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을 해주세요.

로그인
닫기
기획특집 > 특집기획
2019.06.19 등록
크게 원래대로 작게
글자크기
[제6회 신앙체험수기] 우수상/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김은경 (안젤라, 수원교구 초월본당)



지금도 이따금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만약 내가 태어나기 전 하느님께서 미리 "그래, 너는 어떤 고난을 선택할래?" 물으셨다면 나는 과연 지금의 고통을 택할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중학교 3학년 때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한없이 자유로운 시기. 머지않아 고등학생이 된다는 설렘과 곧 중학교를 마친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던 시절이다. 뜻밖의 시련을 만나게 된다.

자꾸만 청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오른쪽만 나빠지는가 싶더니 이내 왼쪽에도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찾아가는 병원마다 원인을 모르겠다며 난감해 한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가게 된 병원에서야 서울에 있는 큰 대학병원을 찾아가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서둘러야 한다는 의사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아프게 머릿속에 내리꽂히는 것만 같다.

서울이라면 한 번도 가 본 기억이 없다. 그야말로 낯설기만 한 도시다. 물어물어 보건소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그때 소개받은 병원이 바로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이다.

빨리 서울로 가라고 하신 선생님의 예상대로 결과는 좋지가 않다. 정확한 병명은 신경섬유종증 2형. 몸에서 다발성으로 양성 종양이 자라는 병. 선천적인 희귀 난치성 유전 질환이다. 유전의 가능성이 50고 나머지 반은 돌연변이로 태어나는 경우란다. 자라나는 혹을 제거하는 수술이 현대 의학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이며 완치는 불가능했다. 평생을 그림자처럼 함께 가야만 하는 병. 내가 그렇게 잔인한 병에 걸렸다는 거였다.

모르고 있던 사이 병은 이미 한참이나 진행이 된 상태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청력이 떨어지는 원인 또한 병에 의한 뇌종양 때문이었다. 이제 망설임조차 나에게는 사치였다. 다급하게 수술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현실적으로 눈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감당할 방법이 없는 거였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두 살 때 이혼하셨다고 한다. 그것이 모두의 행복을 위한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면 두 분의 결정에 대해 불만은 없다. 다만 문제는 엄마와 살게 된 내 인생에 너무 일찍 뿌리를 내린 가난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준비물을 챙기지 못하기 일쑤였다. 계절이 오고 갈 때마다 내 옷장은 동네의 헌 옷 수거함이 됐다. 유난히 체구가 작았기에 또래들이 입던 옷은 대부분 내가 물려 입었다. 성한 옷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추가 떨어진 옷들, 고무줄이 늘어나고 낡은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바느질해서 고쳐 입으면 감쪽같다며 엄마는 좋아하셨지만 내가 보기에는 하나도 감쪽같지 않았다. 헌 옷은 아무리 깨끗하게 빨아도 그냥 헌 옷일 뿐이었다. 새 옷 한 벌 편히 사 입지 못하는 현실이 어린 나에게는 더없이 창피하기만 했다.

그런 형편에 뇌종양 수술비를 마련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결국, 병원 사회사업팀의 도움을 받아 수술은 가능해졌지만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왜 불행이라는 녀석은 늘 한꺼번에 찾아와 혼란을 일으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뇌수술을 앞두고 검사를 하던 중 목에서 또 다른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이미 수술 시기를 놓쳤다고, 크기가 너무 커서 손을 댈 수가 없단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지독한 악몽이라고 생각하며 엄마 품에 안겨 한참을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보일 정도로 어지러운 와중에 누군가 다가 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신다. "병원에 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의사선생님이 아프지 않도록 치료해 주실 거라고"도 하신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다가다 병동에서 본 기억이 있는 수녀님이었다. 가만히 나를 먼저 다독여 주신 수녀님은 "최선을 다해 주실 선생님을 믿어야 한다"며 이번에는 엄마를 따뜻하게 안아주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주 한가운데에 홀로 덩그러니 떨어진 것만 같이 한없이 막막하고 두렵기만 하던 마음이 다소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그렇게 병원 원목실과 수녀님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다음 날도 수녀님은 밝은 얼굴로 병실로 찾아오셨다. 같이 열심히 기도해 보자고, 작게 십자성호를 긋고는 내 손을 잡으신다. 사실 나는 무교였다. 종교라는 건 살아가는 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믿는 거로 생각했다. 당장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걱정인 사람들에게 그런 건 배부른 투정일 뿐이라고. 그런 내가 그날은 수녀님께 먼저 부탁을 했던 것 같다.

"수녀님, 성당에 가보고 싶어요."

뇌수술이 잠깐 미뤄지고 목을 감싸고 있던 두경부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 먼저 진행된다. 수술 성공의 가능성은 50. 나머지 반은 당연히 실패의 가능성이었다.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싸움이다. 이제 모든 것은 하늘에 달려 있었다. 다섯 시간의 사투 끝에 종양은 무사히 제거됐지만, 성대 마비로 인해 나는 목소리를 잃게 된다. 겨우 열여섯의 나이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상흔이었다.

열흘간 중환자실 생활을 마치고 일반실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2층 로비였다. 내 키만 한 성모님이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계신 곳.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는데 울컥 무엇인지 정체 모를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올라온다. 그래서 한참을 더 그곳에 서 있어야만 했다.

목의 상처가 아물고 이어진 뇌종양 수술은 무려 열 시간이 넘는 마라톤 수술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어디에나 아쉬움은 남는 모양이었다. 너무도 기다려 온 중학교 졸업식은 물론, 고등학교 입학식에도 참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졸업식 당일에는 유난히 새하얀 함박눈이 소복소복 많이도 쌓였다. 수술 후 방사선 치료까지 모든 게 끝나고 정확히 100일째가 되던 날 퇴원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앞서서 한 일은 바로 휴대폰을 사는 것이었다. 전화 통화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보니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휴대폰은 나에게 필수여야 했다. 어쩌면 이제 세상과 나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장치인 셈이었다. 혹시 발생할지 모를 응급 상황을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휴대폰은 반드시 필요했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메시지 보내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신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의 아이들처럼 엄마의 눈이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물론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뭐가 이리 복잡하냐"며 엄마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셨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되풀이하며 차근차근 알려드리자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 엄마가 갑자기 휴대폰을 들고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으신다. 그러더니 이내 혼자서 메시지를 보내 보겠다며 자신감을 가득 내보이셨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이 지나고도 엄마에게서는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길게 보내시려는 거지? 생각하는 순간이다. 휴대폰에만 집중하던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신다.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다. 동시에 내 휴대폰이 강한 진동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려 준다. 얼른 열어 보는데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엄마가 보내신 메시지는 바로 딸사랑해였던 것이다.

겨우 그 네 글자를 보내기 위해 엄마는 한참이나 휴대폰과 씨름을 하신 거였다. 보낸 사람이 엄마라는 건 알고 있으니 굳이 딸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알려드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 후에도 메시지를 보내실 때 딸이라는 단어를 빼놓지 않으셨다. 딸어디야, 딸밥먹었어, 딸언제와 등등. 엄마의 메시지에는 물음표도, 띄어쓰기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거기에는 소리 없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사랑하는 딸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가득 담겨 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