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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8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이 말씀으로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1)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장엄한 부르심에서 울려 나오는 말씀이다.
  •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 십계명은 먼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언급한다. 이어서 계명들은 인간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사랑의 응답을 제시한다.
  • 제1절 첫째 계명
  •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 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탈출 20,2-5).2)
  •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마태 4,10).
  • I.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섬겨라”
  • 2084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었다.”(신명 5,6)고 말씀하시는 그 백성의 역사 안에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며 해방시켜 주시는 당신의 행업을 상기시키심으로써 당신을 알리신다. 첫째 말씀에는 율법의 첫째 계명이 담겨 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그 어떤 신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신명 6,13-14). 하느님의 첫째 요청과 정당한 요구는 인간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흠숭하라는 것이다.
  • 2085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께서는 먼저 당신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신다.(3) 인간의 소명과 진리에 관한 계시는 하느님에 관한 계시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26) 창조되었으니, 이에 걸맞게 자신의 행업으로써 하느님을 드러내는 소명을 받았다.
  • 트리폰 씨, 태초로부터……우주를 창조하고 질서 지어 주신 신 외에 다른 신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며, 태초부터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느님께서 당신들의 신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조상들을 “그분의 힘있는 손과 팔을 들어”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어떤 신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당신들과 같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4)
  • 2086 “첫째 계명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포함한다. ‘하느님’이라고 하면, 한결같고 변함이 없으며 항상 동일하신 분, 성실하고 악이 전혀 없는 온전히 의로우신 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그 누가 전능하고 인자하며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한 호의와 애정을 생각하면, 누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계명의 시작과 끝에 ‘나는 주님이다.’라고 반복하신다.”(5)
  • 믿음
  • 2087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계시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안에 우리 윤리 생활의 원천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의 순종’을(6) 첫째 의무로 명시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모든 도덕적 탈선의 시작이고 이유라고 설명한다.(7)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그분을 믿고 그분을 증언하는 것이다.
  • 2088 첫째 계명은 현명하고 조심스럽게 우리의 믿음을 기르고 지키며, 믿음과 대립되는 모든 것을 물리칠 것을 요구한다. 믿음을 거슬러 짓는 죄에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다.
  • 믿음에 대한 고의적 의심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시고 교회가 믿으라고 제시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를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의심하는 것은 믿기를 망설이거나, 신앙에 대한 반론이나 신앙의 어두움으로 생겨나는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심을 고의적으로 키우면, 정신적으로 소경이 된다.
  • 2089 불신은 계시 진리를 무시하거나 그것에 동의하기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단(異端)이란 세례 받은 후 거룩한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어떤 진리를 완강히 부정하거나 완고히 의심하는 것이고, 배교(背敎)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부 포기하는 것이며, 이교(離敎)란 교황에게 순종하거나 그에게 속하는 교회 구성원들과 친교 맺기를 거부하는 것이다.”(8)
  • 희망
  • 2090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을 부르실 때,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사랑에 온전히 응답할 수 없다. 인간은 그 사랑에 응답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의 계명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께서 주시기를 바라야 한다. 희망은 하느님의 복과 지복 직관을 확신에 넘쳐 기다리는 것이다. 희망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벌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 2091 첫째 계명은 희망을 거스르는 죄, 곧 절망이나 자만과도 관련된다.
  • 절망으로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고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시거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버린다. 절망은 하느님의 선함과 의로움과(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성실하시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로움을 거스르는 것이다.
  • 2092 자만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늘의 도움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자만하는 형태도 있고, (회개하지 않고도 하느님의 용서를 얻고 공로 없이도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를 과신하는 형태도 있다.
  • 사랑
  • 2093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진실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라는 요청과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보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명한다.(9)
  • 2094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여러 가지로 죄를 지을 수 있다. 무관심은 하느님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 사랑의 힘을 부인하는 것이다. 배은은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지도 않고, 사랑으로 보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냉담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주저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며, 그 역동적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영적 게으름(acedia)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혐오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증오는 교만에서 비롯된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부인하고, 하느님을 죄를 엄단하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 여겨 저주하는 것이다.
  • II. “오직 하느님만을 섬겨라”
  • 2095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덕(virtus theologalis)은 윤리덕을 형성하고 윤리덕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사랑은 우리가 피조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게 한다. 경신덕(敬神德)은 우리에게 그러한 태도를 갖게 해 준다.
