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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복음/말씀 > 일반기사
2021.02.2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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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와 섭리, 너가 왜 거기서 나와
[사유하는 커피](40)코로나19를 섭리와 연결짓지 마라
▲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장



코로나19 사태에 혐오, 차별과 같은 부정적 언어의 사용이 늘고 있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감성어를 분석한 결과인데, 팬데믹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사람들 간 반목현상이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는 말하는 사람의 인식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더 깊이 우려되는 것은 '계시'와 '섭리'를 코로나19와 연결지어 쓰는 표현들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냉혹한 섭리'라거나 '종말 계시'라는 둥 신의 의지와 억지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들은 생각할수록 근심을 만든다.

계시(Revelation)는 "감춰져 있는 것이 자신을 드러내다"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레벨라시오'(Revelatio)에서 유래했다. 종교학에서는 이 감추어진 것을 '거룩한 존재'라고 규정한다. 거룩한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느냐를 두고 종종 논쟁이 벌어지는데, 대표적인 게 에밀 브루너와 칼 바르트의 '계시 논쟁'이다. 브루너 진영은 "인간이 하느님을 인식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바르트 학파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맞선다. 이 논쟁에서 분명한 것은, 어쨌든 인간은 거룩한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모세 등 특정 인물을 통하거나 불기둥, 바람 소리 등의 형태 안에서 스스로 계시하셨다.

코로나19를 모종의 계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팬데믹을 인류 심판의 전조라고 몰아가며 불안과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물질만능주의를 좇으면서 자연을 마구 훼손하고 있는 인류를 심판하는 것으로써,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공포를 조장한다. 이들 세력의 노림수는 코로나19에 '천형'(Divine punishment)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다. 코로나를 이겨내려면 자신들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수작을 부린다.

섭리(Providence)를 들먹이는 것도 위험하다. '예견' 또는 '배려'를 뜻하는 라틴어 '프로비덴시아'(Providentia)에서 온 섭리는 철학에선 "인간의 운명이 신의 뜻대로 진행된다고 믿는 것"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헤겔은 "신이 인류의 구원을 향해 세계를 정연하게 다스리는 것"을 섭리라고 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섭리와 자연법칙이 같은 뜻으로 혼재돼 사용되기도 한다. 섭리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풀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이다.

코로나19를 섭리에 견주는 것은 곧 코로나 피해자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는 행위이다. 코로나에 걸린 환자를 인과응보로 인해 형벌을 받는 것으로 봐선 안 된다. 코로나에 걸릴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식의 결정론을 펴는 것은 사이비이다. 굳이 코로나를 악에 비유한다면, 치유법은 이런 접근과는 정반대에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악은 선의 결핍에 따라 생겨난다. 코로나를 극복하려면 특정 사람들을 악인 취급하지 말고 재발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의 결핍된 부분을 찾아 고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커피도 마찬가지이다. 커피에 벌레 먹거나 썩은 결점두가 일정 비율 이상 섞여 있게 마련이다. 이 비율을 줄일수록 품질이 좋아지고 마시는 사람의 건강에도 유익하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에 따라 병충해가 극성을 부리면서 결점두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결점두가 많은 커피를 안 사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외면한 사이 나무들이 계속 전염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커피 열매가 벌레 먹지 않도록 기술적이나 재정적으로 결핍된 부분을 채워줘야 한다. 산지를 돕는 공정무역 커피는 이런 심성에서 시작돼 확산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신의 섭리이다.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