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
- 제 2 부 십 계 명
제 2 부 십 계 명
- 십계명
- [ 탈출기 20, 2-17 ]
- 0)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 1)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 2)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 3)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 4)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 5) 살인해서는 안 된다.
- 6) 간음해서는 안 된다.
- 7)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 8)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 9)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 10)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 [ 신명기 5,6-21 ]
- 0)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 1)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 2)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 3)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 4)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 5) 살인해서는 안 된다.
- 6) 간음해서는 안 된다.
- 7)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 8) 이웃에게 불리한 허위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 9) 이웃의 아내를 탐내서는 안 된다.
- 10) 이웃의 재산은 무엇이든지 욕심내서는 안 된다.
- [ 기도서* ]
- 0)
- 1)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 2)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 3)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 4) 사. 부모에게 효도하라
- 5)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 6) 육. 간음하지 마라.
- 7)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 8)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 9)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 10)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 “스승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2052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젊은이에게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을 ‘선하신 단 한 분’으로, 곧 ‘최고선’, 모든 선의 근원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하시고, 이웃에 관한 계명들을 열거하시면서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들을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요약하셨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마태 19,16-19).
- 2053 예수님께서는 이 첫째 대답에 바로 둘째 대답을 덧붙이신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 이 둘째 대답은 첫째 대답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포함한다.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다.(1) 오히려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신 그 스승의 인격에서 율법을 재발견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공관 복음서에서, 부자 청년에게 제자로서 순명하고 계명을 지킴으로써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은, 가난과 정결에 대한 요청과 붙어 있다.(2) 복음적 권고는 계명들과 뗄 수 없는 것이다.
- 2054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받아들이셨을 뿐 아니라, 십계명의 말마디에서 성령의 힘을 뚜렷이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3) 이방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4) 의로움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의 요구들을 넓히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 2055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라는 질문을 받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5) 십계명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이 단일한 이중 계명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9-10).
- 성경의 십계명
- 2056 ‘십계명’(Decalogus)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열 마디 말”(탈출 34,28; 신명 4,13; 10,4)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열 마디 말”을 거룩한 산에서 당신 백성에게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모세가 쓴 다른 법령들과는(6) 달리 “손수”(7) 쓰셨다. 십계명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들’이다. 이 계명들은 탈출기와(8) 신명기에(9) 씌어져 우리에게 전해졌다.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십계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10)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완전한 의미가 계시될 것이다.
- 2057 십계명은 먼저, 구약에서 중심이 되는 하느님의 위대한 해방 사건인 이집트 탈출 사건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금지 곧 부정적인 계명으로 표현되었건,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처럼) 긍정적인 계명으로 표현되었건, 십계명은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삶의 조건들을 가리키고 있다. 십계명은 생명의 길이다.
-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신명 30,16).
- 십계명이 지닌 이 해방하는 힘은, 예를 들어, 이방인들과 노예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안식일의 휴식에 대한 계명에서 드러난다.
-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신명 5,15).
- 2058 십계명은 하느님의 법을 요약하고 선포한다. “주님께서는 구름이 덮이고 어두운 산 위 불 속에서, 큰 소리로 너희 온 회중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아무것도 보태지 않으셨다. 그리고 두 돌 판에 이 말씀을 쓰시어 나에게 주셨다”(신명 5,22).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돌 판을 “증언판”(탈출 25,16)이라고 부른다. 과연 그 돌 판에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서로 맺은 계약의 조목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증언판”(탈출 31,18; 32,15; 34,29)은 “궤”(탈출 25,16; 40,1-3) 속에 넣어 두어야 했다.
- 2059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직접 나타나시어 선포하신 것이다(“그 산 위 불 속에서 너희와 얼굴을 마주 보고 말씀하셨다.”, 신명 5,4). 이 십계명은 당신 자신과 당신 영광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이다. 십계명이라는 선물은 바로 하느님 자신과 당신의 거룩한 뜻을 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심으로써, 백성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
- 2060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과 율법은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일부를 이룬다. 탈출기에 따르면, 백성이 이 십계명의 계시를 받은 것은, 하느님께서 계약을 제안하시고(11) 체결하시는(12) 그 중간에 이루어진다. 백성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실행하고” 거기에 “따르기로”(13) 약속한 후, 비로소 계약이 체결된 것이다(“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호렙에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셨다.”, 신명 5,2).
- 2061 계명은 계약 안에서 그 완전한 의미를 얻게 된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의 윤리적 행동은 계약 안에서 그리고 계약을 통해서 그 본래의 모든 의미를 갖게 된다. 십계명의 첫 마디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주도적인 사랑을 상기시켜 준다.
- 죄에 대한 벌로, 인간은 자유의 낙원에서 이 세상의 종살이로 옮겨 왔다. 이러한 이유로 십계명의 첫 마디, 곧 하느님의 열 마디 말씀의 첫 조목은 자유에 관한 것이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신명 5,6).(14)
- 2062 계명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차적인 것이다. 계명은 계약의 성립으로 하느님께 속한 인간 조건을 말해 주고 있다. 윤리적인 삶은 주도적인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알아 뵙고 그분께 바치는 충성이며, 감사의 예배 행위이고, 하느님께서 역사를 통해 추진하시는 계획에 협력하는 것이다.
- 2063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과 대화에서는, 하느님께서 일인칭으로(“나는 주 하느님이다.……”), 모든 의무를 다른 한 주체(“너는……”)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모든 계명에서는 단수 이인칭 대명사로 상대방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그리고 동시에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신다.
- 주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시고 이웃에 대한 정의를 가르치시어, 인간이 의롭지 못하여 하느님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십계명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과 벗이 되고 이웃과는 화목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십계명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강생하셨다는 사실로 이 계명들이 폐지되기는커녕,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더욱 충만하게 드러났고 또한 깊어졌습니다.(15)
- 교회 전통 안에서 본 십계명
- 2064 교회의 성전은 성경에 충실한 가운데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십계명의 근본적인 중요성과 의미를 인정해 왔다.
- 2065 아우구스티노 성인 이래로, 십계명은 예비 신자들과 신자들의 교리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15세기에는 십계명을 운율을 띤, 그러면서 기억하기 쉽고, 적극적인 형태의 문구로 표현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러한 문구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교회의 교리서들은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종종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설명해 왔다.
- 2066 십계명의 분류와 번호 매김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해 왔다. 이 교리서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정하여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 된 십계명의 분류를 따른다. 루터 교파들도 이 분류를 따른다. 그리스 교부들의 분류는 조금 다른데, 오늘날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단들에서 사용하고 있다.
- 2067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요구를 표현하고 있다. 처음 세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관련되고, 다른 일곱 계명은 이웃 사랑과 관련되는 것이다.
-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율법과 예언서 전체를 요약하는 사랑의 두 계명처럼……, 십계명 자체도 두 개의 돌 판에 담겨서 주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세 계명이 한 판에 씌어졌고, 일곱 계명은 다른 판에 씌어졌던 것입니다.(16)
- 2068 트리엔트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십계명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며, 의화된 이들도 이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17)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를 재확인한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주님에게서 만민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받는다. 이는 모든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아 또 계명을 지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8)
- 십계명의 단일성
- 2069 십계명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각 ‘계명’은 다른 각 계명들과 그리고 계명들 전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이 계명들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 안에 있다. 두 돌 판은 서로를 비추며, 유기적인 단일성을 이룬다. 한 계명을 어기는 것은 다른 계명 모두를 어기는 것이다.(19)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없다. 그리고 하느님의 피조물인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흠숭할 수 없다. 십계명은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합시켜 준다.
- 십계명과 자연법
- 2070 십계명은 하느님의 계시에 속한다. 동시에 십계명은 우리에게 참다운 인간성도 가르쳐 준다. 십계명은 기본적인 의무들을 명확하게 밝혀 줌으로써, 간접적으로는, 인간 본성에 속하는 기본 권리들도 명확하게 밝혀 준다. 십계명은 ‘자연법’의 탁월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
-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법의 법규들이 뿌리내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었습니다.─이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그리고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20)
- 2071 이성만으로도 알 수는 있으나,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계시해 주셨다. 죄 많은 인류가 자연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고 명확하게 알려면, 이러한 계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 죄의 상태에서는 이성의 빛이 흐려지고 의지가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십계명을 완전하게 제시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21)
-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계시와 도덕적 양심의 목소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인식한다.
- 십계명의 의무
- 2072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그 기본 내용들에서 중대한 의무를 계시해 준다. 그 계명들은 본질적으로 불변하며, 언제 어디서나 지킬 의무가 있다. 아무도 이 의무를 면제해 줄 수 없다.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 주신 것이다.
- 2073 계명을 따르는 것은, 그 자체가 가벼운 문제에 대해서도 지킬 의무를 부과한다. 다섯째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는 욕설은 그 자체로 중죄는 아니지만 상황이나 의향에 따라서 중죄가 될 수도 있다.
-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207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여기서 말하는 열매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풍요로워지는 삶의 거룩함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신비에 참여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면, 구세주께서 몸소 우리 안에서 당신의 아버지와 당신의 형제들, 곧 우리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러 오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행실의 살아 있는 내적 규범이 되신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 간추림
- 2075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6-17).
- 207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행동과 말씀으로 십계명의 영속성을 입증하셨다.
- 2077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은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 안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이 계약 안에서, 이 계약을 통해 그 참된 의미를 갖게 된다.
- 2078 성경에 충실한 가운데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교회의 성전은 십계명의 원초적인 중요성과 의미를 인식해 왔다.
- 2079 십계명은 각 ‘말씀’ 또는 ‘계명’이 전체와 관련을 맺는 유기적 단일성을 이루고 있다.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이다.(22)
- 2080 십계명은 자연법의 골자를 탁월하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십계명을 알게 된다.
- 2081 십계명은 그 기본 내용에서 중대한 의무들을 명확히 밝혀 준다. 계명의 준수는 의무의 문제와 관련이 되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의무도 포함한다.
- 2082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당신 친히 은총으로 실천 가능하게 해 주신다.
- 제 1 장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208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이 말씀으로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1)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장엄한 부르심에서 울려 나오는 말씀이다.
-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 십계명은 먼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언급한다. 이어서 계명들은 인간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사랑의 응답을 제시한다.
- 제1절 첫째 계명
-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 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탈출 20,2-5).2)
-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마태 4,10).
- I.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섬겨라”
- 2084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었다.”(신명 5,6)고 말씀하시는 그 백성의 역사 안에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며 해방시켜 주시는 당신의 행업을 상기시키심으로써 당신을 알리신다. 첫째 말씀에는 율법의 첫째 계명이 담겨 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그 어떤 신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신명 6,13-14). 하느님의 첫째 요청과 정당한 요구는 인간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흠숭하라는 것이다.
- 2085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께서는 먼저 당신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신다.(3) 인간의 소명과 진리에 관한 계시는 하느님에 관한 계시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26) 창조되었으니, 이에 걸맞게 자신의 행업으로써 하느님을 드러내는 소명을 받았다.
- 트리폰 씨, 태초로부터……우주를 창조하고 질서 지어 주신 신 외에 다른 신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며, 태초부터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느님께서 당신들의 신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조상들을 “그분의 힘있는 손과 팔을 들어”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어떤 신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당신들과 같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4)
- 2086 “첫째 계명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포함한다. ‘하느님’이라고 하면, 한결같고 변함이 없으며 항상 동일하신 분, 성실하고 악이 전혀 없는 온전히 의로우신 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그 누가 전능하고 인자하며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한 호의와 애정을 생각하면, 누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계명의 시작과 끝에 ‘나는 주님이다.’라고 반복하신다.”(5)
- 믿음
- 2087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계시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안에 우리 윤리 생활의 원천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의 순종’을(6) 첫째 의무로 명시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모든 도덕적 탈선의 시작이고 이유라고 설명한다.(7)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그분을 믿고 그분을 증언하는 것이다.
- 2088 첫째 계명은 현명하고 조심스럽게 우리의 믿음을 기르고 지키며, 믿음과 대립되는 모든 것을 물리칠 것을 요구한다. 믿음을 거슬러 짓는 죄에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다.
- 믿음에 대한 고의적 의심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시고 교회가 믿으라고 제시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를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의심하는 것은 믿기를 망설이거나, 신앙에 대한 반론이나 신앙의 어두움으로 생겨나는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심을 고의적으로 키우면, 정신적으로 소경이 된다.
- 2089 불신은 계시 진리를 무시하거나 그것에 동의하기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단(異端)이란 세례 받은 후 거룩한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어떤 진리를 완강히 부정하거나 완고히 의심하는 것이고, 배교(背敎)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부 포기하는 것이며, 이교(離敎)란 교황에게 순종하거나 그에게 속하는 교회 구성원들과 친교 맺기를 거부하는 것이다.”(8)
- 희망
- 2090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을 부르실 때,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사랑에 온전히 응답할 수 없다. 인간은 그 사랑에 응답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의 계명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께서 주시기를 바라야 한다. 희망은 하느님의 복과 지복 직관을 확신에 넘쳐 기다리는 것이다. 희망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벌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 2091 첫째 계명은 희망을 거스르는 죄, 곧 절망이나 자만과도 관련된다.
- 절망으로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고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시거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버린다. 절망은 하느님의 선함과 의로움과(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성실하시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로움을 거스르는 것이다.
- 2092 자만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늘의 도움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자만하는 형태도 있고, (회개하지 않고도 하느님의 용서를 얻고 공로 없이도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를 과신하는 형태도 있다.
- 사랑
- 2093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진실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라는 요청과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보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명한다.(9)
- 2094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여러 가지로 죄를 지을 수 있다. 무관심은 하느님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 사랑의 힘을 부인하는 것이다. 배은은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지도 않고, 사랑으로 보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냉담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주저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며, 그 역동적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영적 게으름(acedia)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혐오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증오는 교만에서 비롯된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부인하고, 하느님을 죄를 엄단하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 여겨 저주하는 것이다.
