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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특집기획
2024.11.2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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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홍수로 유실된 북한산 ‘산영루’ 마지막 모습 사진에 담아
[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7. 북한산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크뤼거 독일 총영사와 함께 1911년 6월 5일 북한산 산행을 하다 잠시 쉬고 있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독일 총영사 크뤼거 초청으로 북한산 산행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6월 5일 독일 총영사 크뤼거 박사의 초청으로 북한산 산행을 했다. 크뤼거는 1907년 6월 6일 부임해 1914년 서울 주재 독일 영사관이 철수할 때까지 총영사로 활동했다. 그는 고종과 순종 황제 등 대한제국 고위층과 친분을 쌓으며 순종이 영사관 직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외교 업무보다 자국의 통상 이익을 챙기는 데만 앞장섰다.

그 단적인 예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6부에 나온다. 극 중 인물들이 고종의 중국 상해 덕화은행 예치금 증서를 찾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고종은 황실의 통치자금을 일본에 뺏길 것을 예상해 1903년 12월 2일 덕화은행 책임자 부제(J. Buse)를 비밀리에 불러들여 총 51만 8800마르크에 해당하는 16.3㎏ 금괴와 현금 21만 8500엔을 예치했다. 덕화은행은 고종의 통치자금을 독일 베를린에 있는 디스콘토 게젤샤프트 은행에 ‘대한제국 국고 유가증권’이라는 이름으로 거치했다.

이후 2년 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자 고종은 1907년 6월 15일부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강제 침탈을 고발하고 국제 사회에 대한제국의 자주권 회복을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1907년 7월 20일 고종을 퇴위시켰다.

조선통감부는 고종이 어떻게 유럽까지 상당한 비용을 들여 특사를 보낼 수 있었는지 수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의 비밀 통치자금이 외국 은행에 숨겨져 있는 사실을 알아내고 부채 상환 명목으로 압수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도 서둘러 예금 환수를 시행했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 주동자 중 한 명인 미국인 호머 헐버트에게 1909년 8월 예치금 서류와 함께 전액 인출 위임장을 써줘 돈을 찾게 했다. 헐버트는 곧장 상해 덕화은행에 찾아갔으나 이미 한발 늦었다. 덕화은행이 일본에 돈을 넘겨주고 일본의 나베시마 외무총장이 서명한 영수증만 남아있었다.

이토록 일제와 조선통감부가 고종의 비밀 통치자금을 발 빠르게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은 크뤼거 총영사 때문이었다. 크뤼거가 고종의 비밀 자금을 조선 통감부에 알려줘서다. 일제는 헐버트가 덕화은행을 찾아가기 1년 6개월 전에 이미 고종의 통치자금 전액을 찾아갔다. 조선을 사랑했던 베버 총아빠스는 크뤼거의 이러한 만행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1911년 촬영한 북한산 중성문. 북한산성 대서문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이중 방어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중성문·산영루·중흥사 거쳐 문수봉 오른 듯

어쨌든 베버 총아빠스는 카시아노 니바우어 신부 등과 함께 아침 7시 서울 정동의 독일 영사관저(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크뤼거 총영사를 만나 인력거를 타고 창의문을 빠져나와 북한산으로 향했다.<사진 1> 니바우어 신부는 한국에 첫 번째로 진출한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선교사 중 한 명으로 빌렘 신부에게 우리말을 배워 문답식 우리말 교리서와 청소년 잡지를 출간하는 등 청소년 사목에 열의를 보인 사제였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크뤼거 총영사와 함께한 북한산 산행 구간은 기록에 없어 정확하진 않지만, 기행문과 사진으로 보아 북한산성 중성문에서 산영루·행궁터·중흥사·대성문을 지나 문수봉에 올랐다가 대남문으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싶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는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大西門)’이 없기 때문이다. 베버 총아빠스의 북한산 산행 구간 또한 겸재 정선의 ‘노적봉’ 그림에서 만날 수 있다.

북한산은 부아악(負兒岳)·횡악(橫岳)·화악(華岳)·화산(華山)·삼각산(三角山)으로 불러왔다. 베버 총아빠스는 제일 먼저 북한산성 성벽을 만났다. 중성문(中城門)이다.<사진 2> 중성문은 북한산성 대서문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이중 방어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이 문 안쪽이 북한산성의 내성(內城)인 셈이다. “이 성벽은 북한산을 견고한 요새로 변신시켜, 유사시 성내 사람들의 피난처 구실을 했다. 협소한 지세와 비탈의 급경사 덕분에 산성이 읍성보다 방어와 안전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북한산의 험준한 뾰족바위 뒤편 산곡에 안전한 방어망을 구축하려는 의도로 궁궐도 이곳에 지었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93쪽)
 
<사진 3> 북한산 중흥사. 1915년 홍수로 유실됐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중흥사 사진은 유실 이전 마지막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4> 북한산 산영루. 이 사진 역시 1925년 홍수로 유실된 산영루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 하겠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구간별 안내판에 베버 총아빠스 사진 소개

중성문을 통과해 26기의 북한산성 선정비를 지나면 중흥사(重興寺)가 나온다.<사진 3> 북한산성의 모든 길은 중흥사로 통했다고 한다. 겸재가 그린 노적봉 바로 아래에 있는 절이 중흥사다. 지금은 1915년 홍수로 유실돼 그 터만 남아있고 그 옆에 새로 지은 사찰이 있지만,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다행히 고려 말 때 중수한 유서 깊은 중흥사를 볼 수 있었다. 중흥사 앞에는 무기와 식량을 관리하던 중창(中倉)이 있었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중흥사 계곡 산영루(山映樓)에서 잠시 머물렀다.<사진 4>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지은 산영루에서 계곡 물에 비치는 북한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베버 총아빠스가 사진에 담은 산영루는 1925년 홍수 때 유실됐다.(경기도 기념물 223호. 2015년 고양시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복원) “골짜기의 솟은 바위가 멋진 풍광을 연출했다. 그런 곳이면 꼭 기와로 지붕을 이은 정자가 있었다. 크뤼거 박사는 그중 한 곳을 택해 정성껏 음식을 차렸다. (···) 각지고 모난 북한산 봉우리들은 오를수록 험한 급경사의 암벽군을 형성했다. 풍우에 검어진 성벽이 산을 휘감고 부서진 성가퀴가 비바람에 맞서고 있었다. 저 아래 누른 들판이 넘실거렸다. 들판 사이로 황톳빛 언덕이 두더지가 파낸 흙더미처럼 솟아올랐고, 나지막한 지평선에는 푸른 산안개가 아련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94~495쪽) 드디어 솔숲을 지나 문수봉에 올랐다. 해발 727m의 문수봉은 북한산 남쪽 중심 봉우리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대남문 가까이에 있는 문수봉에서 북한산의 모든 봉우리와 능선을 조망하고, 대남문을 통해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하산했다.

북한산에 가면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의 흔적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산행 구간별 안내판에는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사진이 소개되고 있다. 혹 북한산 산행을 한다면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베버 총아빠스의 발자취를 느껴보길 바란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