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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쁜 소식 -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 주셨다
  • 422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곧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것이(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3) 보내 주시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말씀하신 바를 전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이행하셨다.(4)
  • 423 우리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믿고 고백한다. 그분은 헤로데 임금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1세 황제 때에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한 딸에게서 유다인으로 태어났으며, 직업은 목수였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기간 중 본시오 빌라도 총독 치하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에게서 나오셨으며”(요한 13,3), “하늘에서 내려오셨고”(요한 3,13;6,33),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5) 사실을 우리는 믿고 고백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4.16).
  • 424 성령께서 움직여 주시고 성부께서 이끌어 주셔서, 우리는 예수님을 이렇게 믿고 고백한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 베드로가 고백한 바로 이러한 신앙의 반석 위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다.(6)
  •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전하다”(에페 3,8)
  • 425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달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그분을 알리는 것이다. 그분의 첫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알리려는 열정에 불탔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그리고 그들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렸던 친교의 기쁨에 초대한다.
  •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1-4).
  • 교리 교육의 핵심은 그리스도
  • 426 “교리 교육의 핵심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 인물, 성부의 외아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우리를 위하여 수고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분, 부활하여 지금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 말입니다……. 교리 교육은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을 소개하여 하느님의 영원하신 계획 전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리 교육은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의 의미, 그분을 통해 나타난 표징의 의미를 알아들으려는 노력입니다.”(7) 교리 교육의 목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수 있으며, 우리를 거룩하신 성삼위의 생명에 참여토록 하실 수 있습니다.”(8)
  • 427 “교리 교육에서 가르침의 내용은, 강생하신 말씀이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시며, 그 밖의 모든 진리는 그분과 관련되어 전달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이도 그리스도뿐이시며 다른 이는, 그리스도의 대변인으로서 자기 입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한에서 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모든 교리 교사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 하신 심오한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9)
  • 428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불린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기 위하여”, 그리고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 위하여” 마땅히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겨야 한다(필리 3,8-11).
  • 429 사랑으로 얻게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 지식에서, 그분을 알리고(‘복음을 전하고’) 나아가 다른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이끌고자 하는 열망이 솟아난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신앙을 더 잘 알고자 하는 필요성도 항상 느끼게 된다. 이런 목적에서 신경은 맨 먼저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주님 등 예수님의 중요한 호칭들을 제시한다(제2절). 그 다음으로 신경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주요한 신비들을 고백한다. 곧, 강생의 신비(제3절), 수난과 부활 곧 파스카의 신비(제4절과 제5절), 그리고 끝으로 영광 받음의 신비(제6절과 제7절)를 고백한다.
  • 제2절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 I. 예수
  • 430 예수는 히브리 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주님 탄생 예고 때에 천사 가브리엘은 그분께 ‘예수’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이름은 그분의 신원과 사명을 동시에 나타낸다.(10)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없기”(마르 2,7)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의 영원한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인간을 위해 당신 구원의 역사 전체를 총괄적으로 실현하신다.
  • 431 하느님께서는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종살이하던 집”(신명 5,6)에서 구해 내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죄에서도 구해 주셨다. 죄란 언제나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11) 오직 하느님만이 그 죄를 없애 주실 수 있다.(12)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점차 죄의 보편성을 깨달아 가면서, 구원자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13)
  • 432 예수라는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 당신 아들의 인격 안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14) 성자께서는 인간을 죄로부터 보편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해 내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예수는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하느님의 이름이며,(15) 이제는 강생하여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시어,(16) 모든 사람은 이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17)
  • 433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은 일 년에 단 한 번, 대사제가 이스라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지성소의 속죄판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릴 때만 불렀다.(18) 속죄판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이다.(19)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로마 3,25) 하고 말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2코린 5,(19) 는 것을 의미한다.
  • 434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한다.(20) 이제 ‘예수’라는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필리 2,9-10)이 지닌 최상의 권능을 충만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악령들은 그분의 이름을 두려워한다.(21)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22)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께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시기 때문이다.(23)
  • 435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인 기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전례의 모든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로 끝맺는다. 성모송은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는 말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 기도’라고 불리는 동방의 마음의 기도는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한다. 잔 다르크 성녀가 그랬듯이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오직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둔다.(24)
  • II. 그리스도
  • 436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받은이’를 뜻하는 히브리 말 ‘메시아’의 그리스 말 번역에서 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신적 사명을 완전히 수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는 예수님의 고유한 이름이 된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봉헌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부었다. 왕과(25) 사제들의(26) 경우가 그랬고, 간혹 예언자들도(27)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결정적으로 세우시기 위해 파견하시는 메시아의 경우는 그중 가장 특출한 예이다.(28) 메시아는 왕이며 사제로서,(29) 또한 예언자로서(30) 주님의 성령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다.(31) 예수님께서는 사제, 예언자, 왕의 삼중 임무 안에서 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의 희망을 채워 주셨다.
  • 437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의 탄생이라고 목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그분은 처음부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요한 10,36) 분이며,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거룩하신 분”으로 잉태되신 분이다.(32)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하고 명하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가문, 곧 다윗 가문에서 난 요셉의 아내에게서 태어나게 된다(마태 1,16).(33)
  • 438 예수님의 메시아 축성(祝聖)은 그분의 신적 사명을 드러낸다. “이는 그분의 이름 자체가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은이, 기름부음받은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받으신 기름부음 그 자체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름부음 자체이신 성령 안에서, 성부께서는 기름을 부으시고, 성자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으시는 것이다.”(34) 예수님의 영원한 메시아 축성은, 지상 생활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심으로써”(사도 10,38)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 예수님의 업적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이(35) 드러난다.
  • 439 많은 유다인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희망을 가진 몇몇 이방인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 곧 ‘다윗 자손’의 근본적인 특징들을 알아보았다.(36) 예수님은 당신의 권리인 메시아라는 칭호를 받아들이지만,(37) 당시 일부 사람들이 이 칭호를 지나치게 인간적인 개념으로, 특히 정치성을 띤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38) 이 칭호를 매우 조심스럽게 받아들이셨다.(39)
  • 440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받아들이신 다음 곧바로 사람의 아들에게 닥쳐올 수난을 예고하신다.(40) 이로써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요한 3,13)의(41) 천상적 신분 안에서, 그리고 고통 받는 종으로서 맡은 구속 사명 안에서 메시아 왕권의 참내용을 밝히셨다.(42)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그분께서 누리시는 왕권의 진정한 의미가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밝혀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43)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그분의 메시아 왕권은 베드로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 앞에서 선포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 III. 하느님의 외아들
  • 441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천사,(44) 선택된 백성,(45) 이스라엘의 자녀와(46) 그들의 왕들을(47) 부르던 칭호이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자녀로 입양됨을 의미한다. 약속된 메시아-왕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48) 부를 때, 그 본문들에 나타난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반드시 예수님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시라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지칭하는 본문들도(49) 아마 인간보다 더한 분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50)
  • 442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51) 라고 고백하는 것은 다른 경우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다.”(마태 16,17) 하고 엄숙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오로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겪은 자신의 회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 바오로는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9,20).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는 것은 처음부터(52) 사도 신앙의 중심이 되었으며,(53)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54) 맨 먼저 고백하였다.
  • 443 베드로가 메시아 예수님에게서 하느님 아들의 초월적 성격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서 그것을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러하다고 너희가 말하고 있다.”(루카 22,70)(55) 고 대답하셨다. 그 훨씬 이전부터 이미 그분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아버지를 아는 ‘아들’이고,(56) 하느님께서 전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내셨던 ‘종들’과는 다른 분이며,(57) 천사들보다 높은 분(58)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마태 6,9)라고 명하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저희 아버지”라는 말을 쓰지 않으심으로써,(59) 하느님과 당신의 부자 관계를 제자들의 그것과 구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요한 20,17)라는 말로써 그 구별을 명확하게 하신다.
  • 444 복음서는 두 번의 장엄한 순간, 곧 그리스도의 세례 때와 변모 때에 그분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60) 하시는 성부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느님의 외아들”(요한 3,16)이라고 하시며, 이 칭호를 통해서 당신께서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분임을 확언하신다.(6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요한 3,18)을 믿도록 요구하신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백인대장이 한 고백에 이미 나타나 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신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의 궁극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445 예수님의 부활 뒤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영광을 받은 인성의 권능 안에서 드러난다.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4).(62)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 IV. 주님
  • 446 모세에게 계시하신, 감히 부를 수조차 없는 하느님 이름인 YHWH(야훼)는 그리스 말 역 구약 성경에서는 Kyrios(‘주님’)로 번역된다.(63) 그때부터 ‘주님’이라는 칭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지니신 신성까지도 가리키는 가장 자주 쓰이는 이름이 되었다. 신약 성경은 성부를 지칭할 때 이 ‘주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뿐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께도 똑같이 사용한다. 예수님을 바로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새로운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64)
  • 447 예수님께서 몸소 시편 110(109)에 대해 바리사이들과 토론하시면서 이 칭호를 암시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신다.(65) 그러나 당신 제자들에게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66) 공생활 동안 행하신, 자연, 질병, 마귀, 죽음과 죄를 지배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들은 하느님의 주권을 증명한다.
  • 448 복음서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릴 때 매우 자주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칭호는 예수님께 다가가 도움과 치유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증언한다.(67) 이 칭호는 성령의 작용으로 예수님의 하느님 신비를 알게 되었음을 나타낸다.(68)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이 칭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처럼 일종의 흠숭이다. 이 칭호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자리 잡은 고유의 사랑과 정감을 지닌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 449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이라는 신성한 칭호로 부름으로써,(69) 권능과 영예와 영광을 하느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확언한다.(70)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과 같은 분”(필리 2,6)이시며, 성부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당신의 영광 안에 들어 높이심으로써(71) 예수님의 주권을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 450 그리스도교 역사의 시초부터, 예수님께서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단언은(72)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지상의 그 어느 권력에도 절대적으로 종속시켜서는 안 되며, 오직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종속시켜야 한다고 인정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주님’이 아니다.(73) “교회는 인류 역사 전체의 관건과 중심과 목적을 자신의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74)
  • 451 그리스도교 기도의 특징은 ‘주님’이라는 칭호에 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로 기도에 초대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는 말로 기도를 끝맺으며, 신뢰와 희망에 넘쳐 “마란 아타!”(주님께서 오신다!) 또는 “마라나 타!”(저희의 주님, 오십시오!)를 외친다(1코린 16,22).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 간추림
  • 452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마태 1,21)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 453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받은이’, ‘메시아’를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기”(사도 10,38) 때문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는 “오실 분”(루카 7,19)이시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망해 온”(75) 분이시다.
  • 454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영원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시며(76) 또한 하느님 자신이시다.(77)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필수적이다.(78)
  • 455 ‘주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거나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 제3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
  • 제1단락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
  • I. 왜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가-
  • 456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우리는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79) 하고 고백한다.
  • 457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1요한 4,14).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3,5).
