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제 2 장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 제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57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신비는, 사도들과 그 뒤를 이어 교회가 세상에 전파해야 할 기쁜 소식의 핵심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구원자이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단 한 번”(히브 9,26)에 이루어졌다.
- 572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파스카 전후에 주신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을 충실히 따른다.(33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마르 8,31)는 사실로써 예수님의 고난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마태 20,19).
- 573 그러므로 신앙인은 ‘속량’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복음서들은 그 상황을 충실히 전하며,(337) 다른 사료들 역시 이를 밝혀 준다.
- 제1단락 예수님과 이스라엘
- 574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명을 시작하신 초기부터, 일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뜻을 모았다.(338)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들(마귀를 쫓아내심,(339) 죄를 용서하심,(340)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심,(341) 율법상의 정결에 대한 독창적 해석,(342) 세리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심(343) )을 보고 악의를 가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마귀에 들렸다고 의심하기도 했다.(34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모독하고(345) 거짓 예언을 한다고(346) 비난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는 벌을 받는 종교적 죄였다.(347)
- 575 그러므로 예수님의 많은 행동과 말씀은 일반 하느님 백성에게(348) 보다는, 요한 복음이 흔히 ‘유다인들’이라고 부르는(349)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더욱 “반대를 받는 표징”이었다.(350) 물론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관계가 단지 논쟁을 벌이는 관계만은 아니었다. 예수님께 닥칠 위험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은 바리사이들이다.(351)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12장 34절에 나오는 율법 학자의 경우처럼,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칭찬하시고, 여러 번 바리사이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352)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의 부활,(353) 신심 행위(자선, 단식, 기도),(354)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습,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계명의 중심이라는 점 등, 하느님 백성의 이 종교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여러 교리에 동조하신다.(355)
- 576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는 예수님이 선택된 백성의 근본 제도를 거슬러 행동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제도들이란,
- - 성문화된 계율을 완전히 지켜 율법에 복종하며, 바리사이들의 주장대로 구전되는 해석까지도 받아들임으로써 율법에 복종함;
- -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머무르시는 거룩한 장소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닌 중심적 특성;
- - 어떤 인간도 그 영광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유일신에 대한 신앙 등이다.
- I. 예수님과 율법
- 577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첫머리에 율법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그분께서는 시나이 산의 ‘첫 계약’ 때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새 계약’이 주는 은총의 빛으로 해석하셨다.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 578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며, 따라서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율법의 가장 작은 계명까지도 완전히 지킴으로써 율법을 성취해야 한다고 믿으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율법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이시다.(356)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고백했듯이, 율법을 가장 작은 계명까지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다.(357)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해마다 속죄일에 율법을 어긴 그들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실로 율법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며, 야고보 사도가 환기시키듯이, “누구든지 율법을 전부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이 됩니다”(야고 2,10).(358)
- 579 율법은 그 문자뿐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전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바리사이들에게 소중한 원칙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 시대의 많은 유다인들을 극단적인 종교적 열성으로 몰아갔다.(359) 이 극단적 열성은 ‘위선적인’ 결의론(決疑論)에 떨어지거나,(360) 아니면 오로지,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한 사람의 의인에 의해 율법이 완성되는 새로운 하느님의 개입에 대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361)
- 580 율법의 완전한 성취는 성자의 위격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 태어나신(362) 하느님이신 입법자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께는 율법이 더 이상 돌 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의 “가슴에”, 곧 그 “마음에”(예레 31,33) 새겨진 것으로 드러난다. 그 ‘종’은 “성실하게 공정을 펴기”(이사 42,3) 때문에 “백성을 위한 계약”(이사 42,6)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시어,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363) 사람들이 받는 “율법의 저주”를 스스로 받기까지 하신다.(364)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돌아가셨기”(히브 9,15) 때문이다.
- 581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의 눈에 ‘율법 교사’(랍비)로 비쳐졌다.(365) 예수님께서는 종종 율법 교사들의 율법 해석 방식으로 이론을 펴신다.(366) 그러나 동시에 율법 학자들과 충돌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해석을 그들의 해석 범주 안에서 제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 7,29). 모세에게 글로 쓰여진 율법을 주시기 위하여 시나이 산에서 울려 퍼졌던 하느님의 말씀이, 행복 선언을 하신 산 위에서 예수님을 통해 다시 들리는 것이다.(367) 그 ‘말씀’은 율법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궁극적 해석을 내려 율법을 완성하신다.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33-34). 이러한 하느님의 권위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368) 바리사이들이 고집하는 일부 “사람의 전통”(369) 을 비난하신다.