  • 흠숭
  • 2096 경신덕에 따른 행위 가운데 첫째가는 것은 흠숭이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창조주요 구세주로, 주님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신명 6,13)를 인용하시어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8) 하고 말씀하셨다.
  • 2097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그분을 존경하며 온전히 순명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의 허무’를 인정하는 것이다. 흠숭은 마리아께서 노래하셨듯이, 하느님께서 큰일을 하셨고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시다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면서, 하느님을 찬미 찬송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10)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폐쇄하는 데에서, 죄의 속박에서, 세상의 우상 숭배에서 해방된다.
  • 기도
  • 2098 첫째 계명이 명하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행위는 기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높이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 흠숭의 표현이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 전구와 청원의 기도가 바로 그러하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 희생 제사
  • 2099 하느님께 흠숭과 감사, 탄원과 일치의 표징인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거룩한 친교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행하고 또 그럼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행위는 참다운 제사이다.”(11)
  • 2100 진실한 제사가 되려면, 외적 제사는 영적 제사의 표현이어야 한다. 곧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시편 51[50],19)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내적으로 참여하지 않거나(12) 이웃 사랑과 상관없이 바쳐지는 제사를(13) 자주 비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상기시키신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12,7).(14) 유일하고 완전한 제사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그 제사이다.(15) 예수님의 희생 제사와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할 수 있다.
  • 약속과 서원
  • 2101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하느님께 약속을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다. 세례와 견진, 혼인과 성품성사에는 언제나 약속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 신심으로 특정 행위와 기도, 자선과 순례 등을 하느님께 약속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린 약속에 충실함은 지존하신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과 성실하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 2102 “서원, 곧 가능하고 더 좋은 선에 관하여 심사숙고하고 자유로이 하느님께 맺은 약속은 경신덕으로 이행되어야 한다.”(16) 서원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거나 어떤 선한 일을 하느님께 약속하는 신심 행위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서원을 이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약속하고 봉헌한 것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이 한 서원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17)
  • 2103 교회는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겠다는 서원의 모범적 가치를 인정한다.(18)
  • 어머니인 교회는 그 품 안에서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구세주의 자기 비움을 더욱 철저히 따르고 더욱 명백히 보여 주며, 하느님 자녀들의 자유 안에서 가난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 그들은 곧 순종하시는 그리스도를 더욱더 완전히 닮고자, 계명의 척도를 넘는 완덕의 문제에서 하느님 때문에 사람에게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19)
  • 어떤 경우에는 교회가 합당한 이유로 서원과 약속을 관면할 수 있다.(20)
  • 종교의 사회적 의무와 종교 자유에 대한 권리
  • 2104 “모든 사람은 진리, 특히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관한 진리를 탐구하며, 깨달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지켜야 한다.”(21) 그 의무는 “인간 본성 그 자체”에서(22) 생기는 것이다. 그 의무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23) 여러 종교에 대한 꾸밈없는 존경을 배척하지 않으며, “신앙의 오류나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과 지혜와 인내로 대하도록”(24) 그리스도인들을 촉구하는 사랑의 요구와도 상반되지 않는다.
  • 2105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의무는 인간에게 개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종교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의무에 관한 가톨릭의 전통 교리”(25) 이다.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는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정신, 풍습, 법률, 구조 등을 그리스도 정신으로 충만하게 하도록”(26) 힘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는 각 사람 안에 있는 참된 것과 선한 것을 존중하고 일깨우는 것이다. 이 의무는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 안에 유일하고 참된 종교의 예배가 있음을 알릴 것을 그들에게 요구한다.(27)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28) 이처럼 교회는 모든 피조물, 특히 인간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왕권을 드러낸다.(29)
  • 2106 “종교 문제에서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받지 않아야 하고, 또한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혼자서나 단체로, 정당한 범위 안에서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데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30) 이 권리는 인격 자체의 본성에 근거하는 것이며, 인간은 인격의 존엄성에 따라 세속의 질서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진리에 자유롭게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에 따라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자유의 권리를 지닌다.”(31)
  • 2107 “국민의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법 질서 안에서 한 종교 단체에 특수 지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동시에 모든 시민과 종교 단체의 종교 자유의 권리를 반드시 인정하고 존중하여야 한다.”(32)
  • 2108 종교 자유의 권리는 오류를 지지하라는 허락도 아니고,(33)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권리도 아니며,(34) 다만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다. 이 권리는 종교 문제에서 정당한 한계를 지킬 때 정치권력으로부터 외적인 구속을 받지 않을 권리이다. 이 타고난 권리는 “사회의 법적 제도 안에서 인정되어 국민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35)
  • 2109 종교 자유의 권리는 그 자체로 무제한적일 수 없고,(36) 그저 단순히 “실증주의적으로나 자연주의적으로” 이해된 공공질서만으로 제한될 수도 없다.(37) 종교 자유에 내재하는 ‘정당한 한계’는 각 사회의 상황에 맞게 정치적으로 신중하게, 공동선의 요청에 따라 정해지고, “객관적인 도덕 질서에 부합하는 법률 규범”(38) 에 따라 국가 권위가 인정해야 한다.