  • 병든 우리의 본성은 치유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다시 일어서야 했고, 죽은 인간은 다시 살아나야 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좋은 것들을 잃은 사람은 이를 다시 찾아야만 했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사람에게 빛이 비쳐야만 했습니다. 사로잡혔던 우리는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갇혀 있던 우리는 구조를 기다렸고, 노예였던 우리는 해방자를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이 과연 하느님께 하찮은 것이었을까요- 인류가 이처럼 불행하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시게 할 정도로, 이러한 이유들이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만하지 않았겠습니까-(80)
  • 458 ‘말씀’은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 459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함의 모범이 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리고 성부께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산에서 이렇게 명하신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81) 참으로 그분께서는 참행복의 모범이시며, 새 율법의 기준이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 사랑에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 실제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82)
  • 460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인간이 되시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83)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84)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85)
  • II. 강생
  • 461 교회는 요한 복음의 표현(“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 1,14)에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인간 본성을 취하신 일을 ‘강생’(降生)이라고 부른다. 바오로 사도가 인용한 찬미가에서 교회는 강생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86)
  • 462 히브리서도 같은 신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시편 40[39],7-9를 인용한 히브 10,5-7).
  • 463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강생하셨다는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이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1요한 4,2).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 초창기부터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신비”로 노래한 기쁨에 찬 확신이다. “그분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셨도다”(1티모 3,16).
  • III.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
  • 464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 유일하고도 유례없는 강생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분적으로 하느님이시고 부분적으로 인간이시거나, 하느님과 인간의 불분명한 혼합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참하느님으로 계시면서 참사람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시다. 교회는 초기 몇 세기 동안 이 신앙의 진리를 변질시키려는 이단들과 맞서 이를 옹호하고 분명히 해야 했다.
  • 465 초기의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도 그분의 참된 인성을 부인했다(그리스도 가현설[假現說]: Docetismus gnosticus).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87) 하는 참된 강생을 주장했다. 그러나 3세기부터 교회는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사모사타의 파울루스의 주장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입양이 아니라 본성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확언해야 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제1차 세계 공의회는 하느님의 아들이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88) 이시라고 그 신경을 통해 고백하고, “하느님의 아들은 무에서 나왔다”(89) 거나 “성부와는 실체 또는 본질이 다르다”(90) 고 주장한 아리우스를 배척했다.
  • 466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인간적 위격이 하느님의 아들의 신적 위격과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맞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와 431년 에페소 제3차 세계 공의회는 “‘말씀’은 영혼으로 생명력을 지니게 된 육신을 위격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일치시키심으로써 인간이 되셨다.”(91) 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 외에 다른 주체를 가지지 않는다. 이 제2위격은 잉태 때부터 인성을 취하시어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에페소 공의회는 431년에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태중에 인간으로 잉태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당신의 신성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영혼을 부여받은 거룩한 육체를 마리아에게서 얻으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그 위격에서 육체와 결합하였기에 사람의 몸으로 나셨다고 일컬어진다.”(92)
  • 467 그리스도 단성론자(單性論者)들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으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 본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이단에 맞서 칼케돈 제4차 세계 공의회는 451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서,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사람이시며, 신성으로는 아버지와 한 본체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한 본체이시며, “죄 말고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똑같으시고”,(93) 신성으로는 시간 이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으로는 이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태어나신, 유일하고 동일한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것을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가르치는 바이다. 한 분이시며 같은 그리스도이신 외아들 주님은, 우리가 두 본성을 혼동하거나, 변질시키거나, 분할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인정해야 한다. 이 두 본성의 차이점은 그 결합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함이 그대로 보전되어,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본체 안에 결합되었다.(94)
  • 468 칼케돈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의 인성을 일종의 위격적 주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맞서 5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5차 세계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삼위의 한 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하나의 위격(hypostasis 또는 persona)이시다.”(9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기적뿐 아니라 그분의 고통과(96) 죽음까지도, 그분의 인성에 해당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주체인 신적 위격에 귀속된다.(97) “사람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하느님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며, 거룩한 삼위의 한 분이시다.”(98)
  • 469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갈라질 수 없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시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분께서는 ‘우리 형제’ 인간이 되신 참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언제나 ‘우리 주’ 하느님이시다.
  • 로마 전례는 “그분께서는 그대로 계시면서, 그대로가 아닌 모습을 취하셨도다.”(99) 하고 노래한다. 그리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전례문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며 노래한다. “오, 외아들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이시여, 영원하신 당신께서는 저희 구원을 위하여 천주의 성모 평생 동정 마리아에게서 강생하시고, 변화되지 않고 인간이 되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오 그리스도 하느님이시여,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영광을 받으시는, 거룩하신 삼위의 한 분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100)
  • IV.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는가-
  • 470 강생의 신비스러운 결합에서, 성자는 인간 본성을 “취하셨지만 소멸시키지는 않으셨다.”(101) 그러므로 교회는 지성과 의지의 활동을 지닌 그리스도의 인간 영혼과 인간 육체의 온전한 실재성을 역사 안에서 계속 고백해 왔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매번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이 그것을 취하신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에 고유하게 속한다는 사실도 환기시켜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그 인성 안에서 존재하고 행하시는 모든 것은 ‘삼위의 한 분’으로서 존재하고 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삼위 안에서 지니시는 고유한 위격적 존재 양식을 당신의 인성에게도 전달하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육체 안에서나 영혼 안에서 모두 삼위의 신적 삶을 인간적으로 드러내신다.(102)
  •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정신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어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 말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103)
  • 그리스도의 영혼과 인간적 인식
  • 471 라오디케이아의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영혼 또는 정신을 대치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오류에 대해 교회는 영원한 아들이 인간의 영혼도 취하였다고 고백했다.(104)
  • 472 하느님의 아들이 취한 이 인간 영혼은 진정한 인간적 인식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인식은 한계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조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가는”(루카 2,52) 인간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그 때문에 경험으로 알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야만 했다.(105) 이런 사실은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당신 자신을 기꺼이 낮추신 사실과도 부합한다.(106)
  • 473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러한 하느님 아들의 진정한 인간적 인식은 그 ‘위격’의 신적 생명을 드러내는 것이었다.(107) “하느님의 아들은 인성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말씀’에 결합함으로써, 자신 안에서 하느님으로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셨으며, 이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셨다.”(108) 먼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친밀하고도 직접적인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109) 또한 성자께서는 당신의 인간적인 인식 안에서, 인간 마음속에 감추어진 생각들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의 통찰력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110)
  • 474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신 말씀의 위격으로 하느님 지혜와 일치를 이루고 계셨기에, 그 인간적 인식은 당신이 계시하러 오신 영원한 계획들을 온전히 알고 계셨다.(111)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이에 대해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112) 그것을 알리는 것은 당신의 사명이 아니라고 다른 곳에서 밝히신다.(113)
  •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
  • 475 마찬가지로, 교회는 681년 제6차 세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적이고 인간적인 두 의지와 두 작용을 지니신다고 고백하였다. 그 둘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력하는 것이어서, 사람이 되신 말씀은 성부께 완전히 복종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으로서 결정하신 모든 것을 인간으로서도 원하신다.(114)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당신의 신적 의지에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전능한 의지에 순종한다.”(115)
  • 그리스도의 참된 육체
  • 476 ‘말씀’은 참된 인성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는 묘사가 가능하다.(116) 이 때문에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은 “생생하게 그려질”(117) 수 있다. 제7차 세계 공의회에서(118) 교회는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을 성화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 477 이와 동시에 교회는 예수님의 육체를 통하여 “당신 본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인간으로 나타나셨다.”(119) 는 것을 항상 인정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지닌 개별적인 특성들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을 표현한다. 인간 육체의 모습을 취하신 그분을 성화상으로 그려 공경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신자들이 그분의 모습을 공경하는 것은 “그 모습 안에 묘사되어 있는 위격을 공경하는 것”(120) 이기 때문이다.
  • 강생하신 말씀의 성심
  • 478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생, 고뇌와 수난 동안 우리들 모두와 각자를 알고 사랑하셨으며, 우리 하나하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다. 하느님의 아들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갈라 2,20). 그분은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다. 이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은,(121) “구세주께서 영원하신 아버지와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탁월한 표지와 상징으로 여겨진다.”(122)
  • 간추림
  • 479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영원한 말씀이요 성부의 실체적 모습이신 성부의 외아들께서 강생하셨다. 그분은 신성을 잃지 않으면서 인성을 취하셨다.
  • 48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적 위격의 단일성 안에서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 48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지니신다.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아들의 단일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
  • 482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다. 이 지성과 의지는 성부와 성령과 공유하시는 당신의 신적 지성과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종속된다.
  • 483 그러므로 강생은 ‘말씀’의 유일한 위격 안에 결합된 신성과 인성의 놀라운 일치의 신비이다.
  • 제2단락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 I.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되어……
  • 484 마리아에게 주님의 탄생이 예고되면서 “충만한 때”(갈라 4,4)가 시작된다. 그것은 곧 약속과 준비의 성취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머무르고 있는”(콜로 2,9) 그분을 잉태하도록 초대되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하는 마리아의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으로 성령의 힘이 드러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실 것이다”(루카 1,35).
  • 485 성령의 파견은 언제나 성자의 파견과 연관되고, 성자의 파견을 지향한다.(123)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성령께서는 동정 마리아의 태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느님을 잉태하게 하시려고 파견되셨다. 성령께서는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하여 잉태되게 하셨다.
  • 486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인간으로 잉태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바로 ‘그리스도’, 곧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분이시다.(124) 그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목자들에게,(125) 동방 박사들에게,(126) 세례자 요한에게,(127) 그리고 제자들에게(128) 점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어떻게 “그분에게 하느님께서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는지”(사도 10,38)를 드러내는 것이다.
  • II.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 487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에 대하여 믿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마리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 신앙을 밝혀 준다.
  • 예정된 마리아
  • 488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다”(갈라 4,4). 그러나 그분에게 “몸을 마련해 주시기”(129) 위하여 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을 바라셨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삼을 이스라엘의 딸을 선택하셨는데, 그는 갈릴래아 나자렛의 한 젊은 유다 여인,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이며,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루카 1,26-27).
  •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정된 어머니의 동의가 강생에 앞서 이루어져 마치 어느 모로 여인이 죽음에 이바지한 것처럼 그렇게 또한 여인이 생명에 이바지하기를 바라셨다.(130)
  • 489 구약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사명은 거룩한 여인들의 사명을 통해서 예비되어 왔다. 맨 먼저 하와는 비록 불순명하였지만 악에게 승리할 후손을 주시리라는 약속과,(131)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132) 이 약속 덕분에 사라는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133)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인간의 모든 기대와는 달리 무능하고 약한 사람들로(134) 여겨지는 여인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35) 드보라, 룻, 유딧, 에스테르와 다른 많은 여인들을 선택하셨다. 마리아는 “신뢰로 주님께 구원을 바라고 받는 주님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빼어난 분이다. 약속의 오랜 기다림 뒤에, 마침내 빼어난 시온의 딸인 이 여인과 더불어 때가 차고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었다.”(136)
  • 원죄 없으신 잉태
  • 490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이 위대한 임무에 맞갖은 은혜를 받았다.”(137) 가브리엘 천사는 잉태를 예고하면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고(138) 인사한다. 사실 마리아는 신앙으로 자신의 소명에 대한 이러한 예고에 자유로이 동의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도되어야만 했다.
  • 491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한”(139) 마리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구원받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이 선포한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는 바로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으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공로를 미리 입으시어, 원죄에 조금도 물들지 않게 보호되셨다.(140)
  • 492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나자렛의 동정녀를 꾸며 준 더없이 뛰어난 성덕의 빛은”(141)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공로로 보아 뛰어난 방법으로 구원을 받으셨다.”(142) 성부께서는 다른 모든 창조된 인간들보다 마리아에게 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내리셨습니다”(에페 1,3).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 493 동방 전통의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온전히 거룩한 이”(Panagia)라고 불렀으며,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으로, 이를테면 성령께서 빚어 만드신 새로운 인간이시다.”(143) 하고 찬미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았다.
