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185 “저는 믿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앙의 일치는 모든 이에게 규범이 되는, 그리고 동일한 신앙 고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는 신앙의 공통 언어를 요구한다.
- 186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는 처음부터 자신의 신앙을, 모든 사람을 위한 간결하고 규범적인 신앙 조문들을 통하여 표현하고 전달해 왔다.(1) 또한 아주 일찍부터 교회는 신앙의 핵심을 유기적인 조문 형태로 결집 요약하고자 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세례를 원하는 예비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 이러한 신앙의 종합은 인간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것들을 골라 구성한 것으로서, 신앙의 유일한 가르침을 이룹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 안에 많은 가지가 들어 있듯이, 이러한 신경도 몇 마디의 말 속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담겨 있는 참된 신앙심의 모든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2)
- 187 이러한 신앙의 종합을 ‘신앙 고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를 “크레도”(Credo)라고도 부르는데, 이러한 종합적인 기도문이 보통 “저는 믿나이다.”(Credo)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를 ‘신경’(Symbola fidei)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188 그리스 말 ‘심볼론’(Symbolon)은 깨뜨린 물건의 반쪽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원의 증표로 제시되던 것이다. 제시된 물건을 나머지 반쪽과 맞추어 보아 그것을 가진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경’은 신앙인들 사이의 확인과 일치의 표시였다. 그리고 ‘심볼론’은 요약, 전서(全書) 또는 종합을 의미한다. ‘신경’은 신앙의 중요한 진리들을 요약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경’은 교리 교육의 첫째 기준이며 근본 기준이다.
- 189 첫 ‘신앙 고백’은 세례 때에 이루어진다. ‘신경’은 무엇보다도 세례 신앙의 고백이다.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베풀어지므로, 세례 때 고백하는 신앙의 진리들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位格)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 190 그러므로 신경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제1위격’(성부)과 그분의 놀라운 창조 업적, 다음에는 ‘제2위격’(성자)과 인간 구원의 신비, 끝으로 우리 성화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제3위격’(성령)에 대한 부분이다.”(3) 이것이 “우리 세례 인호(印號)의 세 가지 주제이다.”(4)
- 191 “이 세 부분은 서로 결합되어 있지만 또 서로 구분된다. 교부들이 종종 사용하던 비유를 따라 우리는 이 구분을 절(節)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 몸에 사지를 구별하고 구분해 주는 관절이 있듯이, 이 신앙 고백 안에서 우리가 특별히 구분해서 믿어야 할 진리들에 대해 ‘절’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타당하고 옳은 일이었다.”(5) 암브로시오 성인이 이미 확인한 오랜 전통에 따르면,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신앙 전체를 사도들의 수로 상징하고자 신경을 열두 절로 구분하는 관습이 있었다.(6)
- 192 시대가 흐르면서 다양한 시대적 필요에 따라 많은 신앙 고백 또는 신경들이 있었다. 곧 사도 교회와 옛 교회의 여러 신경들,(7) 이를테면 아타나시오 신경이라고도 불리는 ‘퀴쿰퀘(Quicumque) 신경’(8) , 몇몇 공의회의 신앙 고백들(톨레도,(9) 라테라노,(10) 리옹,(11) 트리엔트(12) ), 교황들의 신앙 고백들(5세기 ‘다마소의 신앙 고백’(13) , 1968년 바오로 6세 교황의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14) )이다.
- 193 교회 역사상 다양한 시기에 생겨난 신경들 가운데 어느 것도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신경들은 변함없는 신앙에 대한 요약을 통하여 우리가 오늘날에도 그 신앙에 다다르고 깊어지도록 돕고 있다.
- 이 모든 신경 가운데 두 가지가 교회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 194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했다는 점에서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신경은 로마 교회의 세례를 위한 옛 신경이다. 이 신경의 막중한 권위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좌가 있고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다.”(15)
- 195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고 불리는 신경은 초기의 두 세계 공의회(325년, 381년)에서 나온 신경이라는 의미에서 큰 권위를 가진다. 이 신경은 오늘날에도 동방과 서방의 양대 교회에 공히 간직되어 있다.
- 196 이 책에서 신앙 교리는 이른바 “가장 오래된 로마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에 따라 제시할 것이며, 때때로 더 명확하고 세밀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참조하여 보완해 나갈 것이다.
- 197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 모든 삶을 “표준 가르침에”(로마 6,17) 맡겼던 것처럼, 우리는 생명을 주는 우리 신앙의 신경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앙을 가지고 신경을 외우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 주고 그 품 안에서 우리가 믿는 온 교회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 이 신경은 영적인 인장이고, 우리 마음의 묵상이며, 늘 현존하는 보호이고, 우리 영혼의 보물임이 확실합니다.(16)
- 신경(信經)들
- 제 1 장 천주 성부를 믿나이다
- 198 우리의 신앙 고백은 하느님으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사 44,6)이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마침이시기 때문이다. 성부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제1위격이시기에, 사도신경은 천주 성부로 시작한다. 창조는 하느님의 모든 업적의 시작이며 기초이므로, 신경은 천지 창조로 시작한다.
- 제1절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 제1단락 천주를 믿나이다
- 199 “천주를 저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이 신앙의 첫 언명은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신경 전체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그것을 하느님과 관련시켜 말한다. 십계명이 모두 첫째 계명을 밝혀 주듯이 신경의 모든 구절은 이 첫 구절에 종속된다. 다른 구절들은 인간에게 점진적으로 당신을 계시해 주신 그대로의 하느님을 더 잘 깨닫도록 해 준다. “신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1)
- I.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 200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구약의 하느님 계시에 근거한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고백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고백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둘은 모두 근본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시다. 오직 한 분의 하느님만이 계신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본성과 실체와 본질에서 오직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2)
- 201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께서 ‘유일한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유일하신 분, 하느님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신다. “땅 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이사 45,22-24).(3)
- 202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주님’이시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4)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확인하신다. 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그 ‘주님’이심을 암시하신다.(5)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유일하신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 또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신앙도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 영원하시며, 무한하고 불변하시며, 불가해하고 전능하시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신 참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시나 순전히 하나의 본질,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우리는 확고하게 믿으며 명백하게 고백한다.(6)
- II.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 203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써 당신을 계시하신다. 이름은 본질과 인격의 신원과 그 생명의 의미를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이름 없는 어떤 힘이 아니시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을 알리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타인이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을 더 깊이 알고 인격적으로 부를 수 있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내 주는 것이다.
- 204 하느님께서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 이름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알리셨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을 위한 근본적인 계시로서 확인된 것은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의 계약 전에, 불타는 떨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신 그 계시이다.
- 살아 계시는 하느님
- 205 하느님께서는 불타면서도 타 없어지지 않는 떨기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하느님께서는 성조들을 먼 여행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신,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들과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시는, 성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그들의 후손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오신다. 그분은, 공간과 시간의 저 너머에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며, 이 계획을 위하여 당신의 전능을 발휘하실 하느님이시다.
- “나는 있는 나다”
-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13-15).
- 206 “나는 있는 나다.”, “나는 곧 나다.” 또는 “나는 있는 자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당신의 신비한 이름 야훼(YHWH)를 알려 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시며 어떤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야 할지를 말씀해 주신다. 하느님께서 신비이시듯이, 하느님의 이 이름도 신비롭다. 그것은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이고 동시에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며, 우리가 깨닫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무한히 초월해 계시는 그대로의 하느님께서 이 이름을 통해서 가장 잘 표현되신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사 45,15)이시며 그 이름은 말할 수 없고,(7)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시다.
- 20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써, 과거에도 그랬고(“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탈출 3,6) 미래에도 그러할(“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탈출 3,12), 변함없고 영원한 당신의 성실함도 동시에 알려 주신다.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알려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 곁에 늘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신다.
- 208 당신께로 이끄시는 신비로운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미소함을 깨닫는다. 불타는 떨기 앞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대면한 모세는 자신의 신발을 벗고 얼굴을 가린다.(8)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광 앞에서 이사야는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사 6,5)이라고 부르짖는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느님의 표징을 보고 베드로는 부르짖는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므로 당신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이다”(호세 11,9). 요한 사도도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19-20).
- 209 하느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성경을 읽을 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은 ‘주님’(Adonai, 그리스 말로는 Kyrios)이라는 명칭으로 바꿔 읽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천주성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말로 표현될 것이다.
-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
- 210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금송아지를 숭배한(9) 죄를 저지른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전구를 들으시고, 불충한 백성과 동행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다.(10)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실 것을 청하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탈출 33,1(9) .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신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 34,6). 이에 모세가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한다.(11)
- 211 ‘나다’ 또는 ‘있는 자’라는 ‘하느님 이름’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께 불충했고 그에 따라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데도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시는”(탈출 34,7) 하느님의 신의를 드러낸다. 당신의 아드님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자비가 풍성하신”(에페 2,4)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자 당신의 목숨을 내주심으로써, 바로 당신께서 ‘하느님 이름’을 가지고 계심을 알려 주신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 하느님만이 ‘있다’
- 212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 이름’의 계시 안에 담긴 내용의 풍요로움을 더 펼치고 심화할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며, 그분 외에 다른 신은 없다.(12) 그분은 세상과 역사를 초월하신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은 바로 그분이시다. “그것들은 사라져 가도 당신께서는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다 옷처럼 닳아 없어집니다.……그러나 당신은 언제나 같으신 분, 당신의 햇수는 끝이 없습니다”(시편 102[101],27-28). 하느님께서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는”(야고 1,17) 분이시다. 그분은 항상 영원히 ‘있는 자’이시며, 그렇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약속에 항상 성실하신 분이시다.
- 213 “나는 있는 나다.”라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이름’의 계시에는 “하느님만이 ‘있다.’”는 진리가 담겨 있다. 칠십인역 성경과 그에 뒤이은 교회의 성전(聖傳)은 이미 ‘하느님 이름’을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충만한 ‘존재’요 ‘완전’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그분께 존재와 소유를 받았으나, 오로지 그분께서만 자신의 존재 자체이시며, 그분의 모든 것은 그분 자신에게서 나온다.
- III. ‘있는 자’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사랑이시다
- 214 ‘있는 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을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탈출 34,6) 존재로 드러내신다. 이 두 단어는 ‘하느님 이름’의 풍요로움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업적을 통하여 당신의 자비로움과 선함, 은총과 사랑을 보여 주시며, 또한 당신의 신뢰성과 항구함, 신의와 진실도 보여 주신다. “당신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당신의 자애와 당신의 진실 때문입니다”(시편 138[137],2).(13)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으시다”(1요한 1,5). 또 요한 사도가 가르치듯 하느님께서는 “사랑”(1요한 4,8)이시다.
-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다
- 215 “당신 말씀은 한마디로 진실이며, 당신의 의로운 법규는 영원합니다”(시편 119[118],160).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2사무 7,28). 그러므로 하느님의 약속은 언제나 실현된다.(14) 하느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 말씀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인 신뢰로 모든 일에서 당신 말씀의 진실과 성실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하느님의 말씀과 자비와 성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유혹자의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
- 216 하느님의 진리는 창조하신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리시는 당신의 지혜이다.(15) 홀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16) 하느님께서만 당신과 피조물의 관계에 비추어 모든 것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주실 수 있다.(17)
- 217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도 진실하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가르침은 “진리의 법”(말라 2,6)이다. “진리를 증언하도록”(요한 18,3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1요한 5,20).(18)
-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 218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모든 민족 가운데서 그들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가 오로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자신의 역사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었다.(19)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구원하시기를 멈추지 않으시고,(20) 그들의 불성실과 죄를 용서하신 것도(21) 모두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 219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비유된다.(22) 이 사랑은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강하다.(23)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사랑하신다.(24) 이 사랑은 가장 큰 배신도 이겨 낸다.(25) 이 사랑은 가장 귀중한 선물까지도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요한 3,16).
- 220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다”(이사 54,8).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이사 54,10).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예레 31,3).
- 221 요한 사도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인 것이다.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외아들과 사랑의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려 주신다.(26) 그분은 영원한 사랑의 교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시며, 우리를 그 사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 IV.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결과
- 222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 대단한 결과를 가져온다.
- 223 하느님의 위대함과 위엄을 깨달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깨달을 수 없이 위대하십니다”(욥 36,26).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제일 먼저 섬겨야”(27) 한다.
- 224 감사하며 살아감.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며, 우리의 본질 전체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온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시편 116[114-115],12).
- 225 모든 인간의 단일성과 참된 존엄성을 깨달음.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26) 창조되었다.
- 226 창조된 만물을 선용함.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 그것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면 선용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이면 멀리하도록 해 준다.(28)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거두어 가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께 가까이 가게 하는 모든 것을 주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께 온전히 바치도록 저 자신을 버리게 하소서.(29)
- 227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함. 신앙은 역경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게 한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이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 그 무엇에도 너 흔들리지 말며 그 무엇에도 너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께서만 변치 않으신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30)
- 간추림
- 228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마르 12,29). “최상의 존재는 단 한 분이어야 합니다. 곧 다른 동등한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만일 하느님께서 유일하지 않으시다면 그는 하느님이 아닙니다.”(31)
- 229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오직 우리의 최초의 근원이요 최종 목적이신 하느님께만 향하게 하고, 하느님보다 먼저 다른 무엇을 선택하거나 하느님을 다른 무엇으로도 바꾸지 않도록 한다.
- 230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시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신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32)
- 231 우리 신앙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있는 자’라고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 그분은 당신을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탈출 34,6) 분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진리’이며 ‘사랑’이다.
- 제2단락 성부
- I.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232 그리스도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참조) 세례를 받는다. 먼저 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요구하는 세 가지의 질문에 “믿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삼위일체에 근거한다.”(33)
- 233 그리스도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지 그 ‘이름들’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34) 왜냐하면 전능하신 성부, 독생 성자, 성령, 곧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느님께서만 계시기 때문이다.
- 234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35) 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이다. “구원의 역사[救世史]는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신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리시고, 죄에서 돌아서는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결합시키시려는 길과 방법의 역사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36)
- 235 이 단락에서는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가 어떤 방법으로 계시되었으며(II), 교회는 어떻게 이 신비에 관한 신앙 교리를 정형화하였고(III), 끝으로 천주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심으로써 창조와 구원과 성화의 ‘자비로운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IV) 간략하게 제시할 것이다.
- 236 교부들은 신학(Theologia)과 경륜(Oikonomia)을 구별하여, 앞의 용어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인 생명의 신비를, 뒤의 용어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모든 업적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신학은 경륜을 통하여 우리에게 밝혀진다. 그러나 반대로 경륜 전체를 밝혀 주는 것은 신학이다. 하느님의 업적은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준다. 반대로 당신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는 당신의 업적에 대한 이해를 밝혀 준다. 유비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러한 사실은 인격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격은 그의 행동으로 나타나며, 한 사람의 인격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237 삼위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의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들”(37) 가운데 하나이다. 틀림없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 업적과 구약의 계시 안에 삼위일체이신 당신 존재의 자취를 남겨 놓으셨다. 그러나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파견 이전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존재의 본질은 이성만으로 또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신비였다.
- II.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계시
- 성자를 통하여 알려지신 성부
- 238 많은 종교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하느님은 종종 ‘신들과 사람들의 아버지’로 여겨졌다. 세상의 창조주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3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맏아들 이스라엘”(탈출 4,22)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신 까닭에 더더욱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또한 이스라엘 왕들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신다.(39) 하느님께서는 특히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고아와 과부들의 아버지이시며, 이들은 하느님 사랑의 보호를 받고 있다.(40)
- 239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신앙의 언어는 주로 두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근원이시며 초월적인 권위를 지니셨으며, 동시에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신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부성은 또한 모성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41) 이는 하느님의 내재성과, 하느님과 당신 피조물 사이의 친밀성에 더 주목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의 언어도 부모들에 대한 인간적 경험에서 도움을 얻는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부모에게서 처음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인간인 부모들이 그릇될 수도 있으며 부성과 모성의 모습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성별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분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인간적인 부성과 모성의 근원이며 척도이시면서도(42) 이를 초월하신다.(43)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일 수 없다.
- 240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당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만 영원히 아들이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 241 이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한처음에 계셨으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신 말씀”(요한 1,1)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시고,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시는 분”(히브 1,3)이시라고 고백한다.
- 242 그 뒤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교회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자께서 성부와 “한 본체”(44) 이심을 고백하였다. 곧 성자께서는 성부와 함께 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신경에 포함된 이러한 표현을 그대로 지켜,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이신 분”(45) 이라고 고백하였다.
- 성령을 통하여 계시되신 성부와 성자
- 243 당신 파스카 전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파라클리토’(보호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알려 주신다. 창조 때부터(46)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47) 이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고, 그들 안에 계시면서,(48) 그들을 이끌어 “모든 진리를”(요한 16,13) 깨닫도록 가르쳐 주실 것이다.(49)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자와 성부와 구별되는 하느님의 한 ‘위격’으로 계시되셨다.
- 244 성령의 영원한 근원은 그분의 지상 파견으로 드러난다. 성령께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에 의해서, 또 성자께서 성부의 곁으로 돌아가신 뒤에는 직접 성자에 의해서 사도들과 교회에 파견되신다.(50)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 성령께서 파견되신다는 사실은(51) 삼위일체 신비를 온전히 계시하는 것이다.
- 245 성령에 대한 사도적 신앙은 381년에 열린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된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나이다.”(52) 이로써 교회는 성부께서 “모든 신성의 원천이며 근원”(53) 이심을 고백한다. 한편 성령의 영원한 근원은 성자의 영원한 근원과 무관하지 않다. “삼위일체의 제3위격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시며 동일하시고, 같은 실체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계신다.……그러나 성부만의 성령 또는 성자만의 성령이시라고 할 수 없고,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시라고 해야 한다.”(54) 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신경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신다.”고 고백한다.(55)
- 246 신경의 라틴 전승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고 고백한다. 1438년의 피렌체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성령께서는 그 본질과 존재를 성부와 성자에게서 동시에 받으시며, 유일한 근원이신 한 위와 또 다른 위에게서, 유일한 발출(spiratio)을 통하여 영원히 나오신다.……그리고 성부께서는 아버지로서 외아들을 낳으시고, 당신의 존재만을 제외하고는 당신께 있는 모든 것을 외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자에게서 나오신 성령의 이 발출도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낳으신 성부에게서 영원히 이루어지는 것이다.”(56)
- 247 필리오퀘(Filioque)에 대한 이러한 언명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신경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라틴 전통과 알렉산드리아 전통에 따라 성 레오 교황은, 로마가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에서 381년의 신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전인 447년에(57) 이미 이를 교의로 고백하였다. 신경 안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관습은 점차 라틴 전례 안에 받아들여졌다(8-11세기). 한편 이러한 라틴 전례에서 필리오퀘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포함시킨 문제는 오늘날까지 정교회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 248 동방 전통은 우선 성부께서 성령의 첫 기원이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요한 15,26) 성령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성령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을 확언한다.(58) 그러나 서방 전승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필리오퀘) 발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우선 성부와 성자께서 한 본체로서 이루시는 일치를 표현한다. 서방 교회는 이를 “정당하고 합리적”(59) 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한 본체로서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 위격의 영원한 질서는, 성부께서 “근원이 없는 근원”(60) 으로서 성령의 일차적 근원이심을 내포하고 있지만, 한편 독생 성자의 성부로서 성자와 함께 “성령께서 나오신 유일한 근원”(61) 이시라는 사실 역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당한 보완은, 그것을 지나치게 고착시키지 않는다면, 동일하게 고백하는 신비의 실재를 믿는 신앙의 단일성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 III. 신앙 교리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
- 삼위일체 교의의 형성
- 249 삼위일체에 대해 계시된 진리는 초기 교회 때부터 주로 세례에서 그 신앙의 생생한 근원이 되었다. 세례를 위한 신앙 고백문에 표현된 이 진리는 설교나 교리 교육, 교회의 기도 안에 정형화하였다. 이러한 정형화는 사도들의 글에서 이미 발견되는데, 성찬 전례에서 사용되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은 이를 증명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62)
- 250 초세기 교회는, 삼위일체 신앙을 왜곡시키는 오류에서 이 신앙을 지키고 더 깊이 이해하고자, 이를 더 명확하게 정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교회 교부들의 신학적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감각으로 떠받친 옛 공의회들의 업적이다.
- 251 삼위일체 교의를 정형화하고자 교회는 철학적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 ‘실체’(substantia), ‘위격’(persona 또는 hypostasis), ‘관계’(relatio) 등의 고유한 용어들을 발전시켜야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신앙을 인간적 지혜에 종속시키기보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한히 초월하는”(63) 형언할 수 없는 신비까지도 의미하게 된 이 용어들에, 새롭고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 252 교회는 ‘실체’라는(때로는 ‘본질 essentia’이나 ‘본성 natura’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되는) 단어를 단일성에서 본 하느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며, ‘위격’이라는 단어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실제적 구분에서 본 삼위를 가리킬 때, ‘관계’라는 단어는 그 위격들의 구분이 한 위격과 다른 위격들의 관련에서 존립한다는 사실을 지적할 때 사용한다.
- 삼위일체 교의
- 253 삼위는 한 하느님이시다. 세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 곧 “한 본체의 삼위”(64) 에 대한 신앙을 우리는 고백한다. 하느님의 삼위는 신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다. “성부께서는 성자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며, 성자께서는 성부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다. 곧 본성으로 한 하느님이시다.”(65) “삼위의 각 위는 이러한 실재, 곧 하느님의 실체, 본질 또는 본성이시다.”(66)
- 254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된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홀로는 아니시다.”(67)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되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 양상을 가리키는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성자이신 분은 성부가 아니시며, 성부이신 분은 성자가 아니시고, 성령이신 분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시다.”(68) 세 위격은 그 근원이 가진 관계들로써 서로 구별된다.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하시는 분이시다.”(69) 하느님의 단일성은 삼위로 이루어져 있다.
- 255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느님의 단일성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세 위격의 실제적 구분은 오로지 위격이 다른 위격과 가진 관계에 국한된 것이다. “삼위의 이름에서 성부는 성자에 대하여, 성자는 성부에 대하여,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대하여 관계를 갖는다. 한편 이 관계로 보아 삼위를 일컬을 때에도, 삼위는 오직 하나의 본성 또는 실체라고 믿는다.”(70) 사실 “관계의 대립이 없다면 모든 것은 하나이다.”(71) “이러한 단일성으로, 성부는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시며, 성자는 온전히 성부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시며, 성령은 온전히 성부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신다.”(72)
- 256 ‘신학자’라고도 불리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예비 신자들에게 삼위일체 신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전한다.
- 모든 것에 앞서 이 훌륭한 유산을 간직하십시오. 이를 위하여 나는 살아 싸우고 있으며, 이 유산과 더불어 죽기를 원합니다. 이 선물은 나에게 모든 악을 견디고 모든 즐거움을 하찮게 여기게 합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이 신앙을 맡깁니다. 이제 이 신앙으로 나는 여러분을 물속에 넣었다 들어 올릴 것입니다. 내가 맡기는 이 신앙은 여러분 생애의 동반자와 보호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오직 한 하느님과 그 권능만을 드립니다. 이 하느님께서는 삼위가 한 분으로 존재하시며,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삼위를 포함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체나 본성의 차별도 없고, 올려 주는 우월함도, 낮추는 열등함도 없는 하느님이십니다.……세 무한한 위격이 하나의 무한한 동질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각 위를 그 자체로 볼 때에도 온전한 하느님이시고……삼위를 함께 생각할 때에도 하느님이십니다.……삼위의 광채가 나를 감싸지 않으면 그 단일성을 생각할 수조차 없고, 그 단일성이 나를 사로잡지 않으면 나는 삼위를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73)
- IV. 하느님의 업적과 삼위의 사명
- 257 “오 빛이여! 복되신 삼위, 본래의 일치여!”(74)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행복이시며, 불사의 생명이시고 불멸의 빛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이 당신 복된 생명의 영광을 나누어 주고자 하신다. 이것이 세상 창조 이전에 사랑하시는 당신 성자를 통하여 미리 세워 놓으신 자비로운 ‘선의’(에페 1,9)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에페 1,5) 것이다. 곧,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로마 8,15) 성령을 통해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로마 8,29) 계획하신 것이다. 이 계획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신”(2티모 1,9) 은총이며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직접 나왔다. 이 계획은 창조의 업적과, 인류의 범죄 이래 구원의 역사 전체와, 교회의 사명으로 이어지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 안에 전개된다.(75)
- 258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하느님 세 위격의 공동 작업이다. 삼위가 오직 하나의 동일한 본성을 지니셨듯이, 그 활동도 유일하고 동일하다.(76)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피조물의 세 근원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이시다.”(77) 한편 각 위격은 자신의 개별적인 위격의 특성에 따라 공동 활동을 하신다. 신약 성경에 따라 교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78) “한 분 하느님 성부에게서 만물이 비롯되었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하며, 한 분 성령 안에 만물이 존재한다.”(79) 각 위격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신적 파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 259 공동 활동이자 동시에 개별 활동인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삼위 하나하나의 특성과 그 유일한 본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이 삼위를 결코 분리하지 않으면서 각 위격과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은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고,(80) 성령께서 움직여 주시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81)
- 260 하느님의 모든 계획의 궁극 목적은 모든 사람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82) 그러나 이미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를 우리 안에 모시도록 부름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 오, 흠숭하올 삼위일체의 하느님, 제 자신을 완전히 잊고 마치 제 영혼이 이미 영원 안에 있듯이,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당신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그 무엇도 저의 평화를 뒤흔들거나, 제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순간마다 당신의 심오한 신비로 더 깊이 데려가 주소서. 오, 나의 변치 않는 분이시여! 제 영혼을 평화롭게 하소서. 제 영혼을 당신의 천국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사랑하시는 거처, 당신의 휴식처로 삼으소서. 제가 결코 당신을 그곳에 홀로 두지 않고, 온전히 그곳에 머물러, 온전히 깨어 있는 신앙으로, 당신을 온전히 경배하며, 당신의 창조 활동에 저 자신을 온전히 맡기게 하소서.83)
- 간추림
- 261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당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써 이 신비를 깨닫게 해 주실 수 있다.
- 262 성자의 강생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성부이시며 성자와 성부가 한 본체이시라는 것, 곧 성자께서는 성부 안에서 성부와 더불어 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해 준다.
- 263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서 보내 주시며,(84) 성자께서 “아버지에게서”(요한 15,26) 보내 주시는 성령의 파견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나이다.”(85)
- 264 “성령께서는 첫 근원이신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증여를 통하여, 친교를 이루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86)
- 265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받는 세례의 은총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불완전한 신앙 안에서 그리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빛 안에서, 복되신 삼위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87)
- 266 “가톨릭 신앙은 이러하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로, 삼위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은 하나이고, 그 영광은 동일하고, 그 위엄은 다 같이 영원하다.”(88)
- 267 그 실체가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의 세 위격은 하시는 일에서도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단일한 활동에서, 특히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신적 파견에서 각 위격은 삼위 안에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
- 제3단락 전능하신 하느님
- 268 하느님의 모든 속성 가운데 하느님의 전능만이 신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이 우주적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89)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90) 때문에 그 전능은 곧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이라고 믿는다. 이 전능이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날”(2코린 12,9)(91) 때 신앙만이 이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신비로운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셨네”(시편 115[113 하],3)
- 269 성경은 하느님의 우주적 전능에 대하여 여러 번 고백한다. 하느님을 “야곱의 장사”(창세 49,24; 이사 1,24 등), “만군의 주님”,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시편 24[23],8-10)이라고 일컫는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므로 그분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시편 135[134],6) 전능을 떨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고,(92) 그분께서 만드신 것은 그분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93)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님이시고,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셨으며, 이 우주는 그분께 완전히 복종하고, 그분의 처분에 달려 있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마음과 사건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신다.(94) “당신께서는 언제든지 막강한 힘을 발휘하실 수 있습니다. 누가 당신 팔의 힘을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지혜 11,21)
-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십니다”(지혜 11,23)
- 270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그분의 부성애와 전능은 서로를 밝혀 준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95)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써(“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에게 아들딸이 되리라. - 전능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2코린 6,18), 그리고 무한한 자비를 통하여 아버지로서 전능을 보여 주신다. 당신 자비로 죄인들을 자유로이 용서하심으로써 그 권능의 극치를 드러내신다.
- 271 하느님의 전능은 결코 독단적이지 않다. “하느님 안에서 능력과 본질, 의지와 이해, 지혜와 정의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그분의 정의로운 의지와 지혜로운 이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96)
- 무능하게 보이는 하느님의 신비
- 272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악이나 고통의 체험을 통하여 시련에 놓일 수도 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께서 악을 막을 수 없으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의 자기 낮춤과 부활 안에서 당신의 전능을 신비하게 드러내시고, 그 낮춤과 부활을 통하여 악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시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합니다”(1코린 1,25).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을 통하여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에페 1,19) 알게 하셨다.
- 273 오직 신앙으로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신비한 길을 따를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르게 하려고 그 약함을 영광스럽게 여긴다.(97) 동정 마리아께서는 이와 같은 신앙의 가장 뛰어난 모범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고 믿으셨으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십니다.”(루카 1,49) 하고 주님을 찬양하실 수 있었다.
- 274 “그러므로 주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우리 영혼에 깊이 새겨진 이 확신보다 우리의 신앙과 희망을 더 굳게 해 주는 것은 없다. 신경이 그다음으로 우리에게 믿도록 제시하는 모든 것, 가장 위대하고 가장 불가해하며 자연의 일반적 법칙을 초월하는 가장 높은 것까지도, 하느님의 전능이라는 개념만 가진다면 주저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98)
- 간추림
- 275 우리는 의로운 욥과 함께 고백한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욥 42,2)
- 276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고(99) 확고하게 믿는 교회는, 성경의 증언에 따라 충실하게,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자주 기도드린다.
- 27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돌아서게 하시고 은총을 통하여 당신과 맺은 우정을 회복하심으로써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신다. “주 하느님, 용서와 자비로 전능을 크게 드러내시니…….”(100)
- 278 하느님의 사랑이 전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성부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 제4단락 창조주
- 279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이러한 장엄한 말로 성경은 시작된다. 신경은 이 말을 인용하여 “천지의 창조주”,(101)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102) 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창조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피조물을, 끝으로 죄에 떨어짐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러 오셨다.
- 280 창조는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모든 계획’의 기초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는 “구원 역사의 시작”(103) 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비는 창조의 신비를 비추는 결정적인 빛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창세 1,1) 창조의 목적을 밝혀 준다.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창조의 영광을 의중에 두셨던 것이다.(104)
- 281 이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를 기리는 부활 성야의 독서는 창조 이야기로 시작된다. 비잔틴 전례에서 창조 이야기는 항상 주님의 대축일 전야의 첫 번째 독서가 된다. 옛 증언에 따르면, 세례를 위한 예비 신자들의 교육도 이와 같은 방법을 취했었다.(105)
- I. 창조에 관한 교리 교육
- 282 창조에 관한 교리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이 교리는 인간과 그리스도인 삶의 근본 그 자체와 관련된다. 왜냐하면 창조 교리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모든 시대에 걸친 인간들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답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원과 목적에 대한 두 질문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둘은 우리의 삶과 행동 방식의 의미와 방향을 결정짓는다.
- 283 세계와 인간의 기원 문제는 많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연구는 우주의 생성 시기와 크기, 생명체의 등장, 인간의 출현 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우리는 더욱더 창조주의 위대함을 찬미하고, 그분의 모든 업적과, 학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주신 지능과 지혜에 대해 감사한다. 그들은 솔로몬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께서 만물에 관한 어김없는 지식을 주셔서 세계의 구조와 기본 요소들의 활동을 알게 해 주셨다.……나는 감추어진 것도 드러난 것도 알게 되었으니, 모든 것을 만든 장인인 지혜가 나를 가르친 덕분이다”(지혜 7,17-21).
- 284 이러한 연구에 큰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자연 과학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질문들로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된다. 이 질문은 단순히 언제 어떻게 우주가 물질적으로 생겨났는지, 또는 인간은 언제 발생했는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기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 기원이 우연이나, 맹목적인 운명이나, 이름 모를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지, 또는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지성을 지닌 선한 초월적 존재의 지배를 받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만일 세계가 하느님의 선과 지혜에서 연유하는 것이라면, 왜 악이 존재하는지, 악은 어디에서 오는지, 악은 누구의 책임인지, 악에서 해방될 수는 있는지 하는 것들을 묻는 것이다.
- 285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원에 대한 교회의 대답과는 다른 많은 대답에 직면하였다. 예컨대, 고대의 종교와 문화에는 기원을 다룬 많은 신화가 있다. 어떤 철학자들은 만물이 신이고, 세계는 신이라고, 또는 세계의 변화는 신의 변화라고 하였다(汎神論). 다른 철학자들은 세계가 신의 필연적인 유출이며, 세계는 그 근원에서 흘러나왔다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영원히 투쟁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두 근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二元論, 마니교). 이러한 개념들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세계는(적어도 물질적인 세계는) 타락의 산물이므로 악하며, 따라서 이는 버리거나 초월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靈智主義). 다른 이들은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신은 세계를 마치 시계처럼 움직이도록 창조했고, 일단 창조한 뒤에는 나름대로 움직이도록 방치한다고 한다(理神論). 그리고 끝으로 어떤 이들은 세계의 어떠한 초월적 기원도 인정하지 않으며, 이 세계에서 항상 존재하는 단순한 물질의 작용만을 볼 뿐이다(唯物論). 이러한 시도들은 기원에 관한 질문이 언제 어디서나 제기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러한 탐구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 286 인간의 지성이 이미 기원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실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는, 비록 종종 모호하거나 오류로 왜곡될 수도 있지만, 인간 이성의 빛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업적을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다.(106) 그러므로 신앙은 이러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성을 비추어 주고 견고하게 한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 11,3).
- 287 창조의 진리는 모든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하므로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이, 이 주제에 대해 깨닫는 데 유익한 모든 것을 당신 백성에게 계시하고자 하셨다. 모든 인간이 창조주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지식을 넘어서서,(10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창조의 신비를 점진적으로 계시하셨다. 성조들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들을 선택하시어 당신 백성으로 만드신(108) 그분께서, 땅의 모든 백성과 온 땅이 당신에게 속해 있으며, 당신 홀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시편 115[113 하],15; 124[123],8; 134[133],3)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 288 이처럼 창조 계시는, 유일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시는 계약에 대한 계시나 그 계시의 실현과 분리될 수 없다. 창조는 이 계약을 향한 첫걸음으로서, 또 하느님의 전능하신 사랑에 대한 첫 번째 보편적 증거로서 계시되었다.(109) 따라서 창조의 진리는 예언자들의 메시지와,(110) 시편의 기도와(111) 전례, 그리고 선택된 백성의 지혜로운 성찰 안에서(112) 점점 더 힘차게 표현된다.
- 289 창조를 다룬 성경의 모든 말씀 가운데 창세기의 처음 세 장(章)은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본문들은 다양한 원천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감도를 받은 성경 저자는 이 본문들을 성경의 시작 부분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그 장엄한 말로 창조의 진리, 하느님 안에 있는 창조의 기원과 목적, 그 질서와 선(善), 인간의 운명, 그리고 끝으로 죄의 비극과 구원의 희망까지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경의 단일성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 안에서 읽을 때, ‘창조’, ‘타락’, ‘구원의 약속’ 등의 말들은 ‘한처음’의 신비에 대한 교리 교육의 주요 원천이 된다.
- II. 창조 -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업적
- 290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성경의 이 첫 말씀은 세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의 모든 것을 비로소 존재하게 하셨다. 당신 홀로 창조주이시다(‘창조하다’ - 히브리 말로 ‘bara’ - 라는 말은 언제나 하느님만을 주체로 한다). 존재하는 것 전체(‘하늘과 땅’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는 그것들에게 존재를 주시는 하느님께 달려 있다.
- 291 “한처음에……말씀이 계셨다. 말씀은……하느님이셨다.……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신약 성경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곧 영원한 말씀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계시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6-17). 교회의 신앙은 또한 성령의 창조적 활동도 언명한다. 그분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113) “창조주 성령”(“오소서 성령이여 창조주시여” - 성무일도 찬미가), “모든 선의 원천”(114) 이시다.
- 292 구약 성경 안에 암시되고(115) 새로운 계약 안에 계시된, 성부의 창조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성자와 성령의 창조 활동은 교회의 신앙 규범으로 분명하게 확언된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그분은 아버지이시고,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주인이시며, 그분은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 자신, 곧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지혜’를 통하여”,(116) “당신의 두 손”이신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117)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 업적이다.
- III.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 293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118) 이것은 성경과 성전이 끊임없이 가르치고 찬미하는 진리이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영광을 드러내고 나누시기 위해서이다.”(119) 하느님께는 당신의 사랑과 선하심 이외에 창조를 위한 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열쇠가 만물을 창조할 손을 열었다.”(120)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당신의 선하심으로, 그리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유일하신 참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행복을 더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당신의 완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들에게 부여하신 선을 통하여 당신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장 자유로운 계획 안에서, 모든 것을 한 번에, 한처음에, 유형무형의 피조물 하나하나를 무에서 창조하셨다.(121)
- 294 이렇게 당신 선하심을 드러내고 나누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며, 이를 위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에페 1,5-6). “하느님의 영광은 바로 살아 있는 인간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창조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가 벌써 지상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생명을 주시는데, 하물며 ‘말씀’을 통한 성부의 드러나심이야 하느님을 뵙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생명을 주는 일이 되겠습니까.”(122)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성부께서 마침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동시에 우리의 행복을 돌보시는 것이다.”(123)
- IV. 창조의 신비
-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신다
- 295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124) 그러므로 세계는 어떤 필연성이나, 맹목적 운명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피조물들을 당신의 존재와 지혜와 선에 참여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세계가 생겨났음을 우리는 믿는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묵시 4,11). “주님, 당신의 업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든 것을 당신 슬기로 이루셨습니다”(시편 104[103],24).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네”(시편 145[144],9).
