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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지식·깨달음만 좇는 이단 ‘영지주의’ 출현
[저는 믿나이다] (34) 영지주의

사도 시대부터 교회를 가장 위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입니다. ‘지식’을 뜻하는 헬라어 ‘γνωσιs(그노시스)’에서 유래한 말로, 영지주의자들은 지혜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입니다. 이 영지주의가 사도 시대를 거쳐 2~3세기 교회 안에서 성행했으며 지금도 새 영성 운동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신약성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지주의는 초세기 사도 시대 때부터 교회 안에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죽은 이의 부활은 없다고,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성자 하느님께서 지상에 머무는 동안 잠시 빌린 인간의 모습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에 영지주의자들은 십자가 죽음도 부활도 아무 의미가 없고,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 획득, 곧 ‘깨달음’ 덕분이라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아울러 참하느님과 창조주를 구분합니다. 그들은 참하느님께서 세상의 창조주가 아니기에 죄와 악, 고통과 비극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모든 책임은 불완전한 창조주에게 있고, 창조주가 불완전하기에 그가 만든 세상 역시 불완전하다고 주장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죄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가 아니라 ‘무지’라고 합니다. 무지야말로 하느님과 인간을 가로막는 벽이며 허물어야 할 대상이라고 합니다.
교회 학자들은 사도 시대 사마리아에서 마술로 사람들을 현혹하던 ‘시몬 마구스’를 통해 교회 내 영지주의가 시작했다고 봅니다.(사도 8장 참조) 첫 영지주의자인 시몬 마구스는 사마리아 지방 기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몬 마구스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내용은 사도행전 8장 9-12절까지의 구절입니다.
“그 고을에는 전부터 시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술을 부려 사마리아의 백성을 놀라게 하면서 자기가 큰 인물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리하여 아이에서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힘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그가 오랫동안 마술로 그들을 놀라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필리포스를 믿게 되면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세례를 받았다.”
사도행전의 내용 그대로 시몬 마구스는 로마 제국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임 때(41~54년) ‘하느님의 위대한 힘’이라 자칭하며 사마리아와 로마 등지에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며 교회와 맞섰다.(유스티누스 「호교론」 26) 시몬의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처음에는 당신 아들을 예수의 형상으로 이 땅에 보냈고, 나중에 사마리아에선 시몬으로, 다른 나라에선 성령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바오로 사도는 시몬 마구스를 비롯한 영지주의자들을 ‘양 떼를 해치는 사나운 이리’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라고 경계했습니다.(사도 20,29-30) 분명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헬레니즘 문화 특히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아 정통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 ‘이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영지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최상 신이 있다고 믿는다. 최상 신은 초월적이고 영적인 존재로서 단 한 분이시다. 이 최상 신에게서 여러 신적 존재들이 유출되었으며 이들이 모두 함께 천상계를 이루고 있다.
둘째, 인간을 포함한 물질 세계는 최상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보다 하등한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
셋째,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다. 물질로 이루어진 몸은 하급신인 창조주의 작품이고, 그 내면은 최상 신의 신적 섬광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급 신에 속하는 육체와 최상 신에 속하는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넷째, 신적 섬광, 곧 영이 육체 안에 갇힘으로써 인간의 참 자아인 영이 신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그 영은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고 잠에 빠져 버렸다.
다섯째, 인간 안에 깃든 신적 섬광이 깨어나는 것은 구원의 지식, 곧 그노시스를 통해서다. 그노시스는 믿음이나 착한 행실이나 계명의 준수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기껏해야 그노시스를 얻도록 사람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여섯째, 잠든 영을 깨우려 신의 사절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파견되었다. 빛의 사절 곧 구원자가 파견된 것은 사람의 영혼에 그노시스를 주기 위해서다.”(송혜경, 「영지주의- 그 민낯과의 만남」 34~35쪽)
사도들의 순교로 사도 시대가 끝나고 그의 제자들인 교부가 교회를 이끄는 시기가 열리면서 그리스도교는 본격적으로 ‘신앙의 유산’을 드러내고 보존해 갑니다. 영지주의와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교회는 ‘정통 신앙’과 ‘이단’을 구분하고, ‘신약 성경 정경’을 확정하며 ‘사도 전승 안에서 신앙의 규범’ 곧 ‘믿을 교리’를 확정해 나가지요.
이제 교회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성찰인 ‘교의(Dogma)’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