  •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494 남자를 모르면서도 마리아는, 성령의 힘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잉태 예고를 받았을 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144) 확신하며, “믿음의 순종으로”(145) 응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처럼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에 동의함으로써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리아는 온전한 마음으로 아무런 죄의 거리낌도 없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이고,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쳐,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였다.(146)
  •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대로 “동정 마리아는 순종하시어 자신과 온 인류에게 구원의 원인이 되셨다.”(147) 그와 더불어 적지 않은 옛 교부들이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묶어 놓은 것을 동정녀 마리아가 믿음을 통하여 풀어 주셨다.”(148) 고 말한다. 그리고 하와와 비교하여 마리아를 “살아 있는 이들의 어머니”라 부르고, 더 자주 이렇게 주장한다. “하와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149)
  •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 495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요한 2,1; 19,25)로 불린다.(150) 마리아는 당신의 아드님을 낳기 전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아 “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라고 불린다. 과연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분, 곧 육체적으로 마리아의 참아드님이 되신 분은 다름 아닌 성부의 영원한 아드님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의 제2위격이시다. 교회는 마리아를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고백한다.(151)
  • 동정 마리아
  • 496 초기의 신앙 표현들에서부터,(152) 교회는 예수님께서 오로지 성령의 힘으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다고 고백했으며, 이 사건의 육체적인 측면도 긍정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의 관여 없이 성령으로”(153) 잉태되셨다. 교부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시는 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징표를 동정 잉태에서 알아보았다.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2세기 초)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을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154) 하느님 의지와 권능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155) 참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셨고,……그 육신으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우리를 위하여 참으로 못 박히셨고……참으로 수난하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156)
  • 497 복음서의 이야기들은(157) 동정 잉태를 모든 인간적 이해력과 가능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업적으로 이해하고 있다.(158) 천사는 요셉에게 그의 약혼자 마리아에 대해서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하고 일러 준다. 교회는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약속, 곧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이사 7,14를 그리스 말로 번역한 마태 1,23)고 한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본다.
  • 498 마리아의 동정 잉태에 대하여 마르코 복음이나 신약 성경 서간들이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전설이거나,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학적으로 구성된 이야기가 아닌가 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 잉태되셨다는 신앙은 비그리스도 신자와 유다인들과 이교인들의 강력한 반대와 비웃음과 몰이해에 부딪혔다.(159) 이 동정 잉태는 이교 신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시대의 생각에서 따온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신비들의 내적 연관성”(160) 안에서, 그리고 강생에서 파스카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 안에서 바라보는 신앙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일찍이 이러한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마리아의 동정성과 출산을 몰랐으며, 주님의 죽음도 몰랐습니다. 이 세 가지 빛나는 신비는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161)
  • ‘평생 동정’ 마리아
  • 499 마리아가 동정으로 어머니가 되었다는 신앙을 더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교회는 마리아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그 순간에도,(162) 실제로 그리고 평생 동정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기에 이른다.(163) 사실 그리스도의 출생은 당신 어머니의 “완전한 동정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성화하였다.”(164) 교회 전례는 마리아를 ‘평생 동정’(Aeiparthenos)으로 찬미한다.(165)
  • 500 성경이 예수님의 형제자매에 대해 가끔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마리아의 평생 동정 사실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166) 교회는 항상 이 대목들이 동정 마리아의 다른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 왔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마태 13,55)인 야고보와 요셉은 “다른 마리아”(마태 28,1)라고 명시된 예수님의 제자 마리아의 아들들이다.(167) 구약 성경의 표현 방식대로,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을 일컫는 말이다.(168)
  • 501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유일한 아드님이시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적인 모성은(169)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로마 8,29) 삼으신 성자를 낳았으며, 그 형제들 곧 신자들을 낳아 기르는 데 모성애로 협력한다.”(170)
  • 하느님의 계획에서 본 마리아의 동정 모성
  • 502 신앙의 눈으로 계시 전체와 연관시켜서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에서 당신 아들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셨던 신비한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이유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 사명에 관련되는 만큼, 마리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 사명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관련된다.
  • 503 마리아의 동정성은 강생에서 취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171) “그분께서 취하신 인간 본성 때문에 성부에게서 멀어지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분께서는 그 신성으로는 성부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으로는 어머니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당신의 두 본성 안에서 그분은 바로 성부의 아들이시다.”(172)
  • 504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를 개시하는 새 아담(173) 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1코린 15,47).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잉태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구원 받은 인류의 머리이신(174) 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 505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정 잉태를 통하여, 신앙으로 성령 안에서 입양된 자녀들의 새로운 탄생을 개시하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175)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3). 이러한 생명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이 생명을 받아들임은 동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혼인적 소명은(176) 마리아의 동정 모성 안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 506 마리아는 동정녀이다. 그 동정성은 “어떠한 의혹도 섞이지 않은”(177) 그 믿음의 표지이며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흐트러짐 없는 헌신의 표지이기 때문이다.(178)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한 것은 자신의 신앙이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하셨다는 사실보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복되십니다.”(179)
  • 507 마리아는 교회의 전형이며, 어머니로서 또 동정녀로서 모범을 보여 주신다.(180)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받아들여 그 자신도 어머니가 된다. 실제로 교회는 복음 선포와 세례로써,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느님에게서 난 자녀들을 불멸의 새 생명으로 낳는다. 교회는 또한 신랑에게 바친 믿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지키는 동정녀이다.”(181)
  • 간추림
  • 508 하느님께서는 하와의 후손 가운데 동정 마리아를 택하시어,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삼으셨다.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는 “구원의 뛰어난 열매”이다.(182) 마리아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하게 보호되고, 일생 동안 본죄에 물들지 않았다.
  • 509 마리아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 바로 하느님이신 그 아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 510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을 “동정으로 잉태하고, 동정으로 낳고, 동정으로 길렀으며, 동정으로 젖을 먹이셨으니, 그분은 평생 동정이셨습니다.”(183) 마리아는 당신의 존재 전체로 “주님의 종”(루카 1,38)이다.
  • 511 동정 마리아는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였다.”(184) 마리아는 “인류 전체를 대표하여”(185)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였다. 동정 마리아는 순종으로써 새로운 하와, 곧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다.
  • 제3단락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
  • 512 신경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해서 단지 강생(잉태와 탄생)과 파스카(수난, 십자가에 달리심, 돌아가심, 묻히심, 저승에 가심, 부활, 승천)의 신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신경은 예수님의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생활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강생과 파스카에 관한 신앙 조문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전체를 밝혀 준다.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사도 1,1-2)은 강생과 파스카의 신비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 513 교리 교육은 상황에 맞추어 예수님 신비의 풍요로움을 모두 전개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 생애의 모든 신비들에 공통되는 몇몇 요소들(I)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예수님의 사생활(II)과, 공생활(III)의 주요한 신비들을 개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I.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신비이다
  • 514 복음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많은 것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분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공생활의 많은 부분도 언급하지 않는다.(186)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 515 복음서는 최초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187) 다른 사람들과 그 신앙을 나누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신앙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의 지상 생활 전체에서 그 신비의 자취를 볼 수 있었고, 또 보여 줄 수 있었다. 당신 탄생 때의 포대기에서부터(188) 수난의 신 포도주와(189) 부활 때의 수의에(190) 이르기까지 예수님 생애의 모든 것은 그분의 신비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기적과 말씀을 통해서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다.”(콜로 2,9)는 사실이 계시되었다. 그분의 인성은 이처럼 ‘성사’, 곧 그분의 신성과 그분께서 가져오시는 구원의 징표와 도구로 나타난다. 그분의 지상 생활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비, 곧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의 사명을 수행하신다는 사실이다.
  • 예수님 신비의 공통 특징들
  • 516 그리스도의 전 생애 ─ 말씀과 행동, 침묵과 고통, 존재와 표현 방식 ─ 는 성부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성부께서도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사람이 되셨으므로,(191) 그분 신비의 사소한 모습들도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 준다.(192)
  • 517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속량’의 신비이다. 속량(贖良)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193) 이 신비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강생으로 스스로 가난해지시어 그 가난으로 우리를 오히려 부요하게 하신다.(194) 그분의 숨겨진 생활에서는 순종으로(195)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을 정화한다.(196) 그리고 그분은 치유와 구마(驅魔)로써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태 8,17).(197)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마침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198)
  • 518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총괄 실현’(recapitulatio)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시고 고통 받으신 모든 것은 타락한 인간의 원초적인 소명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하느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실 때, 그분께서는 자신 안에서 인간의 역사 전체를 총괄적으로 실현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지름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아담으로 잃은 것, 곧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게 된다.(199)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인생의 온갖 단계를 거치셨다.(200)
  • 우리가 예수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친교
  • 519 그리스도의 모든 풍요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요, 모든 사람의 재산이다.”(20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사셨다.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202) 강생에서부터 “우리의 죄 때문에”(1코린 15,3) 돌아가시기까지,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로마 4,25) 부활하시기까지 당신 일생을 사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1요한 2,1), “늘 살아 계시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빌어 주신다”(히브 7,25). 그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살고 고통 받으신 그 모든 것을 지니시고 항상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히브 9,24) 계신다.
  • 5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203) 그분은, 당신 제자가 되어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완전한 인간”(204) 이시다. 당신을 낮추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으며,(205) 몸소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를 기도로 이끄시고,(206) 친히 가난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가난과 박해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이끄신다.(207)
  • 521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살며 겪으신 모든 것을 우리가 당신 안에서 그대로 살게 하시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살며 겪으신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분께서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다.”(208)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게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범으로 당신의 육신 안에서 사신 삶에 우리를 당신 몸의 지체로서 참여하게 하신다.
  • 우리는 예수님의 실존과 신비들을 우리 안에서 지속시키고 성취해야 합니다.……그 신비들이 우리와 온 교회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성취되도록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와 온 교회에 그 신비들을 나누고 확장시키며 또 계속하고자 하는 원의를 갖고 계십니다.……이 일은 우리에게 주시기로 계획하신 은총과 그 신비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시려는 만큼 효과를 봅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께서는 그 신비들을 우리에게서 완성하시고자 합니다.(209)
  • II.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숨은 생활의 신비들
  • 준비
  • 522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이 큰 사건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기 동안 이를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첫째 계약”의(210) 예식과 희생 제사, 표상과 상징들을 모두 그리스도를 향해 집중시키셨으며, 계속 출현하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분을 예고하신다. 그 밖에도 이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분께서 오시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불러일으키신다.
  • 523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하여(211) 파견된 주님 직전의 선구자이다.(212)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루카 1,76)인 요한은 모든 예언자를 능가하는(213) 마지막 예언자이며(214) 복음의 시작이다.(215) 그는 자기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께 인사를 드렸고,(216)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부른 “신랑의 친구”(요한 3,29)가 됨을 기뻐했다.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예수님에 앞서 온 그는 설교와 회개의 세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순교로 예수님을 증언한다.(217)
  • 524 교회는 매년 대림 시기 전례를 거행하면서 실제로 메시아를 기다린다. 신자들은 구세주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오랜 준비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새롭게 한다.(218) 교회는 ‘선구자’의 탄생과 순교를 기념하여 그의 소망과 일치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 성탄의 신비
  • 525 예수님께서는 외양간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다.(219) 순박한 목동들이 이 사건의 첫 증인들이다. 이 가난에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난다.(220) 교회는 이날 밤의 영광을 끊임없이 노래한다.
