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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특집기획
2025.06.0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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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환경에서도 일손 도우며 신앙 키워가는 교우촌 아이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1. 일손 돕는 아이들



‘들음’과 ‘봄’은 신앙 성장시키는 자양분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랑’이라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완전한 사랑에 대한 신앙이며, 그 사랑의 결정적인 힘, 곧 세상을 변모시키며 시간을 비추어 주는 사랑의 능력에 대한 신앙입니다.”(「신앙의 빛」 15항)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믿게 됨으로써 예수님 안에 계시된 하느님 사랑 안에서 신앙을 성숙시켜 간다. 요한 복음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우리 삶 안에 맞아들이고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 안에서 그분과 결합되어 그분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걸을 때 비로소 그분의 존재를 믿게 된다고 가르친다.(요한 2,11; 6,47; 12,44 참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대물림한다는 것이다. 가족 간 사랑 안에서 믿음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가르친다.(로마 10,17) 조부모와 부모가 자녀에게 들려주는 성경 말씀을 통해 신앙의 순종을 전수한다. 또 믿음은 ‘봄’으로써 성장한다. 어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봄으로써 자녀들은 신앙에 젖어든다. 따라서 ‘들음’과 ‘봄’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산속 깊은 골짜기에서 교우촌을 이루며 신앙을 지켜온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 환경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교우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특히 황량한 산중 고독 속에 조부모·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을 대견해했다. “그들은 고통과 궁핍 속에 자랐고 일용할 양식을 척박한 대지에서 힘겹게 얻었다. (?) 뜨거운 믿음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저 눈동자들! 이 산골짜기에서 신앙을 구했고, 신앙은 그들의 전부였으니 그들이 이 산골짜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 191~193쪽)



이번 호에는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가족을 도우며 신앙을 키워가던 교우촌 아이들의 모습, 그중에 일손 돕는 아이들 모습을 살펴본다.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담뱃대에 담뱃잎을 담고 있는 프란치스코와 체칠리아’, 랜턴 슬라이드,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능숙하게 담뱃잎 재워주는 두 어린아이



1911년 5월 16일 황해도 청계동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카메라 셔터가 고장 날 정도로 신나게 촬영했다. 그는 이날 점심 식사를 막 마쳤을 때 두 어린아이가 자신과 일행들에게 담뱃대에 담뱃잎을 재워주는 걸 촬영했다.<사진 1>



“우리의 멋들어진 여름 식당은 해가 어디 걸려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침은 주로 제의실 입구에서 함께 먹고, 점심은 성당문 옆 마루에서, 저녁은 아예 밖으로 나가서 먹는다. 최고의 명당자리는 역시 야외에 있다. 그곳에는 봄날의 훈풍이 불고,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활기 넘치는 아이들과 진중한 남자들끼리 넉넉히 함께할 수 있다. 그들은 묵묵히 지켜보는 것으로 우리의 식사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한다. 사제가 기꺼이 그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기에 기쁘고, 종일토록 책임과 압박에 시달리다가 한때나마 사제 곁에 머무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기에 기쁜 것이다. 점심 식사가 끝났다. 빌렘 신부 복사의 아들 프란치스코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 마치 평생 담배를 피운 사람처럼 능숙하게 우리 담뱃대에 담배를 담아 주었다. 그때 불청객이 나타났다. 사리원에서 온 순사들인데, 하나는 일본인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인 통역이었다. 빌렘 신부를 만나러 왔다지만 우리 때문에 온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우리 신원을 확인하려 들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 421~422쪽)



능숙하게 담배를 재우는 두 아이는 ‘프란치스코와 체칠리아’다. 사내는 빌렘 신부의 복사 안봉근(요한 세례자)의 다섯 살배기 ‘창익’이다. 세례명이 체칠리아인 여아는 누구의 자녀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 안봉근 일가의 친족일 것이다. 베버 총아빠스가 놀라워할 만큼 아이들이 능숙하게 담뱃잎을 재우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담배 시중을 든 모양이다.