-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창조하신다
- 296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위하여 이미 존재하는 아무것도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125) 창조가 신적 실체의 필연적인 유출은 더욱 아니다.(126)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이 ‘무에서’ 창조하셨다.(127)
- 하느님께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로 세계를 만드셨다면 특별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장인(匠人)도 재료를 주면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은 바로 무로부터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만드신다는 데서 드러납니다.(128)
- 297 성경은 ‘무에서’ 창조하신다는 신앙을 가능성과 희망이 넘치는 진리로서 증언한다. 이를테면 일곱 아들의 어머니는 그 아들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이렇게 북돋아 준다.
-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2마카 7,22-23.28).
- 298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창조하실 수 있으시므로, 성령을 통하여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129) 그들에게 영혼 생명을 주실 수도 있으며,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로마 4,1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에게 부활을 통하여 육신 생명을 주실 수도 있다. 또,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어둠에서 빛이 생기게 하실 수 있으므로(130)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빛을 주실 수 있다.(131)
- 하느님께서는 질서 있고 선한 세상을 창조하신다
- 299 하느님께서는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시기 때문에 만물에는 질서가 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하셨습니다”(지혜 11,20).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신 영원한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 창조는,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인 관계로 부름을 받은, “하느님의 모습”을(132) 닮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향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하느님 지성의 빛을 나누어 받은 우리의 지성은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133)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겸손의 정신과, 창조주와 그분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134) 하느님의 선에서 태어난 피조물은 이러한 선을 나누어 받는다(“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참 좋았다.”, 창세 1,4.10.12.18.21.31).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이를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고, 인간을 위하여 인간에게 맡기실 유산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물질세계를 포함한 창조계가 선하다는 것을 수없이 반복해서 변호해야만 하였다.(135)
-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초월하시며, 또 그 안에 현존하신다
- 300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업적보다 무한히 위대하시다.(136) “주님께서는 하늘 위에 당신의 엄위를 세우셨습니다”(시편 8,2), “그 위대하심은 헤아릴 길 없어라”(시편 145[144],3). 그러나 그분께서는 지고하고 자유로우신 창조주이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첫 원인이시므로, 당신의 피조물들 안에 가장 깊숙이 현존하신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 머리보다 높이 계시고 내 깊은 속보다 더 깊이 계십니다.”(137)
-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지탱하고 이끌어 가신다
- 301 창조하신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존재와 실존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피조물을 매 순간 존재하도록 지탱해 주시고, 행동할 수 있게 하시며, 완성으로 이끌어 가신다. 창조주에 대한 이러한 완전한 의존성을 깨닫는 것은, 지혜와 자유, 기쁨과 신뢰의 원천이 된다.
-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존속할 수 있었으며, 당신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지혜 11,24-26).
- V.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신다 - 하느님의 섭리
- 302 만물은 고유의 선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창조주의 손에서 완결된 상태로 나온 것은 아니다. 만물은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아직도 다다라야 할 궁극적인 완성을 향한 ‘진행의 상태’로 창조되었다. 당신의 피조물을 이러한 완전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배려를,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부른다.
-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당신의 섭리로 보호하시고 다스리신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하신다”(지혜 8,1). 피조물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해서 발생하게 될 것까지도 “하느님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기”(히브 4,13) 때문이다.(138)
- 303 성경의 증언은 한결같다. 하느님의 섭리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서 미소한 것에서부터 세계와 역사의 큰 사건들까지 모두 보살핀다. 성경은 사건들의 흐름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힘주어 말한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시며,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셨네”(시편 115[113 하],3).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묵시 3,7)라고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 많은 계획이 들어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뿐이다”(잠언 19,21).
- 304 이처럼 성경의 참저자이신 성령께서는 자주 어떤 행위들의 부차적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 행위를 하느님의 행위로 돌리신다. 그것은 하나의 옛날 ‘어투’가 아니라 역사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권과 절대적인 주권을 환기시키고,(139)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는 심오한 방법이다. 시편의 기도들은 이러한 신뢰를 가르치는 위대한 학교이다.(140)
- 30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사소한 필요도 돌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자녀답게 의탁할 것을 요구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141)
- 섭리와 이차적 원인들
- 306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의 ‘주인’이시다. 그러나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도 이용하신다. 이는 무능력의 표지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위대함과 선함의 표지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단순히 거기 있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근원이 되며, 이로써 하느님 계획의 실현에 협력하는 품위도 주셨기 때문이다.
- 307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온 땅을 ‘지배’하고 다스릴 책임을 맡기시어(142) 자유로이 당신의 섭리에 참여할 권한도 주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창조 활동을 완성하고, 자신과 이웃의 선익을 위하여 조화를 완성시키는 지성적이고 자유로운 원인이 되게 하신다. 때때로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동, 기도,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계획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143) 이 때 인간은 “하느님의 협력자”(1코린 3,9)가(144) 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협력하게 된다.(145)
- 308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들의 모든 활동에 작용하신다는 사실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분은 이차적 원인들 안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작용하시는 첫 번째 원인이시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 2,13).(146) 이 진리는 피조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여 준다.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지기 때문에”,(147)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함으로 무에서 존재하게 된 피조물은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은총의 도움 없이 자신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148)
- 섭리 그리고 악의 문제
- 309 만일 질서 있고 선한 세계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다면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절박하고도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고도 신비한 이 질문에 그 어떤 성급한 대답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창조의 선성(善性), 죄의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계약, 구원을 위한 당신 아드님의 강생, 성령의 파견, 교회의 형성, 성사의 효력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이 응할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한 삶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 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두려운 신비 때문에 이 초대를 회피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어느 모로든 악에 대한 대답 아닌 것이 없다.
- 310 하느님께서는 왜 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항상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실 수 있다.(149) 그러나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 완성을 향해 가는 ‘진행의 상태’로서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하셨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이러한 변화는 어떤 존재들의 출현과 더불어 다른 존재들의 소멸을, 더 완전한 것과 더불어 덜 완전한 것을, 자연의 건설과 더불어 파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그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는, 물리적 선은 물리적 악과 공존한다.(150)
- 311 지성과 자유를 지닌 피조물인 천사와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과, 더 나은 것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들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릇된 길을 갈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은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물리적 악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대한 윤리적 악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윤리적 악의 원인일 수 없다.(15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여 악을 허락하시는 것이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악에서 선을 끌어내신다.
-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최상의 선이시므로, 만일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실 충분한 능력과 선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당신의 피조물들 안에 어떠한 악도 존재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152)
- 312 이리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능하신 섭리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서 야기된 악의 결과에서, 물론 윤리적 악의 결과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45,8; 50,20).(153) 이제까지 저지른 가장 큰 윤리 악은 모든 인간의 죄로 일어난 하느님 아들의 배척과 살해였다. 이 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충만한 은총으로(154) 그리스도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을 끌어내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 313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성인들도 이것이 사실임을 계속 증언해 왔다.
-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자신들에게 닥치는 일들에 대해 문제를 삼고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오며, 모든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목적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155)
- 토마스 모어 성인은 순교를 앞두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딸을 위로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비록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이 우리 눈에 매우 나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이다.”(156)
- 또 노리치의 줄리언 여사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하며,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다 선하리라는 사실도 굳게 믿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당신도 모든 일이 선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157)
- 314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그 섭리의 길을 알 수가 없다. 종말에, 우리의 부분적인 인식이 끝나고 하느님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1코린 13,12) 보게 될 때, 비로소 이러한 길을 완전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길을 통해서, 심지어 악과 죄의 비극을 통해서까지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결정적인 안식(Sabbath)으로(158) 이끄신다. 이 결정적인 안식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 간추림
- 315 하느님께서는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그 안에 당신의 전능하신 사랑과 지혜에 대한 첫 번째이며 보편적인 증거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목표로 하는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안배해 두셨다.
- 316 창조의 업적을 성부께 돌리기는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께서 창조의 유일하고 분리될 수 없는 근원이시라는 것 역시 신앙의 진리이다.
- 317 하느님 홀로 자유로이, 직접적으로, 어떤 도움도 없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 318 어떤 피조물도 말 그대로 ‘창조’에 필수적인 무한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곧,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존재를 부여하고 만들어 내는 능력(‘무에서’ 존재를 불러낼 능력)이 피조물에게는 없다.(159)
- 3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함께 나누시려고 세계를 창조하셨다. 당신의 진선미에 참여하는 바로 이 영광을 위하여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것이다.
- 320 세계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시는”(히브 1,3) 분이신 당신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이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이 세계를 계속 존재하게 하신다.
- 321 하느님의 섭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와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그들의 궁극 목적에까지 이끌어 가시는 배려이다.
- 322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섭리에 자녀답게 우리를 맡기도록 권고하시며,(160) 성 베드로 사도는 이를 다시 반복한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161)
- 323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섭리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당신의 계획에 협력하게 하신다.
- 324 하느님께서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을 허락하시는 것은 신비이다. 이 신비는 악을 물리치려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밝혀진다. 만일 영원한 생명 안에서만 완전히 깨닫게 될 그러한 길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악에서조차 선을 끌어내지 않으신다면 악을 허락하실 리 없다는 것을 우리는 신앙으로 확신한다.
- 제5단락 하늘과 땅
- 325 사도신경은 하느님께서 “천지의 창조주”(162) 이심을 고백하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163) 이심을 천명한다.
- 326 성경의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존재하는 모든 것, 피조물 전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을 결합시키거나 구분하는 만물의 유대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땅’은 인간의 세계이다.(164) ‘하늘’ 또는 ‘하늘들’은 창공을 가리킬 수도 있고,(165) 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태 5,16)라는(166) 표현에서처럼 하느님께서 계시는 ‘장소’를 가리킬 수도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 영광인 ‘하늘’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은 영적인 피조물들 ─ 천사들 ─ 이 하느님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 327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신앙 고백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단번에 무에서 영신계와 물질계, 곧 천사들과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러고 나서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져 두 요소를 다 지닌 인간을 창조하셨다.”(167) 고 언명한다.
- I. 천사
- 천사의 존재 - 신앙의 진리
- 328 성경이 보통으로 천사라고 부르는, 육체를 가지지 않은 영적인 것들의 존재는 신앙의 진리이다. 성전 전체의 증언이 일치하듯이, 성경의 증언도 명백하다.
- 그들은 누구인가-
- 32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사’는 본성이 아니라 직무를 가리킨다. 그 본성은 무엇인가- 영(靈)이다. 그 직무는 무엇인가- 천사다. 존재로서는 영이고, 활동으로는 천사다.”(168) 천사는 그 존재 전체가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며 전령이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마태 18,10) 때문에,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힘센 용사들”(시편 103[102],20)이다.
- 330 순수한 영적 피조물인 천사들은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격적인 피조물들이며,(169) 죽지 않는 피조물들이다.(170) 그들은 보이는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 그들 영광의 광채가 이를 증명한다.(171)
- “당신의 모든 천사들과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
- 331 그리스도께서는 천사 세계의 중심이시다. 천사들은 그분께 속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올 것이다”(마태 25,31).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그분께서 천사들을 당신의 구원 계획을 알리는 전령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그분께 속한 존재들이다.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들이 아닙니까-”(히브 1,14)
- 332 그들은 창조 때부터(172) 구원 역사의 흐름을 따라, 줄곧 이 구원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알리고, 이 구원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면, 그들은 지상 낙원의 문을 닫으며,(173) 롯을 보호하고,(174) 하가르와 그녀의 아들을 구하며,(175)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하고,(176) 율법을 전해 주는 직무를 수행하며,(177)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하고,(178) 탄생과(179) 소명들을(180) 알리고 예언자들을 돕는다.(181) 마침내 선구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것은 바로 천사 가브리엘이다.(182)
- 333 사람이 되신 ‘말씀’의 생애는 강생부터 승천까지 천사들의 경배와 봉사에 싸여 있다.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히브 1,6). 그리스도의 탄생 때 “ ……하느님께 영광!”(루카 2,14)이라고 천사들이 부른 찬미의 노래는 교회의 찬미 안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친다. 그들은 어린 예수님을 보호하고,(183) 광야에서 예수님께 봉사하며,(184) 번민 중에 계실 때 용기를 북돋아 드린다.(185) 그러므로 천사들은 그 옛날 이스라엘처럼(186) 예수님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187)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생과(188) 부활의(189)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복음을 선포하는(190) 것도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191) 재림 때에도 그분 곁에서 그분의 심판을 도와 드리게 될 것이다.(192)
- 교회 생활과 천사
- 334 그리하여 교회는 삶의 모든 면에서 천사들의 신비하고 능력 있는 도움을 받는다.(193)
- 335 전례 안에서 교회는 천사들과 하나 되어, 하느님을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194) 하고 찬미한다. (장례 예식의 기도문 “천사들이여, 이 교우를 천상 낙원으로 데려가시어…….”(195) 나, 또 비잔틴 전례의 ‘케루빔 찬미가’(196) 처럼) 교회는 천사의 도움을 청하며, 특별히 몇몇 천사(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과 수호천사)를 기념하며 그 축일을 지낸다.
- 336 사람은 일생 동안, 생명의 시작부터(197) 죽음에 이르기까지,(198) 천사들의 보호와(199) 전구로(200) 도움을 받는다. “모든 신자의 곁에는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보호자이자 목자인 천사가 있다.”(201)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으로, 하느님 안에 결합되는 천사들과 인간들의 복된 공동체에 참여한다.
- II. 유형의 세계
- 337 하느님께서는 이 유형의 세계를 풍요롭고, 다양하며,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 성경은 이러한 창조주의 활동을 상징적으로 6일 동안 계속된 하느님의 ‘일’로 표현하며, 이 일은 일곱째 날의 휴식으로 끝을 맺는다.(202)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창조에 대해 계시하신 진리들을 가르치는데,(203) 이 진리들은 “하느님 찬미를 지향하는 모든 피조물의 가장 깊은 본질과 가치와 목적을 인식하게 한다.”(204)
- 338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존재를 받지 않은 것은 없다.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무에서 생겨남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 자연계 전체, 인간의 모든 역사는 이 원초적 사건에 근거한다. 이 기원(起源)에서 세계가 형성되고 시간이 시작되었다.(205)
- 339 피조물은 저마다 고유한 선과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6일 동안’ 하신 일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한다. “만물은 창조의 조건 자체에서 고유의 안정성과 진리와 선, 또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갖추고 있다.”(206) 저마다 고유한 존재를 지니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신 다양한 피조물들은, 저마다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의 빛을 반영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각 피조물의 고유한 선을 존중하여, 창조주를 무시하는 일이나 인간과 인간의 환경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사물의 무질서한 이용을 피해야 한다.
- 340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이 서로 의존하기를 바라신다. 해와 달, 전나무와 작은 꽃 한 송이, 독수리와 참새, 이들의 무수한 다양성과 차별성의 장관은 어떠한 피조물도 스스로는 불충분함을 의미한다. 이들은 다른 피조물에 의존하여 서로 보완하며, 서로에게 봉사하면서 살아간다.
- 341 우주의 아름다움. 창조된 세계의 질서와 조화는 존재들의 다양성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다양성의 결과이다. 인간은 이러한 질서와 조화를 자연의 법칙으로서 점차 발견해 간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감탄한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이 아름다움은 당연히 지능과 의지를 가진 인간의 존경과 순종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 342 피조물의 위계질서는 덜 완전한 것에서 더 완전한 것으로 진행하는 ‘6일 동안’의 창조 순서에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207) 그 하나하나를 참새까지도 돌보신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7). 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태 12,12)
- 343 인간은 창조 업적의 절정이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창조를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와 분명하게 구별함으로써 이 사실을 드러낸다.(208)
- 344 모든 피조물의 연대성. 모두 동일한 창조주에게서 창조되었다는 점과, 모두 다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피조물은 서로 필요로 한다.
- 내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쓰임 많고 겸손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님,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내 주님,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내 주님을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분을 섬길지어다.(209)
- 345 안식일 - ‘6일 동안’ 하신 일을 마침.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시고”,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이루셨으며”, “이렛날에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쉬셨고”, “그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창세 2,1-3). 이러한 영감을 받은 말마디들은 구원에 유익한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 346 하느님께서는 만물에 기초를 놓으시고 변하지 않는 법칙을 심어 놓으셨다.(210) 신앙인은 이것들을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이는 신앙인에게 하느님 계약의 흔들리지 않는 성실성의 표시와 보증이 된다.(211) 인간으로서는 충실하게 이 기초에 머물러야 하며, 창조주께서 그 기초에 새겨 놓으신 법칙을 존중해야 한다.
- 347 창조는 안식일을 위한 것이다. 곧 하느님에 대한 경배와 흠숭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경배는 피조물의 질서 안에 새겨져 있다.(212) 성 베네딕토의 규칙서는(213) “어떠한 일도 하느님의 일에 앞설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관심사의 올바른 순서를 말하는 것이다.
- 348 안식일은 이스라엘 율법의 핵심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창조의 업적에 표현된 하느님의 지혜와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 349 제8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날이 밝았다. 그날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제7일에는 첫 번째 창조가 완성되었고 제8일에는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이처럼 창조 업적은 구원이라고 하는, 더욱 큰 업적에서 절정에 이른다. 첫 번째 창조는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창조에서 그 의미가 발견되며, 정점에 도달한다. 이 새로운 창조의 찬란함은 첫 번째 창조를 능가한다.(214)
- 간추림
- 350 천사들은 하느님께 끊임없이 영광을 드리며, 다른 피조물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봉사하는 영적인 피조물들이다. “천사들은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선에 협력한다.”(215)
- 351 천사들은 그들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호위하고 있다. 그들은 특히 인간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명에 봉사한다.
- 352 교회는 지상 순례길에 있는 자신을 도와주고, 모든 인간을 보호하는 천사들을 공경한다.
- 353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다양성, 고유한 선, 그들의 상호 의존과 질서를 원하셨다. 모든 물질적인 피조물은 인류의 선익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인간은, 그리고 인간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 354 피조물 안에 새겨진 법칙과, 사물들의 본성에서 나오는 관계들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모든 지혜의 근원이며 도덕의 기초이다.
- 제6단락 인 간
- 355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인간은 피조물들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I), 인간의 고유한 본성 안에는 영신계와 물질계가 결합되어 있으며(II),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고(III),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과의 친교에 참여하게 하셨다(IV).
- I. “하느님의 모습으로”
- 356 보이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오직 인간만이 “창조주를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216) 인간만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217) 이고,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인간은 바로 이 목적 때문에 창조되었으며,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 어떤 이유로 당신께서는 인간에게 이처럼 위대한 존엄성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서, 비길 데 없는 당신의 사랑을 통하여 피조물을 바라보시고, 당신 피조물에 반하셨던 그 사랑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 사랑 때문에 그를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당신의 영원한 ‘선’을 맛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218)
- 357 인간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므로, 존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이다.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체가 되며,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다른 인격들과 친교를 이룰 수 있다. 은총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와 계약을 맺고,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신앙과 사랑의 응답을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다.
- 358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셨다.(219)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모든 피조물을 봉헌하도록 창조되었다.
- 도대체 이런 배려를 받아 창조되는 존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위대하고 경이로운 동물, 하느님 보시기에 피조물 전체를 능가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하늘과 땅, 바다와 모든 창조계가 마련되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의 구원을 너무도 중히 여기시어 당신의 외아들마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높이 올리시어, 당신 오른편에 앉게 하시려고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셨습니다.(220)
- 359 “실제로,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221)
- 인간의 기원은 아담과 그리스도 두 사람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고,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나중 아담을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분에게서 생명을 주는 영혼을 받았습니다.……두 번째 아담은 첫 번째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에게 당신의 모습을 새겨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신 존재를 잃지 않으시려고 나중 아담은 첫 번째 아담의 본성과 이름을 취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 전자는 시작이 있고 후자는 끝이 없습니다. 맨 나중 ‘사람’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듯이, 참으로 첫 ‘사람’이십니다. “나는 시작이요 마침이다.”(222)
- 360 그 공통 기원으로 인류는 하나의 단일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셨기”(사도 17,26)(223) 때문이다.
- 창조주에게서 비롯되는 우리 기원의 단일성 안에서……, 물질적인 육체와 영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진 본성의 단일성 안에서, 모두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의 단일성 안에서, 이 세상 삶에서 이룩할 사명의 단일성 안에서, 모든 사람이 천부의 권리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대지, 곧 주거의 단일성 안에서, 하느님 자신, 곧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초자연적 목적의 단일성 안에서, 이 목적에 도달하려는 방법의 단일성 안에서……, 모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단일성 안에서, 이 모든 것 안에서 인류를 바라본다는 것은 놀라운 장관입니다.(224)
- 361 개인과 문화와 민족의 풍부한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 “인간의 유대와 사랑의”(225) 이 법은 우리에게 모든 인간이 진정한 형제라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
- II.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
- 362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어진 ‘인간’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는 성경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상징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전체적인 인간을 원하신 것이다.
- 363 영혼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종종 인간의 생명이나(226)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227)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228) 가장 가치 있는 것을(229) 가리킨다. 그리고 특히 인간은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을 가리킨다.
- 364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 모습’의 존엄성에 참여한다. 그것이 인간의 육체인 것은 정확히 말해서 영혼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성전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 전체이다.(230)
-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 인간은 그 육체적 조건을 통하여 물질세계의 요소들을 자기 자신 안에 모으고 있다. 이렇게 물질세계는 인간을 통하여 그 정점에 이르며, 창조주께 소리 높여 자유로운 찬미를 드린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적 생활을 천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은 하느님께 창조되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자기 육체를 좋게 여기고 존중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231)
- 365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은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해야 할 만큼 심오하다.(232) 말하자면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인간 육체로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영혼 때문이다. 인간 안의 정신과 물질은 결합된 두 개의 본성이 아니라, 그 둘의 결합으로 하나의 단일한 본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 366 교회는 각 사람의 영혼이 ─ 부모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233) 불멸한다고 가르친다.(234) 죽음으로 육체와 분리되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며, 부활 때 육체와 다시 결합될 것이다.
- 367 때때로 영혼은 ‘영’과 구별되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하고 흠 없이”(1테살 5,23) 지켜지기를 기도한다. 교회는 이러한 구분이 영혼을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235) ‘영’이란 인간이 그 창조 때부터 자신의 초자연적인 목표를 향하고 있음을 의미하며,(236) ‘영혼’은 은총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수 있음을 의미한다.(237)
- 368 교회의 영적인 전통은 또한 성경에서 ‘존재의 심연’(“그들의 가슴에”, 예레 31,33)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마음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이 마음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선택하거나 포기할 것을 결정한다.(238)
- III.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평등과 차이
- 369 하느님께서 원하신 대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 곧 인격에서는 완전히 동등하지만, 그 존재의 특성에서는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를 하느님께서는 바라셨다. ‘남자 됨’ 또는 ‘여자 됨’은 하나의 선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직접 받은, 빼앗길 수 없는 존엄을 지니고 있다.(239)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그들은 ‘남자 됨’과 ‘여자 됨’으로 창조주의 지혜와 선을 반영한다.
- 370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靈)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어떠한 완전성, 곧 어머니의 완전성,(240) 아버지와 남편의 완전성을 반영한다.(241)
- ‘서로를 위한 존재’, ‘두 존재의 결합’
- 371 남자와 여자를 함께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둘이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점을 깨우쳐 준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 어떤 짐승도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가 되지 못하였다.(242) 하느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를 뽑아서 ‘만드신’ 여자를 그에게 데려다 주셨을 때, 남자는 감탄의 외침과, 사랑과 일치의 탄성을 지른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남자는 여자가 자신과 동등한 인간성을 지닌 또 다른 ‘나’임을 발견한다.
- 372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위한 존재’로서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반쪽’으로나 ‘불완전’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서로 인격적으로 일치하도록 만드셨으며, 이 일치 안에서 각자는 상대를 위한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격적으로는 동등하면서(“내 뼈에서 나온 뼈요…….”) 동시에 남성과 여성으로서 서로를 보완하기 때문이다.(243) 하느님께서는 혼인을 통하여 그들을 “한 몸”(창세 2,24)이 되게 하심으로써 인간 생명을 전달할 수 있게 하신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후손들에게 인간 생명을 전달함으로써 배우자와 부모로서의 남녀는 각각 창조주의 일에 협력한다.(244)
- 373 하느님의 계획에서 남녀는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땅을 “지배할”(245) 소명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지배는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정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지혜 11,24) 창조주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는, 다른 피조물들을 위한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 IV. 낙원의 인간
- 374 첫 번째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고, 자기 자신과 주변의 피조물들과 조화를 이루게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될 새로운 창조의 영광만이 이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 375 교회는 신약 성경과 성전의 빛에 비추어, 성경의 상징적 표현을 권위 있게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는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가르친다.(246) 이 원초적인 거룩함의 은총이란 바로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247)
- 376 이 은총의 빛으로 인생의 모든 차원은 견고해진다.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동안에는 죽지도 않고(248) 고통도 당하지 않았다.(249) 인간의 내적인 조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250) 그리고 첫 부부와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조화, 우리는 이 모두를 한마디로 ‘원초적인 의로움’[原義]이라 부른다.
- 377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251)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
- 378 하느님께서 사람을 낙원에 살게 하셨다는 말은 하느님과 사람이 얼마나 친근했는지를 나타낸다.(252) 사람은 에덴 동산에서 “그곳을 일구고 돌보며”(창세 2,15) 사는데, 그 노동은 고역이 아니다.(253) 오히려 보이는 피조물을 완전하게 하고자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께 협력하는 것이다.
- 379 우리 첫 조상들은 하느님의 계획이 인간을 위하여 마련한 원초적 의로움의 이 모든 조화를 죄로 잃게 된다.
- 간추림
- 380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사람을 아버지 모습대로 지으시어 우주 만물을 돌보게 하시고 창조주이신 아버지만을 섬기며 모든 조물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254)
- 381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 ─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 ─ 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이는 성자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255)
- 382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256) 를 이룬다. 신앙 교리는 영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 383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외롭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으며’(창세 1,27), 남녀의 결합이 인간 사회의 최초 형태를 이루었다.”(257)
- 384 계시는 범죄 이전 남자와 여자가 누리던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곧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에서 낙원 생활의 행복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 제7단락 타락
- 385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모든 업적도 선하다. 그러나 아무도 고통의 경험과, 자연계의 ─ 피조물 고유의 한계성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 악을 피할 수 없으며, 특히 윤리 악의 문제는 피할 수 없다.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악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찾았으나 해답을 찾지 못하였다.”(258) 고 말하였으며, 마침내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섬으로써 그의 고통스러운 탐구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 ‘악의 신비’(2테살 2,7)는 ‘경외의 신비’(259) 로써만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만연되어 있는 악과 동시에 넘쳐흐르는 은총을 보여 준다.(260) 그러므로 우리가 악의 기원 문제를 숙고할 때, 악을 홀로 정복하신 그분께 우리 신앙의 눈길을 고정시켜야 한다.(261)
- I.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넘쳐흐른다
- 죄의 실재
- 386 죄는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한다. 이를 무시하거나 또는 이 모호한 실재에 다른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죄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과 하느님의 심오한 관계를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관계를 떠나서는, 계속 인간의 삶과 역사를 짓누르면서 하느님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죄악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 387 죄의 실재, 특히 원죄의 실재는 오로지 하느님 계시의 빛으로 밝혀진다. 하느님에 대한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단지 죄를 성장의 결함, 심리적 나약함, 어떤 잘못, 또는 부적합한 사회 구조에서 나오는 필연적 결과 등으로 설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앎으로써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주신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죄임을 이해하게 된다.
- 원죄 - 신앙의 본질적인 진리
- 388 계시가 진행됨에 따라 죄의 실재도 밝혀진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 역시 인간 조건의 고통을 창세기에 나오는 타락의 이야기에 비추어 보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러한 이야기의 궁극적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빛에서만 명백해진다.(262) 죄의 원천인 아담을 알려면 은총의 원천으로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세상의 구원자를 드러내 보이시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요한 16,8) 분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파라클리토 성령이시다.
- 389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면’(裏面)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교회는(263) 그리스도의 신비가 손상되면 원죄의 계시 역시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타락 이야기를 읽으려면
- 390 인류의 타락 이야기(창세 3장)는 상징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 역사의 시초에 일어났던 사실, 곧 원초적인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264) 계시는 우리의 첫 조상들이 자유로이 범한 원죄가 온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신앙의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265)
- II. 천사들의 타락
- 391 우리의 첫 조상들이 불순명을 선택하게 된 배후에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유혹의 목소리가 있었다.(266) 그 목소리는 질투심 때문에 그들을 죽음에 빠지게 하였다.(267) 성경과 교회의 성전(聖傳)은 그 목소리에서 사탄 또는 악마라 불리는 타락한 천사를 본다.(268) 교회는 그가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천사였다고 가르친다. “악마와 모든 마귀는 하느님께서 본래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그들 스스로 악하게 되었다.”(269)
- 392 성경은 이 천사들의 죄에 대해 말한다.(270) 이 ‘타락’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철저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거부한 이 영적 피조물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생겨난 것이다. 우리 첫 조상들에게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창세 3,5)고 한 유혹자의 말에 바로 이 반역을 엿볼 수 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고”(1요한 3,8),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요한 8,44)다.
- 393 천사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참회가 없는 것처럼, 그들도 타락한 뒤에는 참회가 없다.”(271)
- 394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살인자”(요한 8,44)라고 부르셨던 자,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포기하도록 예수님까지도 유혹한 악마의 해로운 영향을 성경은 증언한다.(272) 그러나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이다”(1요한 3,8). 악마가 저지른 일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은 바로 인간을 하느님께 불순명하도록 거짓말로 유혹한 것이었다.
- 395 그러나 사탄의 힘은 무한하지 못하다. 그는 다만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는 순수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강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막지 못한다. 사탄은 하느님을 거슬러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 나라를 증오하면서 세상에서 활동한다. 인간과 사회에 영적으로 또 간접적으로는 물질적인 것에까지 막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이러한 활동은 인간과 세계의 역사를 힘차고도 부드럽게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허락하신 일이다. 이러한 악마의 활동에 대한 하느님의 허락은 하나의 커다란 신비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로마 8,28).
- III. 원죄
- 자유에 대한 시험
- 396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당신과 친교를 이루게 하셨다. 영적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께 자유롭게 순명함으로써만 이 친교를 누리며 살 수 있다.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금지령은 이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 2,17)는 피조물인 인간이 자유로이 인정하고 신뢰로써 지켜야 할,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를 상징적으로 환기시킨다. 창조주께 속해 있는 인간은 창조 질서와 자유의 사용을 규제하는 윤리적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
- 인간의 첫 범죄
- 397 악마에게 유혹을 받은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창조주를 향한 신뢰가 죽게 버려두었으며,(273) 자신의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첫 범죄가 성립하는 것이다.(274) 그 뒤의 모든 죄는 하느님에 대한 하나의 불순종이 되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 될 것이다.
- 398 이 죄로 인간은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좋아함과 동시에 하느님을 무시하였다. 곧,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을 거슬렀으며,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거슬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275) “하느님처럼 되기를”(276) 원하였다.
- 399 성경은 이러한 첫 불순종의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 준다. 아담과 하와는 곧 원초적 거룩함의 은총을 잃는다.(277) 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특권에 집착하시는 분이라고 잘못 생각하고(278)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279)
- 400 그들이 원초적 의로움으로 누리던 조화는 파괴되었으며, 육체에 대한 영혼의 영적 지배력이 손상을 입게 되고,(280)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갈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281) 그들의 관계는 탐욕과 지배욕으로 얼룩지게 되었다.(282) 피조물들과 이루는 조화는 깨졌다. 보이는 피조물은 인간에게 낯설고 적대적인 것이 되었다.(283) 인간 때문에 피조물은 “멸망의 종살이에”(로마 8,21) 매이게 되었다.(284) 이 불순종의 사건을 두고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285) 분명히 예고한 결과가(286)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죽음이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287)
- 401 이러한 첫 범죄 이후로 이 세상에는 죄가 범람하게 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형제 살해를(288) 비롯하여, 죄로 말미암은 전반적인 타락이(289)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도 죄는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대한 불충실과 모세 율법의 위반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속량’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죄는 무수히 나타난다.(290) 성경과 교회의 성전은 끊임없이 인간 역사 안에 존재하는 죄와 그 보편성을 환기시킨다.
- 하느님의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 사실은 우리의 경험과 일치한다. 인간이 제 마음을 살펴볼 때, 선하신 자기 창조주에게서는 올 수 없는 악에 기울어져 있고 수많은 죄악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흔히 하느님을 자기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궁극 목적을 지향하는 당연한 질서마저 무너뜨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를 깨트려 버렸다.(291)
-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미치는 결과
- 402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에 연관된다.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다.”(로마 5,19)고 말한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죄와 죽음의 보편성에 대비시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보편성을 내세운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 403 바오로 사도의 뒤를 이어 교회는, 인간을 짓누르는 엄청난 비참이나 죄와 죽음으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경향을 아담의 범죄 사실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영혼의 죽음’인 죄에 물들어, 죄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과도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항상 가르쳐 왔다.(292) 신앙의 이 확신으로 교회는, 인격적으로 아직 죄를 범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죄의 사함을 위한 세례를 주는 것이다.(293)
- 404 어떻게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의 죄가 될 수 있는가- 모든 인류는 “마치 한 사람의 한 몸과 같이”(294) 아담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단일성’으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연관되듯이 아담의 죄와 연관된다. 그러나 원죄의 전달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아담이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계시를 통하여 알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지은 죄는 개인의 죄이지만, 그 죄가 타락한 상태로 전달될 인간 본성에 영향을 미쳤다.(295) 이 죄는 인간 번식을 통하여, 곧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인간 본성의 전달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전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원죄를 유비적으로 ‘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죄는 ‘범한’ 죄가 아니라 ‘짊어진’ 죄이며,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 405 원죄는 비록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기는 하지만,(296) 아담의 어떤 후손에게도 개인의 잘못이라는 성격을 가지지는 않는다.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은 잃었지만, 인간 본성이 온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 인간 본성이 그 본연의 힘에 손상을 입고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며 죄에 기우는 것이다(악으로 기우는 이 경향을 ‘탐욕’이라고 부른다). 세례는 그리스도 은총의 생명을 줌으로써 원죄를 없애고 인간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지만, 약해지고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에 미친 결과는 인간 안에 집요하게 남아서 영적인 싸움을 치르게 한다.
- 406 원죄의 전달에 관한 교회의 교리는 5세기 펠라지우스 이단에 반대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사색에서 특히 자극을 받았고, 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에 대항하여 세부적으로 확정되었다. 펠라지우스는 인간이 하느님 은총의 필연적인 도움 없이 자신의 자유 의지의 자연적 힘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담의 죄의 영향을 단순히 나쁜 표양 정도로 축소시켰다. 이와는 반대로 프로테스탄트의 초기 개혁자들은, 인간은 원조의 죄로 근본적으로 타락했으며 그의 자유는 소멸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인간이 저마다 물려받은 죄와 악으로 기우는 경향(탐욕)을 동일시하여, 이 경향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529년 제2차 오랑주 공의회와(297)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298) 특히 원죄에 관하여 계시된 내용의 의미를 밝혔다.
- 힘든 싸움
- 407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교리와 관련된 원죄 교리는 세상에서 인간의 상황과 행위를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비록 인간이 자유롭다 해도 원조들의 죄로 악마는 인간에게 어떤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원죄는 “죽음의 지배력을 지닌 존재, 곧 ‘악마’의 권세에 예속하게 만들었다.”(299) 인간 본성이 손상되어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교육, 정치, 사회,(300) 그리고 도덕 분야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 408 원죄와 인간의 모든 개인적인 죄의 결과들은, 요한 사도가 “세상의 죄”(요한 1,29)라고 표현하듯이 세상 전체를 죄스러운 처지에 빠지게 한다. 이 표현은 또한 인간들의 죄로 생겨난 공동체적 상황과 사회 구조들이 개개인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의미한다.(301)
- 409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1요한 5,19)는(302) 비극적 상황에서 인간의 삶은 일종의 싸움이다.
- 암흑의 세력에 대한 힘든 투쟁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 투쟁은 태초부터 시작되어 주님의 말씀대로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투쟁에 뛰어든 인간은 선을 고수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하느님의 도우시는 은총과 커다란 노력이 없으면 자기 자신 안에서 통일을 이룰 수 없다.(303)
- IV. “인간을 죽음의 세력 아래 버려두지 않으셨다”(감사 기도 제4양식)
- 410 인간이 타락한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를 부르시어(304) 악을 이기고, 타락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는 것을 신비로운 방법으로 말씀하신다.(305) 창세기의 이 구절은 ‘구속자 메시아’에 대한 첫 예고, 곧 뱀과 여인 사이의 싸움과 이 싸움에서 마침내 이 여인의 후손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처음 알리는 것이어서 ‘원복음’(原福音)이라고 부른다.
- 411 그리스도교 전승은 이 대목을 “새로운 아담”의(306) 예고라고 본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아담의 불순종을 넘치게 보상한다.(307) 한편 많은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은 이 ‘원복음’에서 예고된 ‘여인’을 “새로운 하와”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로 생각한다. 마리아는 최초로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죄에 대한 승리의 은혜를 입은 분이다. 그분은 원죄에 전혀 물들지 않았고,(308) 지상 생애 동안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다.(309)
- 412 그렇다면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막지 않으셨던가- 대 레오 성인은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은 마귀가 질투로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310) 그리고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에도 더 높은 목적을 향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더 큰 선을 이루어 내시고자 악을 허락하신다. 이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말했으며, 부활 찬송(Exultet)은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하고 노래한다.”(311)
- 간추림
- 413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지혜 1,13; 2,24).
- 414 사탄 또는 악마와 모든 마귀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획에 봉사하기를 거부하여 타락한 천사들이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그들의 선택은 결정적인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반역에 인간을 끌어들이고자 애쓴다.