  • 동정녀 오늘 영원하신 분을 세상에 낳으시고 땅은 가까이할 수 없는 그분께 동굴을 내드립니다. 천사들과 목동들이 그분을 찬양하고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옵니다. 영원한 하느님, 작은 아기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221)
  • 526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다.(222)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223) 작은 이가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224)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나고”,(225) “위로부터 태어나야”(요한 3,7) 한다. 성탄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갖추실”(226)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예수 성탄의 신비는 이 ‘기묘한 교환’의 신비이다.
  •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과 영혼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남자의 관여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셨도다.(227)
  • 예수님 어린 시절의 신비
  • 527 예수님의 할례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이루어지는데,(228)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계약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표시이며, 율법에 속하는(229) 표시이고, 당신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예배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표시이다. 이 표시는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의 예형이다.(230)
  • 528 주님 공현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주님 공현은 요르단 강에서 받은 그분의 세례와, 카나의 혼인 잔치,(231) 그리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사실을 기념한다.(232) 복음은 주변의 이교(異敎)들을 대표하는 이 박사들이 강생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민족들의 시초라고 본다.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것은,(233) 다윗의 별이 비추는 메시아의 빛을 받아,(234) 장차 만민의 왕이 되실 분을(235) 이스라엘에서 찾았음을 보여 준다. 동방 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이방인들이 유다인을 향하고,(236) 그들로부터 구약에 담겨 있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일 때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과 온 세상의 구원자로 경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237) 주님 공현은 “많은 이방인들이 구약 성조들의 가문에 들어가고”(238) 이스라엘의 특전(239) 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529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침은(240)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속한 맏아들이심을(241) 보여 준다.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와 함께 온 이스라엘은 기다렸던 구세주를 맞으러 온다(비잔틴 전통은 이 사건을 ‘주님 맞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만민의 빛”,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인정되셨으나, “반대받는 표적”이기도 했다. 마리아에게 예언된 고통의 날카로운 칼은 또 하나의 봉헌, 곧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 앞에 준비하신” 구원을 베푸실 저 완전하고 유일한 십자가의 봉헌을 예고한다.
  • 530 이집트 피난과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은(242) 빛에 대한 어둠의 저항을 나타낸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하여 많은 박해를 받으셨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이 박해를 나누어 받게 된다.(243) 예수님께서 이집트에서 올라오신 일은(244) 이집트 탈출을 상기시키며,(245) 그분을 결정적인 해방자로 제시한다.
  •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의 신비
  • 531 예수님께서는 당신 일생의 많은 기간을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에서 사셨다. 그것은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상적인 생활, 육체노동의 생활, 하느님의 율법에 순명하는 유다인의 종교 생활,(246)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이었다. 이 시기 전체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부모에게 순종하셨으며(247)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는 것이다.
  • 532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와 당신 양부에게 순종하신 것은 제4계명을 완전히 지키신 것이다. 이 순종은 천상 아버지께 아들로서 하시는 순종의 현세적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항상 순종하신 것은 올리브 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루카 22,42)라고 하신 순종을 예고하고 미리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자렛 생활에서 일상적인 순종은 이미 아담의 불순종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복구하는 일이었다.(248)
  • 533 나자렛의 감추어진 생활은 모든 사람이 삶의 가장 일상적인 길에서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게 해 준다.
  • 나자렛 성가정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학교, 곧 복음의 학교입니다.……첫째는 침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정신을 위하여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인 침묵을 중시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성장하기를 바랍니다.……다음으로는 가정생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나자렛에서 가정생활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사랑의 친교, 간소하고도 소박한 아름다움, 그리고 성스럽고도 침해할 수 없는 특성들을 배워야 합니다. 끝으로는 노동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목수의 아들’의 나자렛 집에서, 우리는 인간 노동의 준엄하고도 구원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찬미하고자 하며……결론적으로 여기 나자렛에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노동자에게 인사를 보내고, 노동자들의 위대한 모범이시요 그들의 신적인 형제이신 분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249)
  • 534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은 일은(250)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 복음이 침묵을 깬 유일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들의 사명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신비를 엿볼 수 있게 하신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마리아와 요셉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상생활의 침묵 속에 묻혀 지내는 동안 줄곧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 III. 예수님 공생활의 신비
  • 예수님의 세례
  • 535 예수님의 공생활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251) 시작된다.(252)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수많은 죄인들, 세리와 군사들,(253)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사람들,(254) 창녀들이(255)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가셨다.” 세례자 요한은 망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굳이 세례를 받으신다. 이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마태 3,13-17)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하느님 아들로서 드러난 예수님의 공현(Epiphaneia)이다.
  • 536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이라는 당신의 사명을 수락하시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256) 이미 그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피 흘리는 죽음의 ‘세례’를 미리 받으셨다.(257)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기”(마태 3,15) 위하여 오신다. 곧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따르신다. 몸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사랑으로 죽음의 세례를 받아들이신다.(258) 이러한 수락에 성부의 목소리가 당신 아들이 마음에 든다고 응답한다.(259) 예수님께서 잉태 때부터 충만하게 지니셨던 그 성령께서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르신다.”(260)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한 성령의 원천이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담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마태 3,16), 예수님과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물이 거룩하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창조의 서막이다.
  • 537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당신 세례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미리 겪으시는 예수님과 성사적으로 비슷하게 된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속죄하는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겼다가 그분과 함께 다시 올라와야 한다. 그래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로마 6,4).
  •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세례를 통해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함께 묻읍시다. 그분과 함께 높이 올려지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내려갑시다. 그분과 함께 영광스럽게 되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올라갑시다.(261)
  • 그리스도께 일어난 모든 일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물로 씻은 뒤에 하늘 높은 곳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성부의 음성을 통해 입양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262)
  •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
  • 538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광야에서 홀로 계셨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머무르신다.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으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263) 이 시기가 끝 날 무렵, 사탄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자녀다운 자세를 변질시키려고 세 번 유혹을 시도한다. 예수님께서는 낙원에서 아담이 받은 유혹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유혹이 집약된 공격을 물리치신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루카 4,13) 예수님을 떠나간다.
  • 539 복음사가들은 이 신비한 사건이 지닌 구원적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 첫 아담은 유혹에 넘어졌으나, 예수님께서는 꿋꿋하게 서 계시는 새 아담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완전하게 수행하신다. 그 옛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하느님께 대들었던 사람들과는(264)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로써 악마를 이기셨으며, 그의 전리품을 다시 빼앗아 오시고자 “힘센 자를 묶어 놓으셨다.”(265)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자를 물리치신 것은 당신의 수난, 곧 아버지에 대한 자녀다운 사랑으로 바친 최고의 순종을 통한 승리의 예고이다.
  • 540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하느님의 아들이 어떤 식으로 메시아이신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사탄이 제시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그분께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266)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유혹자를 이기셨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교회는 해마다 40일간의 사순 시기를 통하여 광야의 예수님 신비와 결합한다.
  •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541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시작하셨다.”(267)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인간을 들어 높여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268)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심으로써 이를 행하신다. 이 모임이 바로 교회이며, 이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것이다.”(269)
  • 542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가정’ 안에 모인 사람들의 중심에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하느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징표들과 제자들의 파견을 통해서 사람들을 당신께 불러 모으신다.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당신 파스카의 위대한 신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실현하실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이렇게 일치되도록 불리었다.(270)
  • 하느님 나라의 선포
  • 543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았다. 먼저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전해진 이 메시아의 나라는(271) 모든 민족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272)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 주님의 말씀은 밭에 심은 씨앗과 비슷하여,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그리스도의 작은 양 떼에 들게 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것이며, 그런 다음에 씨앗은 저절로 싹이 터 수확 때까지 자라난다.(273)
  • 544 이 나라는 가난하고 미소한 자들, 곧 겸손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루카 4,18)(274) 파견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시는데 그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마태 5,3)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275)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다. 배고픔과(276) 목마름과(277) 궁핍을(278)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신다.(279)
  • 545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초대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28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회개를 호소하시지만, 또한 당신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들에 대한 아버지의 한없는 자비와(281)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임”(루카 15,7)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러한 사랑의 최상 증거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마태 26,28)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일이 될 것이다.
  • 546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의 전형적 형식인 비유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부르신다.(282)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하시지만,(283) 한편 근본적인 선택도 요구하신다.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284)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285) 비유는, 사람들이 마치 단단한 땅처럼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좋은 땅처럼 받아들이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과 같다.(286) 저마다 받은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하는가-(287) 이 세상에 계신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이 비유 안에 은밀하게 들어 있다. “하늘 나라의 신비”(마태 13,11)를 알아들으려면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저 바깥”(마르 4,11)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288)
  • 하느님 나라의 표징
  • 547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가 당신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많은 “기적과 이적과 표징”(사도 2,22)도 행하신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예고된 메시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289)
  • 548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들은 성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한다.(290) 이 표징들은 예수님을 믿도록 권유한다.(291) 그분께서는 그분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청하는 것을 주신다.(292) 그러므로 기적들은 성부의 일을 수행하시는 분에 대한 신앙을 굳건하게 한다. 기적들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언한다.(293)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걸려 넘어지는(294)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기적은 호기심이나 마술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들이 아니다. 그렇게 분명한 기적들을 보여 주셨음에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으며(295) 심지어 마귀의 힘을 빌려 행동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296)
  • 54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주림,(297) 불의,(298) 병과 죽음(299) 등 현세의 불행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 메시아의 표징을 보이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불행을 없애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300) 하느님 자녀의 소명을 다하지 못하게 하거나, 모든 인간적인 예속을 가져오는 가장 심각한 노예 상태, 곧 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301) 오셨다.
  • 550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바로 사탄 나라의 패배이다.(302)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예수님의 구마(驅魔)는 사람들을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303) 이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304)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승리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세워질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무로 세상을 다스리셨네.”(305)
  • ‘하늘 나라의 열쇠’
  • 551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과 함께 머물며 당신의 사명에 동참할 열두 사람을 선택하셨다.(30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나누어 주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셨다”(루카 9,2).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해 교회를 인도하시므로,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
  •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29-30).
  • 552 이 열둘의 사도단 가운데 시몬 베드로가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30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유일한 임무를 맡기셨다. 성부의 계시에 힘입어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고백했다. 이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하고 선언하셨다. “살아 있는 돌”이신(308)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위에 세우신 당신 교회에게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신다. 베드로는 그가 고백한 신앙 때문에 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어떤 쇠퇴로부터도 이 신앙을 보호하고, 형제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는 사명을 맡게 될 것이다.(309)
  • 553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이러한 ‘열쇠의 권한’은 하느님의 집, 곧 교회를 다스릴 권한을 가리킨다. “착한 목자”(요한 10,11)이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이 임무를 확인해 주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매고 푸는’ 권한은 죄를 용서하고 교의에 관한 판단을 선포하며, 교회의 규율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직무를 통하여,(310) 특히 베드로의 직무를 통하여, 이 권한을 교회에 맡기셨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맡기셨다.