  • III.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 2110 첫째 계명은 자신을 당신 백성에게 드러내신 유일하신 주님 외에 다른 신들을 공경하는 것을 금한다. 첫째 계명은 미신과 불경(不敬)을 금한다. 어느 면에서 미신은 정도(正道)를 벗어난 경신을 말하는 것이며, 경외심이 부족하여 생기는 불경은 경신덕과 상반되는 악이다.
  • 미신
  • 2111 미신은 종교심과 종교심이 요구하는 실천에서 빗나가는 이탈이다. 미신은 또한 우리가 참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의 형태로 치장될 수 있다. 예컨대, 본래는 정당하거나 필요한 종교적 실천 행위에다 일종의 마술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기도나 성사들이 요구하는 마음가짐을 경시하면서 그 외적인 요소들에만 효력을 부여하는 일도 미신에 빠지는 것이다.(39)
  • 우상 숭배
  • 2112 첫째 계명은 다신교를 단죄한다. 첫째 계명은 인간에게 하느님 밖에 다른 신들을 믿지 말 것과,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밖에 다른 신들을 공경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성경은 우상들에 대해 이렇게 거부할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저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 사람 손의 작품이라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나이다”(시편 115[113 하],4-5). 이러한 헛된 우상들은 인간을 공허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도 신뢰하는 자들도, 모두 그것들과 같네”(시편 115[113 하],8).(40) 이와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살게 하시고 역사에 개입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여호 3,10)이시다.(41)
  • 2113 우상 숭배는 단지 이교(異敎)의 그릇된 예배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우상 숭배는 신앙에 끊임없는 유혹이 된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것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잡신이나 마귀(예를 들어 악마 숭배), 권력, 쾌락, 인종, 조상, 국가, 재물 등 인간이 하느님 대신에 어떤 피조물을 숭배하고 공경한다면 이는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순교자들이 “짐승”을(42) 섬기지 않으려고, 짐승을 예배하는 것을 흉내내는 것까지도 거부하여 죽어 갔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께서 유일한 주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양립될 수 없다.(43)
  • 2114 인간의 삶은 한 분뿐이신 하느님에 대한 흠숭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 유일하신 주님을 흠숭하라는 계명은 인간을 단순하게 하고 끝없는 분열에서 구한다. 우상 숭배는 인간 본성인 종교심의 타락이다. 우상 숭배자는 “하느님보다는 다른 어떤 것에 하느님이라는 불멸의 개념을 부여하는”(44) 자이다.
  • 점과 마술
  • 2115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이나 다른 성인들에게 미래를 계시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미래와 관련된 모든 것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겨 드리고, 이에 대한 불건전한 호기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 일은 무책임한 과오가 될 수 있다.
  • 2116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 사탄이나 마귀들에게 의뢰하는 것,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 미래를 ‘꿰뚫어 본다’고 하는 그릇된 추측 등이 그러한 예이다.(45) 탄생 별자리를 믿는 것, 점성술, 손금, 전조(前兆)와 운명에 대한 해석, 환시 현상, 점쟁이(무당)에게 물어보는 일 등에는 시간과 역사, 나아가서는 인간까지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능력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당연히 하느님 한 분께만 드려야 하는, 사랑의 경외심이 포함된 영예와 존경을 거스르는 것이다.
