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특집기획
2026.01.14 등록
1997년 파리, 그날의 ‘영적 유산’을 삶으로 증명
[ 세계청년대회 개최지를 가다] 1997 파리 세계청년대회 (2) WYD로 삶이 달라진 이들
‘오늘도 허탕이다.’ 뱅상 모코르(49)씨는 4~5년 전까지만 해도 퇴근 후 골동품 가게를 들르는 게 일상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담긴 한 성물을 수년째 애타게 찾아다녔다.
2025년 12월 2일 프랑스 파리대교구 클리냥쿠르 성모성당에서 만난 모코르씨는 자랑스럽게 재킷 속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를 보여줬다. 그가 수년간 그토록 찾던 1997 파리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WYD)를 기념해 제작한 십자가였다. 젊은 시절의 파리 WYD 기억으로 더욱 투철한 신앙생활을 이어온 그는 “2020년 선종 사제들의 유품을 판매하는 한 골동품 행사에서 마침내 이 십자가를 찾았다”고 말했다. 한 사제의 유품으로 파리 WYD 십자가가 시장에 나오면서 기적적으로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세계청년대회는 단 일주일 남짓 열리는 행사이지만, 누군가에겐 이처럼 빛나는 추억을 남겨주기도 하고, 인생의 방향을 극적으로 전환하는 거대한 사건이 되기도 한다. 그 기억은 힘든 시기 위안이 되기도 하고,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나아가서는 부르심을 느끼고 평생에 걸쳐 신앙의 가치를 살게 하는 매개가 된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향한 여정에서 역대 WYD 개최지를 찾아 그 열매를 조명하는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과 2027 서울 WYD 조직위원회 공동기획 ‘개최지를 가다’. 1997 파리 WYD의 두 번째 편에서는 ‘WYD로 삶이 달라진 이들’을 만났다.
"우리는 교황님의 젊은이들입니다!"
“우리는 교황님의 젊은이들입니다!”
1997년 8월 21일 낮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프랑스 및 전 세계 젊은이의 첫 만남이 이뤄졌던 1997 파리 WYD 교황 환영행사. 교황이 제단에 오르자 에펠탑을 중심으로 운집한 수십만 젊은이의 환호와 기쁨의 함성이 파리 시내를 가득 메웠다.
교구대회와 홈스테이를 처음 도입한 파리 WYD에는 마지막 파견미사에만 100만 명 넘는 순례자가 모였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분이신 주님 아래 수많은 젊은이가 모인 모습에 전 세계가 주목했다.
산업혁명과 전쟁 이후 또 다른 외로움과 두려움의 시대에 직면한 젊은이들을 향해 교황은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 앞에 더 나아가라”고 끊임없이 독려했다. 이 순간을 가슴 깊이 경험한 이들은 약 30년이 흐른 지금도 투철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제단 위 가까이서 교황과 함께했던 청년 대표단은 더욱 진한 기억을 새기고 있다.
스틸스 프레스 에이전시=샤리오/아르날 촬영
젊은이의 신앙 열기로 장관을 이룬 광경을 지켜본 교황의 심정은 어땠을까. 수십만의 젊은이와 함께한 교황의 손은 의외로 떨리고 있었다. 교황의 초대에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한 걸음에 모인 젊은이들을 보며, 교황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 한 청년이 교황의 손을 잡았다.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제단 위 교황 곁에 있었던 오드 미르코비치(52)씨다.
미르코비치씨는 “교황님께서 젊은이들에게 그러셨듯, 그분께 조금이나마 안정감을 드리고 싶어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붙잡았다”며 “교황님께서 타 종교 대표들과 정교회 사제들에게 인사하실 때 제 옆에 서 계셨고,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동안 교황님은 계속 제 손을 잡고 계셨다”고 회상했다. 이후 대회 마무리 전 교황을 다시 만난 미르코비치씨는 교황과 포옹하며 잊지 못할 순간을 남겼다.
찰나였지만, 교황과 한 젊은이와의 따뜻한 모습은 이튿날 프랑스 각 언론에 일제히 보도됐다. 미르코비치씨는 “당시 대형 화면으로 이 순간을 함께 지켜본 모든 청년은 교황의 손을 잡은 저를 자신들과 동일시했다”며 “저를 통해 모든 청년이 교황님의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Esta es la juventud del Papa!”(우리는 교황님의 젊은이들입니다!) WYD가 열릴 때마다 대회 현장에서 들려오는 구호로, 교황과 함께하겠다는 젊은이들의 다짐이자 교황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외침이다. 교황과 젊은이들은 그렇게 서로를 위해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소통을 이어갔고, 이는 대회 때마다 이어지고 있다. WYD는 교황과 젊은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주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이요, 순례다.
