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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232 그리스도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참조) 세례를 받는다. 먼저 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요구하는 세 가지의 질문에 “믿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삼위일체에 근거한다.”(33)
  • 233 그리스도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지 그 ‘이름들’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34) 왜냐하면 전능하신 성부, 독생 성자, 성령, 곧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느님께서만 계시기 때문이다.
  • 234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35) 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이다. “구원의 역사[救世史]는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신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리시고, 죄에서 돌아서는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결합시키시려는 길과 방법의 역사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36)
  • 235 이 단락에서는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가 어떤 방법으로 계시되었으며(II), 교회는 어떻게 이 신비에 관한 신앙 교리를 정형화하였고(III), 끝으로 천주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심으로써 창조와 구원과 성화의 ‘자비로운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IV) 간략하게 제시할 것이다.
  • 236 교부들은 신학(Theologia)과 경륜(Oikonomia)을 구별하여, 앞의 용어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인 생명의 신비를, 뒤의 용어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모든 업적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신학은 경륜을 통하여 우리에게 밝혀진다. 그러나 반대로 경륜 전체를 밝혀 주는 것은 신학이다. 하느님의 업적은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준다. 반대로 당신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는 당신의 업적에 대한 이해를 밝혀 준다. 유비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러한 사실은 인격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격은 그의 행동으로 나타나며, 한 사람의 인격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237 삼위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의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들”(37) 가운데 하나이다. 틀림없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 업적과 구약의 계시 안에 삼위일체이신 당신 존재의 자취를 남겨 놓으셨다. 그러나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파견 이전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존재의 본질은 이성만으로 또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신비였다.
  • II.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계시
  • 성자를 통하여 알려지신 성부
  • 238 많은 종교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하느님은 종종 ‘신들과 사람들의 아버지’로 여겨졌다. 세상의 창조주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3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맏아들 이스라엘”(탈출 4,22)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신 까닭에 더더욱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또한 이스라엘 왕들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신다.(39) 하느님께서는 특히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고아와 과부들의 아버지이시며, 이들은 하느님 사랑의 보호를 받고 있다.(40)
  • 239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신앙의 언어는 주로 두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근원이시며 초월적인 권위를 지니셨으며, 동시에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신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부성은 또한 모성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41) 이는 하느님의 내재성과, 하느님과 당신 피조물 사이의 친밀성에 더 주목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의 언어도 부모들에 대한 인간적 경험에서 도움을 얻는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부모에게서 처음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인간인 부모들이 그릇될 수도 있으며 부성과 모성의 모습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성별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분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인간적인 부성과 모성의 근원이며 척도이시면서도(42) 이를 초월하신다.(43)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일 수 없다.
  • 240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당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만 영원히 아들이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 241 이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한처음에 계셨으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신 말씀”(요한 1,1)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시고,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시는 분”(히브 1,3)이시라고 고백한다.
  • 242 그 뒤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교회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자께서 성부와 “한 본체”(44) 이심을 고백하였다. 곧 성자께서는 성부와 함께 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신경에 포함된 이러한 표현을 그대로 지켜,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이신 분”(45) 이라고 고백하였다.
  • 성령을 통하여 계시되신 성부와 성자
  • 243 당신 파스카 전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파라클리토’(보호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알려 주신다. 창조 때부터(46)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47) 이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고, 그들 안에 계시면서,(48) 그들을 이끌어 “모든 진리를”(요한 16,13) 깨닫도록 가르쳐 주실 것이다.(49)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자와 성부와 구별되는 하느님의 한 ‘위격’으로 계시되셨다.
  • 244 성령의 영원한 근원은 그분의 지상 파견으로 드러난다. 성령께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에 의해서, 또 성자께서 성부의 곁으로 돌아가신 뒤에는 직접 성자에 의해서 사도들과 교회에 파견되신다.(50)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 성령께서 파견되신다는 사실은(51) 삼위일체 신비를 온전히 계시하는 것이다.
