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을 해주세요.

로그인
닫기
사람과사회 > 사설/칼럼
가톨릭평화신문 2019.02.20 등록
크게 원래대로 작게
글자크기
[평화칼럼] ‘전체’ 안에서 ‘부분’ 바라보는 공감형 복지
홍진 클라라(사회복지평론가)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쓴 감정어는 차별과 혐오라는 자료 조사 결과가 나왔다. 많은 사람이 노인을, 가난한 사람을, 장애를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있고 난민을, 외국인 노동자를, 성소수자를, 여성을 혐오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특히 이런 현상은 제재가 어려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급속히 퍼지고 있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는 그 대상에 대한 자기 불안이라고 정의된다. 그 이유로는 정부와 사회적인 제도 및 절차에 대한 신뢰 상실이 자리한다. 이런 반응은 자신이 처한 경제적 불안, 미래에 대한 막막함의 원인을 사회적인 약자인 소수자에게 투사한다는 측면에서 위험하다. 분풀이를 파(派)와 편(偏)으로 나뉘어 혐오하고 차별하는 이른바 파편(破片ㆍ派偏)사회 구조로 가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다름이 부각되는 이른바 차이의 부상을 이해하고 다루는 데에 미숙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점차 다양해지는 시민들의 욕구와 소외, 배제에 대한 불안, 공정성에 대한 불신의 결과인 차별과 혐오를 극복할 대안으로 공감이 거론되지만, 타인의 고통과 처지를 가늠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가장 가까이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변호하고 조력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회복지 영역에서조차 이에 대한 민감성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

정권 변화에 함께 변화하는 사회복지 정책에 따라 사회복지 현장은 대응하기에 급급하고, 시장 중심의 상업화 영향으로 평가 체제와 성과주의를 우선하는 위수탁 제도로 인해 시설마다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국가 복지의 순응적인 파트너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구조적인 한계로 인하여 불평등한 와중에 취약계층은 다시 빈곤의 트랩에 갇혀 있고 이 불평등 속에서 불평등이 악순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한 불편함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도 막아버릴 수 있다. 사회 약자들이 정말 지키고 싶은 것은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의 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공감(empathy)이란 타인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인정하고 온전히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립된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전체 안에서 부분을 바라보는 안목을 지녀야 함을 강조한다. 각 부분의 고유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통합된 사회 전체 안에서 각 부분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각 부분인 구성원은 누구나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고 자유롭게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을 느낄 수 있도록 제도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올해 정부는 포용적 복지정책의 실천 사업으로 사회서비스원 시범사업을 시작하였다. 사회복지 시설의 영세 운영자들에게는 수익 안정을, 노동자들에게는 고용 안정을, 복지 대상자들에게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욕구 충족을 위한 정책이라고 하겠다. 물론 실행해봐야 정확한 것은 파악되겠지만, 자칫 관리지원기관 또는 일자리 확대의 방책이라는 오명을 남길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회복지는 기업의 논리로 이해하면 자리 잡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평준화된 시스템을 작동하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닐 듯하다. 고통의 절규에 귀 기울이고 사람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공감형 복지가 되어야 한다. 주어지는 복지 형태가 아니라 모든 사회복지 시설이 협력자임을 인지하고 대화와 소통으로 정체성과 소명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게 협조해 주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