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제 2 장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 제3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
- 제3단락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512 신경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해서 단지 강생(잉태와 탄생)과 파스카(수난, 십자가에 달리심, 돌아가심, 묻히심, 저승에 가심, 부활, 승천)의 신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신경은 예수님의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생활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강생과 파스카에 관한 신앙 조문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전체를 밝혀 준다.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사도 1,1-2)은 강생과 파스카의 신비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 513 교리 교육은 상황에 맞추어 예수님 신비의 풍요로움을 모두 전개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 생애의 모든 신비들에 공통되는 몇몇 요소들(I)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예수님의 사생활(II)과, 공생활(III)의 주요한 신비들을 개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I.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신비이다
- 514 복음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많은 것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분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공생활의 많은 부분도 언급하지 않는다.(186)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 515 복음서는 최초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187) 다른 사람들과 그 신앙을 나누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신앙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의 지상 생활 전체에서 그 신비의 자취를 볼 수 있었고, 또 보여 줄 수 있었다. 당신 탄생 때의 포대기에서부터(188) 수난의 신 포도주와(189) 부활 때의 수의에(190) 이르기까지 예수님 생애의 모든 것은 그분의 신비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기적과 말씀을 통해서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다.”(콜로 2,9)는 사실이 계시되었다. 그분의 인성은 이처럼 ‘성사’, 곧 그분의 신성과 그분께서 가져오시는 구원의 징표와 도구로 나타난다. 그분의 지상 생활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비, 곧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의 사명을 수행하신다는 사실이다.
- 예수님 신비의 공통 특징들
- 516 그리스도의 전 생애 ─ 말씀과 행동, 침묵과 고통, 존재와 표현 방식 ─ 는 성부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성부께서도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사람이 되셨으므로,(191) 그분 신비의 사소한 모습들도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 준다.(192)
- 517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속량’의 신비이다. 속량(贖良)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193) 이 신비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강생으로 스스로 가난해지시어 그 가난으로 우리를 오히려 부요하게 하신다.(194) 그분의 숨겨진 생활에서는 순종으로(195)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을 정화한다.(196) 그리고 그분은 치유와 구마(驅魔)로써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태 8,17).(197)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마침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198)
- 518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총괄 실현’(recapitulatio)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시고 고통 받으신 모든 것은 타락한 인간의 원초적인 소명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하느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실 때, 그분께서는 자신 안에서 인간의 역사 전체를 총괄적으로 실현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지름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아담으로 잃은 것, 곧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게 된다.(199)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인생의 온갖 단계를 거치셨다.(200)
- 우리가 예수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친교
- 519 그리스도의 모든 풍요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요, 모든 사람의 재산이다.”(20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사셨다.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202) 강생에서부터 “우리의 죄 때문에”(1코린 15,3) 돌아가시기까지,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로마 4,25) 부활하시기까지 당신 일생을 사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1요한 2,1), “늘 살아 계시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빌어 주신다”(히브 7,25). 그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살고 고통 받으신 그 모든 것을 지니시고 항상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히브 9,24) 계신다.
- 5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203) 그분은, 당신 제자가 되어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완전한 인간”(204) 이시다. 당신을 낮추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으며,(205) 몸소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를 기도로 이끄시고,(206) 친히 가난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가난과 박해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이끄신다.(207)
- 521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살며 겪으신 모든 것을 우리가 당신 안에서 그대로 살게 하시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살며 겪으신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분께서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다.”(208)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게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범으로 당신의 육신 안에서 사신 삶에 우리를 당신 몸의 지체로서 참여하게 하신다.
- 우리는 예수님의 실존과 신비들을 우리 안에서 지속시키고 성취해야 합니다.……그 신비들이 우리와 온 교회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성취되도록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와 온 교회에 그 신비들을 나누고 확장시키며 또 계속하고자 하는 원의를 갖고 계십니다.……이 일은 우리에게 주시기로 계획하신 은총과 그 신비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시려는 만큼 효과를 봅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께서는 그 신비들을 우리에게서 완성하시고자 합니다.(209)
- II.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숨은 생활의 신비들
- 준비
- 522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이 큰 사건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기 동안 이를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첫째 계약”의(210) 예식과 희생 제사, 표상과 상징들을 모두 그리스도를 향해 집중시키셨으며, 계속 출현하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분을 예고하신다. 그 밖에도 이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분께서 오시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불러일으키신다.