- II. “오직 하느님만을 섬겨라”
- 2095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덕(virtus theologalis)은 윤리덕을 형성하고 윤리덕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사랑은 우리가 피조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게 한다. 경신덕(敬神德)은 우리에게 그러한 태도를 갖게 해 준다.
- 흠숭
- 2096 경신덕에 따른 행위 가운데 첫째가는 것은 흠숭이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창조주요 구세주로, 주님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신명 6,13)를 인용하시어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8) 하고 말씀하셨다.
- 2097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그분을 존경하며 온전히 순명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의 허무’를 인정하는 것이다. 흠숭은 마리아께서 노래하셨듯이, 하느님께서 큰일을 하셨고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시다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면서, 하느님을 찬미 찬송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10)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폐쇄하는 데에서, 죄의 속박에서, 세상의 우상 숭배에서 해방된다.
- 기도
- 2098 첫째 계명이 명하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행위는 기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높이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 흠숭의 표현이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 전구와 청원의 기도가 바로 그러하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 희생 제사
- 2099 하느님께 흠숭과 감사, 탄원과 일치의 표징인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거룩한 친교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행하고 또 그럼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행위는 참다운 제사이다.”(11)
- 2100 진실한 제사가 되려면, 외적 제사는 영적 제사의 표현이어야 한다. 곧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시편 51[50],19)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내적으로 참여하지 않거나(12) 이웃 사랑과 상관없이 바쳐지는 제사를(13) 자주 비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상기시키신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12,7).(14) 유일하고 완전한 제사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그 제사이다.(15) 예수님의 희생 제사와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할 수 있다.
- 약속과 서원
- 2101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하느님께 약속을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다. 세례와 견진, 혼인과 성품성사에는 언제나 약속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 신심으로 특정 행위와 기도, 자선과 순례 등을 하느님께 약속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린 약속에 충실함은 지존하신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과 성실하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 2102 “서원, 곧 가능하고 더 좋은 선에 관하여 심사숙고하고 자유로이 하느님께 맺은 약속은 경신덕으로 이행되어야 한다.”(16) 서원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거나 어떤 선한 일을 하느님께 약속하는 신심 행위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서원을 이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약속하고 봉헌한 것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이 한 서원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17)
- 2103 교회는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겠다는 서원의 모범적 가치를 인정한다.(18)
- 어머니인 교회는 그 품 안에서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구세주의 자기 비움을 더욱 철저히 따르고 더욱 명백히 보여 주며, 하느님 자녀들의 자유 안에서 가난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 그들은 곧 순종하시는 그리스도를 더욱더 완전히 닮고자, 계명의 척도를 넘는 완덕의 문제에서 하느님 때문에 사람에게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19)
- 어떤 경우에는 교회가 합당한 이유로 서원과 약속을 관면할 수 있다.(20)
- 종교의 사회적 의무와 종교 자유에 대한 권리
- 2104 “모든 사람은 진리, 특히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관한 진리를 탐구하며, 깨달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지켜야 한다.”(21) 그 의무는 “인간 본성 그 자체”에서(22) 생기는 것이다. 그 의무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23) 여러 종교에 대한 꾸밈없는 존경을 배척하지 않으며, “신앙의 오류나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과 지혜와 인내로 대하도록”(24) 그리스도인들을 촉구하는 사랑의 요구와도 상반되지 않는다.
- 2105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의무는 인간에게 개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종교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의무에 관한 가톨릭의 전통 교리”(25) 이다.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는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정신, 풍습, 법률, 구조 등을 그리스도 정신으로 충만하게 하도록”(26) 힘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는 각 사람 안에 있는 참된 것과 선한 것을 존중하고 일깨우는 것이다. 이 의무는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 안에 유일하고 참된 종교의 예배가 있음을 알릴 것을 그들에게 요구한다.(27)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28) 이처럼 교회는 모든 피조물, 특히 인간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왕권을 드러낸다.(29)
- 2106 “종교 문제에서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받지 않아야 하고, 또한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혼자서나 단체로, 정당한 범위 안에서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데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30) 이 권리는 인격 자체의 본성에 근거하는 것이며, 인간은 인격의 존엄성에 따라 세속의 질서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진리에 자유롭게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에 따라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자유의 권리를 지닌다.”(31)
- 2107 “국민의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법 질서 안에서 한 종교 단체에 특수 지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동시에 모든 시민과 종교 단체의 종교 자유의 권리를 반드시 인정하고 존중하여야 한다.”(32)
- 2108 종교 자유의 권리는 오류를 지지하라는 허락도 아니고,(33)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권리도 아니며,(34) 다만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다. 이 권리는 종교 문제에서 정당한 한계를 지킬 때 정치권력으로부터 외적인 구속을 받지 않을 권리이다. 이 타고난 권리는 “사회의 법적 제도 안에서 인정되어 국민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35)
- 2109 종교 자유의 권리는 그 자체로 무제한적일 수 없고,(36) 그저 단순히 “실증주의적으로나 자연주의적으로” 이해된 공공질서만으로 제한될 수도 없다.(37) 종교 자유에 내재하는 ‘정당한 한계’는 각 사회의 상황에 맞게 정치적으로 신중하게, 공동선의 요청에 따라 정해지고, “객관적인 도덕 질서에 부합하는 법률 규범”(38) 에 따라 국가 권위가 인정해야 한다.
- III.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 2110 첫째 계명은 자신을 당신 백성에게 드러내신 유일하신 주님 외에 다른 신들을 공경하는 것을 금한다. 첫째 계명은 미신과 불경(不敬)을 금한다. 어느 면에서 미신은 정도(正道)를 벗어난 경신을 말하는 것이며, 경외심이 부족하여 생기는 불경은 경신덕과 상반되는 악이다.
- 미신
- 2111 미신은 종교심과 종교심이 요구하는 실천에서 빗나가는 이탈이다. 미신은 또한 우리가 참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의 형태로 치장될 수 있다. 예컨대, 본래는 정당하거나 필요한 종교적 실천 행위에다 일종의 마술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기도나 성사들이 요구하는 마음가짐을 경시하면서 그 외적인 요소들에만 효력을 부여하는 일도 미신에 빠지는 것이다.(39)
- 우상 숭배
- 2112 첫째 계명은 다신교를 단죄한다. 첫째 계명은 인간에게 하느님 밖에 다른 신들을 믿지 말 것과,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밖에 다른 신들을 공경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성경은 우상들에 대해 이렇게 거부할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저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 사람 손의 작품이라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나이다”(시편 115[113 하],4-5). 이러한 헛된 우상들은 인간을 공허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도 신뢰하는 자들도, 모두 그것들과 같네”(시편 115[113 하],8).(40) 이와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살게 하시고 역사에 개입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여호 3,10)이시다.(41)
- 2113 우상 숭배는 단지 이교(異敎)의 그릇된 예배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우상 숭배는 신앙에 끊임없는 유혹이 된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것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잡신이나 마귀(예를 들어 악마 숭배), 권력, 쾌락, 인종, 조상, 국가, 재물 등 인간이 하느님 대신에 어떤 피조물을 숭배하고 공경한다면 이는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순교자들이 “짐승”을(42) 섬기지 않으려고, 짐승을 예배하는 것을 흉내내는 것까지도 거부하여 죽어 갔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께서 유일한 주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양립될 수 없다.(43)
- 2114 인간의 삶은 한 분뿐이신 하느님에 대한 흠숭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 유일하신 주님을 흠숭하라는 계명은 인간을 단순하게 하고 끝없는 분열에서 구한다. 우상 숭배는 인간 본성인 종교심의 타락이다. 우상 숭배자는 “하느님보다는 다른 어떤 것에 하느님이라는 불멸의 개념을 부여하는”(44) 자이다.
- 점과 마술
- 2115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이나 다른 성인들에게 미래를 계시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미래와 관련된 모든 것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겨 드리고, 이에 대한 불건전한 호기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 일은 무책임한 과오가 될 수 있다.
- 2116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 사탄이나 마귀들에게 의뢰하는 것,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 미래를 ‘꿰뚫어 본다’고 하는 그릇된 추측 등이 그러한 예이다.(45) 탄생 별자리를 믿는 것, 점성술, 손금, 전조(前兆)와 운명에 대한 해석, 환시 현상, 점쟁이(무당)에게 물어보는 일 등에는 시간과 역사, 나아가서는 인간까지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능력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당연히 하느님 한 분께만 드려야 하는, 사랑의 경외심이 포함된 영예와 존경을 거스르는 것이다.
- 2117 신비로운 능력들을 복종시켜 뜻대로 사용하고, 이웃에게 ─ 비록 이웃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려고 할지라도 ─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마술이나 요술 행위는 경신덕에 크게 위배되는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들이 남에게 해를 입히려는 의향을 지녔거나 마귀의 개입을 청하는 것이라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부적을 지니는 것도 비난받을 일이다. 강신술에는 흔히 점이나 마술 행위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그러한 행위를 멀리하도록 가르친다. 민간요법이라고 일컫는 치료법을 쓰면서 악한 능력의 힘을 비는 일이나 다른 이들의 잘못된 믿음을 악용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 불경
- 2118 하느님의 첫째 계명은 불경의 주요한 죄들을 단죄한다. 말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 신성 모독죄와 성직 매매(simonia)가 그러한 죄들이다.
- 2119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말이나 행실로써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위에서 뛰어내리도록 시험하여 하느님께 행동을 강요했다.(4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신명 6,16)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론을 펴신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시험하는 데 포함되는 도전은 우리의 창조주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과 신뢰를 해치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는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섭리와 권능을 의심하는 것이 늘 포함되어 있다.(47)
- 2120 독성은 성사와 전례 행위 그리고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과 물건과 장소를 모독하거나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특히 성체를 모독했을 때에는 중죄가 된다. 그것은 이 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실체적으로 현존해 계시기 때문이다.(48)
- 2121 성직 매매는(49) 영적인 것을 사거나 파는 행위이다. 마술사 시몬은 사도들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영적인 능력을 보고서 이를 사들이려고 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사도 8,20). 이로써 베드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5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 영적인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삼거나, 그에 대한 소유자나 주인으로 행세해서는 안 된다. 그 영적 재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을 수밖에 없다.
- 2122 “성직자는 성사 집전을 위하여 관할권자가 정한 봉헌금밖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하며, 가난한 이들이 가난 때문에 성사의 도움이 박탈되지 아니하도록 항상 주의하여야 한다.”(51) 관할권자는 이 ‘헌금’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직자들의 생계를 보조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정한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10).(52)
- 무신론
- 2123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따라서 무신론은 현대의 극히 중요한 문제로 여겨야 한다.”(53)
- 2124 무신론이라는 용어는 매우 다양한 현상들을 일컫는 말이다. 무신론의 흔한 형태의 하나는 자신의 필요와 갈망을 공간과 시간에 한정하는 실천적 유물론이다. 무신론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목적이 되고 고유한 자기 역사의 유일한 창조자요 형성자”(54) 라는 그릇된 주장을 펼친다. 현대 무신론의 또 다른 형태의 하나는 단지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해방을 통한 인간의 해방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무신론은 “종교는 본질상 이러한 인간 해방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종교가 인간에게 허황된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을 일으켜, 지상 국가의 건설을 외면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5)
- 2125 하느님의 존재를 배격하거나 거부한다는 면에서 무신론은 경신덕을 거스르는 죄이다.(56) 이 죄에 대한 책임은 의향과 정황에 따라 상당히 덜어질 수 있다. 무신론이 생겨나고 확산되는 데는 믿는 이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믿는 이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리기 때문이다.”(57)
- 2126 흔히 무신론은 하느님에 대한 일체의 종속을 거부하기까지 하는,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그릇된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58) 그러나 사실 우리는 “신 긍정이 인간 존엄성에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하느님 안에 기초를 두고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59) 교회는 “자신의 메시지가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열망과 일치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60)
- 불가지론
- 2127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여러 형태를 띠고 있다. 어떤 경우 불가지론자들은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을 계시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가정한다. 또 다른 경우에 불가지론자들은,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며, 하느님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하여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 2128 불가지론은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을 찾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관심주의, 존재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회피, 윤리적 양심의 게으름 등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불가지론은 흔히 실천적 무신론과 같다.
- IV. “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습을 본떠서 만들지 마라……”
- 2129 하느님의 명령에는 인간의 손으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모든 것을 금지하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신명기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 호렙 산 불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으니 매우 조심하여,……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어 타락하지 않도록 하여라”(신명 4,15-16).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계시하신 분은 절대적 초월자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전부’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께서는 그분의 모든 업적보다 위대하시다”(집회 43,27-28).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지혜 13,3)이시다.
- 2130 그런데도, 구약 시대부터, 하느님께서는 강생하신 ‘말씀’으로 성취된 구원을 상징적으로 가리켜 주는 형상들을 만들도록 명령하시거나 허용하셨다. 구리 뱀과(61) 계약의 궤와 커룹(cherubim)(62)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 2131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는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에 근거하여,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에 맞서, 그리스도뿐 아니라 천주의 성모, 천사와 모든 성인의 성화상 공경을 정당화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성화상의 새로운 ‘경륜’을 시작하신 것이다.
- 2132 그리스도교의 성화상 공경은 우상을 금지하는 첫째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성화에 대한 공경은 그 본래의 대상에게 소급되며”(63) “성화를 공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성화에 그려진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64) 성화에 표하는 공경은 존경을 표하는 공경이지 하느님께만 드려야 하는 흠숭이 아니다.
