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제 2 장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 제3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제1단락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
- I. 왜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가-
- 456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우리는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79) 하고 고백한다.
- 457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1요한 4,14).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3,5).
- 병든 우리의 본성은 치유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다시 일어서야 했고, 죽은 인간은 다시 살아나야 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좋은 것들을 잃은 사람은 이를 다시 찾아야만 했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사람에게 빛이 비쳐야만 했습니다. 사로잡혔던 우리는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갇혀 있던 우리는 구조를 기다렸고, 노예였던 우리는 해방자를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이 과연 하느님께 하찮은 것이었을까요- 인류가 이처럼 불행하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시게 할 정도로, 이러한 이유들이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만하지 않았겠습니까-(80)
- 458 ‘말씀’은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 459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함의 모범이 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리고 성부께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산에서 이렇게 명하신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81) 참으로 그분께서는 참행복의 모범이시며, 새 율법의 기준이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 사랑에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 실제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82)
- 460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인간이 되시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83)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84)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85)
- II. 강생
- 461 교회는 요한 복음의 표현(“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 1,14)에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인간 본성을 취하신 일을 ‘강생’(降生)이라고 부른다. 바오로 사도가 인용한 찬미가에서 교회는 강생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86)
- 462 히브리서도 같은 신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시편 40[39],7-9를 인용한 히브 10,5-7).
- 463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강생하셨다는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이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1요한 4,2).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 초창기부터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신비”로 노래한 기쁨에 찬 확신이다. “그분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셨도다”(1티모 3,16).
- III.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
- 464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 유일하고도 유례없는 강생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분적으로 하느님이시고 부분적으로 인간이시거나, 하느님과 인간의 불분명한 혼합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참하느님으로 계시면서 참사람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시다. 교회는 초기 몇 세기 동안 이 신앙의 진리를 변질시키려는 이단들과 맞서 이를 옹호하고 분명히 해야 했다.
- 465 초기의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도 그분의 참된 인성을 부인했다(그리스도 가현설[假現說]: Docetismus gnosticus).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87) 하는 참된 강생을 주장했다. 그러나 3세기부터 교회는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사모사타의 파울루스의 주장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입양이 아니라 본성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확언해야 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제1차 세계 공의회는 하느님의 아들이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88) 이시라고 그 신경을 통해 고백하고, “하느님의 아들은 무에서 나왔다”(89) 거나 “성부와는 실체 또는 본질이 다르다”(90) 고 주장한 아리우스를 배척했다.
- 466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인간적 위격이 하느님의 아들의 신적 위격과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맞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와 431년 에페소 제3차 세계 공의회는 “‘말씀’은 영혼으로 생명력을 지니게 된 육신을 위격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일치시키심으로써 인간이 되셨다.”(91) 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 외에 다른 주체를 가지지 않는다. 이 제2위격은 잉태 때부터 인성을 취하시어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에페소 공의회는 431년에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태중에 인간으로 잉태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당신의 신성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영혼을 부여받은 거룩한 육체를 마리아에게서 얻으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그 위격에서 육체와 결합하였기에 사람의 몸으로 나셨다고 일컬어진다.”(92)
- 467 그리스도 단성론자(單性論者)들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으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 본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이단에 맞서 칼케돈 제4차 세계 공의회는 451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서,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사람이시며, 신성으로는 아버지와 한 본체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한 본체이시며, “죄 말고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똑같으시고”,(93) 신성으로는 시간 이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으로는 이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태어나신, 유일하고 동일한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것을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가르치는 바이다. 한 분이시며 같은 그리스도이신 외아들 주님은, 우리가 두 본성을 혼동하거나, 변질시키거나, 분할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인정해야 한다. 이 두 본성의 차이점은 그 결합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함이 그대로 보전되어,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본체 안에 결합되었다.(94)
- 468 칼케돈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의 인성을 일종의 위격적 주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맞서 5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5차 세계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삼위의 한 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하나의 위격(hypostasis 또는 persona)이시다.”(9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기적뿐 아니라 그분의 고통과(96) 죽음까지도, 그분의 인성에 해당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주체인 신적 위격에 귀속된다.(97) “사람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하느님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며, 거룩한 삼위의 한 분이시다.”(98)
- 469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갈라질 수 없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시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분께서는 ‘우리 형제’ 인간이 되신 참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언제나 ‘우리 주’ 하느님이시다.