- 415 “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312)
- 416 첫 인간으로서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께 받은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렸다.
- 417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첫 범죄로 후손들에게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손상된 인간 본성을 전해 주었다. 이 상실을 ‘원죄’라 한다.
- 418 원죄의 결과로 인간 본성은 그 힘이 약해져서,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죄로 기울게 되었다(이러한 경향을 ‘탐욕’이라 한다).
- 419 “그러므로 우리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라, 원죄는 ‘모방이 아닌 번식으로’ 인간 본성과 함께 전달되며,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13)
- 420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죄에 대한 승리는, 죄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준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 421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된다고 믿는다. 죄의 노예 상태에 떨어졌으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악의 권세를 쳐부수시고 해방시키신 이 세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변혁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314)
- 제 2 장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 기쁜 소식 -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 주셨다
- 422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곧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것이(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3) 보내 주시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말씀하신 바를 전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이행하셨다.(4)
- 423 우리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믿고 고백한다. 그분은 헤로데 임금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1세 황제 때에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한 딸에게서 유다인으로 태어났으며, 직업은 목수였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기간 중 본시오 빌라도 총독 치하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에게서 나오셨으며”(요한 13,3), “하늘에서 내려오셨고”(요한 3,13;6,33),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5) 사실을 우리는 믿고 고백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4.16).
- 424 성령께서 움직여 주시고 성부께서 이끌어 주셔서, 우리는 예수님을 이렇게 믿고 고백한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 베드로가 고백한 바로 이러한 신앙의 반석 위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다.(6)
-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전하다”(에페 3,8)
- 425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달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그분을 알리는 것이다. 그분의 첫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알리려는 열정에 불탔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그리고 그들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렸던 친교의 기쁨에 초대한다.
-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1-4).
- 교리 교육의 핵심은 그리스도
- 426 “교리 교육의 핵심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 인물, 성부의 외아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우리를 위하여 수고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분, 부활하여 지금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 말입니다……. 교리 교육은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을 소개하여 하느님의 영원하신 계획 전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리 교육은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의 의미, 그분을 통해 나타난 표징의 의미를 알아들으려는 노력입니다.”(7) 교리 교육의 목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수 있으며, 우리를 거룩하신 성삼위의 생명에 참여토록 하실 수 있습니다.”(8)
- 427 “교리 교육에서 가르침의 내용은, 강생하신 말씀이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시며, 그 밖의 모든 진리는 그분과 관련되어 전달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이도 그리스도뿐이시며 다른 이는, 그리스도의 대변인으로서 자기 입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한에서 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모든 교리 교사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 하신 심오한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9)
- 428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불린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기 위하여”, 그리고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 위하여” 마땅히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겨야 한다(필리 3,8-11).
- 429 사랑으로 얻게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 지식에서, 그분을 알리고(‘복음을 전하고’) 나아가 다른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이끌고자 하는 열망이 솟아난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신앙을 더 잘 알고자 하는 필요성도 항상 느끼게 된다. 이런 목적에서 신경은 맨 먼저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주님 등 예수님의 중요한 호칭들을 제시한다(제2절). 그 다음으로 신경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주요한 신비들을 고백한다. 곧, 강생의 신비(제3절), 수난과 부활 곧 파스카의 신비(제4절과 제5절), 그리고 끝으로 영광 받음의 신비(제6절과 제7절)를 고백한다.
- 제2절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 I. 예수
- 430 예수는 히브리 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주님 탄생 예고 때에 천사 가브리엘은 그분께 ‘예수’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이름은 그분의 신원과 사명을 동시에 나타낸다.(10)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없기”(마르 2,7)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의 영원한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인간을 위해 당신 구원의 역사 전체를 총괄적으로 실현하신다.
- 431 하느님께서는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종살이하던 집”(신명 5,6)에서 구해 내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죄에서도 구해 주셨다. 죄란 언제나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11) 오직 하느님만이 그 죄를 없애 주실 수 있다.(12)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점차 죄의 보편성을 깨달아 가면서, 구원자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13)
- 432 예수라는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 당신 아들의 인격 안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14) 성자께서는 인간을 죄로부터 보편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해 내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예수는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하느님의 이름이며,(15) 이제는 강생하여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시어,(16) 모든 사람은 이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17)
- 433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은 일 년에 단 한 번, 대사제가 이스라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지성소의 속죄판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릴 때만 불렀다.(18) 속죄판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이다.(19)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로마 3,25) 하고 말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2코린 5,(19) 는 것을 의미한다.
- 434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한다.(20) 이제 ‘예수’라는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필리 2,9-10)이 지닌 최상의 권능을 충만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악령들은 그분의 이름을 두려워한다.(21)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22)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께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시기 때문이다.(23)
- 435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인 기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전례의 모든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로 끝맺는다. 성모송은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는 말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 기도’라고 불리는 동방의 마음의 기도는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한다. 잔 다르크 성녀가 그랬듯이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오직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둔다.(24)
- II. 그리스도
- 436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받은이’를 뜻하는 히브리 말 ‘메시아’의 그리스 말 번역에서 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신적 사명을 완전히 수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는 예수님의 고유한 이름이 된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봉헌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부었다. 왕과(25) 사제들의(26) 경우가 그랬고, 간혹 예언자들도(27)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결정적으로 세우시기 위해 파견하시는 메시아의 경우는 그중 가장 특출한 예이다.(28) 메시아는 왕이며 사제로서,(29) 또한 예언자로서(30) 주님의 성령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다.(31) 예수님께서는 사제, 예언자, 왕의 삼중 임무 안에서 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의 희망을 채워 주셨다.
- 437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의 탄생이라고 목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그분은 처음부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요한 10,36) 분이며,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거룩하신 분”으로 잉태되신 분이다.(32)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하고 명하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가문, 곧 다윗 가문에서 난 요셉의 아내에게서 태어나게 된다(마태 1,16).(33)
- 438 예수님의 메시아 축성(祝聖)은 그분의 신적 사명을 드러낸다. “이는 그분의 이름 자체가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은이, 기름부음받은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받으신 기름부음 그 자체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름부음 자체이신 성령 안에서, 성부께서는 기름을 부으시고, 성자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으시는 것이다.”(34) 예수님의 영원한 메시아 축성은, 지상 생활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심으로써”(사도 10,38)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 예수님의 업적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이(35) 드러난다.
- 439 많은 유다인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희망을 가진 몇몇 이방인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 곧 ‘다윗 자손’의 근본적인 특징들을 알아보았다.(36) 예수님은 당신의 권리인 메시아라는 칭호를 받아들이지만,(37) 당시 일부 사람들이 이 칭호를 지나치게 인간적인 개념으로, 특히 정치성을 띤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38) 이 칭호를 매우 조심스럽게 받아들이셨다.(39)
- 440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받아들이신 다음 곧바로 사람의 아들에게 닥쳐올 수난을 예고하신다.(40) 이로써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요한 3,13)의(41) 천상적 신분 안에서, 그리고 고통 받는 종으로서 맡은 구속 사명 안에서 메시아 왕권의 참내용을 밝히셨다.(42)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그분께서 누리시는 왕권의 진정한 의미가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밝혀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43)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그분의 메시아 왕권은 베드로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 앞에서 선포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 III. 하느님의 외아들
- 441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천사,(44) 선택된 백성,(45) 이스라엘의 자녀와(46) 그들의 왕들을(47) 부르던 칭호이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자녀로 입양됨을 의미한다. 약속된 메시아-왕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48) 부를 때, 그 본문들에 나타난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반드시 예수님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시라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지칭하는 본문들도(49) 아마 인간보다 더한 분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50)
- 442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51) 라고 고백하는 것은 다른 경우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다.”(마태 16,17) 하고 엄숙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오로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겪은 자신의 회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 바오로는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9,20).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는 것은 처음부터(52) 사도 신앙의 중심이 되었으며,(53)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54) 맨 먼저 고백하였다.
- 443 베드로가 메시아 예수님에게서 하느님 아들의 초월적 성격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서 그것을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러하다고 너희가 말하고 있다.”(루카 22,70)(55) 고 대답하셨다. 그 훨씬 이전부터 이미 그분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아버지를 아는 ‘아들’이고,(56) 하느님께서 전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내셨던 ‘종들’과는 다른 분이며,(57) 천사들보다 높은 분(58)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마태 6,9)라고 명하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저희 아버지”라는 말을 쓰지 않으심으로써,(59) 하느님과 당신의 부자 관계를 제자들의 그것과 구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요한 20,17)라는 말로써 그 구별을 명확하게 하신다.
- 444 복음서는 두 번의 장엄한 순간, 곧 그리스도의 세례 때와 변모 때에 그분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60) 하시는 성부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느님의 외아들”(요한 3,16)이라고 하시며, 이 칭호를 통해서 당신께서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분임을 확언하신다.(6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요한 3,18)을 믿도록 요구하신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백인대장이 한 고백에 이미 나타나 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신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의 궁극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445 예수님의 부활 뒤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영광을 받은 인성의 권능 안에서 드러난다.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4).(62)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 IV. 주님
- 446 모세에게 계시하신, 감히 부를 수조차 없는 하느님 이름인 YHWH(야훼)는 그리스 말 역 구약 성경에서는 Kyrios(‘주님’)로 번역된다.(63) 그때부터 ‘주님’이라는 칭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지니신 신성까지도 가리키는 가장 자주 쓰이는 이름이 되었다. 신약 성경은 성부를 지칭할 때 이 ‘주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뿐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께도 똑같이 사용한다. 예수님을 바로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새로운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64)
- 447 예수님께서 몸소 시편 110(109)에 대해 바리사이들과 토론하시면서 이 칭호를 암시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신다.(65) 그러나 당신 제자들에게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66) 공생활 동안 행하신, 자연, 질병, 마귀, 죽음과 죄를 지배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들은 하느님의 주권을 증명한다.
- 448 복음서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릴 때 매우 자주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칭호는 예수님께 다가가 도움과 치유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증언한다.(67) 이 칭호는 성령의 작용으로 예수님의 하느님 신비를 알게 되었음을 나타낸다.(68)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이 칭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처럼 일종의 흠숭이다. 이 칭호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자리 잡은 고유의 사랑과 정감을 지닌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 449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이라는 신성한 칭호로 부름으로써,(69) 권능과 영예와 영광을 하느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확언한다.(70)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과 같은 분”(필리 2,6)이시며, 성부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당신의 영광 안에 들어 높이심으로써(71) 예수님의 주권을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 450 그리스도교 역사의 시초부터, 예수님께서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단언은(72)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지상의 그 어느 권력에도 절대적으로 종속시켜서는 안 되며, 오직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종속시켜야 한다고 인정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주님’이 아니다.(73) “교회는 인류 역사 전체의 관건과 중심과 목적을 자신의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74)
- 451 그리스도교 기도의 특징은 ‘주님’이라는 칭호에 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로 기도에 초대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는 말로 기도를 끝맺으며, 신뢰와 희망에 넘쳐 “마란 아타!”(주님께서 오신다!) 또는 “마라나 타!”(저희의 주님, 오십시오!)를 외친다(1코린 16,22).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 간추림
- 452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마태 1,21)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 453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받은이’, ‘메시아’를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기”(사도 10,38) 때문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는 “오실 분”(루카 7,19)이시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망해 온”(75) 분이시다.
- 454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영원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시며(76) 또한 하느님 자신이시다.(77)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필수적이다.(78)
- 455 ‘주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거나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 제3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
- 제1단락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
- I. 왜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가-
- 456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우리는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79) 하고 고백한다.
- 457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1요한 4,14).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3,5).
- 병든 우리의 본성은 치유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다시 일어서야 했고, 죽은 인간은 다시 살아나야 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좋은 것들을 잃은 사람은 이를 다시 찾아야만 했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사람에게 빛이 비쳐야만 했습니다. 사로잡혔던 우리는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갇혀 있던 우리는 구조를 기다렸고, 노예였던 우리는 해방자를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이 과연 하느님께 하찮은 것이었을까요- 인류가 이처럼 불행하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시게 할 정도로, 이러한 이유들이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만하지 않았겠습니까-(80)
- 458 ‘말씀’은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 459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함의 모범이 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리고 성부께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산에서 이렇게 명하신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81) 참으로 그분께서는 참행복의 모범이시며, 새 율법의 기준이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 사랑에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 실제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82)
- 460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인간이 되시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83)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84)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85)
- II. 강생
- 461 교회는 요한 복음의 표현(“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 1,14)에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인간 본성을 취하신 일을 ‘강생’(降生)이라고 부른다. 바오로 사도가 인용한 찬미가에서 교회는 강생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86)
- 462 히브리서도 같은 신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시편 40[39],7-9를 인용한 히브 10,5-7).
- 463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강생하셨다는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이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1요한 4,2).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 초창기부터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신비”로 노래한 기쁨에 찬 확신이다. “그분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셨도다”(1티모 3,16).
- III.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
- 464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 유일하고도 유례없는 강생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분적으로 하느님이시고 부분적으로 인간이시거나, 하느님과 인간의 불분명한 혼합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참하느님으로 계시면서 참사람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시다. 교회는 초기 몇 세기 동안 이 신앙의 진리를 변질시키려는 이단들과 맞서 이를 옹호하고 분명히 해야 했다.
- 465 초기의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도 그분의 참된 인성을 부인했다(그리스도 가현설[假現說]: Docetismus gnosticus).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87) 하는 참된 강생을 주장했다. 그러나 3세기부터 교회는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사모사타의 파울루스의 주장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입양이 아니라 본성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확언해야 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제1차 세계 공의회는 하느님의 아들이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88) 이시라고 그 신경을 통해 고백하고, “하느님의 아들은 무에서 나왔다”(89) 거나 “성부와는 실체 또는 본질이 다르다”(90) 고 주장한 아리우스를 배척했다.
- 466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인간적 위격이 하느님의 아들의 신적 위격과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맞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와 431년 에페소 제3차 세계 공의회는 “‘말씀’은 영혼으로 생명력을 지니게 된 육신을 위격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일치시키심으로써 인간이 되셨다.”(91) 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 외에 다른 주체를 가지지 않는다. 이 제2위격은 잉태 때부터 인성을 취하시어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에페소 공의회는 431년에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태중에 인간으로 잉태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당신의 신성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영혼을 부여받은 거룩한 육체를 마리아에게서 얻으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그 위격에서 육체와 결합하였기에 사람의 몸으로 나셨다고 일컬어진다.”(92)
- 467 그리스도 단성론자(單性論者)들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으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 본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이단에 맞서 칼케돈 제4차 세계 공의회는 451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서,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사람이시며, 신성으로는 아버지와 한 본체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한 본체이시며, “죄 말고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똑같으시고”,(93) 신성으로는 시간 이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으로는 이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태어나신, 유일하고 동일한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것을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가르치는 바이다. 한 분이시며 같은 그리스도이신 외아들 주님은, 우리가 두 본성을 혼동하거나, 변질시키거나, 분할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인정해야 한다. 이 두 본성의 차이점은 그 결합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함이 그대로 보전되어,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본체 안에 결합되었다.(94)
- 468 칼케돈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의 인성을 일종의 위격적 주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맞서 5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5차 세계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삼위의 한 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하나의 위격(hypostasis 또는 persona)이시다.”(9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기적뿐 아니라 그분의 고통과(96) 죽음까지도, 그분의 인성에 해당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주체인 신적 위격에 귀속된다.(97) “사람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하느님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며, 거룩한 삼위의 한 분이시다.”(98)
- 469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갈라질 수 없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시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분께서는 ‘우리 형제’ 인간이 되신 참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언제나 ‘우리 주’ 하느님이시다.
- 로마 전례는 “그분께서는 그대로 계시면서, 그대로가 아닌 모습을 취하셨도다.”(99) 하고 노래한다. 그리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전례문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며 노래한다. “오, 외아들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이시여, 영원하신 당신께서는 저희 구원을 위하여 천주의 성모 평생 동정 마리아에게서 강생하시고, 변화되지 않고 인간이 되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오 그리스도 하느님이시여,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영광을 받으시는, 거룩하신 삼위의 한 분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100)
- IV.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는가-
- 470 강생의 신비스러운 결합에서, 성자는 인간 본성을 “취하셨지만 소멸시키지는 않으셨다.”(101) 그러므로 교회는 지성과 의지의 활동을 지닌 그리스도의 인간 영혼과 인간 육체의 온전한 실재성을 역사 안에서 계속 고백해 왔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매번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이 그것을 취하신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에 고유하게 속한다는 사실도 환기시켜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그 인성 안에서 존재하고 행하시는 모든 것은 ‘삼위의 한 분’으로서 존재하고 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삼위 안에서 지니시는 고유한 위격적 존재 양식을 당신의 인성에게도 전달하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육체 안에서나 영혼 안에서 모두 삼위의 신적 삶을 인간적으로 드러내신다.(102)
-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정신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어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 말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103)
- 그리스도의 영혼과 인간적 인식
- 471 라오디케이아의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영혼 또는 정신을 대치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오류에 대해 교회는 영원한 아들이 인간의 영혼도 취하였다고 고백했다.(104)
- 472 하느님의 아들이 취한 이 인간 영혼은 진정한 인간적 인식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인식은 한계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조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가는”(루카 2,52) 인간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그 때문에 경험으로 알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야만 했다.(105) 이런 사실은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당신 자신을 기꺼이 낮추신 사실과도 부합한다.(106)
- 473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러한 하느님 아들의 진정한 인간적 인식은 그 ‘위격’의 신적 생명을 드러내는 것이었다.(107) “하느님의 아들은 인성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말씀’에 결합함으로써, 자신 안에서 하느님으로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셨으며, 이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셨다.”(108) 먼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친밀하고도 직접적인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109) 또한 성자께서는 당신의 인간적인 인식 안에서, 인간 마음속에 감추어진 생각들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의 통찰력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110)
- 474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신 말씀의 위격으로 하느님 지혜와 일치를 이루고 계셨기에, 그 인간적 인식은 당신이 계시하러 오신 영원한 계획들을 온전히 알고 계셨다.(111)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이에 대해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112) 그것을 알리는 것은 당신의 사명이 아니라고 다른 곳에서 밝히신다.(113)
-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
- 475 마찬가지로, 교회는 681년 제6차 세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적이고 인간적인 두 의지와 두 작용을 지니신다고 고백하였다. 그 둘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력하는 것이어서, 사람이 되신 말씀은 성부께 완전히 복종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으로서 결정하신 모든 것을 인간으로서도 원하신다.(114)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당신의 신적 의지에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전능한 의지에 순종한다.”(115)
- 그리스도의 참된 육체
- 476 ‘말씀’은 참된 인성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는 묘사가 가능하다.(116) 이 때문에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은 “생생하게 그려질”(117) 수 있다. 제7차 세계 공의회에서(118) 교회는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을 성화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 477 이와 동시에 교회는 예수님의 육체를 통하여 “당신 본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인간으로 나타나셨다.”(119) 는 것을 항상 인정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지닌 개별적인 특성들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을 표현한다. 인간 육체의 모습을 취하신 그분을 성화상으로 그려 공경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신자들이 그분의 모습을 공경하는 것은 “그 모습 안에 묘사되어 있는 위격을 공경하는 것”(120) 이기 때문이다.
- 강생하신 말씀의 성심
- 478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생, 고뇌와 수난 동안 우리들 모두와 각자를 알고 사랑하셨으며, 우리 하나하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다. 하느님의 아들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갈라 2,20). 그분은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다. 이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은,(121) “구세주께서 영원하신 아버지와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탁월한 표지와 상징으로 여겨진다.”(122)
- 간추림
- 479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영원한 말씀이요 성부의 실체적 모습이신 성부의 외아들께서 강생하셨다. 그분은 신성을 잃지 않으면서 인성을 취하셨다.
- 48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적 위격의 단일성 안에서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 48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지니신다.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아들의 단일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
- 482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다. 이 지성과 의지는 성부와 성령과 공유하시는 당신의 신적 지성과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종속된다.
- 483 그러므로 강생은 ‘말씀’의 유일한 위격 안에 결합된 신성과 인성의 놀라운 일치의 신비이다.
- 제2단락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 I.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되어……
- 484 마리아에게 주님의 탄생이 예고되면서 “충만한 때”(갈라 4,4)가 시작된다. 그것은 곧 약속과 준비의 성취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머무르고 있는”(콜로 2,9) 그분을 잉태하도록 초대되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하는 마리아의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으로 성령의 힘이 드러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실 것이다”(루카 1,35).
- 485 성령의 파견은 언제나 성자의 파견과 연관되고, 성자의 파견을 지향한다.(123)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성령께서는 동정 마리아의 태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느님을 잉태하게 하시려고 파견되셨다. 성령께서는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하여 잉태되게 하셨다.
- 486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인간으로 잉태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바로 ‘그리스도’, 곧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분이시다.(124) 그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목자들에게,(125) 동방 박사들에게,(126) 세례자 요한에게,(127) 그리고 제자들에게(128) 점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어떻게 “그분에게 하느님께서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는지”(사도 10,38)를 드러내는 것이다.
- II.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 487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에 대하여 믿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마리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 신앙을 밝혀 준다.
- 예정된 마리아
- 488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다”(갈라 4,4). 그러나 그분에게 “몸을 마련해 주시기”(129) 위하여 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을 바라셨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삼을 이스라엘의 딸을 선택하셨는데, 그는 갈릴래아 나자렛의 한 젊은 유다 여인,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이며,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루카 1,26-27).
-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정된 어머니의 동의가 강생에 앞서 이루어져 마치 어느 모로 여인이 죽음에 이바지한 것처럼 그렇게 또한 여인이 생명에 이바지하기를 바라셨다.(130)
- 489 구약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사명은 거룩한 여인들의 사명을 통해서 예비되어 왔다. 맨 먼저 하와는 비록 불순명하였지만 악에게 승리할 후손을 주시리라는 약속과,(131)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132) 이 약속 덕분에 사라는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133)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인간의 모든 기대와는 달리 무능하고 약한 사람들로(134) 여겨지는 여인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35) 드보라, 룻, 유딧, 에스테르와 다른 많은 여인들을 선택하셨다. 마리아는 “신뢰로 주님께 구원을 바라고 받는 주님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빼어난 분이다. 약속의 오랜 기다림 뒤에, 마침내 빼어난 시온의 딸인 이 여인과 더불어 때가 차고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었다.”(136)
- 원죄 없으신 잉태
- 490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이 위대한 임무에 맞갖은 은혜를 받았다.”(137) 가브리엘 천사는 잉태를 예고하면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고(138) 인사한다. 사실 마리아는 신앙으로 자신의 소명에 대한 이러한 예고에 자유로이 동의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도되어야만 했다.
- 491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한”(139) 마리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구원받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이 선포한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는 바로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으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공로를 미리 입으시어, 원죄에 조금도 물들지 않게 보호되셨다.(140)
- 492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나자렛의 동정녀를 꾸며 준 더없이 뛰어난 성덕의 빛은”(141)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공로로 보아 뛰어난 방법으로 구원을 받으셨다.”(142) 성부께서는 다른 모든 창조된 인간들보다 마리아에게 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내리셨습니다”(에페 1,3).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 493 동방 전통의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온전히 거룩한 이”(Panagia)라고 불렀으며,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으로, 이를테면 성령께서 빚어 만드신 새로운 인간이시다.”(143) 하고 찬미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았다.
-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494 남자를 모르면서도 마리아는, 성령의 힘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잉태 예고를 받았을 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144) 확신하며, “믿음의 순종으로”(145) 응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처럼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에 동의함으로써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리아는 온전한 마음으로 아무런 죄의 거리낌도 없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이고,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쳐,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였다.(146)
-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대로 “동정 마리아는 순종하시어 자신과 온 인류에게 구원의 원인이 되셨다.”(147) 그와 더불어 적지 않은 옛 교부들이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묶어 놓은 것을 동정녀 마리아가 믿음을 통하여 풀어 주셨다.”(148) 고 말한다. 그리고 하와와 비교하여 마리아를 “살아 있는 이들의 어머니”라 부르고, 더 자주 이렇게 주장한다. “하와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149)
-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 495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요한 2,1; 19,25)로 불린다.(150) 마리아는 당신의 아드님을 낳기 전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아 “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라고 불린다. 과연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분, 곧 육체적으로 마리아의 참아드님이 되신 분은 다름 아닌 성부의 영원한 아드님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의 제2위격이시다. 교회는 마리아를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고백한다.(151)
- 동정 마리아
- 496 초기의 신앙 표현들에서부터,(152) 교회는 예수님께서 오로지 성령의 힘으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다고 고백했으며, 이 사건의 육체적인 측면도 긍정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의 관여 없이 성령으로”(153) 잉태되셨다. 교부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시는 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징표를 동정 잉태에서 알아보았다.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2세기 초)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을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154) 하느님 의지와 권능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155) 참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셨고,……그 육신으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우리를 위하여 참으로 못 박히셨고……참으로 수난하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156)
- 497 복음서의 이야기들은(157) 동정 잉태를 모든 인간적 이해력과 가능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업적으로 이해하고 있다.(158) 천사는 요셉에게 그의 약혼자 마리아에 대해서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하고 일러 준다. 교회는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약속, 곧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이사 7,14를 그리스 말로 번역한 마태 1,23)고 한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본다.
- 498 마리아의 동정 잉태에 대하여 마르코 복음이나 신약 성경 서간들이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전설이거나,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학적으로 구성된 이야기가 아닌가 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 잉태되셨다는 신앙은 비그리스도 신자와 유다인들과 이교인들의 강력한 반대와 비웃음과 몰이해에 부딪혔다.(159) 이 동정 잉태는 이교 신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시대의 생각에서 따온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신비들의 내적 연관성”(160) 안에서, 그리고 강생에서 파스카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 안에서 바라보는 신앙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일찍이 이러한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마리아의 동정성과 출산을 몰랐으며, 주님의 죽음도 몰랐습니다. 이 세 가지 빛나는 신비는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161)
- ‘평생 동정’ 마리아
- 499 마리아가 동정으로 어머니가 되었다는 신앙을 더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교회는 마리아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그 순간에도,(162) 실제로 그리고 평생 동정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기에 이른다.(163) 사실 그리스도의 출생은 당신 어머니의 “완전한 동정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성화하였다.”(164) 교회 전례는 마리아를 ‘평생 동정’(Aeiparthenos)으로 찬미한다.(165)
- 500 성경이 예수님의 형제자매에 대해 가끔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마리아의 평생 동정 사실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166) 교회는 항상 이 대목들이 동정 마리아의 다른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 왔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마태 13,55)인 야고보와 요셉은 “다른 마리아”(마태 28,1)라고 명시된 예수님의 제자 마리아의 아들들이다.(167) 구약 성경의 표현 방식대로,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을 일컫는 말이다.(168)
- 501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유일한 아드님이시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적인 모성은(169)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로마 8,29) 삼으신 성자를 낳았으며, 그 형제들 곧 신자들을 낳아 기르는 데 모성애로 협력한다.”(170)
- 하느님의 계획에서 본 마리아의 동정 모성
- 502 신앙의 눈으로 계시 전체와 연관시켜서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에서 당신 아들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셨던 신비한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이유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 사명에 관련되는 만큼, 마리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 사명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관련된다.
- 503 마리아의 동정성은 강생에서 취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171) “그분께서 취하신 인간 본성 때문에 성부에게서 멀어지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분께서는 그 신성으로는 성부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으로는 어머니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당신의 두 본성 안에서 그분은 바로 성부의 아들이시다.”(172)
- 504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를 개시하는 새 아담(173) 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1코린 15,47).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잉태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구원 받은 인류의 머리이신(174) 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 505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정 잉태를 통하여, 신앙으로 성령 안에서 입양된 자녀들의 새로운 탄생을 개시하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175)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3). 이러한 생명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이 생명을 받아들임은 동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혼인적 소명은(176) 마리아의 동정 모성 안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 506 마리아는 동정녀이다. 그 동정성은 “어떠한 의혹도 섞이지 않은”(177) 그 믿음의 표지이며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흐트러짐 없는 헌신의 표지이기 때문이다.(178)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한 것은 자신의 신앙이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하셨다는 사실보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복되십니다.”(179)
- 507 마리아는 교회의 전형이며, 어머니로서 또 동정녀로서 모범을 보여 주신다.(180)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받아들여 그 자신도 어머니가 된다. 실제로 교회는 복음 선포와 세례로써,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느님에게서 난 자녀들을 불멸의 새 생명으로 낳는다. 교회는 또한 신랑에게 바친 믿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지키는 동정녀이다.”(181)
- 간추림
- 508 하느님께서는 하와의 후손 가운데 동정 마리아를 택하시어,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삼으셨다.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는 “구원의 뛰어난 열매”이다.(182) 마리아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하게 보호되고, 일생 동안 본죄에 물들지 않았다.
- 509 마리아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 바로 하느님이신 그 아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 510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을 “동정으로 잉태하고, 동정으로 낳고, 동정으로 길렀으며, 동정으로 젖을 먹이셨으니, 그분은 평생 동정이셨습니다.”(183) 마리아는 당신의 존재 전체로 “주님의 종”(루카 1,38)이다.
- 511 동정 마리아는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였다.”(184) 마리아는 “인류 전체를 대표하여”(185)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였다. 동정 마리아는 순종으로써 새로운 하와, 곧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다.
- 제3단락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
- 512 신경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해서 단지 강생(잉태와 탄생)과 파스카(수난, 십자가에 달리심, 돌아가심, 묻히심, 저승에 가심, 부활, 승천)의 신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신경은 예수님의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생활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강생과 파스카에 관한 신앙 조문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전체를 밝혀 준다.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사도 1,1-2)은 강생과 파스카의 신비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 513 교리 교육은 상황에 맞추어 예수님 신비의 풍요로움을 모두 전개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 생애의 모든 신비들에 공통되는 몇몇 요소들(I)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예수님의 사생활(II)과, 공생활(III)의 주요한 신비들을 개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I.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신비이다
- 514 복음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많은 것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분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공생활의 많은 부분도 언급하지 않는다.(186)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 515 복음서는 최초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187) 다른 사람들과 그 신앙을 나누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신앙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의 지상 생활 전체에서 그 신비의 자취를 볼 수 있었고, 또 보여 줄 수 있었다. 당신 탄생 때의 포대기에서부터(188) 수난의 신 포도주와(189) 부활 때의 수의에(190) 이르기까지 예수님 생애의 모든 것은 그분의 신비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기적과 말씀을 통해서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다.”(콜로 2,9)는 사실이 계시되었다. 그분의 인성은 이처럼 ‘성사’, 곧 그분의 신성과 그분께서 가져오시는 구원의 징표와 도구로 나타난다. 그분의 지상 생활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비, 곧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의 사명을 수행하신다는 사실이다.
- 예수님 신비의 공통 특징들
- 516 그리스도의 전 생애 ─ 말씀과 행동, 침묵과 고통, 존재와 표현 방식 ─ 는 성부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성부께서도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사람이 되셨으므로,(191) 그분 신비의 사소한 모습들도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 준다.(192)
- 517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속량’의 신비이다. 속량(贖良)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193) 이 신비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강생으로 스스로 가난해지시어 그 가난으로 우리를 오히려 부요하게 하신다.(194) 그분의 숨겨진 생활에서는 순종으로(195)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을 정화한다.(196) 그리고 그분은 치유와 구마(驅魔)로써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태 8,17).(197)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마침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198)
- 518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총괄 실현’(recapitulatio)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시고 고통 받으신 모든 것은 타락한 인간의 원초적인 소명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하느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실 때, 그분께서는 자신 안에서 인간의 역사 전체를 총괄적으로 실현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지름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아담으로 잃은 것, 곧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게 된다.(199)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인생의 온갖 단계를 거치셨다.(200)
- 우리가 예수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친교
- 519 그리스도의 모든 풍요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요, 모든 사람의 재산이다.”(20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사셨다.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202) 강생에서부터 “우리의 죄 때문에”(1코린 15,3) 돌아가시기까지,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로마 4,25) 부활하시기까지 당신 일생을 사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1요한 2,1), “늘 살아 계시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빌어 주신다”(히브 7,25). 그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살고 고통 받으신 그 모든 것을 지니시고 항상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히브 9,24) 계신다.
- 5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203) 그분은, 당신 제자가 되어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완전한 인간”(204) 이시다. 당신을 낮추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으며,(205) 몸소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를 기도로 이끄시고,(206) 친히 가난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가난과 박해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이끄신다.(207)
- 521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살며 겪으신 모든 것을 우리가 당신 안에서 그대로 살게 하시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살며 겪으신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분께서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다.”(208)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게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범으로 당신의 육신 안에서 사신 삶에 우리를 당신 몸의 지체로서 참여하게 하신다.
- 우리는 예수님의 실존과 신비들을 우리 안에서 지속시키고 성취해야 합니다.……그 신비들이 우리와 온 교회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성취되도록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와 온 교회에 그 신비들을 나누고 확장시키며 또 계속하고자 하는 원의를 갖고 계십니다.……이 일은 우리에게 주시기로 계획하신 은총과 그 신비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시려는 만큼 효과를 봅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께서는 그 신비들을 우리에게서 완성하시고자 합니다.(209)
- II.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숨은 생활의 신비들
- 준비
- 522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이 큰 사건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기 동안 이를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첫째 계약”의(210) 예식과 희생 제사, 표상과 상징들을 모두 그리스도를 향해 집중시키셨으며, 계속 출현하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분을 예고하신다. 그 밖에도 이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분께서 오시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불러일으키신다.
- 523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하여(211) 파견된 주님 직전의 선구자이다.(212)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루카 1,76)인 요한은 모든 예언자를 능가하는(213) 마지막 예언자이며(214) 복음의 시작이다.(215) 그는 자기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께 인사를 드렸고,(216)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부른 “신랑의 친구”(요한 3,29)가 됨을 기뻐했다.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예수님에 앞서 온 그는 설교와 회개의 세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순교로 예수님을 증언한다.(217)
- 524 교회는 매년 대림 시기 전례를 거행하면서 실제로 메시아를 기다린다. 신자들은 구세주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오랜 준비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새롭게 한다.(218) 교회는 ‘선구자’의 탄생과 순교를 기념하여 그의 소망과 일치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 성탄의 신비
- 525 예수님께서는 외양간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다.(219) 순박한 목동들이 이 사건의 첫 증인들이다. 이 가난에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난다.(220) 교회는 이날 밤의 영광을 끊임없이 노래한다.
- 동정녀 오늘 영원하신 분을 세상에 낳으시고 땅은 가까이할 수 없는 그분께 동굴을 내드립니다. 천사들과 목동들이 그분을 찬양하고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옵니다. 영원한 하느님, 작은 아기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221)
- 526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다.(222)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223) 작은 이가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224)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나고”,(225) “위로부터 태어나야”(요한 3,7) 한다. 성탄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갖추실”(226)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예수 성탄의 신비는 이 ‘기묘한 교환’의 신비이다.
-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과 영혼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남자의 관여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셨도다.(227)
- 예수님 어린 시절의 신비
- 527 예수님의 할례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이루어지는데,(228)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계약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표시이며, 율법에 속하는(229) 표시이고, 당신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예배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표시이다. 이 표시는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의 예형이다.(230)
- 528 주님 공현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주님 공현은 요르단 강에서 받은 그분의 세례와, 카나의 혼인 잔치,(231) 그리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사실을 기념한다.(232) 복음은 주변의 이교(異敎)들을 대표하는 이 박사들이 강생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민족들의 시초라고 본다.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것은,(233) 다윗의 별이 비추는 메시아의 빛을 받아,(234) 장차 만민의 왕이 되실 분을(235) 이스라엘에서 찾았음을 보여 준다. 동방 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이방인들이 유다인을 향하고,(236) 그들로부터 구약에 담겨 있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일 때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과 온 세상의 구원자로 경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237) 주님 공현은 “많은 이방인들이 구약 성조들의 가문에 들어가고”(238) 이스라엘의 특전(239) 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529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침은(240)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속한 맏아들이심을(241) 보여 준다.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와 함께 온 이스라엘은 기다렸던 구세주를 맞으러 온다(비잔틴 전통은 이 사건을 ‘주님 맞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만민의 빛”,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인정되셨으나, “반대받는 표적”이기도 했다. 마리아에게 예언된 고통의 날카로운 칼은 또 하나의 봉헌, 곧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 앞에 준비하신” 구원을 베푸실 저 완전하고 유일한 십자가의 봉헌을 예고한다.
- 530 이집트 피난과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은(242) 빛에 대한 어둠의 저항을 나타낸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하여 많은 박해를 받으셨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이 박해를 나누어 받게 된다.(243) 예수님께서 이집트에서 올라오신 일은(244) 이집트 탈출을 상기시키며,(245) 그분을 결정적인 해방자로 제시한다.
-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의 신비
- 531 예수님께서는 당신 일생의 많은 기간을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에서 사셨다. 그것은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상적인 생활, 육체노동의 생활, 하느님의 율법에 순명하는 유다인의 종교 생활,(246)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이었다. 이 시기 전체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부모에게 순종하셨으며(247)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는 것이다.
- 532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와 당신 양부에게 순종하신 것은 제4계명을 완전히 지키신 것이다. 이 순종은 천상 아버지께 아들로서 하시는 순종의 현세적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항상 순종하신 것은 올리브 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루카 22,42)라고 하신 순종을 예고하고 미리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자렛 생활에서 일상적인 순종은 이미 아담의 불순종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복구하는 일이었다.(248)
- 533 나자렛의 감추어진 생활은 모든 사람이 삶의 가장 일상적인 길에서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게 해 준다.
