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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성경, 하느님의 말씀: 기억해야 할 것, 잊어야 할 것

732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8-20

[성경, 하느님의 말씀] 기억해야 할 것, 잊어야 할 것

 

 

많은 사람들이 치매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만큼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질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은 소중한 대상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되고 동시에 어느 시점의 기억에 묶이게 됩니다. 망각과 동시에 일련의 구속을 야기한다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앞서 언급된 행태는 문자 그대로 치매에 걸린 사람에게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안고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이가 들수록 점차 무언가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되지만 자신이 기억하고자 하는 ‘라떼(는 말이야)’에는 더 강하게 묶이게 되는 경향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발생한 망각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망각이었고 그 결과로 세상에 죽음이라는 한계가 들어섰습니다(창세기 3장). 이는 자기 자신의 처지 및 자리에 대한 망각과 한 몸을 이룹니다. 피조물이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하느님과 자기 사이의 차이를 제거하려 했으니, 마치 진흙이 자기를 빚어 만드는 이에게 훈수를 두는 꼴입니다(이사 45,9). 그러자 사람은 저주받은 땅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에 묶이게 되고 그 기억은 원죄의 경향 아래에 있는 아담의 후손들을 통해 현실이 됩니다. 자기 본연의 자리를 망각하는 이들이 자행하는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등이 그 결과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망각과 저주스런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정녕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고 망각해야 할 것은 망각하게 하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사람과 달리 당신 백성과의 계약을 망각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고(탈출 2,24) 설령 여인들이 젖먹이를 잊는다 하더라도 당신 백성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이사 49,15). 하느님께 큰 죄를 지어 나라를 잃고 이방인의 땅으로 유배를 갔던 이스라엘이 본국으로 귀환한 실제 역사는 그분의 자애를 담아내는 기억입니다. 이 기억의 바탕에는 피조물로서 자기 본연의 자리를 찾으며 회개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을 위한 특별한 망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사람의 악행을 씻어주시는 분으로서 당신 백성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며 그 죗값을 온전히 받아내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이사 43,25; 예레 31,34; 에제 18,27).

 

하느님의 기억과 망각에 담긴 자비를 구체적으로 얻어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계속 기억해야 할 것은 스스로 미화시키는 ‘라떼’가 아니라 피조물로서 자기 자신의 자리이자 한계 지어진 자신의 처지라 하겠습니다.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해야 하며 동시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물음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내 멍에는 가볍다”하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길을 자아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은 죄를 잊어주시는 하느님을 닮아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벌어진 부정적인 사건들, 나를 힘들게 하고 고생시킨 이들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에 너무 묶여 사는 것 또한 우리 삶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입니다. 가능하다면, 나의 죄를 자비로이 잊어주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나를 상대로 죄를 저지른 이들을 내 기억에서 놓아주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를 희망하는 신앙인의 자세라 하겠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어야 할 것은 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청해봅니다.

 

[2024년 8월 18일(나해) 연중 제20주일 가톨릭마산 8면, 조우현 십자가의 요한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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