  •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봄 - 거룩한 변모
  • 554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그날부터, 스승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베드로는 이러한 예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311) 다른 제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312)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높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택하신 세 증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일어난다.(313)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빛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구름이 그들을 덮고 하늘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 555 예수님께서는 잠시 동안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영광을 보이심으로써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신다. 또한 “영광 속에 들어가기”(루카 24,26)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보여 주신다. 모세와 엘리야는 산 위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율법과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했었다.(314) 예수님의 수난은 물론 성부의 뜻이며, 성자께서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를 행하신다.(315) 구름은 특히 성령의 현존을 가리킨다. “삼위께서 모두 나타나셨으니, 성부께서는 목소리로, 성자께서는 인간으로, 성령께서는 빛나는 구름으로 나타나셨다.”(316)
  • 당신께서는 산 위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어, 가능한 한 당신의 제자들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당신의 영광을 바라보고,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게 될 때 당신의 수난이 스스로 원하신 것임을 깨닫고, 당신께서 참으로 성부의 빛이심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셨나이다.(317)
  • 556 공생활 직전에는 세례가, 파스카 직전에는 거룩한 변모가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의 세례인 ‘첫 번째 재생의 신비’를 드러냈으며, 거룩한 변모는 우리 자신의 부활인 ‘두 번째 재생의 성사’(318) 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도 한다.
  • 베드로가 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바랐을 때, 그는 이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습니다.(319) 베드로여,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신 다음에 주시려고 이것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지상에서 고생하고, 지상에서 봉사하고, 지상에서 멸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내려가라. ‘생명’이신 분이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빵’이신 분이 굶주리기 위하여 내려오고, ‘길’이신 분이 길 가느라 고단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샘’이신 분이 목마르기 위하여 내려오는데, 너는 고생하기를 싫다 하느냐-(320)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 557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321) 이 결심은 예수님께서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당신의 수난과 함께 부활을 예고하셨다.(322)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하고 말씀하신다.
  • 55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된 예언자들의 죽음을 상기시키신다.(323) 그럼에도 예루살렘을 당신 곁에 모으시기 위하여 끈질기게 부르신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ㄴ). 예루살렘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며(324) 다시 한 번 간절한 소원을 표현하신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 559 예루살렘은 자신의 메시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당신을 왕으로 모시려는 군중의 시도를 언제나 피해 오셨던 예수님께서는(325) “당신의 조상 다윗”(루카 1,32)의 도성에 메시아로서 입성하실 시기를 택하시고 그 세부적인 준비를 하신다.(326)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가져오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한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영광의 임금님”(시편 24[23],7-10)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즈카 9,9) 당신의 도읍으로 들어가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교회의 표상인 시온의 딸을 계략이나 폭력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는(327) 겸손으로 정복하신다. 그러므로 그날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린이들과(328)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일 것이다. 그들은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줄 때처럼 환호한다.(329)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시편 118[117],26) 하는 그들의 환호를, 교회는 주님 파스카의 기념을 시작하는 성찬 전례의 ‘거룩하시도다’에서 다시 반복한다.
  • 56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이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완성하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교회 전례는 성지 주일에 이 일을 기념하며 장엄한 성주간을 시작한다.
  • 간추림
  • 561 “그리스도의 삶 전부가 연속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분의 침묵, 기적, 행동거지, 기도, 사람들을 위하시는 사랑,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울이시는 각별한 애정,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상의 전적인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자세, 그분의 부활, 이 모두가 당신 말씀의 실현이었고 계시의 완성이었습니다.”(330)
  • 56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실 때까지 그분을 닮아야 한다.(331)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분과 동화되어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마침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332)
  • 563 목자이든 동방 박사이든 누구나 베들레헴의 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연약한 어린 아기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경배해야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
  • 564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시고, 나자렛에서 보내신 여러 해 동안 비천한 일을 하심으로써, 가정과 노동의 일상생활 안에서 거룩함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 565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의 시작, 곧 당신의 세례 때부터 구속 사업에 온전히 봉헌된 ‘하느님의 종’이시며, 이 일은 당신 수난의 ‘세례’로 완성될 것이다.
  • 566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성부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계획에 완전히 따르심으로써 사탄을 이기시는 겸손한 메시아 예수님을 보여 준다.
  • 567 하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에서 개시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과 현존 안에서 사람들에게 빛나기 시작한다.”(333) 교회는 이 나라의 싹이며 시작이다. 그 열쇠는 베드로에게 맡겨졌다.
  • 568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의 목적은 당신 수난에 대비하여 사도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려는 데 있다. “높은 산”에 오름은 갈바리아 산에 오르기 위한 준비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이 지니시고 성사 안에서 반영되는 것, 곧 “영광의 희망”(콜로 1,27)을 나타내신다.(334)
  • 569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반대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335) 기꺼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 57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린이들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며 당신의 도성에 들어오신 메시아 왕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완성하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 제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 57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신비는, 사도들과 그 뒤를 이어 교회가 세상에 전파해야 할 기쁜 소식의 핵심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구원자이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단 한 번”(히브 9,26)에 이루어졌다.
  • 572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파스카 전후에 주신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을 충실히 따른다.(33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마르 8,31)는 사실로써 예수님의 고난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마태 20,19).
  • 573 그러므로 신앙인은 ‘속량’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복음서들은 그 상황을 충실히 전하며,(337) 다른 사료들 역시 이를 밝혀 준다.
  • 제1단락 예수님과 이스라엘
  • 574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명을 시작하신 초기부터, 일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뜻을 모았다.(338)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들(마귀를 쫓아내심,(339) 죄를 용서하심,(340)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심,(341) 율법상의 정결에 대한 독창적 해석,(342) 세리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심(343) )을 보고 악의를 가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마귀에 들렸다고 의심하기도 했다.(34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모독하고(345) 거짓 예언을 한다고(346) 비난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는 벌을 받는 종교적 죄였다.(347)
  • 575 그러므로 예수님의 많은 행동과 말씀은 일반 하느님 백성에게(348) 보다는, 요한 복음이 흔히 ‘유다인들’이라고 부르는(349)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더욱 “반대를 받는 표징”이었다.(350) 물론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관계가 단지 논쟁을 벌이는 관계만은 아니었다. 예수님께 닥칠 위험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은 바리사이들이다.(351)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12장 34절에 나오는 율법 학자의 경우처럼,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칭찬하시고, 여러 번 바리사이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352)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의 부활,(353) 신심 행위(자선, 단식, 기도),(354)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습,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계명의 중심이라는 점 등, 하느님 백성의 이 종교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여러 교리에 동조하신다.(355)
  • 576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는 예수님이 선택된 백성의 근본 제도를 거슬러 행동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제도들이란,
  • - 성문화된 계율을 완전히 지켜 율법에 복종하며, 바리사이들의 주장대로 구전되는 해석까지도 받아들임으로써 율법에 복종함;
  • -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머무르시는 거룩한 장소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닌 중심적 특성;
  • - 어떤 인간도 그 영광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유일신에 대한 신앙 등이다.
  • I. 예수님과 율법
  • 577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첫머리에 율법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그분께서는 시나이 산의 ‘첫 계약’ 때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새 계약’이 주는 은총의 빛으로 해석하셨다.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 578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며, 따라서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율법의 가장 작은 계명까지도 완전히 지킴으로써 율법을 성취해야 한다고 믿으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율법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이시다.(356)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고백했듯이, 율법을 가장 작은 계명까지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다.(357)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해마다 속죄일에 율법을 어긴 그들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실로 율법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며, 야고보 사도가 환기시키듯이, “누구든지 율법을 전부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이 됩니다”(야고 2,10).(358)
  • 579 율법은 그 문자뿐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전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바리사이들에게 소중한 원칙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 시대의 많은 유다인들을 극단적인 종교적 열성으로 몰아갔다.(359) 이 극단적 열성은 ‘위선적인’ 결의론(決疑論)에 떨어지거나,(360) 아니면 오로지,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한 사람의 의인에 의해 율법이 완성되는 새로운 하느님의 개입에 대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361)
  • 580 율법의 완전한 성취는 성자의 위격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 태어나신(362) 하느님이신 입법자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께는 율법이 더 이상 돌 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의 “가슴에”, 곧 그 “마음에”(예레 31,33) 새겨진 것으로 드러난다. 그 ‘종’은 “성실하게 공정을 펴기”(이사 42,3) 때문에 “백성을 위한 계약”(이사 42,6)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시어,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363) 사람들이 받는 “율법의 저주”를 스스로 받기까지 하신다.(364)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돌아가셨기”(히브 9,15) 때문이다.
  • 581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의 눈에 ‘율법 교사’(랍비)로 비쳐졌다.(365) 예수님께서는 종종 율법 교사들의 율법 해석 방식으로 이론을 펴신다.(366) 그러나 동시에 율법 학자들과 충돌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해석을 그들의 해석 범주 안에서 제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 7,29). 모세에게 글로 쓰여진 율법을 주시기 위하여 시나이 산에서 울려 퍼졌던 하느님의 말씀이, 행복 선언을 하신 산 위에서 예수님을 통해 다시 들리는 것이다.(367) 그 ‘말씀’은 율법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궁극적 해석을 내려 율법을 완성하신다.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33-34). 이러한 하느님의 권위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368) 바리사이들이 고집하는 일부 “사람의 전통”(369) 을 비난하신다.
  • 582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해석으로 율법의 ‘교훈적인’(370) 의미를 밝히심으로써 유다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음식물의 정결에 관한 율법을 완성하신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8-21). 하느님의 권위로써 율법에 관한 결정적인 해석을 내놓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표징(기적)으로 보증을 받고 있는(371) 율법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부 율법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특히 안식일 문제가 그러하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율법 교사식 논법을 사용해서,(372) 하느님에 대한 봉사나(373) 병 고침을 통한 이웃에 대한 봉사가(374) 안식일의 휴식을 침해하지는 않음을 일깨우신다.
  • II. 예수님과 성전
  • 583 예수님께서는 당신보다 앞서 왔던 예언자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최상의 경의를 표하셨다. 태어나신 지 40일 만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분을 성전에서 봉헌하였다.(375) 열두 살이 되셨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양친에게 일깨우시고자 성전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신다.(376) 나자렛 생활 동안 해마다 적어도 파스카 축제 때에는 성전에 올라가셨으며,(377) 공생활 동안에도 유다인들의 큰 명절에는 주기적으로 예루살렘을 순례하셨다.(378)
  • 58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장소로서 성전에 올라가셨다. 예수님께는 성전이 당신 아버지의 거처이며, 기도하는 집이다. 그래서 성전 앞뜰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것에 분개하신다.(379)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것은 당신 아버지에 대한 열정적 사랑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시편 69(68),10)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6-1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사도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성전을 계속 존중하였다.(380)
  • 585 한편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 직전에 그 찬란한 건물의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381) 이로써 당신의 파스카와 더불어 열리게 될 마지막 때의 징표를 예고하신 것이다.(382) 그러나 이 예언은 그분께서 대사제의 집에서 신문을 당하실 때 거짓 증인들이 왜곡하여 고발하였고,(383)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이 말은 조롱이 되어 예수님께 되돌아왔다.(384)
  • 58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중요한 교리를 가르치신 성전에(385) 대해 적의를 가지시기는커녕,(386) 장차 이루실 당신 교회의 초석으로 세우신(387) 베드로와 함께 성전 세를 바치기를 원하셨다.(388)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확실한 거처라고 소개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성전과 동일시하셨다.(3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를 죽음에 처한다는 것은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감을 나타내는 성전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다.(390)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391)
  • III. 구원자이신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수님
  • 587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하였지만,(392) 그들에게 진정으로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죄인들을 속량하시는 그분의 소임이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393)
  • 588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식사하실 때처럼(394) 세리들과 죄인들과도 친하게 식사를 하심으로써, 바리사이들을 놀라게 하셨다.(395)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루카 18,9)(396) 사람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단언하셨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 앞에서, 죄는 보편적인 것이므로(397) 구원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눈이 먼 것이라고 선언하신다.(398)
  • 589 예수님께서 특히 죄인들에 대한 당신의 자비로운 태도가 하느님의 태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개했다.(399)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써(400) 그들을 메시아의 잔치에 받아들임을 암시하기까지 하셨다.(401)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셨다. 그들이 놀라서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하고 말한 것은 옳은 말이 아니던가-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셨으니, 이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여 하느님을 모독한 것이거나,(402) 그게 아니라면 그 말씀은 진실이며, 그분의 인격은 하느님 이름을 드러내고 계시하는 것이 된다.(403)
  • 59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기에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마태 12,30)고 하는 절대적 요구를 정당화하실 수 있으며, 당신을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이”(마태 12,41-42)이고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404) 말씀하실 때에도, 다윗이 당신을 그의 주님 메시아라고 불렀다는 것을 상기시키실 때에도,(405)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하고 단언하실 때에도,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모두 그러하다.
