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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 사설/칼럼
2024.11.2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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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빈 평화칼럼] 10살 소녀가 유서를 쓰다
서종빈 대건 안드레아(논설위원)

제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의 참화 속에 무방비로 죽음을 맞은 한 어린 생명의 유서를 접했다. 가슴이 시리고 분노가 치밀어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지난 3일 아랍권 대표 언론사인 ‘알자지라’에 실린 ‘어느 가자 어린이의 유서’란 제목의 기고문이다.

주인공은 집에 있다가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지난 9월 30일 숨진 10살 팔레스타인 소녀 ‘라샤’.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고 장난감을 갖고 놀아야 할 어린아이가 왜 유서를 썼을까? 유서에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무기력, 가족 사랑의 순수함이 절절히 담겨 있다.

“제가 순교자가 되거나 죽는다면 제발 저 때문에 울지 마세요. 당신의 눈물이 저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니까요. 제 옷가지는 필요한 분들에게 나눠 주세요. 액세서리는 OOO 등에게, 구슬 상자는 OOO 등에게 주세요. 한 달 용돈 50세켈은 OOO 등에게, 동화책과 공책은 OOO, 장난감은 OOO, 그리고 제 오빠 아흐메드에게 야단치지 마세요. 부디 제 바람을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라샤의 유서)

라샤와 연년생인 11살 오빠 아흐메드의 집은 지난 6월 10일 처음 폭격을 당했다. 그때는 가까스로 살아나 전쟁의 두려움과 굶주림 속에 살았지만 석 달 뒤인 9월 30일 집이 또다시 폭격을 당해 두 오누이는 얼굴의 반쪽을 잃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라샤의 유서는 오빠와 같은 무덤에 묻힐 때까지 가족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기고문을 통해 유서를 알린 사람은 라샤의 삼촌이었다.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 이후 13개월 동안 무고한 어린이들의 희생이 계속 늘고 있다. 1만 6700명의 어린이가 살해됐고 1만 7000명의 어린이가 부모를 잃었다. 알자지라는 지금 가자지구에는 아포칼립스(세상의 종말)가 전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엔 사무총장은 ‘인종 청소를 막아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고, 이스라엘 사학자는 “홀로코스트에서 이스라엘은 무얼 배웠느냐?”고 비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고처럼 ‘전쟁은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모두의 패배’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어린이 살해는 미래 파괴이자 포기다. 교황은 전쟁의 첫 피해자인 어린이와 가족이 전쟁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전쟁 종식을 매일 호소한다.

전쟁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어린 자식의 온기 없는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부모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공포와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교황은 “배우자나 부모를 잃은 분들을 위한 말은 있지만, 자녀를 잃은 부모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은 없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자식 잃은 참척(慘慽, 자손이 부모·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의 고통을 위로할 수 없고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의 고통을 책임감 있게 돌볼 것을 교황은 권고한다.

지금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극소수 권력자의 탐욕이 빚은 비극이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다. 아직도 수많은 어린이의 유서가 전쟁 잿더미 속에 묻혀 있고 아이들은 어둠의 공포 속에 유서를 쓰고 있다.

유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러나 라샤처럼 수많은 어린이가 전쟁의 두려움에 유서를 써야 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정작 유서를 써야 할 사람은 전쟁 범죄자들이다. 전쟁과 권력· 탐욕을 나누는 유서가 아닌, 죽음을 앞두고 주님 앞에 설 죄인의 심정으로 유서를 써야 한다.

전쟁 종식을 외치며 평화를 갈망하는 온전한 인류의 분노와 기도가 아쉽다. 위령 성월을 지내며 유산 배분을 위한 개인 유서가 아닌 인류 공멸의 위기에서 나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해 성찰하고 나누는 유서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