- 로마 전례는 “그분께서는 그대로 계시면서, 그대로가 아닌 모습을 취하셨도다.”(99) 하고 노래한다. 그리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전례문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며 노래한다. “오, 외아들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이시여, 영원하신 당신께서는 저희 구원을 위하여 천주의 성모 평생 동정 마리아에게서 강생하시고, 변화되지 않고 인간이 되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오 그리스도 하느님이시여,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영광을 받으시는, 거룩하신 삼위의 한 분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100)
- IV.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는가-
- 470 강생의 신비스러운 결합에서, 성자는 인간 본성을 “취하셨지만 소멸시키지는 않으셨다.”(101) 그러므로 교회는 지성과 의지의 활동을 지닌 그리스도의 인간 영혼과 인간 육체의 온전한 실재성을 역사 안에서 계속 고백해 왔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매번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이 그것을 취하신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에 고유하게 속한다는 사실도 환기시켜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그 인성 안에서 존재하고 행하시는 모든 것은 ‘삼위의 한 분’으로서 존재하고 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삼위 안에서 지니시는 고유한 위격적 존재 양식을 당신의 인성에게도 전달하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육체 안에서나 영혼 안에서 모두 삼위의 신적 삶을 인간적으로 드러내신다.(102)
-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정신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어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 말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103)
- 그리스도의 영혼과 인간적 인식
- 471 라오디케이아의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영혼 또는 정신을 대치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오류에 대해 교회는 영원한 아들이 인간의 영혼도 취하였다고 고백했다.(104)
- 472 하느님의 아들이 취한 이 인간 영혼은 진정한 인간적 인식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인식은 한계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조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가는”(루카 2,52) 인간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그 때문에 경험으로 알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야만 했다.(105) 이런 사실은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당신 자신을 기꺼이 낮추신 사실과도 부합한다.(106)
- 473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러한 하느님 아들의 진정한 인간적 인식은 그 ‘위격’의 신적 생명을 드러내는 것이었다.(107) “하느님의 아들은 인성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말씀’에 결합함으로써, 자신 안에서 하느님으로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셨으며, 이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셨다.”(108) 먼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친밀하고도 직접적인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109) 또한 성자께서는 당신의 인간적인 인식 안에서, 인간 마음속에 감추어진 생각들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의 통찰력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110)
- 474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신 말씀의 위격으로 하느님 지혜와 일치를 이루고 계셨기에, 그 인간적 인식은 당신이 계시하러 오신 영원한 계획들을 온전히 알고 계셨다.(111)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이에 대해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112) 그것을 알리는 것은 당신의 사명이 아니라고 다른 곳에서 밝히신다.(113)
-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
- 475 마찬가지로, 교회는 681년 제6차 세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적이고 인간적인 두 의지와 두 작용을 지니신다고 고백하였다. 그 둘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력하는 것이어서, 사람이 되신 말씀은 성부께 완전히 복종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으로서 결정하신 모든 것을 인간으로서도 원하신다.(114)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당신의 신적 의지에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전능한 의지에 순종한다.”(115)
- 그리스도의 참된 육체
- 476 ‘말씀’은 참된 인성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는 묘사가 가능하다.(116) 이 때문에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은 “생생하게 그려질”(117) 수 있다. 제7차 세계 공의회에서(118) 교회는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을 성화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 477 이와 동시에 교회는 예수님의 육체를 통하여 “당신 본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인간으로 나타나셨다.”(119) 는 것을 항상 인정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지닌 개별적인 특성들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을 표현한다. 인간 육체의 모습을 취하신 그분을 성화상으로 그려 공경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신자들이 그분의 모습을 공경하는 것은 “그 모습 안에 묘사되어 있는 위격을 공경하는 것”(120) 이기 때문이다.
- 강생하신 말씀의 성심
- 478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생, 고뇌와 수난 동안 우리들 모두와 각자를 알고 사랑하셨으며, 우리 하나하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다. 하느님의 아들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갈라 2,20). 그분은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다. 이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은,(121) “구세주께서 영원하신 아버지와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탁월한 표지와 상징으로 여겨진다.”(122)
- 간추림
- 479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영원한 말씀이요 성부의 실체적 모습이신 성부의 외아들께서 강생하셨다. 그분은 신성을 잃지 않으면서 인성을 취하셨다.
- 48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적 위격의 단일성 안에서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 48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지니신다.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아들의 단일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
- 482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다. 이 지성과 의지는 성부와 성령과 공유하시는 당신의 신적 지성과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종속된다.
- 483 그러므로 강생은 ‘말씀’의 유일한 위격 안에 결합된 신성과 인성의 놀라운 일치의 신비이다.
- 제2단락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 I.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되어……
- 484 마리아에게 주님의 탄생이 예고되면서 “충만한 때”(갈라 4,4)가 시작된다. 그것은 곧 약속과 준비의 성취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머무르고 있는”(콜로 2,9) 그분을 잉태하도록 초대되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하는 마리아의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으로 성령의 힘이 드러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실 것이다”(루카 1,35).
- 485 성령의 파견은 언제나 성자의 파견과 연관되고, 성자의 파견을 지향한다.(123)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성령께서는 동정 마리아의 태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느님을 잉태하게 하시려고 파견되셨다. 성령께서는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하여 잉태되게 하셨다.
- 486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인간으로 잉태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바로 ‘그리스도’, 곧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분이시다.(124) 그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목자들에게,(125) 동방 박사들에게,(126) 세례자 요한에게,(127) 그리고 제자들에게(128) 점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어떻게 “그분에게 하느님께서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는지”(사도 10,38)를 드러내는 것이다.