- 582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해석으로 율법의 ‘교훈적인’(370) 의미를 밝히심으로써 유다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음식물의 정결에 관한 율법을 완성하신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8-21). 하느님의 권위로써 율법에 관한 결정적인 해석을 내놓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표징(기적)으로 보증을 받고 있는(371) 율법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부 율법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특히 안식일 문제가 그러하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율법 교사식 논법을 사용해서,(372) 하느님에 대한 봉사나(373) 병 고침을 통한 이웃에 대한 봉사가(374) 안식일의 휴식을 침해하지는 않음을 일깨우신다.
- II. 예수님과 성전
- 583 예수님께서는 당신보다 앞서 왔던 예언자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최상의 경의를 표하셨다. 태어나신 지 40일 만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분을 성전에서 봉헌하였다.(375) 열두 살이 되셨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양친에게 일깨우시고자 성전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신다.(376) 나자렛 생활 동안 해마다 적어도 파스카 축제 때에는 성전에 올라가셨으며,(377) 공생활 동안에도 유다인들의 큰 명절에는 주기적으로 예루살렘을 순례하셨다.(378)
- 58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장소로서 성전에 올라가셨다. 예수님께는 성전이 당신 아버지의 거처이며, 기도하는 집이다. 그래서 성전 앞뜰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것에 분개하신다.(379)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것은 당신 아버지에 대한 열정적 사랑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시편 69(68),10)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6-1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사도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성전을 계속 존중하였다.(380)
- 585 한편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 직전에 그 찬란한 건물의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381) 이로써 당신의 파스카와 더불어 열리게 될 마지막 때의 징표를 예고하신 것이다.(382) 그러나 이 예언은 그분께서 대사제의 집에서 신문을 당하실 때 거짓 증인들이 왜곡하여 고발하였고,(383)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이 말은 조롱이 되어 예수님께 되돌아왔다.(384)
- 58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중요한 교리를 가르치신 성전에(385) 대해 적의를 가지시기는커녕,(386) 장차 이루실 당신 교회의 초석으로 세우신(387) 베드로와 함께 성전 세를 바치기를 원하셨다.(388)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확실한 거처라고 소개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성전과 동일시하셨다.(3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를 죽음에 처한다는 것은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감을 나타내는 성전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다.(390)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391)
- III. 구원자이신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수님
- 587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하였지만,(392) 그들에게 진정으로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죄인들을 속량하시는 그분의 소임이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393)
- 588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식사하실 때처럼(394) 세리들과 죄인들과도 친하게 식사를 하심으로써, 바리사이들을 놀라게 하셨다.(395)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루카 18,9)(396) 사람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단언하셨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 앞에서, 죄는 보편적인 것이므로(397) 구원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눈이 먼 것이라고 선언하신다.(398)
- 589 예수님께서 특히 죄인들에 대한 당신의 자비로운 태도가 하느님의 태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개했다.(399)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써(400) 그들을 메시아의 잔치에 받아들임을 암시하기까지 하셨다.(401)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셨다. 그들이 놀라서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하고 말한 것은 옳은 말이 아니던가-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셨으니, 이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여 하느님을 모독한 것이거나,(402) 그게 아니라면 그 말씀은 진실이며, 그분의 인격은 하느님 이름을 드러내고 계시하는 것이 된다.(403)
- 59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기에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마태 12,30)고 하는 절대적 요구를 정당화하실 수 있으며, 당신을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이”(마태 12,41-42)이고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404) 말씀하실 때에도, 다윗이 당신을 그의 주님 메시아라고 불렀다는 것을 상기시키실 때에도,(405)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하고 단언하실 때에도,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모두 그러하다.
- 59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셨다.(406) 그러나 이러한 신앙 행위는 하느님 은총의 인도로(407) “위로부터 태어나기”(408)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죽는 신비로운 죽음을 거쳐야 했다. 이토록 놀라운 약속의 성취에 직면하여(409) 회개하라고 하는 이러한 요구는, 의회 법정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판단한 비극적 오해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410) 의회 의원들이 이렇게 한 것은 “무지한 탓”이기도(411) 했고, 또 “완고한”(412) 불신 때문이기도 했다.(413)
- 간추림
- 592 예수님께서는 시나이 산의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셨다.(414) 그 궁극적 의미를 밝혀 주시고,(415) 율법을 어긴 죄들을 속량하시어(416)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것이다.(417)
- 593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순례 명절마다 성전에 올라가심으로써 성전을 존중하셨고,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이 거처를 열렬히 사랑하셨다. 성전은 예수님의 신비를 미리 드러낸다.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 것은, 곧 당신 자신의 죽음과, 당신의 몸이 결정적인 성전이 될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어 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 594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와 같은 일들을 행하셨는데, 이는 당신께서 바로 구원자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418) 예수님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419) 오히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라고(420) 여긴 일부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자라고 판단했다.
