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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 사설/칼럼
2021.10.2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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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연의 드라마 속으로] 선을 넘으며 선을 지키는 일
백소연 레지나(가톨릭대 학부대학 조교수)
▲ 백소연 교수


연일 화제를 모으며 종영한 갯마을 차차차는 "힐링 로맨스"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바닷가 마을 공진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해준 드라마였다. 현실주의 치과의사 윤혜진이 만능 백수 홍반장(홍두식)을 만나고 공진에 개원을 하면서 겪게 된 일들은 매회 흥미롭게 전개된다. 혜진에게 공진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함께 여행한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공간이지만 그곳에 정착해 마주한 현실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삶의 시간표를 철저히 계획하며 이해타산을 따지고 살아온 개인주의자인 그녀에게 공진에서의 일상이란 그야말로 선 넘는 일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미처 겪어 보지 못한 낯선 경험들은 혜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혜진은 못내 툴툴거리면서도 어린 보라와 이준이 키우지 못하게 된 고슴도치를 거절하지 못해 받아들이고 다리가 다친 중학생 주리를 위해 등대 가요제에서 백댄서가 되어 준다. 온갖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며 은근 치과를 폄훼했던 남숙이 보이스 피싱의 위기에 놓이자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몸을 던져 범인을 추격하기도 한다. 또 출산이 임박한 윤경에게는 기꺼이 자기 침대를 내어주고 처음으로 새 생명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소셜 포지션을 운운해 왔던 혜진은 마땅히 내세울 직업도 없는 홍두식을, 공진이라는 소박한 바닷가 마을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서울의 임상교수 자리를 포기하고 윤치과를 지키기로 결정한다. 타인과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며 스스로 그어 왔던 삶의 기준을 넘어선 순간, 그녀는 비로소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두식 역시 공진의 사람들과 혜진이 있었기에 절망을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부모님에 이어 할아버지마저 잃었던 어린 두식을 키워낸 것은 공진이었고 한때 삶을 포기하려고까지 한 그를 다시금 품어 살려낸 것 역시 공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진을 사랑하게 되면서 두식은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한 자기의 진짜 상처를 드러내어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된다. 늘 활기차고 유쾌하게만 보였던 그는 슬픔을 나누는 방법을 배우면서 어두운 과거로부터 드디어 자유로워진다. 모든 것을 바꿀 힘을 가졌기에 사랑이야말로 혁명과도 같다는 명제를, 이 드라마는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공진에서 맺게 된 이 아름다운 관계들 이면에 어떤 불편함이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처음 등장한 외지인이 마을의 이목을 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운동을 나선 혜진의 옷차림을 두고 수군거리거나 그녀의 사진을 몰래 찍어 단톡방에 올리는 일 등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호의로 넘겨 버리기 어렵다. 사생활에 대한 소문들, 특히 이성 관계를 두고 뒤에서 제멋대로 상상하고 떠들며 간섭하는 일은 정이나 관심이란 말로 무마하기 어려운 폭력에 불과해 보인다.

감리 할머니가 두식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의 말처럼 사람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가끔 사는 게 묵직할" 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와 그것을 나눌 수 있다. 물론 자기 자신의 선을 넘어 타인에게 다가설 때만 서로의 묵직한 삶의 무게를 알아챌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타인을 향한 진심만큼이나 타인을 위해 지켜야 하는 선, 기다려야 하는 시간 역시 존재해야 한다. 갯마을 차차차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선을 넘어 타인과 만나는지, 동시에 어떻게 서로의 선을 지켜 주어야 하는 건지, 아름답게 사랑하고 살아가야 하는 법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