- II.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 487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에 대하여 믿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마리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 신앙을 밝혀 준다.
- 예정된 마리아
- 488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다”(갈라 4,4). 그러나 그분에게 “몸을 마련해 주시기”(129) 위하여 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을 바라셨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삼을 이스라엘의 딸을 선택하셨는데, 그는 갈릴래아 나자렛의 한 젊은 유다 여인,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이며,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루카 1,26-27).
-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정된 어머니의 동의가 강생에 앞서 이루어져 마치 어느 모로 여인이 죽음에 이바지한 것처럼 그렇게 또한 여인이 생명에 이바지하기를 바라셨다.(130)
- 489 구약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사명은 거룩한 여인들의 사명을 통해서 예비되어 왔다. 맨 먼저 하와는 비록 불순명하였지만 악에게 승리할 후손을 주시리라는 약속과,(131)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132) 이 약속 덕분에 사라는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133)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인간의 모든 기대와는 달리 무능하고 약한 사람들로(134) 여겨지는 여인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35) 드보라, 룻, 유딧, 에스테르와 다른 많은 여인들을 선택하셨다. 마리아는 “신뢰로 주님께 구원을 바라고 받는 주님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빼어난 분이다. 약속의 오랜 기다림 뒤에, 마침내 빼어난 시온의 딸인 이 여인과 더불어 때가 차고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었다.”(136)
- 원죄 없으신 잉태
- 490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이 위대한 임무에 맞갖은 은혜를 받았다.”(137) 가브리엘 천사는 잉태를 예고하면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고(138) 인사한다. 사실 마리아는 신앙으로 자신의 소명에 대한 이러한 예고에 자유로이 동의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도되어야만 했다.
- 491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한”(139) 마리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구원받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이 선포한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는 바로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으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공로를 미리 입으시어, 원죄에 조금도 물들지 않게 보호되셨다.(140)
- 492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나자렛의 동정녀를 꾸며 준 더없이 뛰어난 성덕의 빛은”(141)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공로로 보아 뛰어난 방법으로 구원을 받으셨다.”(142) 성부께서는 다른 모든 창조된 인간들보다 마리아에게 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내리셨습니다”(에페 1,3).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 493 동방 전통의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온전히 거룩한 이”(Panagia)라고 불렀으며,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으로, 이를테면 성령께서 빚어 만드신 새로운 인간이시다.”(143) 하고 찬미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았다.
-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494 남자를 모르면서도 마리아는, 성령의 힘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잉태 예고를 받았을 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144) 확신하며, “믿음의 순종으로”(145) 응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처럼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에 동의함으로써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리아는 온전한 마음으로 아무런 죄의 거리낌도 없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이고,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쳐,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였다.(146)
-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대로 “동정 마리아는 순종하시어 자신과 온 인류에게 구원의 원인이 되셨다.”(147) 그와 더불어 적지 않은 옛 교부들이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묶어 놓은 것을 동정녀 마리아가 믿음을 통하여 풀어 주셨다.”(148) 고 말한다. 그리고 하와와 비교하여 마리아를 “살아 있는 이들의 어머니”라 부르고, 더 자주 이렇게 주장한다. “하와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149)
-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 495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요한 2,1; 19,25)로 불린다.(150) 마리아는 당신의 아드님을 낳기 전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아 “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라고 불린다. 과연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분, 곧 육체적으로 마리아의 참아드님이 되신 분은 다름 아닌 성부의 영원한 아드님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의 제2위격이시다. 교회는 마리아를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고백한다.(151)
- 동정 마리아
- 496 초기의 신앙 표현들에서부터,(152) 교회는 예수님께서 오로지 성령의 힘으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다고 고백했으며, 이 사건의 육체적인 측면도 긍정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의 관여 없이 성령으로”(153) 잉태되셨다. 교부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시는 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징표를 동정 잉태에서 알아보았다.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2세기 초)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을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154) 하느님 의지와 권능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155) 참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셨고,……그 육신으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우리를 위하여 참으로 못 박히셨고……참으로 수난하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156)
- 497 복음서의 이야기들은(157) 동정 잉태를 모든 인간적 이해력과 가능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업적으로 이해하고 있다.(158) 천사는 요셉에게 그의 약혼자 마리아에 대해서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하고 일러 준다. 교회는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약속, 곧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이사 7,14를 그리스 말로 번역한 마태 1,23)고 한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본다.
