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 마르코(申錫福, Marcus)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신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 온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이에 앞서 대구 포졸들은 신 마르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하였다. 또한 여러 날을 수소문한 끝에 그가 장사를 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신 마르코가 돌아올 만한 길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김해 가산이라는 곳에서 신 마르코를 만나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한 다음, 곧장 체포하여 밀양으로 압송하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신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신 마르코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쫓았다. 그들 일행을 만난 신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에게 수작을 하며, 신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신 마르코는 대구로 가는 동안 더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대구에 도착해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을 듣자 화가 나서 다시 신 마르코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며칠을 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하였으니, 이때가 1866년 3월 31일(또는 3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이후 신석복 마르코의 가족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신석복 마르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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