- 523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하여(211) 파견된 주님 직전의 선구자이다.(212)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루카 1,76)인 요한은 모든 예언자를 능가하는(213) 마지막 예언자이며(214) 복음의 시작이다.(215) 그는 자기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께 인사를 드렸고,(216)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부른 “신랑의 친구”(요한 3,29)가 됨을 기뻐했다.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예수님에 앞서 온 그는 설교와 회개의 세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순교로 예수님을 증언한다.(217)
- 524 교회는 매년 대림 시기 전례를 거행하면서 실제로 메시아를 기다린다. 신자들은 구세주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오랜 준비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새롭게 한다.(218) 교회는 ‘선구자’의 탄생과 순교를 기념하여 그의 소망과 일치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 성탄의 신비
- 525 예수님께서는 외양간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다.(219) 순박한 목동들이 이 사건의 첫 증인들이다. 이 가난에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난다.(220) 교회는 이날 밤의 영광을 끊임없이 노래한다.
- 동정녀 오늘 영원하신 분을 세상에 낳으시고 땅은 가까이할 수 없는 그분께 동굴을 내드립니다. 천사들과 목동들이 그분을 찬양하고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옵니다. 영원한 하느님, 작은 아기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221)
- 526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다.(222)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223) 작은 이가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224)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나고”,(225) “위로부터 태어나야”(요한 3,7) 한다. 성탄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갖추실”(226)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예수 성탄의 신비는 이 ‘기묘한 교환’의 신비이다.
-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과 영혼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남자의 관여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셨도다.(227)
- 예수님 어린 시절의 신비
- 527 예수님의 할례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이루어지는데,(228)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계약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표시이며, 율법에 속하는(229) 표시이고, 당신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예배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표시이다. 이 표시는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의 예형이다.(230)
- 528 주님 공현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주님 공현은 요르단 강에서 받은 그분의 세례와, 카나의 혼인 잔치,(231) 그리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사실을 기념한다.(232) 복음은 주변의 이교(異敎)들을 대표하는 이 박사들이 강생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민족들의 시초라고 본다.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것은,(233) 다윗의 별이 비추는 메시아의 빛을 받아,(234) 장차 만민의 왕이 되실 분을(235) 이스라엘에서 찾았음을 보여 준다. 동방 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이방인들이 유다인을 향하고,(236) 그들로부터 구약에 담겨 있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일 때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과 온 세상의 구원자로 경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237) 주님 공현은 “많은 이방인들이 구약 성조들의 가문에 들어가고”(238) 이스라엘의 특전(239) 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529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침은(240)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속한 맏아들이심을(241) 보여 준다.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와 함께 온 이스라엘은 기다렸던 구세주를 맞으러 온다(비잔틴 전통은 이 사건을 ‘주님 맞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만민의 빛”,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인정되셨으나, “반대받는 표적”이기도 했다. 마리아에게 예언된 고통의 날카로운 칼은 또 하나의 봉헌, 곧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 앞에 준비하신” 구원을 베푸실 저 완전하고 유일한 십자가의 봉헌을 예고한다.
- 530 이집트 피난과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은(242) 빛에 대한 어둠의 저항을 나타낸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하여 많은 박해를 받으셨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이 박해를 나누어 받게 된다.(243) 예수님께서 이집트에서 올라오신 일은(244) 이집트 탈출을 상기시키며,(245) 그분을 결정적인 해방자로 제시한다.
-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의 신비
- 531 예수님께서는 당신 일생의 많은 기간을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에서 사셨다. 그것은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상적인 생활, 육체노동의 생활, 하느님의 율법에 순명하는 유다인의 종교 생활,(246)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이었다. 이 시기 전체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부모에게 순종하셨으며(247)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는 것이다.
- 532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와 당신 양부에게 순종하신 것은 제4계명을 완전히 지키신 것이다. 이 순종은 천상 아버지께 아들로서 하시는 순종의 현세적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항상 순종하신 것은 올리브 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루카 22,42)라고 하신 순종을 예고하고 미리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자렛 생활에서 일상적인 순종은 이미 아담의 불순종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복구하는 일이었다.(248)
- 533 나자렛의 감추어진 생활은 모든 사람이 삶의 가장 일상적인 길에서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게 해 준다.
