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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2 등록
성직자 영입에 헌신하고 순교한 조선 교회의 첫 밀사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17) 윤유일 바오로
복자 윤유일(바오로)은 조선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북경교구 성직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연락원(밀사)으로 성직자 영입 운동에 큰 역할을 한 청년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1760년 경기도 여주 점들(현 여주군 금사리) 출신이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유오(야고보)가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가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그는 스승 권철신(암브로시오)으로부터 가톨릭교회를 알게 됐고,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북경에 세 차례 방문해 조선 교회 소식 전달
윤유일은 1789년 권일신의 추천으로 북경교구와 연락을 취할 조선 교회 밀사로 선발됐다. 성격이 온순한 데다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 밝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교회를 위해 왕복 2700여㎞나 되는 고난의 길을 걸어서 1789년부터 1791년까지 세 차례 국경을 넘었고,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 북경에 가서 구베아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를 만나고 왔다.
일반적으로 조선 사신단의 일정은 북경까지는 가는 데 50여 일, 북경에 머무는 기간이 40여 일,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는 데 50여 일 해서 총 140~150일이다. 대략 5개월이 걸리는 셈이다. 1789년 윤유일이 속한 동지사의 정사 이성원이 귀국하자마자 정조 임금에게 보고하지도 못한 채 집에서 숨을 거둘 만큼 연행사 길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그는 1789년 12월 16일 북당에서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단장 로 신부를 만나 이승훈이 쓴 편지를 전했다. 편지에는 조선에서 세례를 받은 이가 1000명이 넘고 김범우(토마스)가 박해를 받아 유배를 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 교우들의 영적 선익을 위해 ‘가성직제도’를 운영하다 잘못임을 알고 중지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로 신부는 즉각 이 사실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알렸다.
1789년 12월 22일 구베아 주교를 만난 그는 로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조선 교회 첫 번째 견진성사자다. 구베아 주교는 그에게 ‘성직자 영입 준비를 하고 조상 제사를 금하라’는 내용의 사목 서한을 건넸다.
윤유일은 1790년 또 한 번 북경을 방문했다. 7월 9일 출발한 청나라 건륭제 팔순을 축하하는 사신단의 마부로 끼어 북경에 갔다. 그는 구베아 주교와 1791년 2월 국경에서 조선에 파견될 성직자를 만나기로 합의하고, 미사 경본과 미사 도구, 포도나무 묘목을 받아 입국했다.
안타깝게도 윤유일은 1791년 2월 국경 변문에서 접촉하기로 한 성직자를 만날 수 없었다. 길이 엇갈린 것이다. 윤유일과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마카오교구 출신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는 열흘 동안 봉황성과 책문을 오가며 서로를 찾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주문모 신부 피신시키고 체포돼 순교
1793년 봄, 윤유일은 다시 한번 성직자 영입 운동에 동참했다. 최필공(토마스, 복자), 최인길, 손경윤(제르바시오, 복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복자) 등이 이 일을 주도하고 있었다.
신해박해 이후 교회의 모든 일은 더욱 은밀하게 진행해야 했다. 윤유일이 너무 노출돼 있어 북경으로 가는 밀사는 지황(사바)이 맡기로 하고, 윤유일은 의주에서 성직자를 한양까지 안전하게 모셔오는 일을 수행하기로 했다. 필요한 경비는 강완숙(골룸바, 복자)이 댔다.
1793년 말 연행사 일행에 섞여 북경에 도착한 지황과 박 요한은 구베아 주교에게 신해박해 상황을 보고하고 성직자를 요청하는 윤유일의 편지를 전했다. 구베아 주교는 1794년 12월에 국경으로 성직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구베아 주교는 1794년 봄 조선 선교사로 제자인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복자) 신부를 선발했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12월 국경 봉황성 변문에서 지황·박 요한과 만나 압록강을 넘었다. 그가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날이 1794년 12월 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성야였다. 윤유일은 의주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12일 만에 한양 계동에 있는 최인길의 집까지 안전하게 모셨다.
하지만 그 기쁨과 안도도 잠시였다. 예비신자인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의 신분과 거처가 발각돼 1795년 6월 27일 체포령이 내렸다. 이 소식을 정약용(요한)으로부터 긴급하게 전달받은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은 주 신부를 급히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체포됐다. 포도대장 조규진은 주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이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 이들이 주 신부에 대해 침묵하자 정조는 중국인 신부의 잠입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이들의 처형을 즉각 명했고, 셋은 이튿날 새벽 옥 안에서 처형돼 시신들은 은밀하게 유기됐다.
구베아 주교가 기억하는 윤유일
35살 젊은 나이에 순교한 윤유일에 대해 구베아 주교는 이렇게 평했다. “저와 이 북경 교회는 지난 1790년 윤 바오로가 북경을 두 번이나 다녀갔을 때, 윤 바오로의 신앙심과 경건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당시 윤 바오로가 어찌나 놀라울 정도로 열심한 마음과 모습으로 견진성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성체성사를 받던지, 북경의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윤 바오로가 신입 교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복음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완숙한 경지에 이른 오래된 천주교 신자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절대 평범하지 않은 얼굴과 언행 그리고 덕망 있는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모두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1797년 8월 15일 구베아 주교가 사천교구장 생 마르틴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