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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2020.09.2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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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신학교 설립하고 순교의 화관을 쓴 선교사
한국 103위 순교 성인 이야기 - 4. 병오·병인박해 순교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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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기해박해가 끝나자 조선 교회는 다시 추스르기 시작했다. 1845년에는 조선인 첫 사제가 탄생하는 기쁨도 맛봤다. 조선교구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와 선교에 힘쓰며 만주에 머물던 최양업 신부와 매스트르 신부를 조선으로 입국시킬 방도를 강구했다.  
 

김대건 신부는 바닷길을 통한 성직자들의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노력하다 1846년 순위도에서 체포됐고, 이는 병오박해로 이어졌다. 103위 순교 성인 중 병오박해 순교자는 9명이다.
 

조선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를 자양분 삼아 또다시 20여 년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조금씩 결실을 보았다. 하지만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이어진 병인박해로 8000여 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1. 기해박해 순교자 (상)

2. 기해박해 순교자 (중)

3. 기해박해 순교자 (하)

4. 병오ㆍ병인박해 순교자


병오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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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문·경련 남매의 아버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현계흠(바오로)이다.

현석문의 누나 현경련은 17세 때 최창현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규칙적으로 독서와 기도 생활을 하면서 여회장직을 맡아 보며 교회 일에 헌신했다. 기해박해 때 체포돼 포청에서 주교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로부터 혹형을 당했다. 옥중에서도 동생 석문에게 신망애 삼덕에 관한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에게 신앙의 본보기를 보였다. 1839년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4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현석문은 1837년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자 복사가 되어 신부와 함께 각지를 돌며 전교했다. 1839년 회장으로 임명된 현석문은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정리해 「기해일기」를 펴내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고 각지에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격려했다. 1845년에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뒤 김 신부의 집에 남아 있던 교우들을 새로운 거처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함께 체포됐다. 그는 옥에 갇혀서도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다 1846년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병인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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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조화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한 뒤 혼인해 아들 윤호를 두었다. 그는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그해 12월 5일 아들 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돼 전주 감영에 갇혔다. 이들 부자는 옥에서 순교할 것을 다짐하며 서로 격려했다. 아들과 함께 예닐곱 차례의 신문을 받고 후손이 끊기는 것을 염려하는 척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도 뿌리쳤다.
 

12월 13일 조화서는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열흘 지난 12월 23일, 아들 윤호도 전주 숲정이에서 곤장 16대를 맞은 뒤 1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와 아버지 조화서에 이어 윤호마저 순교하며 3대가 순교의 화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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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해ㆍ병오박해 파리외방전교회 순교 사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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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며 1837년 주교로는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 그보다 앞선 1836년 1월 입국한 모방 신부는 서울 정하상 집에 머물며 앵베르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지방까지 선교했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최양업ㆍ최방제ㆍ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했다. 샤스탕 신부는 1833년 마카오에서 활동 중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 선교사를 자청, 1837년 1월 입국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는 상복을 입고 험한 산길을 따라 소금에 절인 야채 등으로 주린 배를 채워가며 교우촌을 방문했다. 밤새도록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후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의 노력으로 조선대목구 설정 6년 만에 비로소 교회 체제가 정비됐고, 1839년 초 신자 수는 9000명이 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자수했고, 모방ㆍ샤스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해 1839년 9월 21일 세 사제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세 사제가 순교했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의 선교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병인박해 때는 7명이 순교하기에 이른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1856년 3월에 서울에 도착했다.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는 업적도 남겼다. 유스토·도리·위앵·볼리외 신부는 1864년 사제품을 받고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했다. 그중 도리 헨리코 신부는 교우들이 자신을 '김 헨리코'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했다고 한다. 한국에 김씨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었다.

길게는 10년, 짧게는 1년간의 조선에서의 사목한 목자들은 모두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됐다. 베르뇌 주교는 감옥에서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고도 고통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베르뇌 주교는 그해 3월 7일 유스토ㆍ루도비코ㆍ도리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을 비롯해 「조선 순교자 비망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프랑스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서민들이 먹는 음식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졌다.

위앵 신부는 1865년 조선에 파견,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다블뤼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웠다. 오메트르 신부는 1863년 6월 조선에 입국, 경기도 수원 근처에 있는 손골에서 한국말을 익혔으며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전교했다. 병인박해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 신부도 자수했다. 오메트르 신부 역시 체포돼 세 사제는 서울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의 화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