- 성화를 공경하는 행위는, 성화 그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강생하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해 줄 뿐이다. 곧, 성화에 표하는 동작은 성화 그 자체에 표하는 동작이 아니라, 나타내고 있는 분께 표하는 동작이다.(65)
- 간추림
- 2133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 2134 첫째 계명은 인간에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바라고,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 2135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여라”(마태 4,10).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분께 마땅한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께 드린 약속과 서원을 지키는 것은 첫째 계명을 준수하는 경신덕의 행위들이다.
- 2136 하느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의무는 인간에게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관계되는 것이다.
- 2137 인간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종교를 자유로이 신봉할 수 있어야 한다.(66)
- 2138 미신은 우리가 참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신은 우상 숭배, 그리고 점이나 마술 등의 여러 형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2139 말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 신성 모독, 성직 매매 등은 첫째 계명으로 금지된 불경 죄이다.
- 2140 하느님의 존재를 배척하거나 거부하는 무신론은 첫째 계명을 거스르는 죄이다.
- 2141 성화 공경은 하느님 ‘말씀’의 강생 신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첫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 제2절 둘째 계명
-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탈출 20,7).67)
-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3-34).
- I.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 2142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존경할 것을 명한다. 이 계명은 첫째 계명과 마찬가지로 경신덕에 속하는 것이며, 거룩한 것에 대하여, 특히 우리의 언어 사용을 규제한다.
- 2143 계시된 모든 말씀들 가운데 독특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계시하신 것으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신비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신다. 이름은 다만 신뢰하고 절친한 사람에게만 알려 주는 법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한다. 인간은 사랑이 넘치는 흠숭의 정으로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이름을 상기해야 한다.(68) 인간은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고, 찬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자신이 하는 말 중에 하느님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하지 말 것이다.(69)
- 2144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경의는, 하느님 자신의 신비와 하느님의 이름이 상기시켜 주는 거룩함 그 자체에 드려야 하는 경의를 표명한다. 거룩한 것에 대한 지각(知覺)은 경신덕에 속한다.
- 경외심과 거룩함의 감정은 그리스도인다운 것인가 또는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뵙게 된다면 매우 강렬하게 느낄 감정들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될 때 느낄 감정들이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우리가 믿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에게 그러한 감정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한 감정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요, 하느님의 현존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70)
- 2145 신앙인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여 하느님의 이름을 증언해야 한다.(71) 설교와 교리 교육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흠숭과 경의가 흠뻑 깃들어 있어야 한다.
- 2146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금한다. 곧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것을 모두 금하는 것이다.
- 2147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한 약속은 하느님의 명예와 성실과 진실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 약속들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그 약속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쓰는 것이며, 어느 면에서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72)
- 2148 신성 모독은 둘째 계명을 직접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으로나 말로써 하느님을 증오하거나 비난하거나 도발하고, 하느님을 나쁘게 말하며, 그분에 대하여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 등이다. 야고보 사도는 “그 존귀한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한”(야고 2,7) 이를 비난한 바 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언사를 금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인들, 거룩한 물건들을 거스르는 모든 언사에도 해당된다. 죄가 되는 행위를 은폐하고, 백성을 노예로 만들며, 고문이나 살인을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 또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남용하여 죄를 짓는 것은 종교를 거부하게 만든다.
- 신성 모독은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존경과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에 상반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중죄가 된다.(73)
- 2149 모독을 할 뜻이 없더라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는 욕설은 주님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마술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금한다.
- 하느님의 위대함과 위엄을 마땅히 존경하며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의 이름은 더 위대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존경심과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부를 때, 그분의 이름은 더 거룩해집니다.(74)
- II.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름
- 2150 둘째 계명은 거짓 맹세를 금한다. 서약이나 맹세는 자신이 확언한 것에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진실성을 보증하려고 하느님의 진실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맹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하는 것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신명 6,13).
- 2151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의무이다.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진리의 기준이시다. 인간의 말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도 또는 하느님을 거스를 수도 있다. 맹세가 진실되고 정당할 때에, 맹세는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 인간의 말이 지닌 관계를 밝혀 준다. 거짓 맹세는 거짓을 가장하려고 하느님을 내세우는 것이다.
- 2152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을 하면서 맹세하거나, 맹세를 하고 나서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 맹세를 한 것이다. 거짓 맹세는 모든 말의 주인이신 분에 대한 경의를 심각하게 저버린 것이다. 맹세로써 악을 저지르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하느님 이름의 거룩함에 반하는 것이다.
- 2153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둘째 계명을 설명하셨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4.37).(75) 모든 맹세는 하느님을 보증으로 내세운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하는 모든 말은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진실성에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다. 말을 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부르는 것은, 그분의 현존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의식하는 일에 걸맞은 일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하느님을 증언하거나 그분을 우롱하는 것이다.
- 2154 바오로 사도를 따라,(76) 교회의 성전은 중대하고 정당한 동기에서 (예를 들어, 법정에서) 하는 맹세와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대립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맹세 곧 진실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진리와 판단과 정의 안에서가 아닌 한 발할 수 없다.”(77)
- 2155 하느님의 이름의 거룩함은, 사소한 일에 그분 이름을 부르지 말 것과, 그것이 부당하게 요구하는 권력에 찬성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만한 상황에서는 맹세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정통성이 없는 세속의 권위가 요구하는 맹세는 거부해도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교회의 일치에 반하는 목적으로 맹세가 요구될 때에는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 III. 세례명
- 2156 세례성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베풀어진다. 세례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을 성화시키며,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부르는 자기의 이름을 세례 때 받는다. 그것은 어떤 성인의 이름, 곧 자기의 주님께 모범적으로 충성을 다 바친 한 제자의 이름일 수 있다. 수호성인은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며 전구를 보장해 준다. ‘세례명’은 그리스도교의 신비나 덕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부모와 대부모와 본당 사목구 주임은 그리스도교적 감정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도록 보살펴야 한다.”(78)
- 2157 그리스도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서 긋는 십자 성호로써 자신의 하루와 기도와 활동을 시작한다. 세례 받은 이는 하루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며, 자신이 아버지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구세주의 은총을 청한다. 십자 성호는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굳세게 해 준다.
- 2158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제 이름으로 부르신다.(79) 모든 사람의 이름은 거룩하다. 이름은 그 사람의 표상이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존엄성의 표시로 존중되어야 한다.
- 2159 주어진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다. 하늘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진 각 사람의 신비하고 독특한 인품이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그 돌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묵시 2,17). “내가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14,1).
- 간추림
- 2160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편 8,2)
- 2161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존경할 것을 명한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 2162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모든 것을 금한다. 신성 모독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이름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 2163 거짓 맹세는 거짓을 믿게 하려고 하느님을 내세우는 것이다.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은, 당신의 약속에 한결같이 충실하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중대한 과오이다.
- 2164 “진실과 필요성과 존경심이 없이는 창조주의 이름으로나 피조물의 이름으로도 맹세하지 마라.”(80)
- 2165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부르는 자기의 이름을 받는다. 부모와 대부모와 본당 신부는 그가 세례명을 받도록 보살펴야 한다. 수호성인은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 주며, 전구를 보장해 준다.
- 2166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활동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서 긋는 십자 성호로써 시작한다.
- 2167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제 이름으로 부르신다.(81)
- 제3절 셋째 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8-10).82)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 I. 안식일
- 2168 십계명의 셋째 계명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일깨워 준다. “이렛날은 안식일, 주님을 위한 거룩한 안식의 날이다”(탈출 31,15).
- 2169 이에 대해서 성경은 창조를 상기시킨다.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20,11).
- 2170 성경은 주님의 날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기념일로 제시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5).
- 2171 하느님께서는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의 표로 간직하라고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주셨다.(83)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미하려고, 또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구원 업적을 기리려고 따로 거룩하게 남겨 둔 날, 곧 주님을 위한 날이다.
- 2172 하느님의 행동은 인간 행동의 모범이다. 하느님께서 이렛날 “쉬면서 숨을 돌리셨으니”(탈출 31,17) 인간도 역시 ‘쉬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도 “숨을 돌리게”(84) 해 주어야 한다. 안식일은 사람들이 일상의 일을 멈추고 쉬는 날이다. 이날은 일의 속박과 돈에 대한 숭배에 대항하는 날이다.(85)
- 2173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비난받으시는 일화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날의 거룩함을 어기신 적이 없다.(86)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 권위 있게 올바른 해석을 내려 주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이, “안식일에 악한 일이 아니라 착한 일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87) 단언하시면서, 안식일의 정당성을 확립시켜 주신다. 안식일은 주님 자비의 날이며, 하느님 영광의 날이다.(88)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 II. 주님의 날
-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88[177],24).
- 부활의 날: 새로운 창조
- 우리는 해의 날(일요일)에 모두 함께 모입니다. 이날은 하느님께서 암흑에서 물질을 끌어내시어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유다인들의 안식일 다음 날이면서 또한 주간의 첫째 날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며, 또 이날이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91)
- 2174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마르 16,2)에(89)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첫째 날’로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날은 첫 창조를 상기시킨다. 안식일 다음 날인 ‘여덟째 날’로서(90) 이날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날이 모든 날 중의 첫째 날, 모든 축일 중의 첫째 축일, 주님의 날(he kyriake hemera, dies Dominica), ‘주일’이 되었다.
- 주일 ─ 안식일의 완성
- 2175 주일은 주간마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안식일과는 분명히 구별되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일 의식에 관한 규정을 대체한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통해서, 유다인들의 안식일의 영적인 참의미를 완성하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예고한다. 사실, 율법에 따른 예배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준비하는 것이었으니, 율법에 따라서 행해지던 것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되는 것들을 예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92)
- 옛 질서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주님과 그분의 죽음으로 이날에 우리의 생명은 솟아나게 되었습니다.(93)
- 2176 주일을 경축하는 일은,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자비심을 회상함으로써, “하느님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공적이고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도록”(94) 인간의 마음속에 본래부터 새겨져 있는 윤리적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주일 예배는 구약의 윤리적 규정을 지킬 뿐 아니라 완수하며, 주일마다 창조주이시자 당신 백성의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여 그 주기성과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다.
- 주일의 성찬례
- 2177 주님의 날을 경축하고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교회 생활의 중심이다. “사도전승에 따라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경축하는 주일은 보편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 지켜야 한다.”(95)
-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주님 승천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과 성모 승천 대축일, 성 요셉 대축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그리고 모든 성인 대축일도 지켜야 한다.(96)
- 2178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모이는 관습은 사도 시대의 초기부터 시작된 것이다.(97)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은 다음과 같이 환기시키고 있다.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히브 10,25).
- 성전은 언제나 실질적인 한 권고 말씀을 생생히 전해 준다. “일찍 교회에 나와서 주님께 가까이 가며,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기도 중에 참회하십시오.……하느님의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고, 드려야 할 기도를 마치고 파견을 받기 전에는 떠나지 마십시오.……우리가 자주 말한 바와 같이, 기도와 휴식을 위해 이날이 여러분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98)
- 2179 “본당 사목구는, 그 사목이 교구장의 권위 아래 고유한 목자로서의 본당 사목구 주임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 내에 고정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이다.”(99) 본당은 주일의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서 모든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이다. 본당은 신자들에게 전례 생활의 일반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신자들을 이 전례 거행에 불러 모으며,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선행과 형제애로써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다.(100)
- 그대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집에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모이는 곳이며, 그들은 그곳에서 한마음으로 하느님을 환호합니다. 교회에는 그 외에도 정신의 일치, 마음의 합일, 사랑의 유대, 사제들의 기도 등이 있습니다.(101)
- 주일의 의무
- 2180 교회의 법규는 주님의 법을 명확하게 하고 구체화한다.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의무 축일에 미사에 참례할 의무가 있다.”(102) “미사 참례에 관한 교회 법규는 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오후 4시부터: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74조 1항)에 어디서든지 가톨릭 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103)
- 2181 주일의 성찬례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실천의 기초가 되고 그 실천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중대한 이유(예를 들어, 병이 들었거나 유아를 보살펴야 하는 경우)로 면제되거나 본당 신부에게서 관면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규정된 날에 성찬례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104) 이 의무를 고의적으로 지키지 않는 사람은 중죄를 짓는 것이다.
- 2182 공동으로 거행하는 주일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과 그분과 교회에 충실하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하여 신자들은 신앙과 사랑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들은 함께 하느님의 거룩함과 구원에 대한 자신들의 희망을 증언한다. 그들은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서로를 격려한다.
- 2183 “성직자가 없거나 다른 중대한 이유 때문에 성찬례의 참여가 불가능하게 되면, 신자들은 본당 사목구 성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에서 교구장의 규정에 따라 거행되는 말씀 전례가 있으면 거기에 참여하거나, 또는 개인적으로나 가족끼리, 또는 기회 있는 대로 여러 가족들이 모여서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매우 권장된다.”(105)
- 은총의 날, 휴식의 날
- 2184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듯이”(창세 2,2), 인간의 삶도 노동과 휴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주님의 날이 제정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들의 “가정,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106)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2185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다른 의무 축일에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배, 주님의 날에 맛보는 고유한 기쁨, 자선의 실천, 정신과 육체의 적당한 휴식 등을 방해하는 일이나 활동을 삼가야 한다.(107) 가정에서 필요하거나 사회에 큰 유익을 주는 일은 주일의 휴식 규정의 적용을 면제하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 신자들은 정당한 면제 사유들을 핑계 삼아 신앙과 가정생활과 건강을 해치는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 진리를 사랑하면 거룩한 여가를 찾고, 사랑이 필요하면 올바른 일을 받아들인다.(108)
- 2186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필요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과 고생 때문에 쉴 수 없는 형제들을 기억해야 한다. 주일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심으로써 자선 활동과 병자, 불구자, 노인들에게 겸손하게 봉사하는 데 바쳐져 왔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네 가족과 친지들에게 평일에는 내기 힘들었던 시간을 내 주고 그들을 보살핌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주일은 내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 다져지도록 촉진시켜 주는 반성과 침묵, 교양과 묵상을 위한 때이다.
