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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예수님을 상상하라(묵시 5,1-6)

713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6-22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예수님을 상상하라(묵시 5,1-6)

 

 

묵시 5장은 천상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돌연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누가 두루마리를 열어젖힐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어린양…. 그가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속속들이 보여 줄 것이다. 요한의 시선을 따른 이야기의 흐름 역시 어린양을 향한다. 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놓인 두루마리를 요한은 보았고, 그 두루마리의 봉인을 제거할 어린양을 보았다. 신적권능을 가리키는 오른손. 그러나 그 ‘오른손’의 권능은 드러나지 않는다. 어좌에 앉으신 그분이 두루마리를 열지 않으니까. 오히려 오른손에서 시작하여 두루마리를 열어젖힐 누군가를 찾아 나서야 한다. 오른손은 어린양이 나타나야 할 이유이며, 어린양을 통해 두루마리는 제 속살을 드러내어야 한다.

 

어린양에 대한 집중적 서술은 요한의 인간적 한계성과 대립하여 부각된다. 하늘과 땅 위, 땅 아래, 그 누구도 봉인을 열 수 없다는 대목에서 오로지 어린양을 향한 요한의 집중도는 매우 뚜렷하다. 요한은 울고 있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여전히, 계속해서…(‘울다’의 그리스말 동사는 지속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미완료 형태로 소개된다.) 요한의 울음을 인간의 한계와 그 한계를 채워 줄 예수님의 권능을 가리키는 메타포로 많이들 생각한다. 그러나 그 울음이 그것만일까. 우리의 일상 속 울음은 어떤가. 무기력한 한계에 봉착했을 때 우는 것이 과연 무기력해서 우는 것일까. 아니면 한계 너머, 간절한 바람을 담은 짙은 호소의 행위로 울음을 내뱉고 마는가. 요한의 울음은 두루마리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간절함의 메타포가 아닐까. 인간의 한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인간 너머 다른 존재와 다른 세상을 향한 개방과 상상이 울음으로 분하여 표현된 것은 아닐까.

 

드러나야 할 두루마리의 속살은 반쪽이다. 안과 밖에 쓰여진 두루마리는 반은 보이고 반은 가려져 있다. 어린양은 적혀진 것의 반을 열어 보여 줄 것이다. 교부들은 두루마리 안쪽에 적힌 것을 구약 성경, 밖에 적힌 것을 신약 성경으로 이해했다. 구약의 하느님이 신약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계시된다는 것. 예수님은 그야말로 계시의 완성이라는 것. 그러나…, 두루마리에 적힌 것에 대한 호기심은 이야기의 주된 관심이 아닌 듯하다. 요한 묵시록은 두루마리의 내용에 대해선 침묵한다. 무엇이 적혔는지 알 수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묵시 5장은 어린양에 대한 서술만 가득하다.

 

어린양은 사자가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메시아와 그 집안을 가리켰던 동물은 사자, 그야말로 힘센 사자였다. 힘센 사자가 곧장 어린 양으로 구체화되는 이야기 흐름은 당황스럽다. 마치 마르코 복음에서 메시아를 두고 제자들과 예수님의 이해가 전혀 다른 것처럼, 그리하여 수난받는 메시아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베드로가 ‘사탄’이 되고마는 것처럼, 사자와 어린양은 결코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되지! 그럼에도 사자와 어린양은 요한의 시선으로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복음의 기막힌 역설은 기어이 어린양과 사자의 간극을 메꾸고 지워 버린다.

