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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특집기획
2026.03.18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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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좋은 형제’의 고장에서 피어난 신앙 공동체
14. 대전교구 예산본당 대률공소
대전교구 예산본당 대률공소 전경. 대률공소는 6명의 교우가 주축이 되어 설립된 공소이다.

대흥면 ‘의좋은 형제’ 이성만과 이순

대전교구 예산본당 대률공소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형제고개로 527-8에 자리하고 있다. ‘형제고개’는 예산군 대흥면 갈신리와 예산읍 대회리를 잇는 고개이다.

1980년대 한 라면 광고를 통해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유행어가 널리 퍼진 적이 있다. 이 유행어의 원조가 대흥면 ‘의좋은 형제’다. 조선 초 대흥면에 살던 이성만·이순 형제가 어느 해 가을걷이 후 형은 신혼인 아우를 위해, 동생은 식구가 많은 형을 위해 자기 곳간의 볏단을 한밤중에 몰래 형제의 집에 옮겨두고 왔다. 어찌 된 일인지 자기 집 곳간 볏단이 줄지 않아 밤새 옮기다 길에서 형제가 마주쳐 서로 감싸안고 울었다고 한다. 형제끼리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베푼 이 미담이 알려져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관찬 지리지에 수록됐고,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예산군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 관아인 대흥 동헌 앞에 1497년 세워진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가 있다. 이 비문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관찬 지리지에 수록된 내용과 사뭇 다르다. “조선 세종대에 충청도 대흥호장 이성만과 이순 등이 부모 생전에 기쁨으로 봉양하고, 봄가을 맛난 반찬을 대접했으며, 돌아가시자 형은 어머니의 산소를 지키고, 아우는 아버지의 산소를 지켰다. 또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에 이르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에 가서 조석으로 음식을 나누었다. (?) 이 효행과 우애가 널리 알려져 조정에까지 보고돼 세종이 이들에게 정려(旌閭)를 내렸다.”

대흥에는 의좋은 형제뿐 아니라 ‘의좋은 순교자’도 있다. 복자 김정득(베드로)이 대흥 출신 순교자이다. 그는 사촌인 예산 여사울 출신 복자 김광옥(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김광옥과 함께 성물과 교회 서적만을 챙겨 공주 무성산으로 피신해 살다 체포돼 홍주 감영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고향 대흥으로 끌려와 동헌 형옥에서 하루 머문 뒤 대흥 저잣거리에서 참수 순교했다.
대률공소 제단. 나무 제대와 십자가·성상들이 단출하게 꾸며져 있다.

‘의좋은 순교자’ 김정득과 김광옥 복자

복자 김광옥은 여사울에서 오랫동안 면장을 했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이 그의 아들이다. 50세 무렵 이존창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신유박해 때 김정득과 함께 체포돼 참수형을 받고 예산에서 순교했다.

복자 김정득과 김광옥은 처형장인 각자의 고향으로 끌려가던 중 예산과 대흥의 갈림길에서 손을 맞잡고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며 짧은 작별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이튿날인 1801년 8월 25일 한날한시에 각기 읍내 물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대전교구는 2015년 8월 19일에 대흥 동헌 옆에 ‘대흥 봉수산 성지’를 조성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복자 김정득과 같은 날 예산에서 순교한 복자 김광옥을 비롯해 예산 출신 29위 순교 복자를 현양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사촌 간인 김정득·김광옥 복자를 ‘의좋은 순교자’라 부르고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사 안에서 예산은 충청도 지역에서 첫 번째로 복음이 전해지고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다. 예산 땅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된 것은 1784년 말 또는 1785년 초로 알려져 있다. 여사울(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출신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과 친지·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내포에 첫 번째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다. 여사울은 1791년 당시 80여 가구 중 10여 가구를 제외하고 모두 가톨릭 교우일 만큼 교세가 강했다. 여사울에서 시작한 충청도 지역 가톨릭 신앙 공동체는 이후 진목·솔뫼·면천·다락골 등지로 확산되며 내포 지역 교회를 형성했다.