- 나자렛 성가정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학교, 곧 복음의 학교입니다.……첫째는 침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정신을 위하여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인 침묵을 중시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성장하기를 바랍니다.……다음으로는 가정생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나자렛에서 가정생활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사랑의 친교, 간소하고도 소박한 아름다움, 그리고 성스럽고도 침해할 수 없는 특성들을 배워야 합니다. 끝으로는 노동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목수의 아들’의 나자렛 집에서, 우리는 인간 노동의 준엄하고도 구원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찬미하고자 하며……결론적으로 여기 나자렛에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노동자에게 인사를 보내고, 노동자들의 위대한 모범이시요 그들의 신적인 형제이신 분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249)
- 534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은 일은(250)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 복음이 침묵을 깬 유일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들의 사명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신비를 엿볼 수 있게 하신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마리아와 요셉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상생활의 침묵 속에 묻혀 지내는 동안 줄곧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 III. 예수님 공생활의 신비
- 예수님의 세례
- 535 예수님의 공생활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251) 시작된다.(252)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수많은 죄인들, 세리와 군사들,(253)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사람들,(254) 창녀들이(255)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가셨다.” 세례자 요한은 망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굳이 세례를 받으신다. 이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마태 3,13-17)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하느님 아들로서 드러난 예수님의 공현(Epiphaneia)이다.
- 536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이라는 당신의 사명을 수락하시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256) 이미 그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피 흘리는 죽음의 ‘세례’를 미리 받으셨다.(257)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기”(마태 3,15) 위하여 오신다. 곧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따르신다. 몸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사랑으로 죽음의 세례를 받아들이신다.(258) 이러한 수락에 성부의 목소리가 당신 아들이 마음에 든다고 응답한다.(259) 예수님께서 잉태 때부터 충만하게 지니셨던 그 성령께서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르신다.”(260)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한 성령의 원천이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담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마태 3,16), 예수님과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물이 거룩하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창조의 서막이다.
- 537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당신 세례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미리 겪으시는 예수님과 성사적으로 비슷하게 된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속죄하는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겼다가 그분과 함께 다시 올라와야 한다. 그래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로마 6,4).
-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세례를 통해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함께 묻읍시다. 그분과 함께 높이 올려지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내려갑시다. 그분과 함께 영광스럽게 되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올라갑시다.(261)
- 그리스도께 일어난 모든 일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물로 씻은 뒤에 하늘 높은 곳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성부의 음성을 통해 입양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262)
-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
- 538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광야에서 홀로 계셨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머무르신다.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으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263) 이 시기가 끝 날 무렵, 사탄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자녀다운 자세를 변질시키려고 세 번 유혹을 시도한다. 예수님께서는 낙원에서 아담이 받은 유혹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유혹이 집약된 공격을 물리치신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루카 4,13) 예수님을 떠나간다.
- 539 복음사가들은 이 신비한 사건이 지닌 구원적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 첫 아담은 유혹에 넘어졌으나, 예수님께서는 꿋꿋하게 서 계시는 새 아담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완전하게 수행하신다. 그 옛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하느님께 대들었던 사람들과는(264)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로써 악마를 이기셨으며, 그의 전리품을 다시 빼앗아 오시고자 “힘센 자를 묶어 놓으셨다.”(265)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자를 물리치신 것은 당신의 수난, 곧 아버지에 대한 자녀다운 사랑으로 바친 최고의 순종을 통한 승리의 예고이다.
- 540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하느님의 아들이 어떤 식으로 메시아이신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사탄이 제시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그분께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266)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유혹자를 이기셨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교회는 해마다 40일간의 사순 시기를 통하여 광야의 예수님 신비와 결합한다.
-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541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시작하셨다.”(267)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인간을 들어 높여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268)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심으로써 이를 행하신다. 이 모임이 바로 교회이며, 이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것이다.”(269)
- 542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가정’ 안에 모인 사람들의 중심에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하느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징표들과 제자들의 파견을 통해서 사람들을 당신께 불러 모으신다.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당신 파스카의 위대한 신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실현하실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이렇게 일치되도록 불리었다.(270)
- 하느님 나라의 선포
- 543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았다. 먼저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전해진 이 메시아의 나라는(271) 모든 민족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272)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 주님의 말씀은 밭에 심은 씨앗과 비슷하여,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그리스도의 작은 양 떼에 들게 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것이며, 그런 다음에 씨앗은 저절로 싹이 터 수확 때까지 자라난다.(273)
- 544 이 나라는 가난하고 미소한 자들, 곧 겸손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루카 4,18)(274) 파견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시는데 그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마태 5,3)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275)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다. 배고픔과(276) 목마름과(277) 궁핍을(278)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신다.(279)
- 545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초대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28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회개를 호소하시지만, 또한 당신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들에 대한 아버지의 한없는 자비와(281)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임”(루카 15,7)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러한 사랑의 최상 증거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마태 26,28)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일이 될 것이다.
- 546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의 전형적 형식인 비유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부르신다.(282)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하시지만,(283) 한편 근본적인 선택도 요구하신다.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284)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285) 비유는, 사람들이 마치 단단한 땅처럼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좋은 땅처럼 받아들이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과 같다.(286) 저마다 받은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하는가-(287) 이 세상에 계신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이 비유 안에 은밀하게 들어 있다. “하늘 나라의 신비”(마태 13,11)를 알아들으려면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저 바깥”(마르 4,11)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288)
- 하느님 나라의 표징
- 547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가 당신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많은 “기적과 이적과 표징”(사도 2,22)도 행하신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예고된 메시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289)
- 548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들은 성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한다.(290) 이 표징들은 예수님을 믿도록 권유한다.(291) 그분께서는 그분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청하는 것을 주신다.(292) 그러므로 기적들은 성부의 일을 수행하시는 분에 대한 신앙을 굳건하게 한다. 기적들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언한다.(293)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걸려 넘어지는(294)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기적은 호기심이나 마술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들이 아니다. 그렇게 분명한 기적들을 보여 주셨음에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으며(295) 심지어 마귀의 힘을 빌려 행동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296)
- 54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주림,(297) 불의,(298) 병과 죽음(299) 등 현세의 불행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 메시아의 표징을 보이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불행을 없애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300) 하느님 자녀의 소명을 다하지 못하게 하거나, 모든 인간적인 예속을 가져오는 가장 심각한 노예 상태, 곧 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301) 오셨다.
- 550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바로 사탄 나라의 패배이다.(302)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예수님의 구마(驅魔)는 사람들을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303) 이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304)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승리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세워질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무로 세상을 다스리셨네.”(305)
- ‘하늘 나라의 열쇠’
- 551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과 함께 머물며 당신의 사명에 동참할 열두 사람을 선택하셨다.(30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나누어 주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셨다”(루카 9,2).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해 교회를 인도하시므로,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
-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29-30).
- 552 이 열둘의 사도단 가운데 시몬 베드로가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30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유일한 임무를 맡기셨다. 성부의 계시에 힘입어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고백했다. 이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하고 선언하셨다. “살아 있는 돌”이신(308)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위에 세우신 당신 교회에게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신다. 베드로는 그가 고백한 신앙 때문에 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어떤 쇠퇴로부터도 이 신앙을 보호하고, 형제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는 사명을 맡게 될 것이다.(309)
- 553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이러한 ‘열쇠의 권한’은 하느님의 집, 곧 교회를 다스릴 권한을 가리킨다. “착한 목자”(요한 10,11)이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이 임무를 확인해 주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매고 푸는’ 권한은 죄를 용서하고 교의에 관한 판단을 선포하며, 교회의 규율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직무를 통하여,(310) 특히 베드로의 직무를 통하여, 이 권한을 교회에 맡기셨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맡기셨다.
-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봄 - 거룩한 변모
- 554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그날부터, 스승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베드로는 이러한 예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311) 다른 제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312)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높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택하신 세 증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일어난다.(313)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빛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구름이 그들을 덮고 하늘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 555 예수님께서는 잠시 동안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영광을 보이심으로써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신다. 또한 “영광 속에 들어가기”(루카 24,26)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보여 주신다. 모세와 엘리야는 산 위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율법과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했었다.(314) 예수님의 수난은 물론 성부의 뜻이며, 성자께서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를 행하신다.(315) 구름은 특히 성령의 현존을 가리킨다. “삼위께서 모두 나타나셨으니, 성부께서는 목소리로, 성자께서는 인간으로, 성령께서는 빛나는 구름으로 나타나셨다.”(316)
- 당신께서는 산 위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어, 가능한 한 당신의 제자들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당신의 영광을 바라보고,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게 될 때 당신의 수난이 스스로 원하신 것임을 깨닫고, 당신께서 참으로 성부의 빛이심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셨나이다.(317)
- 556 공생활 직전에는 세례가, 파스카 직전에는 거룩한 변모가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의 세례인 ‘첫 번째 재생의 신비’를 드러냈으며, 거룩한 변모는 우리 자신의 부활인 ‘두 번째 재생의 성사’(318) 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도 한다.
- 베드로가 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바랐을 때, 그는 이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습니다.(319) 베드로여,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신 다음에 주시려고 이것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지상에서 고생하고, 지상에서 봉사하고, 지상에서 멸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내려가라. ‘생명’이신 분이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빵’이신 분이 굶주리기 위하여 내려오고, ‘길’이신 분이 길 가느라 고단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샘’이신 분이 목마르기 위하여 내려오는데, 너는 고생하기를 싫다 하느냐-(320)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 557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321) 이 결심은 예수님께서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당신의 수난과 함께 부활을 예고하셨다.(322)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하고 말씀하신다.
- 55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된 예언자들의 죽음을 상기시키신다.(323) 그럼에도 예루살렘을 당신 곁에 모으시기 위하여 끈질기게 부르신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ㄴ). 예루살렘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며(324) 다시 한 번 간절한 소원을 표현하신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 559 예루살렘은 자신의 메시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당신을 왕으로 모시려는 군중의 시도를 언제나 피해 오셨던 예수님께서는(325) “당신의 조상 다윗”(루카 1,32)의 도성에 메시아로서 입성하실 시기를 택하시고 그 세부적인 준비를 하신다.(326)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가져오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한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영광의 임금님”(시편 24[23],7-10)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즈카 9,9) 당신의 도읍으로 들어가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교회의 표상인 시온의 딸을 계략이나 폭력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는(327) 겸손으로 정복하신다. 그러므로 그날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린이들과(328)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일 것이다. 그들은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줄 때처럼 환호한다.(329)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시편 118[117],26) 하는 그들의 환호를, 교회는 주님 파스카의 기념을 시작하는 성찬 전례의 ‘거룩하시도다’에서 다시 반복한다.
- 56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이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완성하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교회 전례는 성지 주일에 이 일을 기념하며 장엄한 성주간을 시작한다.
- 간추림
- 561 “그리스도의 삶 전부가 연속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분의 침묵, 기적, 행동거지, 기도, 사람들을 위하시는 사랑,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울이시는 각별한 애정,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상의 전적인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자세, 그분의 부활, 이 모두가 당신 말씀의 실현이었고 계시의 완성이었습니다.”(330)
- 56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실 때까지 그분을 닮아야 한다.(331)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분과 동화되어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마침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332)
- 563 목자이든 동방 박사이든 누구나 베들레헴의 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연약한 어린 아기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경배해야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
- 564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시고, 나자렛에서 보내신 여러 해 동안 비천한 일을 하심으로써, 가정과 노동의 일상생활 안에서 거룩함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 565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의 시작, 곧 당신의 세례 때부터 구속 사업에 온전히 봉헌된 ‘하느님의 종’이시며, 이 일은 당신 수난의 ‘세례’로 완성될 것이다.
- 566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성부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계획에 완전히 따르심으로써 사탄을 이기시는 겸손한 메시아 예수님을 보여 준다.
- 567 하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에서 개시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과 현존 안에서 사람들에게 빛나기 시작한다.”(333) 교회는 이 나라의 싹이며 시작이다. 그 열쇠는 베드로에게 맡겨졌다.
- 568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의 목적은 당신 수난에 대비하여 사도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려는 데 있다. “높은 산”에 오름은 갈바리아 산에 오르기 위한 준비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이 지니시고 성사 안에서 반영되는 것, 곧 “영광의 희망”(콜로 1,27)을 나타내신다.(334)
- 569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반대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335) 기꺼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 57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린이들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며 당신의 도성에 들어오신 메시아 왕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완성하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 제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 57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신비는, 사도들과 그 뒤를 이어 교회가 세상에 전파해야 할 기쁜 소식의 핵심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구원자이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단 한 번”(히브 9,26)에 이루어졌다.
- 572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파스카 전후에 주신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을 충실히 따른다.(33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마르 8,31)는 사실로써 예수님의 고난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마태 20,19).
- 573 그러므로 신앙인은 ‘속량’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복음서들은 그 상황을 충실히 전하며,(337) 다른 사료들 역시 이를 밝혀 준다.
- 제1단락 예수님과 이스라엘
- 574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명을 시작하신 초기부터, 일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뜻을 모았다.(338)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들(마귀를 쫓아내심,(339) 죄를 용서하심,(340)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심,(341) 율법상의 정결에 대한 독창적 해석,(342) 세리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심(343) )을 보고 악의를 가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마귀에 들렸다고 의심하기도 했다.(34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모독하고(345) 거짓 예언을 한다고(346) 비난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는 벌을 받는 종교적 죄였다.(347)
- 575 그러므로 예수님의 많은 행동과 말씀은 일반 하느님 백성에게(348) 보다는, 요한 복음이 흔히 ‘유다인들’이라고 부르는(349)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더욱 “반대를 받는 표징”이었다.(350) 물론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관계가 단지 논쟁을 벌이는 관계만은 아니었다. 예수님께 닥칠 위험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은 바리사이들이다.(351)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12장 34절에 나오는 율법 학자의 경우처럼,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칭찬하시고, 여러 번 바리사이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352)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의 부활,(353) 신심 행위(자선, 단식, 기도),(354)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습,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계명의 중심이라는 점 등, 하느님 백성의 이 종교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여러 교리에 동조하신다.(355)
- 576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는 예수님이 선택된 백성의 근본 제도를 거슬러 행동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제도들이란,
- - 성문화된 계율을 완전히 지켜 율법에 복종하며, 바리사이들의 주장대로 구전되는 해석까지도 받아들임으로써 율법에 복종함;
- -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머무르시는 거룩한 장소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닌 중심적 특성;
- - 어떤 인간도 그 영광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유일신에 대한 신앙 등이다.
- I. 예수님과 율법
- 577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첫머리에 율법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그분께서는 시나이 산의 ‘첫 계약’ 때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새 계약’이 주는 은총의 빛으로 해석하셨다.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 578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며, 따라서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율법의 가장 작은 계명까지도 완전히 지킴으로써 율법을 성취해야 한다고 믿으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율법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이시다.(356)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고백했듯이, 율법을 가장 작은 계명까지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다.(357)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해마다 속죄일에 율법을 어긴 그들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실로 율법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며, 야고보 사도가 환기시키듯이, “누구든지 율법을 전부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이 됩니다”(야고 2,10).(358)
- 579 율법은 그 문자뿐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전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바리사이들에게 소중한 원칙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 시대의 많은 유다인들을 극단적인 종교적 열성으로 몰아갔다.(359) 이 극단적 열성은 ‘위선적인’ 결의론(決疑論)에 떨어지거나,(360) 아니면 오로지,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한 사람의 의인에 의해 율법이 완성되는 새로운 하느님의 개입에 대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361)
- 580 율법의 완전한 성취는 성자의 위격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 태어나신(362) 하느님이신 입법자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께는 율법이 더 이상 돌 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의 “가슴에”, 곧 그 “마음에”(예레 31,33) 새겨진 것으로 드러난다. 그 ‘종’은 “성실하게 공정을 펴기”(이사 42,3) 때문에 “백성을 위한 계약”(이사 42,6)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시어,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363) 사람들이 받는 “율법의 저주”를 스스로 받기까지 하신다.(364)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돌아가셨기”(히브 9,15) 때문이다.
- 581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의 눈에 ‘율법 교사’(랍비)로 비쳐졌다.(365) 예수님께서는 종종 율법 교사들의 율법 해석 방식으로 이론을 펴신다.(366) 그러나 동시에 율법 학자들과 충돌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해석을 그들의 해석 범주 안에서 제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 7,29). 모세에게 글로 쓰여진 율법을 주시기 위하여 시나이 산에서 울려 퍼졌던 하느님의 말씀이, 행복 선언을 하신 산 위에서 예수님을 통해 다시 들리는 것이다.(367) 그 ‘말씀’은 율법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궁극적 해석을 내려 율법을 완성하신다.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33-34). 이러한 하느님의 권위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368) 바리사이들이 고집하는 일부 “사람의 전통”(369) 을 비난하신다.
- 582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해석으로 율법의 ‘교훈적인’(370) 의미를 밝히심으로써 유다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음식물의 정결에 관한 율법을 완성하신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8-21). 하느님의 권위로써 율법에 관한 결정적인 해석을 내놓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표징(기적)으로 보증을 받고 있는(371) 율법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부 율법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특히 안식일 문제가 그러하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율법 교사식 논법을 사용해서,(372) 하느님에 대한 봉사나(373) 병 고침을 통한 이웃에 대한 봉사가(374) 안식일의 휴식을 침해하지는 않음을 일깨우신다.
- II. 예수님과 성전
- 583 예수님께서는 당신보다 앞서 왔던 예언자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최상의 경의를 표하셨다. 태어나신 지 40일 만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분을 성전에서 봉헌하였다.(375) 열두 살이 되셨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양친에게 일깨우시고자 성전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신다.(376) 나자렛 생활 동안 해마다 적어도 파스카 축제 때에는 성전에 올라가셨으며,(377) 공생활 동안에도 유다인들의 큰 명절에는 주기적으로 예루살렘을 순례하셨다.(378)
- 58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장소로서 성전에 올라가셨다. 예수님께는 성전이 당신 아버지의 거처이며, 기도하는 집이다. 그래서 성전 앞뜰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것에 분개하신다.(379)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것은 당신 아버지에 대한 열정적 사랑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시편 69(68),10)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6-1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사도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성전을 계속 존중하였다.(380)
- 585 한편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 직전에 그 찬란한 건물의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381) 이로써 당신의 파스카와 더불어 열리게 될 마지막 때의 징표를 예고하신 것이다.(382) 그러나 이 예언은 그분께서 대사제의 집에서 신문을 당하실 때 거짓 증인들이 왜곡하여 고발하였고,(383)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이 말은 조롱이 되어 예수님께 되돌아왔다.(384)
- 58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중요한 교리를 가르치신 성전에(385) 대해 적의를 가지시기는커녕,(386) 장차 이루실 당신 교회의 초석으로 세우신(387) 베드로와 함께 성전 세를 바치기를 원하셨다.(388)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확실한 거처라고 소개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성전과 동일시하셨다.(3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를 죽음에 처한다는 것은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감을 나타내는 성전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다.(390)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391)
- III. 구원자이신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수님
- 587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하였지만,(392) 그들에게 진정으로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죄인들을 속량하시는 그분의 소임이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393)
- 588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식사하실 때처럼(394) 세리들과 죄인들과도 친하게 식사를 하심으로써, 바리사이들을 놀라게 하셨다.(395)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루카 18,9)(396) 사람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단언하셨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 앞에서, 죄는 보편적인 것이므로(397) 구원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눈이 먼 것이라고 선언하신다.(398)
- 589 예수님께서 특히 죄인들에 대한 당신의 자비로운 태도가 하느님의 태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개했다.(399)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써(400) 그들을 메시아의 잔치에 받아들임을 암시하기까지 하셨다.(401)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셨다. 그들이 놀라서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하고 말한 것은 옳은 말이 아니던가-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셨으니, 이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여 하느님을 모독한 것이거나,(402) 그게 아니라면 그 말씀은 진실이며, 그분의 인격은 하느님 이름을 드러내고 계시하는 것이 된다.(403)
- 59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기에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마태 12,30)고 하는 절대적 요구를 정당화하실 수 있으며, 당신을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이”(마태 12,41-42)이고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404) 말씀하실 때에도, 다윗이 당신을 그의 주님 메시아라고 불렀다는 것을 상기시키실 때에도,(405)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하고 단언하실 때에도,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모두 그러하다.
- 59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셨다.(406) 그러나 이러한 신앙 행위는 하느님 은총의 인도로(407) “위로부터 태어나기”(408)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죽는 신비로운 죽음을 거쳐야 했다. 이토록 놀라운 약속의 성취에 직면하여(409) 회개하라고 하는 이러한 요구는, 의회 법정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판단한 비극적 오해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410) 의회 의원들이 이렇게 한 것은 “무지한 탓”이기도(411) 했고, 또 “완고한”(412) 불신 때문이기도 했다.(413)
- 간추림
- 592 예수님께서는 시나이 산의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셨다.(414) 그 궁극적 의미를 밝혀 주시고,(415) 율법을 어긴 죄들을 속량하시어(416)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것이다.(417)
- 593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순례 명절마다 성전에 올라가심으로써 성전을 존중하셨고,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이 거처를 열렬히 사랑하셨다. 성전은 예수님의 신비를 미리 드러낸다.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 것은, 곧 당신 자신의 죽음과, 당신의 몸이 결정적인 성전이 될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어 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 594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와 같은 일들을 행하셨는데, 이는 당신께서 바로 구원자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418) 예수님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419) 오히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라고(420) 여긴 일부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자라고 판단했다.
- 제2단락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 I. 예수님의 재판
- 예수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분열
- 595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의견은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다.(421) 그들 가운데에는 바리사이 니코데모나(422) 고관인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같은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이(423)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직전에 요한 사도는, 매우 불완전하게나마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요한 12,42)고 말할 수 있었다. 성령 강림 다음 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고”(사도 6,7),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사도 15,5)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야고보 사도가 바오로 사도에게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신자가 된 이들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율법을 열성으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사도 21,20)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 596 예수님을 대하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424)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회당에서 내쫓기로 이미 합의했다.(425)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요한 11,48)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카야파 대사제는 이렇게 예언으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서 “죽을죄를 지었다.”고(426)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었으므로(427)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자로 고발하여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었다.(42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반란과 살인”(루카 23,19)으로 고발된 바라빠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셨다. 대사제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정치적으로 위협하였다.(429)
-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 597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역사적인 복합성을 고려할 때,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아시겠지만 그 주역들(배반자 유다, 최고 의회, 빌라도)의 개인적 죄가 어떠하든, 선동을 받은 군중들의 외침이나(430) 성령 강림 뒤의 회개하라는 호소에 포함된 일반적인 책망이 있었다 해도,(431) 그 재판의 책임을 예루살렘의 유다인 전체에게 지울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심으로써,(432) 예루살렘의 유다인들과 나아가 그 지도자들의 “무지”를 인정하셨고, 예수님을 따라 베드로도 그렇게 하였다.(433) 나아가 책임 인정의(434) 표현인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하는 군중의 외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속한 다른 유다인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확대할 수는 없다.
-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천명하였다.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에게 그리스도 수난의 책임을 차별 없이 지우거나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치 성경의 귀결이듯이, 유다인들을 하느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인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435)
-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 수난의 장본인이었다
- 598 교회는 그 신앙에 대한 교도권과 성인들의 증언에서, “죄인들 자신이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겪으신 모든 고난의 장본인이었고 그 도구였다.”는(436) 사실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우리 죄가 그리스도께 미친다는 점을(437) 생각하여, 교회는 주저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자주 유다인들에게만 지웠던 예수님의 처형에 대한 가장 중대한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린다.
- 계속해서 죄에 다시 떨어지는 사람들이 이 무서운 잘못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인 만큼, 타락과 악에 빠지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음 안에서, 그들 안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거듭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우리의 죄가 유다인들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증언대로,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1코린 2,8)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주님을 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그분을 부정하면, 그것은 말하자면 그분을 우리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 된다.(438)
-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439)
- II.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속량하시는 죽음
- “하느님께서 정하신 계획대로 넘겨지신 예수님”
- 599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일은 불행한 상황들 때문에 생겨난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베드로 사도가 성령 강림 날의 첫 설교 때부터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예수님이 넘겨지셨다(사도 2,23)고 설명했듯이,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신비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이러한 어법은 예수님을 넘겨준(440)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미리 써 놓으신 각본을 수동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600 하느님께는 시간의 모든 순간이 실제적으로 현재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 ‘예정’의 영원한 계획을 수립하실 때 거기에는 당신 은총에 대한 각 사람의 자유로운 응답도 포함된다. “과연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는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분, 곧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을 없애려고,(441) 다른 민족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이 도성에 모여, 그렇게 되도록 주님의 손과 주님의 뜻으로 예정하신 일들을 다 실행하였습니다”(사도 4,27-2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442) 그들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을 허락하셨다.(443)
-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 601 “의로운 종”의(444)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이 구원 계획은 보편적인 속량, 곧 사람들을 죄의 예속에서 해방시키는 속량의 신비로서(445) 성경에 예고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해 받았다.”고(446) 말하는 신앙 고백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1코린 15,3)는 것을 고백한다.(447) 속량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특히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성취한다.(448)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고난 받는 종에 비추어(449) 당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제시하셨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 주셨고,(450) 다음으로 사도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셨다.(451)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분을 ‘죄’로 만드셨다”
- 602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사도적 신앙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1베드 1,18-20). 원죄의 결과인 인간의 죄는 죽음으로 처벌을 받는다.(452) 당신 아들을 종의 모습으로,(453) 곧 죄 때문에 타락하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시어,(454)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 603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었다 하여 버림받은 적이 없으시다.(455) 그러나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부와 일치시키는(456) 속량하시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죄를 짓고 헤매는 우리를 떠맡으심으로써,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씀하셨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457)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과 연대를 이루게 하시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셨고”(로마 8,32) 우리가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로마 5,10) 하셨다.
- 하느님께서는 속량하시는 보편적 사랑을 먼저 보여 주신다
- 604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아들을 넘겨주심으로써, 당신의 계획이 우리의 어떤 공로보다도 앞서 존재하는 관대한 사랑의 계획이라는 것을 드러내신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4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 605 이 사랑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양 비유의 결론을 통해 상기시키셨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마태 20,28)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 “많은 이들”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한정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당신을 내어 주시는 구세주 오직 한 분과 인류 전체를 대비시킨다.(459) 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아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고 가르친다.(460)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고, 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461)
- III.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성부께 바치셨다
-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성부께 드리는 제물이다
- 606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462)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5-10). 성자께서는 강생하신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당신 구속 사명 안에 받아들이신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1요한 2,2) 되신 예수님의 제사는 성부와 이루는 사랑의 일치를 표현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 607 예수님 생애 전체는 성부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계획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원의로 가득 차 있다.(463) 속량을 위한 수난이 당신 강생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 12,2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그리고 또 십자가 위에서도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목마르다.”(요한 19,28)고 말씀하신다.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
- 608 세례자 요한은 죄인들에게처럼 예수님께도 세례를 베풀기로 하고 나서,(464) 예수님을 알아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465) 이라고 표현한다. 요한은 예수님이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466) 고통을 당하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진 고난 받는 종이시며,(467) 동시에 첫 파스카 때 이스라엘의 속량을 상징하던 파스카 어린양이시라는(468)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469) 오신 그분의 사명을 표현한다.
- 예수님께서는 성부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신다
- 609 인류를 위한 성부의 사랑을 인간으로서 당신 마음에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요한 15,13) 때문이다. 이처럼 고난과 죽음으로 예수님의 인성은 인류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의 자유롭고 완전한 도구가 되었다.(470) 과연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또 아버지께서 구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수난과 죽음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가장 자유롭게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다.(471)
-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생명을 자유로이 바치셨다
- 610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 열두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던 중에,(472) 자신을 자유로이 하느님께 바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셨다. 수난 전날 아직 자유로우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성부께 드리는 자발적인 봉헌의(473) 기념으로 삼으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 611 이 순간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는 당신 희생의 “기념”이(474)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봉헌에 사도들도 포함시키시고, 그들에게 이를 계속할 것을 명하신다.(475)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도들을 새로운 계약의 사제로 세우신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476)
- 겟세마니의 고뇌
- 61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을 바치심으로써(477) 미리 맛보신 새로운 계약의 잔을 겟세마니의 고뇌 중에(478)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479) 아버지의 손에서 다시 받으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인간적 공포를 그렇게 표현하셨다. 실로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의 인성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성과는 달리 예수님의 인성에는 죽음의 원인인(480) 죄가 전혀 없다.(481)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인성은 “생명의 영도자”,(482) “살아 있는 자”(483) 의 신적 위격이 취하신 인성이다. 당신의 인간적 의지로 성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받아들임으로써,(48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1베드 2,24) 당신 죽음을 속량을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신다.
-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일하고 결정적인 희생 제사다
- 613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485) 을 통해서 인류의 결정적인 속량을 완성하는 파스카의 희생 제사이며,(486)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487) 새로운 계약의 희생 제사이다.(488) 신약의 이 제사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성자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489)
- 614 그리스도의 이 희생 제사는 유일하며, 모든 제사들을 완성하고 초월한다.(490) 이 희생 제사는 우선 하느님 아버지께서 몸소 주신 선물이다. 바로 성부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내어 주신 것이다.(491)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자유로이, 사랑으로,(492) 성령을 통해서(493)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기 위하여 성부께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는(494) 봉헌이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을 당신의 순종으로 바꾸신다
- 615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은 고난 받는 종의 대역, 곧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일을 맡아 완수하셨다.(495)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과오를 보상하셨고, 아버지께 우리의 죄를 배상해 드리셨다.(496)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신다
- 616 이 끝없는 사랑(497)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속량적, 배상적, 속죄적 그리고 보상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을 제물로 바치실 때 우리 모두를 인식하고 사랑하셨다.(498)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5,14). 사람은 제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은 모든 사람들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품으며,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머리가 되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제사가 된다.
- 617 트리엔트 공의회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거룩하신 당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을 얻어 주셨다.”(499) 고 가르침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근원”으로서(500) 그리스도 희생 제사의 특별한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고 교회는 다음과 같은 노래로 십자가를 경배한다. “오! 십자가, 유일한 희망이여, 하례하나이다.”(501)
-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참여한다
- 618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502) 이신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신 하느님으로서 당신 위격 안에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기”(503) 때문에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신다.”(504)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505)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기 때문이다.(506)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속량을 위한 당신 희생 제사의 첫 수혜자들인 바로 그들이 당신 희생 제사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507) 속량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에 그 누구보다도 가장 긴밀히 참여한 분은 바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이다.(508)
-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하나뿐이다. 십자가 이외에, 하늘에 오르는 다른 사다리는 없다.(509)
- 간추림
- 619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1코린 15,3).
- 620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셨기”(1요한 4,10)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2코린 5,19).
- 62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유로이 당신을 바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중에 이러한 선물을 미리 보여 주시고 실현하신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 622 그리스도의 속량은 다음과 같다. 그분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곧,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요한 13,1) 그들이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그 헛된 소행에서 속량되게(510) 하려고 오신 것이다.
- 62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아버지께 사랑으로 온전히 순종하시어,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는(511) 고난 받는 종의 속죄 사명을 완수하신다.(512)
- 제3단락 예수 그리스도께서 묻히셨다
- 62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히브 2,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 안에서 당신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도록”(1코린 15,3)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맛보도록’, 곧 죽음의 상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순간과 부활하신 순간 사이에 그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상태를 경험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상태는 그분께서 묻히시고 저승에 가신 신비이다.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께서는,(513) 우주 전체에 평화를 가져오는(514)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515) 다음 취하시는 하느님의 “안식”을(516) 드러낸다. 이것이 성토요일의 신비이다.
- 육신을 지니고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
- 625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머무르심으로써, 부활 이전에 고통당할 수 있는 상태와 부활하신 현재의 영광스러운 상태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바로 ‘살아 계신’ 분, 곧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묵시 1,18).
- 하느님(성자)께서는 자연 질서에 따라 죽음이 영혼과 육신을 갈라놓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그러나 스스로 삶과 죽음이 만나는 장소가 되시고자, 부활로써 육신과 영혼을 다시 결합시키셨다. 이는 죽음으로 생기는 자연 분해를 멈추게 하시고, 당신 스스로 분리된 부분들을 위한 결합의 근원이 되심으로써 이루어졌다.(517)
- 626 죽임을 당하신 “생명의 영도자”께서(518) 바로 “부활하여 살아 계신 분”이시기(519)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죽음으로 분리된 그 영혼과 육신을 계속 지니고 있음은 당연하다.
-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었다 해도, 그 신성이 육체와 영혼에 따로 따로 갈라져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 위격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의 육신과 영혼은 처음부터 ‘말씀’의 위격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죽음으로 서로 분리되기는 했지만 그 영혼과 육신은 각기 동일하고 유일한 말씀의 위격과 더불어 있었다.(520)
-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다”
- 627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으로 사신 지상 생활을 마감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육신은 하느님 아들의 위격과 결합되어 있어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기에”(사도 2,24) 다른 시체들처럼 썩어 없어지지 않았다. “하느님의 힘이 그리스도의 육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셨다.”(521)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갔다.”(이사 53,8)는 말과,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도 2,26-27)(522) 하는 말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사흗날의”(1코린 15,4;루카 24,46)(523) 예수님 부활이 그 징표이다. 당시 사람들은 부패가 나흘째 되는 날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24)
- “그리스도와 함께 묻혀……”
- 628 세례의 본래적이고 온전한 표징은 물에 잠기는 것이다. 물에 잠기는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하여 죄에 대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묻힘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525)
- 간추림
- 629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셨다.(526)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죽어 묻히신 것이다.
- 630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신적 위격은 죽음으로 분리된 그 영혼과 육신을 계속 지니고 계셨다. 이 때문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몸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사도 13,37).
- 제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 631 예수님께서는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습니다.……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에페 4,9-10).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심과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같은 조항에서 고백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파스카 안에서, 바로 죽음에서 생명이 솟아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인류를 밝게 비추시는 샛별이여.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527)
- 제1단락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셨다
- 632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1코린 15,20)고(528) 하는 신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죽은 이들의 거처에 머물러 계셨다는 사실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529) 이것은 사도적 설교가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신 사실에 부여한 첫째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겪으셨고, 그 영혼은 죽은 이들의 거처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곳에 묶여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구원자로서 그곳에 내려가신 것이다.(530)
- 633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 내려가신 죽은 이들의 거처를 성경은 저승이나 셔올(지옥)이라고 하는데,(531) 이곳에 있는 이들이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532) 사실 악인이건 의인이건 구세주를 기다리는 모든 죽은 이의 경우가 그렇듯이,(533)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불쌍한 라자로의 비유에서 보여 주시듯이(534) 그들의 운명이 모두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 구해 내신 것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자신들의 해방자를 기다리던 거룩한 영혼들이었다.”(535)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떨어진 이들을 구하거나(536) 저주받은 지옥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537) 당신보다 먼저 간 의인들을 해방시키고자 저승에 가신 것이다.(538)
- 634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1베드 4,6).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심은 구원의 복음 선포의 충만한 완성이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의 궁극적 단계이며 시간 안에 압축된 단계이지만, 구원된 모든 사람이 속량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구원 사업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실제적인 의미에서 무한히 방대한 단계이다.
- 635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나게”(요한 5,25) 하시고자 죽음의 심연으로 내려가셨다.(539) “생명의 영도자”이신(540)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다”(히브 2,14-15).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묵시 1,18),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을 것이다”(필리 2,10).
- 오늘 깊은 침묵이 온 땅을 덮고 있습니다. 하나의 깊은 침묵이요 고독입니다. 임금님께서 주무시기에 깊은 침묵입니다. 하느님께서 육신을 지니고 잠드셨으며, 옛적부터 잠들어 있던 이들을 깨우러 가셨기에 땅은 떨며 말을 잃었습니다.……주님은 잃어버린 양인 원조 아담을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죽음의 그늘 밑, 어두움 속에 앉아 있는 모든 이를 만나러 가고자 하십니다. 그들의 하느님이며 동시에 그들의 후손이신 그분은 아담과 함께 묶여 있는 하와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자 찾아가십니다.……“나는 너의 하느님이지만 너를 위하여 너의 아들이 되었다.……잠자는 너는 잠에서 깨어나거라. 지옥의 사슬에 매여 있도록 너를 창조하지 않았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나오너라. 나는 죽은 이들의 ‘생명’이니라.”(541)
- 간추림
- 636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셨다.”는 표현으로써 신경은 예수님이 참으로 죽으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당신이 죽으시어 죽음과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히브 2,14) 악마를 멸망시키셨다는 것을 고백한다.
- 637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적 위격과 결합된 영혼으로 죽은 이들의 거처로 내려가셨다. 그분은 당신보다 앞서 간 의인들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셨다.
- 제2단락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 638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사도 13,32-33).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신앙 진리의 정수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를 중심 진리로 믿고 실천했으며, 성전(聖傳)이 근본 진리로 전승하였고, 신약 성경의 기록으로 확립되어 십자가와 함께 파스카 신비의 핵심 부분으로 가르쳐 온 신앙 진리이다.
-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도다.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도다.(542)
- I. 역사적이며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
- 639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는 신약 성경이 증언하듯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들을 보여 주는 실제 사건이다. 서기 56년경에 이미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사도는 여기서, 다마스쿠스 성문 근처에서 개종한 뒤에 알게 된 부활에 대한 살아 있는 전승을 말하고 있다.(543)
- 빈 무덤
- 640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파스카 사건의 테두리 안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요소는 바로 빈 무덤이다. 빈 무덤 자체가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시체가 무덤 안에 없다는 사실은 달리 설명될 수도 있다.(544) 그럼에도 빈 무덤은 모든 사람에게 핵심적 징표가 된다. 제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인정하는 첫걸음이었다. 먼저 거룩한 여인들의 경우가 그러했고(545) 다음에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했다.(546)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요한 20,2)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요한 20,6) 발견하고, “보고 믿었다.”고(547) 한다. 이는 그가 빈 무덤의 상태를 보고(548)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사람이 한 일일 수 없으며, 라자로의 경우와는 달리(549) 예수님이 단순히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 부활하신 분의 발현
- 641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거룩한 여인들이 처음으로 부활하신 분을 만났다.(550) 그들은 성금요일 저녁에 안식일이 다가오기 때문에 서둘러 매장했던(551)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마저 발라 드리려고 무덤에 갔다.(55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도들에게 알린 첫 사람은 여인들이었다.(553) 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시는데, 먼저 베드로에게 그리고 이어서 열두 사도들에게 나타나신다.(554) 베드로는 형제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도록 부름을 받았기에(555) 그들보다 먼저 부활하신 그분을 보았고, 그의 증언을 듣자 공동체는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외친다.
