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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 전주 숲정이 성지

신유박해(1801년) 순교자


복자 이순이 루갈다(1782-1802년)


‘유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2년에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 바오로는 그녀와 남매 사이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 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이 루갈다의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그의 학문을 이어 오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부친은 처남인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 베드로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이 루갈다의 모친도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자신이 배운 교리를 어린 그녀에게도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루갈다는 일찍부터 어머니에게 글도 배웠다.

17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이 루갈다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가면서 오로지 영혼을 구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리고 1795년에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첫영성체를 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나흘 동안을 집 안에 들어앉아 처음으로 성체를 모시기 위한 교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루갈다는 오로지 성체를 잘 모시고 덕행을 쌓는 데에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배필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회 안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 루갈다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랐지만 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고, 주 야고보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때 주 신부의 머리에는 동정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전주에 살고 있는 유중철 요한이 떠올랐으며, 이에 곧장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1798년 10월 이 루갈다는 남편의 고향인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남편 유 요한이 동정 서약을 어기려고 할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이 루갈다가 살던 초남이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그들은 이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를 가장 먼저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였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 요한도 체포하여 전주로 끌고 갔다.

이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녀는 함께 갇혀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며 순교의 길로 나아가자고 권면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이 루갈다가 옥중에서 언니들에게 보낸 서한에 들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뒤, 전주 관장은 이 루갈다와 그녀의 친척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바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이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녀가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순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간 이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에 의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순이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순이 루갈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신희(申喜, ?-1802년)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유항검(柳恒儉)의 처. 1801년 봄 남편과 큰 아들 유중철(柳重哲)이 신유(辛酉)박해로 체포되어 이해 10월 순교한 후 곧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음 1801년 12월 28일) 전주(全州) 숲정이에서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시숙(媤叔) 유익검(柳益儉)의 아들 유중성(柳重誠), 동서(同壻) 이육희(李六喜) 등과 함께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육희(李六喜, ?-1802년)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순교자 유관검(柳關儉)의 처.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시집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어 1802년 1월 31일(음 1801년 12월 28일) 아들 유중성(柳重誠), 동서 신희(申喜), 이순이(李順伊) 등과 함께 전주(全州)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출처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복자 유중성 마태오(1784?-1802년)

‘완석’(完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柳重誠)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5세의 나이로 돌아가셔서,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유 마태오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작은아버지 유 아우구스티노와 그 가족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유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1801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유 마태오의 집안에서는 유 아우구스티노와 유 요한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의 어머니는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중성 마태오는 사촌 형수인 이순이 루갈다 등 다른 친척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유 마태오와 친척들은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유 마태오가 사촌 형수인 이 루갈다와 함께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유 마태오는 친척들과 유배지로 가는 동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들을 다시 잡아 오도록 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후 유 마태오는, 다시 감사 앞에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다음과 같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 오던 신앙입니다. 유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왔다. 이에 따라 유중성 마태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가량이었다. 당시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유중성 마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기해박해(1839년) 순교자


복자 김대권 베드로(?-1839년)


김대권(金大權) 베드로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청라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 야고보은 바로 그의 아우이다.

김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워 왔으나, 열심히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였다.

김 베드로는 한때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이 무렵에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는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을 뻔하였다. 그 사고 뒤에 그들은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가게 되었다.

김 베드로는 언제나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계명을 지키는 데에 열중하였다. 주일마다 이웃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예수 성탄 대축일이면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면서 밤을 새웠다. 언젠가는 호랑이가 그의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는데,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기도를 다 하고 내려왔다. 사순 시기 때면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 한 끼의 식사만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아우 김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도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밝혔다.

김 베드로는,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27년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오래지 아니하여 포졸들이 그 마을로 들이닥치자, 김 베드로는 웃는 얼굴로 그들 앞에 나아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고산에서 한차례 신앙을 증언한 김 베드로는,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서적을 갖다 바치거나 교우들의 이름을 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주 관장이 그의 아들을 데려와 목에 칼을 겨누었을 때도 그는 “이러한 일로 목이 잘리면 아들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감사 앞으로 끌려가서도 김 베드로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난의 은혜를 한 터럭만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드러냈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의 살과 뼈에 사무쳐 있으므로, 사지를 자르거나 뼈를 부순다고 하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감사는 할 수 없이 김 베드로를 옥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김대권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대권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태권 베드로(1782-1839년)

‘승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태권(李太權)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배울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를 갔다가 3년 뒤에 그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은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는 그의 삼촌이다.