- 2187 주일과 축일들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서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각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일을 쓸데없이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관습(운동, 외식 등)과 사회적 필요성(공무 등)으로 어떤 이들에게 주일의 노동이 요구될 경우, 각자가 충분한 여가 시간을 갖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자들은, 절제와 사랑으로써, 집단적 여가 활동으로 생겨나는 폭음, 폭식과 폭력을 피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경제 사정이 어렵더라도, 공권력은 시민에게 휴식과 예배를 위한 시간을 보장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고용주들도 고용인들에 대해 공권력과 유사한 의무를 지고 있다.
- 2188 그리스도인은 종교 자유와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존중하면서, 주일과 교회의 축일들이 법정 공휴일로 정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고 존경하며 기뻐하는 모범을 모든 사람에게 공적으로 드러내 보여야 하며, 인간 사회의 영적 생활에 값진 기여를 하는 그들의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 나라의 법이나 다른 이유들로 주일에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우리를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히브 12,22-23)에 참여시켜 주는 이날을 우리네 해방의 날로 지내야 한다.
- 간추림
- 2189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신명 5,12). “이렛날은 안식일, 주님을 위한 거룩한 안식의 날이다”(탈출 31,15).
- 2190 첫째 창조의 완성을 표현하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키는 주일로 대치되었다.
- 2191 교회는 여덟째 날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데, 이날은 마땅히 주님의 날 또는 주일이라고 불린다.(109)
- 2192 “주일은……보편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 지켜야 한다.”(110)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의무 축일에 미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111)
- 2193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의무 축일에, “하느님께 바쳐야 할 예배, 주님의 날의 고유한 기쁨이나 마음과 몸의 합당한 휴식을 방해하는 일과 영업을 삼가야 한다.”(112)
- 2194 주일의 제정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가정,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누리는 데”(113) 에 이바지한다.
- 2195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일을 쓸데없이 남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제 2 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 2196 모든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인가 하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대답하신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상기시킨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 제4절 넷째 계명
-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탈출 20,12).
-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 주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 “하느님의 계명”의1) 중요성을 상기시키셨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친다. “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2) 하신 약속입니다”(에페 6,1-3).
- 2197 십계명의 둘째 돌 판은 넷째 계명으로 시작된다. 이 계명은 사랑의 순서를 가르쳐 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다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전해 준 우리 부모를 공경하기를 바라셨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선익을 위해 권위를 부여하신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고 존중할 의무가 있다.
- 2198 이 계명은 지켜야 할 의무들을 적극적인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이 계명은 생명과 혼인과 세상의 재화와 사람의 말 등을 특별히 존중하는 것과 연관되는 그다음의 계명들을 예고한다. 이 계명은 교회의 사회 교리의 한 기초를 이룬다.
- 2199 넷째 계명은 자녀들에게 부모와의 관계를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 관계가 가장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계명은 또한 친족들에 대한 혈연 관계와도 관련된다. 이 계명은 조부모와 집안 어른들에게 존경과 애정과 감사를 드릴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이 계명은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의무, 고용주에 대한 고용인들의 의무, 윗사람들에 대한 아랫사람들의 의무, 자기네 나라와 그 행정가나 위정자들에 대한 국민의 의무에까지 미친다.
- 이 계명은 부모와 후견인, 스승, 지도자, 행정관, 위정자들과 같이 다른 이들이나 인간 공동체에 권위를 행사하는 모든 사람의 의무를 내포하고 암시한다.
- 2200 넷째 계명을 준수하는 이에게는 보상이 주어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탈출 20,12).(3) 이 계명을 존중함으로써 영적인 열매 외에 평화와 번영이라는 현세적인 열매도 보장받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이 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공동체와 개인들에게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
- I.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가정
- 가정의 본질
- 2201 부부 공동체는 혼인 당사자의 합의로 이루어진다. 혼인과 가정은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그리고 그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 부부의 사랑과 자녀 출산은 그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고 일차적인 책임을 지게 한다.
- 2202 혼인으로 결합된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그들의 자녀들과 더불어 한 가정을 이룬다. 이 제도는 공권력이 인정하는 그 어떤 제도보다 우선하며, 공권력은 가정이라는 제도를 인정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가정은 규범적 기준이 되는 제도이며, 여러 형태의 친족 관계도 가정을 기준으로 하여 정해져야 한다.
- 2203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심으로써 가정을 세우셨고, 가정의 기본 구조를 마련해 주셨다. 가정의 구성원들은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 구성원과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가정은 갖가지 책임과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다.
- 그리스도인의 가정
- 2204 “그리스도인 가정은 교회적 친교의 특수한 표출이고 실현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정 교회’라고 불릴 수도 있고 불려야 한다.”(4)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이다. 신약 성경에도 나타나듯이, 가정이란 교회 안에서 독특한 중요성을 지닌다.(5)
- 2205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사람들의 친교이며,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이루시는 친교의 표지요 형상이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출산과 자녀 교육은 성부께서 하시는 창조 행위의 반영이다. 가정은 그리스도의 기도와 희생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일상적 기도와 하느님 말씀을 읽는 것은 가정 안에서 사랑을 강화시켜 준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복음의 전파자이며 선교사이다.
- 2206 가족 관계는 한 가족이라는 감정과 애정과 관심을 갖게 해 주는데, 이는 특히 가족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다. 가정은 부부의 “화합 그리고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성실한 협력”(6) 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탁월한 공동체이다.
- II. 가정과 사회
- 2207 가정은 사회생활의 근원적 세포이다. 가정은 남녀가 사랑과 생명을 전달하며 헌신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자연적 사회이다.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권위와 안정과 사귐의 생활은 사회에서 누리는 자유와 안전과 형제애의 기초가 된다. 가정은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도덕적 가치를 깨닫고, 하느님을 공경하기 시작하며, 자유의 선용을 배울 수 있는 공동체이다. 가정 생활은 사회생활의 입문이다.
- 2208 가정에서 그 구성원들은 청소년이나 노인, 병자,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책임을 지는 일을 배울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도움을 베풀지 못할 처지에 있는 가정들도 많이 있다. 그럴 때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가정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그 사회에 그들의 어려움을 보살펴 줄 의무가 돌아간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7).
- 2209 가정은 적절한 사회적 조치들로써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 가정들이 그 의무를 다할 처지가 못 되는 곳에서는 다른 사회단체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가정 공동체를 지탱해 줄 의무가 있다.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더 큰 공동체들은 가정의 권리를 빼앗거나 가정생활에 간섭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2210 생명과 사회 복지를 위한 가정의 중요성 때문에(7) 혼인과 가정을 지탱하고 견고하게 해 주어야 할 특별한 책임이 사회에 있다. 국가 권력은 “혼인과 가정의 진정한 특성을 인정하고 보호하고 향상시키며 공중도덕을 수호하고 가정의 번영에 이바지하는”(8) 것을 중대한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 2211 정치 공동체는 가정을 존중하고, 돌보며, 특별히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가정에 보장해 줄 의무가 있다.
- - 가정을 꾸미고, 자녀들을 출산하며, 부부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자녀들을 양육할 자유,
- - 부부의 유대와 가족 제도의 안정성 보호,
- - 각자의 신앙을 고백하고 전파하며, 필요한 수단과 제도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녀들을 자기네 신앙 안에서 양육할 자유,
- - 사유 재산권, 사업을 계획하고 직장과 주택을 가질 권리, 이주할 권리,
- - 국가의 제도에 따라, 의료 혜택과 노인에 대한 보조와 가족 수당을 받을 권리,
- - 안전과 보건에 대한 보호, 특히 마약, 외설물, 알코올 중독 등과 같은 위험에 대한 보호,
- - 다른 가정들과 연합체를 형성하여 국가 권력 앞에 자신들의 대표자를 내세울 수 있는 자유.(9)
- 2212 넷째 계명은 사회 안에 있는 다른 관계들도 명확하게 해 준다. 우리는 우리 형제자매들 안에서 우리 부모의 자녀들을, 우리 사촌들 안에서 우리 조상들의 후손을, 우리 동포들 안에서 우리 조국의 자녀들을, 세례 받은 이들 안에서 우리 어머니이신 교회의 자녀들을, 모든 사람 안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불리기를 바라시는 분의 아들딸들을 본다. 이처럼 우리 이웃과 우리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이웃은 인간 집단의 한 개체로서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밝혀진 그 신원에 따라, 마땅히 특별한 배려와 존중을 받아야 할 ‘그 사람’인 것이다.
- 2213 인간 공동체들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 공동체를 잘 다스리는 것은 권리를 보장하고, 의무를 이행하며, 계약을 성실히 지키는 것 등에 국한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고용주와 고용인, 통치자와 시민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정의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인간의 품위에 맞는 본성적인 선의를 전제로 한다.
- III. 가정 구성원들의 의무
- 자녀의 의무
- 2214 하느님의 부성(父性)은 인간이 지닌 부성의 근원이다.(10) 하느님의 이 부성은 인간이 자기 부모를 존경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 미성년이든 성년이든,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11) 부모와 자녀의 유대 관계에서 생기는 천부적 애정으로 유지된다. 그 존경은 하느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것이다.(12)
- 2215 부모 공경(효도)은, 부모가 생명의 선물로써 자녀들을 세상에 낳고, 사랑과 수고로써 나이와 지혜와 은총이 자랄 수 있게 해 준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마음을 다해 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어머니의 산고를 잊지 마라. 네가 그들에게서 태어났음을 기억하여라. 그들이 네게 베푼 것을 어떻게 그대로 되갚겠느냐-”(집회 7,27-28)
- 2216 자녀가 부모에게 드리는 공경은 참다운 공손과 순종으로 나타난다. “내 아들아,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마라.……그것이 네가 길을 다닐 때 너를 인도하고, 잠잘 때 너를 지켜 주며, 깨어나면 너에게 말벗이 되어 주리라”(잠언 6,20-22). “지혜로운 아들은 교훈을 사랑하지만 빈정꾼은 꾸지람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잠언 13,1).
- 2217 자녀가 부모의 집에서 사는 동안에는 자녀의 선익과 가족의 선익을 위해서 부모가 하는 모든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콜로 3,20).(13) 자녀들은 그들의 교육자들과, 부모들이 그들을 맡긴 모든 사람들의 합당한 명령에도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이, 그러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양심에 따라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고 확신이 선다면 그 명령에 따르지 말아야 한다.
- 자녀들은 성장해 가면서 부모를 늘 공경해야 한다. 부모가 바라는 바를 먼저 알아서 만족시켜 드리고, 기꺼이 부모의 의견을 청하며, 부모의 정당한 훈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녀들은 성인이 되면 부모에 대한 순종의 의무는 벗어나지만, 변함없이 부모를 존경해야 한다. 부모에 대한 존경은 사실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인 하느님 경외에 뿌리를 두고 있다.
- 2218 넷째 계명은 장성한 자녀들에게 부모에 대한 책임을 환기시켜 준다. 자녀들은 힘 자라는 데까지 부모의 노년과 병환 중에, 고독하거나 곤궁한 때에 물질적 정신적인 도움을 드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이 보은의 의무를 일깨우신다.(14)
-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집회 3,2-6).
-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를 버리는 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와 같고, 자기 어머니를 화나게 하는 자는 주님께 저주를 받는다(집회 3,12-13.16).
- 2219 자녀들의 부모 공경은 가정생활 전체를 화목하게 하며, 이는 형제자매들 간의 관계에도 관련이 된다. 부모에 대한 존경은 가정 전체의 분위기를 밝고 따뜻하게 해 준다. “손자들은 노인의 화관이다”(잠언 17,6).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십시오”(에페 4,2).
- 2220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신앙의 선물과 세례의 은총을 받게 해 주고 교회 안에서 살게 해 준 사람들에게 특별히 감사해야 한다. 그들은 부모나 가족 가운데 다른 이들일 수 있고, 조부모, 사목자, 교리 교사, 그 밖의 선생이나 친구들일 수 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2티모 1,5).
- 부모의 의무
- 2221 부부 사랑의 풍요로움은, 자녀 출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윤리 교육과 영적 양육에도 미쳐야 한다. 부모의 교육적 역할은 “매우 중대한 것이어서, 이것이 없으면 거의 보완할 수 없다.”(15) 교육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부모의 기본적이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의무이다.(16)
- 2222 부모는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보아야 하고,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 부모는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에 그들 자신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지키도록 가르친다.
- 2223 부모는 자녀 교육의 첫째가는 책임자이다. 부모는 먼저 애정과 용서와 존경과 성실성과 이해관계를 떠난 봉사를 규범으로 하는 가정을 이룸으로써 그러한 책임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정은 덕을 가르치기에 매우 알맞은 곳이다. 덕성 교육을 위해서는, 모든 참다운 자유의 조건인 자기희생과 건전한 판단력과 자제력의 훈련이 요구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차원을 내적이고 영적인 차원에”(17) 종속시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는 것 또한 부모의 중대한 책임이다.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자신들의 결점을 인정할 줄 안다면, 자녀들을 더 잘 이끌어 주고 고쳐 줄 수 있을 것이다.
- “제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 종종 매를 댄다. …… 그를 자랑으로 삼으리라”(집회 30,1-2).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에페 6,4).
