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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판관 입타의 비극

690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2-27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판관 입타의 비극

 

 

아브라함이 주님의 명령으로 아들 이사악을 바치려 한 일(창세 22,1-19)은 딸을 제물로 바친 판관 11장의 입타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사악의 번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던 의도였지만(1절), 입타의 사건은 인신제(人身祭)가 이스라엘에서 합법이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의문거리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행간에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판관 11,1에서 입타는 길앗 출신의 “힘센 용사”로 소개됩니다. ‘길앗’은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자리한 산지의 옛 이름입니다. 또한 그는 “창녀의 아들”로도 소개되는데, 이는 그가 신분이 천한 자였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어머니가 꼭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혼외관계에 얽혀 있거나 간음한 여인도 창녀 취급을 받았습니다(창세 34,31). 입타는 판관기의 백성이 그러했듯(판관 10,6 등) 하느님 섬기는 법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판관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출발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어 끝내 지파들이 서로 싸우기에 이릅니다(20장). 이런 불안정함은 사무엘이 등장하고 나서야 사라지게 됩니다.

 

입타는 딸을 제물로 바쳤다는 점에서 아들의 번제를 명 받은 아브라함과 닮았지만 차이점을 여럿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세 12,1) 가나안으로 왔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큰 부자가 됩니다(13,2 등). 이사 41,8에서는 ‘주님의 벗’이라 불릴 만큼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으니, 주님께서 아들을 바치라 하셨을 때 그분을 신뢰하는 건 그에게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입타는 천출(賤出)이라 ‘부친의 집에서 쫓겨났고’(판관 11,2) 훗날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지긴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이해타산 때문이었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그의 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5-8절). 그러니 어릴 때부터 홀로 생존 투쟁을 한 입타가 아브라함처럼 무조건적 신뢰를 갖긴 힘들었을 것입니다.

 

판관 11,29(“주님의 영이 입타에게 내렸다.”)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입타가 ‘위험한 맹세’(30-31절)를 하기 전부터 그와 함께하고 계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확신하지 못한 입타는 끝내 누군가의 목숨을 건 다음, 마치 도박하듯 출전합니다. 만일 승전한다면 자신을 맞으러 맨 처음 나오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자신의 무남독녀가 나오게 되자 절망해버립니다. 하지만 주님께 한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 탓을 오히려 딸에게 돌립니다: “아, 내 딸아! (···)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35절) 생존하느라 힘들었고 그 때문에 남 탓에도 익숙해진 입타는, 충직한 성품 덕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실하게 살아간 아브라함과 크게 대조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최대한 말을 아끼고 중요한 것만 언급하곤 하는데, 입타의 비극은 매우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유행하던 인신공양을 비판하려던 것으로 보입니다. 곧 입타의 사연을 통해 인신제가 백성이 바란 행복이나 성공이 아니라 도리어 비극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학 교수, 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

 

[2024년 2월 25일(나해) 사순 제2주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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