 

힘 있는 사자가 힘없는 어린양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의 논리가 새롭고 신선하다. 더욱이 어린양은 밀림의 사자처럼 홀로 우뚝 선 채 자랑하지 않는다. 어린양은 오히려 ‘함께, 하나 된’ 채 더불어 존재한다. 어린양은 ‘한가운데’ 공간을 차지한다. 우리말 번역은 어린양의 공간을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로 해석하지만, ‘사이’가 아니라, 한가운데’이다. 어린양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어좌에 앉으신 분과 지상의 하느님 백성인 스물 넷 원로, 어디든 계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을 가리키는 네 생물과 ‘하나의 공간’ 안에 함께한다. ‘한가운데’는 배타적 중심이 아니라 모든 공간을 수렴하는 ‘일치의 기준’이 된다. 특정 공간이나 지위를 어린양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해석하는 건, 역사의 배타적 한 인물이 아니라 모든 시공간 안에 친교의 장으로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겪어 내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저런 분이시다 고백하는 건 쉬운 일이나 이런 분도, 저런 분도 되신다는 사실을 겪는 건 때론 고통스럽다. ‘내가’ 찾아나서는 메시아가 뚜렷할수록 ‘우리의’ 메시아는 흐릿해질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는 정답은 분명히 이것이어야 하는데, 다른 정답은 허용될 수 없는데, 저렇게 달리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부끄럽거나 슬퍼질 수 있다. 나의 예수님은 사라지고 우리의 예수님이 남을 때, 그건 실은 나의 인식의 틀이 무너져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발굴하는 일’이 될 테니.

 

어린양을 통해 새로운 예수님을 ‘발굴하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살해된 것처럼 보이나 실은 서 있는 어린양’은 대개 인간 역사를 살다가 죽고 부활한 예수님으로 해석해 버린다. ‘살해되다’는 동사와 ‘서 있다’라는 동사는 ‘완료형’ 분사형태로, 죽음과 부활은 특정 시간의 구체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지속적인 성질이라는 것. 죽음과 생명이 어린양이라는 형상 안에 온전히 하나로 흡수되어 지속되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예수님을 두고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의 흔적을 제거한 채 부활의 승리를 가져 온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과 생명은 대립의 두 단어가 아니라 어린 양을 통하여 통합의 새 이미지로 그려진다. 물리칠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서 있어 영원히 살아 계신 예수님 안에 죽음은 생명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재해석된다.

 

분사형태의 두 동사는 성과 관련해서 더욱 복잡한 문법적 구조를 지닌다. 그리스말은 남성, 여성, 중성의 형태로 나뉘어져 구성되는데, ‘살해된’이라는 동사는 남성분사로, 중성명사인 ‘어린양’과 문법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혹자는 어린양이 중성일지라도 ‘살해된’ 동사가 남성을 가리키는만큼 한 남자, 곧 예수님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어린양을 예수님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은 남는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동사는 ‘스타우로오’로 요한 묵시록은 11장의 두 증인 이야기에서 이 동사를 사용한다. 요한 묵시록은 예수님의 역사적 죽음을 정확히 알고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묵시 5장의 어린양의 죽음을 가리키는 동사는 ‘스파조’로, 목을 잘라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가 사용된다. 목이 잘려 죽어 간 많은 순교자들, 그들의 피는 곧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섞여 구원의 생수가 되지 않을까.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는 실은 많은 신앙의 증거로 피가 끓어오르는 생명의 자리가 아닐까. 어린양은 예수님을 증언한 신앙인의 숱한 죽음 위에 새롭게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어린양의 형상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역사의 예수를 찾다가 지금 수많은 예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대개의 성서 신학이 역사적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역사성에 집중하여 해석하는 데 골몰하다가 지금 우리 삶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하느님의 일들엔 무지하거나 소홀한 것은 아닌지. 갈수록 신학과 신앙의 운동장에 뛰어놀 선수가 사라져 가는데도 신학과 신앙은 교문을 굳건히 닫아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한 묵시록의 어린양은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의 결정체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한 어린양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반복하는 예수님의 이미지가 되었다. 상상이 현실을 깨우고 흔들어 댈 때, 신학과 신앙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예수님이 죽어간 흔적을 꼭 보아야겠다는 토마스의 의심이 예수님을 참된 주님으로 고백하게 한다. 빤한 믿음보다 설레는 믿음이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의심하고 상상하면 어떨까. 어린양을 읽으면서 저 옛날의 예수님이 오늘 다시 새롭게 살아 계시길, 그리하여 어린양이 서 있는 한,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아 늘 새로움에 설레고 목마르길 바랄 뿐이다.

 

[월간 빛, 2024년 6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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