이 베드로는, 아홉 살 때인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되었다. 또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이 베드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뒤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계속해서 지켜 나갔다. 또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던 그는, 1827년에 다시 한 번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려고 하였으나, 가족을 남겨 두고 떠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천주의 명을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동생만을 피신시켰다.

과연 얼마 뒤에 포졸들은, 이 베드로가 살고 있는 마을에 나타났고, 그는 이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에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교회 서적을 바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말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는 아무것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를 도저히 살려둘 수 없다.”고 하면서 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이 베드로는, 김대권 베드로, 이일언 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태권 베드로는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옥중 수기를 남겼다. 한편 사형 판결이 있기 전에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태권은 밤낮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를 받들었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태권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일언 욥(1767-1839년)

충청도 홍주의 대벌 마을에서 태어난 이일언(李日彦) 욥은, 1801년 이전에 아버지 점손(占孫)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의 관명(冠名)은 태문(太文)이었다.

이 욥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물도 얻어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10년을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으나, 묵묵히 참고 따름으로써 참다운 신자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관장의 허락 아래 개인 집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15년부터 이 욥은 안의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생활하였다. 1826년 5월에는 연금에서 풀려나 전라도 임실의 대판이라는 곳으로 이주하였으며, 여기서 그는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듬해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욥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해 죽겠다.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궁벽한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없으니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을 때에 전주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이 욥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바라던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전주 관장은 이 욥을 처음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전력을 알아내고는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다. 그는 비록 키가 작고 몸집도 보잘것없었지만, 신앙의 인내로 형벌을 참아 내 보는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곳에 있던 박해자들은 “우리가 그의 외모를 보고 잘못 판단했군. 이 사람은 정말 천주교인들의 두목이 분명하이.”라고 수군거렸다.

문초와 형벌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지만, 이 욥의 신앙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관장은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그를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이후, 이일언 욥은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처형 장소로 가는 동안, 이일언 욥은 자식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옥중에서 신음해 오다가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나의 행운을 기뻐하여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너희들도 훌륭한 교우가 되거라.”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일언 욥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정태봉 바오로(1796-1839년)

1796년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촌 당숙의 손에 자라났다. 그는 관명(冠名)이 ‘만보’였으나, ‘태봉’이라는 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 베드로 회장은 그의 사촌이다.

본디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였던 정 바오로는, 고아가 겪어야만 하였던 시련들을 인내와 체념으로 견디어 냈다. 또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때에 정 바오로는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오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회 서적을 펴면 끝까지 읽은 다음에야 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였다. 그러한 사이에 그의 마음에는 점차 순교의 뜻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는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용담에서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 바오로는 무모함을 피하고자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가 자주 집에 들른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 밀고자가 모든 사실을 관아에 일러바쳤고, 이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당시 포졸들이 가지고 온 영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 바오로는 이를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포졸들을 따라 용담 관아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에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 관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정 바오로는 교우들을 밀고하거나 배교할 생각을 조금도 갖지 않았고, 이 사실을 깨달은 관장은 그를 투옥하도록 명령하였다. 정 바오로는, 이일언 욥,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정 바오로가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기뻐하면서 천주께 감사를 드렸다. 이때에 정 바오로는 자신의 마음이 심약한 것이 안심이 되지 않았으므로, 처형 때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옥졸들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다음 정태봉 바오로는 동료들과 함께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사형 판결이 있기 전에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태봉은 요사하고 황탄한 말에 빠져 이를 깊이 믿었으며, 제사를 폐지하고 지내지 않았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정태봉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신태보 베드로(1769?-1839년)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뒷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이 지난 뒤, 사촌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한 신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주 야고보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신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뒤,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촌 이 요한을 비롯하여 다른 교우들과 연락이 닿게 되자, 그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우들이 가장 시급한 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북경에서 다시 성직자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그 결과, 1811년 말에 이 요한이 교우 한 명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자들의 서한 두 통을 전하게 되었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신 베드로는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신 베드로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작정하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신 베드로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상주의 포졸들과 함께 잣골로 들이닥쳤다. 당시 포졸들은 이미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준 사실과 그의 거주지를 알고 있었다.