- 498 마리아의 동정 잉태에 대하여 마르코 복음이나 신약 성경 서간들이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전설이거나,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학적으로 구성된 이야기가 아닌가 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 잉태되셨다는 신앙은 비그리스도 신자와 유다인들과 이교인들의 강력한 반대와 비웃음과 몰이해에 부딪혔다.(159) 이 동정 잉태는 이교 신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시대의 생각에서 따온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신비들의 내적 연관성”(160) 안에서, 그리고 강생에서 파스카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 안에서 바라보는 신앙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일찍이 이러한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마리아의 동정성과 출산을 몰랐으며, 주님의 죽음도 몰랐습니다. 이 세 가지 빛나는 신비는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161)
- ‘평생 동정’ 마리아
- 499 마리아가 동정으로 어머니가 되었다는 신앙을 더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교회는 마리아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그 순간에도,(162) 실제로 그리고 평생 동정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기에 이른다.(163) 사실 그리스도의 출생은 당신 어머니의 “완전한 동정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성화하였다.”(164) 교회 전례는 마리아를 ‘평생 동정’(Aeiparthenos)으로 찬미한다.(165)
- 500 성경이 예수님의 형제자매에 대해 가끔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마리아의 평생 동정 사실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166) 교회는 항상 이 대목들이 동정 마리아의 다른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 왔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마태 13,55)인 야고보와 요셉은 “다른 마리아”(마태 28,1)라고 명시된 예수님의 제자 마리아의 아들들이다.(167) 구약 성경의 표현 방식대로,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을 일컫는 말이다.(168)
- 501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유일한 아드님이시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적인 모성은(169)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로마 8,29) 삼으신 성자를 낳았으며, 그 형제들 곧 신자들을 낳아 기르는 데 모성애로 협력한다.”(170)
- 하느님의 계획에서 본 마리아의 동정 모성
- 502 신앙의 눈으로 계시 전체와 연관시켜서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에서 당신 아들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셨던 신비한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이유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 사명에 관련되는 만큼, 마리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 사명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관련된다.
- 503 마리아의 동정성은 강생에서 취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171) “그분께서 취하신 인간 본성 때문에 성부에게서 멀어지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분께서는 그 신성으로는 성부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으로는 어머니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당신의 두 본성 안에서 그분은 바로 성부의 아들이시다.”(172)
- 504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를 개시하는 새 아담(173) 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1코린 15,47).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잉태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구원 받은 인류의 머리이신(174) 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 505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정 잉태를 통하여, 신앙으로 성령 안에서 입양된 자녀들의 새로운 탄생을 개시하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175)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3). 이러한 생명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이 생명을 받아들임은 동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혼인적 소명은(176) 마리아의 동정 모성 안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 506 마리아는 동정녀이다. 그 동정성은 “어떠한 의혹도 섞이지 않은”(177) 그 믿음의 표지이며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흐트러짐 없는 헌신의 표지이기 때문이다.(178)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한 것은 자신의 신앙이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하셨다는 사실보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복되십니다.”(179)
- 507 마리아는 교회의 전형이며, 어머니로서 또 동정녀로서 모범을 보여 주신다.(180)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받아들여 그 자신도 어머니가 된다. 실제로 교회는 복음 선포와 세례로써,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느님에게서 난 자녀들을 불멸의 새 생명으로 낳는다. 교회는 또한 신랑에게 바친 믿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지키는 동정녀이다.”(181)
- 간추림
- 508 하느님께서는 하와의 후손 가운데 동정 마리아를 택하시어,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삼으셨다.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는 “구원의 뛰어난 열매”이다.(182) 마리아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하게 보호되고, 일생 동안 본죄에 물들지 않았다.
- 509 마리아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 바로 하느님이신 그 아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 510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을 “동정으로 잉태하고, 동정으로 낳고, 동정으로 길렀으며, 동정으로 젖을 먹이셨으니, 그분은 평생 동정이셨습니다.”(183) 마리아는 당신의 존재 전체로 “주님의 종”(루카 1,38)이다.
- 511 동정 마리아는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였다.”(184) 마리아는 “인류 전체를 대표하여”(185)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였다. 동정 마리아는 순종으로써 새로운 하와, 곧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다.
- 제3단락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
- 512 신경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해서 단지 강생(잉태와 탄생)과 파스카(수난, 십자가에 달리심, 돌아가심, 묻히심, 저승에 가심, 부활, 승천)의 신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신경은 예수님의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생활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강생과 파스카에 관한 신앙 조문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전체를 밝혀 준다.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사도 1,1-2)은 강생과 파스카의 신비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 513 교리 교육은 상황에 맞추어 예수님 신비의 풍요로움을 모두 전개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 생애의 모든 신비들에 공통되는 몇몇 요소들(I)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예수님의 사생활(II)과, 공생활(III)의 주요한 신비들을 개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I.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신비이다
- 514 복음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많은 것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분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공생활의 많은 부분도 언급하지 않는다.(186)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 515 복음서는 최초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187) 다른 사람들과 그 신앙을 나누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신앙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의 지상 생활 전체에서 그 신비의 자취를 볼 수 있었고, 또 보여 줄 수 있었다. 당신 탄생 때의 포대기에서부터(188) 수난의 신 포도주와(189) 부활 때의 수의에(190) 이르기까지 예수님 생애의 모든 것은 그분의 신비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기적과 말씀을 통해서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다.”(콜로 2,9)는 사실이 계시되었다. 그분의 인성은 이처럼 ‘성사’, 곧 그분의 신성과 그분께서 가져오시는 구원의 징표와 도구로 나타난다. 그분의 지상 생활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비, 곧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의 사명을 수행하신다는 사실이다.