  • 59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셨다.(406) 그러나 이러한 신앙 행위는 하느님 은총의 인도로(407) “위로부터 태어나기”(408)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죽는 신비로운 죽음을 거쳐야 했다. 이토록 놀라운 약속의 성취에 직면하여(409) 회개하라고 하는 이러한 요구는, 의회 법정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판단한 비극적 오해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410) 의회 의원들이 이렇게 한 것은 “무지한 탓”이기도(411) 했고, 또 “완고한”(412) 불신 때문이기도 했다.(413)
  • 간추림
  • 592 예수님께서는 시나이 산의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셨다.(414) 그 궁극적 의미를 밝혀 주시고,(415) 율법을 어긴 죄들을 속량하시어(416)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것이다.(417)
  • 593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순례 명절마다 성전에 올라가심으로써 성전을 존중하셨고,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이 거처를 열렬히 사랑하셨다. 성전은 예수님의 신비를 미리 드러낸다.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 것은, 곧 당신 자신의 죽음과, 당신의 몸이 결정적인 성전이 될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어 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 594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와 같은 일들을 행하셨는데, 이는 당신께서 바로 구원자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418) 예수님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419) 오히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라고(420) 여긴 일부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자라고 판단했다.
  • 제2단락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 I. 예수님의 재판
  • 예수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분열
  • 595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의견은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다.(421) 그들 가운데에는 바리사이 니코데모나(422) 고관인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같은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이(423)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직전에 요한 사도는, 매우 불완전하게나마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요한 12,42)고 말할 수 있었다. 성령 강림 다음 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고”(사도 6,7),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사도 15,5)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야고보 사도가 바오로 사도에게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신자가 된 이들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율법을 열성으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사도 21,20)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 596 예수님을 대하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424)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회당에서 내쫓기로 이미 합의했다.(425)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요한 11,48)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카야파 대사제는 이렇게 예언으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서 “죽을죄를 지었다.”고(426)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었으므로(427)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자로 고발하여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었다.(42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반란과 살인”(루카 23,19)으로 고발된 바라빠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셨다. 대사제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정치적으로 위협하였다.(429)
  •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 597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역사적인 복합성을 고려할 때,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아시겠지만 그 주역들(배반자 유다, 최고 의회, 빌라도)의 개인적 죄가 어떠하든, 선동을 받은 군중들의 외침이나(430) 성령 강림 뒤의 회개하라는 호소에 포함된 일반적인 책망이 있었다 해도,(431) 그 재판의 책임을 예루살렘의 유다인 전체에게 지울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심으로써,(432) 예루살렘의 유다인들과 나아가 그 지도자들의 “무지”를 인정하셨고, 예수님을 따라 베드로도 그렇게 하였다.(433) 나아가 책임 인정의(434) 표현인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하는 군중의 외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속한 다른 유다인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확대할 수는 없다.
  •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천명하였다.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에게 그리스도 수난의 책임을 차별 없이 지우거나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치 성경의 귀결이듯이, 유다인들을 하느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인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435)
  •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 수난의 장본인이었다
  • 598 교회는 그 신앙에 대한 교도권과 성인들의 증언에서, “죄인들 자신이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겪으신 모든 고난의 장본인이었고 그 도구였다.”는(436) 사실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우리 죄가 그리스도께 미친다는 점을(437) 생각하여, 교회는 주저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자주 유다인들에게만 지웠던 예수님의 처형에 대한 가장 중대한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린다.
  • 계속해서 죄에 다시 떨어지는 사람들이 이 무서운 잘못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인 만큼, 타락과 악에 빠지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음 안에서, 그들 안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거듭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우리의 죄가 유다인들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증언대로,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1코린 2,8)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주님을 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그분을 부정하면, 그것은 말하자면 그분을 우리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 된다.(438)
  •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439)
  • II.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속량하시는 죽음
  • “하느님께서 정하신 계획대로 넘겨지신 예수님”
  • 599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일은 불행한 상황들 때문에 생겨난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베드로 사도가 성령 강림 날의 첫 설교 때부터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예수님이 넘겨지셨다(사도 2,23)고 설명했듯이,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신비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이러한 어법은 예수님을 넘겨준(440)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미리 써 놓으신 각본을 수동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600 하느님께는 시간의 모든 순간이 실제적으로 현재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 ‘예정’의 영원한 계획을 수립하실 때 거기에는 당신 은총에 대한 각 사람의 자유로운 응답도 포함된다. “과연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는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분, 곧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을 없애려고,(441) 다른 민족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이 도성에 모여, 그렇게 되도록 주님의 손과 주님의 뜻으로 예정하신 일들을 다 실행하였습니다”(사도 4,27-2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442) 그들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을 허락하셨다.(443)
  •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 601 “의로운 종”의(444)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이 구원 계획은 보편적인 속량, 곧 사람들을 죄의 예속에서 해방시키는 속량의 신비로서(445) 성경에 예고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해 받았다.”고(446) 말하는 신앙 고백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1코린 15,3)는 것을 고백한다.(447) 속량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특히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성취한다.(448)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고난 받는 종에 비추어(449) 당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제시하셨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 주셨고,(450) 다음으로 사도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셨다.(451)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분을 ‘죄’로 만드셨다”
  • 602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사도적 신앙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1베드 1,18-20). 원죄의 결과인 인간의 죄는 죽음으로 처벌을 받는다.(452) 당신 아들을 종의 모습으로,(453) 곧 죄 때문에 타락하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시어,(454)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 603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었다 하여 버림받은 적이 없으시다.(455) 그러나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부와 일치시키는(456) 속량하시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죄를 짓고 헤매는 우리를 떠맡으심으로써,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씀하셨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457)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과 연대를 이루게 하시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셨고”(로마 8,32) 우리가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로마 5,10) 하셨다.
  • 하느님께서는 속량하시는 보편적 사랑을 먼저 보여 주신다
  • 604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아들을 넘겨주심으로써, 당신의 계획이 우리의 어떤 공로보다도 앞서 존재하는 관대한 사랑의 계획이라는 것을 드러내신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4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 605 이 사랑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양 비유의 결론을 통해 상기시키셨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마태 20,28)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 “많은 이들”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한정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당신을 내어 주시는 구세주 오직 한 분과 인류 전체를 대비시킨다.(459) 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아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고 가르친다.(460)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고, 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461)
  • III.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성부께 바치셨다
  •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성부께 드리는 제물이다
  • 606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462)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5-10). 성자께서는 강생하신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당신 구속 사명 안에 받아들이신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1요한 2,2) 되신 예수님의 제사는 성부와 이루는 사랑의 일치를 표현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 607 예수님 생애 전체는 성부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계획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원의로 가득 차 있다.(463) 속량을 위한 수난이 당신 강생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 12,2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그리고 또 십자가 위에서도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목마르다.”(요한 19,28)고 말씀하신다.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
  • 608 세례자 요한은 죄인들에게처럼 예수님께도 세례를 베풀기로 하고 나서,(464) 예수님을 알아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465) 이라고 표현한다. 요한은 예수님이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466) 고통을 당하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진 고난 받는 종이시며,(467) 동시에 첫 파스카 때 이스라엘의 속량을 상징하던 파스카 어린양이시라는(468)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469) 오신 그분의 사명을 표현한다.
  • 예수님께서는 성부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신다
  • 609 인류를 위한 성부의 사랑을 인간으로서 당신 마음에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요한 15,13) 때문이다. 이처럼 고난과 죽음으로 예수님의 인성은 인류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의 자유롭고 완전한 도구가 되었다.(470) 과연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또 아버지께서 구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수난과 죽음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가장 자유롭게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다.(471)
  •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생명을 자유로이 바치셨다
  • 610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 열두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던 중에,(472) 자신을 자유로이 하느님께 바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셨다. 수난 전날 아직 자유로우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성부께 드리는 자발적인 봉헌의(473) 기념으로 삼으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 611 이 순간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는 당신 희생의 “기념”이(474)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봉헌에 사도들도 포함시키시고, 그들에게 이를 계속할 것을 명하신다.(475)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도들을 새로운 계약의 사제로 세우신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476)
  • 겟세마니의 고뇌
  • 61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을 바치심으로써(477) 미리 맛보신 새로운 계약의 잔을 겟세마니의 고뇌 중에(478)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479) 아버지의 손에서 다시 받으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인간적 공포를 그렇게 표현하셨다. 실로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의 인성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성과는 달리 예수님의 인성에는 죽음의 원인인(480) 죄가 전혀 없다.(481)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인성은 “생명의 영도자”,(482) “살아 있는 자”(483) 의 신적 위격이 취하신 인성이다. 당신의 인간적 의지로 성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받아들임으로써,(48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1베드 2,24) 당신 죽음을 속량을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신다.
  •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일하고 결정적인 희생 제사다
  • 613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485) 을 통해서 인류의 결정적인 속량을 완성하는 파스카의 희생 제사이며,(486)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487) 새로운 계약의 희생 제사이다.(488) 신약의 이 제사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성자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489)
  • 614 그리스도의 이 희생 제사는 유일하며, 모든 제사들을 완성하고 초월한다.(490) 이 희생 제사는 우선 하느님 아버지께서 몸소 주신 선물이다. 바로 성부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내어 주신 것이다.(491)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자유로이, 사랑으로,(492) 성령을 통해서(493)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기 위하여 성부께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는(494) 봉헌이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을 당신의 순종으로 바꾸신다
  • 615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은 고난 받는 종의 대역, 곧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일을 맡아 완수하셨다.(495)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과오를 보상하셨고, 아버지께 우리의 죄를 배상해 드리셨다.(496)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신다
  • 616 이 끝없는 사랑(497)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속량적, 배상적, 속죄적 그리고 보상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을 제물로 바치실 때 우리 모두를 인식하고 사랑하셨다.(498)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5,14). 사람은 제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은 모든 사람들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품으며,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머리가 되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제사가 된다.
