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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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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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행복합니다”
너는 행복하냐, 묻는다면 당장 무엇이 행복인지, 왜 행복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된다. 어정쩡한 행복론들에 둘러싸여 행복을 키워가야 하는 당위가 거세질수록 나의 행복은 점점 더 무거운 족쇄가 된다. 꼭 행복해야 하므로, 그리하여 행복하지 않은 것은 자책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엔 갈증을 느낀다. 오늘은 그래서 불행한 쪽에 좀 더 가까운 시간을 겨우 살아낸다. 행복의 끈은 잡힐 듯 또 멀어진다.
묵시 1,3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행복을 바라는 내용은 요한 묵시록에 일곱번 나온다.(1,3;14,13;16,15;19,9;20,6;22,7.14) 묵시 1,3은 요한 묵시록의 저술 의도이기도 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전해진 후 반드시 남게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전해진 계시가 사람들의 행복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요한 묵시록을 읽는 이유가 된다.
행복을 두고 많은 사람이 많은 말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선을 행하는 것’이 행복이라 했다. 그럼에도 의로운 이의 불행을 말하는 욥기는 옳고 바른 일을 실천하더라도 행복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요한 묵시록은 행복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할까. 묵시 1,3을 찬찬히 다시 살펴보자.
행복의 대상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한정된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다. 학자들은 전례 공동체 안에서 낭독된 일곱 교회의 편지들(묵시 2-3장)이 요한 묵시록의 시작으로 추정한다. 누군가는 편지들을 읽었고 공동체는 그 낭독의 소리를 듣고 삶의 지침으로 삼았으리라. 신비한 계시의 내용을 많이 알거나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적혀진 글들을 소리 내어서 읽고 읽은 것을 듣고 적혀진 것을 지켜내는 일이 요한 묵시록을 쓴 이유다.(묵시 22,18-19) 적혀진 글 요한 묵시록은 2000년 전 요한 공동체를 향했으나 읽고 듣는 행위를 통해 그 글은 수많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또 전해진다.
읽는다는 것은 적혀진 것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언어학자들은 독서 행위를 통해 글이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말은 고정된 기록이 아니라 살아 움직여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하는 매개체가 된다. 교회의 주석학은 역사 속 사실 관계에 천착하여 글의 진위 여부와 글이 가리키는 역사적 실제에 관심을 두는 반면, 글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언어학자들은 글이 시대를 초월하여 읽고 듣는 이들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살핀다. 요컨대 글에 대한 주석(주석학)이 해석(언어학)으로 옮겨지면 글은 늘 배고프고 목마르다. 읽기는 글이 있는 한 끝이 없으므로, 그래서 글은 읽기를 통해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하므로.
그래서일까. 요한 묵시록은 적혀진 기록에 대해 굳건히 지켜 나가길 권고한다.(묵시 22,18) 주석학은 기록된 것을 ‘지키는’ 일을 윤리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적혀진 글이 삶의 규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올바른 행위의 준거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글을 지키는 것은 행복한 일이어야 하고, 그 글은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공동체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면, ‘지키는 행위’ 는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노력에 내맡겨 둘 수 없다. 저 홀로 올바로 산다고 행복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개인의 무결점이 누군가에게는 숨막히는 흠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지키는 행위’는 자신을 향하고 자신의 올바름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고 타인을 찬찬히 살피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을 읽는 이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적혀진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토닥이고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신앙 선조들이 걸어간 삶의 여정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살펴보는, 다분히 타자 지향적인 행동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다.