- 나자렛 성가정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학교, 곧 복음의 학교입니다.……첫째는 침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정신을 위하여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인 침묵을 중시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성장하기를 바랍니다.……다음으로는 가정생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나자렛에서 가정생활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사랑의 친교, 간소하고도 소박한 아름다움, 그리고 성스럽고도 침해할 수 없는 특성들을 배워야 합니다. 끝으로는 노동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목수의 아들’의 나자렛 집에서, 우리는 인간 노동의 준엄하고도 구원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찬미하고자 하며……결론적으로 여기 나자렛에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노동자에게 인사를 보내고, 노동자들의 위대한 모범이시요 그들의 신적인 형제이신 분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249)
- 534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은 일은(250)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 복음이 침묵을 깬 유일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들의 사명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신비를 엿볼 수 있게 하신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마리아와 요셉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상생활의 침묵 속에 묻혀 지내는 동안 줄곧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 III. 예수님 공생활의 신비
- 예수님의 세례
- 535 예수님의 공생활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251) 시작된다.(252)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수많은 죄인들, 세리와 군사들,(253)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사람들,(254) 창녀들이(255)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가셨다.” 세례자 요한은 망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굳이 세례를 받으신다. 이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마태 3,13-17)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하느님 아들로서 드러난 예수님의 공현(Epiphaneia)이다.
- 536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이라는 당신의 사명을 수락하시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256) 이미 그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피 흘리는 죽음의 ‘세례’를 미리 받으셨다.(257)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기”(마태 3,15) 위하여 오신다. 곧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따르신다. 몸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사랑으로 죽음의 세례를 받아들이신다.(258) 이러한 수락에 성부의 목소리가 당신 아들이 마음에 든다고 응답한다.(259) 예수님께서 잉태 때부터 충만하게 지니셨던 그 성령께서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르신다.”(260)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한 성령의 원천이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담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마태 3,16), 예수님과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물이 거룩하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창조의 서막이다.
- 537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당신 세례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미리 겪으시는 예수님과 성사적으로 비슷하게 된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속죄하는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겼다가 그분과 함께 다시 올라와야 한다. 그래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로마 6,4).
-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세례를 통해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함께 묻읍시다. 그분과 함께 높이 올려지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내려갑시다. 그분과 함께 영광스럽게 되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올라갑시다.(261)
- 그리스도께 일어난 모든 일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물로 씻은 뒤에 하늘 높은 곳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성부의 음성을 통해 입양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262)
-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
- 538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광야에서 홀로 계셨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머무르신다.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으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263) 이 시기가 끝 날 무렵, 사탄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자녀다운 자세를 변질시키려고 세 번 유혹을 시도한다. 예수님께서는 낙원에서 아담이 받은 유혹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유혹이 집약된 공격을 물리치신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루카 4,13) 예수님을 떠나간다.
- 539 복음사가들은 이 신비한 사건이 지닌 구원적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 첫 아담은 유혹에 넘어졌으나, 예수님께서는 꿋꿋하게 서 계시는 새 아담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완전하게 수행하신다. 그 옛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하느님께 대들었던 사람들과는(264)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로써 악마를 이기셨으며, 그의 전리품을 다시 빼앗아 오시고자 “힘센 자를 묶어 놓으셨다.”(265)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자를 물리치신 것은 당신의 수난, 곧 아버지에 대한 자녀다운 사랑으로 바친 최고의 순종을 통한 승리의 예고이다.
- 540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하느님의 아들이 어떤 식으로 메시아이신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사탄이 제시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그분께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266)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유혹자를 이기셨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교회는 해마다 40일간의 사순 시기를 통하여 광야의 예수님 신비와 결합한다.
