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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건네어진 계시

689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2-12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건네어진 계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우리는 흔히 ‘사실’로 여기며 이웃에게 전하곤 한다. “내가 봤다, 내가 들었다.”라고 말하면 사실 여부에 대한 신빙성은 더욱 뚜렷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보고 듣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을 보고 듣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무언가 찾아내어야 한다는 당위나 간절함이 짙을수록 있는 그대로를 보고 듣는데 실패할 확률은 높아진다.

 

요한 묵시록을 해석하는 데 수많은 노력이 있었고 그중에 잘못된 해석의 대부분은 요한 묵시록을 통해 미래에 펼쳐질 사실관계를 알아내고자 하는 허황된 열정에서 비롯된다. 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대체로 이해할 만한 것이나 요한 묵시록은 미래에 다가올 일들을 미리 점치듯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이유는 이렇다.

 

요한 묵시록의 계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고 요한을 거쳐서 우리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계시의 전달 목적은 ‘하느님의 종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요한 묵시록은 분명히 밝힌다.(묵시 1,1) 계시는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또 전해지는 무엇이다. ‘종들’이 없으면 계시는 멈춘다. 계시가 갈 곳을 잃어버린다. 요한 묵시록을 읽는다는 것은 계시의 내용을 좇는 것에 앞서 계시가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또 다른 곳으로 전이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事實)과 진리(眞理)를 거의 같은 의미로 여기는 우리의 인식 습관은 ‘건네어진 계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사지선다(四技選多) 형식의 정답만을 강요당한 교육을 받아온 이유 때문인지, 사실 관계는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되고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에 둔감하다. 건네어진 계시는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과 요한을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형태를 취한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계시는 예수님, 그리고 요한을 거치면서 다른 기호로 변화된다. 우리말 번역에 ‘알려주다’라고 되어 있는 동사는 ‘세마이노’, 곧 ‘기호화되다. 상징화되다’라는 뜻을 지닌다. 말하자면 하느님이 주신 계시는 요한에 이르러 그 형태와 내용이 다른 상징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에 적힌 수많은 이야기는 계시의 사실 관계를 드러내는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따르고 갈구하는 신앙인들 사이에 펼쳐지는 진리를 위한 자유로운 사색의 결과다.

 

‘상징’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먼저 상징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들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상상은 얼마간의 ‘믿음’을 전제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경험들을 총동원해 상징이 가리키는 바를 상상하는 건, 자신의 사유 방식과 그 흐름을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증거다. 이 믿음을 자신의 ‘자존감’ 혹은 ‘주체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저마다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그 다름을 통해 하나의 상징은 수백, 수천의 해석 결과로 나타난다. 상징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가 아니라 상징이 가리키는 바를 상상하는 고유한 해석 주체들의 놀이를 풍요롭게 한다. 요한 묵시록 1장 1절에서 단수 형태로 표현된 ‘하느님의 말씀’은 요한 묵시록의 끝자락에 가서 ‘이 책의 말씀들’이란 복수 형태로 나타난다.(묵시 22,6.7.9. 우리말 성경은 모두 단수, 곧 ‘말씀’으로 번역되어 있다.)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해석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되, 요한의 증언을 통해 다양한 상징과 말씀들로 풍성하게 그려내는 창조적 자리다. 요한 묵시록을 읽는다는 것은 특정한 인물 요한이 어떤 특정한 상황 안에서 어떤 특정한 관점으로 예수님을 묘사하는지 지켜보는 일이 된다. 그리고 지켜보는 그 일은 실은 독자의 고유한 관점 안에서 주체적으로 행하는 또 다른 창조의 작업으로 거듭난다. 요한 묵시록 22장은 예수님의 일인칭 화법으로 이런 말씀을 전한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묵시 22,12) 요한 묵시록을 읽는다는 것은 수많은 상징을 통해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제 삶의 행실로써 살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징은 해석 주체들의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또 다른 구체적 행실로 변화한다. 