- 2224 가정은 연대 의식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깨우치는 자연스러운 장소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인류 사회를 위협하는 비굴한 타협과 타락을 조심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 2225 혼인성사의 은총으로, 부모는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달할 책임과 특권을 부여받았다. 부모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자신들이 간직한 신앙의 신비를 자녀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최초의 신앙 선포자”(18) 가 된다. 부모는 자녀들이 어린 시절부터 교회 생활에 참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정의 생활 방식은, 평생 동안 간직하게 될 정서적인 성향을 길러 주어, 살아 있는 신앙의 올바른 기초가 되고 기둥이 될 수 있다.
- 2226 부모가 하는 신앙 교육은 자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가정의 구성원들이 복음과 일치하는 그리스도교적 삶을 보여 줌으로써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서로 도울 때, 이미 신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정의 교리 교육은 다른 형태의 신앙 교육들을 선행하고, 수반하며, 풍요롭게 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도록 가르칠 사명을 띠고 있다.(19) 본당은 그리스도인 가정들의 성찬 공동체이며 전례 생활의 중심이다. 본당은 자녀들과 부모들의 교리 교육을 위한 특권을 가진 장소이다.
- 2227 자녀들도 그들 나름대로 자기 부모의 성화에 이바지한다.(20) 모든 이가 저마다 마음 상하게 한 일, 다툰 것, 의롭지 못했던 점, 성실하지 못했던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끊임없이, 서로 용서하여야 한다. 서로의 애정이 이를 권장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를 요구한다.(21)
- 2228 자녀들이 어릴 때, 자녀에게 쏟는 부모의 존중과 애정은 먼저 자기 자녀들을 양육하고 그들의 영육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는 데 기울이는 관심과 정성으로 나타난다. 자녀들이 성장하는 동안에도, 부모는 같은 존중과 헌신으로써 자녀들에게 이성과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도록 가르친다.
- 2229 자녀 교육의 첫째 책임자인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그들의 신념과 일치하는 학교를 선택해 줄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기본적인 것이다. 부모는 할 수 있는 대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교육 임무를 좀 더 잘 수행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학교를 선택할 의무가 있다.(22) 공권력은 부모의 이러한 권리를 보장해 주며, 이 권리 행사를 위한 실질적 조건들을 확보해 줄 의무가 있다.
- 2230 자녀들은 성인이 되면서, 자기 직업과 생활양식을 선택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들은 이러한 새로운 책임들을 부모와 서로 신뢰하는 관계 안에서 기꺼이 받아들이며, 이에 대해 부모의 의견과 조언을 구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는 직업 선택이나 배우자 선택에서 자녀들을 강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신중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부모는 현명한 조언으로써, 특히 자녀들이 가정을 꾸미려고 할 때,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 2231 어떤 이들은 자기 부모나 형제자매들을 돌보려고, 또는 어떤 직업에 더 온전히 전념하려고, 또는 다른 훌륭한 동기들 때문에 혼인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류 가족의 선익에 크게 공헌할 수 있다.
- IV. 가정과 하느님 나라
- 2232 가족의 유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인간적이고 영적인 성숙과 인간의 자율성을 향해 성장하면 할수록, 하느님에게서 오는 그의 독특한 소명도 더 분명하고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 부모는 이 소명을 존중하고, 자녀들이 그 부르심에 따르는 응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소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임을(23) 확신해야 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 2233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 가족의 일원이 되고 예수님의 생활 방식에 따라 살라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 부모는 자기 자녀가 하늘 나라를 위한 동정 생활, 곧 봉헌 생활 또는 사제직 안에서 당신을 따르도록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면,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고 존중하여야 한다.
- V. 시민 사회의 권위들
- 2234 하느님의 넷째 계명은 또한 우리의 선익을 위해 사회 안에서 하느님께 권위를 부여받은 모든 사람도 존경할 것을 명한다. 넷째 계명은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그 공권력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의무도 밝혀 준다.
- 공권력의 의무
- 2235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봉사하기 위해 이를 행사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공권력의 행사는 그 권력의 신적 기원과 합리적인 성격과 그 목적의 특성에 따라서 윤리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아무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법에 어긋나는 것을 명령하거나 입법화할 수 없다.
- 2236 권위 행사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쉽게 자유를 행사하고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하여 올바른 가치 서열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윗사람은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필요와 공헌도를 고려하면서 화합과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분배 정의를 현명하게 실행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정하는 규칙과 조치가 개인적인 이익을 내세워 공동체의 이익을 거스르게 하는 유혹의 빌미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24)
- 2237 정치권력은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정치권력은 모든 사람들의 권리, 특별히 가정과 불행한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인간적으로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여야 한다.
- 시민권에 따른 정치적 권리는 공동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으며 또한 주어져야 한다. 이 권리들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이유 없이 공권력으로써 정지할 수 없다. 정치적 권리의 행사는 국가와 인류 공동체의 공동선을 목적으로 한다.
- 국민의 의무
- 2238 공권력 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윗사람들을 하느님 은혜의 관리자로 그리고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아야 한다.(25)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 자유인으로서 행동하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십시오”(1베드 2,13.16). 시민들의 성실한 협력에는 인격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선익에 해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올바르게 질책할 권리와 때로는 의무까지도 내포되어 있다.
- 2239 국민의 의무는, 진리와 정의의 정신, 연대 의식과 자유의 정신으로 공권력과 함께 사회의 선익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봉사는 감사의 의무와 사랑의 계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합법적 권위에 복종하고 공동선에 봉사하기 위해 국민들은 정치 공동체 안에 살아가면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 2240 공권력에 대한 복종과 공동선에 대한 공동 책임은, 도덕적으로 세금 납부와 투표권 행사, 국토 방위 등을 요구한다.
-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 13,7).
- 그리스도인은 자기 조국에 살고 있지만, 마치 나그네와 같습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외국인같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그들은 기존 법에 순종하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은 법률보다 우월합니다.……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지위는 그렇게 고귀한 것이어서, 그들이 그 지위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26)
-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1티모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감사할 것을 권고한다.
- 2241 부유한 나라들은, 자기 조국에서 얻을 수 없는 안전과 생활 필수품들을 구하러 온 외국인들을 가능하다면 모두 맞아들일 의무가 있다. 공권력은 손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이 그 손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자연법이 잘 지켜지도록 보살펴야 한다.
- 정치권력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공동선을 위해서, 이민의 권리 행사를 여러 가지 법률적인 조건에 종속시킬 수 있다. 특히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에 대한 이주민들의 의무 수행에서 그러하다. 이주민은 그를 받아들이는 나라의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유산을 고마운 마음으로 존중하며, 그 나라의 법을 준수하고, 국가의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
- 2242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이나 기본 인권이나 복음의 가르침 등에 어긋날 때, 시민들은 양심적으로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 공권력의 요구가 올바른 양심의 요구에 어긋날 때, 공권력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복종과 정치 공동체에 대한 복종이 다르다는 데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21).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 공권력의 월권으로 국민들이 억압을 받는 곳에서도, 국민들은 객관적으로 공동선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자연법과 복음이 그어 주는 한계를 지키며 이러한 권력의 남용을 거슬러 자기 자신과 동포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은 정당하다.(27)
- 2243 정치권력의 억압에 대한 저항은 아래의 조건들이 다 함께 충족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무기 사용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 1) 기본권이 확실하고 심각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침해를 받을 때, 2) 다른 수단을 모두 사용하고 난 후에, 3) 더 심한 무질서를 유발할 우려가 없을 때, 4)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일 때, 5)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더 나은 해결책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설 때.
- 정치 공동체와 교회
- 2244 어떤 제도이든지, 은연 중에라도, 인간과 인간의 소명에 대한 시각을 지니고, 그 시각을 판단 기준과 가치 체계와 행동 노선의 근거로 삼는다. 대부분의 사회 제도들은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종교만이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인간의 기원과 목적으로 명확하게 인식해 왔다. 교회는 정치권력들에게 그들의 판단과 결정을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이 진리에 비추어 내리라고 권고한다.
- 이 진리를 무시하거나, 하느님에게서 독립한다는 명목으로 이를 거부하는 사회들은, 그들의 판단 기준과 목적을 자체 내에서 찾거나 어떤 이데올로기에서 이끌어 오게 된다. 또한 역사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선과 악의 객관적 기준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공공연하게든 또는 음험하게든, 전체주의적인 권력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28)
- 2245 “교회는 그 임무와 권한으로 보아 어느 모로도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결코 어떠한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동시에 교회는 인간 초월성의 표지이며 보루이다.”(29) 교회는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와 책임도 존중하고 증진한다.”(30)
- 2246 “교회가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 이때에 교회는 오로지 복음에 일치하고 다양한 시대와 환경에 따라 모든 사람의 행복에 부합하는 모든 방법을 사용한다.”(31) 이것은 교회의 사명에 속하는 일이다.
- 간추림
- 2247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신명 5,16; 마르 7,10).
- 2248 넷째 계명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다음으로 우리의 부모와, 우리의 선익을 위해 당신께서 권위를 부여하신 이들을 공경하기를 원하셨다.
- 2249 부부 공동체는 혼인 당사자의 계약과 합의 위에 세워진다. 혼인과 가정은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그리고 그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
- 2250 “개인의 행복, 일반 사회와 그리스도교 사회의 안녕은 부부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의 행복한 상태에 직결되어 있다.”(32)
- 2251 자녀들은 부모에게 존경과 감사와 올바른 순종과 도움을 드려야 한다. 자녀들의 효도는 가정생활 전체의 조화를 북돋운다.
- 2252 부모는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과 기도와 모든 덕을 가르칠 책임을 일차적으로 지고 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하여 자녀들에게 물질적으로 또 영적으로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 2253 부모는 자기 자녀들의 소명을 중시하고 후원해 주어야 한다. 부모는 그리스도인의 첫째 소명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임을 명심하고 가르쳐야 한다.
- 2254 공권력은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의 행사를 위한 조건들을 존중할 의무를 지고 있다.
- 2255 시민들은 진리와 정의의 정신, 연대성과 자유의 정신으로 공권력과 함께 사회 건설에 힘써야 할 의무가 있다.
- 2256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에 어긋날 때에는 양심에 따라 그 명령에 따르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 2257 모든 사회는 인간과 인간의 최종 목적에 대한 시각을 그 판단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복음의 빛을 떠날 때 사회는 쉽사리 전체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 제5절 다섯째 계명
-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 2258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생성 시초부터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연결되며 또한 모든 생명의 목적이기도 한 창조주와 영원히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무죄한 인간의 목숨을 직접 해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33)
- I. 인간 생명의 존중
- 성경의 증언
- 2259 성경은 형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에서,(34)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원죄의 결과인 분노와 욕망이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 형제 살해의 악랄함을 보고 말씀하셨듯이, 인간이 인간의 원수가 되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창세 4,10-11).
- 2260 하느님과 인류가 맺은 계약은, 하느님의 선물인 인간 생명과 인간의 살인적 폭력성을 잊지 않도록 짜여 있다.
-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 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창세 9,5-6).
- 구약 성경은 항상 피를 생명의 신성한 표지로 여겼다.(35) 이러한 가르침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것이다.
- 2261 성경은 다섯째 계명이 금지하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탈출 23,7). 무죄한 사람을 일부러 살인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황금률과 창조주의 거룩하심을 중대하게 거스르는 것이다. 이러한 살인을 금지하는 법은 예외 없이 유효하다. 이 법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누구나 지켜야 한다.
- 2262 주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살인해서는 안 된다.”(마태 5,21)는 계명을 상기시키시며, 여기에 분노와 증오와 복수하는 일까지 금지하신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뺨을 내밀 것과,(36) 원수를 사랑할 것을(37)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셨으며,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말씀하셨다.(38)
- 정당방위
- 2263 개인이나 집단의 정당방위는, 고의적인 살인죄가 성립되는 무죄한 사람의 살인을 금지하는 데 대한 예외가 아니다. “자기 방어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하나는 자기 생명의 보존이요, 다른 하나는 공격자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39) ……전자만이 의도적인 것이며, 후자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40)
- 2264 자기 사랑은 도덕성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존권을 존중하는 것은 정당하다.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공격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할지라도 살인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 만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방법으로 폭력을 물리친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다.……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적절한 방어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구원에 필요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의 생명을 돌볼 의무가 더 크기 때문이다.(41)
- 2265 정당방위는 권리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책임진 사람에게는 중대한 임무가 될 수 있다. 공동선을 지키려면 불의한 공격자가 해악을 끼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책임에 맡겨진 시민 공동체를 해치는 공격자들을 물리치는 데 무력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
- 2266 인권과 시민 사회의 기본 규범을 손상시키는 행동의 확산을 억제하는 국가의 노력은 공동선 보호 요구에 부합한다. 공권력은 범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부과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형벌의 첫째 목표는 잘못으로 발생한 폐해를 바로잡는 것이다. 죄지은 사람이 이 형벌을 스스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속죄의 효과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형벌은 공공질서와 사람들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다. 형벌은 또한 치유를 위한 것으로서, 되도록 죄지은 사람의 교정에 이바지해야 한다.
- 2267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은, 범죄자의 정체와 책임에 대한 완전한 규명이 전제되고, 불의한 공격자에게서 인간 생명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유일하고 가능한 방법이 오로지 사형뿐이라면, 사형에 의존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 그러나 만일 공격자에게서 사람들의 안전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데 사형이 아닌 방법으로도 충분하다면 공권력은 그러한 방법만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들이 공동선의 실제 조건에 더 잘 부합하기 때문이며, 인간의 품위에 더욱 적합하기 때문이다.
