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
- 제 2 부 십 계 명
- 제 2 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제6절 여섯째 계명
- III. 부부 사랑
제 2 부 십 계 명
- 2360 성(性)은 남녀의 부부애를 위해 있는 것이다. 혼인 생활에서 부부의 육체관계는 정신적 일치의 표징과 보증이 된다. 세례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인 유대는 성사로써 성화된다.
- 2361 “남자와 여자가 부부에게만 허용된 고유하고 배타적인 행위를 통하여,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성은 결코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만이 아니고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와 관련된다. 성은 남자와 여자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사랑의 일부일 경우에만 진정으로 인간적이다.”(105)
- 토비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말하였다. “여보, 일어나구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 사라가 일어나자 그들은 기도하며 자기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였다. 토비야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저희 조상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당신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협력자이며 협조자로 아내 하와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둘에게서 인류가 나왔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들은 “아멘, 아멘.” 하고 함께 말하였다(토빗 8,4-8).
- 2362 “부부가 친밀하고 정결하게 서로 결합하는 행위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행위이다. 참으로 인간다운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그러한 행위는 상호 증여를 뜻하고 북돋우며,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서로 풍요롭게 한다.”(106) 성은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다.
- 창조주께서 몸소……출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부부가 육체와 정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맛보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이 즐거움을 추구하고 이를 향유하는 일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께서 그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부는 올바른 절제의 한도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107)
- 2363 부부의 육체 결합으로 혼인의 두 가지 목적, 곧 부부 자신들의 선익과 생명의 전달이 실현된다. 혼인의 이 두 가지 의미나 가치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럴 경우, 반드시 부부의 정신 생활이 변질될 것이며, 또한 혼인의 선익과 가정의 장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 남녀의 부부애는 이처럼 신의와 자녀 출산이라는 이중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 부부의 신의
- 2364 “창조주께서 제정하시고 당신의 법칙으로 안배하신, 생명과 사랑의 내밀한 부부 공동체는 인격적인 합의로 맺은 결코 철회할 수 없는 계약으로 세워진다.”(108)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준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을 이룬다. 부부가 자유로이 맺은 이 계약은 그들에게 이 결합을 단일하고 해소될 수 없는 것으로 유지할 의무를 지운다.(10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110)
- 2365 부부의 신의는 약속을 항구하게 지킴으로써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신의를 지키는 분이시다. 혼인성사는 남녀를 당신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의에 참여시킨다. 그들은 부부의 정결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이 신비를 증언한다.
-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젊은 신랑에게 권고한다. “나는 당신을 내 품에 받아들이고, 당신을 사랑하며, 내 생명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덧없는 것이며,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삶에서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을 보장을 받도록 이 세상의 삶을 당신과 함께하는 것이 나의 가장 열렬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나는 당신의 사랑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며, 당신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내게 없을 것입니다.”(111)
- 혼인과 출산
- 2366 자녀 출산은 선물이며, 혼인의 목적 중의 하나이다. 사실 부부 사랑은 본성적으로 자녀 출산을 지향하고 있다. 자녀는 외부에서 부부의 상호 사랑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내어 주는 일의 열매이자 완성으로서, 부부 결합 그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편에 서는”(112) 교회는 “모든 혼인 행위는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의 출산을 목적으로 한다.”(113) 고 가르친다. “교도권이 여러 번 제시한 이 가르침의 근거는 부부 일치와 자녀 출산이라는 혼인 행위의 이중 목적이 지닌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혼인 행위의 이 불가분의 관계는 인간이 스스로 파기하지 못한다.”(114)
- 2367 생명을 전해 줄 소명을 받고 있는 부부는 하느님의 창조 능력과 부성(父性)에 참여한다.(115) “인간 생명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의무는 부부의 고유한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 부부는 이 의무에서 자기들이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의 협력자이며 또한 그 사랑의 해석자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지고 자신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116)
- 2368 이 책임의 독특한 일면은 출산의 조절이다. 부부는 정당한 이유로(117) 자녀 출산에 간격을 두기를 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이 이기주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는 부모의 정당성에 부합하는 것임을 확인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부부는 도덕성의 객관적 기준에 따라서 자신들의 행동을 조절해야 한다.
