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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성경, 하느님의 말씀: 침묵하시는 하느님

750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0-24

[성경, 하느님의 말씀] 침묵하시는 하느님

 

 

침묵은 말에 선재합니다. 동시에 침묵은 창조의 완성을 이룹니다. 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 말씀이 있기 전에 하느님의 침묵이 있었습니다. 세상 창조 7일 째, 종말까지 이어질 창조 사업에 하느님께서 큰 쉼표를 하나 찍으시며 ‘세상이 완성되어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저 말씀을 멈추셨습니다(창세 2,2 참조). 말씀의 멈춤은 온 세상 피조물의 안식과 복, 거룩함을 자아냈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말로 이루어지는 세상 창조에 앞서 있고 그것을 완성하는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온 세상 피조물은 하느님의 침묵에 참여하게끔 초대받았습니다. 웅장한 자연 환경에 압도되어 본 사람은 ‘침묵이 이루어내는 하느님 찬미’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압도하는 자연은 자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자기 본연의 자리를 지킬 따름입니다. 사람은 말이 아닌 침묵으로 아상(我相)을 넘어서는 존재인 자연을 마주합니다. 그로써 경이를 느끼고 한편으론 겸손해지며 그 가운데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는 온 우주의 질서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끊임없이 완성시켜 나가야 할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창세 2,19 참조) 그래서 자기 말을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입을 닫아야 할 시점에 계속 입을 벌려 자기 말을 늘어놓습니다. 그로써 피조물 본연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기도 하고, 애써 자기 본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른 이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이 창세기 3장의 뱀과 첫 인간들의 고통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안식, 복, 거룩함이 뿌리내릴 수 없는 어둠의 골짜기의 현신(現身)이라 하겠습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걷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시편 23,4 참조)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침묵하십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 성부께서는 구원의 길을 가시는 성자의 고통 앞에 침묵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의 침묵을 십자가 상에서 받아 안으십니다. 그 누구보다 힘 있는 말씀을 간직하신 분께서 하느님으로서의 자리를 내려놓으시고 죄인들의 자리를 취하시며 침묵으로 지탱하십니다. 무고하신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고 죽으셨다는 신앙고백에 맞갖게, 침묵하지 못했던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서 대신 침묵해주십니다. 그렇게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을 통해 하느님의 침묵을 온전히 담아낸 십자가라는 자리는 온 인류의 재창조와 부활의 매개로 작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상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침묵에 기반을 둔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의 침묵에서 시작과 완성을 보듯이, 우리의 말 또한 하느님의 침묵에서 비롯되어 하느님의 침묵으로 귀결되어야 하겠습니다. ‘최대한 말을 줄여야 한다’라는 식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앞서, 우리의 삶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회귀하지 않고 하느님의 침묵을 지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침묵이 오롯이 하느님께 유보된 은총이란 사실입니다. 우리의 침묵은 피조물 본연의 자리에 늘 부족하여 과도할 따름인 스스로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먼지와 재로 돌리는 회개의 몸짓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몸짓을 십자가 상에서 침묵하시는 주님께서 이끌고 계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지키고자 애쓰는 모든 이를 하느님께서 강복하시기를, 그로써 하느님 침묵의 안식, 복, 거룩함이 우리 삶에 실현되기를 희망합니다.

 

[2024년 10월 20일(나해) 연중 제29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전교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조우현 십자가의 요한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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