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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교육으로 나라 잃은 한국인의 민족혼을 일깨우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6. 선교 베네딕도회

1909년 2월 남자 수도자 2명 서울에 첫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인생의 목적은 하느님 뜻 안에서 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한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기도와 사랑만으로 성화의 열매를 맺기엔 부족하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한다. 이 가르침대로라면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자유로이 활동하시도록 삼위일체 하느님께 맡겨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봉헌의 삶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으로 축성되는 것이다.
수도자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축성된 삶의 표본이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느님에 의해 성화되고, ‘오소서! 성령이여’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본성과 신비적으로 일치하는 은총의 삶을 살아간다.
하느님과 완전히 결합한 삶은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계시의 삶’이다. 그들이 일상에서 일궈내는 ‘성덕’은 성령의 이끄심을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덕의 원형이며 모범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미사 대영광송을 통해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완연한 하느님의 성전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인의 전형인 남자 수도자 2명이 1909년 2월 25일 서울에 첫발을 디뎠다. 성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보니파시오 사우어·도미니코 엔스호프 신부다. 이들은 1908년 9월 14일 독일 남부에 자리한 상트 오틸리엔 대수도원을 방문했다. 사범학교와 기술학교 등 한국 가톨릭교회 교육 사업을 맡아달라는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간청에 의해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9년 사우어 신부는 한국 파견 선교사로, 엔스호프 신부는 수도원 부지 매입 등 한국 진출에 필요한 전반적인 실무를 파악하기 위해서 왔다. 그해 7월 9일 지금의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 자리에 수도원 부지를 매입했고, 12월 6일 백동 수도원 건물이 완공됐다. 그리고 엿새 뒤 12월 11일 백동 수도원은 원장좌 자립 수도원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고, 사우어 신부가 초대 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12월 28일 카시아노 니바우어·안드레아 에카르트 신부, 파스칼 팡가우어·마르티노 후버·콜룸바노 바우어 수사가 제1차 한국 파견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했다. 애석하게도 바우어 수사는 당시 한국에서 창궐하던 콜레라에 걸려 한 달 만인 1910년 1월 26일 선종했다.

선교 베네딕도회, 사범학교·실업학교 운영
“베네딕도회원들은 젊었고? 이들은 교구 신부의 검소한 삶에 끼어들려고 온 것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옛날 수도원들 같은, 그리스도교 문화의 한 건실한 중심을 건설하기 위해 뮈텔 주교의 초청으로 서울에 왔다. 그들은 수도원을 건립하고, 성당·농장·작업·기숙사와 체육관 등을 갖춘 사범학교와 실업학교를 운영해야 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인원이나 재정상 이유로 이룰 수 없었던 이 과업은 한국의 교회 생활에 획기적 전환점임이 분명했다. 서울에 신앙이 뿌리내린 지 한참 뒤인 1887년에 용산에 현지인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생겼다. 1888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출해 사회사업을 펼쳤다. 이제는 베네딕도회가 탄탄한 가톨릭 중심을 건설하고 여러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가톨릭교회를 은둔에서 끌어내어 교회 생활을 심화시키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분도통사」 72~73쪽)
1911년 2월 21일 카니시오 퀴겔겐·칼리스토 히머 신부, 마르코 메츠거·힐라리오 호이스·요셉 그라하머·베드로 게르네르트 수사가 제2차 한국 파견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과 함께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처음 한국을 방문해 그해 6월 25일까지 머문다. 베버 총아빠스가 한국에 머물 때 성 비오 10세 교황은 4월 8일 조선대목구를 서울과 대구대목구로 분할했다. 그리고 백동 수도원은 1913년 5월 15일 오틸리엔 연합회 두 번째 원장좌에 이어 두 번째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됐고,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임명됐다.<사진 1>
한국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시도록’(수도 규칙 57,9) 기도하고 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1920년 원산대목구를 설정, 성 베네딕도회에 사목 관할권을 위임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사우어 주교아빠스를 임명했다. 베네딕도회는 원산에 선교본부를 설립하고, 함경도와 연길·간도·의란 지역 복음화에 박차를 가했다.<사진 2>

한국인 사제 양성과 초등·고등 교육에 심혈
“매년 개종자들이 평균 5000명에 이릅니다. 더 많은 신앙의 사도가 있다면 그 수가 열 배는 될 수 있으리라고 선교사들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든 신부가 하나같이 아주 방대한 구역을 맡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마을은 일 년에 겨우 한두 차례밖에 방문할 수 없습니다. 많은 관할 구역에서 그리스도인이 많이 증가했고, 그들을 돌보느라 선교사의 기력이 완전히 바닥나고 있습니다. 훌륭한 뜻이 있어도 선교사가 외교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다른 선교 단체들에 비해 개종자가 많은 것은 이곳 선교사들 자신의 노고의 직접적 성과라기보다 그리스도인들의 감화와 훌륭한 표양의 결과입니다.”(「분도통사」 107쪽)
“우리 대화를 들은 어떤 한국 사람이 나에게 ‘신부님!’이라고 말을 걸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 도시에 가톨릭 신자 친구가 있고, 자신은 몇 년 전에 교리 공부를 시작했지만, 교리 수업을 받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집에 가 보니 식구가 여섯이었다. 이처럼 하느님의 도움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던 가톨릭 신자 가정을 셋이나 찾아냈다. 나는 청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 성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버림받은 어린양들이 목자를 고대하는 지역이 아직 여러 군데 있을 것이다.”(「분도통사」 208~209쪽 안드레아 에카르트 신부 보고서 중)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덕원 신학교를 비롯한 원산·연길 등 선교 지역 곳곳에 해성 학교를 설립, 한국인 사제 양성과 한국민의 초등·고등 교육에 온 정성을 쏟았다.<사진 3>
“한국인 수가 일본인의 세 배에 달하지만, 한국인 학생은 일본인 학생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는다.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배회하는 아이들이 꽤 많다. 배움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이 매우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자들뿐 아니라 외교인들까지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와 학교를 열어 달라고 조른다. 벌써 소년 30명이 입학을 신청했다. 굳은 의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은 입학 신청과 동시에 교리문답서까지 사갔다.”(「분도통사」 277쪽, 1921년 10월 원산 연대기)
한국의 선교 베네딕도회는 자신의 사목지를 은둔처로 삼아 나라를 잃은 한국인에게 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웠고, 인생의 가치가 하느님과 일치함에 있음을 가르쳤다. 하느님을 찾는 이 ‘주님의 학원’ 전통은 지금까지 왜관 수도원을 통해, 또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소장 한국 문화 유산 환수와 식물 표본 반환 등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