신 베드로는 이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뒷날 그 자신이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다음의 내용은, 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 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 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 베드로는 결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지 않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할 때면,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감사는 할 수 없이 신 베드로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고,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용맹한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 임금의 명에 따라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가량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신태보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


성 정문호(鄭~) 바르톨로메오(1801-1866년)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또는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어느 양반집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많이 하여 원님까지 지냈으며, 학식과 교양과 인격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영세한 후부터는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해로 인하여 마을을 떠난 그는 전라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만년에야 전주의 대성 지방 신리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신리골에 살면서 그는 신자들에게나 비신자들에게나 차별 없이 상대했고, 또 교리를 밝혀 소상하게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예의범절도 잘 가르쳐 주었음으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전라도 일대에도 박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자, 그는 심부름꾼으로 오사영을 전주로 보내어 정세를 알아보게 하였다. 오사영은 비신자인데다가 고을의 관직에 있는 자였으므로 전주 포청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고, 또 자원하여 신자들을 도와 성심껏 협조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전갈이 없자 정 바르톨로메우스는 조금은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12월 3일 저녁 포졸들이 두 패로 나눠서 한 무리는 성지동 마을로 들어가 조화서 베드로(Petrus)와 그의 아들 조윤호 요셉 그리고 이명서 베드로를 체포하고, 다른 한 무리는 대성 마을로 침입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근처 주막으로 끌려가 성지동에서 체포된 다른 세 명과 만나게 되었다. 다음날 일곱 사람은 지방 감사의 집까지 압송되어 갔는데,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감사 집에 도착해서는 즉시 창고에 갇혀 있다가 얼마 후 불려나와 고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정 바르톨로메우스가 유혹에 넘어가 배교할 듯 했었는데, 조화서 베드로가 격려하여 다시 생각을 돌리고 마음을 잡아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정 바르톨로메우스는 순간적이나마 마음이 약해졌음을 참회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용감한 마음으로 온갖 고문을 잘 이겨냈다. 그는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했다. 이때가 1866년 12월 13일이요,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손선지(孫~) 베드로(1820-1866년)

성 손선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임천 지방의 고인돌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남달리 신앙과 품행이 뛰어났다. 어른이 되자 샤스탕(Chastan, 鄭) 신부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던 그는 인자한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에 힘쓰며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모범적인 신자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거처하던 집은 마을의 공소였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주의와 노력으로 언제나 신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그가 47세가 되던 1866년 추수기에 접어들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좀 완화되는 듯 하다가 얼마 후 더욱 혹심한 박해로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공소 예절에서 그는 신자들을 보고 “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가두시려는 모양이군요.” 하며 자기는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무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그해 12월 3일 저녁 그는 가족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집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시 상황을 알아차리고서 재빨리 가족들에게 피하라고 말한 뒤에 자신이 교우임을 자백하여 순순히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구진포리 주막까지 데리고 가 먼저 이곳에 붙잡아 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였다. 그 사이 손 베드로의 어머니는 마을 원님을 찾아가 아들을 좀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또 손 베드로의 아들이 감영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들의 효심에는 감동하였으나 크게 꾸짖고는 “나에게는 큰 유혹이 된다. 내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영에 오지 말라”고 하면서 일을 중지시켰다.

다음날 그는 전주 감사 앞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전교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고문과 주리를 잔인하게 가하다 못해 그의 팔까지 부러뜨렸다. 그가 처형장으로 나설 때 남아서 기다리는 다른 신자에게 자기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사형장에 도착한 그는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기도했는데, 희광이가 칼로 그의 어깨를 내려치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장난하지 마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에서 1866년 12월 13일에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한재권(韓~) 요셉(1836-1866년)

성 한재권 요셉(Josephus)은 충청도 진잠에서 독실한 신자인 한언적 도미니코(Dominicus)와 모친 성주 배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온순한 성격과 굳은 신앙을 지녔던 그는 서 막달레나(Magdalena)와 혼인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충청도 진잠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부친은 전라도 고산 다리실로 피신했고, 그 후 그는 가족을 이끌고 대성동 신리 마을로 가서 살았다. 한 요셉은 진잠에서 회장으로 활동했으나 이곳의 회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회장님’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성실함과 착한 성품을 칭송하였다.

