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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 사설/칼럼
2024.07.0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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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홍택의 중고로운 평화나라] 개인이 직접 복수하는 시대의 귀환
임홍택 유스토(「90년생이 온다」 저자 · 명지대 겸임교수)

Q: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던데, 진짜 지옥이랑 비슷합니까?

A: 아니요.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진짜 지옥에서는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거든요.

이는 과거 한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글이다. 짧은 글 속에서 답을 하는 자는 지옥이란 본디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는 곳인데, 한국에서는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지 않으니 지옥보다 못한 곳이라는 자조 섞인 답을 하고 있다.

중고등학생들이 공부하는 교과서에 따르면, 정의는 크게 분배적 정의와 교정적 정의로 구분한다. 분배적 정의는 나라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이익과 부담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원칙과 관련이 있으며 기준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이에 반해 교정적 정의는 부당한 피해와 행위에 따른 불균형과 부정의를 법 집행을 통한 처벌로 바로잡는 것을 의미하기에, 분배적 정의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에 비하면 의미가 비교적 정확하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법 집행이 올바르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2020년 법제연구원이 개원 30주년을 기념하고 발표한 연구보고서인 <한국인의 법의식: 법의식조사의 변화와 발전>에 따르면 지난 30년 동안 우리 국민의 준법의식 수준은 대폭 높아졌지만 법 집행은 국민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2022년 작 「그건 부당합니다」에서 우리 사회의 교정적 정의가 국민 의식을 따라잡지 못하면 곧 개인이 직접 복수하는 시대가 귀환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말은 법치국가의 기본인 공적제재가 붕괴하고, 사적제재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나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사적제재의 나라를 넘어서 사적제재가 유일한 답인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한 유명 트로트 가수의 음주 뺑소니 사건이 화제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음주운전 사실이 명백해도 초고가의 수임료를 받는 똑똑한 변호사들은 법망을 피해갈 수 있는 물타기 수법 등을 지시하고, 검찰은 이에 화답한 듯 알코올 수치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음주운전을 기소하지 않았다. 법원은 피해자와의 (반강제적인) 합의와 공탁금, 초범과 반성을 이유로 최대 집행유예를 때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한국 사법체계, 부끄러운지 알아야 한다’고 사법부 개혁만을 또다시 외칠 것이다. 결국 도돌이표일 뿐이다. 처벌과 정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사적제재는 개인이라는 상대적 약자가 불합리하고 부당한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이 무기는 앞으로 더 조직화하고 매서워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든 방패는 원래의 방어 용도로 사용되겠지만, 간혹 누군가의 머리를 찍는 공격 용도로도 변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벌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복수의 감정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파이먼 영국 배스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저서 「복수의 심리학」을 통해 우리 인간이 왜 용서보다 복수에 열광하는지 연구했다. 그의 답은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복수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복수는 인간의 끈질기고 강력한 욕구 그 자체인 동시에 인간 본능에 숨어 있는 정의 구현의 형태’다. 단지, 인간 사회의 문명화가 이뤄지면서 국가가 공권력의 힘으로개인의 복수를 대신해주는 형태가 지속됐다고 지적한다. 개인에 의한 ‘직접 복수’의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국가에 의한 ‘간접 복수’의 형태로 변화했다는 의미다. 수세기 동안 겨우 만들어낸 간접 복수가 직접 복수로 바뀌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본인 용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우리가 특정 역할을 할 수는 없더라도 처벌과 용서라는 논의의 물꼬를 틀 시기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