- 642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일어난 모든 일은, 모든 사도를 ─ 특히 베드로를 ─ 부활 날 아침에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건설에 참여시킨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의 증인들로서 그분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다. 초기 신자 공동체의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던, 그리고 대부분이 아직 그들 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들의 직접적인 증언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은(556) 우선 베드로와 열두 사도였으나, 그들뿐이 아니었다. 바오로는 야고보와 모든 사도 외에도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557)
- 643 이런 증언들을 앞에 두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물리적인 차원을 벗어난 어떤 것으로 해석하기는 불가능하며, 이를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제자들의 신앙이, 그들의 스승이 미리 알려 주셨듯이, 스승의 수난과 십자가 위의 죽음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여러 사실에서 분명해진다.(558) 수난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제자들은(적어도 그들 가운데 몇몇은) 부활 소식을 쉽게 믿지 못했다. 복음서들은 우리에게 신비로운 열광에 넘치는 공동체를 보여 주기는커녕 기가 꺾이고(“침통한 표정으로” 루카 24,17) 두려워하는(559)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때문에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온 거룩한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했으며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루카 24,11).(560)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 644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 앞에서도 여전히 의심할 정도로,(561) 제자들에게는 부활이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그들은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562)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였다”(루카 24,41). 토마스도 같은 의심의 시험을 겪게 된다.(563) 그리고 마태오 사도가 전하는 갈릴래아의 마지막 발현 때에도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 이런 이유로, 부활이 사도들의 신앙의 (또는 경솔한 신앙의) 산물이었다는 가설은 신빙성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부활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 하느님 은총의 작용으로 ─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서 생겨난 것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한 인성
- 64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만지게 하시고,(564)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써(565)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끄시며,(566)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나타나 부활하신 그 육신이 수난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는,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육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567) 한편 이 참되고 실제적인 육신은 영광스러운 육신의 새로운 특성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육신은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나타날 수가 있다.(568) 왜냐하면 그분의 인성은 더 이상 지상에 매여 있지 않고 다만 성부의 신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569) 이런 이유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정원지기의 모습이나(570) 또는 제자들에게 친숙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마르 16,12) 등 얼마든지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이는 분명 그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571)
- 646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신이 부활 전에 야이로의 딸, 나인의 젊은이, 라자로 등을 다시 살리신 경우처럼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적적인 사건들이었지만 이 기적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지상의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을 뿐이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다시 죽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신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진다. 예수님의 몸은 그 영광스러운 상태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늘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572)
- 초월적 사건인 부활
- 647 부활 성야의 ‘부활 찬송’(Exultet)은 “오, 참으로 복된 밤! 너 홀로 때와 시를 알고 있었으니, 너 홀로 죽은 이들의 세계에서 살아 나오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았도다.”(573) 하고 노래한다. 사실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고 어느 복음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았다.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다른 생명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부활 사건의 핵심은 감각 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빈 무덤이라는 표징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만났다는 사실로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확인되지만, 역사를 초월하고 넘어선다는 면에서 부활은 여전히 신앙의 신비의 핵심에 머물러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시고(574) 다만 당신 제자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이다”(사도 13,31).
- II. 부활 - 거룩한 삼위의 업적
- 648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피조물과 역사 안에 초월적으로 개입하셨다는 점에서 신앙의 대상이다. 부활 안에서 삼위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함께 일하시며 또 각 위의 독자성을 드러내기도 하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고”(사도 2,24) 그로써 그 인성을 ─ 그 육신과 함께 ─ 삼위일체 안으로 완전히 이끌어 들이신 성부의 권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로마 1,4) 계시되신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은 인성을 되살리시고, 그분을 주님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부르신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난다고 강조한다.(575)
- 649 성자께서는 당신의 신적 능력으로 부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가 부활할(동사 ‘부활하다’의 능동태(576) )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7-18).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1테살 4,14).
- 650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위격에서부터 부활을 관상한다. 이 위격은 죽음으로 분리된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신에 결합된 채로 남아 있었다. “인간의 이 두 구성체 안에 남아 있는 신성의 단일성으로 이 둘은 다시 결합됩니다. 이처럼 두 구성체의 결합이 분리됨으로써 죽음이 오고 분리된 이 둘의 결합으로 부활이 일어납니다.”(577)
- III. 부활의 의미와 구원 효과
- 651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부활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들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던 당신의 신적 권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부활로써 보여 주셨으므로, 비록 인간의 정신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 모든 진리는 정당화된다.
- 652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의 약속과,(578) 예수님께서 사시는 동안 하신 약속의(579) 실현이다. “성경 말씀대로”라는(580)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예언들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 653 예수님의 신성의 진실성은 그분의 부활로 확인되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Ego eimi)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께서 바로 “나다”는 것, 곧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 자신이시라는 것을 증명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천명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사도 13,32-33).(581)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 아들의 강생의 신비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활은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른 강생의 완성이다.
- 654 파스카의 신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해 주시고,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 얻게 해 주는 의화이다.(582)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의화는 죄로 생겨난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은총에 대한 새로운 참여이다.(583)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가서 내 형제들에게 전하여라.”(마태 28,10)(584) 하고 제자들을 형제라 부르셨듯이, 부활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게 하는 하느님의 양자 입양을 실현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이다. 이 양자 입양은 그분의 부활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외아들의 생명에 실제적으로 참여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 655 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 ─ 은 장차 우리 부활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 이 완성을 기다리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 사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앞으로 올 세상의 힘을 맛본”(히브 6,5), 그들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려 간다.(585) 이는 그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2코린 5,15).
- 간추림
- 656 부활 신앙은 부활하신 분을 실제로 만난 제자들이 역사적으로 증언한 사건과,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간다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사건을 그 대상으로 한다.
- 657 빈 무덤과 흩어진 수의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죽음과 부패의 사슬을 벗어났음을 뜻한다. 이것들은 제자들을 부활하신 분과 만나도록 준비시킨다.
- 658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한 첫 사람”(콜로 1,18)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은 우리 영혼을 의화시키심으로써,(586) 장차에는 우리 육신을 다시 살리심으로써(587) 우리 자신의 부활의 근원이 되신다.
- 제6절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
- 65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그리스도의 육신은 그 육신이 언제나 누리는 새롭고 초자연적인 특성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588) 부활의 순간부터 영광스럽게 되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음식을 먹고 마시며(589)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40일 동안에는,(590) 아직도 그분의 영광은 보통 인간의 모습에 가려져 있다.(591) 예수님의 마지막 발현은, 구름과(592) 하늘로(593) 상징되는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그분의 인성이 결정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맺는데, 이제 그분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594) 그분이 바오로를 사도로 임명하는(595) 마지막 발현에서, “칠삭둥이 같은”(1코린 15,8) 그에게 당신을 나타내신 것은 온전히 예외적이고 유일한 일이다.
- 660 이 기간 동안 부활하신 그분의 영광이 가려져 있는 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신비스런 말씀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이 말씀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부 오른편에 오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다르게 나타난다. 역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성격을 지닌 승천 사건은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가는 표지이다.
- 661 이 마지막 단계인 승천은 첫 번째 단계인 강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에게서 내려오신” 분, 곧 그리스도만이 “아버지께 가실” 수 있다.(596)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597)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능력만으로는 “아버지의 집”에,(598) 하느님의 생명과 지복(至福)에 다다를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인간에게 이 길을 열어 주시어, “우리 으뜸이며 선구자로 앞서 가시면서……당신 지체인 우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599) 하실 수 있었다.
- 66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림은 승천으로 하늘에 높이 오름을 의미하고 예고한다. 십자가는 승천의 시작이다.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유일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히브 9,24).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사제직을 영원히 수행하고 계신다. 그분은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신다”(히브 7,25).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히브 9,11)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경배하는 전례의 중심이며 주재자이시다.(600)
- 663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성부 오른쪽이라는 말을 우리는 천주성의 영광과 영예라고 이해한다. 하느님이시며 성부와 한 본체로서 모든 시대 이전에 하느님의 아들로 존재하시던 분께서 강생하셨다가 육신이 영광스럽게 된 후 그 육신을 지니고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601)
- 664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심은 메시아 나라의 시작, 곧 사람의 아들에 관해 예언자 다니엘이 보았던 환시의 성취를 의미한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이때부터 사도들은 “끝이 없을 나라”의(602) 증인들이 되었다.
- 간추림
- 665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느님의 천상 영역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감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지만(603) 그때까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실 것이다.(604)
- 666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가셔서, 당신 몸의 지체인 우리가 언젠가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신다.
- 66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에 단 한 번 결정적으로 들어가시어, 언제나 우리에게 성령이 내리실 것을 보장하시는 중개자로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신다.
- 제7절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 I.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이미 교회를 통하여 다스리고 계신다……
- 668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 인성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위에 참여함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지니고 계신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계신다. 성부께서 “만물을 그분 발 아래 굴복시키셨기” 때문이다(에페 1,21-22).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주님이시며(605) 역사의 주님이시다. 인간 역사와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데 모아”(606) 그분 안에서 초월적 절정에 이른다.
- 669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607) 하늘로 올려지고 영광스럽게 되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교회 안에 머무르신다. 속량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교회에 행사하시는 권위의 원천이다.(608)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609) 는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것이다.”(610)
- 670 예수님의 승천 이후 하느님의 계획은 그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 우리는 이미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1요한 2,18).(611) “그러므로 이미 세기들의 종말이 우리에게 다가왔으며 세상의 쇄신도 되돌이킬 수 없이 결정되어 이 현세에서 어느 모로 미리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가 이미 지상에서 참된 성덕으로 불완전하게나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612) 그리스도의 나라는 교회의 복음 선포에 수반하는(613) 기적적인 표징들로써(614) 이미 그 현존을 드러내고 있다.
-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할 때까지……
- 671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미 당신의 교회 안에 현존하지만, 아직은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루카 21,27) 오시는(615) 왕의 지상 내림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로 악의 세력의(616) 뿌리는 정복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할 때까지,(617) “의로움이 깃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순례하는 교회는 자신의 성사들 안에서 그리고 이 시대에 딸린 제도 안에서 지나갈 이 현세의 모습을 지니고, 아직까지 신음하고 진통을 겪으며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618)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기 위하여(619) 특히 성찬 전례 중에(620)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621)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 672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 왕국이 영광스럽게 세워질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밝히셨다.(622) 예언자들의 말에 따르면(623) 그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결정적인 질서를 가져다 줄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금은 성령과 증거의 때이지만,(624) 또한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는(625) 마지막 때의 싸움이 시작되는(626) “재난”과(627) 악의 시련으로(628) 얼룩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기다림과 깨어 있음의 시기이다.(629)
- 이스라엘의 희망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 673 비록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지만”(사도 1,7)(630) 승천 이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임박해(631) 있다. 이 종말론적 사건과 그에 앞서 닥칠 마지막 시련은 비록 ‘유보’되어 있기는 해도(632)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633)
- 674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역사의 어느 순간에든 이루어질 수 있지만,(634) “믿지 않는”(로마 11,20)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함(635)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636) 예수님을 인정할 때까지 보류되고 있다. 성령 강림 뒤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물론 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사도 3,19-21). 그리고 바오로 사도도 이에 동의한다.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로마 11,15) 메시아의 구원으로 들어가는 “이방 민족들의 풍성한 축복”에(637) 뒤이은 “유다인들의 풍성한 축복”은(638)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1코린 15,28),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에페 4,13) 해 줄 것이다.
- 교회의 마지막 시련
- 675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교회는 많은 신자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게 될 마지막 시련을 겪어야 한다.(639) 교회의 지상 순례에 따르는 이 박해는,(640) 진리를 저버리는 대가로 인간의 문제를 외견상 해결해 주는 종교적 사기의 형태로 ‘죄악의 신비’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최고의 종교적 사기는 거짓 그리스도, 곧 가짜 메시아의 사기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느님과 육신을 지니고 오신 하느님의 메시아 대신에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641)
- 676 거짓 그리스도의 이 사기는, 역사를 넘어 종말의 심판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역사 안에서 이룬다고 주장할 때마다 이미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교회는 장차의 메시아 나라를 왜곡한 이른바 ‘천년 왕국설’과 그 완화된 형태까지도 배격했으며,(642) 특히 “본질적으로 사악한” 세속화된 메시아 신앙의 정치적 형태를 배격했습니다.(643)
- 677 교회는 그 죽음과 부활 안에서 주님을 따르는 이 마지막 파스카를 통과해야만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644) 그러므로 이 나라는 상승적인 발전에 따른 교회의 역사적 승리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645) 당신의 신부를 하늘에서 내려보내실(646) 하느님께서 악의 마지막 발악에 대해 승리하심으로써 완성될 것이다.(647) 악의 반역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는, 지나갈 이 세상의 우주적인 마지막 동요가 있고 나서(648) 최후의 심판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649)
- II.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 678 예언자들과(650) 세례자 요한에 뒤이어(651) 예수님께서는 설교 중에 마지막 날의 심판을 예고하셨다. 그때에는 각자의 행동과(652) 마음속의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653)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고의적 불신이 단죄받을 것이다.(654) 이웃에 대한 태도에서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거부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655)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 679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속자로서 인간의 모든 일과 마음을 결정적으로 판단할 충만한 권한이 있으시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 권한을 ‘획득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요한 5,22) 넘겨주셨다.(656) 그런데 아들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며,(657)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658)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은총을 거절한 사람은 저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며,(659) 각자가 한 일에 따라 받을 뿐 아니라,(660) 사랑의 성령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661)
- 간추림
- 680 주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이미 다스리고 계시지만 아직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께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승리는 악의 세력의 마지막 공격을 거쳐야 나타날 것이다.
- 681 세상 종말에 있을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싸여 오셔서, 역사 안에서 밀과 가라지처럼 함께 자란 악에 대한 선의 결정적 승리를 이루실 것이다.
- 682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셔서 마음속에 감추어진 의향을 드러나게 하시고, 각자에게 그의 행업에 따라, 그리고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한 것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 제 3 장 성령을 믿나이다
- 68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이러한 신앙의 인식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와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보다 앞서 오셔서 우리 안에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신앙의 첫 성사인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성부 안에 근원을 두고 성자 안에서 주어진 ‘생명’은 교회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내밀하게 전달된다.
- 세례는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성부에게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을 우리에게 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성령을 지닌 사람은 ‘말씀’, 곧 성자께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자께서는 그들을 성부께 소개해 주시고, 성부께서는 그들에게 불사불멸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없이는 하느님의 아들을 볼 수 없으며, 성자 없이는 아무도 성부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부를 아는 것은 성자를 통해서이며 성자를 아는 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1)
- 684 성령께서는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데 첫째이시며, 또한 새로운 생명의 전달에서도 첫째이시다. 그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2) 반면에 거룩한 삼위의 위격들에 대한 계시에서는 마지막이시다. ‘신학자’인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러한 과정을 ‘자상한’ 하느님의 교육법을 통해 설명한다.
- 구약 성경은 성부를 명확하게 선포하고 성자는 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성자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성령의 신성을 엿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사시며 우리가 당신 자신을 더욱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실제로 성부의 신성이 아직 고백되지 않고 있었을 때, 성자를 공공연히 선포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고, 성자의 신성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을 때 성급한 표현을 빌려 성령을 마치 가외의 짐처럼 덧붙이는 것도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빛은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진보와 발전을 통하여 더욱 찬란히 빛날 것입니다.(3)
- 685 그러므로 성령을 믿는 것은 곧 성령께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한 본체로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는 분”(4) 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학’에서 성령의 거룩한 신비가 다루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하느님의 ‘경륜’ 안에서 성령을 다룰 것이다.
- 686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한 구원 계획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일하신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성자의 강생으로 시작된 이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야 성령께서는 계시되고 주어지고 위격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지셨다. 이때에는 새로운 창조의 ‘맏이’이시며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느님의 이 계획이 성령이 주어짐으로써 교회, 성인의 통공, 죄의 사함, 육신의 부활, 영원한 생명 등으로 인류 안에서 구체화될 것이다.
- 제8절 “성령을 믿으며”
- 687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1코린 2,11). 하느님을 계시해 주시는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분이”(5) 우리에게 성부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우리에게 ‘말씀’을 계시해 주시고 신앙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만 성령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진리의 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신다.”(6) 참으로 하느님다운 이러한 숨김은,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요한 14,17)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분을 아는 것은 그분께서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 688 교회는 교회가 전하는 사도들의 신앙 안에 살아 있는 친교로서, 성령을 인식하는 장소이다. 곧,
- - 성령께서 영감을 주신 성경 안에서,
- - 교부들의 증언이 언제나 살아 있는 전통 안에서,
- - 성령께서 도우시는 교회의 교도권 안에서,
- -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 성사의 전례 안에서 말씀과 상징을 통하여,
- - 우리를 위하여 성령께서 전구해 주시는 기도 안에서,
- - 교회를 이루는 은사와 직무 안에서,
- - 사도적 삶과 선교적 삶의 표징들 안에서,
- - 성령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구원 사업을 계속하시는 성인들의 증거 안에서.
- I. 성자와 성령의 공동 파견
- 689 성부께서 우리 마음에 보내 주신 당신 아드님의 영께서는(7) 참으로 하느님이시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한 본체이시며, 삼위일체의 내적 ‘생명’에서나 세상을 위한 당신 사랑의 선물에서나 성부와 성자와 분리되실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은 생명을 주시며, 동일한 본질이시고, 나누어질 수 없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경배하면서, 세 위격의 구별도 또한 고백한다. 성부께서 당신의 ‘말씀’을 보내실 때 언제나 당신의 ‘성령’도 보내신다. 성자와 성령께서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고 함께 파견되신다. 물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볼 수 있는 모습인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지만,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 690 예수님께서는 ‘기름부음받은이’ 곧 그리스도이시다. 성령께서 그분에게 ‘부어지셨기’ 때문이며, 강생에서부터 그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에서(8) 비롯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때(9)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부 곁에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광을,(10) 곧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성령을(11) 그들에게 주신다. 그리하여 이 공동 파견이 성부께서 성자의 신비체 안에서 자녀로 삼으신 그들 안에 펼쳐질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성령의 사명은 그들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일이다.
- 기름부음이라는 개념은……성자와 성령 사이에 아무런 거리가 없음을 암시합니다. 사실 피부와 기름부음 사이에 이성적으로나 감각적으로 아무런 매개물을 인정할 수 없듯이, 성자와 성령의 접촉도 직접적입니다. 따라서 신앙으로 성자와 접촉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기름과 접촉해야 합니다. 사실 성령께서 감싸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성자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고백은, 신앙을 통하여 모이는 사람들에게 어디서나 다가오시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12)
- II. 성령의 이름과 칭호와 상징
- 성령의 고유한 이름
- 691 ‘성령’, 이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하고 영광을 드리는 그분의 고유한 이름이다. 교회는 이 이름을 주님께 받았으며, 새로운 자녀가 되는 세례 때 이를 고백한다.(13)
- ‘영’(靈)이라는 용어는 히브리 말 ‘루아’(Ruah)의 번역으로, 본래 숨결, 공기, 바람 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위격적으로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의 ‘영’이신 그분의 새롭고도 초월적인 존재를 니코데모에게 암시하기 위해, 감지할 수 있는 바람의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신다.(14) 한편 영(靈)과 성(聖)은 삼위에 공통된 하느님 속성이다. 그런데 성경과 전례와 신학 언어는, ‘영’과 ‘성’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달리 쓰이는 혼동을 피하면서, 이 두 용어를 결합시켜 성령의 형언할 수 없는 위격을 가리킨다.
- 성령의 고유한 칭호
- 692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실 것을 예고하고 약속하실 때 그분을 ‘파라클리토’(Paracletos)라고 부르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곁으로 불려 온 분’(ad-vocatus) 곧 보호자라는 뜻이다(요한 14,16.26; 15,26; 16,7). ‘파라클리토’는 일반적으로 ‘변호자’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첫 변호자이시다.(15) 주님께서 친히 성령을 “진리의 영”(16) 이라고 부르신다.
- 693 사도행전과 서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령’이라는 그분의 고유한 이름 외에,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서는 약속된 성령(갈라 3,14; 에페 1,13), 입양의 영(로마 8,15; 갈라 4,6), 그리스도의 영(로마 8,9), 주님의 영(2코린 3,17), 하느님의 영(로마 8,9.14; 15,19; 1코린 6,11; 7,40) 등의 칭호를 찾아볼 수 있으며, 베드로 사도의 편지에는 “영광의 성령”(1베드 4,14)이라는 칭호도 있다.
- 성령의 상징
- 694 물. 물은 세례에서 성령의 활동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성령 청원 기도 후에, 물은 새로운 탄생을 나타내는 유효한 성사적 표징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첫 탄생을 위한 잉태가 물속에서 이루어지듯이, 세례수는 하느님 생명으로 다시 나는 우리의 탄생이 성령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의미한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성령을 받아 마셨다”(1코린 12,13).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또한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이시며,(17) 이 생수는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18)
- 695 기름부음. 기름부음도 성령을 상징한다. 성령과 기름부음은 동의어로 쓰일 정도이다.(19)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에서 기름부음은 견진의 성사적 표징인데 동방 교회에서는 이 성사를 ‘축성 성유(크리스마) 도유’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기름부음의 효력 전체를 파악하려면 성령께서 처음으로 행하신 기름부음, 곧 예수님의 기름부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스도(히브리 말로 ‘메시아’)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분’을 의미한다. 구약에는 주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이들’이 있었고,(20) 그중의 특출한 예가 다윗 임금이었다.(2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독특한 방식으로 하느님께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성자께서 취하신 인성은 온전히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세워지셨다.(22) 동정 마리아는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성령께서는 그분의 탄생 때 천사를 통해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알리시며,(23) 시메온을 성전으로 이끌어 주님의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하신다.(24)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가득 채우시고,(25) 성령의 힘은 그리스도의 치유와 구원의 행위들 안에서 드러난다.(26) 마침내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다.(27) 이리하여 죽음을 이긴 당신 인성 안에 충만히 ‘그리스도’로 세워지신 예수님께서는(28) ‘성도’들에게 성령을 넘치게 부어 주시어, 그들이 하느님 아들의 인성과 결합하여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에페 4,13) 하신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에 따르면 ‘온전한 그리스도’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다.(29)
- 696 불. 물이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탄생과 풍요를 가리킨다면, 불은 성령의 활동이 지닌 변화시키는 힘을 상징한다. 엘리야 예언자는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엘리야는 자신의 기도로 카르멜 산 위 제물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였다.(30) 이 불은 닿는 것을 변화시키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온”(루카 1,17)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루카 3,16) 분이심을 선포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성령께서는 오순절 아침 “불꽃” 모양의 혀들이 갈라져 제자들 위에 내려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채우신다.(31) 영성적 전통은 이 불이 성령의 활동을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의 하나로 간직해 왔다.(32)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
- 697 구름과 빛. 이 두 상징은 성령의 발현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의 하느님 발현 때부터 구름은, 때로는 어두운 구름으로, 때로는 빛나는 구름으로, 그 초월적 영광을 덮어, 살아 계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계시한다. 예컨대,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더불어,(33) 만남의 장막에서,(34) 광야를 걷는 동안에,(35)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36) 구름이 덮었다. 이러한 상징들을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서 성취하신다. 성령께서 동정 마리아 위에 내려와 “감싸 주시어”(37)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게 하신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가 일어난 산에서 성령의 “구름이 일어”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4-(35)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던 날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38) 이 구름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사람의 아들을 그 영광 안에서 드러내 보일 것이다.(39)
- 698 인호(印號). 인호라는 상징은 기름부음과 가까운 상징이다. 과연 “아버지 하느님께서 날인하신”(요한 6,27)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성부께서는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날인하신다.(40) 인호(sphragis)라는 상징은 세례와 견진, 성품성사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의 지워지지 않는 결과를 가리키기 때문에, 반복될 수 없는 이 세 성사가 남기는 지울 수 없는 ‘특성’을 표현하고자 일부 신학 전통은 이 인호의 표상을 사용해 왔다.
- 699 안수. 예수님께서는 손을 얹어 병자들을 치유하시고,(41)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셨다.(42) 사도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같은 행동을 한다.(43) 더 나아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주어진다.(44) 히브리서에서 안수는 ‘기초 교리’ 가운데 하나이다.(45) 교회는 성사 집전에서 성령 청원 기도 안에 성령이 강하게 주어짐을 의미하는 이 표징을 보존하였다.
- 700 손가락.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46) 하느님의 율법은 “하느님께서 손가락으로”(탈출 31,18) 돌 판에 쓰셨지만, 사도들에게 써 주신 “그리스도의 추천서”는 “하느님의 영으로 새겨지고, 돌 판이 아니라 살로 된 마음이라는 판에 새겨졌다”(2코린 3,3). 성가 “오소서 창조주 성령님”(Veni Creator Spiritus)은 “하느님의 오른 손가락”(47) 이신 성령께 기도한다.
- 701 비둘기. 대홍수(대홍수는 세례와 관련된 상징이다)가 끝났을 때, 노아가 날려 보낸 비둘기는 땅이 다시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돌아온다.(48)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분 위에 내려와 머무르신다.(49) 성령께서는 세례 받은 이들의 정화된 마음에 내려오셔서 머물러 계신다. 어떤 성당들은 제대 위에 매달린 비둘기 모양의 금속 그릇(columbarium)에 성체를 모셔 둔다. 성령을 암시하는 비둘기의 상징은 그리스도교 성화상의 전통적인 주제이다.
- III. 약속의 시대에서 하느님의 영과 말씀
- 702 태초부터 “때가 찼을 때”까지(50) 아버지의 ‘말씀’과 ‘영’의 공동 사명은 숨겨진 상태로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영’은 그동안 메시아의 때를 준비하고 계셨으며, 두 분 다 아직 완전히 계시되지는 않으셨지만, 그분들을 기다리고, 나타나시면 영접하도록 약속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구약 성경을 읽을 때(51)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52) 성령께서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찾는 것이다.(53)
- 교회의 신앙은 ‘예언자들’을, 하느님의 말씀을 힘차게 선포하고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기록하도록 성령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신 모든 사람들로 이해한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성경을 율법서(처음의 다섯 권 또는 모세 오경)와 예언서(우리가 역사서와 예언서라고 부르는 책들)와 성문서(지혜 문학, 특히 시편)로 구분한다.(54)
- 창조에서
- 703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숨결’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생명의 기원이다.(55)
-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한 본체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만물을 다스리고 거룩하게 하시고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성령께서 하느님으로서 성부 안에서 성자를 통해 만물을 유지하시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권한은 당연히 그분께 속한다.(56)
- 704 “사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손(곧 성자와 성령)으로 만드셨다.……그리고 그의 육신에 당신의 모습을 그려 넣으셔서, 눈에 보이는 것까지도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게 하셨다.”(57)
- 약속의 영
- 705 죄와 죽음으로 그 모습이 손상되기는 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하느님의 모습”, 성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을 상실하였으며”,(58) 그 ‘유사성’을 잃어버렸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 구원 계획이 개시되는데, 이 계획의 정점에서 성자께서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어(59) 그 ‘영광’, 곧 만물을 ‘살리시는’ 성령을 주시고 성부에 대한 ‘유사성’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 706 인간적으로 볼 때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에도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성령의 힘과 신앙의 결실인 후손을 약속하신다.(60) 이 후손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민족이 축복받게 될 것이다.(61) 이 후손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62) 이분께 부어지는 성령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아들이실 것이다.(63) 하느님께서는 맹세를 통하여(64)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주실 것을 미리 약속하셨으며,(65) 하느님께서 당신 것으로 삼으신 백성의 구원을 준비할 “약속의 성령”을(66) 보내 주실 것도 약속하셨다.
- 하느님 발현과 율법에서
- 707 하느님 발현(Theophania)은 성조들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여호수아로부터 대예언자들의 사명을 시작하게 한 환시에 이르기까지, 이 ‘약속’의 행로를 밝혀 준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러한 하느님 발현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때로는 드러나게 때로는 성령의 구름에 감싸인 채 자신을 보여 주거나 듣게 해 준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 왔다.
- 708 하느님의 이런 교육법(paedagogia)은 특히 율법의 부여에서 드러난다.(67) 율법은 하느님의 백성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한 ‘감시자’(paedagogus)로서 주어졌다.(68) 그러나 율법은 하느님과의 ‘유사성’을 잃은 인간을 구원할 능력이 없고,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잘 알게 해 주어(69) 성령에 대한 소망을 불러일으켰다. 시편의 탄식들이 이를 증언한다.
- 이스라엘 왕국과 유배에서
- 709 ‘약속’과 ‘계약’의 징표인 율법은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비롯된 백성의 마음과 제도를 지배해야만 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5-6).(70) 그러나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처럼 왕국이 되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다윗에게 약속하신 나라는(71) 성령께서 세우실 나라이며, 이 나라는 성령을 따르는 가난한 사람들의 나라가 될 것이다.
- 710 율법의 망각과 계약에 대한 불성실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유배가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약속의 실패이지만, 사실 이 유배는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성실성을 신비롭게 드러내는 것이며, 약속된 회복 곧 성령에 따른 재건의 시작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러한 정화를 거쳐야만 했다.(72) 유배 생활은 하느님의 계획에서 이미 십자가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으며, 유배에서 돌아온 가난한 ‘남은 자들’은 교회의 매우 분명한 표상들 가운데 하나이다.
- 메시아와 그분의 영을 기다림
- 711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9). 여기서 예언의 두 줄기 흐름이 윤곽을 드러낸다. 그 하나는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영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희망 중에 “이스라엘의 위로”와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루카 2,25.38) 소수의 ‘남은 자들’ 곧 가난한 백성들(73) 안에서 하나로 합해진다.
- 지금까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메시아와 그분의 영 사이의 관계가 더 분명히 드러나는 예언들만을 다루기로 한다.
- 712 기다려 온 메시아의 모습은 ‘임마누엘의 책’에서(74) 나타나기 시작하며(“이사야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요한 12,41), 특히 이사야 11장 1-2절이 그러하다.
-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 713 메시아의 모습은 특히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 드러난다.(75) 이 노래들은 예수 수난의 의미를 예고하며,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성령을 널리 주실 것인지를 알려 준다. 그 방식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종의 모습”(필리 2,7)을 취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몸소 짊어지심으로써 당신 생명의 영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게 된다.
- 714 그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이 대목을 당신의 것으로 삼아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신다(루카 4, 18-19).(76)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715 성령의 파견과 직접 관련되는 예언서 본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마음에 ‘약속’의 언어로 사랑과 성실의 어조로 말씀하시는 예언이며,(77) 베드로 사도는 성령 강림 날 아침 이 예언의 성취를 선포하게 된다.(78) 이 약속들에 따르면,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령께서 새로운 율법을 새겨 주심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 그분은 흩어지고 갈라진 백성들을 다시 모아 화해시키실 것이며, 첫 번째 창조를 새롭게 하시고, 하느님께서는 거기서 평화 중에 사람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 716 하느님의 신비한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인간의 정의가 아닌 메시아의 정의를 기다리는 “가난한”(79) 백성들, 곧 겸손하고 양순한 사람들이, 마침내 약속의 시간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위대한 숨은 활동이다. 성령께서 정화하시고 밝게 비추어 주신 사람들의 마음이 시편에서 드러난다. 성령께서는 이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을 주님께 마련해 드린다.(80)
- IV. 때가 찼을 때의 그리스도의 영
- 선구자, 예언자, 세례자 요한
- 717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요한 1,6). 요한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찰 것인데”(루카 1,15), 이는 동정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다.(81) 이렇게 해서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82) 셈이 되었다.
- 718 요한은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83) 그 안에 머무는 영의 불이 그를 오실 주님에 “앞서 달려가게(선구자)” 한다. 성령께서는 선구자인 요한을 통해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루카 1,17) 일을 마치신다.
- 719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84) 성령께서는 그 안에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일을” 완수하신다. 요한은 엘리야로부터 시작된 예언자들의 시대를 마감한다.(85)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가 임박했음을 알린다. 그는 오시는 위로자의 “소리”이다.(86) 진리의 성령께서 그러하시듯이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요한 1,7).(87) 요한이 보기에, 성령께서는 “예언자들이 탐구하고 연구하던 것”과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던 것”을 완성하신다.(88)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3-36).
- 720 끝으로 성령께서는 세례자 요한과 함께 일을 시작하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일, 곧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닮은 ‘유사성’을 되돌려 주는 일인데 성령께서는 이를 미리 나타내 보여 주신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것이었지만, 물과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는 새로운 탄생을 위한 것이다.(89)
-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 721 지극히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평생 동정인 마리아는 때가 찼을 때 성자와 성령의 파견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걸작이다. 성령께서 그녀를 준비시키셨기에, 성부께서는 구원 계획에 따라 성자와 성령이 처음으로 인간들 가운데 머무르실 거처를 찾아내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전승은 자주 지혜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대목들을 마리아와 연관시켜 읽어 왔다.(90) 전례에서 마리아는 ‘상지의 옥좌’라고 찬양되고 표현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이루실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이 마리아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이루실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이 마리아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 722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으로 마리아를 준비시키셨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콜로 2,9). 바로 이분의 어머니가 ‘은총을 가득히 받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아는 비천한 피조물이지만 순수한 은총으로 죄 없이 잉태되었기에, 전능하신 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선물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치 ‘시온의 딸’에게 하듯이 “기뻐하여라”(91) 하고 마리아에게 인사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마리아가 영원하신 성자를 잉태하고 있을 때 성령 안에서 성부께 드린 찬미가는(92) 모든 하느님의 백성, 곧 교회가 드리는 감사이다.
- 723 성령께서는 마리아 안에서 성부의 자비로운 계획을 실현하신다. 동정 마리아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고 낳는다. 성령과 신앙의 힘을 통하여 마리아의 동정성은 독특한 출산력이 된다.(93)
- 724 성령께서는 마리아에게서 동정녀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이 성부의 아들이심을 나타내 보이신다. 마리아는 결정적으로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불붙은 덤불이다. 성령으로 가득 찬 그녀는 보잘것없는 육체를 지니신 ‘말씀’을 보여 주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과(94) 이방 민족들 가운데 가장 먼저 온 사람들에게(95) ‘말씀’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 725 마침내 성령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의 호의적 사랑(하느님의 ‘선의’)의 대상인(96) 인간들에게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데, 겸손한 사람들, 예컨대 목자들, 동방 박사들, 시메온과 한나, 카나의 신랑 신부, 첫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분을 받아들인다.
- 726 성령의 이 사명이 끝날 때 마리아는 ‘여인’, ‘살아 있는 이들의 어머니’, 새로운 하와, ‘온전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다.(97) 그러한 마리아는, 오순절 아침에 성령께서 교회의 등장과 함께 열어젖히신 ‘마지막 때’의 시초에,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던”(사도 1,14) 열두 사도와 함께 있었다.
- 그리스도 예수님
- 727 때가 찼을 때 이루어질 성자와 성령의 사명 전체는, 성자께서 당신의 강생 때부터 성부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담겨 있다. 예수님은 바로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다.
- 신경의 둘째 부분은 모두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모든 업적은 성자와 성령의 공동 사명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예수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신 일과 영광스러운 주님이 되신 후에 보내 주신 성령에 대해서만 언급하려 한다.
- 728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로 영광을 받으시기까지는 성령을 충분히 드러내지 않으신다. 그러나 당신의 몸이 세상의 생명을 위한 양식이라고 가르치시면서는 군중에게까지 성령을 조금씩 암시하신다.(98) 그리고 니코데모와(99) 사마리아 여인,(100) 초막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도(101) 성령을 암시하신다. 당신 제자들에게 기도와(102) 그들이 장차 해야 할 증언에(103)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성령에 대해 터놓고 말씀하신다.
- 729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이행이 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되자 비로소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신다.(104) 성부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어 다른 파라클리토(보호자)인 진리의 영을 보내실 것이다. 성부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실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성부 곁에서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오실 것이고, 우리는 그분을 알아뵙게 될 것이며, 그분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머무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되새기게 해 주실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완전한 진리로 이끌어 주시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죄와 정의와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 730 마침내 예수님의 때가 왔다.(105) 예수님께서는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그 순간에 당신의 영을 성부의 손에 맡기신다.(106) 이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로마 6,4)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주신다.(107) 이‘때’부터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이 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108)
- V. 마지막 때의 성령과 교회
- 성령 강림
- 731 오순절 날(부활 제7주간이 끝나는 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가 완성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위격으로 나타나고, 주어지며, 전해진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충만함에서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 주신다.(109)
- 732 이날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계시되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열렸다. 그들은 비천한 육신을 지녔지만 신앙 안에서 이미 삼위일체의 친교에 참여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끊임없는 당신의 오심을 통하여 세상을 ‘마지막 때’로, 교회의 때로, 이미 물려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로 진입하게 하신다.
- 우리는 ‘참빛’을 보았고, 하늘의 성령을 받았으며, 참된 신앙을 찾았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우리는 나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흠숭하나이다.(110)
- 성령 - 하느님의 선물
- 733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16). 그 사랑은 으뜸 가는 선물로서 다른 모든 선물들을 포함한다. 이 사랑은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 734 우리는 죄 때문에 죽었거나 적어도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사랑의 선물의 첫 결과는 바로 죄의 용서이다. “성령의 친교”(2코린 13,13)는 교회 안에서,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죄로 잃었던, 하느님을 닮은 유사성을 회복시켜 준다.