- 부부의 사랑과 생명 전달의 책임을 조화시키는 행동 방식의 도덕성은 순수한 의향이나 동기 평가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그 도덕성은 인간의 본성과 그 행위의 본질에서 이끌어 낸 객관적 기준, 곧 참사랑이라는 맥락 안에서 상호 증여와 인간 출산의 온전한 의미를 보전하는 그러한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118)
- 2369 “일치와 출산이라는 이 두 가지 본질적인 면을 보전함으로써, 부부 행위는 상호 간의 진정한 사랑과 부모가 되는 인간의 지고한 소명을 향한 의의를 온전히 살리는 것이다.”(119)
- 2370 주기적인 절제, 곧 자기 관찰과 불임 기간의 이용에 바탕을 둔 출산 조절(가족계획)은(120) 도덕성의 객관적 기준에 합치되는 것이다. 이 방법들은 부부의 육체를 존중하고, 그들 사이의 애정을 북돋우며 진정한 자유를 가르쳐 준다. 반면에, “부부 행위를 앞두고, 또는 행위 도중에, 또는 그 자연적인 결과의 진행 과정 중에, 출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수단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121) 근본적으로 악이다.
- 남편과 아내가 서로 완전히 자신을 내어 줌을 표현하는 본래의 언어가 피임이라는 객관적으로 모순된 언어, 곧 자신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바치는 것을 거부하는 언어로써 덮씌워진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개방성을 적극적으로 거부함과 아울러 인간 전체를 바치도록 되어 있는 부부 사랑의 내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출산 주기법과 피임 간의 인간학적 도덕적 차이점을 파악하고 더욱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차이점은 보통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인격과 성이라는 두 개의 융화하기 어려운 개념에 관련된다.(122)
- 2371 “인간의 생명과 그 전달 임무는 현세에만 국한되고 또 현세에서만 측량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아야 한다.”(123)
- 2372 국가는 국민의 복지에 책임을 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가 국민의 인구 조절의 방향을 주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국가는 권위적이고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 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 국가는 자녀의 출산과 교육의 첫째 책임자인 부부의 주도권을 정당하게 대신할 수 없다.(124) 이 영역에서 국가가 도덕률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개입하는 것은 불가하다.
- 자녀라는 선물
- 2373 성경과 교회의 전통적 관습은 많은 자녀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복과 부모의 헌신이 드러나는 표징으로 본다.(125)
- 2374 자녀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부의 고통은 크다. “주 하느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는 자식 없이 살아가는 몸입니다.”(창세 15,2) 하고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묻는다. 라헬도 그녀의 남편 야곱에게 “나도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 버리겠어요.”(창세 30,1) 하고 외친다.
- 2375 인간의 불임을 줄이기 위한 연구는 장려해야 한다. 다만 그 연구에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인간을 위한 것이라야 하고,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참되고 온전한 선익을 위한 연구라야 한다는”(126) 조건이 전제된다.
- 2376 부부가 아닌 제삼자의 개입(정자나 난자의 제공, 자궁 대여)으로 부부의 분리를 유발하는 기술은 매우 파렴치한 일이다. (이종[異種]의 인공 수정과 착상 같은) 그러한 기술은 혼인으로 맺어지고 부모라고 알고 있는 남녀에게서 태어날 아기의 권리를 침해한다. 이 기술은 “오로지 서로를 통하여 부모가 되는 부부의 배타적인 권리”(127) 를 저버린다.
- 2377 이런 기술들은 오로지 부부 사이에서만 쓰인다면(동종[同種]의 인공 수정과 착상), 아마도 덜 비난할 만한 것이 될지는 몰라도,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 기술은 성행위를 출산 행위에서 분리시킨다. 이 경우에 아기가 생겨나게 하는 행위는 더 이상 두 사람이 서로를 내어 주는 행위가 아니라, “의사나 생물학자의 기술에 배아의 생명과 신원을 내맡기는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기술이 인격적 인간의 기원과 운명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런 기술의 지배야말로 부모나 자녀에게 공통적이어야 할 존엄성과 평등의 원칙을 거스르는 일이다.”(128)
- “도덕적 견지에서 볼 때, 부부의 일치를 특정하게 표현하는 부부의 독특한 행위의 결과가 아닌 출산은 출산 고유의 도덕적 측면에서 온전성이 결여된 것이다.……부부 행위의 참뜻과 인간의 유일성에 대한 존중의 상관관계가 존중될 때에만 인간 품위에 알맞는 출산이 가능한 것이다.”(129)
- 2378 자녀는 당연한 어떤 것이 아니라 선물이다.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은 인간이다. 자녀는 소유물일 수 없다. 이른바 ‘자녀를 가질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자녀를 소유물로 보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서는 자녀만이 참된 권리를 갖는다. 곧, 자녀는 “부모에게 고유한 부부 사랑의 행위가 맺는 결실이 되는 권리와, 또한 임신되는 순간부터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130) 를 가지고 있다.
- 2379 복음은 육체적 출산 불능이 절대적 악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의학적인 모든 정당한 수단을 동원한 후에도 임신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부부는 모든 영적 출산의 근원인 주님의 십자가와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타인에게 필요한 봉사를 함으로써 그들의 헌신을 드러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