그날 이후의 삶
이처럼 특별한 순간은 미르코비치씨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을 더욱 진지하게 바라보게 했고, 법학 교수이자 아동인권변호사로 살도록 이끈 전환점이 됐다. 그는 ‘대리모 제도의 보편적 폐지를 위한 카사블랑카 선언’에 법학 선임 강사로 참여했고, 현재 생명운동가로도 활동하면서 교회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 사회 곳곳에서 아동 기본권 증진에 힘쓰고, 배아 파괴를 부추기는 인공수정 같은 보조생식술·대리모 제도 철폐를 외치며 ‘생명윤리’의 가치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는 “교황님 손을 잡고, 그 의미를 실감했던 제 모습이 언론에 대서특필된 뒤 인생이 바뀌었다”며 “이후 매일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책임감을 갖고 살고 있다”고 했다.
“법조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 또한 하느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제 삶의 방식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 봉헌하려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 구조를 자연법에 더 가깝도록 이끌어야 함을 잘 압니다. 제가 아이들을 위해 하는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입니다.”
카린 라시디(55)씨도 “파리 WYD 당시 교황님과의 만남으로 삶의 큰 용기를 얻었다”고 증언했다. 주님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더욱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이웃에게 다가가는 용기였다. 라시디씨는 파리 WYD 이후 28년 내내 일상을 봉사로 채워나가고 있다. 본당 교리교사, 전례 봉사부터 시작해 몇 년 전부터는 카리타스 활동도 하고 있다.
라시디씨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비로운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WYD를 통해 깨달았다”며 “1997년 8월 22일 십자가의 길에서 교황님이 들려주신 어린 시절 이야기는 큰 울림을 줬다”면서 당시를 생생히 기억했다.
“교황님은 폴란드에서 노동자로 지내셨고,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를 겪으셨다고 했습니다. WYD 현장에는 고학력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죠. 그러나 그분께서는 세속적 조건과 상관없이 ‘미래는 여러분 손에 달려있고, 직접 행동할 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바뀔 것’이라고 모든 이를 아우르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단순한 메시지는 모두의 마음 깊이 와 닿았고, 젊은이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줬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파리 WYD를 통해 해방됐습니다.”
체험을 넘어 부르심으로
WYD 이후 사제의 길로 들어선 이도 만났다. 파리대교구 성 요셉 데 제파네트본당 주임 아르노 니콜라 신부는 젊은 시절 그토록 원하던 자국에서의 파리 WYD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오는 주교들을 맞이하는 평신도 봉사자였다. 국가별 고유한 문화를 품고 파리에 도착한 주교들의 모습은 그의 기억에 지금도 남아있다.
그 가운데 북아프리카에서 온 한 주교가 종교 박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주교는 봉사자였던 니콜라 신부에게 “십자가를 자유롭게 꺼낼 수 있어 기쁘다”며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당신과 함께하게 되어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다. 한 주교와 나눈 짧은 대화는 평신도의 교회 이해를 넓혀줬다.
니콜라 신부가 당시 회사에 휴가를 내고 WYD에 봉사하러 간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그를 놀렸다. 업무를 뒤로하고 종교 행사에 봉사까지 하러 가는 모습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도 흔치 않았다. 하지만 대회 후 회사에 복귀했더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동료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은 연일 보도된 WYD 모습을 지켜보고 교황의 행보에 큰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니콜라 신부는 “세속화된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하느님을 목말라한다는 사실을 그때 깊이 깨달았다”며 부르심의 계기를 전했다.
거룩한 부르심, 성소에 확실하게 응답하게 된 것은 10년이 더 지나서였다. 여느 때처럼 거리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료 급식소 ‘레스토 뒤 꾀르’(사랑의 음식점)에서 봉사하던 중이었다. 행려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던 어느 날, 누군가 그의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니콜라 신부는 “그 순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마음이 타올랐던 것처럼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름을 강렬히 느꼈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부르심을 느낀 것이다. 이후 신학교에 입학, 현재 사제로서 자신이 경험한 신앙의 깊은 가치를 전하는 사목에 매진하고 있다.
WYD에서 성소를 느낀 이들은 더 많다. 꼭 사제나 수도자가 되진 않더라도 WYD 현장에서 순례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느님 부르심을 느끼곤 한다. 2011 마드리드 WYD를 마치고 열린 ‘네오카테쿠메나도 길’(국제 사도직 단체) 성소 모임에서 “부르심이 있다면 일어나십시오”라는 한 마디에 수많은 청년이 제대를 향해 뛰어가는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성소를 느끼는 모든 순례자를 위한 영적 상담이 WYD에서는 꼭 필요하다.
