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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유딧

670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3-07-23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딧 (1)

 

 

유딧기가 비록 성경에서 역사서로 분류되지만, 사실 그 내용은 비역사적입니다. 예를 들면, 유딧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대성읍 니네베에서 아시리아인들을 다스리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제십이년의 일이다.(1,1)

 

그런데 네부카드네자르는 아시리아의 임금이 아니라 오히려 아시리아를 정복한 바빌로니아의 임금이었죠. 그리고 니네베는 네부카드네자르가 왕위에 오르기 7년 전인 기원전 612년에 이미 멸망합니다. 또한, 홀로페르네스는 훨씬 후대인 페르시아 시대의 인물이며, 배툴리아라는 지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즉, 유딧기의 핵심적인 역사적 정보가 모두 틀리거나 확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비역사성이 유딧기가 매우 늦은 시기에 그리스어로 쓰인 것으로 여겨진 점(사실 유딧기의 원문은 히브리어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과 함께 유다인들의 정경 타나카에서 빠지게 된 이유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유딧기는 처음부터 유딧을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상징적인 인물로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딧이라는 이름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유다 여인’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가상의 세상과 유딧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일까요? 유딧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유딧 이야기는 아시리아와 메디아의 전쟁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이 아시리아를 정복하지만, 여기서는 메디아가 패배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이었기에 두 왕국의 국운이 걸려있어서 각자 동맹군을 총동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시리아의 원군 요청에는 어떤 나라도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아시리아는 결국 메디아에 승리한 후 홀로페르네스 대장군에게 대군을 주어 배신자들을 응징하도록 합니다.

 

파죽지세로 정벌을 이어가던 아시리아의 군대의 말발굽이 어느덧 유다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풍전등화의 처지가 된 유다의 백성들은 하느님께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고행을 하며’(4,9) ‘힘을 다하여 주님께 부르짖습니다.’(4,15) 이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 군사적 요충지인 배툴리아에 내립니다. 배툴리아의 함락은 곧 유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2023년 7월 23일(가해) 연중 제16주일(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딧 (2)

 

 

아시리아 군대에 포위된 배툴리아에 유딧이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유딧은 어린 시절부터 미모와 지혜, 그리고 경건함으로 유명했습니다. 요즘 표현대로라면, 예쁘고, 똑똑한 데다 성격까지 좋은 ‘엄친딸’이랄까요?

 

하지만 이때 유딧은 자식 없는 과부 처지였습니다. 과부는 고아와 더불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가 필요할 정도로 불쌍한 신세로 여겨졌습니다. 비록 유딧에게는 다행히 남편이 물려준 많은 재산이 있어 먹고사는 걱정은 없었을 테지만, 엄격한 가부장제에서 과부라는 신분은 사회적 한계와 제약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유딧은 자기 집에서 과부 생활을 하였다(8,4).

 

또한, 정절을 유지하며 홀로 살아가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딧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다(16,22).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문화에서 자식이 없는 부인은 수치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딧이 모든 유다인이 아시리아 군대가 두려워 떨고만 있을 때 민족을 구하기 위해 홀로 나섭니다.

 

유딧이 선택한 싸움 방식은 미인계입니다:

 

유딧은 속에 입고 있던 자루 옷을 벗고 과부 옷도 치웠다. 그리고 물로 몸을 씻고 값비싼 향유를 바른 다음, 머리를 빗고 머리띠를 두르고서 자기 남편 므나쎄가 살아 있을 때 입던 화사한 옷을 차려입었다. 또 발에는 신발을 신고 발찌를 두른 다음, 팔찌와 반지와 귀걸이와 그 밖의 모든 패물을 찼다. 이렇게 유딧은 자기를 보는 모든 남자의 눈을 흐리려고 한껏 몸치장을하였다(10,3-4).

 

임진왜란 때 주논개가 촉석루에서 왜장을 유혹하여 함께 투신하기 위해 몸단장을 곱게 하였다는 어우야담의 기록이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에게 나아가 유다는 자신의 죄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아첨 섞인 거짓말을 하여 그의 환심을 사고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반한 홀로페르네스가 연회를 베풀어 주었을 때, 그를 술에 취하게 하여 잠들게 한 다음 목을 잘라 자루에 담아 배툴리아로 돌아옵니다.

