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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 소양로 성당
앤서니 콜리어(Anthony Collier, 1913-1950년) 신부
 
콜리어 신부의 유해는 죽림동 주교좌성당 뒤뜰 교구 성직자 묘지에 모셔져 있다.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안토니오. 한국 성은 고(高). 1913년 아일랜드의 라우스(Louth) 주에서 출생하여 소신학교(Christian Brothers School) 세인트 패트릭 대학(St. Patrick College)을 졸업하였다. 1931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가 있는 네번(Navan)의 달간 파크(Dalgan Park)로 가 선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뒤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939년 4월 춘천 지목구 성립 이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이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였고, 1940년 12월 퀸란(T. Quinlan, 具仁蘭) 신부가 춘천 지목구장이 되어 11개 본당을 관할하게 되었다. 한국어와 풍속을 익히던 콜리어 신부는 그 가운데 횡성 본당의 보좌 신부를 맡았다. 1941년 12월 8일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일제는 평양 대목구 · 광주 · 춘천 지목구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인 · 아일랜드인 선교사들을 모두 체포 · 감금하였다. 이에 콜리어 신부도 퀸란 신부를 비롯한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1941년 12월 강릉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춘천으로 압송되어 경찰 학교에 감금되었다. 1942년에 아일랜드의 중립적 위치가 인정됨에 따라 선교사들은 각자 자기 본당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사목 활동은 금지된 채 춘천에서 연금 상태에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 후 38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면서 춘천 지목구의 3분의 1이 북한으로 편입되어 번창하던 본당과 많은 신자들을 잃게 된 와중에 콜리어 신부는 다시 횡성 본당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 1월 춘천(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으로부터 소양로 본당이 분리 · 설정되자 초대 주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소양로 본당에는 250여 명의 신자가 있었고, 관할 공소로 발산 · 금산 공소가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채 1주일도 안 되어 북한군이 춘천 지목구에 들이닥쳤다. 북한군의 손에 많은 사제가 체포 · 희생되었는데, 콜리어 신부가 그 첫 희생자였다. 콜리어 신부는 6월 25일 저녁에 퀸란 신부를 방문하여 강 건너에 있는 북한군이 곧 시내로 들어올 것이라는 이야기와 북한군에 의해 상처받은 몇몇 부상자를 도와 준 이야기를 나누었다. 퀸란 신부는 상황이 위험하므로 자신의 숙소에 머물기를 권하였지만 콜리어 신부는 이를 거절하고 신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돌아갔으며, 이틀 뒤인 27일에 복사 김 가브리엘과 함께 체포되었다.
 
북한군은 그들을 밧줄로 묶어 강으로 끌고 가 총격을 가하여 콜리어 신부는 37세의 나이에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김 가브리엘은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콜리어 신부의 시신은 7월 4일에 체포되어 7일에 총살된 삼척(현 성내동) 본당 주임인 매긴(J. Maginn, 陳) 신부와 묵호 본당 주임 레일리(P. Reilly, 羅) 신부의 시신과 함께 발견되어, 춘천 죽림동 본당에서 1951년 10월 11일에 장례 미사가 거행된 뒤 성당 뒤뜰(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의 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최선혜,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