- 오늘날은 참으로 범죄자의 자기 구제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박탈하지 않고서도, 범죄자가 해를 끼칠 수 없게 하여 국가가 효과적으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피고를 사형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는 사건은 “실제로 전혀 없지는 않더라도 매우 드물다.”(42)
- 고의적인 살인
- 2268 다섯째 계명은 직접적이고 고의적인 살인을 중대한 죄로 금하고 있다. 살인자와 살인에 일부러 협력하는 자는 하늘을 향해 복수를 부르짖게 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43)
- 천부의 유대를 파괴하기 때문에, 유아 살해,(44) 형제 살해, 부모 살해와 배우자 살해는 특별히 중한 죄이다. 우생학이나 국민 건강이라는 구실로 행해지는 어떤 살인도, 공권력이 명령하는 것까지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 2269 다섯째 계명은 어떤 사람을 간접적으로나마 죽이려는 의향으로 자행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 도덕률은 중대한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죽을 위험에 놓이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위험에 놓인 사람에게 도움을 거절하는 것을 금한다.
- 인간 사회가 기근으로 사람들이 죽어 가는 데 대하여 구제책을 세우고자 노력하지 않고 묵인하는 것은 파렴치한 불의이며 중대한 죄이다. 폭리를 추구하며 탐욕스러운 행위로 인류 형제의 굶주림과 죽음을 유발시키는 상인들은 간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며, 그 책임은 그들에게 돌아간다.(45)
- 본의 아닌 살인은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적합한 이유 없이 죽음을 초래하게 하는 행동을 했다면, 비록 살해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중죄를 면하지 못한다.
- 낙태
- 2270 인간의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인간은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인간의 권리들을 인정받아야 하며, 그중에는 모든 무죄한 이들의 생명 불가침의 권리도 포함되어 있다.(46)
-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
-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제가 땅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뼈대는 당신께 감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시편 139[138],15).
- 2271 교회는 1세기부터 모든 인위적 낙태를 도덕적인 악으로 단정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은 변하지 않았으며, 불변하는 것으로 존속한다. 직접 낙태, 곧 목적이나 수단으로서 의도한 낙태는 도덕률의 중대한 위반이다.
- 낙태로 태아를 죽이지 말고, 갓난아이를 죽이지도 마시오.(47)
-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생명 보존이라는 숭고한 직무를 인간에게 맡기시어 인간 품위에 알맞은 방법으로 이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생명은 임신 순간부터 최대의 배려로 보호받아야 한다. 낙태와 유아 살해는 흉악한 죄악이다.(48)
- 2272 낙태에 대한 분명한 협력은 중죄가 된다. 교회는 인간 생명을 거스르는 이 죄를 교회법적 벌인 파문으로 제재한다. “범죄 사실 자체로”,(49) 그리고 교회법으로 정해진 조건들에 따라,(50) “낙태를 주선하여 그 효과를 얻는 자는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51)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자비의 영역을 제한하려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이 범죄의 중대함과, 죽임을 당한 무고한 태아와, 그 부모와 그리고 사회 전체에 끼친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 2273 무죄한 모든 개개인의 생명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시민 사회와 그 법률의 기본 요소가 된다.
- “시민 사회와 정치권력은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권리는 어느 개인이나 또는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어느 사회나 국가가 특권으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이며, 사람의 기원이 되는 창조 행위로써 인간 안에 타고난 것이다. 이러한 기본권 가운데, 임신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모든 인간이 갖는 생명권과 육체적 완전성에 대한 권리를 지적해야만 한다.”(52)
- “일단 민법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인권의 보호를 실정법이 어떤 범주의 사람들에게서 박탈한 순간, 국가는 법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개개 시민의 권리, 특히 더 힘이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지 않을 경우 법치 국가의 기초는 흔들리게 마련이다.……임신되는 순간부터 보장되어야 할 출생 전의 아이에 대한 존중과 보호 의무에 따라서, 법은 아이의 권리를 의도적으로 박탈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적절한 법적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53)
- 2274 배아는 임신되는 순간부터 인간 대우를 받아야 하므로, 가능한 대로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보호받고, 보살핌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 산전 진단(産前診斷)은 “배아의 생명과 온전성을 지키고 배아를 하나의 개체로서 보호하거나 치료할 목적으로 행해진다면,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진단 결과에 따라서는 유산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도덕률을 심히 거스르는 것이 된다. 진단이란 사형 선고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54)
- 2275 “인간 배아에 대한 개입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곧 배아의 생명과 온전성을 존중하여야 하고, 배아에게 부적절한 위험이 없어야 하며, 질병 치료, 건강 상태의 호전 또는 개별 태아 자체의 온전한 생존을 지향하는 개입이어야 한다.”(55)
-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생물학적 실험 재료’로 쓰려고 배아를 만들어 내는 일은 부도덕하다.”(56)
- “염색체나 유전 물질을 변화시키려는 일부 시도들은, 치료 목적이 아니라 특정 성(性)이나 미리 정한 다른 기준에 따라서 우수한 인간을 선택적으로 만들어 내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조작들은 인간 존재의 개별적인 존엄성과 온전성, 그리고 (그 유일하고 다수로 복사될 수 없는) 주체성에 어긋나는 것이다.”(57)
- 안락사
- 2276 생명력이 감소되고 쇠퇴되어 가는 사람들을 특별히 존중해야 한다. 병자들이나 신체 장애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아야 한다.
- 2277 동기나 수단이 어떻든, 직접적인 안락사는 신체 장애인, 병자 또는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이다. 안락사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
- 그러므로 고통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죽게 하는 행위나 그 행위를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창조주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한 존중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언제나 단죄되고 배척되어야 하는 이 살인 행위는, 아무리 선의에서 빚어진 오판의 결과라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살인 행위이다.(58)
- 2278 비용이 크게 들고 위험하며 특수하거나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의료 기구의 사용 중단은 정당할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지나친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료 기구 사용을 중단)할 때에는, (환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환자가 자격과 능력을 가졌을 경우에는 환자 본인이 (중단)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법적 보호자들이 결정해야 하는데, 언제나 환자의 타당한 소원과 정당한 이익을 존중하는 가운데 결정해야 한다.
- 2279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환자에게 일반적으로 베풀어야 하는 치료 행위를 중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수명을 단축시킬 위험이 있더라도, 죽어 가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그리고 환자의 죽음을 목적으로나 수단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죽음이 예견되고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된다면, 진통제 사용은 인간의 존엄성에 도덕적으로 부합될 수도 있다. 진통제를 쓰는 치료는 사심 없는 사랑의 행위이다. 따라서 이 치료 행위는 장려되어야 한다.
- 자살
- 2280 사람은 저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생명에 책임을 져야 한다. 생명의 최고 주권자는 바로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생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보존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 2281 자살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영속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 경향에 상반되는 것이다. 또 올바른 자기 사랑에도 크게 어긋난다. 그와 동시에 자살은 이웃 사랑도 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우리가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가정, 국가, 인류 사회와 맺는 연대 관계를 부당하게 파괴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다.
- 2282 만일 자살이 시범적으로, 특히 젊은이들에게 본보기로 행해진다면, 이것은 죄로 이끄는 유혹이라는 매우 악한 표양이 되는 것이다. 자살 방조는 도덕률에 어긋난다.
- 중한 정신 장애나, 시련, 고통 또는 고문으로 겪는 불안이나 심한 두려움은 자살자의 책임을 경감시킬 수 있다.
- 2283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다. 교회는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 II. 인간 존엄성의 존중
- 타인의 영혼 존중: 악한 표양
- 2284 악한 표양(스캔들)은 악을 저지르도록 타인을 이끄는 태도나 행위이다. 악한 표양을 보이는 사람은 이웃을 악으로 이끄는 유혹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덕과 정의에 해를 끼침으로써, 그의 형제를 영적 죽음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다. 만일 어떤 행위나 부작위로 일부러 타인이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게 한다면, 그 악한 표양은 중죄가 된다.
- 2285 악한 표양은, 그것을 보이는 사람의 권위나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의 약함 때문에 특별한 중대성을 띠게 된다. 이 악한 표양은 우리 주님께 다음과 같은 저주를 불러일으켰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 18,6).(59) 본성이나 직무에 따라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악한 표양을 보인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양의 탈을 쓴 이리로 비유하신다.(60)
- 2286 악한 표양은 법이나 제도, 유행이나 여론 등으로 유발될 수 있다.
- 그러므로 풍속의 퇴폐나 종교 생활의 타락, 또는 “고의적이건 아니건 계명에 합치되는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어렵게 하거나 실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들”(61) 로 이끄는 법이나 사회 구조를 촉구하는 사람들은 악한 표양을 보이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부정 행위를 조장하는 규칙을 정하는 기업주들이나,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성나게 하는”(62) 교사들, 그리고 여론을 조작하여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 2287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사용하는 사람은 악한 표양을 보이는 죄를 짓는 것이며,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자기가 조장한 악에 책임이 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루카 17,1)
- 건강 존중
- 2288 생명과 신체의 건강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값진 재산이다. 우리는 타인의 필요와 공동선을 참작하면서 이 재산을 분별 있게 돌보아야 한다.
- 시민들의 건강을 돌보려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게 해 주는 생활 여건, 곧 의식주, 보건, 기초 교육, 직업, 사회복지 등이 갖추어지도록 사회가 도와야 한다.
- 2289 윤리적으로 육신 생명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신 생명이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윤리는 육신의 숭배를 촉진시키고, 육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며, 완벽한 육체와 스포츠의 성공을 우상화하는 경향의 새로운 이교도적 정신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강한 자와 약한 자 중에서 선별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타락시킬 수 있다.
- 2290 절제의 덕은 음식, 술, 담배, 약물의 남용 등 온갖 형태의 과잉을 피하게 한다. 술취한 상태에서나, 속도에 대한 무절제한 취미로 도로나 바다, 하늘에서 타인과 자신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들은 중죄를 짓는 것이다.
- 2291 마약 사용은 인간의 건강과 생명에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 마약 사용은 다만 직접 치료를 위한 처방의 경우가 아니면 중죄이다. 마약의 밀조와 밀매는 파렴치한 행위이며, 이는 도덕률을 심각하게 어기는 행위를 조장하기 때문에 범죄에 직접 협력하는 것이다.
- 인간 존중과 과학 연구
- 2292 개인이나 인간 집단에 대한 과학적, 의학적, 또는 심리학적 실험은 병의 치료나 공중 보건의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
- 2293 기초 과학 연구는 응용 과학 연구와 함께 만물에 대한 인간 지배권의 중요한 표현이 된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데 사용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전인적 발전을 촉진할 때, 이는 귀중한 자원이 된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는 인생의 의미와 인간 발전의 의미를 보여 줄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은 그것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의 도덕적 가치에 비추어, 과학과 기술은 그 궁극의 목적과 한계 범위가 정해지는 것이다.
- 2294 과학 연구와 그 응용에서 도덕적인 중립을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은 환상이다. 반면, 그 방향 결정의 기준들은, 기술의 단순한 효율성이나,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어떤 사람들을 위하는 효용이나, 최악의 경우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등 그 어느 것에서도 추론될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은 그 본질적 의미로 보아서, 도덕의 근본 기준들을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인간과 그 양도할 수 없는 권리, 그리고 그의 참되고 전적인 선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 2295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률에 어긋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와 실험은 그 자체로 정당한 행위일 수 없다. 비록 피실험자들의 동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들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만일 실험 대상자의 생명이나 그 육체적, 정신적 완전성에 피할 수 없는 지나친 위험을 겪게 하는 것이라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또 피실험자나 그 보호자의 명백한 동의 없이 행해지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 2296 장기 이식은 제공자가 겪는 신체적, 정신적 손상과 위험률이 그 장기를 받는 사람이 얻고자 하는 선익과 균형을 이룬다면 도덕률에 부합된다. 죽은 뒤의 장기 기증은 훌륭하고 칭찬받을 일이며 헌신적인 연대의 표징으로서 장려되어야 한다. 장기 이식은 제공자나 그 보호자의 분명한 동의 없이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한 것이라 해도,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적출이나 죽음을 직접 유발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 육체의 완전성에 대한 존중
- 2297 사람을 납치하고 인질로 삼는 것은 사회 안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피랍자를 위협하여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도덕적으로 부당하다. 폭력 행위(테러리즘)는 사람을 무차별로 위협하고 상처를 입히고 죽인다. 폭력 행위는 정의와 사랑에 크게 어긋난다.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서, 죄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반대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증오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육체적 또는 정신적 폭력을 사용하는 고문은 인간 존중과 인간 존엄성에 어긋난다. 엄밀한 의미에서 치료를 위한 처방의 경우가 아니라면 고의적이고 직접적인 수족 절단, 신체 상해, 불임 수술은 도덕률에 어긋난다.(63)
- 2298 과거에는 합법적 정부들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혹 행위들을 다반사로 자행했으며, 이런 경우 흔히 교회의 사목자들은 이에 항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교회의 사목자 자신들도 교회의 법정에서 고문에 관한 로마법의 규정들을 받아들였었다. 이런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교회는 늘 관용과 자비의 의무를 가르쳐 왔으며, 성직자들에게 피 흘리는 일을 금하였다. 근래에 와서, 그 같은 가혹 행위들은, 공공질서를 위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인간의 정당한 권리에 합치하는 것도 아니었음이 명백해졌다. 오히려 그런 행위들은 더욱 나쁜 타락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그런 관습들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하며, 희생자들과 가해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 죽은 이들에 대한 존경
- 2299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에게는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품위 있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들과 가까운 친지들은 기도로써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친지들은 적당한 때에, 병자들이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성사들을 받도록 주선해야 한다.
- 2300 죽은 이들의 시신은 부활에 대한 신앙과 희망 안에서 존경과 사랑으로 다루어야 한다. 죽은 이들을 장사 지내는 것은 신체에 자비를 베푸는 일이며,(64) 이것은 성령의 궁전인 하느님의 자녀들을 명예롭게 하는 일이다.