다른 이의 모습과 삶을 읽고 한 사회를 살펴보는 데 예언자들의 말씀은 그 전형이다. 요한 묵시록은 스스로 ‘예언의 말씀’이라고 제 정체성을 규정한다.(묵시 1,3) ‘예언’으로 번역되는 ‘프로페테이아’라는 그리스말은 ‘~앞에서 말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계시를 백성에게 전하는 일이 ‘예언’이다. 대개의 예언자들은 공정과 정의를 말했고, 그 이면에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서민들의 애환을 보듬는 위로가 있었다. 예언은 행동거지에 대한 심판이나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암시가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들을 이어주고, 끊어진 사람 간의 자비와 사랑을 회복하는 것을 제 역할로 삼는다. 이를테면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랑의 언어가 ‘예언의 말씀’이다. 지난 시간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이냐, 예언문학이냐를 놓고 학자들은 씨름했다. 대개 표현과 형식의 면에서 묵시문학적 뉘앙스가 뚜렷해 묵시문학으로 분류되지만, 내용과 의미에 있어 요한 묵시록은 분명 우리에게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느님 앞에서, 백성들 안에서 예언자들이 외쳤던 말들은 요한 묵시록의 글로 옮겨져 우리에게 전해진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그 글을 읽고 듣고 서로 나눔으로써 저 옛날 예언자들의 외침이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행복의 포탄되어 터져 나오게 한다.
행복의 때는 지금이다. 내일의 행복을 좇는 마음으로 요한 묵시록을 읽을 이유는 없다. 묵시 1,3에 ‘가까이’로 번역되는 ‘엥구스’는 현재를 포함한 시간의 충만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아직 다다르지 않은 시간은 없다. 전통적으로 가까이 온 ‘그때’를 예수님의 재림의 시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접속사 ‘가르’는 앞 문장, 그러니까 ‘행복합니다’로 시작하는 문장의 원인을 정확히 짚는다. 행복해야 할 이유는 아직 오지 않는 그 재림의 시간이 아니라 이미 다다른 시간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초기 교회의 신앙인들은 물론 오늘 우리 역시 예수님의 재림을 여전히 기다린다.(요한 14,2-3; 사도 1,11; 1코린 15,51-52; 1테살 1,10) 예수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고 언제 오실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 온 그 시간’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리스말의 시간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구별한다. 크로노스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가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의미를 담은 시간이다. 철이 들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늙어가는 순간들에 우리가 느끼고 깨닫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이다. 묵시 1,3이 말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아직 오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 묵시록을 읽고 듣는 모든 이들 안에서 ‘이미’ 오신 메시아로 여겨진다. 예언의 말씀이 공동체 안에 울려 퍼질 때, 그 시간은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님이 이미 오셨다는 믿음으로 행복해야 할 시간이 된다.
오늘의 이 시간을 홀로 고민하고 홀로 노력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의 지식을 적당히 얼버무려 타인의 행복을 논하는 책과 글들이 서점가를 메우고 있는 요즘,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행복으로 살아갈 것인가. 믿음을 가진 우리가 행복한 정도는 이웃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에 비례할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행복을 한마디로 추려보면, ‘만남’이라는 말마디가 떠오른다. 요한 묵시록은 읽는 이와 듣는 이들이 만나는 행복의 자리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모든 글이 그러하듯, 읽고 듣는 일이 개인으로 끝날 때, 글은 죽는다. 글은 읽고 듣고 나누어진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말이 되고,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생각한다.
서로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결국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에 대해. 행복은 다름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한다. 요한 묵시록의 글이 다 읽히고 나면 글은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갈증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제 글이 다하는 마지막에 요한 묵시록이 남긴 이 말은 모든 민족이 모여 와 하나로 만나는 천상 예루살렘 이후에 적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모든 만남의 끝이 결국엔 예수님이라는 사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역사 속 한 인물을 만나는 게 아니라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이를 만나는 일이 된다는 사실, 이 사실들은 요한 묵시록을 읽고 듣고 나누는 일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린다. 그러니까… 나의 행복을 좇다가 우리의 행복이 무엇인지 또 다른 질문을 받고야 만다. 어쩌면 행복은 나로부터 우리를 읽어내는 작업, 그 자체가 아닐까.
[월간 빛, 2024년 3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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