  • 2117 신비로운 능력들을 복종시켜 뜻대로 사용하고, 이웃에게 ─ 비록 이웃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려고 할지라도 ─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마술이나 요술 행위는 경신덕에 크게 위배되는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들이 남에게 해를 입히려는 의향을 지녔거나 마귀의 개입을 청하는 것이라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부적을 지니는 것도 비난받을 일이다. 강신술에는 흔히 점이나 마술 행위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그러한 행위를 멀리하도록 가르친다. 민간요법이라고 일컫는 치료법을 쓰면서 악한 능력의 힘을 비는 일이나 다른 이들의 잘못된 믿음을 악용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 불경
  • 2118 하느님의 첫째 계명은 불경의 주요한 죄들을 단죄한다. 말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 신성 모독죄와 성직 매매(simonia)가 그러한 죄들이다.
  • 2119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말이나 행실로써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위에서 뛰어내리도록 시험하여 하느님께 행동을 강요했다.(4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신명 6,16)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론을 펴신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시험하는 데 포함되는 도전은 우리의 창조주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과 신뢰를 해치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는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섭리와 권능을 의심하는 것이 늘 포함되어 있다.(47)
  • 2120 독성은 성사와 전례 행위 그리고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과 물건과 장소를 모독하거나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특히 성체를 모독했을 때에는 중죄가 된다. 그것은 이 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실체적으로 현존해 계시기 때문이다.(48)
  • 2121 성직 매매는(49) 영적인 것을 사거나 파는 행위이다. 마술사 시몬은 사도들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영적인 능력을 보고서 이를 사들이려고 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사도 8,20). 이로써 베드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5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 영적인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삼거나, 그에 대한 소유자나 주인으로 행세해서는 안 된다. 그 영적 재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을 수밖에 없다.
  • 2122 “성직자는 성사 집전을 위하여 관할권자가 정한 봉헌금밖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하며, 가난한 이들이 가난 때문에 성사의 도움이 박탈되지 아니하도록 항상 주의하여야 한다.”(51) 관할권자는 이 ‘헌금’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직자들의 생계를 보조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정한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10).(52)
  • 무신론
  • 2123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따라서 무신론은 현대의 극히 중요한 문제로 여겨야 한다.”(53)
  • 2124 무신론이라는 용어는 매우 다양한 현상들을 일컫는 말이다. 무신론의 흔한 형태의 하나는 자신의 필요와 갈망을 공간과 시간에 한정하는 실천적 유물론이다. 무신론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목적이 되고 고유한 자기 역사의 유일한 창조자요 형성자”(54) 라는 그릇된 주장을 펼친다. 현대 무신론의 또 다른 형태의 하나는 단지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해방을 통한 인간의 해방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무신론은 “종교는 본질상 이러한 인간 해방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종교가 인간에게 허황된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을 일으켜, 지상 국가의 건설을 외면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5)
  • 2125 하느님의 존재를 배격하거나 거부한다는 면에서 무신론은 경신덕을 거스르는 죄이다.(56) 이 죄에 대한 책임은 의향과 정황에 따라 상당히 덜어질 수 있다. 무신론이 생겨나고 확산되는 데는 믿는 이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믿는 이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리기 때문이다.”(57)
  • 2126 흔히 무신론은 하느님에 대한 일체의 종속을 거부하기까지 하는,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그릇된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58) 그러나 사실 우리는 “신 긍정이 인간 존엄성에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하느님 안에 기초를 두고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59) 교회는 “자신의 메시지가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열망과 일치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60)
  • 불가지론
  • 2127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여러 형태를 띠고 있다. 어떤 경우 불가지론자들은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을 계시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가정한다. 또 다른 경우에 불가지론자들은,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며, 하느님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하여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 2128 불가지론은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을 찾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관심주의, 존재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회피, 윤리적 양심의 게으름 등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불가지론은 흔히 실천적 무신론과 같다.
  • IV. “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습을 본떠서 만들지 마라……”
  • 2129 하느님의 명령에는 인간의 손으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모든 것을 금지하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신명기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 호렙 산 불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으니 매우 조심하여,……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어 타락하지 않도록 하여라”(신명 4,15-16).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계시하신 분은 절대적 초월자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전부’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께서는 그분의 모든 업적보다 위대하시다”(집회 43,27-28).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지혜 13,3)이시다.