-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541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시작하셨다.”(267)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인간을 들어 높여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268)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심으로써 이를 행하신다. 이 모임이 바로 교회이며, 이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것이다.”(269)
- 542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가정’ 안에 모인 사람들의 중심에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하느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징표들과 제자들의 파견을 통해서 사람들을 당신께 불러 모으신다.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당신 파스카의 위대한 신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실현하실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이렇게 일치되도록 불리었다.(270)
- 하느님 나라의 선포
- 543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았다. 먼저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전해진 이 메시아의 나라는(271) 모든 민족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272)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 주님의 말씀은 밭에 심은 씨앗과 비슷하여,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그리스도의 작은 양 떼에 들게 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것이며, 그런 다음에 씨앗은 저절로 싹이 터 수확 때까지 자라난다.(273)
- 544 이 나라는 가난하고 미소한 자들, 곧 겸손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루카 4,18)(274) 파견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시는데 그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마태 5,3)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275)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다. 배고픔과(276) 목마름과(277) 궁핍을(278)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신다.(279)
- 545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초대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28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회개를 호소하시지만, 또한 당신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들에 대한 아버지의 한없는 자비와(281)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임”(루카 15,7)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러한 사랑의 최상 증거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마태 26,28)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일이 될 것이다.
- 546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의 전형적 형식인 비유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부르신다.(282)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하시지만,(283) 한편 근본적인 선택도 요구하신다.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284)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285) 비유는, 사람들이 마치 단단한 땅처럼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좋은 땅처럼 받아들이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과 같다.(286) 저마다 받은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하는가-(287) 이 세상에 계신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이 비유 안에 은밀하게 들어 있다. “하늘 나라의 신비”(마태 13,11)를 알아들으려면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저 바깥”(마르 4,11)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288)
- 하느님 나라의 표징
- 547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가 당신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많은 “기적과 이적과 표징”(사도 2,22)도 행하신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예고된 메시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289)
- 548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들은 성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한다.(290) 이 표징들은 예수님을 믿도록 권유한다.(291) 그분께서는 그분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청하는 것을 주신다.(292) 그러므로 기적들은 성부의 일을 수행하시는 분에 대한 신앙을 굳건하게 한다. 기적들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언한다.(293)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걸려 넘어지는(294)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기적은 호기심이나 마술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들이 아니다. 그렇게 분명한 기적들을 보여 주셨음에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으며(295) 심지어 마귀의 힘을 빌려 행동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296)
- 54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주림,(297) 불의,(298) 병과 죽음(299) 등 현세의 불행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 메시아의 표징을 보이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불행을 없애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300) 하느님 자녀의 소명을 다하지 못하게 하거나, 모든 인간적인 예속을 가져오는 가장 심각한 노예 상태, 곧 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301) 오셨다.
- 550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바로 사탄 나라의 패배이다.(302)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예수님의 구마(驅魔)는 사람들을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303) 이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304)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승리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세워질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무로 세상을 다스리셨네.”(305)
- ‘하늘 나라의 열쇠’
- 551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과 함께 머물며 당신의 사명에 동참할 열두 사람을 선택하셨다.(30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나누어 주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셨다”(루카 9,2).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해 교회를 인도하시므로,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
-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29-30).
- 552 이 열둘의 사도단 가운데 시몬 베드로가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30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유일한 임무를 맡기셨다. 성부의 계시에 힘입어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고백했다. 이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하고 선언하셨다. “살아 있는 돌”이신(308)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위에 세우신 당신 교회에게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신다. 베드로는 그가 고백한 신앙 때문에 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어떤 쇠퇴로부터도 이 신앙을 보호하고, 형제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는 사명을 맡게 될 것이다.(309)
- 553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이러한 ‘열쇠의 권한’은 하느님의 집, 곧 교회를 다스릴 권한을 가리킨다. “착한 목자”(요한 10,11)이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이 임무를 확인해 주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매고 푸는’ 권한은 죄를 용서하고 교의에 관한 판단을 선포하며, 교회의 규율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직무를 통하여,(310) 특히 베드로의 직무를 통하여, 이 권한을 교회에 맡기셨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맡기셨다.