- 제2단락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 I. 예수님의 재판
- 예수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분열
- 595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의견은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다.(421) 그들 가운데에는 바리사이 니코데모나(422) 고관인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같은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이(423)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직전에 요한 사도는, 매우 불완전하게나마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요한 12,42)고 말할 수 있었다. 성령 강림 다음 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고”(사도 6,7),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사도 15,5)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야고보 사도가 바오로 사도에게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신자가 된 이들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율법을 열성으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사도 21,20)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 596 예수님을 대하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424)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회당에서 내쫓기로 이미 합의했다.(425)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요한 11,48)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카야파 대사제는 이렇게 예언으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서 “죽을죄를 지었다.”고(426)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었으므로(427)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자로 고발하여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었다.(42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반란과 살인”(루카 23,19)으로 고발된 바라빠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셨다. 대사제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정치적으로 위협하였다.(429)
-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 597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역사적인 복합성을 고려할 때,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아시겠지만 그 주역들(배반자 유다, 최고 의회, 빌라도)의 개인적 죄가 어떠하든, 선동을 받은 군중들의 외침이나(430) 성령 강림 뒤의 회개하라는 호소에 포함된 일반적인 책망이 있었다 해도,(431) 그 재판의 책임을 예루살렘의 유다인 전체에게 지울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심으로써,(432) 예루살렘의 유다인들과 나아가 그 지도자들의 “무지”를 인정하셨고, 예수님을 따라 베드로도 그렇게 하였다.(433) 나아가 책임 인정의(434) 표현인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하는 군중의 외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속한 다른 유다인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확대할 수는 없다.
-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천명하였다.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에게 그리스도 수난의 책임을 차별 없이 지우거나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치 성경의 귀결이듯이, 유다인들을 하느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인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435)
-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 수난의 장본인이었다
- 598 교회는 그 신앙에 대한 교도권과 성인들의 증언에서, “죄인들 자신이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겪으신 모든 고난의 장본인이었고 그 도구였다.”는(436) 사실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우리 죄가 그리스도께 미친다는 점을(437) 생각하여, 교회는 주저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자주 유다인들에게만 지웠던 예수님의 처형에 대한 가장 중대한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린다.
- 계속해서 죄에 다시 떨어지는 사람들이 이 무서운 잘못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인 만큼, 타락과 악에 빠지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음 안에서, 그들 안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거듭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우리의 죄가 유다인들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증언대로,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1코린 2,8)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주님을 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그분을 부정하면, 그것은 말하자면 그분을 우리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 된다.(438)
-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439)
- II.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속량하시는 죽음
- “하느님께서 정하신 계획대로 넘겨지신 예수님”
- 599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일은 불행한 상황들 때문에 생겨난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베드로 사도가 성령 강림 날의 첫 설교 때부터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예수님이 넘겨지셨다(사도 2,23)고 설명했듯이,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신비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이러한 어법은 예수님을 넘겨준(440)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미리 써 놓으신 각본을 수동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600 하느님께는 시간의 모든 순간이 실제적으로 현재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 ‘예정’의 영원한 계획을 수립하실 때 거기에는 당신 은총에 대한 각 사람의 자유로운 응답도 포함된다. “과연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는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분, 곧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을 없애려고,(441) 다른 민족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이 도성에 모여, 그렇게 되도록 주님의 손과 주님의 뜻으로 예정하신 일들을 다 실행하였습니다”(사도 4,27-2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442) 그들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을 허락하셨다.(443)
-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 601 “의로운 종”의(444)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이 구원 계획은 보편적인 속량, 곧 사람들을 죄의 예속에서 해방시키는 속량의 신비로서(445) 성경에 예고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해 받았다.”고(446) 말하는 신앙 고백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1코린 15,3)는 것을 고백한다.(447) 속량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특히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성취한다.(448)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고난 받는 종에 비추어(449) 당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제시하셨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 주셨고,(450) 다음으로 사도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셨다.(451)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분을 ‘죄’로 만드셨다”
- 602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사도적 신앙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1베드 1,18-20). 원죄의 결과인 인간의 죄는 죽음으로 처벌을 받는다.(452) 당신 아들을 종의 모습으로,(453) 곧 죄 때문에 타락하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시어,(454)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 603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었다 하여 버림받은 적이 없으시다.(455) 그러나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부와 일치시키는(456) 속량하시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죄를 짓고 헤매는 우리를 떠맡으심으로써,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씀하셨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457)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과 연대를 이루게 하시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셨고”(로마 8,32) 우리가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로마 5,10) 하셨다.
