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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3.1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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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사랑 때문에 난민들과 함께하려 합니다”
사순 기획 - 시리아·이라크 난민 돕는 살레시오회 중동관구 이미숙 수녀

▲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온 난민 자녀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꿈꾼다.


 2011년 8월. 살레시오수녀회 중동관구 이미숙(루치아) 수녀는 시리아로 향했다. 내전이 시작된 지 5개월째로 접어들면서 시리아에 의료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간호사였던 이 수녀는 수시로 수류탄과 포탄이 날아드는 병원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자살폭탄 테러도 잇달았다. 1년 8개월여를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야 했다.

이 수녀를 전쟁터에 내버려둘 수만은 없었던 레바논 주재 한국대사관의 거듭된 철수 요청과 수도회 장상의 소임지 이동 결정에 따라 이 수녀는 2013년 봄 살레시오수녀회 중동관구가 자리 잡고 있는 요르단 암만으로 철수했다. 내전의 땅에서 떠났지만, 고통받는 난민 아이들을 만나게 된 이 수녀는 난민 사도직을 시작했다. 고통받는 이들을 남겨두고 온 자책감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6년째 이 수녀는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 자녀들과 함께해왔다. 사순시기를 맞아 그 사도직 현장의 얘기를 들어본다.



 6년째 시리아·이라크 난민들과 동반

 

힘겹게 마련한 새집과 비싼 가구들, 가전제품들, 살림살이들…. 손때 묻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집은 2015년에 일어난 폭탄 테러로 다 폐허가 됐다. 죽거나 다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리나(50)씨와 남편 그리고 세 자녀의 충격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선' 시리아를 떠나야 했다. 친척이 사는 요르단 입국에 성공했지만, 암만의 겨울은 혹독했다. 산꼭대기에 구한 셋집은 지붕이 부실해 비만 오면 물이 새 방바닥에 물이 가득했다. 아들 조르지오와 요셉, 딸 죠 등 세 자녀 중 작은아들과 딸은 간질을 앓고 있고, 남편은 계약기간이 만료돼 실직했다. 그러던 중 유방암 판정을 받은 리나씨는 유방 절제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심리적 부담감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 모든 게 지난 4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이 수녀는 이처럼 힘겨운 삶을 사는 시리아, 이라크 난민들과 동반한다.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겨운' 가톨릭교회와 시리아 정교회 신자 난민 7000여 가족을 본당별로 나눠 요르단 카리타스와 함께 돌본다. 2015년부터 암만의 빈 학교 건물을 여러 채 받아 난민들 숙소로 쓰고, 일주일에 서너 차례 빌린 버스로 지역마다 찾아가 아이들을 수도원 학교 건물로 데려온 뒤 현지 수도자들과 함께 놀이나 예체능 교육을 하고 간식도 제공한다.

문제는 재원 마련의 어려움이다. 해서 이 수녀는 3∼4개월에 한 번씩 이스라엘로 나가 순례단에게 도움을 받는다. 한국에 올 때도 잊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2016년부터 2년간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에서 매달 200만 원씩 지원해줬고, 2018년에는 교황청 어린이 전교회 한국지부에서 미화 9000달러를 제공해줘 수도원 학교에 태양광 설비를 갖추면서 전기료가 크게 줄었다. 요르단이나 이스라엘 현지 관광 안내자들 도움으로 순례자들에게 후원을 받거나 의류를 기증받고 있다.
 

▲ 요르단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암만 수도원 학교에서 시리아·이라크 난민 자녀들과 함께하는 이미숙 수녀.


난민들 자녀 돌보는 데 투신하는 이유

 

이 수녀가 이처럼 난민 사도직, 특히 난민들의 자녀를 돌보는 데 투신하는 이유는 시리아 다마스쿠스 병원에서의 체험 때문이다.

"병원에 실려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심각했어요. 폐가 관통되거나 내장이 파열되고 다리가 절단된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지요. 출혈을 잡기가 힘겨웠어요. 도착하자마자 사망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심지어 병원 잔디밭에도 폭탄이 떨어졌어요. 때로는 병원 인근에서 폭탄이 터져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기도 했어요. 불발탄을 보면 '성모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느꼈고, 때로는 '나도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두 평이 채 못 되는 병원 침실에서 밤새도록 웅크리고 있다가 날이 밝는 나날이 계속됐다. 폭음에 유리창이 깨져 다칠까 봐 창문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잠을 잤다. 그즈음 이 수녀는 자신도 모르게 잠을 잘 수 없게 됐다.

전황이 심각해지자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와 레바논 주재 한국대사관에선 이 수녀에게 철수를 종용했다. 그렇지만 이 수녀는 환자들을 내버려둔 채 무작정 떠날 수 없었다. '선교사라면 선교지에서 죽어야지' 하는 생각도 그를 갈등하게 했다. 때론 '너, 무서워서 도망가는 거지' 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듯한 동료들의 시선도 그를 괴롭혔다. 결국, 이 수녀는 한국 외교관들의 계속된 권유와 수녀회 장상의 결정으로 시리아를 빠져나오게 됐다. 철수 뒤로 그는 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다.

"시리아에 있을 땐 죽음이 정말 두려웠어요. 정말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나온 뒤로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컸습니다. 다마스쿠스에 있을 땐 날마다 죽느냐 사느냐였는데, 암만에 나오니 아랍인들이 다 IS처럼 보였어요. 비행기 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놀랐어요. 때론 동료 수도자들이 '저기 IS가 온다'고 장난을 쳐 놀란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 시간이 꽤 오래갔어요."

그렇게 암만 수녀원에서 살아가며 이 수녀는 트라우마를 치유해 나갔다. 하느님 앞에 아픔을 펼쳐놓고 울기도 하고, 슬픔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난민 사도직이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건 시리아의 고통받는 형제들과 함께한다는 일종의 연대였다.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고 말하던 다마스쿠스 병원에 두고 온 부상자들과 이어주는 끈, 고리 같은 것이었다. 시리아를 떠난 지 6년이 다 돼 가는데도 이 수녀는 여전히 그 병원 환자들을 잊지 못한다.


전쟁 끝나면 시리아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래서 이 수녀는 "전쟁이 끝나면 시리아로 돌아가고 싶다"며 "만약에 다시 돌아간다면 무섭고 힘들겠지만, 시리아를 고향처럼 마음속에 두고 기도하면서 돌아갈 날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디를 가든 일보다 중요한 건 난민들과 함께하는 것, 곧 현존입니다. 언어도, 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총알받이가 돼 죽을까 봐 겁도 나지만, 예수님 사랑 때문에 저희는 기꺼이 난민들과 함께하려고 합니다."
 

도움 주실 분 : 우리은행 1005 -302-306612, (재)한국천주교살레시오수녀회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