-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봄 - 거룩한 변모
- 554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그날부터, 스승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베드로는 이러한 예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311) 다른 제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312)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높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택하신 세 증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일어난다.(313)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빛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구름이 그들을 덮고 하늘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 555 예수님께서는 잠시 동안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영광을 보이심으로써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신다. 또한 “영광 속에 들어가기”(루카 24,26)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보여 주신다. 모세와 엘리야는 산 위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율법과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했었다.(314) 예수님의 수난은 물론 성부의 뜻이며, 성자께서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를 행하신다.(315) 구름은 특히 성령의 현존을 가리킨다. “삼위께서 모두 나타나셨으니, 성부께서는 목소리로, 성자께서는 인간으로, 성령께서는 빛나는 구름으로 나타나셨다.”(316)
- 당신께서는 산 위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어, 가능한 한 당신의 제자들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당신의 영광을 바라보고,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게 될 때 당신의 수난이 스스로 원하신 것임을 깨닫고, 당신께서 참으로 성부의 빛이심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셨나이다.(317)
- 556 공생활 직전에는 세례가, 파스카 직전에는 거룩한 변모가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의 세례인 ‘첫 번째 재생의 신비’를 드러냈으며, 거룩한 변모는 우리 자신의 부활인 ‘두 번째 재생의 성사’(318) 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도 한다.
- 베드로가 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바랐을 때, 그는 이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습니다.(319) 베드로여,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신 다음에 주시려고 이것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지상에서 고생하고, 지상에서 봉사하고, 지상에서 멸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내려가라. ‘생명’이신 분이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빵’이신 분이 굶주리기 위하여 내려오고, ‘길’이신 분이 길 가느라 고단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샘’이신 분이 목마르기 위하여 내려오는데, 너는 고생하기를 싫다 하느냐-(320)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 557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321) 이 결심은 예수님께서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당신의 수난과 함께 부활을 예고하셨다.(322)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하고 말씀하신다.
- 55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된 예언자들의 죽음을 상기시키신다.(323) 그럼에도 예루살렘을 당신 곁에 모으시기 위하여 끈질기게 부르신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ㄴ). 예루살렘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며(324) 다시 한 번 간절한 소원을 표현하신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 559 예루살렘은 자신의 메시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당신을 왕으로 모시려는 군중의 시도를 언제나 피해 오셨던 예수님께서는(325) “당신의 조상 다윗”(루카 1,32)의 도성에 메시아로서 입성하실 시기를 택하시고 그 세부적인 준비를 하신다.(326)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가져오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한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영광의 임금님”(시편 24[23],7-10)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즈카 9,9) 당신의 도읍으로 들어가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교회의 표상인 시온의 딸을 계략이나 폭력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는(327) 겸손으로 정복하신다. 그러므로 그날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린이들과(328)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일 것이다. 그들은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줄 때처럼 환호한다.(329)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시편 118[117],26) 하는 그들의 환호를, 교회는 주님 파스카의 기념을 시작하는 성찬 전례의 ‘거룩하시도다’에서 다시 반복한다.
- 56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이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완성하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교회 전례는 성지 주일에 이 일을 기념하며 장엄한 성주간을 시작한다.
- 간추림
- 561 “그리스도의 삶 전부가 연속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분의 침묵, 기적, 행동거지, 기도, 사람들을 위하시는 사랑,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울이시는 각별한 애정,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상의 전적인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자세, 그분의 부활, 이 모두가 당신 말씀의 실현이었고 계시의 완성이었습니다.”(330)
- 56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실 때까지 그분을 닮아야 한다.(331)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분과 동화되어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마침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332)
- 563 목자이든 동방 박사이든 누구나 베들레헴의 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연약한 어린 아기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경배해야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
- 564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시고, 나자렛에서 보내신 여러 해 동안 비천한 일을 하심으로써, 가정과 노동의 일상생활 안에서 거룩함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 565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의 시작, 곧 당신의 세례 때부터 구속 사업에 온전히 봉헌된 ‘하느님의 종’이시며, 이 일은 당신 수난의 ‘세례’로 완성될 것이다.
- 566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성부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계획에 완전히 따르심으로써 사탄을 이기시는 겸손한 메시아 예수님을 보여 준다.
- 567 하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에서 개시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과 현존 안에서 사람들에게 빛나기 시작한다.”(333) 교회는 이 나라의 싹이며 시작이다. 그 열쇠는 베드로에게 맡겨졌다.
- 568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의 목적은 당신 수난에 대비하여 사도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려는 데 있다. “높은 산”에 오름은 갈바리아 산에 오르기 위한 준비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이 지니시고 성사 안에서 반영되는 것, 곧 “영광의 희망”(콜로 1,27)을 나타내신다.(334)
- 569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반대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335) 기꺼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 57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린이들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며 당신의 도성에 들어오신 메시아 왕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완성하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