  • 617 트리엔트 공의회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거룩하신 당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을 얻어 주셨다.”(499) 고 가르침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근원”으로서(500) 그리스도 희생 제사의 특별한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고 교회는 다음과 같은 노래로 십자가를 경배한다. “오! 십자가, 유일한 희망이여, 하례하나이다.”(501)
  •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참여한다
  • 618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502) 이신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신 하느님으로서 당신 위격 안에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기”(503) 때문에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신다.”(504)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505)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기 때문이다.(506)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속량을 위한 당신 희생 제사의 첫 수혜자들인 바로 그들이 당신 희생 제사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507) 속량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에 그 누구보다도 가장 긴밀히 참여한 분은 바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이다.(508)
  •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하나뿐이다. 십자가 이외에, 하늘에 오르는 다른 사다리는 없다.(509)
  • 간추림
  • 619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1코린 15,3).
  • 620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셨기”(1요한 4,10)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2코린 5,19).
  • 62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유로이 당신을 바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중에 이러한 선물을 미리 보여 주시고 실현하신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 622 그리스도의 속량은 다음과 같다. 그분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곧,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요한 13,1) 그들이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그 헛된 소행에서 속량되게(510) 하려고 오신 것이다.
  • 62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아버지께 사랑으로 온전히 순종하시어,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는(511) 고난 받는 종의 속죄 사명을 완수하신다.(512)
  • 제3단락 예수 그리스도께서 묻히셨다
  • 62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히브 2,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 안에서 당신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도록”(1코린 15,3)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맛보도록’, 곧 죽음의 상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순간과 부활하신 순간 사이에 그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상태를 경험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상태는 그분께서 묻히시고 저승에 가신 신비이다.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께서는,(513) 우주 전체에 평화를 가져오는(514)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515) 다음 취하시는 하느님의 “안식”을(516) 드러낸다. 이것이 성토요일의 신비이다.
  • 육신을 지니고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
  • 625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머무르심으로써, 부활 이전에 고통당할 수 있는 상태와 부활하신 현재의 영광스러운 상태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바로 ‘살아 계신’ 분, 곧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묵시 1,18).
  • 하느님(성자)께서는 자연 질서에 따라 죽음이 영혼과 육신을 갈라놓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그러나 스스로 삶과 죽음이 만나는 장소가 되시고자, 부활로써 육신과 영혼을 다시 결합시키셨다. 이는 죽음으로 생기는 자연 분해를 멈추게 하시고, 당신 스스로 분리된 부분들을 위한 결합의 근원이 되심으로써 이루어졌다.(517)
  • 626 죽임을 당하신 “생명의 영도자”께서(518) 바로 “부활하여 살아 계신 분”이시기(519)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죽음으로 분리된 그 영혼과 육신을 계속 지니고 있음은 당연하다.
  •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었다 해도, 그 신성이 육체와 영혼에 따로 따로 갈라져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 위격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의 육신과 영혼은 처음부터 ‘말씀’의 위격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죽음으로 서로 분리되기는 했지만 그 영혼과 육신은 각기 동일하고 유일한 말씀의 위격과 더불어 있었다.(520)
  •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다”
  • 627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으로 사신 지상 생활을 마감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육신은 하느님 아들의 위격과 결합되어 있어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기에”(사도 2,24) 다른 시체들처럼 썩어 없어지지 않았다. “하느님의 힘이 그리스도의 육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셨다.”(521)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갔다.”(이사 53,8)는 말과,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도 2,26-27)(522) 하는 말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사흗날의”(1코린 15,4;루카 24,46)(523) 예수님 부활이 그 징표이다. 당시 사람들은 부패가 나흘째 되는 날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24)
  • “그리스도와 함께 묻혀……”
  • 628 세례의 본래적이고 온전한 표징은 물에 잠기는 것이다. 물에 잠기는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하여 죄에 대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묻힘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525)
  • 간추림
  • 629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셨다.(526)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죽어 묻히신 것이다.
  • 630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신적 위격은 죽음으로 분리된 그 영혼과 육신을 계속 지니고 계셨다. 이 때문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몸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사도 13,37).
  • 제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 631 예수님께서는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습니다.……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에페 4,9-10).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심과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같은 조항에서 고백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파스카 안에서, 바로 죽음에서 생명이 솟아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인류를 밝게 비추시는 샛별이여.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527)
  • 제1단락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셨다
  • 632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1코린 15,20)고(528) 하는 신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죽은 이들의 거처에 머물러 계셨다는 사실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529) 이것은 사도적 설교가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신 사실에 부여한 첫째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겪으셨고, 그 영혼은 죽은 이들의 거처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곳에 묶여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구원자로서 그곳에 내려가신 것이다.(530)
  • 633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 내려가신 죽은 이들의 거처를 성경은 저승이나 셔올(지옥)이라고 하는데,(531) 이곳에 있는 이들이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532) 사실 악인이건 의인이건 구세주를 기다리는 모든 죽은 이의 경우가 그렇듯이,(533)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불쌍한 라자로의 비유에서 보여 주시듯이(534) 그들의 운명이 모두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 구해 내신 것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자신들의 해방자를 기다리던 거룩한 영혼들이었다.”(535)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떨어진 이들을 구하거나(536) 저주받은 지옥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537) 당신보다 먼저 간 의인들을 해방시키고자 저승에 가신 것이다.(538)
  • 634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1베드 4,6).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심은 구원의 복음 선포의 충만한 완성이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의 궁극적 단계이며 시간 안에 압축된 단계이지만, 구원된 모든 사람이 속량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구원 사업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실제적인 의미에서 무한히 방대한 단계이다.
  • 635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나게”(요한 5,25) 하시고자 죽음의 심연으로 내려가셨다.(539) “생명의 영도자”이신(540)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다”(히브 2,14-15).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묵시 1,18),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을 것이다”(필리 2,10).
  • 오늘 깊은 침묵이 온 땅을 덮고 있습니다. 하나의 깊은 침묵이요 고독입니다. 임금님께서 주무시기에 깊은 침묵입니다. 하느님께서 육신을 지니고 잠드셨으며, 옛적부터 잠들어 있던 이들을 깨우러 가셨기에 땅은 떨며 말을 잃었습니다.……주님은 잃어버린 양인 원조 아담을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죽음의 그늘 밑, 어두움 속에 앉아 있는 모든 이를 만나러 가고자 하십니다. 그들의 하느님이며 동시에 그들의 후손이신 그분은 아담과 함께 묶여 있는 하와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자 찾아가십니다.……“나는 너의 하느님이지만 너를 위하여 너의 아들이 되었다.……잠자는 너는 잠에서 깨어나거라. 지옥의 사슬에 매여 있도록 너를 창조하지 않았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나오너라. 나는 죽은 이들의 ‘생명’이니라.”(541)
  • 간추림
  • 636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셨다.”는 표현으로써 신경은 예수님이 참으로 죽으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당신이 죽으시어 죽음과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히브 2,14) 악마를 멸망시키셨다는 것을 고백한다.
  • 637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적 위격과 결합된 영혼으로 죽은 이들의 거처로 내려가셨다. 그분은 당신보다 앞서 간 의인들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셨다.
  • 제2단락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 638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사도 13,32-33).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신앙 진리의 정수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를 중심 진리로 믿고 실천했으며, 성전(聖傳)이 근본 진리로 전승하였고, 신약 성경의 기록으로 확립되어 십자가와 함께 파스카 신비의 핵심 부분으로 가르쳐 온 신앙 진리이다.
  •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도다.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도다.(542)
  • I. 역사적이며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
  • 639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는 신약 성경이 증언하듯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들을 보여 주는 실제 사건이다. 서기 56년경에 이미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사도는 여기서, 다마스쿠스 성문 근처에서 개종한 뒤에 알게 된 부활에 대한 살아 있는 전승을 말하고 있다.(543)
  • 빈 무덤
  • 640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파스카 사건의 테두리 안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요소는 바로 빈 무덤이다. 빈 무덤 자체가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시체가 무덤 안에 없다는 사실은 달리 설명될 수도 있다.(544) 그럼에도 빈 무덤은 모든 사람에게 핵심적 징표가 된다. 제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인정하는 첫걸음이었다. 먼저 거룩한 여인들의 경우가 그러했고(545) 다음에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했다.(546)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요한 20,2)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요한 20,6) 발견하고, “보고 믿었다.”고(547) 한다. 이는 그가 빈 무덤의 상태를 보고(548)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사람이 한 일일 수 없으며, 라자로의 경우와는 달리(549) 예수님이 단순히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 부활하신 분의 발현
  • 641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거룩한 여인들이 처음으로 부활하신 분을 만났다.(550) 그들은 성금요일 저녁에 안식일이 다가오기 때문에 서둘러 매장했던(551)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마저 발라 드리려고 무덤에 갔다.(55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도들에게 알린 첫 사람은 여인들이었다.(553) 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시는데, 먼저 베드로에게 그리고 이어서 열두 사도들에게 나타나신다.(554) 베드로는 형제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도록 부름을 받았기에(555) 그들보다 먼저 부활하신 그분을 보았고, 그의 증언을 듣자 공동체는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외친다.
  • 642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일어난 모든 일은, 모든 사도를 ─ 특히 베드로를 ─ 부활 날 아침에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건설에 참여시킨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의 증인들로서 그분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다. 초기 신자 공동체의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던, 그리고 대부분이 아직 그들 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들의 직접적인 증언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은(556) 우선 베드로와 열두 사도였으나, 그들뿐이 아니었다. 바오로는 야고보와 모든 사도 외에도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557)
  • 643 이런 증언들을 앞에 두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물리적인 차원을 벗어난 어떤 것으로 해석하기는 불가능하며, 이를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제자들의 신앙이, 그들의 스승이 미리 알려 주셨듯이, 스승의 수난과 십자가 위의 죽음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여러 사실에서 분명해진다.(558) 수난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제자들은(적어도 그들 가운데 몇몇은) 부활 소식을 쉽게 믿지 못했다. 복음서들은 우리에게 신비로운 열광에 넘치는 공동체를 보여 주기는커녕 기가 꺾이고(“침통한 표정으로” 루카 24,17) 두려워하는(559)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때문에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온 거룩한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했으며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루카 24,11).(560)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 644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 앞에서도 여전히 의심할 정도로,(561) 제자들에게는 부활이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그들은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562)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였다”(루카 24,41). 토마스도 같은 의심의 시험을 겪게 된다.(563) 그리고 마태오 사도가 전하는 갈릴래아의 마지막 발현 때에도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 이런 이유로, 부활이 사도들의 신앙의 (또는 경솔한 신앙의) 산물이었다는 가설은 신빙성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부활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 하느님 은총의 작용으로 ─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서 생겨난 것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한 인성
  • 64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만지게 하시고,(564)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써(565)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끄시며,(566)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나타나 부활하신 그 육신이 수난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는,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육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567) 한편 이 참되고 실제적인 육신은 영광스러운 육신의 새로운 특성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육신은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나타날 수가 있다.(568) 왜냐하면 그분의 인성은 더 이상 지상에 매여 있지 않고 다만 성부의 신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569) 이런 이유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정원지기의 모습이나(570) 또는 제자들에게 친숙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마르 16,12) 등 얼마든지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이는 분명 그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571)
  • 646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신이 부활 전에 야이로의 딸, 나인의 젊은이, 라자로 등을 다시 살리신 경우처럼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적적인 사건들이었지만 이 기적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지상의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을 뿐이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다시 죽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신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진다. 예수님의 몸은 그 영광스러운 상태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늘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572)
  • 초월적 사건인 부활
  • 647 부활 성야의 ‘부활 찬송’(Exultet)은 “오, 참으로 복된 밤! 너 홀로 때와 시를 알고 있었으니, 너 홀로 죽은 이들의 세계에서 살아 나오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았도다.”(573) 하고 노래한다. 사실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고 어느 복음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았다.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다른 생명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부활 사건의 핵심은 감각 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빈 무덤이라는 표징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만났다는 사실로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확인되지만, 역사를 초월하고 넘어선다는 면에서 부활은 여전히 신앙의 신비의 핵심에 머물러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시고(574) 다만 당신 제자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이다”(사도 13,31).