- 735 이때 성령께서는 우리들 유산의 “보증” 또는 “첫 선물”을 주신다.(111) 곧,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신”(112) 그 사랑인 삼위일체의 생명을 주신다. 이 사랑은(1코린 13장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 우리가 “성령의 힘”(사도 1,8) 을 받아 가능해진 새로운 생명의 원리이다.
- 736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를 참포도나무에 접목시켜 주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가 자신을 버리면 버릴수록(113) 우리는 더욱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게 된다.(114)
- 성령을 통해 우리는 낙원을 되찾고, 하늘 나라에 오를 수 있으며,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집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신뢰심이 생겨, 그리스도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으며, 빛의 자녀라 불리고,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115)
- 성령과 교회
- 737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궁전인 교회 안에서 성취된다. 이 공동 사명은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성령 안에서 성부와 이루는 그리스도의 친교에 참여하게 한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준비시키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사람들을 도와 그리스도께 이끌어 주신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보여 주시고, 그분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도록 정신을 열어 주신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하느님과 화해시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며, 그들이 “많은 열매를 맺도록”(116) 그리스도의 신비를 그들 안에, 특히 성체 안에 탁월하게 현존하게 하신다.
- 738 교회의 파견은 그리스도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무엇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 파견의 성사(聖事)이다. 교회는 그 전 존재로 모든 지체들 안에서 지극히 거룩한 성삼위의 친교의 신비(이것이 다음 절의 주제이다)를 선포하고 증언하며 실현하고 퍼져 나가게 하려고 파견되었다.
- 우리 모두는 유일하고 동일한 성령을 받으므로 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 서로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다수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하는 아버지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하나이시고 나뉨이 없으십니다. 이 성령께서는 서로 다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 당신을 통해서 일치 안에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당신이 그 안에 계시는 이들을 한 몸으로 일치시키는 것처럼 모든 이 안에 계시는 하나이고 나뉨이 없으신 하느님의 영께서도 모든 이를 영적인 일치로 묶어 주십니다.(117)
- 739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이시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지체들을 양육하고, 치유하시며, 그들의 상호 기능을 유기적으로 조직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증언하도록 그들을 파견하시고, 성부에 대한 당신의 봉헌과 온 세상을 위한 당신의 전구에 그들이 참여하도록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성사들을 통하여 당신 몸의 지체들에게 거룩한 분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는 분이신 당신 영을 주신다(이것이 이 교리서 제2편의 주제이다).
- 740 교회의 성사들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따르는 새로운 삶에서 그 열매를 맺는다(이것이 이 교리서 제3편의 주제이다).
- 741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하느님의 일꾼이신 성령께서는 기도의 스승이시다(이것이 이 교리서 제4편의 주제이다).
- 간추림
- 742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 743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때에는 언제나 당신의 성령도 보내신다. 그 파견은 공동적이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 744 때가 차자 성령께서는 마리아 안에,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오시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신다. 마리아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성부께서는 세상에 임마누엘을 주신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는 뜻이다.
- 745 하느님의 아들은 강생하실 때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써 그리스도(메시아)로 축성되셨다.(118)
- 74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광 중에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세워지셨다.(11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 충만함에서 성령을 사도들과 교회에 부어 주신다.
- 747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체들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생기를 주시며 거룩하게 하신다. 교회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의 성사이다.
- 제9절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
- 748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한다.”(120)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로써 공의회는 교회에 대한 신조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신조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 말고 다른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는 교부들이 즐겨 사용한 비유처럼 오로지 태양의 빛을 반사하기만 하는 달과 같다.
- 749 교회에 관한 신조는 또한 그 신조에 앞서 있는 성령에 관한 신조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성령께서 모든 거룩함의 근원이며 거룩함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교회에 거룩함을 주신 분이 성령이시라는 것을 고백한다.”(121) 교부들의 표현대로 교회는 “성령께서 피어나는 곳”(122) 이다.
- 750 교회가 ‘거룩하고’, ‘보편되며’,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덧붙였듯이) ‘하나이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임을 믿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교회를 믿는 것은 아니다(라틴 말에서는 “Credo in Deum”과 “Credo Ecclesiam”으로 분명히 구별하였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업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내리신 모든 선물이 하느님의 선에서 오는 것임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123)
- 제1단락 하느님 계획 안의 교회
- I. 교회의 이름과 표상들
- 751 ‘교회’(라틴 말 Ecclesia는 그리스 말의 ek-kalein ‘밖으로 부르다’에서 나옴)라는 말은 ‘불러 모음’을 뜻한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백성의 집회를 가리킨다.(124) 이것은 그리스 말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 앞에 모인 선택된 백성들의 집회, 특히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율법을 받아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진 시나이 산의 집회에 자주 사용된 용어이다.(1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초기 공동체는 스스로를 ‘교회’(Ecclesia)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이 그 집회의 계승자임을 자처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극변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백성을 교회로 ‘불러 모으신다.’ Church(영어), Kirche(독일어)의 어원인 그리스 말 Kyriake는 ‘주님께 속한 모임’을 의미한다.
- 752 그리스도교 용어로 볼 때 ‘교회’는 전례적 집회를 가리키지만,(126) 또한 지역 신자 공동체를 가리키거나(127) 온 세계 신자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128) 사실 이러한 세 가지의 의미는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에서 모으시는 백성이다. 교회는 지역 공동체 안에 존재하며, 전례의 거행, 특히 성체성사를 위한 전례적 모임으로 실현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로 살아,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 교회의 상징들
- 753 성경에는 교회의 깊은 신비를 말하기 위해 계시에서 사용되는 서로 연결된 수많은 표상들이 있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근본 개념을 드러내고자 여러 가지 표상을 사용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모든 표상은 새로운 구심점을 발견하게 되는데,(129)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백성의 ‘머리’가 되셨으며(130) 이제 그들은 그분의 몸이 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구심점을 중심으로 “유목 생활이나 농사, 건축 또는 가정과 부부 생활”(131) 에서 빌려 온 표상들이 결집되어 있다.
- 754 “교회는 양 우리이며 그 유일하고 반드시 필요한 문은 그리스도이시다.(132) 교회는 또한 양 떼이며, 하느님께서 친히 그 목자가 되시겠다고 예고하셨다.(133) 비록 그 양들이 인간 목자들의 다스림을 받지만, 착한 목자이시며 목자들의 으뜸이신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그 양들을 기르시고 이끌어 주신다.(134)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셨다.(135) ”(136)
- 755 “교회는 하느님의 농사 곧 하느님의 밭이다.(137) 그 밭에서 옛 올리브 나무가 자라고 있다. 성조들이 그 거룩한 뿌리이며, 거기에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것이다.(138) 바로 그 밭을 천상의 농부께서 포도밭으로 선택하셨다.(139)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포도나무이시며 그 가지들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며,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140) ”(141)
- 756 “또 흔히 교회를 하느님의 건물이라고 한다.(142) 주님께서 친히 당신을 돌에 비겨,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마태 21,42과 병행구; 사도 4,11; 1베드 2,7; 시편 118[117],22) 하셨다. 그 기초 위에서 교회가 사도들을 통하여 지어졌고,(143) 그 기초 때문에 교회는 견고한 결속력을 지닌다. 그 건물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꾸며진다. 하느님의 집,(144) 곧 하느님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 하느님의 신령한 거처,(145)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장막,(146) 특히 거룩한 교부들이 찬미하는, 돌로 지은 지성소에서 표상되는 성전이라 불리며, 전례에서는 당연히 거룩한 도읍, 새 예루살렘에 비겨진다. 바로 그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살아 있는 돌로 쓰인다.(147) 그 거룩한 도읍이 새로운 세상에서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묵시 21,1-2)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요한은 보았다.”(148)
- 757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는 또한 ‘우리 어머니’라고 불리며(갈라 4,26),(149) 순결한 어린양의 순결한 신부로 묘사된다.(150)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은……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다’(에페 5,25-26). 풀릴 수 없는 계약으로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끊임없이 ‘가꾸고 보살피신다’(에페 5,29).”(151)
- II. 교회의 기원, 설립과 사명
- 758 교회의 신비를 탐구하려면 먼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의 계획 안에서 그 기원을 묵상하고, 역사 안에서 그 점진적인 실현을 묵상해야 한다.
- 성부의 심오한 계획
- 759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지혜와 자비의 지극히 자유롭고 심오한 계획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들어 높여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 성부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아들 안에서 이 생명으로 부르셨으니,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거룩한 교회 안에 불러 모으기로 결정하셨다.” 이 ‘하느님의 가족’은 성부께서 세우신 계획에 따라서,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점차로 형성되고 실현되어 간다. 사실 교회는, “세상이 생길 때부터 이미 예표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고, 마지막 시대에 세워져 성령 강림으로 드러났으며, 세말에 영광스러이 완성될 것이다.”(152)
- 세상이 생길 때부터 예시된 교회
- 760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은 교회를 위해 창조되었다.”(153) 고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이 참여는 그리스도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음’으로써 실현되는데, 이 ‘불러 모음’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만물의 목적이며,(154) 천사의 타락이나 인간의 범죄와 같은 고통스러운 역경도,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당신 팔의 힘을 펼치시어 완전한 사랑을 베풀기 위한 기회와 도구로서만 허락하셨다.
- 하느님의 의지에서 세상이 비롯되었듯이, 인간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계획에서 교회가 비롯되었다.(155)
- 구약에서 준비된 교회
- 761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치가 죄로 파괴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죄로 야기된 혼돈에 대한 하느님의 반작용이 바로 교회라는 불러 모음이다. 이러한 재결합은 모든 민족의 품 속에서 은밀하게 실현된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신다”(사도 10,35).(156)
- 762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기 위한 먼 준비는 아브라함을 부름으로써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157) 직접적인 준비는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함으로써 시작된다.(158) 이 선택으로 이스라엘은 장차 모든 민족을 모으는 징표가 될 것이다.(159)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미 이스라엘이 이 계약을 어기고 창녀와 같이 처신했음을 비난하고 있다.(160) 예언자들은 영원한 “새 계약”을 예고한다.(161) “이 새로운 계약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다.”(162)
-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
- 763 때가 찼을 때 성부의 이러한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것은 성자의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자 “파견”의(163) 동기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성경에서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신 교회를 시작하셨던 것이다.”(164)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시작하셨다. 교회는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165)
- 764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과 현존 안에서 사람들에게 빛나기 시작한다.”(166)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167) 이다. 이 나라의 시작과 싹은 예수님께서 오시어 당신 주위로 불러 모으신 사람들의 “작은 양 떼”(루카 12,32)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들의 목자이시다.(168) 그들은 예수님의 참가족을 이룬다.(169) 이처럼 당신 주위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행동 양식’을 가르쳐 주시고, 또 고유한 기도도 가르쳐 주셨다.(170)
- 765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동체에 하느님 나라가 완전히 이룩될 때까지 지속될 조직을 만들어 주셨다. 우선 베드로를 으뜸으로 하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다.(171)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172) 그들은 새 예루살렘의 초석이다.(173) 열두 제자와(174) 다른 제자들은(175) 그리스도의 사명과 권능, 그리고 그분의 운명에도 참여한다.(176)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활동을 통하여 당신 교회를 준비하고 세우신다.
- 766 그러나 교회는 우리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심으로써 태어났다. 이 전적인 헌신은 특히 성체성사를 세움에서 예비되고 십자가 위에서 실현되었다. “그 기원과 성장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상징되었다.”(177) “십자가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온 교회의 놀라운 성사가 솟아 나왔기 때문이다.”(178) 하와가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졌듯이, 교회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꿰뚫린 심장에서 태어났다.(179)
- 성령을 통하여 나타난 교회
- 767 “성부께서 성자께 지상에서 이루시도록 맡기신 일이 성취된 다음,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도록 파견되셨다.”(180) 그날 “교회는 많은 사람 앞에 공공연히 나타나, 설교를 통하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181) 교회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성상 선교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교회를 파견하시어 그들을 당신 제자로 삼도록 하셨다.(182)
- 768 성령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려고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183) “그러므로 교회는 그 창립자의 은혜를 받아 사랑과 겸손과 극기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를 선포하고 모든 민족 가운데에 이 나라를 세울 사명을 받았으며 또 지상에서 이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것이다.”(184)
- 영광 중에 완성될 교회
- 769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185) 그날까지 “교회는 세상의 박해를 견디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으며 자신의 순례 길을 걸어간다.”(186) 이 세상에서 교회는 자신이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187) 귀양살이 중이라는 것을 알고, 하늘 나라의 완전한 도래와 “자기 임금님과 영광스럽게 결합되기를 바라고 갈망한다.”(188) 영광스러운 교회의 완성과, 그 완성을 통한 세상의 완성은 큰 시련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의인 아벨부터 마지막 뽑힌 사람까지’ 아담 이래의 모든 의인이 보편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모이게 될 것이다.”(189)
- III. 교회의 신비
- 770 교회는 역사 안에 있으나 동시에 역사를 초월한다. 우리는 오직 “신앙의 눈으로만”(190) 교회의 가시적 실재와 동시에 하느님의 생명을 지닌 영적 실재를 볼 수 있다.
- 가시적이며 영적인 교회
- 771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인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이 땅 위에 가시적인 구조로 세우시고 끊임없이 지탱하여 주시며, 교회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진리와 은총을 널리 베푸신다.
- - 교계 조직으로 이루어진 단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비체, - 가시적인 집단인 동시에 영적인 공동체, - 지상의 교회인 동시에 천상의 보화로 가득 찬 이 교회는 두 개가 아니라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191)
- 교회의 특성은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이며,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지니고, 열렬히 활동하면서도 관상에 전념하고, 세상 안에 현존하면서도 다만 나그네인 것이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인간적인 것은 신적인 것을 지향하고 또 거기에 종속되며,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활동은 관상을, 현존하는 것은 우리가 찾아가는 미래의 도성을 지향한다.(192)
- 겸손이여! 숭고함이여! 향백나무 장막이며 하느님의 지성소, 지상의 거처이며 하늘의 궁전, 진흙 집이며 왕의 궁궐, 죽음의 몸이며 빛의 신전, 교만한 자들의 업신여김을 받지만 그리스도의 신부로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이 여인은 검지만 아름답고, 오랜 귀양살이의 수고와 고통으로 빛이 바랬지만, 마침내 천상 아름다움으로 꾸며진다.(193)
- 인간과 하느님의 결합의 신비인 교회
- 772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계획의 목적인 당신의 신비를 교회 안에서 완성하고 계시하신다.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을 것이다”(에페 1,10).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관계를 바오로 사도는 “큰 신비”(에페 5,32)라고 부른다. 교회는 마치 신랑과 결합하듯 그리스도와 결합하기 때문에(194) 이제 교회도 신비가 된다.(195) 바오로 사도는 교회 안에서 이 신비를 보며 이렇게 외친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콜로 1,27).
- 773 교회 안에서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 사랑”(1코린 13,8)으로 하느님과 인간들이 이루는 이 일치가 바로, 지나가는 이 세상과 관련된 교회 안의 모든 성사적 도구의 목적이다.(196) “교회의 구조는 온전히 그리스도 지체들의 거룩함을 위해 있다. 이 거룩함은 신부가 신랑의 선물에 사랑으로 응답하게 되는 저 ‘큰 신비’에 따라 측정된다.”(197) 마리아는 티나 주름이 없는 신부와(198) 같은 교회의 신비인 거룩함에서 우리 모두를 앞서 간다. 그러므로 “교회는 베드로적인 차원보다 마리아적인 차원이 앞선다.”(199)
-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교회
- 774 그리스 말 mysterion은 라틴 말로 ‘신비’(mysterium)와 ‘성사’(sacramentum)라는 두 가지 말로 번역되었다. 후대의 설명에 따르면, ‘성사’는 ‘신비’가 가리키는 구원의 감추어진 실재에 대한 표징을 더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의 신비이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비는 없습니다.”(200) 거룩하시며 또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의 인성이 이루신 구원의 업적은 교회의 성사들(동방 교회에서는 ‘거룩한 신비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에서 드러나고 작용하는 구원의 성사이다. 일곱 가지 성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펼치시는 표지이며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의미하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간직하고 이를 나눈다. 이러한 유비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성사’라고 부른다.
- 775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다.”(201) 인간과 하느님의 깊은 일치를 이루는 성사가 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목적이다. 사람들 사이의 친교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또한 인류 일치의 성사이기도 하다. 이 일치는 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묵시 7,9)의 사람들을 교회 안에 불러 모으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교회는 장차 도래할 이 일치를 완전히 실현하는 “표징이며 도구”이다.
- 776 성사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도구이다. “그리스도께서는……이 백성을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202) “구원의 보편 성사”(203) 로 세우시어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보여 주며 실천하신다.”(204) 교회는 “온 인류가 하느님의 한 백성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모이며 성령의 한 성전을 함께 세우기를”(205) 원하시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가시적인 계획이다.”(206)
- 간추림
- 777 ‘교회’라는 말은 ‘불러 모음’을 뜻한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도록 불러 모은 사람들의 모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양육되어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 778 교회는 하느님 계획의 수단이며 동시에 목적이다. 창조에서 예시되고, 구약에서 준비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으로 세워지고, 구속을 위한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실현된 교회는 성령 강림을 통하여 구원의 신비로서 드러났다. 교회는 지상으로부터 구원된 모든 이의(207) 모임으로서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 779 교회는 가시적이며 동시에 영적이고, 교계적 사회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교회는 ‘하나’이지만 인간적, 신적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신앙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이다.
- 780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원의 성사이고,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는 친교의 표지이자 도구이다.
- 제2단락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성전인 교회
- I. 교회 - 하느님의 백성
- 781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 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으며, 차츰차츰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 역사를 통하여 당신과 당신 계획을 드러내시며 그 백성을 당신 것으로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저 새롭고 완전한 계약,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전하여질 더욱 완전한 계시의 준비와 표상이 된다.……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유다인과 이방인 가운데에서 부르신 백성을 혈육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다.”(208)
- 하느님 백성의 특성
- 782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를 통해 나타난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 문화적 여러 집단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 -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다. 하느님께서는 본래 어느 민족에도 속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옛날에는 백성이 아니던 무리를 당신 백성으로 취하심으로써 “그들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1베드 2,9)이 되었다.
- - 육체적인 출생으로 이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태어남”(요한 3,3-5)으로써, 곧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세례로써 그 일원이 되는 것이다.
- - 이 백성의 우두머리는 예수 그리스도(기름부음받은이, 메시아)이시다. 그분의 기름부음인 성령께서 그 ‘머리’로부터 몸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이 백성은 ‘메시아적 백성’이다.
- - “이 백성은 그 신분으로 하느님 자녀의 품위와 자유를 지니며, 성령께서 마치 성전에 계시듯 그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신다.”(209)
- - “이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여야 한다는 사랑의 새 계명을 그 법으로 지니고 있다.”(210) 이는 성령의 ‘새’ 법이다.(211)
- - 이 백성의 사명은 지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212) 이 백성은 “온 인류를 위하여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가장 튼튼한 싹이 된다.”(213)
- - “마지막으로, 이 백성은 하느님의 나라를 그 목적으로 삼는다. 하느님께서 친히 이 땅에서 시작하신 그 나라는 세말에 또한 당신 친히 완성하실 때까지 끝까지 넓혀져야 한다.”(214)
- 사제, 예언자, 왕의 직분에 참여하는 백성
- 78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어 ‘사제이고 예언자이며 왕’으로 세우신 분이다.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에 참여하며, 거기에서 나오는 사명과 봉사의 책임을 진다.(215)
- 784 신앙과 세례로 이 백성 안에 들어온 우리는 이 백성의 독특한 소명, 곧 사제 소명을 나누어 받는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히신 대사제 주 그리스도께서는 새 백성이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셨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새로남과 성령의 도유를 통하여 신령한 집과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되었다.”(216)
- 785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 이는 특히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해진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217) 그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때, 평신도이건 성직자이건 간에 백성 전체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 786 끝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끄심으로써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신다.(218) 왕이시며 우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셨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219) 교회는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습을 알아본다.”(220)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봉사하는 이 소명에 따라 삶으로써 ‘왕의 품위’를 실현한다.
-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난 이들은 모두 십자가의 표시로 왕이 되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사제로 축성됩니다. 그래서 우리 직분의 특수한 봉사 직무 외에도, 영적이고 이성적인 모든 그리스도인이 왕다운 겨레와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속한 영혼이 자기 몸을 다스리는 것 이상으로 더 왕다운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께 깨끗한 양심을 바치고 마음의 제대위에서 신심의 티 없는 제물을 바치는 일보다 더 사제다운 일이 있겠습니까-(221)
- II. 교회 - 그리스도의 몸
- 교회는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이다
- 787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을 당신과 함께 살게 하셨고,(222)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계시하셨으며,(223) 당신의 사명, 당신의 기쁨(224) 그리고 당신의 고통에(225) 그들을 참여시켜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의 더욱 긴밀한 친교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4-5). 그리고 당신의 몸과 우리의 몸 사이의 신비롭고도 실제적인 친교를 예고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 788 당신의 존재를 제자들이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으셨다.(226)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까지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227) 당신의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 주셨다.(228) 이로써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는 어떤 의미에서 더 강화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불러 모으신 당신 형제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어 신비로이 당신의 몸을 이루셨다.”(229)
- 789 교회를 몸에 비유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가 잘 보여 준다. 교회는 단순히 그리스도 주위에 모인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몸 안에서, 그분 안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세 가지 측면, 곧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이루는 모든 지체 간의 일치, 그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 “한 몸”
- 790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결합된다. “그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자들에게 나누어지며, 신자들은 수난을 당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성사를 통하여 신비롭게 실제로 결합되는 것이다.”(230)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결합시키는 세례에서 특히 그러하다.(231) 그리고 “성찬의 빵을 나누어 먹으며 실제로 주님의 몸을 모시는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또 우리 사이에 친교를 이루도록 들어 높여진다.”(232)
- 791 몸의 단일성이 지체들의 다양성을 없애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때에도 지체들이 서로 다르고 그 직무가 서로 다른 것이다.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다. 그 성령께서 당신의 풍요와 직무의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선물을 교회에 유익하도록 나누어 주신다.”(233) 신비체의 단일성은 신자들 사이에 사랑을 낳고 자극한다. “그러므로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한다.”(234) 끝으로 신비체의 단일성은 모든 인간적 분열을 극복한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7-28).
- “그리스도께서 이 몸의 머리이시다”
- 79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콜로 1,18)이시다. 그분은 창조와 구속의 근원이시다. 성부의 영광 안에 들어 올려지신 그분은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콜로 1,18)이시며, 특히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당신 통치권을 만물 위에 펼치신다.
- 79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파스카에 결합시키신다. 모든 지체는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갈라 4,19) 그리스도를 닮기로 애써야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 안으로 받아들여진다.……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머리에 결합된 몸으로서 그분의 고난을 함께 받는 것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으려는 것이다.”(235)
- 79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장하도록 돌보신다.(236)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향해 자라도록 하시기 위하여(237) 당신 몸인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선물들과 서로 다른 봉사직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서로 돕도록 하신다.
- 795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는 ‘온전한 그리스도’(Christus totus)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이다. 성인들은 이러한 일치를 매우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머리와 지체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합니다.(238)
- 우리 구세주께서는 당신이 취하신 교회와 하나의 인격체임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239)
- 머리와 지체들은 말하자면 신비스러운 하나의 인격체이다.(240)
- 잔 다르크 성녀가 재판관들에게 한 말은 거룩한 교회 학자들의 믿음을 요약하고 신앙인의 상식을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241)
-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 796 머리와 지체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는 인간관계에서도 둘의 구별을 내포한다. 이러한 측면은 종종 신랑과 신부라는 비유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신랑이라는 이 주제는 예언자들에 의해 마련되었고 세례자 요한에 의해 선포되었다.(242) 주님께서도 당신을 “신랑”(마르 2,19)이라고 자처하셨다.(243)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와 각 신자들을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오직 하나가 되기로 ‘약혼한’ 신부라고 표현한다.(244) 교회는 흠 없는 어린양의 흠 없는 신부이다.(245) 그리스도께서는 이 신부를 사랑하시어 “거룩하게 하시려고”(에페 5,26) 자신을 내어 주셨으며, 영원한 계약을 통해 결합하시고 자신의 몸처럼 끊임없이 돌보아 주신다.(246)
- 머리와 몸, 많은 것으로 이루어진 하나, 이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입니다.……몸이 말하든 지체가 말하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머리가 되어 말씀하시고 또 몸이 되어 말씀하십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복음서 안에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태 19,6).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실제로 다른 두 사람이 있고 그들은 혼인의 결합으로 오직 하나가 됩니다.…… 머리로서는 자신을 ‘신랑’이라 부르고 몸으로서는 자신을 ‘신부’라고 부릅니다.(247)
- III. 교회 - 성령의 성전
- 797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는 우리의 정신, 곧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와 가지는 관계와 같다.”(248)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가 서로, 그리고 그 으뜸이신 머리와 결합하는 것은 숨은 원리로서 그리스도의 성령의 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성령께서 온전히 그 머리 안에 계시며, 온전히 그 몸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각 지체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249) 성령께서는 교회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6)으로 만드신다.(250)
- 과연 하느님의 선물은 교회에 맡겨졌다.……그리스도와 이루는 친교, 곧 불멸의 보증이며 우리 신앙의 확인이요 하느님께로 오르는 사다리인 성령이 교회에 주어졌다.……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계시고, 하느님의 영이 계시는 곳에 교회와 모든 은총이 있기 때문이다.(251)
- 798 성령께서는 “신비체의 모든 지체들이 하는 생동적이며 참으로 유익한 모든 활동의 근원이시다.”(252) 성령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 안에서 온몸을 이루신다.(253) 곧, 지체들을 완전한 사람으로 “세울 수 있는”(사도 20,32)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례를 통하여,(254)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양육하고 치유하는 성사를 통하여, “그 선물들 가운데에서 사도들이 받은 가장 뛰어난 은총”(255) 을 통하여, 선을 행하게 하는 덕행들을 통하여, 끝으로 여러 가지 특별한 은사(카리스마)들을 통하여 신비체를 이루신다. 이 은사들은, 신도들이 “교회의 쇄신과 더욱 폭넓은 교회 건설을 위하여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이나 직무를 받아들이는 데에 알맞도록 준비시킨다.”(256)
- 은사
- 799 특별한 것이거나 단순하고 보잘것없는 것이거나, 은사는 성령의 은총이며 직접 간접으로 교회에 유익이 된다. 은사는 교회의 건설과 인류의 선익과 세상의 필요를 위한 것이다.
- 800 은사는 은사를 받는 사람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에 사도적인 생명력과 거룩함을 주는 놀랍고 풍부한 은총이다. 한편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이 참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어야 하며, 이 성령의 진정한 감화에 완전히 일치하는 방법, 곧 은사들의 참된 척도인 사랑에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257)
- 801 이러한 의미에서 은사의 식별은 항상 필요하다.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교회 목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 특히 목자들은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모든 것을 시험하여 좋은 것을 붙드는 일이 특별히 그들의 소관”(258) 이다. 이로써 모든 은사가 그 다양성과 보완성 안에서 “공동 선”(1코린 12,7)을 위하여 협력할 수 있게 된다.(259)
- 간추림
- 802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셨습니다”(티토 2,14).
- 803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 804 우리는 믿음과 세례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불린다.”(260)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한 가족을 이루고 하느님의 한 백성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이다.”(261)
- 80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고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당신 몸으로 만드신다.
- 806 몸의 단일성 안에서 지체들과 그 기능들은 다양하다. 모든 지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고통 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박해받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
- 807 교회는 몸이고 그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간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 사신다.
- 808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으며, 교회를 위해 당신을 내어 주셨고, 당신 피로 교회를 정화하셨다. 그분은 교회를 하느님의 모든 자녀를 출산하는 어머니로 삼으셨다.
- 809 교회는 성령의 성전이다. 성령께서는 신비체의 영혼과 같아서, 그 생명의 원리이시며, 다양성 안의 일치와 풍요로운 선물과 은사들의 근원이시다.
- 810 “이렇게 온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으로 나타난다.”(262)
- 제3단락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
- 81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이며, 우리는 신경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263) 서로 불가분의 관계인 이 네 속성들은(264) 교회와 교회 사명의 본질적 특성을 나타낸다. 이 속성들은 교회가 스스로 지니게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가 되도록 해 주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이 특성들 하나하나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신다.
- 812 교회가 이 특성들을 하느님께 받는다는 사실은 오로지 신앙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역사를 통하여 드러나는 이 특성들은 인간 이성에 설득력을 지닌 명백한 표지이기도 하다. “교회의 거룩함과 보편적 일치와 확고한 안정성은 그 자체가 교회에 대한 위대하고 영원한 신뢰의 동기가 되며, 하느님께서 교회에 사명을 주셨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265) 는 점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상기시키고 있다.
- I. 교회는 하나이다
- “교회 일치의 거룩한 신비”266)
- 813 교회는 그 기원상 하나이다. “이 신비의 최고 표본과 최고 원리는 삼위의 일치, 곧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일치이다.”(267) 교회는 그 설립자로 보아 하나이다. “강생하신 성자께서는 평화의 임금님으로서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한 백성, 한 몸 안에서 모든 사람의 일치를 회복시키셨기 때문이다.”(268) 교회는 그 ‘영혼’으로 하나이다. “믿는 이들 안에 살아 계시는 성령께서는 온 교회를 가득 채우시고 다스리시어 신자들의 저 놀라운 친교를 이루시고 모든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결합시키시어, 교회 일치의 원리가 되신다.”(269)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상 하나이다.
- 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우주의 아버지 한 분만 계시고, 우주의 ‘말씀’도 한 분만 계시며, 또한 어디서나 동일하신 성령도 한 분만 계십니다. 그리고 어머니이신 동정녀 한 분만 계시는데, 나는 그분을 교회라고 즐겨 부릅니다.(270)
- 814 하나인 이 교회는 그 기원에서부터 이미 풍부한 다양성과 더불어 나타난다. 이 다양성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다양성과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다수성에서 동시에 연유한다. 하느님 백성의 단일성에 다양한 민족들과 문화들이 합류한다.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는 은혜와 직책과 조건과 생활양식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또한 교회의 친교 안에는 고유한 전통을 지니는 개별 교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271) 이 다양성의 풍요로움은 교회의 일치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한편 죄와 죄의 결과가 가져오는 속박은 끊임없이 일치의 선물을 위협한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 역시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에페 4,3)를 보존하라고 권고한다.
- 815 이 일치의 끈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완전하게 묶어 주는”(콜로 3,14) 사랑이다. 그러나 순례하는 교회의 일치는 또한 다음과 같은 가시적인 친교의 끈들로 보장된다.
- - 사도들로부터 이어받은 한 신앙에 대한 고백,
- - 하느님에 대한 예배의 공통 거행, 특히 성사의 공통 거행,
- - 하느님 가족의 형제적 화목을 유지해 주는 성품성사를 통한 사도적 계승.(272)
- 816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이며,……우리 구세주께서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교회의 사목을 맡기셨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교회의 전파와 통치를 위임하셨으며, 교회를 영원히 진리의 기둥과 터전으로 세우셨다.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273)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구원의 보편적 수단인, 그리스도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수단이 온갖 충만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앞장을 서는 한 사도단에 신약의 모든 보화를 맡기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지상에 세우시려는 것이었으며, 어느 모로든 이미 하느님 백성에 소속된 모든 이는 그 몸에 완전히 합체되어야 한다.”(274)
- 단일성의 상처
- 817 실제로 “하느님의 이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미 분열이 생겨났으며, 사도는 이 분열을 단죄하여야 한다고 엄중히 책망하였다. 후세기에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공동체들이 가톨릭 교회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졌으며, 어떤 때에는 양쪽 사람들의 잘못이 없지 않았다.”(275)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의 단일성에 상처를 입히는 분열은 분명히 인간들의 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이 분열은 이단, 배교, 이교로 구별된다).(276)
- 죄가 있는 곳에 다수(多數)가 있고, 이교가 있고, 이단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덕이 있는 곳에 합일이 있고 모든 믿는 이가 한 몸, 한마음을 이루는 일치가 있습니다.(277)
- 818 이러한 분열에서 유래된 “공동체들 안에서 지금 태어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분열의 죄로 비난받을 수는 없으며, 가톨릭 교회는 그들을 형제적 존경과 사랑으로 끌어안는다.……세례 때에 믿음으로 의화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은 그들을 당연히 주님 안의 형제로 인정한다.”(278)
- 819 또한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279) 가 가톨릭 교회의 가시적 울타리 밖에도 존재한다. 그것들은 “기록된 하느님 말씀, 은총의 생활, 믿음, 바람, 사랑, 성령의 다른 내적 선물과 가시적 요소들이 그러하다.”(280) 그리스도의 성령께서는 이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데, 그 힘은 그리스도께서 가톨릭 교회에 맡기신 충만한 은총과 진리 자체에서 나온다. 이 모든 선물은 그리스도에게서 오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으로,(281) “보편적(가톨릭) 일치를 재촉하고 있다.”(282)
- 일치를 향하여
- 820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당신 교회에 주신 일치,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그 일치가 가톨릭 교회 안에 있다고 우리는 믿으며 세상 종말까지 그 일치가 날로 자라나기를 바란다.”(283)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끊임없이 일치의 선물을 주고 계시지만, 교회는 언제나 이를 유지하고 강화하며 완성하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이 일치를 바라신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당신 수난 때에 성부께 기도하셨으며, 당신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것이다. “아버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재건하려는 열망은 그리스도의 은총이고 성령의 부르심이다.(284)
- 821 이에 합당하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요구된다.
- - 교회의 소명에 더욱더 충실하려는 끊임없는 쇄신. 이 쇄신은 일치 운동의 원동력이다.(285)
- - “복음에 따라 더욱 순수한 생활을 하려는”(286) 마음의 회개.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선물에 대한 신비체 지체들의 불충실이 분열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 - 공동 기도. “마음의 회개와 거룩한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한 사적 공적 기도와 더불어 일치 운동의 혼으로 여겨야 하며, 마땅히 영적 일치 운동이라 할 수 있기”(287) 때문이다.
- - 형제적 상호 이해.(288)
- - 신자들과 특히 사제들에 대한 교회 일치 교육.(289)
- - 여러 교회나 공동체들이 시도하는 신학자들 사이의 대화와 그리스도인들 간의 만남.(290)
- - 인간을 위한 여러 봉사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의 협력.(291)
- 822 “일치 회복은 신자이든 목자이든 온 교회의 관심사이다.”(292) “그리스도의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의 일치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화해시키려는 이 거룩한 목표는 인간의 힘과 재능을 초월한다는 것을 공의회가 잘 알고 있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에, 우리를 위한 성부의 사랑에, 성령의 능력에 우리의 모든 희망을 둔다.”(293)
- II. 교회는 거룩하다
- 823 “교회는 흠 없이 거룩하다고 믿어진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시다’고 칭송받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 사랑하시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으며,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이 되게 하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294)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295) 이고, 그 구성원들은 “성도”(296) 라고 불린다.
- 824 그리스도와 결합된 교회는 그분을 통하여 성화되며, 교회도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성화시키는 도구가 된다.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가장 커다란 효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297) 교회 안에 풍부한 “구원의 수단”(298) 들이 위탁되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덕을 얻게 된다.”(299)
- 825 “교회가 이미 지상에서 참된 성덕으로 불완전하게나마 드러나고 있다.”(300) 그러나 아직은 그 구성원들이 완전한 성덕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크고 많은 구원의 수단을 갖춘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생활 신분이나 처지에서든,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성덕에 이르도록 저마다 자기 길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다.”(301)
- 826 사랑은 우리 모두가 부름 받은 거룩함의 핵심이다. “사랑은 모든 성화 수단을 이끌고 가르쳐 그 목표에 이르게 한다.”(302)
- 저는, 교회가 여러 다른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가장 필요하고 가장 고귀한 지체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 교회가 심장을 가지고 있고, 그 심장은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지체들을 움직이게 하며, 만일 이 사랑의 불이 꺼지게 되면 사도들은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자신의 피를 흘리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사랑은 모든 부르심을 포함하며, 사랑은 모든 것이고, 사랑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를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한마디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303)
- 827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흠이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모르셨지만 오로지 백성들의 죄를 없애러 오셨으므로,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304) 성직자들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305) 세상 끝 날까지 모든 사람 안에 죄의 가라지와 복음의 좋은 씨가 함께 자라고 있다.(306)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에 붙들렸지만 아직은 성화의 길을 가야 하는 죄인들을 불러 모은다.
- 교회는 은총의 생명 이외에 스스로 다른 어떤 생명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 품 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면서도 거룩합니다. 그 지체들은 교회의 생명으로 살아감으로써 성화됩니다. 그러나 그 지체들이 이 생명에서 벗어나게 되면 죄와 무질서에 빠지고, 이로써 교회의 거룩함이 빛을 발하는 데에 장애가 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죄에 대해 괴로워하며 속죄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은혜로 자녀들을 죄에서 해방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307)
- 828 교회는 어떤 신자들을 시성(諡聖)함으로써, 곧 그 신자들이 영웅적으로 덕행의 길을 닦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한 삶을 살았음을 장엄하게 선언함으로써, 교회 안에 힘있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을 다른 신자들에게 모범과 전구자로 세워 줌으로써 희망을 북돋아 준다.(308) “많은 남녀 성인들은 교회 역사의 가장 어려웠던 상황에서 언제나 쇄신의 원천과 기원이 되어 왔다.”(309) 과연 “교회의 거룩함은 사도적 활동과 선교 열정의 감추어진 원천이며 그르침 없는 척도다.”(310)
- 829 “교회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안에서 이미 완덕에 이르러 어떠한 티나 주름도 없이 서 있지만, 그리스도 신자들은 아직도 죄를 극복하고 성덕 안에서 자라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눈을 들어 뽑힌 이들의 온 공동체에 덕행의 모범으로 빛나고 계시는 마리아를 바라본다.”(311) 성모님 안에서 교회는 이미 지극히 거룩하다.
