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성경 인물 이야기: 가나안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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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4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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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가나안 여인 (1)
이제 우리는 마태오 복음 15,21-28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감탄케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나보겠습니다. 비록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유명(有名)하다는 표현은 어색하겠지만, 복음을 읽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어느날 예수께서 이스라엘 북서부 해안에 위치한 이방인들의 도시인 티로와 시돈에 들리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의 땅을 밟는 것조차 꺼렸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방인 지역을 지나야 했을 때는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들어오기 전에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내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위험한 생화학 물질이 있는 방에 들어갔다 나올 때 공기 샤워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방인을 치명적인 병균처럼 여겼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티로와 시돈은 구약성경에서 곧잘 저주받은 도시들로 등장합니다: “티로의 모든 임금과 시돈의 모든 임금과 바다 건너 해안 지방의 임금들 ... 내가 너희 가운데에 보내는 칼로 말미암아 너희는 마시고 취하며, 토하고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마라”(예레 25,22. 27)
이들의 바알을 비롯한 온갖 우상들의 숭배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그 뿌리까지 흔들 정도로 위협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방인 지방에서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 땅의 원주민이었던 가나안인의 후손입니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다인이나 가나안인이나 모두 한 핏줄입니다. 가나안인은 멀리 보면 노아의 아들인 셈, 함, 야벳 가운데 함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펫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창세 9,18)
좀 더 가까이 보면 가나안 땅에 살던 아브라함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가나안인은 이방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라 부를 정도로 경멸하고 천시했습니다.
참고로 유다인들은 사람의 신분을 14등급으로 분류했는데, 이방인은 성불구자보다도 낮은 최하 등급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가나안 여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15,22)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단순히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던 호칭이지만, 이어지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인 ‘다윗의 자손’과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볼 때, 이 이방인 여인은 아직 많은 유다인, 심지어 제자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오해하고 있는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025년 10월 5일(다해) 연중 제27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가나안 여인 (2)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이렇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15,22)
마귀가 들렸다는 말은 단순히 정신적인 이상 증세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고, 육체적 장애를 동반한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말 성경에 ‘호되게’로 번역된 그리스어 카코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지 고통의 극심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것이 사악한 일임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여인은 마귀가 하느님의 피조물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억압함으로써 감히 하느님을 거슬러 창조를 깨뜨리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여인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비록 이방인이지만 엄연히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기 딸의 상황에 개입할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딸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청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 여인은 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즉 딸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눈물겨운 모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여인을 매정하게 내치려 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곧잘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서는 것을 막는 장벽처럼 묘사되곤 합니다. 물론 당시 여인이 소란 피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던 이스라엘의 가부장적 문화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적대적 관계를 생각하면 아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긴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당황스러운 것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께서는 처음에는 이 여인의 부르짖음에 아예 응답도 하지 않으시다가, 나중에는 당신은 유다인들의 구원만을 위해 오셨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15,24)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스라엘 집안’과 ‘길 잃은 양’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보다는 동의어적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해 보입니다. 즉,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이라는 표현을 ‘길 잃은 양인 이스라엘 집안’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진실이 아니라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신다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까지 왜 오셨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이미 로마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신 일을 기억합시다(8,5-13). [2025년 11월 2일(다해)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가톨릭안동 3면]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가나안 여인 (3)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냉정한 말씀에도 포기하지 않고 엎드려 절하며 다시 한번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15,25).
복음의 그리스어 원문은 이 여인의 행위를 표현하는 데 있어 지속되고 있는 행위를 나타내는 미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여인의 부복하는 행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녀의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시며 또다시 여인을 시험에 들게 하십니다(15,26).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개는 이방인들을 비하해 부르는 호칭입니다.
가나안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합니다. 우리가 알던 예수님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이토록 겸손하고 간절하게 청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가련한 여인을 모욕하며 내치실 정도로 냉정한 인물이었던가요? 이 여인은 복음 전체를 통틀어 예수께 가장 차가운 대접을 받은 인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개를 언급하실 때 사용된 그리스 단어는 쿠나리오이스입니다. 이 단어는 부정한 들개를 뜻하는 쿠온과 구별되어 집 안에서 키우는 개, 즉, 애완견을 가리킵니다.
본디 이스라엘에는 애완견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방 지역인 티로와 시돈에서는 애완견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에게 익숙한 용어를 사용해 이방인이 비록 하느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등한 위치에 있지는 않다고 해도, 그들 또한 이미 하느님의 집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살갑지는 않지만, 이방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가나안 여인의 대답은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여인을 뛰어난 신학자로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복음 전체를 통틀어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승리한 유일한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라는 응답으로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15,27).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구원의 우선순위를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먼저여야 하는지 따지지 않음은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순종입니다. [2025년 12월 7일(가해)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가톨릭안동 3면]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가나안 여인 (4)
이어지는 가나안 여인의 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강아지도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합니다(15,27).
이것은 자기 딸의 고통을 외면하는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도 아니고, 강아지에게 빵을 먹을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가나안 여인은 두 가지 중요한 신앙의 진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식탁에서 자연스레 떨어지는 은총의 부스러기만으로도 딸을 구원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말함으로써 하느님 은총의 무한한 효력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둘째, 강아지가 식탁 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것을 주인이 제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방인들조차 구원에서 제외하지 않는 하느님의 보편적 자비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인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결국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감탄하시고야 맙니다(15,28).
성경에서 감탄사(아)와 호격(여인아!)이 함께 사용되는 경우는 드문데, 이것은 엄숙한 선언을 할 때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끈질기고, 견고하며, 겸손할 뿐 아니라 지혜롭기까지 한 가나안 여인의 놀라운 믿음을 장엄하게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감탄시킨 이 익명의 가나안 여인은 마태오 복음 8장의 백인대장에 이어 예수께 칭찬받은 두 번째 이방인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한 이 이야기는 단지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효력이 미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오히려 유다인들보다도 구원받기에 더 합당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편협한 민족주의와 맹목적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유다인들을 가르치십니다. 구원의 보편주의, 즉 가톨릭이 계시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뿐 아니라 마르코 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시리아 페니키아 사람으로 나옵니다.
마태오가 마르코와는 달리 이 여인을 가나안 사람으로 표현한 이유는 또 다른 가나안 여인 라합과 연결 짓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본디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전멸되어야만 했던 그 땅의 이방인 가운데 하나였던 라합은 믿음으로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게다가 그는 예수님의 조상까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너무나 오래되어 기억마저 희미해져 버린 이 보편적 구원의 역사를 다시 떠올리기를 바란 듯합니다. [2026년 2월 1일(가해) 연중 제4주일 가톨릭안동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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