  • 245 성령에 대한 사도적 신앙은 381년에 열린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된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나이다.”(52) 이로써 교회는 성부께서 “모든 신성의 원천이며 근원”(53) 이심을 고백한다. 한편 성령의 영원한 근원은 성자의 영원한 근원과 무관하지 않다. “삼위일체의 제3위격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시며 동일하시고, 같은 실체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계신다.……그러나 성부만의 성령 또는 성자만의 성령이시라고 할 수 없고,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시라고 해야 한다.”(54) 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신경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신다.”고 고백한다.(55)
  • 246 신경의 라틴 전승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고 고백한다. 1438년의 피렌체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성령께서는 그 본질과 존재를 성부와 성자에게서 동시에 받으시며, 유일한 근원이신 한 위와 또 다른 위에게서, 유일한 발출(spiratio)을 통하여 영원히 나오신다.……그리고 성부께서는 아버지로서 외아들을 낳으시고, 당신의 존재만을 제외하고는 당신께 있는 모든 것을 외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자에게서 나오신 성령의 이 발출도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낳으신 성부에게서 영원히 이루어지는 것이다.”(56)
  • 247 필리오퀘(Filioque)에 대한 이러한 언명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신경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라틴 전통과 알렉산드리아 전통에 따라 성 레오 교황은, 로마가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에서 381년의 신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전인 447년에(57) 이미 이를 교의로 고백하였다. 신경 안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관습은 점차 라틴 전례 안에 받아들여졌다(8-11세기). 한편 이러한 라틴 전례에서 필리오퀘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포함시킨 문제는 오늘날까지 정교회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 248 동방 전통은 우선 성부께서 성령의 첫 기원이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요한 15,26) 성령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성령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을 확언한다.(58) 그러나 서방 전승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필리오퀘) 발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우선 성부와 성자께서 한 본체로서 이루시는 일치를 표현한다. 서방 교회는 이를 “정당하고 합리적”(59) 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한 본체로서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 위격의 영원한 질서는, 성부께서 “근원이 없는 근원”(60) 으로서 성령의 일차적 근원이심을 내포하고 있지만, 한편 독생 성자의 성부로서 성자와 함께 “성령께서 나오신 유일한 근원”(61) 이시라는 사실 역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당한 보완은, 그것을 지나치게 고착시키지 않는다면, 동일하게 고백하는 신비의 실재를 믿는 신앙의 단일성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 III. 신앙 교리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
  • 삼위일체 교의의 형성
  • 249 삼위일체에 대해 계시된 진리는 초기 교회 때부터 주로 세례에서 그 신앙의 생생한 근원이 되었다. 세례를 위한 신앙 고백문에 표현된 이 진리는 설교나 교리 교육, 교회의 기도 안에 정형화하였다. 이러한 정형화는 사도들의 글에서 이미 발견되는데, 성찬 전례에서 사용되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은 이를 증명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62)
  • 250 초세기 교회는, 삼위일체 신앙을 왜곡시키는 오류에서 이 신앙을 지키고 더 깊이 이해하고자, 이를 더 명확하게 정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교회 교부들의 신학적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감각으로 떠받친 옛 공의회들의 업적이다.
  • 251 삼위일체 교의를 정형화하고자 교회는 철학적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 ‘실체’(substantia), ‘위격’(persona 또는 hypostasis), ‘관계’(relatio) 등의 고유한 용어들을 발전시켜야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신앙을 인간적 지혜에 종속시키기보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한히 초월하는”(63) 형언할 수 없는 신비까지도 의미하게 된 이 용어들에, 새롭고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 252 교회는 ‘실체’라는(때로는 ‘본질 essentia’이나 ‘본성 natura’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되는) 단어를 단일성에서 본 하느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며, ‘위격’이라는 단어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실제적 구분에서 본 삼위를 가리킬 때, ‘관계’라는 단어는 그 위격들의 구분이 한 위격과 다른 위격들의 관련에서 존립한다는 사실을 지적할 때 사용한다.
  • 삼위일체 교의
  • 253 삼위는 한 하느님이시다. 세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 곧 “한 본체의 삼위”(64) 에 대한 신앙을 우리는 고백한다. 하느님의 삼위는 신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다. “성부께서는 성자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며, 성자께서는 성부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다. 곧 본성으로 한 하느님이시다.”(65) “삼위의 각 위는 이러한 실재, 곧 하느님의 실체, 본질 또는 본성이시다.”(66)
  • 254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된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홀로는 아니시다.”(67)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되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 양상을 가리키는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성자이신 분은 성부가 아니시며, 성부이신 분은 성자가 아니시고, 성령이신 분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시다.”(68) 세 위격은 그 근원이 가진 관계들로써 서로 구별된다.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하시는 분이시다.”(69) 하느님의 단일성은 삼위로 이루어져 있다.
  • 255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느님의 단일성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세 위격의 실제적 구분은 오로지 위격이 다른 위격과 가진 관계에 국한된 것이다. “삼위의 이름에서 성부는 성자에 대하여, 성자는 성부에 대하여,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대하여 관계를 갖는다. 한편 이 관계로 보아 삼위를 일컬을 때에도, 삼위는 오직 하나의 본성 또는 실체라고 믿는다.”(70) 사실 “관계의 대립이 없다면 모든 것은 하나이다.”(71) “이러한 단일성으로, 성부는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시며, 성자는 온전히 성부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시며, 성령은 온전히 성부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신다.”(72)
  • 256 ‘신학자’라고도 불리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예비 신자들에게 삼위일체 신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전한다.