- III. 교회는 보편되다(catholica)
- ‘가톨릭’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 830 ‘가톨릭’이라는 말에는 ‘전체성’ 또는 ‘온전성’, ‘보편성’이라는 뜻이 있다. 교회는 다음 두 가지 뜻에서 보편적(가톨릭)이다.
- 교회는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므로 보편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다.”(312) 교회 안에는 머리와 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 완전하게 존재한다.(313)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완전하고 충만한 방법을”(314) 그분에게서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 방법들은 올바르고 완전한 신앙 고백, 온전한 성사 생활 그리고 사도적 계승을 통하여 서품된 직무 등이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성령 강림 날부터(315) 보편된 것(가톨릭)이었으며,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항상 보편될 것이다.
- 831 교회가 보편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전 인류에게 파견하셨기 때문이다.(316)
-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불린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이고 유일한 이 백성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퍼져 나가, 처음에 인간 본성을 하나로 만드시고 흩어진 당신 자녀들을 마침내 하나로 모으고자 하신 하느님 뜻의 계획을 성취해야 한다.……하느님의 백성을 돋보이게 꾸며 주는 이 보편성은 바로 주님의 선물이다. 이로써 가톨릭 교회는 온 인류가 그 모든 부요와 함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분 성령의 일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려고 힘껏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317)
- 각 개별 교회는 ‘보편되다’
- 832 “그리스도의 이 교회는 신자들의 모든 합법적 지역 집회에 존재하며, 자기 목자들과 결합되어 있는 이 회중을 신약 성경에서 교회라고 부른다.……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신자들이 모이고……주님 만찬의 신비가 거행된다.……이 공동체들이 가끔 작고 가난하거나 흩어져 살더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며, 그분의 힘으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가 이루어진다.”(318)
- 833 개별 교회는 주로 교구(또는 동방 교회의 주교구)이며, 사도적 계승으로 서품된 그의 주교들과, 믿음과 성사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319) “보편 교회의 모습대로 이루어진 개별 교회들 안에 또 거기에서부터 유일하고 단일한 가톨릭 교회가 존재한다.”(320)
- 834 개별 교회는 여러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랑으로 가장 탁월한”(321) 로마 교회와 일치함으로써 온전히 보편된 교회가 된다. “모든 교회가, 곧 모든 신자가 이 교회와 일치해야 하는데, 그것은 더욱 앞선 이 교회의 기원 때문이다.”(322) “실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내려오신 때부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는 여기(로마)에 있는 큰 교회가, 구세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지옥의 문이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는 유일한 기초라고 믿어 왔으며 지금도 믿고 있다.”(323)
- 835 “보편 교회를 본질적으로 다른 개별 교회들의 통합체로 인식하거나 개별 교회들의 다소 변칙적인 연합체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그 소명과 사명에서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환경 속에 뿌리를 내린다면 세상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외적 모습과 표현을 띠게 될 것입니다.”(324) 지역 교회들만의 고유한 규율과 전례 예법, 신학적-영성적 전통 등의 풍부한 다양성은 “갈릴 수 없는 교회의 보편성을 더욱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325)
- 누가 가톨릭 교회에 속하는가-
- 836 “하느님 백성의 이 보편적 일치는 세계 평화를 예시하고 증진하므로 모든 사람이 이 일치로 부름 받고 있다. 가톨릭 신자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신자이든 모든 사람이 다 여러 모로 이 일치에 소속되거나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른다.”(326)
- 837 “교회의 모임에 완전히 합체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 안에 세워진 완전한 질서와 구원의 모든 수단을 받아들이며, 교회의 가시적 구조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곧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로 결합된다. 그러나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 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327)
- 838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완전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거나 베드로의 후계자 아래에서 친교의 일치를 보존하지 못하는 저 사람들과도 교회는 자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328)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 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329) 특히 정교회들과 맺는 이러한 친교는 매우 깊어서 “주님의 성찬을 공동으로 거행할 만한 완전성에 도달하기에 큰 부족함이 없다.”(330)
-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 839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331)
- 유다인들과 교회의 관계. 새로운 계약의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자신의 신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 주 하느님께서 먼저 말씀하신”(332) 유다 민족에 대한 유대를 발견한다.(333)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과 달리 유다인들의 신앙은 이미 옛 계약의 하느님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유다 민족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 나셨습니다”(로마 9,4-5).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로마 11,29).
- 840 미래를 생각해 볼 때, 구약의 하느님 백성과 새로운 하느님 백성은 서로 유사한 목적, 곧 메시아의 오심(또는 재림)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그들 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르고 오해하는 비극 속에서 세상 끝 날까지 그 모습이 가려진 메시아를 기다린다.
- 841 이슬람 교인들과 교회의 관계. “구원의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이슬람 교인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334)
- 842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과 교회의 관계는 먼저 인류의 공통 기원과 공통 목적에 따른 유대이다.
-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를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민족의 기원은 하나이고, 그 궁극 목적도 단 하나 곧 하느님이시다. 좋으신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계획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고,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거룩한 도성에 뽑힌 이들이 모일 것이다.(335)
- 843 교회는 다른 종교들이, 알려지지 않으셨지만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숨결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선한 것과 참된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336) 이라고 생각한다.
- 844 그러나 사람들은 그 종교적 행동 양식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오류와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 사람들은 흔히 악마에게 속아 허황한 생각에 빠져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뒤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며, 또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다가 죽어 가며 극도의 절망에 놓인다.(337)
- 845 성부께서는 죄 때문에 흩어지고 길 잃은 당신의 모든 자녀를 다시 모으시기 위하여 온 인류를 당신 아들의 교회로 불러 모으고자 하셨다. 교회는 인류가 그 일치와 구원을 되찾는 곳이다. 교회는 “화해를 이룬 세상”(338) 이며, “주님의 십자가의 돛을 활짝 펴고 성령의 바람을 받아 이 세상을 잘 항해하는”(339) 배이다. 교부들이 즐겨 쓰는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는 홍수에서 유일하게 구해 주는 노아의 방주에 비유된다.(340)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 846 교부들이 자주 반복했던 이 단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이해할 때, 이 말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 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341)
- 847 이 단언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342)
- 84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만 아시는 길로, 자기의 탓 없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실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다.(343) ) 그러나 교회는 복음화의 필요성과 동시에 그 거룩한 권리를 가진다.”(344)
- 교회의 보편성이 요구하는 선교
- 849 선교 명령. “‘구원의 보편 성사’가 되도록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교회는 그 고유한 보편성의 내적 요구에서 또 그 창립자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한다.”(345)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 850 선교의 기원과 목적. 주님께서 내리신 선교 명령의 궁극 원천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다. “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346) 그리고 이 사명의 궁극 목표는, 바로 인간들이 사랑의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이루시는 친교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347)
- 851 선교의 동기.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 선교 의무와 열성의 원천이라고 언제나 생각해 왔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348) 과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앎으로써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구원은 진리 안에 있다. 진리의 성령의 활동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위임받은 교회는 그들에게 진리를 전달해 주기 위해 그들의 희망을 맞으러 나아가야 한다. 교회는 선교적이어야 한다. 구원 계획이 보편되다고 믿기 때문이다.
- 852 선교의 길. “교회의 모든 선교의 주역은 성령이시다.”(349) 성령께서는 선교의 길에서 교회를 이끄신다. 이 선교(missio)는 “계속되며 또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missio)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 나가야 한다. 곧, 가난과 순명과 봉사의 길, 또 죽음에 이르는 자기희생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로 그 죽음에서 승리자가 되셨다.”(350)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351)
- 853 그러나 교회는 그 나그넷길에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와 그리고 복음이 맡겨진 자들의 인간적인 나약함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352) 경험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참회와 쇄신”(353) 의 길로 나아감으로써만 “십자가의 좁은 길”(354) 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355) 사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356)
- 854 바로 이러한 사명을 통하여 “교회는 온 인류와 함께 걸어가 세계와 함께 동일한 지상 운명을 체험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되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어야 할 인류 사회의 누룩으로서, 또 마치 그 혼처럼 존재한다.”(357) 선교 활동은 인내를 요구한다. 우선 이 일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시작된다.(358) 그리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는(359)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우고 지역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이어진다.(360) 이러한 노력은 민족들의 문화 안에 복음을 토착화하는 과정으로 접어들게 된다.(361) 그리고 실패를 겪는 일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과 집단들 또 민족들과 관련하여 교회는 그들을 오로지 단계적으로 만나고 파고들며 또 그렇게 하여 그들을 가톨릭 교회로 온전히 받아들인다.”(362)
- 855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향한 노력을 요구한다.(363) 과연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은, 세례로 교회에 들어왔지만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한 자녀들에게서 교회가 그 고유의 충만한 보편성을 실현하는 데에 장애가 되고 있다. 더욱이 교회 자체로서도 그 현실 생활의 모든 면에서 충만한 보편성을 드러내기가 어렵게 되었다.”(364)
- 856 선교 임무에는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과의 존경 가득한 대화가 포함된다.(365) 믿는 이들은 “마치 감추어진 하느님의 현존과도 같이 이미 민족들에게 있는 진리와 은총”(366) 을 더욱 잘 알게 됨으로써 이 대화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이 기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민족들에게 베푸신 진리와 선을 공고히 하고 보완하며 향상시키려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과 악마의 패배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367) 그들을 오류와 악에서 정화하려는 것이다.
- IV.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 온다
- 857 교회는 사도들 위에 세워졌으므로 사도적이다.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apostolica) 교회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 -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선교에 파견하신 증인들인(368) “사도들의 기초”(에페 2,20)(369) 위에 세워졌다.
- - 교회는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370) 고귀한 유산, 사도들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371) 보존하고 전한다.
- -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사도들의 사목직을 이어받아 그들을 계승한 사람들, 곧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회의 최고 목자와 하나 되어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이 명령을 수행하는”(372) 주교단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지도를 받는다.
-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373)
- 사도들의 파견
- 858 예수님께서는 성부에게서 파견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마르 3,13-14). 이리하여 그들은 ‘파견된 자’가 된다. (그리스 말 apostolos, 곧 ‘사도’는 이런 뜻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이들을 통하여 계속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374) 그러므로 사도들의 파견은 예수님 파견의 연속이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마태 10,40)이라고 말씀하신다.(375)
- 859 예수님께서는 성부께 받은 당신의 사명에 열두 제자들을 참여시키신다.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요한 5,19.30) 당신을 파견하신 성부에게서 모든 것을 받으시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도 그들에게 직무를 맡기시고 그것을 수행할 능력을 주시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37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자신들이 “새 계약의 일꾼”(2코린 3,6), “하느님의 일꾼”(2코린 6,4), “그리스도의 사절”(2코린 5,20),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1코린 4,1)의 자격을 하느님께 받았음을 안다.
- 860 사도들의 직무 중에는 전수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직무에는 영구적인 면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377)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그 신적 사명은 세말까지 지속될 것이다. 사도들이 전하여야 할 복음은 교회를 위하여 모든 시대에 모든 삶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도들은……후계자들을 세우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378)
-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
- 861 사도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자기 사후에도 지속되도록, 자신의 직접 협력자들에게, 일종의 유언 형식으로, 자기들이 시작한 일을 완성하고 강화할 의무를 맡겼으며, 온 무리를 보살피라고 부탁하였으니, 성령께서는 그들을 우리 가운데에서 하느님 교회의 목자로 세우셨다. 이렇게 사도들은 후계자들을 세웠으며, 또 나중에 그들이 죽으면 다른 훌륭한 사람들이 그 직무를 받아들이도록 법규를 마련하여 주었다.”(379)
- 862 “주님께서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에게 특별히 맡기시어 그 후계자들에게 전수되는 임무가 영속하듯이, 사도들의 교회 사목 임무도 영속하며 주교들의 거룩한 품계에서 끊임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주교들이 신적 제도에 따라 사도들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가르친다. 주교들은 교회의 목자들이므로, 주교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주교를 배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380)
- 사도직
- 863 전체 교회가 사도적인 이유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신앙과 생활에서 그 기원과 하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체 교회는 온 세상에 ‘파견’되었으며,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파견에 참여함으로써 사도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본질적으로 사도직을 위한 소명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온 세상으로 넓히기 위한 신비체의 모든 활동을 사도직”(381) 이라고 부른다.
- 864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모든 사도직의 원천이시며 기원이시므로” 평신도 사도직의 결실이 “그리스도와 평신도의 일치에 달려 있음”(382) 은 자명하다. 사도직은 소명과 시대의 요청, 성령의 여러 은사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도직의 생명”(383) 은 언제나 사랑이며, 특히 성체성사에서 얻는 사랑이다.
- 865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온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교회 안에 존재하고 종말에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384)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도래한 이 나라는 종말에 완전하게 드러날 때까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사람들 안에 신비하게 성장하고 있다. 그때에 그분께 속량되어 그분 안에서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385)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유일한 백성,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386)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있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서(387) 다시 모이게 될 것이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다”(묵시 21,14).
- 간추림
- 866 교회는 하나이다. 교회는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을 모시고 있고,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의 세례로 태어나고, 오직 하나의 몸을 이루며, 한 분이신 성령께 생명을 얻는다. 이는 오직 하나의 희망을 위한 것인데,(388) 이 희망이 이루어질 때 모든 분열은 극복될 것이다.
- 867 교회는 거룩하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교회의 창시자이시며,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바치셨으며, 거룩하신 성령께서 교회에 생명을 주신다. 죄인들을 품고 있을지라도, ‘죄인들로 이루어진 죄 없는 교회’이다. 교회는 성인들을 통하여 그 거룩함이 빛나는데, 마리아 안에서 교회는 이미 온전히 거룩하다.
- 868 교회는 보편되다. 교회는 신앙 전체를 선포하며, 모든 구원의 방법들을 자신 안에 충만히 지니면서 이를 관리한다. 교회는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며, 모든 시대를 포용한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이다.”(389)
- 869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 온다. 교회는 든든한 기초, 곧 어린양의 열두 사도 위에 세워졌으며,(390) 무너질 수 없다.(391) 교회는 진리 안에 확고하게 서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단 안에 현존하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신다.
- 870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이며, 우리는 신경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 그 조직 밖에서도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가 발견되지만, 그 요소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고유한 선물로서 보편적 일치를 재촉하고 있다.”(392)
- 제4단락 그리스도 신자: 성직자, 평신도, 봉헌 생활자
- 871 “그리스도 신자들은 세례로 그리스도께 합체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성되고, 또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하느님께서 교회에게 이 세상에서 성취하도록 맡기신 사명을 각자의 고유한 조건에 따라 실행하도록 소명 받은 자들이다.”(393)
- 872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 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생으로 인하여 품위와 행위에 관하여 진정한 평등이 있고, 이로써 모두가 각자의 고유한 조건과 임무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의 건설에 협력한다.”(394)
- 873 주님께서 원하신 당신 신비체의 지체들 사이에 있는 차이는 그 일치와 사명에 도움이 된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직무가 있지만, 그 사명은 하나이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으로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그분께 받았다. 또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효과적으로 참여하여 하느님 백성 전체의 사명에서 맡은 자기 역할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수행한다.”(395) 그리고 “이 양편(성직자와 평신도)의 신자들 중……복음적 권고의 선서로써 특별한 양식으로 하느님께 봉헌되고 교회의 구원 사명에 이바지하는 이들도 있다.”(396)
- I. 교계의 구성
- 교회의 직무는 왜 존재하는가-
- 874 그리스도께서 바로 교회 직무의 원천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권한과 사명을 주시며 그 방향과 목적을 제시하셨다.
-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고 또 언제나 증가시키도록 당신 교회 안에 온몸의 선익을 도모하는 여러 가지 봉사 직무를 마련하셨다. 실제로, 거룩한 권한을 가진 봉사자들이 자기 형제들에게 봉사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품위를 지닌 모든 사람이……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397)
- 875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어떤 개인,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로마 10,17). 아무도 복음을 전파할 사명이나 명령을 자신에게 부여할 수는 없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사람은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힘입어 말하고 행동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동체에 말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은총을 줄 수 없다. 은총은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권한과 능력을 부여하신 은총의 봉사자들을 전제로 한다. 주교와 사제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in persona Christi Capitis) 행동할 사명과 권한(‘거룩한 권한’)을 그리스도께 받는다. 부제(diaconus)는 주교와 사제단과 일치하여, 전례와 말씀과 자선의 봉사(diaconia)에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는 힘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이들이 스스로는 행하거나 줄 수 없고 다만 하느님의 선물에 따라 행하고 베푸는 이 직무를 교회 전통은 ‘성사’라고 불러왔다. 교회의 직무는 고유한 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
- 876 교회의 직무는 그 본질이 성사적이므로 봉사의 특성을 지닌다. 실제로 사명과 권위를 주시는 그리스도께 완전히 속한 성직자들은, 우리를 위하여 자유로이 “종의 모습”(필리 2,7)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다.(398) 성직자들이 봉사하는 말씀과 은총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므로, 그들은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399)
- 877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 직무는 그 본질이 성사적이므로 단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봉사 직무를 시작하시면서 “새 이스라엘의 싹이 되고 거룩한 교계의 기원”(400) 인 열두 사도를 세우셨다. 함께 선택되어 함께 파견된 사도들의 형제적 일치는 모든 신자의 형제적 친교에 이바지할 것이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를 반영하고 증언하는 것이다.(401) 이러한 까닭에 모든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주교단의 으뜸인 로마 주교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단 안에서 그의 봉사 직무를 수행한다. 사제들도 그들의 주교의 지도 아래 교구 사제단 안에서 그들의 봉사 직무를 수행한다.
- 878 끝으로 교회 직무는 그 본질이 성사적이므로 개별적 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사제들은 공동으로 임무를 수행하지만 또한 언제나 개별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각자는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하는 부름을 받았다.(402) 이는 공동의 사명 안에서 개별적인 증인이 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각자는 사명을 주시는 분 앞에서 각자 책임을 지면서, ‘그분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나는 성부와……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나는……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하고 선언한다.
- 879 그러므로 교회의 성사적 직무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봉사이다. 이 봉사는 개별적인 특성과 단체적인 형태를 지닌다. 이는 주교단과 그 으뜸인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 사이의 유대, 개별 교회를 위한 주교의 사목적 책임과 보편 교회를 위한 주교단의 공동 관심 사이의 관계에서 확인된다.
- 주교단과 그 으뜸인 교황
- 880 그리스도께서는 열두 사도를 세우시면서 그들을 “확고한 단체 또는 집단의 형태로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에서 선택하신 베드로를 으뜸으로 삼으셨다.”(403) “주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거룩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하나의 사도단을 이루듯이, 비슷한 이치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도 서로 결합되어 있다.”(404)
- 881 주님께서는 당신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시몬 한 사람을 당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으며,(405) 그를 당신의 온 양 떼의 목자로 세우셨다.(406) 그런데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저 임무는 그 단장과 결합되어 있는 사도단에게도 부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407)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이러한 사목 임무는 교회의 기초에 속하는 것이다. 이 임무는 교황의 수위권 아래서 주교들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
- 882 교황은 로마 주교이며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주교들의 일치는 물론 신자 대중이 이루는 일치의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근원이며 토대이다.”(408) 사실 “교황은 자기 임무의 힘으로 곧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온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완전한 보편 권한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409)
- 883 주교단은 “그 단장인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한의 주체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권한은 오로지 교황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행사될 수 있다.”(410)
- 884 “주교단은 보편 교회에 대한 권한을 보편(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한다.”(411) “베드로의 후계자가 세계 공의회로 확인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계 공의회는 결코 인정되지 아니한다.”(412)
- 885 “이 사도단은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하느님 백성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며, 또한 한 단장 아래 모여 있으므로 그리스도 양 떼의 단일성을 드러낸다.”(413)
- 886 “개별 주교들은 자기 개별 교회 안에서 일치의 가시적인 근원과 토대가 된다.”(414) 이처럼 그들은 사제들과 부제들의 협조를 받아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부분에 대하여 사목 통치를 한다.”(415) 그러나 각 주교들은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모든 교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416) 우선 “보편 교회의 한 부분인 자기 교회를 잘 다스림으로써 교회들의 몸인 신비체 전체의 선익에”(417) 이바지해야 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418) 믿음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과 온 세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게 그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887 서로 근접해 있고 동일 문화권에 속하는 개별 교회들은 관구(provincia)를 형성하거나 총대교구(patriarchatus), 연합구(regio)라고 하는 더 넓은 범위의 교회 연합체를 형성한다.(419) 이러한 연합체의 주교들은 그 지방의 주교대의원회의나 관구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 “비슷한 방법으로 오늘날 주교회의들은 합의체적 정신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여러 가지 풍요로운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다.”(420)
- 가르치는 임무
- 888 주교들의 첫째 임무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421) “주님께 받은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422) 이를 위해 그들의 협력자인 사제들의 도움을 받는다. “주교들은 새로운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신앙의 선포자이며”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의 “진정한 스승 곧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닌 스승”(423) 이다.
- 889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전해 준 순수한 신앙으로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교회를 당신의 무류성에 참여시키고자 하셨다. ‘초자연적 신앙 감각’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의 지도를 받아 “신앙을 온전히 지킨다.”(424)
- 890 교도권의 사명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결정적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교도권은 하느님의 백성이 빗나가거나 쇠약해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며, 올바른 신앙을 오류 없이 고백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처럼 교도권의 사목적 임무는 자유를 주는 진리 안에 하느님의 백성이 머물도록 보살피는 임무이다. 이 봉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목자들에게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무류성의 은사를 주셨다. 이 은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행사될 수 있다.
- 891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은 참으로 신앙 안에서 자기 형제들의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이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에, 교황은 자기 임무에 따라 그 무류성을 지닌다. 교회에 약속된 무류성은 주교단이 베드로의 후계자와 더불어 최상 교도권을” 특별히 세계 공의회에서 “행사할 때에 주교단 안에도 내재한다.”(425) 교회가 그 최상의 교도권을 통하여 어떠한 것을 “하느님에게서 계시되어 믿어야 할 것”(426) 으로 제시하거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제시할 때에는 그러한 “결정 에 신앙의 순종으로 따라야 한다.”(427) 이 무류성은 “하느님 계시의 위탁이 펼쳐지는 그만큼 펼쳐진다.”(428)
- 892 하느님의 도우심은 또한 베드로의 후계자와 하나가 되어 가르치는 사람들인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그리고 온 교회의 목자인 교황에게 특별하게 주어지는데, 이들이 무류의 결정을 내리지 않을 때에도, ‘결정적인’ 의사 표시 없이 일반적인 교도권의 행사를 통하여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한 계시를 더 잘 이해하도록 지도하는 가르침을 제시할 때에도 주어진다. 이러한 일반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도 신자들은 “마음의 종교적 순종으로 그를 따라야”(429) 하는데, 이것은 신앙의 동의와는 구별되지만, 신앙의 동의를 연장하는 것이다.
- 거룩하게 하는 임무
- 893 또한 주교는 특별히 자신이 직접 봉헌하거나 자신의 협력자들인 사제들이 봉헌하는 성찬례로써 “최고 사제직의 은총의 관리자가 된다.”(430) 이는 성찬례가 개별 교회의 삶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주교와 사제들은 그들의 기도와 성무, 말씀 선포와 성사 집전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한다. 주교와 사제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됨으로써”(1베드 5,3) 교회를 거룩하게 한다. 이로써 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양 떼와 함께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431)
- 다스리는 임무
- 894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절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들을 다스린다. 조언과 권고와 모범으로 또한 권위와 거룩한 권한으로 다스려야 한다.”(432) 그러나 이러한 권위와 권한은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봉사 정신에 따라 건설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433)
- 895 “주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행사하는 이 권한은 고유한 직접적 직권이다. 비록 그 권한의 행사가 궁극적으로 교회의 최고 권위로 다스려지고 교회와 신자들의 선익을 고려하여 일정한 한계에 제한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434) 주교들을 교황의 대리자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교황의 통상적이고도 직접적인 최고 권한은 주교들의 권한을 무효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확인하고 보호한다. 주교들의 권한은 교황의 지도 아래 온 교회의 친교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 896 ‘착한 목자’는 주교 사목직의 모범과 ‘전형’(典型)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있는 주교는 “무지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다. 주교는 아랫사람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또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결합되어 계시듯이 신자들은 주교와 결합되어야 한다.”(435)
-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버지를 따르시듯이, 여러분은 모두 주교를 따르십시오. 그리고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랐듯이) 사제단을 따르십시오. 부제들을 하느님의 계명처럼 존경하십시오. 그 누구든 교회에 관계되는 어떠한 일도 주교를 떠나서 행하지 마십시오.(436)
- II. 평신도
- 897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가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이해된다. 곧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 전체의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437)
- 평신도의 소명
- 898 “평신도들의 임무는 자기의 소명에 따라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그러므로 평신도들이 특별히 하여야 할 일은 자신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모든 현세 사물을 조명하고 관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일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발전하여 창조주와 구세주께 찬미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438)
- 899 교리와 그리스도인 생활의 요구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분야의 실제적인 문제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아내고 만들어 가는 일에는 특히 평신도들의 자발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발성은 교회 생활의 정규적인 요소이다.
- 평신도들은 교회 생활의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교회는 사회의 활력소와 원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자신들이 교회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 곧 공동체의 으뜸인 교황과 그와 일치해 있는 주교들의 인도를 받는 지상 신자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사실을 언제나 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439)
- 900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와 마찬가지로 평신도들은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바로 주님께 사도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하느님의 구원 소식을 사람들과 온 세상에 알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을 수행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오직 평신도를 통해서만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경우에 이러한 의무는 더욱더 절실하다. 교회 공동체에서 평신도들의 활동은 매우 필요하며 이 활동 없이는 사목자들의 사도직은 대부분의 경우 완전한 효과를 거둘 수 없다.(440)
-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평신도의 참여
- 901 “평신도들은 그리스도께 봉헌되고 성령으로 도유된 사람들로서 놀랍게도 언제나 그들 안에서 성령의 더욱 풍부한 열매를 맺도록 부름을 받고 또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의 모든 일, 기도, 사도직 활동, 부부 생활, 가정생활, 일상 노동, 심신의 휴식은, 성령 안에서 행하며 더구나 생활의 어려움을 인내로이 참아 받는다면, 그 모든 일을 하고 더욱이 삶의 괴로움을 꿋꿋이 견뎌 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인 제물이 되고(1베드 2,5 참조), 성찬례 거행 때에 주님의 몸과 함께 정성되이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된다. 또한 이와 같이 평신도들은 어디에서나 거룩하게 살아가는 경배자로서 바로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한다.”(441)
- 902 부모들은 “부부 생활을 그리스도교적 정신으로 하고 자녀들의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주선함으로써”(442) 특별한 모양으로 이 성화 임무에 참여한다.
- 903 평신도들이 필요한 자질을 갖춘 경우 고정적으로 독서직과 시종직을 맡을 수 있다.(443) “성직자들이 부족하여 교회의 필요로 부득이한 곳에서는 평신도들이 독서자나 시종자가 아니라도 그들의 직무의 일부를 보충하여 법 규정에 따라 말씀의 직무를 집행하고 전례 기도를 주재하며 세례를 수여하고 성체를 분배할 수 있다.”(444)
-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대한 평신도의 참여
- 904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권한으로 가르치는 교계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예언자직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평신도들을 증인으로 세우시고 신앙 감각과 말씀의 은총을 주신다.”(445)
- 어떤 사람을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가르치는 일은 설교자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의 일이다.(446)
- 905 평신도들은 그들의 예언자적 사명을 복음화를 통해, “곧 생활의 증거와 말씀으로 전하는 그리스도 선포”를 통해 실현한다. 평신도들이 하는 “이러한 복음화 활동은 세속의 일반 환경에서 이루어진다는 바로 이 점에서 어떤 특별한 징표와 독특한 효력을 얻는다.”(447)
- 이러한 사도직이 생활의 증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참된 사도직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말로 그리스도를 선포할 기회를 찾는 것이다.(448)
- 906 평신도들 중에서 자질과 역량을 갖춘 사람들은 교리 교육과(449) 거룩한 학문 교육,(450) 사회 홍보 매체에(451) 협력할 수도 있다.
- 907 “신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학식과 능력과 덕망에 따라 교회의 선익에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거룩한 목자들에게 표시하며 또한 이것을 그 밖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알릴 권리와 때로는 의무까지도 있다. 다만 신앙과 도덕의 보전과 목자들에 대한 존경 및 공익과 인간 품위에 유의하여야 한다.”(452)
-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한 평신도의 참여
- 908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453) 제자들에게 왕다운 자유의 선물을 주시어 제자들이 “극기와 거룩한 생활로 자기 자신 안에서 죄의 나라를 완전히 쳐 이기게 하셨다.”(454)
- 자신의 육체를 복종시키고 격정에 휩쓸리지 않고 영혼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왕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그 사람은 왕처럼 자신을 다스릴 줄 알고 바르게 판결하며, 죄에 묶이지 않습니다.(455)
- 909 “평신도들은 또한 힘을 합쳐 그 풍습을 죄악으로 몰아가는 세상의 제도들과 조건들을 바로잡아, 이 모든 것이 정의의 규범에 부합하고 또 덕의 실천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도와주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활동과 문화에 도덕 가치가 스며들게 할 것이다.”(456)
- 910 “평신도들은 사목자들의 협력자로서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소명을 받거나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특은에 따라 공동체의 활동과 성장을 위해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457)
- 911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은 “권한의 행사에 법규범을 따라 협력할 수 있다.”(458) 예를 들면 지역 공의회,(459) 교구 대의원 회의,(460) 사목 평의회(461) 등에 참여하고, 본당 사목구의 사목 임무를 수행하고,(462) 재무 평의회에 협력하며,(463) 교회 법원에 참여하는 것(464) 등이 그러한 경우들이다.
- 912 “신자들은 교회에 결합되어 자기의 본분이 된 권리와 의무 그리고 인간 사회 구성원이 되어 자기에게 딸린 권리와 의무를 구별하도록 열심히 배워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서로 조화롭게 결합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며, 현세의 어떠한 일에서나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어떠한 인간 행위든 현세의 일에서도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465)
- 913 따라서 “모든 평신도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신 대로’(에페 4,7) 자기에게 주어진 그 은혜로써 바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살아 있는 도구이며 증인이다.”(466)
- III. 봉헌 생활
- 914 “복음적 권고의 서원으로 이루어지는 신분은, 교회의 교계 구조와 관련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교회의 생활과 성덕에 속한다.”(467)
- 복음적 권고와 봉헌 생활
- 915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다양한 복음적 권고를 받고 있다. 모든 신자는 완전한 사랑으로 부름 받는다. 이 사랑은 봉헌 생활의 소명을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 생활의 정결, 청빈, 순명의 의무를 지운다. 교회가 인정하는 일정한 생활 신분에서, 바로 이 복음적 권고의 서원이 하느님께 ‘봉헌된 생활’의 특징이다.(468)
- 916 이로써 봉헌 생활의 신분은 세례에 근거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진 ‘더욱 깊은’ 봉헌을 체험하는 생활 방식 가운데 하나로 드러나게 된다.(469) 봉헌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기로 다짐하며,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애덕의 완성을 추구함으로써 교회에서 미래 세계의 영광을 예고하고 보여 준다.(470)
- 큰 나무, 많은 가지
- 917 “마치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씨앗에서 자라난 나무가 주님의 밭에서 놀랍게도 수없이 많은 가지가 뻗어 나듯이, 독수(獨修)나 공동의 여러 생활 형태와 다양한 수도 가족들이 생겨나 회원들의 진보와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선익에 이바지한다.”(471)
- 918 “맨 처음부터 교회에는 복음적 권고를 실천함으로써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따르고 더 가까이에서 그분을 본받고자 하여, 각자 나름대로 하느님께 봉헌된 생활을 하는 남녀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독수 생활을 하거나 수도 가족을 일으켰다. 교회는 그 권위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승인하였다.”(472)
- 919 주교들은 성령께서 당신 교회에 맡기신 봉헌 생활의 새로운 은혜를 식별하려고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 봉헌 생활의 새로운 형태들을 승인하는 것은 사도좌에만 유보되어 있다.(473)
- 은수 생활
- 920 은수자들은, 세 가지 복음적 권고[福音三德]를 언제나 공적으로 선서하지는 않지만, “세속으로부터 더욱 철저하게 격리되어 고독의 침묵과 줄기찬 기도와 참회 고행으로 하느님 찬미와 세상의 구원에 자기의 신명을 바친다.”(474)
- 921 은수자들은 그리스도와 인격적 친교를 이루는 교회 신비의 내적 측면을 보여 준다.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은수(隱修) 생활은 주님을 침묵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은수자에게는 주님만이 모든 것이기에 주님께 자기네 삶을 바친다. 은수 생활이야말로 사막의 영적 싸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영광을 찾아야 하는 특별한 소명이다.
- 봉헌된 동정녀들과 과부들
- 922 사도 시대부터 더욱 자유로운 마음과 몸과 정신으로 전적으로 주님과 일치하도록 부름을 받은 동정녀들과(475) 과부들이,(476) 교회의 인정을 받아, “하늘 나라 때문에”(마태 19,12) 평생 동정이나 정결의 신분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 923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려 거룩한 계획을 발원하는 동정녀들은, 승인된 전례 예식에 따라서 교구장에 의하여 하느님께 봉헌되고 천주 성자 그리스도께 신비적으로 약혼되며 교회의 봉사에 헌신한다.”(477) 이 장엄한 예식(Consecratio Virginum)으로 “동정녀는 봉헌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나타내는 초월적 표징이 되며, 하늘의 저 신부와 내세 생활의 종말적인 표상이 된다.”(478)
- 924 봉헌 생활의 다른 형식으로 사는(479) 동정녀들의 회도 있는데, 이들은 세속에 사는 여자로서 (또는 수도자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고유한 신분에 따라 기도와 속죄, 형제들에 대한 봉사와 사도직에 종사한다.(480) 봉헌된 동정녀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더욱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단체를 만들 수 있다.(481)
- 수도 생활
- 925 수도 생활은 그리스도교 초기에 동방에서 생겨났다.(482) 교회법에 따라 설립된 수도회 안에서 살아가는(483) 수도 생활은 전례적 특성, 복음적 권고를 따르겠다는 공적 서원, 형제적인 공동생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일치의 증거 등을 통하여 봉헌 생활의 다른 형식과 구별된다.(484)
- 926 수도 생활은 교회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다. 수도 생활은 교회가 주님께 받은 선물이며,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는 생활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신자들에게 교회가 항구한 생활양식으로 제공하는 선물이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고 동시에 스스로 구세주의 신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수도 생활은 다양한 형태를 통해 이 시대의 언어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초대받는다.
- 927 모든 수도자는, 면속(免屬)이거나 아니거나(485) 교구장 주교들의 사목 직무의 협조자들이다.(486) 교회의 뿌리 내림과 선교적 성장에는 “복음 선포의 시작부터”(487) 모든 형태의 수도 생활의 존재가 필요하였다. “고대의 수도 단체에서 중세의 수도단과 현대의 수도회에 이르기까지 수도 가족들이 신앙의 전파와 새로운 교회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488)
- 재속회
- 928 “재속회(在俗會)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세속에 살면서 애덕의 완성을 향하여 노력하고 세상의 성화를 위하여 특히 그 안에서부터 기여하기를 힘쓰는 봉헌 생활회이다.”(489)
- 929 재속회 회원들은 “온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이러한) 성화를 위해 봉헌된 생활”(490) 로 “세속 안에서 또 세속으로부터 교회의 복음화 임무에 참여”(491) 하는데, 이들의 존재는 세상의 누룩과 같다.(492) 이들의 그리스도인 생활의 증거는 현세 사물을 하느님께 맞게 정돈하고 세상을 복음의 힘으로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유대로 복음적 권고를 받아들여 자기들끼리 그 고유한 재속 생활 방식에 알맞게 친교와 형제애를 지켜 나간다.(493)
- 사도 생활단
- 930 다양한 형태의 봉헌 생활 이외에 사도 생활단들도 있는데, 그 회원들은 “수도 서원 없이 그 단체에 고유한 사도적 목적을 추구하고 고유한 생활 방식에 따라 형제적 공동생활을 하면서 회헌을 준수하며, 애덕의 완성을 향하여 정진한다. 이러한 단체들 가운데에는 그 회원들이 정해진 회헌에 따라 복음적 권고를 받아들이는 단체들도 있다.”(494)
- 봉헌 생활과 선교 - 오시는 왕을 선포함
- 931 세례로써 이미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은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더욱 그분께 봉사하고 교회의 선익을 위해 자신을 바친다. 교회는 봉헌 생활의 신분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성령께서 어떻게 교회 안에서 기묘하게 활동하시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복음적 권고를 따르기로 서원한 사람들은 우선 그들의 봉헌을 실천할 사명을 지닌다. “봉헌 생활회의 회원들은 자기 봉헌에 의하여 교회의 봉사에 헌신하므로 자기 소속회의 고유한 방침대로 선교 활동에 특별히 열중할 의무가 있다.”(495)
- 932 하느님 생명의 성사, 곧 하느님 생명의 표징과 도구인 교회 안에서, 봉헌 생활은 구속 신비의 독특한 표징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고 본받는 것, 그분의 낮추심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시대 사람들과 ‘더 깊이’ 함께하는 일이 된다. 이 ‘더 좁은’ 길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표양으로 형제들을 자극하고, “참행복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혁시킬 수도 없고 하느님께 봉헌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자기 신분으로 빛나는 뛰어난 증거로 보여 주는 것이다.”(496)
- 933 비록 이러한 증거가 수도자 신분에서처럼 공적이건 사적이건, 아니면 숨겨진 것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오심’은 봉헌된 모든 사람의 삶의 원천과 방향이 된다.
