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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2019.10.07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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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탯줄을 잘라야 아기가 삽니다 / 최인각 신부
"탯줄을 잘라야 엄마도 아기도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탯줄을 자르십시오." 이 말은 제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학생과 학부모님들에게 한 것입니다. 학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에 지나칠 정도로 관여해 학교 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들어, 당부의 의미로 강하게 한 말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탯줄을 자르지 않으면 사랑은 연결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랑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탯줄을 자르는 것은 사랑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연결되는, 진정한 사랑을 드러내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안법고를 선택한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고등학생이 되려면, 중학생의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안법고에 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학부모님들에게도 "소중한 자녀를 학교에 믿고 맡길 자신이 없으시면, 아니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에게, 아니 선생님들에게 미주알고주알 무어라 관여하려면, 여러분의 자녀들을 다시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대신 여러분이 자녀와의 탯줄을 끊고 학교를 믿고 맡기신다면, 저를 비롯한 교직원은 부모의 마음으로 자녀들을 교육하겠습니다. 우리 교직원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러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학부모님과 학생들에게, "탯줄을 자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예,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이에 저는 "그러면, 여러분은 안법고등학교 학생과 학부모님이 될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해도 되겠습니다"라고 오리엔테이션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은 어제의 탯줄을 잘라내고, 새로운 오늘의 삶에 전적으로 투신하고 있는가?'라는 자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와 다가왔던 것은, 저의 '수염'이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되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3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피정 중 여러 가지 영적인 체험을 하면서 수염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멋있고 좋아 보인다며 박수를, 어떤 사람은 지저분하니 빨리 자르라고 손을 내저었습니다. 대다수는 후자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에게 있어, 그 영적 체험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한편으로 나름 멋있다고 생각해서), 5년 이상 수염을 고수했습니다.

학부모님과 학생들에게 새로운 삶을 위해 탯줄을 자르라고 해놓고, 과거의 체험(탯줄)에 연연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내가 먼저 수염(탯줄)을 자르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나니, 수염을 자르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막상 깎고 나니, 깔끔하고 예뻐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쉬운 걸, 많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주었구나!'라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가끔 학생들이 교장실에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교장 신부님, 저 탯줄 잘랐습니다"하며 농담하곤 합니다. 그러면, "잘했어. 이제 너는 진정한 안법인이 된 거야. 실은 신부님도 탯줄을 자르기 위해 수염을 잘랐지"라고 응수하며 함께 웃습니다.


최인각 신부
(안법고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