  • II. 부활 - 거룩한 삼위의 업적
  • 648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피조물과 역사 안에 초월적으로 개입하셨다는 점에서 신앙의 대상이다. 부활 안에서 삼위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함께 일하시며 또 각 위의 독자성을 드러내기도 하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고”(사도 2,24) 그로써 그 인성을 ─ 그 육신과 함께 ─ 삼위일체 안으로 완전히 이끌어 들이신 성부의 권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로마 1,4) 계시되신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은 인성을 되살리시고, 그분을 주님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부르신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난다고 강조한다.(575)
  • 649 성자께서는 당신의 신적 능력으로 부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가 부활할(동사 ‘부활하다’의 능동태(576) )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7-18).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1테살 4,14).
  • 650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위격에서부터 부활을 관상한다. 이 위격은 죽음으로 분리된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신에 결합된 채로 남아 있었다. “인간의 이 두 구성체 안에 남아 있는 신성의 단일성으로 이 둘은 다시 결합됩니다. 이처럼 두 구성체의 결합이 분리됨으로써 죽음이 오고 분리된 이 둘의 결합으로 부활이 일어납니다.”(577)
  • III. 부활의 의미와 구원 효과
  • 651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부활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들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던 당신의 신적 권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부활로써 보여 주셨으므로, 비록 인간의 정신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 모든 진리는 정당화된다.
  • 652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의 약속과,(578) 예수님께서 사시는 동안 하신 약속의(579) 실현이다. “성경 말씀대로”라는(580)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예언들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 653 예수님의 신성의 진실성은 그분의 부활로 확인되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Ego eimi)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께서 바로 “나다”는 것, 곧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 자신이시라는 것을 증명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천명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사도 13,32-33).(581)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 아들의 강생의 신비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활은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른 강생의 완성이다.
  • 654 파스카의 신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해 주시고,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 얻게 해 주는 의화이다.(582)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의화는 죄로 생겨난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은총에 대한 새로운 참여이다.(583)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가서 내 형제들에게 전하여라.”(마태 28,10)(584) 하고 제자들을 형제라 부르셨듯이, 부활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게 하는 하느님의 양자 입양을 실현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이다. 이 양자 입양은 그분의 부활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외아들의 생명에 실제적으로 참여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 655 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 ─ 은 장차 우리 부활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 이 완성을 기다리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 사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앞으로 올 세상의 힘을 맛본”(히브 6,5), 그들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려 간다.(585) 이는 그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2코린 5,15).
  • 간추림
  • 656 부활 신앙은 부활하신 분을 실제로 만난 제자들이 역사적으로 증언한 사건과,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간다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사건을 그 대상으로 한다.
  • 657 빈 무덤과 흩어진 수의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죽음과 부패의 사슬을 벗어났음을 뜻한다. 이것들은 제자들을 부활하신 분과 만나도록 준비시킨다.
  • 658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한 첫 사람”(콜로 1,18)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은 우리 영혼을 의화시키심으로써,(586) 장차에는 우리 육신을 다시 살리심으로써(587) 우리 자신의 부활의 근원이 되신다.
  • 제6절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
  • 65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그리스도의 육신은 그 육신이 언제나 누리는 새롭고 초자연적인 특성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588) 부활의 순간부터 영광스럽게 되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음식을 먹고 마시며(589)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40일 동안에는,(590) 아직도 그분의 영광은 보통 인간의 모습에 가려져 있다.(591) 예수님의 마지막 발현은, 구름과(592) 하늘로(593) 상징되는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그분의 인성이 결정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맺는데, 이제 그분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594) 그분이 바오로를 사도로 임명하는(595) 마지막 발현에서, “칠삭둥이 같은”(1코린 15,8) 그에게 당신을 나타내신 것은 온전히 예외적이고 유일한 일이다.
  • 660 이 기간 동안 부활하신 그분의 영광이 가려져 있는 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신비스런 말씀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이 말씀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부 오른편에 오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다르게 나타난다. 역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성격을 지닌 승천 사건은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가는 표지이다.
  • 661 이 마지막 단계인 승천은 첫 번째 단계인 강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에게서 내려오신” 분, 곧 그리스도만이 “아버지께 가실” 수 있다.(596)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597)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능력만으로는 “아버지의 집”에,(598) 하느님의 생명과 지복(至福)에 다다를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인간에게 이 길을 열어 주시어, “우리 으뜸이며 선구자로 앞서 가시면서……당신 지체인 우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599) 하실 수 있었다.
  • 66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림은 승천으로 하늘에 높이 오름을 의미하고 예고한다. 십자가는 승천의 시작이다.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유일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히브 9,24).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사제직을 영원히 수행하고 계신다. 그분은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신다”(히브 7,25).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히브 9,11)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경배하는 전례의 중심이며 주재자이시다.(600)
  • 663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성부 오른쪽이라는 말을 우리는 천주성의 영광과 영예라고 이해한다. 하느님이시며 성부와 한 본체로서 모든 시대 이전에 하느님의 아들로 존재하시던 분께서 강생하셨다가 육신이 영광스럽게 된 후 그 육신을 지니고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601)
  • 664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심은 메시아 나라의 시작, 곧 사람의 아들에 관해 예언자 다니엘이 보았던 환시의 성취를 의미한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이때부터 사도들은 “끝이 없을 나라”의(602) 증인들이 되었다.
  • 간추림
  • 665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느님의 천상 영역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감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지만(603) 그때까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실 것이다.(604)
  • 666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가셔서, 당신 몸의 지체인 우리가 언젠가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신다.
  • 66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에 단 한 번 결정적으로 들어가시어, 언제나 우리에게 성령이 내리실 것을 보장하시는 중개자로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신다.
  • 제7절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 I.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이미 교회를 통하여 다스리고 계신다……
  • 668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 인성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위에 참여함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지니고 계신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계신다. 성부께서 “만물을 그분 발 아래 굴복시키셨기” 때문이다(에페 1,21-22).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주님이시며(605) 역사의 주님이시다. 인간 역사와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데 모아”(606) 그분 안에서 초월적 절정에 이른다.
  • 669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607) 하늘로 올려지고 영광스럽게 되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교회 안에 머무르신다. 속량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교회에 행사하시는 권위의 원천이다.(608)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609) 는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것이다.”(610)
  • 670 예수님의 승천 이후 하느님의 계획은 그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 우리는 이미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1요한 2,18).(611) “그러므로 이미 세기들의 종말이 우리에게 다가왔으며 세상의 쇄신도 되돌이킬 수 없이 결정되어 이 현세에서 어느 모로 미리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가 이미 지상에서 참된 성덕으로 불완전하게나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612) 그리스도의 나라는 교회의 복음 선포에 수반하는(613) 기적적인 표징들로써(614) 이미 그 현존을 드러내고 있다.
  •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할 때까지……
  • 671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미 당신의 교회 안에 현존하지만, 아직은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루카 21,27) 오시는(615) 왕의 지상 내림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로 악의 세력의(616) 뿌리는 정복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할 때까지,(617) “의로움이 깃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순례하는 교회는 자신의 성사들 안에서 그리고 이 시대에 딸린 제도 안에서 지나갈 이 현세의 모습을 지니고, 아직까지 신음하고 진통을 겪으며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618)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기 위하여(619) 특히 성찬 전례 중에(620)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621)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 672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 왕국이 영광스럽게 세워질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밝히셨다.(622) 예언자들의 말에 따르면(623) 그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결정적인 질서를 가져다 줄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금은 성령과 증거의 때이지만,(624) 또한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는(625) 마지막 때의 싸움이 시작되는(626) “재난”과(627) 악의 시련으로(628) 얼룩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기다림과 깨어 있음의 시기이다.(629)
  • 이스라엘의 희망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 673 비록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지만”(사도 1,7)(630) 승천 이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임박해(631) 있다. 이 종말론적 사건과 그에 앞서 닥칠 마지막 시련은 비록 ‘유보’되어 있기는 해도(632)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633)
  • 674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역사의 어느 순간에든 이루어질 수 있지만,(634) “믿지 않는”(로마 11,20)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함(635)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636) 예수님을 인정할 때까지 보류되고 있다. 성령 강림 뒤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물론 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사도 3,19-21). 그리고 바오로 사도도 이에 동의한다.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로마 11,15) 메시아의 구원으로 들어가는 “이방 민족들의 풍성한 축복”에(637) 뒤이은 “유다인들의 풍성한 축복”은(638)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1코린 15,28),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에페 4,13) 해 줄 것이다.
  • 교회의 마지막 시련
  • 675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교회는 많은 신자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게 될 마지막 시련을 겪어야 한다.(639) 교회의 지상 순례에 따르는 이 박해는,(640) 진리를 저버리는 대가로 인간의 문제를 외견상 해결해 주는 종교적 사기의 형태로 ‘죄악의 신비’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최고의 종교적 사기는 거짓 그리스도, 곧 가짜 메시아의 사기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느님과 육신을 지니고 오신 하느님의 메시아 대신에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641)
  • 676 거짓 그리스도의 이 사기는, 역사를 넘어 종말의 심판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역사 안에서 이룬다고 주장할 때마다 이미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교회는 장차의 메시아 나라를 왜곡한 이른바 ‘천년 왕국설’과 그 완화된 형태까지도 배격했으며,(642) 특히 “본질적으로 사악한” 세속화된 메시아 신앙의 정치적 형태를 배격했습니다.(643)
  • 677 교회는 그 죽음과 부활 안에서 주님을 따르는 이 마지막 파스카를 통과해야만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644) 그러므로 이 나라는 상승적인 발전에 따른 교회의 역사적 승리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645) 당신의 신부를 하늘에서 내려보내실(646) 하느님께서 악의 마지막 발악에 대해 승리하심으로써 완성될 것이다.(647) 악의 반역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는, 지나갈 이 세상의 우주적인 마지막 동요가 있고 나서(648) 최후의 심판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649)
  • II.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 678 예언자들과(650) 세례자 요한에 뒤이어(651) 예수님께서는 설교 중에 마지막 날의 심판을 예고하셨다. 그때에는 각자의 행동과(652) 마음속의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653)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고의적 불신이 단죄받을 것이다.(654) 이웃에 대한 태도에서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거부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655)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 679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속자로서 인간의 모든 일과 마음을 결정적으로 판단할 충만한 권한이 있으시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 권한을 ‘획득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요한 5,22) 넘겨주셨다.(656) 그런데 아들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며,(657)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658)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은총을 거절한 사람은 저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며,(659) 각자가 한 일에 따라 받을 뿐 아니라,(660) 사랑의 성령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661)
  • 간추림
  • 680 주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이미 다스리고 계시지만 아직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께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승리는 악의 세력의 마지막 공격을 거쳐야 나타날 것이다.
  • 681 세상 종말에 있을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싸여 오셔서, 역사 안에서 밀과 가라지처럼 함께 자란 악에 대한 선의 결정적 승리를 이루실 것이다.
  • 682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셔서 마음속에 감추어진 의향을 드러나게 하시고, 각자에게 그의 행업에 따라, 그리고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한 것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