파리 WYD에서도 성소를 느낀 참가자들이 신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이어졌다. 파리대교구 정보학술국 국장 로랑 스탈라 부르디옹 신부는 이미 1992년 신학교에 입학한 신학생이었다. 부르디옹 신부는 “당시 모든 신학생이 WYD 봉사자로 활동했다”며 “저는 성소에 관심을 갖거나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줬다”고 전했다.
부르디옹 신부는 WYD 기간 내내 생제르멩 데프레성당에서 성소를 느낀 젊은이들과 마주했고, 성소의 가치를 심어줬다. 이후 그는 파리대교구장이자 파리 WYD 조직위원장이었던 고 장 마리 뤼스티제 추기경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부르디옹 신부는 “뤼스티제 추기경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의 씨앗을 주기적으로 심어줘야 한다’고 늘 당부하셨다”며 “WYD는 젊은이들에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공동체성을 상기시켜주면서 동시에 큰 소속감과 보편성을 심어준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금 저와 WYD를 이야기하기 위해 멀리 한국에서 온 당신 또한 우리 파리 WYD의 유산”이라며 “WYD는 참가한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신앙의 도장을 찍는 사건”이라고 했다.
마음의 도장, 새로움 꿈으로
프랑스 생쇼몽 그리스도교연합 수도회 장상 마리 비안네 수녀는 1997년 8월 23일 롱샴 경마장에서 열린 파리 WYD 밤샘기도 현장에서 자신의 22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는 마음속 작은 성소와, 언니들처럼 성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열망 사이에서 갈등 중이었다. 마침 이성 친구의 고백을 받아 고민하던 때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비안네 수녀는 물리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시험을 준비 중이었고, 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파리 WYD 봉사자로 자원하게 된 터였다. 비안네 수녀는 “그때의 우리는 그저 또래들과 또 다른 모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들떴던 해맑은 청년이었다”며 “솔직히 마음 깊은 곳에서 저를 부르시는 목소리를 짐짓 외면하려 애썼던 것 같다”고도 했다.
비안네 수녀는 WYD 봉사를 위해 파리로 향하는 기차에서 한창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 「한 영혼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1997년 8월 24일 파견미사에서의 일이었다. “저는 교황님이 계신 자리에서 생일을 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어요. 장엄한 경험이었지요. 그리고 다음날 열흘간 밤낮없이 이어진 봉사와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으로 녹초가 돼있던 봉사자들에게 교황님께서 전한 감사 인사는 다시금 우리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교황님께서 수도자들에게도 다가가셨죠. 제가 마음속 깊이 열망했던 수도자들에게요!”
그리고 마침 파리 WYD 기간 중 교황이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를 여성으로서 세 번째 교회학자로 장엄히 선포했을 때, 생각지 못하게 그녀가 간직하던 부르심이 큰 확신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부르심을 외면할 순 없구나.’ 비안네 수녀는 “마치 모든 것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고 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여태 애쓴 것이 무색하게도 엄청난 행복이 저를 가득 채웠어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고 있었죠.”
비안네 수녀는 이후 영적 지도 사제와 면담을 통해 ‘교육’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임을 알게 됐다. 비안네 수녀는 “성 빈첸시오 드 폴이 설립한 수녀회는 학교를 통한 교육 사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며 “파리 WYD 이듬해인 1998년 2월 수녀회에 입회해 그해 7월 16일 갈멜산의 성모 마리아 축일에 서원했다”고 했다.
수녀가 된 뒤에는 교실에서 비신자인 학생들에게도 물리·화학뿐만 아니라 교리교육을 가르쳤다. 아이들과 소통하며 그들이 예수님과 만나도록 돕는 사도직은 비안네 수녀에겐 큰 기쁨이었다. 2014년에는 수녀회 장상으로 선출됐다. 비안네 수녀는 “파리 WYD는 수도생활이든 사제직이든 혼인이든 각자 부르심에 잘 응답하도록 은총을 선사했다”며 “WYD 유경험자로서 이후에도 많은 젊은이를 데리고 WYD에 참여했다”고 했다.
이후 그의 친구들도 아름다운 성가정을 이루거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수도자가 됐다. 비안네 수녀는 “저는 삶의 모든 것을 계획한 적 없지만, WYD는 많은 이에게 큰 깨달음과 계기를 선사한다”면서 “주님께서 각자에게 마련하신 사랑의 계획을 따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했다.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