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38: 심판으로 읽고 구원을 생각하다(묵시 14,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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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38) 심판으로 읽고 구원을 생각하다(묵시 14,14-20)
심판의 두려움은 곧 구원을 향한 애절함
요한 묵시록 14장 14절부터 본격적인 심판의 이야기가 서술된다. 심판을 이야기하는 묵시문학 글들에 습관적으로 혹은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말마디들이 요한 묵시록 14장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느님의 진노, 낫, 불, 피 등 우리가 듣기에 거북하거나 두려운 말마디들이다.
불편한 말마디들 사이에 ‘추수’와 ‘수확’이라는 말마디 역시 자리 잡고 있다. 추수와 수확은 어느 시간의 마지막을 가리킨다. 애써 키운 작물들이 마지막 때에 이르렀다는 것은 성취나 성공의 의미일 텐데, 요한 묵시록 14장의 추수와 수확이란 말마디는 심판 이야기 한가운데 낯설게 버티고 있다.
추수와 수확은 전통적으로 마지막 때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을 가리켰던 말마디라고 해석하나(요엘 4,12-13 참조), 그런 해석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 요컨대 하느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게 마땅할 뿐이다.(묵시 14,12) 스스로 믿는 이라 여긴다면, 추수와 수확은 심판과 징벌의 은유로 읽힐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독일어로 된 가장 오래된 그림 신약성경인 「오트하인리히 성경(Ottheinrich Bible)」 중 <어린양의 승리와 마지막 수확>
요한 묵시록은 결정적 심판을 19장에 가서야 서술한다. 학자들은 요한 묵시록 14장의 심판에 관한 서사를 19장을 위한 하나의 ‘예변적’ 장면이라 말한다. 19장의 결정적인 심판을 준비하는 경고성 문구들이 14장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요한 묵시록 19장의 심판은 마지막 시간의 근원적 심판, 그러니까 악의 근본적 상징이었던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을 향한 심판이고, 요한 묵시록 14장의 심판은 우상 숭배에 물들어 하느님을 저버리는 인간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대부분의 학자는 심판의 관점에서 요한 묵시록 14장을 다루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러나, 우린 조금 다르게 읽어 보자. 우리가 비록 부족하나마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마침 우리가 읽는 요한 묵시록 14장 14절은 ‘사람의 아들’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11장에 이미 나타나기도 한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나타나는 메시아에 닿아 있다. 심판의 시간에 구원을 가져다줄 메시아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메시아가, 그 사람의 아들이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사뭇 달라 당황스러울 뿐이다.
금관을 쓰고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어, 사랑 가득하고 겸손하며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복음서의 사람의 아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금관을 쓰고 있어 힘이 있는 임금이 떠오르고(묵시 4,4 참조)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어 두려움이 서려 있는 종말의 심판관이 떠오른다.(요엘 4,13 참조)
구원의 상징이기도 하고, 심판의 주체이기도 한 메시아의 이중적 묘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메시아는 우리의 믿음 여부에 따라 구원자이기도 하고 심판자이기도 해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만약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 중 하나를 우리의 행실로 선택 가능하다면, 낫을 휘두르는 사람의 아들이 인자하거나 다정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무서워할 이유가 있을까.
나의 행실이 하느님의 계명 안에 있으면 낫을 든 사람의 아들은 오히려 듬직하거나 자랑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사실 낫을 휘둘러 땅의 곡식을 수확하는 것은 전형적인 종말의 선포와 닮았다.(마태 3,12; 9,37; 마르 4,29 참조) 구원받은 이들은 수확의 그 마지막 때에 하느님 품에 안길 것이므로 그들에게 낫을 휘두를 그 마지막 때는 회피가 아니라 갈망의 시간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 묵시록 14장 19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분노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불에 대한 권한을 가진 천사가 낫을 든 천사에게 땅의 포도를 거두라고 명령한다. 불은 징벌을 가리키는 은유이고, 땅의 포도는 징벌을 받아야 할 대상을 가리킨다. 거두어진 포도는 도성 밖 큰 포도 확에 던져진다. 도성을 두고 대개의 주석학자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예루살렘 밖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이민족의 공간이었고(4에즈 13,35; 2바룩 40,1 참조) 요엘서와 즈카르야서는 종말의 마지막 심판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일어난다고도 예언했다.(요엘 4,2.16; 즈카 14 참조)
요한 묵시록 14장의 이런 서사 흐름에서 공간 대립에 대한 관찰은 중요하다. 하느님의 분노는 큰 포도 확을 형용하고 큰 포도 확은 예루살렘 밖이라는 것. 더군다나 도성 밖은 피범벅의 끔찍한 공간이다. 포도 확에서 흘러나온 피가 “천육백 스타디온”이라는데, 한 스타디온이 200m가 조금 안 된다. 1600스타디온은 대략 300km의 거리다.
어떤 이들은 팔레스타인 땅의 북쪽과 남쪽 거리로 300km를 해석하기도 하지만 1600이라는 숫자는 4의 배수(4×400; 4×4×100; 40×40)이고 4가 지리적인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피는 이 세상 모든 곳을 잠식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요컨대 하느님의 분노는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 묵시록 21장과 22장에 가서 천상 예루살렘이 모든 민족을 향한 구원의 자리라는 사실을 또한 만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분노가 온 세상을 덮친다는 것과 그분의 구원이 모든 민족을 향해 있다는 것이 모순 관계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의 안과 밖의 강력한 대립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그 모순은 두 공간의 상생을 통한 하나의 논리로 확연해진다. ‘온 세상의 피범벅’으로 묘사되는 징벌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예루살렘 안의 구원은 더욱 또렷해진다는 것.
예루살렘 밖에 벌어지는 하느님의 심판과 그 효력이 대단할수록 예루살렘 안의 구원은 더욱 값지고 간절해진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우리의 추수는 구원인가, 심판인가. 행여 심판의 두려움으로 요한 묵시록 14장이 읽힌다면, 그 두려움은 불안이나 슬픔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여정을 갈망하는 애절함이 아니겠는가.
[가톨릭신문, 2025년 9월 28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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