 

그리하여 상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또 다른 측면은 해석을 통한 상상은 실재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리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은 ‘이것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그것이 아니게 된다. 요한 묵시록을 잘못 가르치는 수많은 이단, 예컨대 신천지와 같은 이단의 특징은 계시에 대한 근거없는 속단이다. 요한 묵시록은 상징을 통해 ‘꾸며지고 각색된’ 예수님을 증언하는 요한의 고유한 고백록이다. 요한이 읽고 쓰고 전해 주는 예수님, 그 예수님은 남다르게 독창적이며 그렇기에 매력적이다. 누가 감히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을, 그것도 여러 상징으로 다시 채색된 예수님을 ‘바로 이분이 예수다!’라고 함부로 단정하겠는가! 다른 이의 관점이 다른 상징들로 소개된 것이 요한 묵시록이기에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 자체가 아니라 요한의 고유한 관점으로 소개된 계시의 해석이다. 하느님의 계시를 알고파 갈망하되, 계시 자체를 보고 듣고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겸손되이 일상의 상징들 안에서 하느님을 조금씩 닮아가고자 애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어럼풋한 것’을 이것이다 외치는 것이 거짓과 독선을 만들어 낸다.(1코린 13,12) 다만 우리는 그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이것이 과연 당신의 뜻입니까?”라고….

 

요한 묵시록은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알린다.(묵시 1,1) ‘머지않아’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물리적 미래’로 향하게 된다. 그리스말 ‘엔 타케이’를 ‘머지않아’로 번역했는데 ‘갑자기, 급작스럽게’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일어날 일들’은 미래에만 들이닥치는 게 아니다.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금, 즉시, 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들이 ‘일어날 일들’이다. 주석학자들은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1세기 교회 공동체가 기다리던 예수의 재림으로 이해한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건, 새롭고 낯선 이를 기다리는 의심스러운 불안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지상 삶을 이미 함께 겪어낸 이를 지금의 자리에서 그리워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건 그 누구만이 아니라 그와 보낸 모든 시공간을 지금 이 자리에 끌어당기는 일이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지금에 와서야 화들짝 놀라며 ‘그런 거였어!’라고 외치는 순간, 우리의 과거는 현재 안에 살아 꿈틀거린다. 아니 지금을 살아가는 나 자신의 호흡을 더 값지게, 더 단단하게, 혹은 더 신중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깨닫고 그분을 익히는 길은 다양하다. 요한 묵시록을 읽는 것은 주석학적 배경 지식에 휘둘리며 상징들이 가리키는 일차적 의미를 수없이 반복하여 되뇌는 단순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징들을 통해 실제 일어날 일들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식 지평을 자유로이 바꾸어 낼 수 있는 놀이가 요한 묵시록을 읽는 일이어야 한다. 사실 묵시문학의 기능이 그러했다. 팍팍한 삶을 살아내는 데 지친 민중들은 저마다 간직했던 희망과 바람들을 여러 상징으로 다양하게 상상했고 그것을 글로 옮긴 것이 묵시문학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희망과 바람을 요한 묵시록을 통해 적어갔고 그리스도인들은 모진 삶을 견뎌내며 요한 묵시록을 읽어갔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속 한 인물이되, 그분을 가리키는 수많은 상징은 ‘십사만 사천 가지’의 셀 수 없는 상징들로 영원히 되살아난다. 오늘 우리의 상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른 상징으로 거듭나서 또 다른 분인(分人)으로 우리의 일상을 파고든다. 그 상징들의 의미는 주석서에 나타난 사변적 지식 몇 가지로, 혹은 비이성적 감정에 저당잡힌 난잡한 신심 활동의 맹목적 반복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상징들에 인색하거나 무지한 신학적, 신앙적 언어는 제 갈길을 이미 잃은 듯 보인다. 예수님이 우리의 일상 안에서 또렷한 분인으로 다시 살아날 때 우리는 건네어지고 전해지는 계시의 풍요로움을 맛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다. 그러니까 상징들을 통해 상상의 자유를 살아내어야 하고, 또 예수님을 우리 삶의 또 다른 상징들로 다시 드러내어야 한다. 우리는 미처 살아내지 않은 다른 사건들을 계속해서 마주하며 예수님을 새롭게, 그리고 갑자기 상상하며 우리 삶의 모든 것에 예민해야 한다. 그리하지 못한다면 요한 묵시록은 우리 삶과 동떨어진 난해한 신비의 책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그리고 신비주의를 이용해 못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활개를 칠 수밖에.

 

[월간 빛, 2024년 2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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