조선 시대 대흥군은 홍주목과 공주목을, 한양과 충청도 서남 지역, 전라도를 잇는 교통 요지였다. 초기 조선 교회 때부터 대흥은 예산과 홍주·공주·청양 지역으로 선교 사제들과 교우들이 복음을 전하고, 또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로 숨어들 때, 그리고 순교의 길을 장엄하게 걸어갈 때 반드시 지나쳐야 했던 길목이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대흥과 홍주·신창에 ‘척화비’를 세워 가톨릭 신앙을 뿌리 뽑으려 했다. 그만큼 예산 대흥면은 조선 왕조 박해 시기 교회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대률공소 벽면에 장식된 십자가의 길 14처.

‘의좋은 신앙의 형제들’이 지은 하느님의 집

이제 ‘의로운 신앙의 형제들’ 얘기를 구성해 보겠다. 대률공소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율리(大栗里)는 대흥면 동쪽에 자리하고 있고, 동으로 갈신리와 신양면 귀곡리, 서쪽으로 손지리와 지곡리, 남쪽으로 탄방리와 금곡리, 북쪽으로 예산읍 주교리와 접하고 있다. 구릉지가 발달해 있고 신양천 지류인 탄방천이 흐르고 있어 주민 대다수가 농사를 짓고 있다.

1974년 대률리에 살던 6명의 교우가 주축이 되어 지역 전교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들 중 박성운(요셉)이 전교에 힘썼고 1979년에는 세례받은 교우 수가 5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전까지 전운하(안토니오) 초대 공소 회장 집에서 공소 예절을 하다 대지 410㎡를 매입, 1979년에 건평 69㎡의 시멘트 벽돌조 건물을 지어 공소로 사용해 오고 있다. 공소 건물은 목수 2명과 공소 교우들이 공사에 힘을 보태 지었다고 한다.

탄방천 바로 옆에 지어진 대률공소의 구조는 일자형으로 단출하다. 외벽 대부분에 낀 이끼가 50년 가까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입구에는 십자가와 성모상이 장식돼 있다. 내부는 나무 바닥과 흰색 내벽으로 마감돼 있다. 회중석과 바닥에 두껍게 깔린 먼지가 쇠락해가고 있는 지금의 대률공소를 대변해준다.
103위 한국 순교 성인 페넌트. 시성식이 있던 1984년부터 지금까지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낡은 페넌트가 ‘신앙 안에서의 회복’이라는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제단에는 나무 제대와 독서대가 설치돼 있고, 제대 뒷벽 중앙에는 십자가가, 그 좌우로 성모상과 요셉 성상이 장식돼 있다. 양측 내벽에는 십자가의 길이 꾸며져 있는데, 색바랜 성화가 나무 액자에 끼워져 있다. 제대 성모상 아래 ‘103위 성인화’와 벽 한쪽에 ‘103위 한국 순교 성인 페넌트’가 눈길을 끈다.

지금은 쇠락해 모든 것이 빛바래 보이지만 대률공소는 ‘의좋은 신앙의 형제들’이 짓고 아름답게 꾸민 하느님의 집임이 틀림없다.

의좋은 신앙의 형제들이 수고와 희생, 기도로 지은 집은 낡고 초라해 보여도 신앙 안에선 늘 새롭다. 이 새로움은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나오는 ‘회복’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주님의 말씀을 ‘의좋은 형제의 고장’, ‘의좋은 순교자의 고장’, ‘의좋은 신앙의 형제들 고장’에서 묵상해 봄은 어떨까!

대흥 봉수리 성지와 대률공소는 가톨릭 신앙에서 사랑이 갖는 의미를 깨닫게 한다. 우리가 이웃에게 폐쇄적이고 그들에게 눈을 감고 있다면 하느님을 볼 수 없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