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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비
  • 522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이 큰 사건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기 동안 이를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첫째 계약”의(210) 예식과 희생 제사, 표상과 상징들을 모두 그리스도를 향해 집중시키셨으며, 계속 출현하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분을 예고하신다. 그 밖에도 이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분께서 오시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불러일으키신다.
  • 523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하여(211) 파견된 주님 직전의 선구자이다.(212)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루카 1,76)인 요한은 모든 예언자를 능가하는(213) 마지막 예언자이며(214) 복음의 시작이다.(215) 그는 자기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께 인사를 드렸고,(216)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부른 “신랑의 친구”(요한 3,29)가 됨을 기뻐했다.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예수님에 앞서 온 그는 설교와 회개의 세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순교로 예수님을 증언한다.(217)
  • 524 교회는 매년 대림 시기 전례를 거행하면서 실제로 메시아를 기다린다. 신자들은 구세주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오랜 준비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새롭게 한다.(218) 교회는 ‘선구자’의 탄생과 순교를 기념하여 그의 소망과 일치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 성탄의 신비
  • 525 예수님께서는 외양간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다.(219) 순박한 목동들이 이 사건의 첫 증인들이다. 이 가난에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난다.(220) 교회는 이날 밤의 영광을 끊임없이 노래한다.
  • 동정녀 오늘 영원하신 분을 세상에 낳으시고 땅은 가까이할 수 없는 그분께 동굴을 내드립니다. 천사들과 목동들이 그분을 찬양하고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옵니다. 영원한 하느님, 작은 아기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221)
  • 526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다.(222)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223) 작은 이가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224)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나고”,(225) “위로부터 태어나야”(요한 3,7) 한다. 성탄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갖추실”(226)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예수 성탄의 신비는 이 ‘기묘한 교환’의 신비이다.
  •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과 영혼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남자의 관여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셨도다.(227)
  • 예수님 어린 시절의 신비
  • 527 예수님의 할례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이루어지는데,(228)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계약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표시이며, 율법에 속하는(229) 표시이고, 당신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예배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표시이다. 이 표시는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의 예형이다.(230)
  • 528 주님 공현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주님 공현은 요르단 강에서 받은 그분의 세례와, 카나의 혼인 잔치,(231) 그리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사실을 기념한다.(232) 복음은 주변의 이교(異敎)들을 대표하는 이 박사들이 강생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민족들의 시초라고 본다.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것은,(233) 다윗의 별이 비추는 메시아의 빛을 받아,(234) 장차 만민의 왕이 되실 분을(235) 이스라엘에서 찾았음을 보여 준다. 동방 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이방인들이 유다인을 향하고,(236) 그들로부터 구약에 담겨 있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일 때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과 온 세상의 구원자로 경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237) 주님 공현은 “많은 이방인들이 구약 성조들의 가문에 들어가고”(238) 이스라엘의 특전(239) 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529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침은(240)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속한 맏아들이심을(241) 보여 준다.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와 함께 온 이스라엘은 기다렸던 구세주를 맞으러 온다(비잔틴 전통은 이 사건을 ‘주님 맞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만민의 빛”,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인정되셨으나, “반대받는 표적”이기도 했다. 마리아에게 예언된 고통의 날카로운 칼은 또 하나의 봉헌, 곧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 앞에 준비하신” 구원을 베푸실 저 완전하고 유일한 십자가의 봉헌을 예고한다.
  • 530 이집트 피난과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은(242) 빛에 대한 어둠의 저항을 나타낸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하여 많은 박해를 받으셨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이 박해를 나누어 받게 된다.(243) 예수님께서 이집트에서 올라오신 일은(244) 이집트 탈출을 상기시키며,(245) 그분을 결정적인 해방자로 제시한다.
  •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의 신비
  • 531 예수님께서는 당신 일생의 많은 기간을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에서 사셨다. 그것은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상적인 생활, 육체노동의 생활, 하느님의 율법에 순명하는 유다인의 종교 생활,(246)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이었다. 이 시기 전체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부모에게 순종하셨으며(247)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는 것이다.
  • 532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와 당신 양부에게 순종하신 것은 제4계명을 완전히 지키신 것이다. 이 순종은 천상 아버지께 아들로서 하시는 순종의 현세적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항상 순종하신 것은 올리브 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루카 22,42)라고 하신 순종을 예고하고 미리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자렛 생활에서 일상적인 순종은 이미 아담의 불순종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복구하는 일이었다.(248)
  • 533 나자렛의 감추어진 생활은 모든 사람이 삶의 가장 일상적인 길에서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게 해 준다.
  • 나자렛 성가정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학교, 곧 복음의 학교입니다.……첫째는 침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정신을 위하여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인 침묵을 중시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성장하기를 바랍니다.……다음으로는 가정생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나자렛에서 가정생활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사랑의 친교, 간소하고도 소박한 아름다움, 그리고 성스럽고도 침해할 수 없는 특성들을 배워야 합니다. 끝으로는 노동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목수의 아들’의 나자렛 집에서, 우리는 인간 노동의 준엄하고도 구원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찬미하고자 하며……결론적으로 여기 나자렛에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노동자에게 인사를 보내고, 노동자들의 위대한 모범이시요 그들의 신적인 형제이신 분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249)
  • 534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은 일은(250)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 복음이 침묵을 깬 유일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들의 사명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신비를 엿볼 수 있게 하신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마리아와 요셉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상생활의 침묵 속에 묻혀 지내는 동안 줄곧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