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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 사설/칼럼
2023.06.01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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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아 평화칼럼] 메라키
조민아 마리아(미국 조지타운대 신학 및 종교학과 교수)


그리스어 ‘메라키(μερκι)’는 문자적으로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쓰이는 의미는 ‘어떤 행동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그 과정 속으로 녹아드는 것’을 의미하는, 깔끔한 번역이 어려운 단어다. 아마 우리말 중에는 ‘극진함’이란 단어가 가장 가까울 것이다. ‘메라키’는 중차대한 사안에만 적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멀리서 오신 손님을 위해 따뜻한 커피를 내리거나, 청소 노동자들의 수고를 덜기 위해 어지럽혀진 분리수거함을 정리하는 일상적인 행위 또한 마음과 몸을 다해 극진히 행한다면 ‘메라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어떤 일이건 ‘메라키’가 된다. 부모님의 주름지고 여읜 손을 잡아 드릴 때,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 친구를 위한 선물을 고를 때, 함께 사는 반려 동물의 순진무구한 위로에 고마움을 느끼며 먹이를 챙길 때,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사랑하는 행위와 순간 속에서 우리는 ‘메라키’한다. ‘메라키’는 보상을 바라거나 결과를 의식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저 그 행위와 순간에 나 스스로를 갈아 넣어 극진할 수 있으므로 족한 것이다.

사랑하는 모든 순간이 ‘메라키’인 이유는 그 사랑이 대체 불가능하며 유일한 까닭이다. 분산된 마음으로는 ‘메라키’ 할 수 없다.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뿐인 당신 앞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을 사는 것이 ‘메라키’이다. 만약 외모 때문에, 능력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당신과 함께하는 순간은 ‘메라키’가 되지 않는다. 물론 능력과 자질은 당신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지만, 사랑은 외면적인 것이건 내면적인 것이건 당신이 가진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내 마음에 들어온 단 하나의 사람이 당신이며, 내 심장이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당신이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많은 순간이 이 ‘메라키’로 채워졌을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 12,30)고 가르쳤지만,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가난한 히브리 민중들과 눈을 맞추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때, 그는 ‘메라키’했으리라. 간음한 여인을 변호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여 바닥에 무언가를 썼을 때, 그는 ‘메라키’했으리라. 슬픔에 잠긴 마리아와 마르타를 위로하려 그들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메라키’했으리라.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며 ‘내 몸과 피를 받아먹으라’ 말했을 때, 그는 터질 듯 아픈 가슴으로 ‘메라키’했으리라. 사랑했으므로, 사랑이므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메라키’했으리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바로 그런 말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의 심장이 선택했으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서 사랑하신다는 말이다. 부자이건 가난하건, 학력이 높건 낮건, 비장애인이건 장애인이건, 이성애자이건 성소수자이건, 좌파이건 우파이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에는 조건과 이유가 붙지 않는다. 손수 빚으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고유한 존재인 나와 당신을 위해 하느님은 우리가 숨 쉬는 매 순간 ‘메라키’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메라키’가 녹아 있는 세상의 어느 한 생명,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가 하느님을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이런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유일신 신앙은 다른 종교를 부정하고 배척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믿는 신이 내게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사랑임을 고백하라는 의미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전능자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 복을 내려주시고 죽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곳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조건과 이유와 목적을 떠나, 하느님이 먼저 심장을 열어 나를 사랑해 주시니 나의 심장이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메라키’인 나의 삶과 내 이웃의 삶에 극진함을 다하여 ‘메라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