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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첸시오 11세(8.12)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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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인노첸시오 11세 (Innocent XI)
성인 기본정보
축일 8월 12일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611-1689년

  •    복자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 또는 인노첸시오 11세)는 1611년 5월 19일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Milano) 공국의 코모(Como)에서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베네데토 오데스칼키(Benedetto Odescalchi)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려서부터 사제 성소를 느꼈던 그는 162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코모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인문학을 배웠다. 1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제노바(Genova)로 가서 가문에서 운영하는 은행의 일을 도우며 도제교육을 받았다. 1630년 그는 페스트의 광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로마(Roma)와 나폴리(Napoli)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639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어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 때 교황청에 들어가서 다양한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64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그를 부제급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1648년에는 극심한 기근으로 고통 받고 있던 페라라(Ferrara)에 교황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페라라의 시민들에게 자신을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1650년 노바라(Novara)의 주교로 임명된 후에 주교품을 받았다. 노바라 교구의 주교가 된 베네데토 오데스칼키는 자신의 수입 전부를 교구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건강상의 이유로 1654년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로마에서 조용히 지내며 교황청 업무에만 집중했다.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가 선종한 후 강력한 교황 후보였던 그는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결국 1676년 9월 21일 교황 클레멘스 10세의 후임으로 제240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에 선출된 후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 또는 인노첸시오)라는 이름을 택한 그는 교회에 대한 프랑스 왕 루이 14세(Louis XIV)의 간섭과 견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긴축 재정을 통해 교황청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힘썼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해 루이 14세 왕의 정책과 배치되었다. 또한 교리교육과 매일 영성체를 장려하고, 신학교 교육의 수준을 높이며, 윤리신학이 해이해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1687년 신비주의와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에 물든 에스파냐의 미겔 드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를 단죄하고 그에 의해 야기된 이단과 싸우며 교회의 정통교리를 수호하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는 교황직에 오르기 전이나 후나 늘 단순하고 경건한 삶을 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 내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배척하여 큰 존경을 받았던 그는 1689년 8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제대 아래 묻혔다. 1956년 10월 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복자품에 올렸는데, 시복식을 위해 그의 유해를 발굴했을 때 죽은 지 26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유해는 청동으로 장식된 석관에 모셔져 보존되다가 2011년 5월 1일 복자품에 오른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를 모시기 위해 성당 안쪽의 다른 제대로 옮겨 안치되었다.

참고자료
  • 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 마이클 월시 저, 변우찬 역, 옥스퍼드 교황 사전 - 인노첸시오 11세, 왜관읍(분도출판사), 2014년, 426-4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