  • 2130 그런데도, 구약 시대부터, 하느님께서는 강생하신 ‘말씀’으로 성취된 구원을 상징적으로 가리켜 주는 형상들을 만들도록 명령하시거나 허용하셨다. 구리 뱀과(61) 계약의 궤와 커룹(cherubim)(62)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 2131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는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에 근거하여,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에 맞서, 그리스도뿐 아니라 천주의 성모, 천사와 모든 성인의 성화상 공경을 정당화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성화상의 새로운 ‘경륜’을 시작하신 것이다.
  • 2132 그리스도교의 성화상 공경은 우상을 금지하는 첫째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성화에 대한 공경은 그 본래의 대상에게 소급되며”(63) “성화를 공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성화에 그려진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64) 성화에 표하는 공경은 존경을 표하는 공경이지 하느님께만 드려야 하는 흠숭이 아니다.
  • 성화를 공경하는 행위는, 성화 그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강생하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해 줄 뿐이다. 곧, 성화에 표하는 동작은 성화 그 자체에 표하는 동작이 아니라, 나타내고 있는 분께 표하는 동작이다.(65)
  • 간추림
  • 2133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 2134 첫째 계명은 인간에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바라고,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 2135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여라”(마태 4,10).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분께 마땅한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께 드린 약속과 서원을 지키는 것은 첫째 계명을 준수하는 경신덕의 행위들이다.
  • 2136 하느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의무는 인간에게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관계되는 것이다.
  • 2137 인간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종교를 자유로이 신봉할 수 있어야 한다.(66)
  • 2138 미신은 우리가 참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신은 우상 숭배, 그리고 점이나 마술 등의 여러 형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2139 말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 신성 모독, 성직 매매 등은 첫째 계명으로 금지된 불경 죄이다.
  • 2140 하느님의 존재를 배척하거나 거부하는 무신론은 첫째 계명을 거스르는 죄이다.
  • 2141 성화 공경은 하느님 ‘말씀’의 강생 신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첫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 제2절 둘째 계명
  •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탈출 20,7).67)
  •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3-34).
  • I.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 2142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존경할 것을 명한다. 이 계명은 첫째 계명과 마찬가지로 경신덕에 속하는 것이며, 거룩한 것에 대하여, 특히 우리의 언어 사용을 규제한다.
  • 2143 계시된 모든 말씀들 가운데 독특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계시하신 것으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신비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신다. 이름은 다만 신뢰하고 절친한 사람에게만 알려 주는 법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한다. 인간은 사랑이 넘치는 흠숭의 정으로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이름을 상기해야 한다.(68) 인간은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고, 찬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자신이 하는 말 중에 하느님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하지 말 것이다.(69)
  • 2144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경의는, 하느님 자신의 신비와 하느님의 이름이 상기시켜 주는 거룩함 그 자체에 드려야 하는 경의를 표명한다. 거룩한 것에 대한 지각(知覺)은 경신덕에 속한다.
  • 경외심과 거룩함의 감정은 그리스도인다운 것인가 또는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뵙게 된다면 매우 강렬하게 느낄 감정들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될 때 느낄 감정들이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우리가 믿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에게 그러한 감정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한 감정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요, 하느님의 현존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70)
  • 2145 신앙인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여 하느님의 이름을 증언해야 한다.(71) 설교와 교리 교육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흠숭과 경의가 흠뻑 깃들어 있어야 한다.
  • 2146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금한다. 곧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것을 모두 금하는 것이다.
  • 2147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한 약속은 하느님의 명예와 성실과 진실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 약속들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그 약속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쓰는 것이며, 어느 면에서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72)
  • 2148 신성 모독은 둘째 계명을 직접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으로나 말로써 하느님을 증오하거나 비난하거나 도발하고, 하느님을 나쁘게 말하며, 그분에 대하여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 등이다. 야고보 사도는 “그 존귀한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한”(야고 2,7) 이를 비난한 바 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언사를 금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인들, 거룩한 물건들을 거스르는 모든 언사에도 해당된다. 죄가 되는 행위를 은폐하고, 백성을 노예로 만들며, 고문이나 살인을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 또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남용하여 죄를 짓는 것은 종교를 거부하게 만든다.
  • 신성 모독은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존경과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에 상반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중죄가 된다.(73)
  • 2149 모독을 할 뜻이 없더라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는 욕설은 주님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마술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금한다.