- 2301 법률 수사나 과학 연구가 그 동기인 시체 해부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죽으면 무상으로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것은 합법적이고 장한 일이다. 육신 부활의 신앙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는 화장을 허락한다.(65)
- III. 평화의 보호
- 평화
- 2302 우리 주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마태 5,21)는 계명을 상기시키심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요구하시며 살의를 품은 분노와 증오의 부도덕성을 고발하신다.
- 분노는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의 악에 대해 복수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악습을 교정하고 정의의 선을 보존하기 위해서”(66) 보상을 부과하는 것은 잘 하는 일이다. 만일 분노로 해서 이웃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히거나 이웃을 죽이기를 원하기까지 한다면 이는 사랑을 크게 어기는 것이므로, 죽을죄에 해당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 2303 의도적인 증오는 사랑에 어긋난다. 이웃에 대한 증오는 이웃이 잘못되기를 일부러 바랄 때 죄가 된다. 일부러 이웃이 심한 손해를 입기를 염원할 때, 이웃에 대한 증오는 중죄가 된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 2304 인간 생명의 존중과 증진에는 평화가 필요하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만도 아니고, 적대 세력들 사이의 균형을 보장하는 데 그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선익 보호,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 소통, 사람들과 민족의 존엄성 중시, 형제애의 끊임없는 실천 등이 없이는 평화는 지상에서 실현될 수 없다. 평화는 “질서의 고요함”(67) 이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사 32,17)이며 사랑의 결실이다.(68)
- 2305 지상의 평화는 메시아이시며 “평화의 군왕”(이사 9,5)이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 열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적개심을 없애셨고”(에페 2,16),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으며,(69) 당신 교회를 인간과 인간이 하나 되고 또한 하느님과 인류가 하나 되는 일치의 성사로 세우셨다.(70)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그리스도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하고 선언하신다.
- 2306 난폭하고 무자비한 행위를 포기하고,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취하는 방어 수단을 택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사랑을 증언하는 이들이다. 여기에는 다만 타인과 사회의 권리와 의무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그 사람들은 폭력에 의지하는 것이 파괴와 죽음을 포함하여, 대단히 큰 물질적 정신적 위험을 몰고 온다는 것을 정당하게 증언한다.(71)
- 전쟁을 피함
- 2307 다섯째 계명은 인간의 생명을 일부러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 모든 전쟁이 초래하는 불행과 불의 때문에, 교회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오랜 전쟁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도록 모든 이가 기도하고 행동할 것을 간곡히 촉구한다.(72)
- 2308 모든 시민과 모든 위정자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진력할 의무가 있다.
- 그러나 “전쟁의 위험이 있고 적절한 힘을 지닌 관할 국제 권위가 없는 동안에는, 참으로 평화 협상의 모든 방법을 다 써 본 정부들의 정당 방위권은 부정할 수 없다.”(73)
- 2309 무력을 통한 정당방위에 대한 엄격한 조건들을 엄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이는 중대한 결정이므로 무력을 쓰는 정당방위는 도덕적 정당성의 엄중한 조건들을 따라야 한다. 이 결정은 아래 조건들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
- - 공격자가 국가나 국제 공동체에 가한 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해야 한다.
- - 이를 제지할 다른 모든 방법들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효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 - 성공의 조건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 - 제거되어야 할 악보다 더 큰 악과 폐해가 무력 사용으로 초래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서 현대 무기의 파괴력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 이 조건들이 이른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교리에서 열거되는 전통적 요소들이다.
- 이 같은 도덕적 정당성의 조건들에 대한 평가는 공동선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신중한 판단에 달렸다.
- 2310 이런 경우 공권력은 국민들에게 국가 방위에 필요한 의무를 부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 군인 생활로 조국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한 역군이다. 이 임무를 올바로 수행한다면, 그들은 참으로 국가의 공동선과 평화 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다.(74)
- 2311 양심상의 이유로 무기 사용을 거부하며 다른 방법으로 인간 공동체에 봉사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국가가 공정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75)
- 2312 교회와 인간 이성은 무력 충돌 중에도 도덕률은 영구히 유효하다는 것을 선언한다. “불행히도 전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전쟁 그 자체로 적대 편의 모든 행동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76)
- 2313 비전투원과 부상병과 포로들을 존중하고 인간답게 대우해야 한다.
- 국제법과 그 원칙에 어긋나는 고의적 행동과 그것을 지시하는 명령들은 죄이다. 맹목적인 복종이라고 해도, 이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무죄일 수 없다. 따라서 어떤 민족이나 국민이나 소수 민족에 대한 집단 학살은 죽을죄로 단죄되어야 한다. “종족 말살”의 명령에는 항거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 2314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인간 자신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이는 확고히 또 단호히 단죄받아야 한다.”(77) 현대전의 위험은 과학 무기, 특히 원자 무기, 생물학 무기 또는 화학 무기의 보유자들에게 이러한 범죄 행위를 저지를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다.
- 2315 많은 사람들은 무기의 비축을 가상의 적에게 전쟁을 단념하도록 하는 역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국가들 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유효한 것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그 같은 전쟁 억제 수단과 관련하여 막중한 도덕적 제약이 가해지고 있다. 군비 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있다. 언제나 새로운 무기를 마련하는 데에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의 낭비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막고,(78) 민족들의 발전을 방해한다. 과잉 군비는 분쟁의 원인을 증가시키고, 분쟁이 확산될 위험을 증대시킨다.
- 2316 무기의 생산과 거래는 국가들과 국제 공동체의 공동선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공권력은 이를 규제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단기적 이윤 추구가 국가들 사이에서 폭력과 분쟁을 불러일으키고 국제적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기도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 2317 개인들과 국가들 사이에 만연된 불의와, 경제 사회 분야의 지나친 불공정과 불평등, 시기, 불신과 교만은 끊임없이 평화를 위협하며 전쟁의 원인이 된다. 이런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모든 활동은 평화를 이룩하고 전쟁을 피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 인간은 죄인이므로, 전쟁의 위험이 인간을 위협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러하겠지만, 인간이 사랑으로 결합되어 죄를 극복하는 그만큼 폭력도 극복할 것이다. 그때에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백성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79)
- 간추림
- 2318 “그분의 손에 모든 생물의 목숨과 모든 육체의 숨결이 달려 있음을”(욥 12,10).
- 2319 모든 사람의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신성하다. 살아 계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바로 그 자체를 위하여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 2320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주의 거룩하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 2321 살인 금지는 부당한 공격자가 사람을 해칠 수 없게 하려는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생명이나 공동선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당 방위는 중대한 의무이다.
- 2322 아기는 임신되는 순간부터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직접적인 낙태, 곧 목적이나 수단으로서 행한 고의적 낙태는 도덕률을 크게 어기는 “파렴치한 행위”(80) 이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거스르는 이 죄를 교회법적 형벌인 파문으로 제재한다.
- 2323 배아는 임신되는 순간부터 인격체로 대우를 받아야 하므로,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보호받고, 보살핌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 2324 방법과 동기가 어떻든, 고의적인 안락사는 살인죄이다.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창조주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한 존경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 2325 자살은 정의와 희망과 사랑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다섯째 계명은 자살을 금지한다.
- 2326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이가 중죄를 짓도록 일부러 유도할 때, 이는 악한 표양으로서 중죄가 된다.
- 2327 모든 전쟁이 초래하는 불행과 불의 때문에 우리는 전쟁을 피하고자 가능한 모든 합리적인 방법들을 다 강구해야 한다. 교회는 “주님, 기근과 전염병과 전쟁에서 우리를 구해 주소서.” 하고 기도한다.
- 2328 교회와 인간의 이성은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도덕률이 영구히 유효함을 천명한다. 국제법과 그 보편적 원칙을 일부러 어기는 행위들은 범죄이다.
- 2329 군비 경쟁은 인류에게 막심한 상처를 주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도록 해치고 있다.(81)
- 2330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 제6절 여섯째 계명
- 간음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4).82)
-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 I.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 2331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자신 안에서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일치의 신비를 살고 계신다. 인류를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인간성 안에 사랑과 일치의 소명을 부여하시고, 따라서 그 소명에 따른 능력과 책임도 부여하셨다.”(83)
-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창세 1,28).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던 날,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를 만드셨다. 그분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하셨다”(창세 5,1-2).
- 2332 인간의 성은 육체와 영혼의 단일성 안에서 인간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특히 정서, 사랑하고 자녀를 출산하는 능력,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타인과 친교를 이루는 능력에 관련된다.
- 2333 자신의 성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남녀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 차이와 상호 보완성은 행복한 혼인 생활과 풍요로운 가정생활을 지향하는 것이다. 부부의 화합과 사회의 화합은 두 성이 어떻게 서로 보완해 주고 채워 주고 도와주느냐에 어느 정도 달려 있다.
- 2334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실 때에,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인격적 품위를 동등하게 주셨다.”(84) “인간은 인격체인데, 이 점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 왜냐하면 둘 다 인격적인 하느님의 모습으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85)
- 2335 남녀는 서로 다르지만 그 품위에서 동등하며, 그 모습에서 하느님의 힘과 사랑을 드러낸다. 혼인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육체를 통해 하느님의 너그러움과 풍요로움을 본받는 것이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이 결합에서 모든 세대의 인류가 태어난다.(86)
- 2336 예수님께서는 창조된 만물을 그 본래의 순수성으로 회복시켜 주시려고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정확히 해석하신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87)
- 교회의 전통은 여섯째 계명을 인간의 성 전체에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 II. 정결의 소명
- 2337 정결은, 성이 인격 안에 훌륭히 통합되어 있음과 그 때문에 육적이고 영적인 실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내적 일치를 뜻한다. 인간이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세계에 속해 있음을 표현하는 성은, 인격 대 인격의 관계 안에서, 남녀가 온전히 또 시간의 제한 없이 서로를 내어 줄 때 참으로 인격적이고 인간다운 것이 된다.
- 그러므로 정결의 덕은 완전한 인격과 온전한 헌신을 내포한다.
- 완전한 인격
- 2338 정결한 사람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생명과 사랑의 능력을 완전히 보전한다. 이 완전성은 인격의 통일성을 나타내며, 인격에 손상을 줄지도 모르는 모든 언행을 배격한다. 곧 이중생활이나 이중적 언어를 용납하지 않는다.(88)
- 2339 정결은 자제력의 훈련을 요구한다. 이 훈련은 인간의 자유를 배우는 교육이다. 인간이 정욕을 지배하여 평화를 얻느냐, 아니면 그 정욕에 자신을 맡겨 불행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렸다.(89) “인간의 존엄성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한다. 곧 맹목적인 내부 충동이나 순전한 외부 강박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적 동기와 권고에 따라 인격적으로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온갖 욕정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선을 선택하여 자기 목적을 추구하고 적절한 도움을 받아 효과적으로 슬기롭게 행동할 때에 인간은 이러한 존엄성을 얻는다.”(90)
- 2340 자신의 세례 서약을 충실히 지키고 유혹에 대항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들을 선택하는 데 신중하여야 한다. 그 수단들이란 자아 인식, 상황에 따른 적절한 금욕 실천, 하느님 계명에 대한 순종, 도덕률의 실천과 기도에 충실함 등이다. “자제로써 우리는 한데 모아진다. 우리의 산만한 정신 때문에 잃어버렸던 통일성을 되찾게 된다.”(91)
- 2341 정결의 덕은 절제라는 중추적 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절제는 인간의 감성적 정욕과 욕구들이 이성 안에 머물게 한다.
- 2342 자제력을 얻으려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 덕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자제력은 인생의 모든 시기마다 다시 시작하는 노력을 요구한다.(92) 특정한 시기들, 예컨대 인격이 형성되는 아동기나 청소년기에는 특별히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 2343 정결의 덕은 너무나도 자주 죄로 얼룩진 불완전한 단계들을 거쳐 가는 성장의 법칙을 겪는다. “인간은 수많은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서 날마다 자신을 쌓아 올리는 역사적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성장 단계를 따라 도덕적 가치를 알게 되고 사랑하며 성취하는 것이다.”(93)
- 2344 정결한 사람이 되려면, 각 개인의 노력이 매우 필요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노력도 필요한 것이다. 이는 “개인의 진보와 그 사회의 발전이 서로 의존하고 있기”(94) 때문이다. 정결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하며, 특히 인간 생활의 도덕적 정신적 차원을 존중하는 정보와 교육을 받을 권리를 전제로 한다.
- 2345 정결은 윤리덕의 하나이다. 정결은 또한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며,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이기도(95) 하다. 성령께서는 세례의 물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순결을 본받게 하신다.(96)
- 온전한 자아 선사
- 2346 사랑은 모든 덕의 실체이다. 사랑의 영향 아래, 정결은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을 배우는 학교가 된다. 자제력은 자기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한 것이다. 정결을 지키는 사람은 이웃에게 하느님의 신의와 사랑을 증언하는 증인이 된다.
- 2347 정결의 덕은 우정으로 피어난다. 정결의 덕은 우리를 당신의 벗으로 선택하시고,(97) 당신을 남김 없이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를 하느님이신 당신의 신분에 참여하게 하신 그분을 어떻게 따르고 본받을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정결은 불멸을 약속해 주는 것이다.
- 정결은 특히 이웃과 나누는 우정으로 표현된다. 동성이나 이성 사이에서 발전된 우정은 모두에게 큰 선익을 준다. 우정은 영적인 친교로 발전한다.
- 정결의 다양한 형태
- 2348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정결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결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98)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신분에 알맞게 정결한 생활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 정결하게 살겠다고 약속하였다.
- 2349 “정결은 각 개인의 다양한 생활 상태에 따라서 구별되어야 한다.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더 쉽게 전념하기 위한 훌륭한 방법으로서 동정이나 봉헌된 독신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고, 또 모든 이에게 도덕률이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혼인하거나 독신으로 지내는 이들도 있다.”(99) 혼인한 사람들은 부부로서 정결을 지키도록 요청받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금욕으로써 정결을 실천한다.