- 하느님께서는 속량하시는 보편적 사랑을 먼저 보여 주신다
- 604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아들을 넘겨주심으로써, 당신의 계획이 우리의 어떤 공로보다도 앞서 존재하는 관대한 사랑의 계획이라는 것을 드러내신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4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 605 이 사랑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양 비유의 결론을 통해 상기시키셨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마태 20,28)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 “많은 이들”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한정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당신을 내어 주시는 구세주 오직 한 분과 인류 전체를 대비시킨다.(459) 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아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고 가르친다.(460)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고, 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461)
- III.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성부께 바치셨다
-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성부께 드리는 제물이다
- 606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462)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5-10). 성자께서는 강생하신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당신 구속 사명 안에 받아들이신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1요한 2,2) 되신 예수님의 제사는 성부와 이루는 사랑의 일치를 표현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 607 예수님 생애 전체는 성부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계획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원의로 가득 차 있다.(463) 속량을 위한 수난이 당신 강생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 12,2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그리고 또 십자가 위에서도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목마르다.”(요한 19,28)고 말씀하신다.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
- 608 세례자 요한은 죄인들에게처럼 예수님께도 세례를 베풀기로 하고 나서,(464) 예수님을 알아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465) 이라고 표현한다. 요한은 예수님이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466) 고통을 당하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진 고난 받는 종이시며,(467) 동시에 첫 파스카 때 이스라엘의 속량을 상징하던 파스카 어린양이시라는(468)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469) 오신 그분의 사명을 표현한다.
- 예수님께서는 성부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신다
- 609 인류를 위한 성부의 사랑을 인간으로서 당신 마음에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요한 15,13) 때문이다. 이처럼 고난과 죽음으로 예수님의 인성은 인류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의 자유롭고 완전한 도구가 되었다.(470) 과연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또 아버지께서 구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수난과 죽음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가장 자유롭게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다.(471)
-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생명을 자유로이 바치셨다
- 610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 열두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던 중에,(472) 자신을 자유로이 하느님께 바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셨다. 수난 전날 아직 자유로우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성부께 드리는 자발적인 봉헌의(473) 기념으로 삼으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 611 이 순간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는 당신 희생의 “기념”이(474)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봉헌에 사도들도 포함시키시고, 그들에게 이를 계속할 것을 명하신다.(475)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도들을 새로운 계약의 사제로 세우신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476)
- 겟세마니의 고뇌
- 61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을 바치심으로써(477) 미리 맛보신 새로운 계약의 잔을 겟세마니의 고뇌 중에(478)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479) 아버지의 손에서 다시 받으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인간적 공포를 그렇게 표현하셨다. 실로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의 인성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성과는 달리 예수님의 인성에는 죽음의 원인인(480) 죄가 전혀 없다.(481)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인성은 “생명의 영도자”,(482) “살아 있는 자”(483) 의 신적 위격이 취하신 인성이다. 당신의 인간적 의지로 성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받아들임으로써,(48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1베드 2,24) 당신 죽음을 속량을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신다.
-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일하고 결정적인 희생 제사다
- 613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485) 을 통해서 인류의 결정적인 속량을 완성하는 파스카의 희생 제사이며,(486)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487) 새로운 계약의 희생 제사이다.(488) 신약의 이 제사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성자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489)
- 614 그리스도의 이 희생 제사는 유일하며, 모든 제사들을 완성하고 초월한다.(490) 이 희생 제사는 우선 하느님 아버지께서 몸소 주신 선물이다. 바로 성부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내어 주신 것이다.(491)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자유로이, 사랑으로,(492) 성령을 통해서(493)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기 위하여 성부께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는(494) 봉헌이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을 당신의 순종으로 바꾸신다
- 615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은 고난 받는 종의 대역, 곧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일을 맡아 완수하셨다.(495)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과오를 보상하셨고, 아버지께 우리의 죄를 배상해 드리셨다.(496)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신다
- 616 이 끝없는 사랑(497)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속량적, 배상적, 속죄적 그리고 보상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을 제물로 바치실 때 우리 모두를 인식하고 사랑하셨다.(498)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5,14). 사람은 제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은 모든 사람들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품으며,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머리가 되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제사가 된다.