  • 하느님의 위대함과 위엄을 마땅히 존경하며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의 이름은 더 위대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존경심과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부를 때, 그분의 이름은 더 거룩해집니다.(74)
  • II.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름
  • 2150 둘째 계명은 거짓 맹세를 금한다. 서약이나 맹세는 자신이 확언한 것에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진실성을 보증하려고 하느님의 진실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맹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하는 것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신명 6,13).
  • 2151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의무이다.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진리의 기준이시다. 인간의 말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도 또는 하느님을 거스를 수도 있다. 맹세가 진실되고 정당할 때에, 맹세는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 인간의 말이 지닌 관계를 밝혀 준다. 거짓 맹세는 거짓을 가장하려고 하느님을 내세우는 것이다.
  • 2152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을 하면서 맹세하거나, 맹세를 하고 나서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 맹세를 한 것이다. 거짓 맹세는 모든 말의 주인이신 분에 대한 경의를 심각하게 저버린 것이다. 맹세로써 악을 저지르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하느님 이름의 거룩함에 반하는 것이다.
  • 2153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둘째 계명을 설명하셨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4.37).(75) 모든 맹세는 하느님을 보증으로 내세운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하는 모든 말은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진실성에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다. 말을 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부르는 것은, 그분의 현존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의식하는 일에 걸맞은 일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하느님을 증언하거나 그분을 우롱하는 것이다.
  • 2154 바오로 사도를 따라,(76) 교회의 성전은 중대하고 정당한 동기에서 (예를 들어, 법정에서) 하는 맹세와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대립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맹세 곧 진실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진리와 판단과 정의 안에서가 아닌 한 발할 수 없다.”(77)
  • 2155 하느님의 이름의 거룩함은, 사소한 일에 그분 이름을 부르지 말 것과, 그것이 부당하게 요구하는 권력에 찬성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만한 상황에서는 맹세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정통성이 없는 세속의 권위가 요구하는 맹세는 거부해도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교회의 일치에 반하는 목적으로 맹세가 요구될 때에는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 III. 세례명
  • 2156 세례성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베풀어진다. 세례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을 성화시키며,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부르는 자기의 이름을 세례 때 받는다. 그것은 어떤 성인의 이름, 곧 자기의 주님께 모범적으로 충성을 다 바친 한 제자의 이름일 수 있다. 수호성인은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며 전구를 보장해 준다. ‘세례명’은 그리스도교의 신비나 덕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부모와 대부모와 본당 사목구 주임은 그리스도교적 감정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도록 보살펴야 한다.”(78)
  • 2157 그리스도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서 긋는 십자 성호로써 자신의 하루와 기도와 활동을 시작한다. 세례 받은 이는 하루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며, 자신이 아버지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구세주의 은총을 청한다. 십자 성호는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굳세게 해 준다.
  • 2158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제 이름으로 부르신다.(79) 모든 사람의 이름은 거룩하다. 이름은 그 사람의 표상이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존엄성의 표시로 존중되어야 한다.
  • 2159 주어진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다. 하늘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진 각 사람의 신비하고 독특한 인품이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그 돌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묵시 2,17). “내가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14,1).
  • 간추림
  • 2160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편 8,2)
  • 2161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존경할 것을 명한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 2162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모든 것을 금한다. 신성 모독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이름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 2163 거짓 맹세는 거짓을 믿게 하려고 하느님을 내세우는 것이다.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은, 당신의 약속에 한결같이 충실하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중대한 과오이다.
  • 2164 “진실과 필요성과 존경심이 없이는 창조주의 이름으로나 피조물의 이름으로도 맹세하지 마라.”(80)
  • 2165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부르는 자기의 이름을 받는다. 부모와 대부모와 본당 신부는 그가 세례명을 받도록 보살펴야 한다. 수호성인은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 주며, 전구를 보장해 준다.
  • 2166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활동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서 긋는 십자 성호로써 시작한다.
  • 2167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제 이름으로 부르신다.(81)
  • 제3절 셋째 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8-10).82)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 I. 안식일
  • 2168 십계명의 셋째 계명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일깨워 준다. “이렛날은 안식일, 주님을 위한 거룩한 안식의 날이다”(탈출 31,15).
  • 2169 이에 대해서 성경은 창조를 상기시킨다.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20,11).
  • 2170 성경은 주님의 날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기념일로 제시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5).