- 예수님 신비의 공통 특징들
- 516 그리스도의 전 생애 ─ 말씀과 행동, 침묵과 고통, 존재와 표현 방식 ─ 는 성부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성부께서도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사람이 되셨으므로,(191) 그분 신비의 사소한 모습들도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 준다.(192)
- 517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속량’의 신비이다. 속량(贖良)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193) 이 신비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강생으로 스스로 가난해지시어 그 가난으로 우리를 오히려 부요하게 하신다.(194) 그분의 숨겨진 생활에서는 순종으로(195)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을 정화한다.(196) 그리고 그분은 치유와 구마(驅魔)로써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태 8,17).(197)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마침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198)
- 518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총괄 실현’(recapitulatio)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시고 고통 받으신 모든 것은 타락한 인간의 원초적인 소명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하느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실 때, 그분께서는 자신 안에서 인간의 역사 전체를 총괄적으로 실현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지름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아담으로 잃은 것, 곧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게 된다.(199)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인생의 온갖 단계를 거치셨다.(200)
- 우리가 예수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친교
- 519 그리스도의 모든 풍요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요, 모든 사람의 재산이다.”(20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사셨다.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202) 강생에서부터 “우리의 죄 때문에”(1코린 15,3) 돌아가시기까지,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로마 4,25) 부활하시기까지 당신 일생을 사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1요한 2,1), “늘 살아 계시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빌어 주신다”(히브 7,25). 그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살고 고통 받으신 그 모든 것을 지니시고 항상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히브 9,24) 계신다.
- 5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203) 그분은, 당신 제자가 되어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완전한 인간”(204) 이시다. 당신을 낮추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으며,(205) 몸소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를 기도로 이끄시고,(206) 친히 가난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가난과 박해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이끄신다.(207)
- 521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살며 겪으신 모든 것을 우리가 당신 안에서 그대로 살게 하시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살며 겪으신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분께서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다.”(208)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게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범으로 당신의 육신 안에서 사신 삶에 우리를 당신 몸의 지체로서 참여하게 하신다.
- 우리는 예수님의 실존과 신비들을 우리 안에서 지속시키고 성취해야 합니다.……그 신비들이 우리와 온 교회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성취되도록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와 온 교회에 그 신비들을 나누고 확장시키며 또 계속하고자 하는 원의를 갖고 계십니다.……이 일은 우리에게 주시기로 계획하신 은총과 그 신비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시려는 만큼 효과를 봅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께서는 그 신비들을 우리에게서 완성하시고자 합니다.(209)
- II.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숨은 생활의 신비들
- 준비
- 522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이 큰 사건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기 동안 이를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첫째 계약”의(210) 예식과 희생 제사, 표상과 상징들을 모두 그리스도를 향해 집중시키셨으며, 계속 출현하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분을 예고하신다. 그 밖에도 이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분께서 오시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불러일으키신다.
- 523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하여(211) 파견된 주님 직전의 선구자이다.(212)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루카 1,76)인 요한은 모든 예언자를 능가하는(213) 마지막 예언자이며(214) 복음의 시작이다.(215) 그는 자기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께 인사를 드렸고,(216)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부른 “신랑의 친구”(요한 3,29)가 됨을 기뻐했다.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예수님에 앞서 온 그는 설교와 회개의 세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순교로 예수님을 증언한다.(217)
- 524 교회는 매년 대림 시기 전례를 거행하면서 실제로 메시아를 기다린다. 신자들은 구세주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오랜 준비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새롭게 한다.(218) 교회는 ‘선구자’의 탄생과 순교를 기념하여 그의 소망과 일치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 성탄의 신비
- 525 예수님께서는 외양간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다.(219) 순박한 목동들이 이 사건의 첫 증인들이다. 이 가난에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난다.(220) 교회는 이날 밤의 영광을 끊임없이 노래한다.
- 동정녀 오늘 영원하신 분을 세상에 낳으시고 땅은 가까이할 수 없는 그분께 동굴을 내드립니다. 천사들과 목동들이 그분을 찬양하고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옵니다. 영원한 하느님, 작은 아기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221)
- 526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다.(222)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223) 작은 이가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224)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나고”,(225) “위로부터 태어나야”(요한 3,7) 한다. 성탄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갖추실”(226)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예수 성탄의 신비는 이 ‘기묘한 교환’의 신비이다.
