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을 해주세요.

로그인
닫기
사목/복음/말씀 > 복음생각/생활
2024.06.26 등록
크게 원래대로 작게
글자크기
무한이 유한으로 들어오게 하는 유일한 통로는 ‘비움’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75. 비움의 영성
//img.cpbc.co.kr/npgroupcts/2024/06/IM20240630000004464.jpg 이미지

무한호텔 방이 무한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비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 비움만이 유한과 무한의 만남을 이어가게 한다. 출처=Wikimedia Commons




 





무한개의 방이 있는 호텔이 있다. 거기에는 무한수의 손님이 머문다. 그런데 손님이 한 명 더 왔다. 무한개의 방에는 끝 방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그렇다면 1번 방의 손님이 2번 방으로, 2번 방의 손님은 그 다음 방으로 옮기면 된다. 무한대에 1을 더해도 여전히 무한대다. 그런데 만약 셀 수 없는 무한수의 손님이 왔다. 이땐 또 어떻게 할까? 이때는 1번 방은 2번으로, 2번 방은 4번으로, 3번 방은 6번으로 옮기면서 홀수를 비워 놓으면 된다. 무한대에 2를 곱해도 무한이다. 그 외에 무한 단체 손님들이 들어와도 문제없이 모두 수용할 수 있다는 독일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가 제기한 ‘무한호텔 역설’이다.



무한호텔의 주인은 그 어떤 무한수의 손님이 와도 절대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주인은 무한개의 방이 있기 때문에 비우기만 하면 된다. 방을 주기 위해 그 어떤 조건을 내세워 어떤 특정인이나 집단을 제외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주인에게는 적대자나 경쟁자도 없다. 모두를 다 무한 품는다. 만약 주인이 조건을 내세워 어떤 특정 집단만을 받아들인다면 곧바로 유한성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대립자가 생길 것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무한은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무한을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힐베르트의 무한호텔 역설만 한 이론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한은 그 어떤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우고 열려있을 뿐이다. 유한한 우린 매일 갈등과 대립관계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성을 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무한호텔 방이 무한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 비움만이 유한과 무한의 만남을 이어가게 한다. 유한의 인간이 무한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려면 철저하게 비워야 한다. 반복적으로. 그런데 비움의 영성을 살기 위해서 갈망에서 머물면 안 된다. ‘하느님도 갈망하면 안 된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갈망하는 순간 유한성에 갇혀 소유를 욕망하고 집착하면서 자신만의 우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우상론을 현대인에게 적용한다면 우린 매일 우상을 섬기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이 속한 문화가 가장 탁월하다고 믿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것도 우상숭배다. 여론을 맹신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요즘 정치가 시끄러운 사회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권위만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우상숭배다. 우상에는 늘 ‘적대자’가 존재한다. 나의 문화가 탁월하면 타문화는 열등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진리라면 내가 모르는 것은 허구다.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만 신뢰하면 다른 정당이나 정치 세력을 배척하고 공격한다.



언제부턴가 정치가 우상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특정 인물이 유일한 희망이고 자신의 이념 성향과 유사한 사람들만이 무조건 내 편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의 실수는 관대하게 이해하고 반대 세력의 똑같은 실수엔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혐오와 공격적 발언을 쏟아낸다.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무조건 수용’하고 ‘무조건 거부’한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고가 정지되고 ‘무조건’으로 넘어가면 우상의 단계에 이른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칫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성당은 열심히 나가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적대적이라면 나만의 우상을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혹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몇몇 사람들 때문에 성당을 가기 싫다는 사람들을 만난다. 하느님을 믿지만, 상처를 준 사람들 때문에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자칫 소유욕을 부르고 특정 대상에게 의존케 된다. 의존은 쉽게 실망으로 이어지고 미움과 적대감으로 옮겨진다. 그렇기에 하느님에 대한 갈망의 차원을 넘어 ‘비움’의 영성을 살아야 한다.



무한이 들어오려면 유한은 비워야 한다. 무한이 유한으로 들어오게 하는 유일한 통로는 ‘비움’이다. 비움의 자리에 무한인 신성이 활동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 어떤 ‘대립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성이 묻는 안부>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딱 여기에 머물면 나의 의지대로 성취하려는 욕심이 생기고 집착하게 되지요. 그러면 우상을 만나게 됩니다. 종교적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거나 ‘해야만’하는 의무에 빠지지요. 이런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합니다.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합니다. 목구멍은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요. 그러다가 결국 나 역시 우상과 닮아갑니다.”(시편 115,5-8 참조)



하느님은 무한하십니다. 하느님은 완전하고 선하신 분이며 그 어떤 대립자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신성이 우리 안에 활발하게 활동하시도록 매일 매 순간 나 스스로를 비우면서 비움의 영성을 살아야겠습니다. 무한이 들어오려면 유한은 비워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