- 617 트리엔트 공의회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거룩하신 당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을 얻어 주셨다.”(499) 고 가르침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근원”으로서(500) 그리스도 희생 제사의 특별한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고 교회는 다음과 같은 노래로 십자가를 경배한다. “오! 십자가, 유일한 희망이여, 하례하나이다.”(501)
-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참여한다
- 618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502) 이신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신 하느님으로서 당신 위격 안에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기”(503) 때문에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신다.”(504)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505)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기 때문이다.(506)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속량을 위한 당신 희생 제사의 첫 수혜자들인 바로 그들이 당신 희생 제사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507) 속량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에 그 누구보다도 가장 긴밀히 참여한 분은 바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이다.(508)
-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하나뿐이다. 십자가 이외에, 하늘에 오르는 다른 사다리는 없다.(509)
- 간추림
- 619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1코린 15,3).
- 620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셨기”(1요한 4,10)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2코린 5,19).
- 62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유로이 당신을 바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중에 이러한 선물을 미리 보여 주시고 실현하신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 622 그리스도의 속량은 다음과 같다. 그분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곧,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요한 13,1) 그들이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그 헛된 소행에서 속량되게(510) 하려고 오신 것이다.
- 62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아버지께 사랑으로 온전히 순종하시어,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는(511) 고난 받는 종의 속죄 사명을 완수하신다.(512)
- 제3단락 예수 그리스도께서 묻히셨다
- 62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히브 2,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 안에서 당신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도록”(1코린 15,3)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맛보도록’, 곧 죽음의 상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순간과 부활하신 순간 사이에 그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상태를 경험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상태는 그분께서 묻히시고 저승에 가신 신비이다.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께서는,(513) 우주 전체에 평화를 가져오는(514)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515) 다음 취하시는 하느님의 “안식”을(516) 드러낸다. 이것이 성토요일의 신비이다.
- 육신을 지니고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
- 625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머무르심으로써, 부활 이전에 고통당할 수 있는 상태와 부활하신 현재의 영광스러운 상태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바로 ‘살아 계신’ 분, 곧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묵시 1,18).
- 하느님(성자)께서는 자연 질서에 따라 죽음이 영혼과 육신을 갈라놓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그러나 스스로 삶과 죽음이 만나는 장소가 되시고자, 부활로써 육신과 영혼을 다시 결합시키셨다. 이는 죽음으로 생기는 자연 분해를 멈추게 하시고, 당신 스스로 분리된 부분들을 위한 결합의 근원이 되심으로써 이루어졌다.(517)
- 626 죽임을 당하신 “생명의 영도자”께서(518) 바로 “부활하여 살아 계신 분”이시기(519)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죽음으로 분리된 그 영혼과 육신을 계속 지니고 있음은 당연하다.
-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었다 해도, 그 신성이 육체와 영혼에 따로 따로 갈라져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 위격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의 육신과 영혼은 처음부터 ‘말씀’의 위격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죽음으로 서로 분리되기는 했지만 그 영혼과 육신은 각기 동일하고 유일한 말씀의 위격과 더불어 있었다.(520)
-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다”
- 627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으로 사신 지상 생활을 마감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육신은 하느님 아들의 위격과 결합되어 있어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기에”(사도 2,24) 다른 시체들처럼 썩어 없어지지 않았다. “하느님의 힘이 그리스도의 육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셨다.”(521)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갔다.”(이사 53,8)는 말과,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도 2,26-27)(522) 하는 말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사흗날의”(1코린 15,4;루카 24,46)(523) 예수님 부활이 그 징표이다. 당시 사람들은 부패가 나흘째 되는 날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24)
- “그리스도와 함께 묻혀……”
- 628 세례의 본래적이고 온전한 표징은 물에 잠기는 것이다. 물에 잠기는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하여 죄에 대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묻힘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525)
- 간추림
- 629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셨다.(526)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죽어 묻히신 것이다.
- 630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신적 위격은 죽음으로 분리된 그 영혼과 육신을 계속 지니고 계셨다. 이 때문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몸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사도 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