  • 모든 것에 앞서 이 훌륭한 유산을 간직하십시오. 이를 위하여 나는 살아 싸우고 있으며, 이 유산과 더불어 죽기를 원합니다. 이 선물은 나에게 모든 악을 견디고 모든 즐거움을 하찮게 여기게 합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이 신앙을 맡깁니다. 이제 이 신앙으로 나는 여러분을 물속에 넣었다 들어 올릴 것입니다. 내가 맡기는 이 신앙은 여러분 생애의 동반자와 보호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오직 한 하느님과 그 권능만을 드립니다. 이 하느님께서는 삼위가 한 분으로 존재하시며,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삼위를 포함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체나 본성의 차별도 없고, 올려 주는 우월함도, 낮추는 열등함도 없는 하느님이십니다.……세 무한한 위격이 하나의 무한한 동질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각 위를 그 자체로 볼 때에도 온전한 하느님이시고……삼위를 함께 생각할 때에도 하느님이십니다.……삼위의 광채가 나를 감싸지 않으면 그 단일성을 생각할 수조차 없고, 그 단일성이 나를 사로잡지 않으면 나는 삼위를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73)
  • IV. 하느님의 업적과 삼위의 사명
  • 257 “오 빛이여! 복되신 삼위, 본래의 일치여!”(74)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행복이시며, 불사의 생명이시고 불멸의 빛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이 당신 복된 생명의 영광을 나누어 주고자 하신다. 이것이 세상 창조 이전에 사랑하시는 당신 성자를 통하여 미리 세워 놓으신 자비로운 ‘선의’(에페 1,9)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에페 1,5) 것이다. 곧,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로마 8,15) 성령을 통해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로마 8,29) 계획하신 것이다. 이 계획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신”(2티모 1,9) 은총이며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직접 나왔다. 이 계획은 창조의 업적과, 인류의 범죄 이래 구원의 역사 전체와, 교회의 사명으로 이어지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 안에 전개된다.(75)
  • 258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하느님 세 위격의 공동 작업이다. 삼위가 오직 하나의 동일한 본성을 지니셨듯이, 그 활동도 유일하고 동일하다.(76)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피조물의 세 근원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이시다.”(77) 한편 각 위격은 자신의 개별적인 위격의 특성에 따라 공동 활동을 하신다. 신약 성경에 따라 교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78) “한 분 하느님 성부에게서 만물이 비롯되었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하며, 한 분 성령 안에 만물이 존재한다.”(79) 각 위격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신적 파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 259 공동 활동이자 동시에 개별 활동인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삼위 하나하나의 특성과 그 유일한 본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이 삼위를 결코 분리하지 않으면서 각 위격과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은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고,(80) 성령께서 움직여 주시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81)
  • 260 하느님의 모든 계획의 궁극 목적은 모든 사람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82) 그러나 이미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를 우리 안에 모시도록 부름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 오, 흠숭하올 삼위일체의 하느님, 제 자신을 완전히 잊고 마치 제 영혼이 이미 영원 안에 있듯이,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당신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그 무엇도 저의 평화를 뒤흔들거나, 제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순간마다 당신의 심오한 신비로 더 깊이 데려가 주소서. 오, 나의 변치 않는 분이시여! 제 영혼을 평화롭게 하소서. 제 영혼을 당신의 천국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사랑하시는 거처, 당신의 휴식처로 삼으소서. 제가 결코 당신을 그곳에 홀로 두지 않고, 온전히 그곳에 머물러, 온전히 깨어 있는 신앙으로, 당신을 온전히 경배하며, 당신의 창조 활동에 저 자신을 온전히 맡기게 하소서.83)
  • 간추림
  • 261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당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써 이 신비를 깨닫게 해 주실 수 있다.
  • 262 성자의 강생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성부이시며 성자와 성부가 한 본체이시라는 것, 곧 성자께서는 성부 안에서 성부와 더불어 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해 준다.
  • 263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서 보내 주시며,(84) 성자께서 “아버지에게서”(요한 15,26) 보내 주시는 성령의 파견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나이다.”(85)
  • 264 “성령께서는 첫 근원이신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증여를 통하여, 친교를 이루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86)
  • 265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받는 세례의 은총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불완전한 신앙 안에서 그리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빛 안에서, 복되신 삼위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87)
  • 266 “가톨릭 신앙은 이러하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로, 삼위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은 하나이고, 그 영광은 동일하고, 그 위엄은 다 같이 영원하다.”(88)
  • 267 그 실체가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의 세 위격은 하시는 일에서도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단일한 활동에서, 특히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신적 파견에서 각 위격은 삼위 안에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