  • 2171 하느님께서는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의 표로 간직하라고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주셨다.(83)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미하려고, 또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구원 업적을 기리려고 따로 거룩하게 남겨 둔 날, 곧 주님을 위한 날이다.
  • 2172 하느님의 행동은 인간 행동의 모범이다. 하느님께서 이렛날 “쉬면서 숨을 돌리셨으니”(탈출 31,17) 인간도 역시 ‘쉬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도 “숨을 돌리게”(84) 해 주어야 한다. 안식일은 사람들이 일상의 일을 멈추고 쉬는 날이다. 이날은 일의 속박과 돈에 대한 숭배에 대항하는 날이다.(85)
  • 2173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비난받으시는 일화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날의 거룩함을 어기신 적이 없다.(86)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 권위 있게 올바른 해석을 내려 주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이, “안식일에 악한 일이 아니라 착한 일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87) 단언하시면서, 안식일의 정당성을 확립시켜 주신다. 안식일은 주님 자비의 날이며, 하느님 영광의 날이다.(88)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 II. 주님의 날
  •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88[177],24).
  • 부활의 날: 새로운 창조
  • 우리는 해의 날(일요일)에 모두 함께 모입니다. 이날은 하느님께서 암흑에서 물질을 끌어내시어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유다인들의 안식일 다음 날이면서 또한 주간의 첫째 날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며, 또 이날이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91)
  • 2174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마르 16,2)에(89)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첫째 날’로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날은 첫 창조를 상기시킨다. 안식일 다음 날인 ‘여덟째 날’로서(90) 이날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날이 모든 날 중의 첫째 날, 모든 축일 중의 첫째 축일, 주님의 날(he kyriake hemera, dies Dominica), ‘주일’이 되었다.
  • 주일 ─ 안식일의 완성
  • 2175 주일은 주간마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안식일과는 분명히 구별되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일 의식에 관한 규정을 대체한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통해서, 유다인들의 안식일의 영적인 참의미를 완성하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예고한다. 사실, 율법에 따른 예배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준비하는 것이었으니, 율법에 따라서 행해지던 것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되는 것들을 예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92)
  • 옛 질서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주님과 그분의 죽음으로 이날에 우리의 생명은 솟아나게 되었습니다.(93)
  • 2176 주일을 경축하는 일은,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자비심을 회상함으로써, “하느님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공적이고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도록”(94) 인간의 마음속에 본래부터 새겨져 있는 윤리적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주일 예배는 구약의 윤리적 규정을 지킬 뿐 아니라 완수하며, 주일마다 창조주이시자 당신 백성의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여 그 주기성과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다.
  • 주일의 성찬례
  • 2177 주님의 날을 경축하고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교회 생활의 중심이다. “사도전승에 따라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경축하는 주일은 보편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 지켜야 한다.”(95)
  •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주님 승천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과 성모 승천 대축일, 성 요셉 대축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그리고 모든 성인 대축일도 지켜야 한다.(96)
  • 2178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모이는 관습은 사도 시대의 초기부터 시작된 것이다.(97)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은 다음과 같이 환기시키고 있다.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히브 10,25).
  • 성전은 언제나 실질적인 한 권고 말씀을 생생히 전해 준다. “일찍 교회에 나와서 주님께 가까이 가며,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기도 중에 참회하십시오.……하느님의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고, 드려야 할 기도를 마치고 파견을 받기 전에는 떠나지 마십시오.……우리가 자주 말한 바와 같이, 기도와 휴식을 위해 이날이 여러분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98)
  • 2179 “본당 사목구는, 그 사목이 교구장의 권위 아래 고유한 목자로서의 본당 사목구 주임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 내에 고정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이다.”(99) 본당은 주일의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서 모든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이다. 본당은 신자들에게 전례 생활의 일반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신자들을 이 전례 거행에 불러 모으며,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선행과 형제애로써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다.(100)
  • 그대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집에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모이는 곳이며, 그들은 그곳에서 한마음으로 하느님을 환호합니다. 교회에는 그 외에도 정신의 일치, 마음의 합일, 사랑의 유대, 사제들의 기도 등이 있습니다.(101)
  • 주일의 의무
  • 2180 교회의 법규는 주님의 법을 명확하게 하고 구체화한다.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의무 축일에 미사에 참례할 의무가 있다.”(102) “미사 참례에 관한 교회 법규는 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오후 4시부터: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74조 1항)에 어디서든지 가톨릭 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103)
  • 2181 주일의 성찬례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실천의 기초가 되고 그 실천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중대한 이유(예를 들어, 병이 들었거나 유아를 보살펴야 하는 경우)로 면제되거나 본당 신부에게서 관면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규정된 날에 성찬례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104) 이 의무를 고의적으로 지키지 않는 사람은 중죄를 짓는 것이다.