1866년 12월 3일 저녁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에 그는 장작을 패고 있었기에 포졸들에게 쉽게 체포되었다. 한 요셉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전주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옥중의 여러 가지 심문과 고문보다도 가족들의 구명 운동과 배교 강요 때문에 심한 번민을 하였으나, 끝내는 순교의 월계관을 받아썼다. 그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조화서(趙~) 베드로(1815-1866년)

성 조화서 베드로(Petrus)는 수원 지방의 도마지에서 태어났고, 1839년에 순교한 조 안드레아(Andreas)의 아들이다. 부친을 잃은 뒤에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여 몇 년 간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일하였으나, 최 신부가 선종함으로써 1864년에 다시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한 막달레나(Magdalena)를 아내로 맞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는데, 얼마 후 부인 한 막달레나가 죽자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힌 조 베드로는 자기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그의 며느리가 달려 나가 자기 남편인 조윤호 요셉에게 집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였다. 자기 아들 요셉이 집으로 들어오자 아버지는 “너는 여기에 들어와선 안 된다. 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나 아들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면서 자기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 함께 체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부자가 함께 묶여 전주로 향하는 도중에 여러 가지 수모와 혹심한 천대를 받았으며, 주막에서 며칠을 묵어가며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한 후 곧이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조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도 함께 있는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그는 죽인다고 협박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원님에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사형장에 도착한 조 베드로는 침착하게 죽을 준비를 한 다음 희광이에게 “이곳 처형장에서까지도 흉포한 그대여! 천주교를 좀 믿어보시오. 우리는 죽으면서도 천주교를 신봉할 것입니다”라고 한 후 성호를 긋고 나서 세찬 칼을 세 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때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이명서(李~) 베드로(1821-1866년)

성 이명서 베드로(Petrus)는 충청도의 어느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박해를 피하여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자연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완주군 구이면 고소대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고소대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1866년에 다시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온순한 성품과 착한 마음씨를 지녔고 예의범절이 깍듯하며 착하고 어진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나 가슴앓이로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성지동 신자들이 다가올 박해를 예상하고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는 “사세가 그렇게 다급하게 되었다면 빨리 피해야지요, 나는 병 때문에 피하지 못할 처지이고 천주님의 안배에 의지할 따름입니다. 필요하시다면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내 병은 영원히 낫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순교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1866년 12월 5일 저녁에 포졸들이 이 베드로의 집을 덮치자 심경이 달라진 그는 생에 대한 미련이 남아 포졸에게 애걸하였으나, 옆에 있던 조화서의 말을 듣고 “내 아까는 무서워서 그랬지만 사실은 나도 신자올시다” 하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그도 전주로 끌려가 감사 앞에서 문초를 받았다. 가슴앓이 환자인 줄 알면서도 감사는 죄수의 손발과 머리를 묶어 고정시켜 놓고 등허리를 난타하였다.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그는 “수십 번을 죽는다 해도 천주교를 따를 것이오.”라고 하면서 배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마침내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우리의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기뻐하였고, “오늘 치명하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 진복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원지(鄭~) 베드로(1846-1866년)

성 정원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진잠의 어느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공주에서 순교하였기 때문에 그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다가 체포되기 얼마 전에는 전주 완주군 소양면 성지동에 있는 조화서 베드로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였다.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형과 한집에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열심하고 또 지극히 착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조화서 베드로는 이 젊은이를 성의껏 지도해 주었다.

1866년 12월 3일 전라 감사가 보낸 포교와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자 정 베드로는 마을을 몰래 빠져나와 산에서 하룻밤을 꼬박 세운 뒤, 마을 일이 궁금하여 발몬이라는 마을 뒷산마루 아래만 살피면서 정신없이 내려오다가 산마루로 오르던 포졸과 정면으로 마주쳐 꼼짝없이 체포되었다. 그는 조 베드로 일행과 구진포리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전주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노모를 생각하다가 처음에는 신자임을 부인하였으나, 조 베드로 등의 위로와 격려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교우임을 똑똑히 밝히게 되었다. 감사 앞에 끌려가 교리를 가르쳐 준 선생들을 대라고 하자, 그는 유일한 스승은 천주교를 믿다가 이미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한 분뿐임을 확실히 밝혔다. 자기 아버지가 이 교를 신봉하다가 죽었는데도 같은 교를 믿는다고 해서 놀라는 포졸들에게 그는 “나는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를 만나 뵙기 위해서라도 성교를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그 후 그는 옥에서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전하였다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시오. 천국에서 우리가 서로 만날 때가 오리니 그날을 기다립시다.” 갇힌 지 9일이 지난 12월 13일 정 베드로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 집행을 위해 모든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동안 포청의 관리 하나가 술에 취하여 죄수들을 희롱하며 “죽어 천당은 무슨 놈의 천당이냐?”고 하며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때 그는 머리를 번쩍 들고 “몰상식한 놈 같으니, 그래 너는 네 아버지, 네 어머니를 저주하느냐?”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않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스물 한 살의 젊은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