 

하룻밤 새 어처구니없게 지휘자를 잃은 아시리아의 대군은 혼란에 빠지고 공포에 사로잡혀 퇴각하고 맙니다. [2023년 7월 30일(가해) 연중 제17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딧 (3)

 

 

세계 최강의 군대를 이끌던 장군 홀로페르네스 앞에 홀로 선 유딧은 종종 거인 장수 골리앗에 맞선 어린 다윗과 비교됩니다. 또한, 셀레우코스 군대를 물리친 유다 마카베오와 비교하여 유다인들이 그 사건을 기념하는 하누카 축제 때 유딧이 홀로페르네스를 죽이기 전 그에게 대접한 치즈(10장 5절의 ‘정결한 빵’이 우리말 성경과 다른 역본에는 ‘빵과 치즈’로 되어있습니다.)를 먹는 관습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유딧을 사탄에 승리한 성모님의 예형으로 보는 전승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미인계, 기만, 암살 등이 비록 전쟁에서 허용되는 행위들이라 해도 신앙인으로서 권장하거나 칭송하기는 어려운 노릇입니다. 그것도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고 단호하게 보이는 유딧의 행위를 말이죠.

 

화가 카라바조는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순간의 유딧을 미간을 찌푸리며 두려워하는 인간적이고 앳된 모습으로 그렸지만, 성경은 냉정한 암살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힘을 다하여 그의 목덜미를 두 번 내리쳐서 머리를 잘라 내었다. 그러고 나서 그의 몸뚱이를 침상에서 굴려 버리고, 닫집을 기둥에서 뽑아 내렸다. 잠시 뒤에 유딧은 밖으로 나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기 시녀에게 넘겼다.(13,8-9)

 

그리고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에게 한 15구절이나 되는 말(11,5-19) 가운데 9절 단 한 구절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전부 거짓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사라를 누이로 속이는 등(창세 12,11-13) 성경에 거짓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적극적인 거짓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유딧은 정말 엄청난 거짓말쟁이입니다.

 

여타의 성경 인물들에 대하여 그렇게 하듯이 유딧을 모범으로 삼아 그의 행실을 따라도 좋은 것일까요? 좋은 목적이 나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나요?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실 유딧에게서는 매우 특이한 점들이 발견됩니다. 인간답지 않은 모습이 발견된다고 할까요? 그렇다면 당연히 인간의 윤리적 기준으로 유딧을 판단하는 일은 유보해야겠죠.

 

유딧 이전에도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한 많은 위대한 인물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딧은 그들과 달리 단지 하느님의 도구임을 넘어서 하느님의 화신(化身)처럼 나타납니다. 유딧은 하느님처럼 말하고, 하느님처럼 행동합니다. [2023년 8월 6일(가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딧 (4)

 

 

유딧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 사이에는 유사함이 있습니다: “제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려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8,34)

 

하느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시면서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실 것인지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또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라고 명령하시면서도 어떻게 그 일을 가능케 하실 것인지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유딧의 찬양에도 주목해 주십시오: 내 영토, 나의 젊은이들, 나의 젖먹이들, 내 어린것들, 나의 처녀들(16,4), 내 백성(16,11), 내 겨레(16,17).

 

하느님 외에 성경의 어떤 인물도 감히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인이 입에 담을법한 말이 아니었죠.

 

유딧의 행동과 하느님의 행동도 유사합니다. 하느님께서 거짓 예언을 내리심으로써 아합이 승리하리라 착각하게 만드시는 것(1열왕 22)처럼 유딧도 신탁의 형식을 빌려 홀로페르네스가 승리하리라 생각하게 만듭니다(11,16-19).

 

또한, 유딧이 홀로페르네스를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은 밤에 이루어집니다(13,1).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때도 밤입니다(탈출 12,29-30). 그리고 아시리아 군인 185,000명을 죽여 예루살렘을 구하신 때도 밤입니다(2열왕 19,35).

 

결정적으로, 백성의 대표들이 유딧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예루살렘의 영예고 이스라엘의 큰 영광이며 우리 겨레의 큰 자랑이오.”(15,9)

 

성경의 어떤 인물도 이러한 찬사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더하여 여기 사용된 표현들은 보통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렇게 볼 때, 유딧은 볼 수 없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이 지상에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어떤 이는 유딧을 ‘에피파니아’, 즉 하느님의 현현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인물들을 살펴보다가 유딧에 이르러 예기치 않게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숨어계신 듯 보이나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을 절대 외면하지 않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시는 하느님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굳이 자식 없는 과부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이들의 하느님, 비천한 이들의 구조자, 약한 이들의 보호자, 버림받은 이들의 옹호자, 희망 없는 이들의 구원자(9,11)이심을 알려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2023년 8월 13일(가해) 연중 제19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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