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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 일반기사
2025.09.2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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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돋보기] 칼레 신부의 국내 사목지
이학주 요한 크리소스토모(신문취재팀 기자)
34년을 살면서 한 개인의 삶에 이토록 천착한 적은 처음이다.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5회에 걸쳐 연재한 ‘박해 속에 피어난 우정’ 기획 기사 이야기다. 1861~1866년 조선에서 사목한 교황 파견 선교사였던 파리외방전교회 칼레(Calais) 신부의 발자취를 좇는 여정이었다.

지난 7월 15~25일 칼레 신부와 복자 박상근(마티아) 후손들과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프랑스 이곳저곳을 누빈 결과물이었다. 현지에서 보고 들은 것 외에도 한국에 돌아와 조사한, 칼레 신부에 관한 정보를 그야말로 쏟아부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알았지만, 기사에 미처 넣지 못한 내용이 있다. 칼레 신부의 국내 사목지다. 여러 교회사 자료는 칼레 신부가 1861년 ‘주님 봉헌 축일(성모 취결례) 구역’, 즉 경상도 서부를 처음 배정받아 그곳에서 줄곧 사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칼레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와 고향에 보낸 편지에 적힌 내용은 달랐다. ‘주님 봉헌 축일 구역’은 과거 베르뇌 주교가 맡은 구역 절반, 곧 미리내를 비롯한 한강 이남 경기도 42개 교우촌이었다. 이는 가장 나이가 어리고 늦게 사제품을 받은 선교사를 위한 구역이었는데, 면적이 좁아 이동하기 쉬운 데다 서울과 가까워 베르뇌 주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였다.

이어 1864년 칼레 신부는 같이 조선에 입국한 조안노 신부의 구역(충남 공주 일대)까지 담당했다. 앞서 그가 둠벙이 교우촌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해 말, 칼레 신부는 막내 선교사 오메트르 신부에게 ‘주님 봉헌 축일 구역’을 물려줬다.

1865년 들어 칼레 신부는 공주를 떠나 4개 도(경기·강원·충청·경상)에 걸친 광대한 구역을 맡게 됐다. 베르뇌 주교 명에 따라, 병으로 쇠약해진 페롱 신부와 사목지를 맞바꾼 것. 문경 등 현재 안동교구 관할 구역인 경북 북부에서도 이때부터 활동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