-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과 영혼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남자의 관여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셨도다.(227)
- 예수님 어린 시절의 신비
- 527 예수님의 할례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이루어지는데,(228)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계약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표시이며, 율법에 속하는(229) 표시이고, 당신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예배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표시이다. 이 표시는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의 예형이다.(230)
- 528 주님 공현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주님 공현은 요르단 강에서 받은 그분의 세례와, 카나의 혼인 잔치,(231) 그리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사실을 기념한다.(232) 복음은 주변의 이교(異敎)들을 대표하는 이 박사들이 강생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민족들의 시초라고 본다.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것은,(233) 다윗의 별이 비추는 메시아의 빛을 받아,(234) 장차 만민의 왕이 되실 분을(235) 이스라엘에서 찾았음을 보여 준다. 동방 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이방인들이 유다인을 향하고,(236) 그들로부터 구약에 담겨 있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일 때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과 온 세상의 구원자로 경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237) 주님 공현은 “많은 이방인들이 구약 성조들의 가문에 들어가고”(238) 이스라엘의 특전(239) 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529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침은(240)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속한 맏아들이심을(241) 보여 준다.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와 함께 온 이스라엘은 기다렸던 구세주를 맞으러 온다(비잔틴 전통은 이 사건을 ‘주님 맞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만민의 빛”,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인정되셨으나, “반대받는 표적”이기도 했다. 마리아에게 예언된 고통의 날카로운 칼은 또 하나의 봉헌, 곧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 앞에 준비하신” 구원을 베푸실 저 완전하고 유일한 십자가의 봉헌을 예고한다.
- 530 이집트 피난과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은(242) 빛에 대한 어둠의 저항을 나타낸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하여 많은 박해를 받으셨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이 박해를 나누어 받게 된다.(243) 예수님께서 이집트에서 올라오신 일은(244) 이집트 탈출을 상기시키며,(245) 그분을 결정적인 해방자로 제시한다.
-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의 신비
- 531 예수님께서는 당신 일생의 많은 기간을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에서 사셨다. 그것은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상적인 생활, 육체노동의 생활, 하느님의 율법에 순명하는 유다인의 종교 생활,(246)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이었다. 이 시기 전체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부모에게 순종하셨으며(247)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는 것이다.
- 532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와 당신 양부에게 순종하신 것은 제4계명을 완전히 지키신 것이다. 이 순종은 천상 아버지께 아들로서 하시는 순종의 현세적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항상 순종하신 것은 올리브 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루카 22,42)라고 하신 순종을 예고하고 미리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자렛 생활에서 일상적인 순종은 이미 아담의 불순종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복구하는 일이었다.(248)
- 533 나자렛의 감추어진 생활은 모든 사람이 삶의 가장 일상적인 길에서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게 해 준다.
- 나자렛 성가정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학교, 곧 복음의 학교입니다.……첫째는 침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정신을 위하여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인 침묵을 중시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성장하기를 바랍니다.……다음으로는 가정생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나자렛에서 가정생활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사랑의 친교, 간소하고도 소박한 아름다움, 그리고 성스럽고도 침해할 수 없는 특성들을 배워야 합니다. 끝으로는 노동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목수의 아들’의 나자렛 집에서, 우리는 인간 노동의 준엄하고도 구원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찬미하고자 하며……결론적으로 여기 나자렛에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노동자에게 인사를 보내고, 노동자들의 위대한 모범이시요 그들의 신적인 형제이신 분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249)
- 534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은 일은(250)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 복음이 침묵을 깬 유일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들의 사명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신비를 엿볼 수 있게 하신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마리아와 요셉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상생활의 침묵 속에 묻혀 지내는 동안 줄곧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 III. 예수님 공생활의 신비
- 예수님의 세례
- 535 예수님의 공생활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251) 시작된다.(252)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수많은 죄인들, 세리와 군사들,(253)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사람들,(254) 창녀들이(255)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가셨다.” 세례자 요한은 망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굳이 세례를 받으신다. 이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마태 3,13-17)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하느님 아들로서 드러난 예수님의 공현(Epiphaneia)이다.
- 536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이라는 당신의 사명을 수락하시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256) 이미 그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피 흘리는 죽음의 ‘세례’를 미리 받으셨다.(257)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기”(마태 3,15) 위하여 오신다. 곧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따르신다. 몸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사랑으로 죽음의 세례를 받아들이신다.(258) 이러한 수락에 성부의 목소리가 당신 아들이 마음에 든다고 응답한다.(259) 예수님께서 잉태 때부터 충만하게 지니셨던 그 성령께서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르신다.”(260)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한 성령의 원천이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담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마태 3,16), 예수님과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물이 거룩하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창조의 서막이다.
- 537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당신 세례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미리 겪으시는 예수님과 성사적으로 비슷하게 된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속죄하는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겼다가 그분과 함께 다시 올라와야 한다. 그래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로마 6,4).
-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세례를 통해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함께 묻읍시다. 그분과 함께 높이 올려지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내려갑시다. 그분과 함께 영광스럽게 되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올라갑시다.(261)
- 그리스도께 일어난 모든 일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물로 씻은 뒤에 하늘 높은 곳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성부의 음성을 통해 입양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262)
-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
- 538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광야에서 홀로 계셨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머무르신다.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으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263) 이 시기가 끝 날 무렵, 사탄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자녀다운 자세를 변질시키려고 세 번 유혹을 시도한다. 예수님께서는 낙원에서 아담이 받은 유혹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유혹이 집약된 공격을 물리치신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루카 4,13) 예수님을 떠나간다.
