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제 1 장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인간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 I. 하느님을 향한 갈망
- 27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 인간 존엄성의 빼어난 이유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간의 소명에 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존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을 자유로이 인정하고 자기 창조주께 자신을 맡겨 드리지 않고서는 인간은 온전히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없다.(1)
- 28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그들의 신앙과 종교적 행위들(기도, 제사, 예배, 묵상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찾는 길을 표현해 왔다. 이러한 표현 양식들은, 비록 모호한 점들을 내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매우 보편적인 것들이므로 인간을 종교적인 존재라고 일컬을 수 있다.
-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6-28).
- 29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2) 을 종종 망각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명백하게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들은 매우 다양한 근원에서 비롯될 수 있다.(3) 곧 세상의 불행에 대한 반발, 종교적인 무지나 무관심, 현세와 재물에 대한 근심,(4) 신앙인들의 좋지 못한 표양, 종교에 대한 적대적 사조, 그리고 끝으로, 하느님이 두려워 몸을 숨기며,(5) 그분의 부름을 듣고 달아나는,(6) 죄인인 인간의 태도 등이다.
- 30 “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기뻐하여라”(시편 105[104],3). 비록 인간은 하느님을 잊거나 거부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모든 이를 끊임없이 부르신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느님을 찾으려면 자신의 모든 지성적 노력, 올바른 지향, ‘바른 마음’, 그리고 하느님을 찾도록 가르치는 다른 이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 “주님, 주님께서는 위대하시고 크게 기림직하옵시며, 그 힘은 능하시고 그 지혜로우심은 헤아릴 길 없나이다.” 당신께서 내신 한 줌 창조물인 인간이, 죽을 운명을 지녔으며, 자신의 죄와 “당신께서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신다.”는 증거를 스스로 지닌 바로 그 인간이 당신을 기리려 하나이다. 당신의 한 줌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찬미하여 기쁨을 누리도록 인간을 일깨워 주십니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7)
- II. 하느님 인식에 이르는 길
- 31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부름 받아, 하느님을 찾고 있는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르는 몇 가지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길은,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 얻어진 증거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참된 확실성에 이르게 하는 ‘일관성과 설득력을 가진 논증’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라 하기도 한다.
-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이러한 ‘길’들은 창조계, 곧 물질세계와 인간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 32 세계: 운동과 변화, 우연, 세상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우리는 우주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다.
- 바오로 사도는 이교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19-20).(8)
- 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땅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바다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드넓게 퍼져 가는 대기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하늘의 아름다움에게 묻고……이 모든 실재하는 것에게 물어보십시오. 모든 것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이렇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들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고백입니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들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그 누가 만들었겠습니까-”(9)
- 33 인간: 진리와 아름다움을 향한 개방성, 윤리적 선에 대한 감각, 자유와 양심의 소리, 무한과 행복에 대한 갈망 등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묻는다.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 영혼의 표지들을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씨앗은 한갓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10) 이므로, 이 영혼의 근원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 34 세계와 인간은 자신 안에 스스로 최초 원인과 최종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도 마침도 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의 ‘존재’에 참여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여러 가지 ‘길’을 통하여 “모두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11) 제1원인이며 최종 목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 35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과 친밀해지도록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자 하셨다. 그럼에도 하느님 존재에 대한 증거들은 신앙을 준비시킬 수 있으며, 신앙이 인간의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줄 수 있다.
- III. 하느님 인식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 36 “우리 어머니인 거룩한 교회는, 인간이 이성의 타고난 빛을 통하여 피조물로부터 출발하여 만물의 근원이며 목적이신 하느님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가르친다.”(12) 이러한 능력이 없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27)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 37 한편 인간이 처한 역사적 조건들 안에서 이성의 빛만으로 하느님을 인식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 간단히 말해서, 실제로 인간 이성이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빛으로써, 당신 섭리로 세상을 보호하고 다스리시는 인격적인 하느님과, 창조주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어 놓으신 자연법에 대한 참되고 확실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본성적 능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결과를 얻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진리들은 감각적인 사물들의 질서를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구체적인 행동에 적용되고 삶을 형성하게 될 때에는 자기를 바치고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진리들을 얻기 위해서 인간의 정신은 감각과 상상력의 충동뿐 아니라, 원죄에서 발생한 그릇된 욕망들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일들에서, 스스로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들이 거짓이거나 적어도 불확실한 것이라고 쉽게 믿어 버립니다.(13)
- 38 그러므로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것들뿐 아니라 “이성으로 접근 가능한 종교적 윤리적 진리들도 현재의 인간 조건에서도 더 쉽게, 확실히, 오류 없이 알기 위해서는”(14) 하느님 계시의 빛이 필요하다.
- IV. 하느님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 39 교회는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옹호함으로써, 모든 인간에게 또 모든 인간과 더불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확신은 다른 종교, 철학, 과학, 그리고 또 믿지 않는 사람이나 무신론자들과 나누는 대화의 출발점이 된다.
- 40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말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우리는 단지 피조물들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고 인식과 사고의 한계를 가진 인간적 방식으로만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41 피조물들은 모두 하느님과 어떠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더욱더 그러하다. 피조물들의 다양한 완전성(진·선·미)은 하느님의 무한한 완전성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조물의 완전성을 근거로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 13,5).
- 42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신다. 따라서 “형언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15) 하느님을 우리의 인간적인 표현으로 뒤바꾸지 않으려면, 우리의 언어가 가지는 한계와 상상과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정화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은 언제나 하느님의 신비에 미치지 못한다.
- 43 이처럼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언어가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하느님께 실제로 다다르기는 하지만 그분의 무한한 순수성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참으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그 차이점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16) “우리는 결코 하느님께서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다만 무엇이 아닌지 알 수 있을 뿐이며, 다른 존재들이 그분과 관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17)
- 간추림
- 44 인간은 그 본성으로나 소명으로나 종교적인 존재이다.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인간은 오직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자유로이 살아갈 때에만 그 삶이 충만해진다.
- 45 인간은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으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제가 온전히 당신 안에 있을 때 더 이상 고통도 시련도 없을 것이며, 당신으로 충만할 때 제 삶은 완성될 것입니다.”(18)
- 46 피조물들의 알림과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 인간은 만물의 원인이며 목적이신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
- 47 교회는, 인간이 타고난 이성의 빛의 도움으로 우리의 창조주이고 주님이시며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을 그분의 업적을 통하여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19)
- 48 비록 한정된 우리의 언어가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지만,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에 대한 유사성을 지닌 피조물들의 다양한 완전성에 근거하여 우리는 실제로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 49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진다.”(20)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과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느님의 빛을 가져다주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들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