- 하느님의 백성은 여기에 영속하는 나라가 없어 미래의 나라를 찾아야 하므로,……수도자 신분은 또한 이미 이 세상에 있는 천상 보화를 모든 신자에게 보여 주고,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얻은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증거를 드러내며, 미래의 부활과 하늘 나라의 영광을 예고하여 준다.(497)
- 간추림
- 934 “하느님의 제정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에는 교회 안의 거룩한 교역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법에서 성직자들이라고 부르고 그 외의 신자들은 평신도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양편 사람들 가운데 복음적 권고를 따르겠다고 선서하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그로써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는 이들도 있다.(498)
- 935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을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도록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당신 사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들은 그분의 대리자로서 활동할 권한을 그리스도께 받는다.
- 936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당신 교회의 보이는 초석으로 삼으셨으며, 그에게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다.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이 세상 보편 교회의 목자이다.”(499)
- 937 “교황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영혼들을 보살필 때에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최고 권한을 가진다.”(500)
- 938 성령께서 세우신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이다. 각 주교들은 “자기 개별 교회 안에서 일치의 가시적인 근원과 토대가 된다.”(501)
- 939 주교들은 협력자인 사제들과 부제들의 도움을 받아, 신앙을 올바르게 가르칠 임무와, 하느님에 대한 예배, 특히 성찬례를 집전할 임무, 참목자로서 자기가 맡은 교회를 다스릴 임무를 띤다. 교황과 더불어, 교황 아래서 모든 교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그들의 임무이다.
- 940 “세상 한가운데에서 세속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평신도의 신분이므로 바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 정신으로 불타올라 마치, 누룩처럼 세상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름 받았다.”(502)
- 941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그들은 더욱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교회적 삶의 모든 차원에서 세례와 견진의 은총을 펼치고, 이로써 모든 신자가 받은 성덕의 소명을 실현한다.
- 942 평신도들은 그들의 예언자직으로 인해, “인간 사회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고 있다.”(503)
- 943 평신도들은 그들의 왕직으로 인해, 자기희생과 거룩한 생활을 통하여 자신과 세상에서 죄의 지배를 물리칠 능력을 가진다.(504)
- 944 하느님께 봉헌된 생활은 교회의 인정을 받은 항구한 생활 양식으로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복음적 권고를 따르기로 하는 공적 선서로 특징지어진다.
- 945 세례로써 이미 하느님께 봉헌되어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긴 사람은 봉헌 생활의 신분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봉사와 교회의 선익에 더욱 헌신하게 된다.
- 제5단락 모든 성인의 통공
- 946 사도신경은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고백한 다음에 ‘모든 성인의 통공’을 고백한다. 어떤 면에서 이 구절은 앞 구절을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이다. “교회란 모든 성도의 공동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505) 모든 성도의 친교가 바로 교회이다.
- 947 “모든 신자가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각자의 선은 모두에게 전달된다.……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선의 공유가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지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모든 선이 지체들에게 전달되며, 이러한 전달은 교회의 성사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506) “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하나’이신 성령께서 교회가 받은 모든 것을 공동의 자산이 되게 하신다.”(507)
- 948 그러므로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곧 ‘거룩한 것들(sancta)의 공유’와 ‘거룩한 사람들(sancti) 사이의 친교’가 그것이다.
- 대부분의 동방 전례에서는 집전 사제가 영성체 전에 성체를 들어 올리면서 “거룩한 것들은 거룩한 사람들에게!”(Sancta sanctis!)라고 선포한다. 신자들(sancti)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sancta)로 양육되어 성령과 친교(Communio 그리스 말로 Koinonia)를 이루며 성장하고 이를 세상에 더욱 널리 전하게 된다.
- I. 영적 자산의 공유
- 949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제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 신앙의 공유. 신자들의 신앙은 사도들에게서 받은 교회의 신앙이며, 나눔으로써 풍부해지는 생명의 보화이다.
- 950 성사의 공유. “모든 성사의 효과는 신자 전체의 것이다. 성사들, 특히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문과 같은 세례성사는 모두를 서로 묶어 주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 결합시키는 거룩한 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교부들의 신경 풀이에서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성사의 공유로 이해하고 있다.……성사는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므로, 모든 성사는 친교의 성사라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친교를 완성시키는 주된 성사는 성체성사이므로 친교의 성사라는 말은 성체성사에 더 적합하다.”(508)
- 951 은사의 공유. 교회의 친교 안에서 성령께서는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모든 계층의 신자들에게 특별한 은총도 나누어 주신다.”(509)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1코린 12,7).
- 952 공동 소유. “신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참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의 공동 소유로 여겨야 하며, 가난한 이와 이웃의 불행을 도와줄 준비와 열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510)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재산 관리인이다.(511)
- 953 사랑의 공유.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로마 14,7).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6-27).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1코린 13,5).(512) 우리가 사랑으로 한 가장 작은 행위라도 모든 성인의 통공을 바탕으로 모든 산 이와 죽은 이의 연대 안에서 모든 이의 유익이 되도록 퍼져 나간다. 모든 죄는 이러한 친교에 해를 끼친다.
- II.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의 친교
- 954 교회의 세 가지 형태. “주님께서 당신 위엄을 갖추시고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오실 때까지, 또 죽음을 물리치시고 모든 것을 당신께 굴복시키실 때까지,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어떤 이는 지상에서 나그넷길을 걷고 있고, 어떤 이는 이 삶을 마치고 정화를 받으며, 또 어떤 이는 ‘바로 삼위이시며 한 분이신 하느님을 계시는 그대로 분명하게’ 뵈옵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513)
-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같은 사랑 안에서 참으로 여러 단계와 방법으로 친교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 하느님께 영광의 같은 찬미가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딸린 모든 사람은 그분의 성령을 모시고 하나인 교회로 뭉쳐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514)
- 955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잠든 형제들과 나그네들의 결합은 조금도 중단되지 않으며, 더욱이 교회의 변함없는 신앙에 따르면, 영신적 선익의 교류로 더욱 튼튼해진다.”(515)
- 956 성인들의 전구. “천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더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온 교회를 성덕으로 더욱더 튼튼하게 강화하고,……이들은 주님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께 전구하며,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일에서 주님을 섬기고……따라서 그들의 형제적 배려로 우리의 연약함이 많은 도움을 받는다.”(516)
- 울지들 마십시오. 죽은 다음에 저는 여러분에게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여러분을 도울 수 있습니다.(517)
- 저는 하늘로 올라가 땅을 위하여 유익한 일을 하겠습니다.(518)
- 957 성인들과 이루는 친교. “오로지 표양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늘에 있는 이들을 기억하며 공경할 뿐 아니라 또한 더 나아가서 형제적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온 교회의 일치가 성령 안에서 강화되도록 그렇게 한다. 나그네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친교가 우리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인도하는 것처럼 이렇게 성인들과 이루는 통공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주고, 온갖 은총과 하느님 백성의 생명 자체가 그 원천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519)
-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흠숭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며 주님을 본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교자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의 왕이시며 스승이신 분을 향한 그들의 비할 데 없는 신앙심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고, 동료 제자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520)
- 958 죽은 이들과 이루는 친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의 이러한 친교를 명백히 인식하는 나그네들의 교회는 초대 그리스도교 이래로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을 커다란 신심으로 소중하게 간직하여 왔으며, 죽은 이들을 위하여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거룩하고 유익한 생각이기 때문에(2마카 12,45 참조),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대리 기도를 바쳤다.”(521) 그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그들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들의 전구를 효과 있게 할 수 있다.
- 959 하느님의 한 가족.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모두 서로 사랑하고 하나의 찬미가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하며 서로 교류할 때에 우리는 교회의 근본 소명에 부응한다.”(522)
- 간추림
- 960 교회는 ‘성도들의 친교’이다. 이 말은 ‘거룩한 것들’(sancta)의 공유를 뜻하는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자들의 일치가 표현되고 실현되는”(523) 성찬례를 가리킨다.
- 961 이 말은 또한 ‘거룩한 사람들’(sancti)이 ‘모든 이를 위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친교를 가리킨다. 이 친교로써 저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하고 겪는 모든 일은 모든 이를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
- 962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의 친교를 믿습니다. 곧, 지상에서 순례자로 있는 사람들, 남은 정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죽은 이들, 하늘에 있는 복된 분들이 모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친교 안에서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과 그분의 성인들이 우리의 기도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524)
- 제6단락 마리아 - 그리스도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 963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비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이제 교회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의 위치를 생각해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사실 동정 마리아께서는 “구세주의 참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받으신다.……분명히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이시다.……왜냐하면 저 머리의 지체인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태어나도록 사랑으로 협력하셨기 때문이다.’”(525)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시다.”(526)
- I.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 964 교회에서 마리아의 역할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일치의 직접적 결과이다. “구원 활동에서 성모님과 아드님의 이 결합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 때부터 그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드러난다.”(527) 이 일치는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 때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 복되신 동정녀께서도 신앙의 나그넷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드님과 당신의 결합을 충실히 견지하셨다. 거기에 하느님의 계획대로 서 계시어(요한 19,25 참조), 성모님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극도의 고통을 겪으시며 당신에게서 나신 희생 제물에 사랑으로 일치하시어 아드님의 희생 제사에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을 결합시키셨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성모님을 제자에게 어머니로 주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27 참조).(528)
- 965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드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당신의 기도로 교회의 시작을 도와주셨다.”(529) 사도들과 몇몇 여인들과 함께 “마리아께서도 주님의 탄생 예고 때에 이미 당신을 덮어 그느르셨던 성령의 은혜를 당신의 기도로 간청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530)
- 그 승천에서도
- 966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531) 거룩한 동정녀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한 것이다.
- 오 천주의 성모님, 당신은 출산 때에도 동정을 보존하셨으며, 돌아가시면서도 세상을 떠나지 않으셨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잉태하셨고 기도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주신 당신은 생명의 근원에 결합되셨나이다.(532)
- ……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 어머니이시다
- 967 동정 마리아께서는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 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헌신함으로써 교회를 위하여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신다. 이로써 마리아께서는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지체”(533) 가 되시고, “교회의 전형”(typos)(534) 이 되신다.
- 968 그런데 교회와 온 인류에 대한 동정 마리아의 역할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마리아께서는 “순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 영혼들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시고자 온전히 독특한 방법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535)
- 969 “은총의 계획 안에 있는 마리아의 모성은 주님 탄생의 예고에 믿음으로 동의하시고 십자가 밑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간직하셨던 그 동의에서부터 모든 뽑힌 이들의 영원한 완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된다. 실제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이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그 때문에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교회 안에서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라는 칭호로 불리신다.”(536)
- 970 “사람들에 대한 마리아의 어머니 임무는 그리스도의 이 유일한 중개를 절대로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힘을 보여 준다. 사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사람들에게 미치시는 모든 구원의 영향은……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그 영향은 그리스도의 중개에 의지하고 거기에 온전히 달려 있고 거기에서 모든 힘을 길어 올린다.”(537) “어떠한 피조물도 강생하신 말씀 곧 구세주와 결코 똑같이 헤아려질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교역자나 신자들이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듯이, 또 하느님의 유일한 선성이 피조물들 안에서 실제로 갖가지 모양으로 퍼져 나가듯이, 구세주의 유일한 중개도 피조물들 가운데에서 그 유일한 원천에 참여하는 다양한 협력을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불러일으킨다.”(538)
- II. 성모 마리아 공경
- 971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라”(루카 1,48).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신심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본질적 요소이다.”(539)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에서 특별한 공경으로 당연히 존경을 받으신다. 사실 오랜 옛적부터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로 공경을 받으시고, 신자들은 온갖 위험과 곤경 속에서 그분의 보호 아래로 달려 들어가 도움을 간청한다.……공경은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그대로 온전히 독특한 것이지만, 강생하신 말씀과 똑같이 성부와 성령께 보여 드리는 흠숭의 공경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또한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준다.”(540) 이러한 마리아 공경은 천주의 성모님께 바쳐진 전례 축일들과(541) “복음 전체의 요약”인(542) 묵주 기도와 같은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에 나타난다.
- III. 마리아 - 교회의 종말론적 표상
- 972 우리는 앞에서 교회와 그 기원, 사명, 목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마리아께 눈을 돌려, 그분 안에서 교회의 신비와 “신앙의 나그넷길”을 걷는 교회를 관상하고, 이 나그넷길이 끝난 다음 본향에 들어선 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끝맺음이 될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마리아께서는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지극히 거룩하신 불가분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543) 안에서 교회를 기다리고 있으며, 교회는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이며 자신의 어머니로 공경한다.
-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어느 모로든 하늘에서 영혼과 육신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시어 내세에 완성될 교회의 표상이 되시고 그 시작이 되시는 것처럼, 이 지상에서 주님의 날이 올 때까지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 빛나고 계신다.(544)
- 간추림
- 973 주님의 탄생 예고 때에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로 강생의 신비에 동의함으로써, 마리아는 이미 당신 아드님께서 완수하셔야 할 모든 사업에 협력한다.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께서 구세주이시며 신비체의 머리이신 모든 곳에서 어머니이다.
- 974 지극히 거룩한 동정 마리아는 지상 생활을 마치고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려졌으며, 그곳에서 이미 당신 아드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여, 아드님의 신비체에 딸린 모든 지체들의 부활을 앞당겨 누렸다.
- 975 “우리는 새 하와이시고 교회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께서 천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어머니로서 당신의 역할을 계속하고 계심을 믿습니다.”(545)
- 제10절 “죄의 용서를 믿나이다”
- 976 사도신경은 죄의 용서에 대한 믿음을 성령에 대한 믿음과 연결시킬 뿐 아니라 교회와 성인의 통공에 대한 믿음과도 연관시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죄를 용서하는 당신의 신적 권능을 주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 (이 교리서의 제2편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그 밖의 다른 성사, 특히 성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를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몇 가지 기초적인 사항만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 I. 죄의 용서를 위한 유일한 세례
- 977 우리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신앙과 세례에 연결시키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세례는 우리 잘못 때문에 돌아가셨다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부활하신(546) 그리스도와 우리를 결합시켜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로마 6,4) 하는 죄의 용서를 위한 첫째가는 가장 주요한 성사이다.
- 978 “우리를 정화하는 세례를 받으면서, 우리가 처음 신앙 고백을 할 때에 받는 용서는 아주 충만하고 전적인 것이어서, 원죄나 우리 자신의 의지로 지은 죄나 또 그 죄들을 속죄하기 위해 받아야 할 어떤 벌도 남지 않게 된다.……그렇다고 해도 세례의 은총은 본성의 모든 나약함에서 누구도 해방시켜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끊임없이 악으로 이끌어 가는 사욕(邪慾)의 충동과 싸워야 한다.”(547)
- 979 악으로 기우는 이 경향과의 싸움에서 어느 누가 과연 모든 죄의 상처들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굳세고 조심성이 있다 하겠는가- “그러므로 교회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사용하는 일에서 세례 이외의 다른 방법이 더 필요하다. 교회는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죄를 지어 온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줄 능력이 있어야 한다.”(548)
- 980 세례 받은 사람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할 수 있다.
- 교부들이 고해를 “수고스러운 세례”라고(549) 부른 것은 합당한 것이었다. 세례가 아직 새로 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처럼 고해성사는 세례를 받은 후 죄에 떨어진 사람들의 구원에 필요하다.(550)
- II. 열쇠의 권한
- 981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루카 24,47) 되도록 하라고 하셨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이 “화해의 직분”(2코린 5,18)을 수행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어 주신 하느님의 용서를 사람들에게 전하며 그들을 회개와 신앙으로 부를 뿐만 아니라, 세례를 통한 죄의 용서를 그들에게 베풀어 주기도 하고 그리스도께 받은 열쇠의 권한으로 그들을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시킨다.
-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죄로 죽었던 영혼이 이 교회 안에서 다시 살아나 은혜롭게도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됩니다.(551)
- 982 아무리 중대한 잘못이라고 해도 거룩한 교회가 용서해 줄 수 없는 잘못은 없다. “아무리 사악하고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그의 뉘우침이 진실하기만 하면 누구나 용서에 대해 확고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552)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에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누구에게나 용서의 문이 항상 열려 있기를 원하신다.(553)
- 983 교리 교육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주신 비할 데 없이 큰 선물에 대한 신앙을 신자들에게 일깨워 주고 키워 주도록 힘쓰는 것이어야 한다. 그 큰 선물은 바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직무를 통하여 참으로 죄를 용서하는 사명과 권한이다.
-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큰 권한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잘것없는 봉사자들이 당신이 지상에 계실 때 수행하신 모든 일을 당신의 이름으로 행하기를 원하십니다.(554)
-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천사들이나 대천사들에게도 주지 않으신 권한을 받았습니다.……하느님께서는 사제들이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것을 하늘에서 승인하십니다.(555)
- 만일 교회 안에 죄의 용서가 없다면 어떠한 희망도 없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해방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선물을 교회에 맡겨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556)
- 간추림
- 984 신경은 ‘죄의 용서’를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과 연결 짓는다. 사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실 때,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맡기셨다.
- 985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첫째가는 주된 성사이다. 세례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우리를 결합시키고 우리에게 성령을 준다.
- 986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으며, 이 권한을 주교와 사제들을 통하여 고해성사 안에서 통상적으로 행사한다.
- 987 “죄의 용서에서, 사제들과 성사들은 우리 구원의 유일한 주인이며 증여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없애시고 우리에게 의화의 은총을 주시려고 사용하시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다.”(557)
- 제11절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
- 988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믿음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신경은, 세말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선언에서 절정에 이른다.
- 98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영원히 사시는 것과 같이, 의인들도 죽은 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며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을(558) 굳게 믿고 바란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활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업적이 될 것이다.
-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559)
- 990 ‘육신’이라는 용어는 연약하고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560) ‘육신의 부활’은 죽은 다음에 불멸하는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죽을 몸도”(로마 8,11)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 991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요소였다. “죽은 이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며, 우리는 부활을 믿는 이들이다.”(561)
-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2-14.20).
- I.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 부활에 관한 점진적 계시
- 992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당신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계시하셨다. 죽은 이의 육신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 전체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내적 결과로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그분은 아브라함을 비롯해 그 후손과 맺으신 ‘계약’을 충실히 지키는 분이시기도 하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에서 부활에 대한 신앙이 표현되기 시작한다. 마카베오 가문의 순교자들은 시련 중에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카 7,9).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2마카 7,14).(562)
- 993 바리사이들과(563) 주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564) 부활을 희망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부활 신앙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이신 분에 대한 믿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 994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한 신앙을 당신 자신과 연결 지으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예수님을 믿고,(565)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566) 마지막 날에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살리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몇몇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돌려주심으로써(567) 부활에 대한 징표와 보증을 주시고, 이로써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은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이 독특한 사건을 요나의 기적과(568) 성전의 표징과(569)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곧, 당신이 죽임을 당하신 후 사흗날에 부활하리라고 예고하신다.(570)
- 995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증인”(사도 1,22)이(571) 되는 것이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 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남으로써 아주 분명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하게 될 것이다.
- 996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처음부터 몰이해와 반대에 부딪혀 왔다.(572) “그리스도교 신앙은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육신의 부활에 대해 가장 격렬하고 끈질기고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다.”(573)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생명이 영적으로 지속된다는 사실은 매우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확실히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가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 죽은 이들이 어떻게 부활하는가-
- 997 ‘부활’이란 무엇인가- 육신과 영혼의 분리인 죽음으로 사람의 육신은 썩게 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그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으로, 예수 부활의 능력을 통해, 우리 육신을 우리 영혼에 결합시키심으로써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육신에 돌려주실 것이다.
- 998 누가 부활할 것인가- 죽은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다.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574)
- 999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셨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루카 24,39).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할 것이다.”(575) 그러나 이 육신은 “영적인 몸”(1코린 15,44)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576)
- 그러면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35-37.42.52-53).
- 1000 이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상상력과 이해력을 뛰어넘는 것으로, 신앙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 육신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앞당겨 맛보고 있다.
- 땅에서 나온 빵도 하느님의 축성을 받게 되면 더 이상 보통의 빵이 아니라, 지상의 것과 천상의 것 두 가지로 이루어진 성체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우리 육신도 더 이상 썩어 없어질 육신이 아니고, 부활의 희망을 지닌 육신이 됩니다.(577)
- 1001 언제 부활할 것인가- 부활은 “마지막 날에”(요한 6,39-40.44.54; 11,24) “세상 끝 날에”(578)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1테살 4,16).
-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우리
- 1002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 사실이듯이, 어떤 면에서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금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콜로 2,12; 3,1).
- 1003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된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천상 생명에 이미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579) 그러나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3).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6).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되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4).
- 1004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믿는 이들의 육신과 영혼은 이미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품위에 참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육신을 소중히 여겨야 함은 물론 다른 사람의 육신도, 특히 그 육신이 고통 당하고 있을 때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 몸은……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위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13-20).
- II.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죽다
- 1005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살기”(2코린 5,8) 위하여 떠나야 한다. 죽음이라는 이 ‘떠남’에서(580)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그 영혼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날 육체와 다시 합쳐질 것이다.(581)
- 죽음
- 1006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른다.”(582) 어떤 의미에서 육체의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사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죄가 주는 품삯”(로마 6,23)이다.(583)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은 주님의 죽음에 들어가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584)
- 1007 죽음은 지상 생활의 마침이다. 우리의 삶은 시간으로 계산되며,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변하고 늙어가므로, 지상의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생명의 정상적인 끝마침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은 우리의 삶에 긴박감을 준다. 죽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삶을 실현하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한다.
-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1.7).
- 1008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성경과(585) 성전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자인 교회의 교도권은 죽음이 사람의 죄 때문에 세상에 들어왔다고 가르친다.(586) 비록 사람이 죽을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죽지 않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죽음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죄의 결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587)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육체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588) 따라서 죽음은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1코린 15,26)이다.
- 1009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변화시키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본래의 인간 조건인 죽음을 겪으셨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한 공포에도,(589)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자유로이 순종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의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다.(590)
- 그리스도인 죽음의 의미
- 1010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리스도 덕분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지닌 본질적 새로움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이미 성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 중에 죽으면 육체적인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성취하고,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속량 행위 안에서 그분과 완전히 한 몸이 된다.
- 이 세상 극변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내 출생의 때가 가까웠습니다.……나에게 깨끗한 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내가 거기 닿아야 사람이 될 것입니다.(591)
- 1011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신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해서,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 1,23)라고 말한 바오로 사도와 같은 바람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죽음을 성부에 대한 순종과 사랑의 행위로 변화시킬 수 있다.(592)
- 내 지상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다만 내 안에 있는 것은 샘솟는 물이고, 이 샘물이 “성부께로 오라.”고 내 안에서 속삭이고 있습니다.(593)
- 나는 하느님 뵙기를 원하며, 그분을 뵙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594)
-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595)
- 1012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시각은(596) 교회 전례가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597)
- 1013 죽음은 인간의 지상 순례의 끝이며, 지상 생활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현하고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비의 시간의 끝이다. “단 한 번뿐인 우리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친 다음에”(598) 인간은 또 다른 지상 생활을 위해 돌아오지 못한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다”(히브 9,27). 죽음 뒤에 ‘환생’이란 없다.
- 1014 교회는 우리가 죽을 때를 위하여 준비하도록 권유하며(“졸연히 예비 없이 죽음에서 주님은 우리를 구하소서.”: 옛 성인 호칭 기도), 천주의 성모 마리아에게 “저희 죽을 때에”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기를 청하고(성모송),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자인 요셉 성인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도록 권고한다.
- 네 모든 행동과 네 모든 생각에서 네가 오늘 죽게 될 것처럼 너는 행동해야 할 것이다. 네 양심이 평안하면,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피하는 것보다는 죄를 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오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내일은 어떻게 준비가 되어 있겠느냐-(599)
- 내 주님!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신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받으소서. 죽을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도다, 당신의 짝 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600)
- 간추림
- 1015 “육신(caro)은 구원의 축(cardo)이다.”(601) 우리는 육신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육신을 속량하기 위해 육신을 취하신 말씀을 믿고, 육신의 창조와 구원의 완성인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 1016 죽음을 통하여 영혼은 육신과 분리되지만,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변화된 육신을 영혼과 다시 결합시키심으로써 우리 육신에게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돌려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것처럼 우리 모두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다.
- 1017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있는 이 육신이 참으로 부활할 것을 믿는다.”(602) 그러나 썩을 몸으로 무덤에 묻히지만 썩지 않을 몸,(603) “영적인 몸으로”(1코린 15,44) 다시 살아난다.
- 1018 “죄를 짓지 않았다면 없었을 죽음”(604) 을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 겪게 되었다.
- 1019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어 자유로이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셨으며, 이로써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주셨다.
- 제12절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 1020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 지으며, 죽음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긴다. 교회는 죽음을 앞둔 그리스도인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죄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힘을 북돋우는 도유(塗油)로 날인하며, 여행을 위한 양식인 노자 성체로 그리스도를 모시게 하며, 다음과 같이 평안을 빌어 준다.
- 하느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영혼이 이제 세상을 떠나려 하나이다. 이 영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천주 성부님, 이 영혼을 받아들이소서. 이 영혼을 위하여 수난하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님, 이 영혼을 받아들이소서. 이 영혼을 찾아오신 천주 성령님, 이 영혼을 받아들이소서. 오늘 이 영혼에게 평화를 주시고, 거룩한 시온에서 주님을 우러러 뵈오며 길이 살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 동정 마리아와 성 요셉과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일찍이 흙으로 만드신 이 교우를 주님께 돌아가게 하소서.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들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돌아가는 이 교우를 즐거이 맞아들이게 하소서.…… 구세주이신 주님을 뵈오며 영원히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605)
- I. 개별 심판
- 1021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시간인 인생에 끝을 맺는다.(606) 신약 성경은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과의 마지막 만남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주로 이야기하지만, 각자가 죽은 뒤 곧바로 자신의 행실과 믿음에 따라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도 반복하여 천명한다. 불쌍한 라자로의 비유,(607)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죄수에게 하신 말씀,(608) 그 밖에 다른 여러 대목들은(609)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는 영혼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610)
- 1022 각 사람은 죽자마자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셈 바치는 개별 심판으로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된다. 이러한 대가는 정화를 거치거나,(611) 곧바로 하늘의 행복으로 들어가거나,(612) 곧바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이다.(613)
- 우리의 삶이 저물었을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614)
- II. 천국
- 1023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과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얼굴과 얼굴을 마주”(1코린 13,12)(615) 보기 때문에 영원히 하느님을 닮게 될 것이다.
- 사도들에게서 이어받은 권위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다. 곧, 하느님의 보편적인 안배에 따라 모든 성인의 영혼과……다른 모든 죽은 신자들, 그리스도의 거룩한 세례를 받고 죽은 사람들로서 그들이 죽을 때 더 이상 정화할 것이 없었거나……나아가 정화해야 할 것이 과거에 있었거나 정화할 것을 지닌 채 죽었어도 죽은 후에 온전히 정화된 영혼들은……그들의 육체 안에서 부활하기 전에, 그리고 최후의 심판 전에, 그리고 우리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부터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하늘 나라, 하늘 낙원에서 거룩한 천사들의 모임에 받아들여졌으며, 받아들여지고 있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이후로 이 영혼들은 어떠한 피조물도 거치지 않고 지복 직관으로, 얼굴을 맞대고 신적 본질을 보았고, 보고 있다.(616)
- 1024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 완전한 삶, 곧 성삼위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하는 생명과 사랑의 이 친교를 ‘천국’이라고 부른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이다.
- 1025 천국에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617) 뽑힌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살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자신들의 참된 신원과 자신들 본래의 이름을 간직하며, 간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발견한다고 할 수 있다.(618)
-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619)
- 102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 주셨다. 천국의 복된 사람들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결과를 완전히 차지하는 데 있으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고 당신의 뜻을 끝까지 충실하게 지켜 온 사람들을 하늘의 당신 영광에 참여시키신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한 몸이 된 모든 사람의 복된 공동체이다.
- 1027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복된 친교의 이 신비는 모든 이해와 표현을 초월한다. 성경은 이를 생명, 빛, 평화, 혼인 잔치, 하늘 나라의 포도주, 아버지의 집, 천상 예루살렘, 낙원 등 비유적인 표상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해 준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 1028 하느님께서는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인간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시거나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실 때에만 그 참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천상 영광 안의 하느님을 뵙는 것을 교회는 ‘지복 직관’(至福直觀)이라고 부른다.
- 하느님을 뵙고, 당신의 하느님 주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과 영원한 빛의 기쁨에 참여하는 영예를 누리며……하늘 나라에서 의인들과 하느님의 벗들과 함께 불멸의 기쁨을 얻어 누리는 것이 어찌 영광과 행복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620)
- 1029 지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하늘의 영광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피조물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계속 수행한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이다”(묵시 22,5).(621)
- III. 마지막 정화 - 연옥
- 1030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 1031 교회는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전혀 다르다. 교회는 연옥에 관한 신앙 교리를 특히 피렌체 공의회와(622) 트리엔트 공의회에서(623) 확정하였다. 교회의 전승은 성경의 어떤 대목들을(624) 참고하여 정화하는 불에 대해 이야기한다.
-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마태 12,32)이라고 진리이신 분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가벼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심판하기 전에 정화하는 불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어떤 죄들은 현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지만 다른 어떤 죄들은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625)
- 1032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관습에도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유다 마카베오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5). 교회는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미사성제를 드렸다.(626) 그것은 그들이 정화되어 지복 직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자선과 대사(大赦)와 보속도 권한다.
-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기억합시다. 욥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번제로 정화되었다면,(627) 죽은 이들을 위한 우리의 봉헌 제물이 그들에게 위로를 준다는 것을 왜 의심하겠습니까- 주저하지 말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드립시다.(628)
- IV. 지옥
- 1033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자유로이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과 결합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이나 이웃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중한 죄를 짓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요한 3,14-15). 우리 주님께서는 만일 우리가 그분의 형제들인 가난한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기를 소홀히 한다면 당신과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629)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옥’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또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
- 1034 예수님께서는 믿고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꺼지지 않는 불이(630) 타고 있는 ‘지옥’(Gehenna)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곳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멸망하게 된다.(631)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 13,41-42) 하고 엄숙히 선언하시며,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 25,41) 하고 단죄하실 것이다.
- 1035 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친다. 죽을죄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지옥의 고통, 곧 “영원한 불”의(632) 고통을 겪는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다.
- 1036 지옥에 대한 성경의 단언과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하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 주님의 경고대로 우리는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므로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단 한 번뿐인 우리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친 다음에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축복받은 이들과 함께 헤아려질 수 있을 것이며, 악하고 게으른 종들처럼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거나 바깥 어둠 속에 내쫓아 거기에서 절치 통곡하게 하라는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다.(633)
- 1037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634)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죽을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미사 전례와 신자들의 일상 기도를 통하여 교회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2베드 3,9)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빈다.
- 주님, 저희 봉사자들과 온 가족이 바치는 이 예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저희를 한평생 평화롭게 하시며 영원한 벌을 면하고 뽑힌 이들의 무리에 들게 하소서.(635)
- V. 최후의 심판
- 1038 최후의 심판에 앞서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사도 24,15)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할 것이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31-33.46).
- 1039 진리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각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상이 결정적으로 밝혀질 것이다.(636) 최후의 심판 때에 각 사람이 지상 생활 동안 선을 행하였거나 이를 소홀히 한 일의 궁극적 결과까지도 드러날 것이다.
- 악인들이 행하는 모든 악이 낱낱이 기록되는데,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잠잠히 아니 오시니”(시편 50[49],3)……그분께서는 왼쪽에 있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내 보잘것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세상에 있게 했다. 그들의 머리인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지상에서 내 지체들은 고생하며 굶주리고 있었다. 만일 너희들이 내 지체들에게 베풀었더라면 너희가 준 것이 머리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보잘것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세상에 둔 것은, 너희들의 선행을 나의 보물 창고로 가져올 심부름꾼으로 그들을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그들 손에 아무것도 맡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앞에서 아무것도 찾을 것이 없다.”(637)
- 1040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아버지만이 그 시간과 날짜를 알고 계시며, 그분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결정하신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전체에 대한 당신의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하실 것이다. 우리는 창조 업적의 궁극적 의미와 구원 경륜 전체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을 그 궁극적 목적으로 이끄시는 당신 섭리의 놀라운 길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며,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638) 드러내게 될 것이다.
- 1041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은혜로운 때에, 구원의 날에”(2코린 6,2) 회개하라고 하느님께서 아직도 사람들에게 하시는 호소이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촉구하며, “당신의 성도들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칭송을 받으실”(2테살 1,10)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희망”(티토 2,13)을 알리는 것이다.
- VI.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
- 1042 종말에는 하느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할 것이다. 최후의 심판 후에 육체와 영혼이 영광스럽게 된 의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우주 자체도 새롭게 될 것이다.
- 온 교회는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인간과 밀접히 결합되어 인간을 통하여 그 목적에 이르는 온 세상도 인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될 것이다.”(639)
- 1043 인류와 세상을 변화시킬 이 신비로운 새로움을 성경은“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이라고(640) 부른다.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에페 1,10) 하느님 계획의 결정적 실현이 될 것이다.
- 1044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된(641)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642)
- 1045 인간에게 이 완성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원하신 인류 일치의 궁극적 실현이 될 것이며, 순례 중인 교회는 바로 이 일치의 “성사”(643) 이다.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은 구원된 사람들의 공동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묵시 21,2),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묵시 21,9)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는, 지상의 인류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죄와 더러움과(644) 이기주의로 생겨나는 상처를 더 이상 입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당신을 무궁히 드러내 주실 지복 직관은 행복과 평화와 상호 친교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 1046 우주와 관련하여 계시는 물질세계와 인간 사이의 깊은 공동 운명을 이야기한다.
-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19-23).
- 1047 그러므로 가시적인 우주도 역시 변화되고, “세상 자체도 그 최초의 상태로 복원되어 아무 장애 없이 의인들에게 봉사하며”(645)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들이 누릴 영광에 참여하게 되어 있다.
- 1048 “우리는 땅과 인류가 완성되는 때를 모르며, 우주 변혁의 방법도 알지 못한다. 죄로 이지러진 이 세상의 모습은 반드시 사라진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정의가 깃드는 새로운 집과 새로운 땅을 마련하시리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있다. 그 행복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평화의 모든 열망을 채우고 또 넘칠 것이다.”(646)
- 1049 “그러나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이 땅을 가꾸려는 관심을 약화시켜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 땅에는 이미 새로운 세기의 어떤 밑그림을 제시하여 줄 수 있는 저 새로운 인류 가족의 몸이 자라고 있다. 따라서 현세 진보는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진보가 인간 사회의 더 나은 개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647)
- 1050 “인간의 존엄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의 가치들, 곧 우리 본성과 노력의 훌륭한 열매인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주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지상에 널리 전파한 다음,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보편되고 영원한 나라,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돌려 드릴 것이다.”(648)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것이다.
- 우리의 실체적이고 참된 생명은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이에게 샘물처럼 부어 주시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써 우리 인간들에게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약속되었습니다.(649)
- 간추림
- 1051 모든 사람은 죽자마자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개별 심판으로 영원한 갚음을 받는다.
- 1052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 중에 죽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 죽음 뒤의 저세상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고 믿습니다. 이 영혼들이 그들의 육체와 다시 결합되는 부활의 날에 죽음은 결정적으로 정복될 것입니다.”(650)
- 1053 “우리는 낙원에서 예수님과 마리아 주위에 모인 무수한 영혼들이 하늘의 교회를 이룬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영원한 행복 중에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고 있으며, 정도는 각기 다르지만 그들도 천사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시는 하느님의 통치에 참여하여 형제다운 염려로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고 우리의 약함을 도와줍니다.”(651)
- 1054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 1055 교회는 ‘모든 성인의 통공’에 힘입어 죽은 이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 드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특히 미사성제를 드린다.
- 1056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지옥’이라고도 불리는 “영원한 죽음의 슬프고도 비참한 현실”(652) 을 신자들에게 깨우쳐 준다.
- 1057 지옥의 주된 고통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다.
- 1058 교회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도록 기도한다. “주님,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653) 아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며”(1티모 2,4)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는 것도 사실이다.
- 1059 “지극히 거룩한 로마 교회는 심판 날에 모든 사람이 육신을 지니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보고하게 된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고백한다.”(654)
- 1060 종말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육신과 영혼이 영광스럽게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물질적인 우주도 변화할 것이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것이다.
- 1061 신경은 성경의 마지막 책과 마찬가지로(655) 아멘(Amen)이라는 히브리 말로 끝맺고 있다. 이 말은 신약 성경의 기도문 끝에 자주 나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자신의 기도들을 아멘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 1062 히브리 말의 아멘은 ‘믿다’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그 어원은 견고함, 신뢰성, 성실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멘’이라는 말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다.
- 1063 이사야 예언서에는 “진리의 하느님”, 곧 문자 그대로는 “아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그분께서 약속에 성실하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땅에서 자신을 위하여 복을 비는 자는 신실하신 (아멘의) 하느님께 복을 빌리라”(이사 65,16). 우리 주님께서는 자주 이 “아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며,(656) 때로는 두 번 거듭 사용하시기도 하는데,(657) 이는 당신 가르침에 대한 신뢰성과 하느님의 진리에 바탕을 둔 권위를 강조하시는 것이다.
- 1064 그러므로 신경 끝의 “아멘”은 첫머리의 “저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말마디를 되풀이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의 ‘아멘’이신 분께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때 “저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 고백에 대한 ‘아멘’이 될 것이다.
- 신경은 여러분에게 거울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한 모든 것을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는지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기뻐하십시오.(658)
- 1065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아멘”(묵시 3,14)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성부의 사랑에 대한 결정적 ‘아멘’이시다. 그분은 성부에 대한 우리의 ‘아멘’을 받아서 완성하신다.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 합니다”(2코린 1,20).
-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659)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