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주 동안 우리는 전례 시기에 맞춰 교리서 제3부 육의 부활 편을 공부하면서 부활의 개념을 좀 더 선명하고 새롭게 정립했다. 이제 멈추었던 제2부 마음의 구원편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하신 예수님 말씀으로 돌아가자.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한처음과 더불어 몸 신학을 푸는 열쇠다. 간결한 문장 같지만 이 말씀의 정황과 의미는 매우 폭넓고 깊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사이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이혼으로 우리를 한처음, 즉 창세기 1장과 2장에 옮겨 줬듯이, 이 말씀도 창세기 3장까지 올라가야만 말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한처음 인간은 기뻐하며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라고 고백한다.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처음으로 보인 자신들의 내적(마음) 상태와 거기에서 변화된 마음 상태를 행위로 드러낸 표현이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지각하는 마음은 도덕의 안내자로 내적 진리를 말하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고백은 두려움 때문에 두 가지를 잃어버렸음을 드러낸다. 하나는, 하느님 모상에 대한 원초적 확신을 잃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한 것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연결할 수 없게 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 대한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신적 시각의 참여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다"에 장애가 들어왔고, 그로 말미암아 심오한 평화와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됐음을 말한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의 존재요 선물이 아님을, 창조된 선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 모습 그대로임을 볼 수 없게 됐다. 이는 인간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변화됐다는 뜻이다. 타자는 나를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관계로 변하게 됐음을 말한다.
이는 원고독에서 타자에게 향했던 몸-인격의 통합체로서의 유일한 존엄성이 위협받는 상황이다.(28과 2항) 결국 마음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자신의 인격이 갖는 가치의 존엄성도 타자의 존엄성도 위협한다. 몸으로 표현되는 하느님 모상인 그의 초월적 조직의 일부가 명백히 땅의 지배에 놓이게 된 것이다.(27과 4항)
이 사실은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품위, 피조물임에도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그분의 상대인 너로, 곧 책임 있는 주체이자 당신과 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동반자로 부르신 그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절대성에 참여하도록 인도한 그것을 땅에 묶어버린 것이다. 언뜻 보면 부끄러움은 어떤 외적인 사실이나 마음과 감정의 상태를 감추려는 경향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분명 인격과 관계된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은 인격의 존재가 내적이라는 사실, 인격은 자기 고유의 내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격과 결부되어 있는 부끄러움은 인격의 성장과 그 궤를 함께한다.
"제가 알몸이기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원초적 부끄럼은 그 자체 내에서 몸이 일으킨 구체적 굴욕의 표징들, 즉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 상황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나 자신과 싸우고, 내 자신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고백록」 VIII, X, 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