  • 2182 공동으로 거행하는 주일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과 그분과 교회에 충실하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하여 신자들은 신앙과 사랑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들은 함께 하느님의 거룩함과 구원에 대한 자신들의 희망을 증언한다. 그들은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서로를 격려한다.
  • 2183 “성직자가 없거나 다른 중대한 이유 때문에 성찬례의 참여가 불가능하게 되면, 신자들은 본당 사목구 성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에서 교구장의 규정에 따라 거행되는 말씀 전례가 있으면 거기에 참여하거나, 또는 개인적으로나 가족끼리, 또는 기회 있는 대로 여러 가족들이 모여서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매우 권장된다.”(105)
  • 은총의 날, 휴식의 날
  • 2184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듯이”(창세 2,2), 인간의 삶도 노동과 휴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주님의 날이 제정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들의 “가정,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106)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2185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다른 의무 축일에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배, 주님의 날에 맛보는 고유한 기쁨, 자선의 실천, 정신과 육체의 적당한 휴식 등을 방해하는 일이나 활동을 삼가야 한다.(107) 가정에서 필요하거나 사회에 큰 유익을 주는 일은 주일의 휴식 규정의 적용을 면제하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 신자들은 정당한 면제 사유들을 핑계 삼아 신앙과 가정생활과 건강을 해치는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 진리를 사랑하면 거룩한 여가를 찾고, 사랑이 필요하면 올바른 일을 받아들인다.(108)
  • 2186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필요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과 고생 때문에 쉴 수 없는 형제들을 기억해야 한다. 주일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심으로써 자선 활동과 병자, 불구자, 노인들에게 겸손하게 봉사하는 데 바쳐져 왔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네 가족과 친지들에게 평일에는 내기 힘들었던 시간을 내 주고 그들을 보살핌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주일은 내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 다져지도록 촉진시켜 주는 반성과 침묵, 교양과 묵상을 위한 때이다.
  • 2187 주일과 축일들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서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각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일을 쓸데없이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관습(운동, 외식 등)과 사회적 필요성(공무 등)으로 어떤 이들에게 주일의 노동이 요구될 경우, 각자가 충분한 여가 시간을 갖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자들은, 절제와 사랑으로써, 집단적 여가 활동으로 생겨나는 폭음, 폭식과 폭력을 피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경제 사정이 어렵더라도, 공권력은 시민에게 휴식과 예배를 위한 시간을 보장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고용주들도 고용인들에 대해 공권력과 유사한 의무를 지고 있다.
  • 2188 그리스도인은 종교 자유와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존중하면서, 주일과 교회의 축일들이 법정 공휴일로 정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고 존경하며 기뻐하는 모범을 모든 사람에게 공적으로 드러내 보여야 하며, 인간 사회의 영적 생활에 값진 기여를 하는 그들의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 나라의 법이나 다른 이유들로 주일에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우리를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히브 12,22-23)에 참여시켜 주는 이날을 우리네 해방의 날로 지내야 한다.
  • 간추림
  • 2189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신명 5,12). “이렛날은 안식일, 주님을 위한 거룩한 안식의 날이다”(탈출 31,15).
  • 2190 첫째 창조의 완성을 표현하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키는 주일로 대치되었다.
  • 2191 교회는 여덟째 날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데, 이날은 마땅히 주님의 날 또는 주일이라고 불린다.(109)
  • 2192 “주일은……보편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 지켜야 한다.”(110)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의무 축일에 미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111)
  • 2193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의무 축일에, “하느님께 바쳐야 할 예배, 주님의 날의 고유한 기쁨이나 마음과 몸의 합당한 휴식을 방해하는 일과 영업을 삼가야 한다.”(112)
  • 2194 주일의 제정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가정,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누리는 데”(113) 에 이바지한다.
  • 2195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일을 쓸데없이 남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