- 539 복음사가들은 이 신비한 사건이 지닌 구원적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 첫 아담은 유혹에 넘어졌으나, 예수님께서는 꿋꿋하게 서 계시는 새 아담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완전하게 수행하신다. 그 옛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하느님께 대들었던 사람들과는(264)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로써 악마를 이기셨으며, 그의 전리품을 다시 빼앗아 오시고자 “힘센 자를 묶어 놓으셨다.”(265)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자를 물리치신 것은 당신의 수난, 곧 아버지에 대한 자녀다운 사랑으로 바친 최고의 순종을 통한 승리의 예고이다.
- 540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하느님의 아들이 어떤 식으로 메시아이신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사탄이 제시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그분께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266)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유혹자를 이기셨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교회는 해마다 40일간의 사순 시기를 통하여 광야의 예수님 신비와 결합한다.
-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541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시작하셨다.”(267)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인간을 들어 높여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268)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심으로써 이를 행하신다. 이 모임이 바로 교회이며, 이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것이다.”(269)
- 542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가정’ 안에 모인 사람들의 중심에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하느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징표들과 제자들의 파견을 통해서 사람들을 당신께 불러 모으신다.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당신 파스카의 위대한 신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실현하실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이렇게 일치되도록 불리었다.(270)
- 하느님 나라의 선포
- 543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았다. 먼저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전해진 이 메시아의 나라는(271) 모든 민족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272)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 주님의 말씀은 밭에 심은 씨앗과 비슷하여,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그리스도의 작은 양 떼에 들게 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것이며, 그런 다음에 씨앗은 저절로 싹이 터 수확 때까지 자라난다.(273)
- 544 이 나라는 가난하고 미소한 자들, 곧 겸손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루카 4,18)(274) 파견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시는데 그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마태 5,3)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275)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다. 배고픔과(276) 목마름과(277) 궁핍을(278)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신다.(279)
- 545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초대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28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회개를 호소하시지만, 또한 당신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들에 대한 아버지의 한없는 자비와(281)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임”(루카 15,7)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러한 사랑의 최상 증거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마태 26,28)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일이 될 것이다.
- 546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의 전형적 형식인 비유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부르신다.(282)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하시지만,(283) 한편 근본적인 선택도 요구하신다.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284)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285) 비유는, 사람들이 마치 단단한 땅처럼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좋은 땅처럼 받아들이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과 같다.(286) 저마다 받은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하는가-(287) 이 세상에 계신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이 비유 안에 은밀하게 들어 있다. “하늘 나라의 신비”(마태 13,11)를 알아들으려면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저 바깥”(마르 4,11)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288)
- 하느님 나라의 표징
- 547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가 당신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많은 “기적과 이적과 표징”(사도 2,22)도 행하신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예고된 메시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289)
- 548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들은 성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한다.(290) 이 표징들은 예수님을 믿도록 권유한다.(291) 그분께서는 그분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청하는 것을 주신다.(292) 그러므로 기적들은 성부의 일을 수행하시는 분에 대한 신앙을 굳건하게 한다. 기적들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언한다.(293)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걸려 넘어지는(294)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기적은 호기심이나 마술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들이 아니다. 그렇게 분명한 기적들을 보여 주셨음에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으며(295) 심지어 마귀의 힘을 빌려 행동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296)
- 54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주림,(297) 불의,(298) 병과 죽음(299) 등 현세의 불행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 메시아의 표징을 보이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불행을 없애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300) 하느님 자녀의 소명을 다하지 못하게 하거나, 모든 인간적인 예속을 가져오는 가장 심각한 노예 상태, 곧 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301) 오셨다.
- 550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바로 사탄 나라의 패배이다.(302)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예수님의 구마(驅魔)는 사람들을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303) 이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304)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승리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세워질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무로 세상을 다스리셨네.”(305)
- ‘하늘 나라의 열쇠’
- 551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과 함께 머물며 당신의 사명에 동참할 열두 사람을 선택하셨다.(30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나누어 주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셨다”(루카 9,2).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해 교회를 인도하시므로,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
-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29-30).
- 552 이 열둘의 사도단 가운데 시몬 베드로가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30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유일한 임무를 맡기셨다. 성부의 계시에 힘입어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고백했다. 이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하고 선언하셨다. “살아 있는 돌”이신(308)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위에 세우신 당신 교회에게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신다. 베드로는 그가 고백한 신앙 때문에 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어떤 쇠퇴로부터도 이 신앙을 보호하고, 형제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는 사명을 맡게 될 것이다.(309)
- 553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이러한 ‘열쇠의 권한’은 하느님의 집, 곧 교회를 다스릴 권한을 가리킨다. “착한 목자”(요한 10,11)이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이 임무를 확인해 주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매고 푸는’ 권한은 죄를 용서하고 교의에 관한 판단을 선포하며, 교회의 규율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직무를 통하여,(310) 특히 베드로의 직무를 통하여, 이 권한을 교회에 맡기셨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맡기셨다.
