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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특집기획
2026.01.27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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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문학은 한 몸… ‘복 많은 집’ 안주인, 남편과 함께 세례 받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문학을 통한 사도적 삶,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 (3) 하느님의 자녀 되어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복 많은 집’이라 불렸던 보문동 집에서의 박완서. 박완서디지털문학관 제공


동네서 ‘복이 넘치는 집’으로 불리던 때
감사와 두려움에 ‘종교 가져볼까’ 생각

비인간적 장례 문화에 회의 느끼다
천주교의 존엄한 장례미사에 마음 열어

신앙의 힘으로 아픔 치유하고
독자들에게 사랑과 용서의 가치 전해



‘복 많은 집’

박완서가 가정을 이루고 살던 서울 보문동의 한옥을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서울 잠실의 아파트로 이주하면서 집을 팔려고 내놨더니 내놓기가 무섭게 금방 팔렸더랬다. 새로이 아파트가 많이 생기던 때라 주택, 특히나 오래된 한옥은 인기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말 그대로 언제나 복이 넘치는 집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박완서는 당시로는 드물게 연애결혼에 골인하였는데 남편은 조용하면서도 아내의 말이라면 뭐든 다 좋다고 해주는 푸근한 사람이어서 부부간의 금슬이 좋았다. 자식들은 또 어떠한가. 오남매 가운데 누구 하나 속 썩인 자식이 없었다. 중고등학교부터 입학시험을 치러 보내던 때였는데 단 한 번도 낙방한 적이 없었고 좋은 대학교에 척척 붙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나이 마흔에 등단한 뒤로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는 일마다 잘되고 조금의 근심도 없는 생활이 이어지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일만 계속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호사다마라고 어쩌다 불행이 한 번 닥칠 수도 있겠지. 그러려면 어딘가 기댈 구석이 있어야 할 텐데. 종교를 한 번 가져볼까?’

넘치는 행복을 어딘가에 감사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간 공짜로 복을 마음껏 누리려 하느냐고 저 높은 곳 어디에선가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또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불행에 대비해 기도할 든든한 백 하나쯤 있어야지 싶었다. 나이가 들어서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의 집안에는 딱히 종교가 없었다. 그의 고향은 개성 인근의 ‘박적골’이라는 시골 동네였다. 워낙 깊은 두메라 일제강점기였는데도 일본 사람을 직접 본 일이 없었고 할아버지가 개성에 나가 사오신 물감으로 ‘덕국(德國, 독일)’이라는 나라 밖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 정도였다고 한다. 박완서의 할아버지는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남자아이는 서당에 보내 한문을 배우게 하고 여자아이는 집에서 한글을 배우게 하는 분이었다.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 간에 화목하며 남녀가 함부로 섞이지 않고 가난한 이를 측은히 여겨야 한다는 지극히 유교적인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그런 보수적인 집안에서도 당차게 자녀 교육을 서울에서 시킨 어머니는 근심이 있을 때면 장독대에 정안수를 떠놓고 빌었다. 밤하늘의 북두칠성에도 빌었다. 6·25전쟁을 겪으며 가족이 희생되는 아픔을 절에 가 달래다가 말년에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 이런 성장 배경 속에 박완서도 처음에는 한 가지 종교에 정착하지 못했다. 남편과 함께 처음엔 개신교 교회에 나가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 근처 성당을 찾게 된 것이다. 그가 세례를 받게 되자 ‘작가가 종교에 깊이 빠지면 문학에 소홀하게 된다’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종교와 문학은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종교와 문학으로 개인의 아픔을 치유하였고, 이는 가톨릭 신자는 물론 신자가 아닌 일반 독자에게도 힘과 용기를 주었다. 문학의 힘을 빌려 사랑과 감사, 회개와 용서 등 종교의 가치를 세상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종교의 힘으로 작품은 더욱 풍성해졌다. 박완서에게 종교와 문학은 한 몸이었다.

 
어머니 홍기숙 여사.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 덕에 박완서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현대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6·25전쟁으로 아들(박완서의 오빠)을 잃고 고통받다 말년에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됐다. 이러한 어머니의 종교와 삶, 죽음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단편 「부처님 근처」를 썼다. 박완서디지털문학관 제공


나의 마지막 길은 장례미사였으면

그가 천주교 세례를 받기로 결심한 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항간에 가족을 연이어 잃은 슬픔을 겪은 후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박완서가 세례를 받은 것은 그 전인 1984년이었다.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느낀 죄책감 때문이었다.

박완서는 결혼 후 줄곧 시어머니를 모시고 한집에 살았다. 시어머니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던 시절 박완서가 딸을 내리 넷을 낳고 마침내 다섯 번째에 이르러 아들을 품에 안을 때까지 성별에 상관없이 손주 다섯을 직접 업어 키워주신 분이었다.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배려가 몸에 배어있던 시어머니는 학교 문턱도 밟지 못하고 글도 깨치지 못한 분이었지만 박완서는 그런 시어머니를 경건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분으로 존경했다. 26년 넘게 함께 살던 시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돌아가신 후 맞닥뜨린 장례 절차는 그를 몹시 괴롭게 했다.

박완서 부부는 당시에 주위에서 하던 대로 장의사를 불러 장례를 치렀는데 고인에게 관은 얼마짜리, 수의는 얼마짜리를 해드려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흥정을 하려 들었다. 심지어 고인의 저승길에 노잣돈이 두둑해야 한다며 수의를 입힌 옷가지 이곳저곳에 두툼한 지폐를 찔러 넣게 하고, 선산에 오르는 영구차가 멈출 때마다 마치 혼인하는 신부 집에 함을 들이는 양 돈을 깔아 움직이게 하였다. 그렇게 상주가 돈을 내놓을 때마다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넣는 장의사의 손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살아생전 사람을 소중히 대한 시어머니의 마지막을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모시는 것에 박완서는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간 가 본 문상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나도 죽으면 저런 대접을 받고 싶다 할 정도로 인상 깊은 장례식은 거의 천주교 의식의 장례미사였는데, 고인이 부자든 가난하든 따지지 않고 이승에서의 죽음에 대한 절망보다 훗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예식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에게 해드린 것 같은 대접을 나는 받고 싶지 않았다. 종교를 가지는 데 있어 어찌 보면 이기적인 계산일 수도 있지만 시어머니라면 괜찮다고 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박완서 가족의 식사 모습. 남편 호영진씨와 아들 원태씨. 가톨릭평화신문 DB


평화의 인사를 통해 신비를 체험하다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을 때 박완서에게 천주교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종교 이전에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성경 공부를 한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 또 성경 말씀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잘못을 덮어놓고 꾸짖지 않고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평화의 인사만큼은 새로웠다. 주위에 누가 앉았는지 미사를 하는 동안엔 전혀 모르다가 평화의 인사 시간이 되면 비로소 몸을 돌려 교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서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한 번은 바로 옆에 앉은 형제에게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를 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한 이가 내 남편이었다니! 그이에게 이런 얼굴이 있었던가! 평생을 한 이불 덮고 산 남편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살아왔었다. 그가 번 돈은 내 돈이요, 내 생각은 그의 생각이 된다는 걸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와 한 몸이라 여겼던 남편을 독립적인 ‘남’이라 바라볼 수 있는, 관습을 깨는 새로움의 신비를 체험하며 박완서는 ‘정혜 엘리사벳’으로 거듭 났다. 그의 손에 이끌려 함께 성당에 나간 남편 호영진은 ‘하상 바오로’로 세례를 받게 된다. 53세 때의 일이었다. <계속>

 


정혜린 클라라(프리랜서 작가)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