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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요한 묵시록을 통해 바라본 우리 사회, 예수가 예수를

687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1-17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요한 묵시록을 통해 바라본 우리 사회, 예수가 예수를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카페를 자주 찾는다. 적당한 소음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이 좋아서다. 소음들 사이에 점잖게, 혹은 거칠게 전해지는 삶의 애환은 가끔씩 내가 쓰고 있는 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새로운 삶을 그려보고 상상하게 한다.

 

사람들은 세상 이야기를 자주 한다. 정치, 야구, 주식, 쇼핑, 드라마, 먹거리, 연예인에 관한 이야기들은 재미를 넘어 때론 다툼까지 이어지곤 한다. 저마다 보는 게 다르고, 보이는 것보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우리는 서로의 다른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지 않다. 흥미로운 건, 그 많은 대화 속에 자기 자신은 쏙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거침없이 이야기하되, 스스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세간의 소문이나 제 계급에서 적당히 인정된 사실을 제 의견인양 뽐낸다. 여기에 보태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교훈적이라는 한줌의 정보로 세상을 가르치듯 덤벼드는 ‘샌님’도 많은 게 사실이다. 요즘 유튜브나 SNS의 해악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다량의 정보에 노출된 사람들의 이성은 제 논점과 신념을 다듬는 게 아니라 누군지 모를 타인의 모호한 생각을 재처리하는 데 소모된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균형 잡힌 인식으로 역사 속 예수님의 삶과 그 삶을 추종한 신앙인들의 고백을 진지하게 관찰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제 신념의 노리개로 예수님을 사유화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님에 대해 뭔가 대단한 것을 찾으려는 이들의 속내는 실은 세상에 돋보이고, 세상과 다름을 각인시키며 짐짓 세상 위에 초연한 삶을 멋지게 살고 있다는 교만으로 얼룩진 게 아닐까. 그리고 그 교만은 실은 제 본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함의 결과가 아닐까.

 

성경을 읽는다는 건 제 삶을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성경의 문자나 문법, 그리고 역사적 사실 관계에 천착해서 지금 제 삶의 맥락을 놓치고 사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동굴 벽에 꼼짝없이 갇힌 선사 시대의 그림과 같다. 성경을 읽는다는 건 예전의 그림을 자신의 화폭으로 옮겨와 제 삶의 고유한 물감으로 덧칠하는 창조의 작업이 아닐까.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께서도 “성경은 읽는 이와 자란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요한 묵시록의 첫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한다. ‘계시’는 그리스말 ‘아포칼립시스’로 ‘장막을 걷어 낸다’는 뜻을 지닌다. 숨겨지고 가려진 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계시다. 문법적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말 명사의 속격(屬格, Genitive case) 형태로 쓰여졌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말 속격은 주체적 의미와 객체적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주체적 예수 그리스도가 객체적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요한 묵시록은 예수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여러 상징을 통해 찬찬히 풀어놓은 글이다.

 

예수님이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요한 묵시록은 역사 속 인간으로 살아간 예수님에 대한 해석이자 질문이기도 하다. 세상은 인간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지, 그리고 그 이해와 해석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인간 역사 안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떠하실까?라고 묻고 또 묻는 일의 결과가 요한 묵시록이다.

 

끊임없는 해석과 질문 사이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자아상과 이름 모를 그리스도인들의 자아상을 한데 엮는 ‘중개적 자리’로 존재한다. 예수님은 예수님으로서 독자적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인간 세상에 왔고,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계시하셨다. 예수님 안에 신의 섭리와 인간의 일상이 중첩되어 꿈틀거린다. 요한묵시록은 예수님의 이러한 두 차원의 정체성을 하나로 엮어 나가는 이야기다.

 

예수님이 살아간 시절의 유다 사회는 묵시주의에 휩싸였다. 기원전 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된 묵시주의는 삶의 고단함에 지친 마지막 절규이자 저항이었다. 기원전 2세기 중엽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215-164년)의 강압적 통치와 기원후 70년경 로마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다 사회가 시대의 아픔에 대해 처절히 묻는 계기가 되었다.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는가, 왜 우리는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묵시주의는 고통에 고립된 인간 세상의 보편적 현상이다. 유다 사회건 지금의 한국 사회건 아프고 슬픈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포탄처럼 터져 나오는 원망과 고통의 소리가 묵시주의의 한 단면이다.

 

고통스런 세상에 대한 고민은 대개 인간적 지혜나 해결책이 아닌 신적 섭리나 신의 개입을 갈구하며 표현되곤 한다. 시대의 위기는 극복될 수 없는 영역으로 분류하고 인간적 한계는 또 다른 신적 권능으로 보호받아야 된다는 것이 묵시주의 시대가 가져다준 인식의 얼개였다. 하느님 앞에, 힘겨운 세상 속에 인간은 그저 가련한 존재, 딱 그만큼만 살기를 바랐고 살아진 시간들은 어떤 의미도 소거된 무력함 그 자체가 된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살아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버텨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게 있다. 대부분의 유다 묵시문학은 내일과 저 세상을 꿈꾸도록 이끈다. 내일과 저 세상은 현재 이 세상에서 얻고 싶어 안달난, 그러나 도무지 얻을 수 없는 화려함과 부유함을 상징하는 것들로 도배된다. 내일과 저 세상은 실은 오늘과 이 세상의 실패에서 기인한 ‘성공’을 위한 애절한 호소와도 같았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의 하느님 나라를 줄곧 가르친 것이 예수님이고, 그 가르침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단죄받아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며 거친 삶을 살아낸 게 그리스도인이었다. 저 천상을 바라볼 게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역사를 제 것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며 나누는 이가 예수님이었고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지금, 여기에 대한 사유와 지금, 여기와의 화해다. 시대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연습을 예수님은 요한 묵시록을 통해 가르친다. 내일의 허망한 기대와 ‘노오력’하면 바뀔 것이라는 지금에 대한 결핍으로 근근이 살아내는 세상, 그 세상의 힘겨움을 다른 세상으로 환치하여 저만의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그리면서 지금을 회피하고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버릇을 내려놓길 요한 묵시록은 제안한다. 요한 묵시록을 읽는다는 건 적혀진 글의 문법과 지난 시간의 흔적을 더듬거나 오지 않는 내일과 종말의 두려움을 미리 대비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을 통해 풀어놓는 것이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나의 계시’가 되어야한다.

 

* 이번 호부터 새로 연재되는 박병규(요한보스코) 신부님의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월간 빛, 2024년 1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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