-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봄 - 거룩한 변모
- 554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그날부터, 스승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베드로는 이러한 예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311) 다른 제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312)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높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택하신 세 증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일어난다.(313)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빛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구름이 그들을 덮고 하늘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 555 예수님께서는 잠시 동안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영광을 보이심으로써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신다. 또한 “영광 속에 들어가기”(루카 24,26)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보여 주신다. 모세와 엘리야는 산 위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율법과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했었다.(314) 예수님의 수난은 물론 성부의 뜻이며, 성자께서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를 행하신다.(315) 구름은 특히 성령의 현존을 가리킨다. “삼위께서 모두 나타나셨으니, 성부께서는 목소리로, 성자께서는 인간으로, 성령께서는 빛나는 구름으로 나타나셨다.”(316)
- 당신께서는 산 위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어, 가능한 한 당신의 제자들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당신의 영광을 바라보고,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게 될 때 당신의 수난이 스스로 원하신 것임을 깨닫고, 당신께서 참으로 성부의 빛이심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셨나이다.(317)
- 556 공생활 직전에는 세례가, 파스카 직전에는 거룩한 변모가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의 세례인 ‘첫 번째 재생의 신비’를 드러냈으며, 거룩한 변모는 우리 자신의 부활인 ‘두 번째 재생의 성사’(318) 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도 한다.
- 베드로가 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바랐을 때, 그는 이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습니다.(319) 베드로여,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신 다음에 주시려고 이것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지상에서 고생하고, 지상에서 봉사하고, 지상에서 멸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내려가라. ‘생명’이신 분이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빵’이신 분이 굶주리기 위하여 내려오고, ‘길’이신 분이 길 가느라 고단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샘’이신 분이 목마르기 위하여 내려오는데, 너는 고생하기를 싫다 하느냐-(320)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 557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321) 이 결심은 예수님께서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당신의 수난과 함께 부활을 예고하셨다.(322)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하고 말씀하신다.
- 55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된 예언자들의 죽음을 상기시키신다.(323) 그럼에도 예루살렘을 당신 곁에 모으시기 위하여 끈질기게 부르신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ㄴ). 예루살렘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며(324) 다시 한 번 간절한 소원을 표현하신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 559 예루살렘은 자신의 메시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당신을 왕으로 모시려는 군중의 시도를 언제나 피해 오셨던 예수님께서는(325) “당신의 조상 다윗”(루카 1,32)의 도성에 메시아로서 입성하실 시기를 택하시고 그 세부적인 준비를 하신다.(326)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가져오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한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영광의 임금님”(시편 24[23],7-10)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즈카 9,9) 당신의 도읍으로 들어가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교회의 표상인 시온의 딸을 계략이나 폭력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는(327) 겸손으로 정복하신다. 그러므로 그날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린이들과(328)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일 것이다. 그들은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줄 때처럼 환호한다.(329)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시편 118[117],26) 하는 그들의 환호를, 교회는 주님 파스카의 기념을 시작하는 성찬 전례의 ‘거룩하시도다’에서 다시 반복한다.
- 56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이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완성하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교회 전례는 성지 주일에 이 일을 기념하며 장엄한 성주간을 시작한다.
- 간추림
- 561 “그리스도의 삶 전부가 연속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분의 침묵, 기적, 행동거지, 기도, 사람들을 위하시는 사랑,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울이시는 각별한 애정,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상의 전적인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자세, 그분의 부활, 이 모두가 당신 말씀의 실현이었고 계시의 완성이었습니다.”(330)
- 56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실 때까지 그분을 닮아야 한다.(331)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분과 동화되어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마침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332)
- 563 목자이든 동방 박사이든 누구나 베들레헴의 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연약한 어린 아기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경배해야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
- 564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시고, 나자렛에서 보내신 여러 해 동안 비천한 일을 하심으로써, 가정과 노동의 일상생활 안에서 거룩함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 565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의 시작, 곧 당신의 세례 때부터 구속 사업에 온전히 봉헌된 ‘하느님의 종’이시며, 이 일은 당신 수난의 ‘세례’로 완성될 것이다.
- 566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성부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계획에 완전히 따르심으로써 사탄을 이기시는 겸손한 메시아 예수님을 보여 준다.
- 567 하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에서 개시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과 현존 안에서 사람들에게 빛나기 시작한다.”(333) 교회는 이 나라의 싹이며 시작이다. 그 열쇠는 베드로에게 맡겨졌다.
- 568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의 목적은 당신 수난에 대비하여 사도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려는 데 있다. “높은 산”에 오름은 갈바리아 산에 오르기 위한 준비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이 지니시고 성사 안에서 반영되는 것, 곧 “영광의 희망”(콜로 1,27)을 나타내신다.(334)
- 569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반대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335) 기꺼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 57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린이들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며 당신의 도성에 들어오신 메시아 왕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완성하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