오늘날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성당 마당에서 사제들과 선교사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가 담배를 권해드리는 어린아이들이 천진하기만 하다. 이 아이들이 집안에서 얼마나 가정교육과 신앙교육을 잘 배웠는지 유추할 수 있다. 아마 담뱃잎을 재워주는 것이 아이들에겐 성직자·수도자들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벌멍덕을 든 아이들과 벌통’,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아기를 업은 소년과 종이 우산을 든 아이’, 랜턴 슬라이드, 1911년 5월 황해도 해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집안 일 돕는 어린아이들의 봉사는 겸손



베버 총아빠스는 황해도 청계동 한 가정 뒷마당에서 벌멍덕을 든 아이들을 촬영했다.<사진 2> 양봉은 수도자들의 주요 노동 중 하나여서 자연히 관심이 갔을 것이다. 베버 총아빠스와 동행하며 한국의 풍물을 촬영한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는 1918년 서양 양봉 기술을 한국인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양봉요지」를 저술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봉 교육교재다.



벌멍덕은 주로 우리나라 토종 꿀벌을 키울 때 쓰는 도구다. 분봉해서 벌통을 옮길 때 멍덕 안에 꿀을 발라 벌들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들어가 자리 잡도록 하는 데 쓰인다. 지푸라기를 꼬아 고깔 모양으로 만든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아이들은 담장 앞 짚 주저리를 씌운 나무 벌통 곁에 서 있다. 오랫동안 양봉을 해본 탓인지 벌통 옆에서도 겁을 내지 않는다. 짚 주저리 속 벌통 위에는 벌이 꿀을 저장하고 새끼를 칠 수 있도록 뚜껑을 덮어뒀다. 벌멍덕을 손에 쥔 아이가 아마도 책임지고 벌을 키우는 모양이다.



집안 일을 돕는 어린아이들의 봉사는 겸손하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가장 단순한 일을 맡기지만 아이들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의 정신과 의지, 정서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교감한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청계동을 방문하기에 앞서 1911년 5월 11일 황해도 해주의 명망 있고 유복한 한 교우 집에서 묵었다. 집 주인은 집 일부를 경당으로 꾸몄고, 사제관으로 방 2개를 증축해 놓았다. 베버 총아빠스는 이곳에서 ‘아기를 업고 있는 아이와 종이 우산을 들고 있는 아이’를 촬영했다.<사진 3> 아마 신심 깊은 이 집 주인의 자녀일 것이다. 맏이로 보이는 앳된 소년이 막내를 들춰 업고 우산을 든 동생을 돌보고 있다. 베버 총아빠스가 든 카메라에 호기심을 보이는 둘째와 달리 형은 무심하다.



어쩌면 베버 총아빠스는 이 사진으로 형제 간 신뢰를 표현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신뢰는 찰나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충실을 기반으로 한다. ‘큰 형이 우리를 돌보고 있구나’ 하는 절대적 확신이 있어야만 그 자리가 평안해진다. 신뢰는 형제애의 품위를 드높인다.




<사진 4> 작가 미상, ‘장작 패는 소년’, 유리건판, 1920년대,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늠름하고 당당하게 장작을 패는 소년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는 ‘장작 패는 소년’ 사진이 보관돼 있다.<사진 4> 누가 어디서 촬영했는지는 기록이 없고, 1920년대 사진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사진 속 도끼를 든 소년은 늠름하다. 눈매도 나이에 비해 예사롭지 않다. 소년 뒤로 수북이 쌓인 생소나무를 보아 아마도 겨울나기 땔감을 준비하는 듯하다. 한 가족의 따뜻한 겨울나기가 이 소년의 도끼질에 달려 있다. 소년의 얼굴에 알듯 모를 듯 행복감과 자신감이 피어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도끼를 든 당당함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낸다.



당당함은 자신이 충만할 때만 드러나는 기품이다. 대물림으로 켜켜이 쌓인 신앙의 확고함은 세상 안에서 당당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 부모와 함께 실천하며 성숙한 아이들의 신앙은 교회뿐 아니라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생명을 불어넣는 활력이다. 그래서 교회는 아이들을 ‘보화’라며 소중히 여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