- 정결의 덕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내들의 정결이고, 다른 하나는 과부의 정결이며, 셋째는 처녀들의 정결입니다. 우리는 다른 형태들을 배제하면서 어느 한 형태만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의 규율이 풍부하다는 증거입니다.(100)
- 2350 약혼자들은 금욕으로써 정결을 지키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시험을 거쳐서 서로 존경하며 신의를 배우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서로를 받아들일 희망을 길러 나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혼인할 때까지 부부애의 고유한 애정 표현을 미뤄 두어야 한다. 약혼자들은 정결하게 성숙하도록 서로 자제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 정결을 거스르는 죄
- 2351 방탕은 성애(性愛)의 쾌락을 무질서하게 원하고 그것에 문란하게 탐닉하는 것이다. 성적 쾌락은, 부부 일치와 자녀 출산이라는 그 궁극 목적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될 때, 도덕적 문란이 된다.
- 2352 자위행위는 성적 만족을 얻고자 생식기를 일부러 자극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항구한 전통에 따라, 교회의 교도권과 신자들의 도덕의식은 자위행위를 본질적으로 몹시 무질서한 행위임을 의심 없이 견지하고 있다.” “행위에 따르는 동기 자체가 어떠하든, 부부의 정상적 관계를 벗어나서, 성기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도덕 질서가 요구하는, 곧 참된 사랑의 맥락에서 상호 증여와 인간 출산의 완전한 의미를 실현시키는”(101) 성관계 밖에서 성적 쾌락이 추구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바른 판단력을 키워 주고 사목 활동을 잘 하려면, 미숙한 정서, 습관의 힘, 불안 상태나 다른 심리적 사회적 요인들을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그러한 요인들은 도덕적 책임을 줄이거나 어쩌면 거의 없앨 수 있다.
- 2353 사음(邪淫)은 혼인하지 않은 남녀의 육체 결합이다. 이는 인간의 품위에, 그리고 본래 부부의 선익과 자녀 출산과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성의 품위에도 크게 어긋난다.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하는 매우 악한 표양이 되는 것이다.
- 2354 포르노(phornography)는 일부러 제삼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사생활의 성행위를 실제로 또는 모방하여 옮겨 놓은 것이다. 상대방에게 은밀하게 자기를 선물로 내어 주는 부부 행위를 왜곡하므로, 포르노는 정결을 모독하는 것이다. 또한 포르노는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배우, 상인, 대중)의 품위를 크게 해친다. 이들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원초적 쾌락과 불의한 이익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포르노는 이에 관련되는 모든 사람을 가상적인 환상의 세계에 빠지게 한다. 이것은 중죄이다. 당국은 포르노물의 제작과 배포를 막아야 한다.
- 2355 매매춘은 몸 파는 사람을 성적 쾌락의 도구로 전락시켜 그 사람의 품위를 해친다. 돈을 지불하는 사람도 자신에게 중죄를 짓는 것이다. 그는 세례로 약속한 정결을 깨뜨리고, 성령의 궁전인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이다.(102) 매매춘은 사회적 재앙이다. 이 재앙의 피해자는 보통 여자들이지만, 남자나 어린이 또는 청소년일 수도 있다(이 마지막의 두 경우에는, 그 죄가 악한 표양으로 곱절로 늘어난다). 매매춘에 몸을 맡기는 것은 언제나 중죄가 되지만, 빈곤과 협박과 또는 사회적 압력이 가해질 때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줄어들 수 있다.
- 2356 강간은 강제로 침입하여 폭력으로 어떤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정의와 사랑을 해친다. 강간은 존중받을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신체적 도덕적 온전성에 대한 권리에 극심한 상처를 입힌다. 강간은 피해자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을 피해를 입힌다. 이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악한 행위이다. 가까운 친척이 저지르는 강간(예를 들면, 근친상간)이나 교육자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강간은 더욱 큰 해악이다.
- 정결과 동성애
- 2357 동성애는 동성의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거나 더 강하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남자끼리나 여자끼리 갖는 관계를 말한다. 동성애는 기나긴 시대와 다양한 문화를 거치며 갖가지 형태를 띠어 왔다. 동성애의 심리적 기원은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 동성애를 심각한 타락으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에 바탕을 두어,(103) 교회는 전통적으로 “동성애 행위는 그 자체로 무질서”(104) 라고 천명해 왔다. 동성애는 자연법에도 어긋난다. 동성애는 성행위를 생명 전달로부터 격리시킨다. 그 행위들은 애정과 성의 진정한 상호 보완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성의 성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다.
- 2358 상당수의 남녀가 깊이 뿌리박힌 동성애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경우는 스스로 동성연애자의 처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무질서인 이 성향은 그들 대부분에게는 시련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존중하고 동정하며 친절하게 대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에게 어떤 부당한 차별의 기미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들의 처지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들을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결합시키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 2359 동성애자들은 정결을 지키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내적 자유를 가르치는 자제의 덕으로, 때로는 사심 없는 우정의 도움을 받아서, 또한 기도와 성사의 은총으로, 그들은 점차 그리고 단호하게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다가설 수 있고 또 다가서야 한다.
- III. 부부 사랑
- 2360 성(性)은 남녀의 부부애를 위해 있는 것이다. 혼인 생활에서 부부의 육체관계는 정신적 일치의 표징과 보증이 된다. 세례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인 유대는 성사로써 성화된다.
- 2361 “남자와 여자가 부부에게만 허용된 고유하고 배타적인 행위를 통하여,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성은 결코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만이 아니고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와 관련된다. 성은 남자와 여자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사랑의 일부일 경우에만 진정으로 인간적이다.”(105)
- 토비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말하였다. “여보, 일어나구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 사라가 일어나자 그들은 기도하며 자기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였다. 토비야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저희 조상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당신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협력자이며 협조자로 아내 하와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둘에게서 인류가 나왔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들은 “아멘, 아멘.” 하고 함께 말하였다(토빗 8,4-8).
- 2362 “부부가 친밀하고 정결하게 서로 결합하는 행위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행위이다. 참으로 인간다운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그러한 행위는 상호 증여를 뜻하고 북돋우며,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서로 풍요롭게 한다.”(106) 성은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다.
- 창조주께서 몸소……출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부부가 육체와 정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맛보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이 즐거움을 추구하고 이를 향유하는 일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께서 그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부는 올바른 절제의 한도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107)
- 2363 부부의 육체 결합으로 혼인의 두 가지 목적, 곧 부부 자신들의 선익과 생명의 전달이 실현된다. 혼인의 이 두 가지 의미나 가치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럴 경우, 반드시 부부의 정신 생활이 변질될 것이며, 또한 혼인의 선익과 가정의 장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 남녀의 부부애는 이처럼 신의와 자녀 출산이라는 이중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 부부의 신의
- 2364 “창조주께서 제정하시고 당신의 법칙으로 안배하신, 생명과 사랑의 내밀한 부부 공동체는 인격적인 합의로 맺은 결코 철회할 수 없는 계약으로 세워진다.”(108)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준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을 이룬다. 부부가 자유로이 맺은 이 계약은 그들에게 이 결합을 단일하고 해소될 수 없는 것으로 유지할 의무를 지운다.(10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110)
- 2365 부부의 신의는 약속을 항구하게 지킴으로써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신의를 지키는 분이시다. 혼인성사는 남녀를 당신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의에 참여시킨다. 그들은 부부의 정결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이 신비를 증언한다.
-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젊은 신랑에게 권고한다. “나는 당신을 내 품에 받아들이고, 당신을 사랑하며, 내 생명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덧없는 것이며,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삶에서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을 보장을 받도록 이 세상의 삶을 당신과 함께하는 것이 나의 가장 열렬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나는 당신의 사랑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며, 당신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내게 없을 것입니다.”(111)
- 혼인과 출산
- 2366 자녀 출산은 선물이며, 혼인의 목적 중의 하나이다. 사실 부부 사랑은 본성적으로 자녀 출산을 지향하고 있다. 자녀는 외부에서 부부의 상호 사랑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내어 주는 일의 열매이자 완성으로서, 부부 결합 그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편에 서는”(112) 교회는 “모든 혼인 행위는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의 출산을 목적으로 한다.”(113) 고 가르친다. “교도권이 여러 번 제시한 이 가르침의 근거는 부부 일치와 자녀 출산이라는 혼인 행위의 이중 목적이 지닌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혼인 행위의 이 불가분의 관계는 인간이 스스로 파기하지 못한다.”(114)
- 2367 생명을 전해 줄 소명을 받고 있는 부부는 하느님의 창조 능력과 부성(父性)에 참여한다.(115) “인간 생명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의무는 부부의 고유한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 부부는 이 의무에서 자기들이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의 협력자이며 또한 그 사랑의 해석자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지고 자신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116)
- 2368 이 책임의 독특한 일면은 출산의 조절이다. 부부는 정당한 이유로(117) 자녀 출산에 간격을 두기를 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이 이기주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는 부모의 정당성에 부합하는 것임을 확인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부부는 도덕성의 객관적 기준에 따라서 자신들의 행동을 조절해야 한다.
- 부부의 사랑과 생명 전달의 책임을 조화시키는 행동 방식의 도덕성은 순수한 의향이나 동기 평가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그 도덕성은 인간의 본성과 그 행위의 본질에서 이끌어 낸 객관적 기준, 곧 참사랑이라는 맥락 안에서 상호 증여와 인간 출산의 온전한 의미를 보전하는 그러한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118)
- 2369 “일치와 출산이라는 이 두 가지 본질적인 면을 보전함으로써, 부부 행위는 상호 간의 진정한 사랑과 부모가 되는 인간의 지고한 소명을 향한 의의를 온전히 살리는 것이다.”(119)
- 2370 주기적인 절제, 곧 자기 관찰과 불임 기간의 이용에 바탕을 둔 출산 조절(가족계획)은(120) 도덕성의 객관적 기준에 합치되는 것이다. 이 방법들은 부부의 육체를 존중하고, 그들 사이의 애정을 북돋우며 진정한 자유를 가르쳐 준다. 반면에, “부부 행위를 앞두고, 또는 행위 도중에, 또는 그 자연적인 결과의 진행 과정 중에, 출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수단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121) 근본적으로 악이다.
- 남편과 아내가 서로 완전히 자신을 내어 줌을 표현하는 본래의 언어가 피임이라는 객관적으로 모순된 언어, 곧 자신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바치는 것을 거부하는 언어로써 덮씌워진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개방성을 적극적으로 거부함과 아울러 인간 전체를 바치도록 되어 있는 부부 사랑의 내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출산 주기법과 피임 간의 인간학적 도덕적 차이점을 파악하고 더욱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차이점은 보통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인격과 성이라는 두 개의 융화하기 어려운 개념에 관련된다.(122)
- 2371 “인간의 생명과 그 전달 임무는 현세에만 국한되고 또 현세에서만 측량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아야 한다.”(123)
- 2372 국가는 국민의 복지에 책임을 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가 국민의 인구 조절의 방향을 주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국가는 권위적이고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 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 국가는 자녀의 출산과 교육의 첫째 책임자인 부부의 주도권을 정당하게 대신할 수 없다.(124) 이 영역에서 국가가 도덕률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개입하는 것은 불가하다.
- 자녀라는 선물
- 2373 성경과 교회의 전통적 관습은 많은 자녀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복과 부모의 헌신이 드러나는 표징으로 본다.(125)
- 2374 자녀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부의 고통은 크다. “주 하느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는 자식 없이 살아가는 몸입니다.”(창세 15,2) 하고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묻는다. 라헬도 그녀의 남편 야곱에게 “나도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 버리겠어요.”(창세 30,1) 하고 외친다.
- 2375 인간의 불임을 줄이기 위한 연구는 장려해야 한다. 다만 그 연구에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인간을 위한 것이라야 하고,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참되고 온전한 선익을 위한 연구라야 한다는”(126) 조건이 전제된다.
- 2376 부부가 아닌 제삼자의 개입(정자나 난자의 제공, 자궁 대여)으로 부부의 분리를 유발하는 기술은 매우 파렴치한 일이다. (이종[異種]의 인공 수정과 착상 같은) 그러한 기술은 혼인으로 맺어지고 부모라고 알고 있는 남녀에게서 태어날 아기의 권리를 침해한다. 이 기술은 “오로지 서로를 통하여 부모가 되는 부부의 배타적인 권리”(127) 를 저버린다.
- 2377 이런 기술들은 오로지 부부 사이에서만 쓰인다면(동종[同種]의 인공 수정과 착상), 아마도 덜 비난할 만한 것이 될지는 몰라도,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 기술은 성행위를 출산 행위에서 분리시킨다. 이 경우에 아기가 생겨나게 하는 행위는 더 이상 두 사람이 서로를 내어 주는 행위가 아니라, “의사나 생물학자의 기술에 배아의 생명과 신원을 내맡기는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기술이 인격적 인간의 기원과 운명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런 기술의 지배야말로 부모나 자녀에게 공통적이어야 할 존엄성과 평등의 원칙을 거스르는 일이다.”(128)
- “도덕적 견지에서 볼 때, 부부의 일치를 특정하게 표현하는 부부의 독특한 행위의 결과가 아닌 출산은 출산 고유의 도덕적 측면에서 온전성이 결여된 것이다.……부부 행위의 참뜻과 인간의 유일성에 대한 존중의 상관관계가 존중될 때에만 인간 품위에 알맞는 출산이 가능한 것이다.”(129)
- 2378 자녀는 당연한 어떤 것이 아니라 선물이다.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은 인간이다. 자녀는 소유물일 수 없다. 이른바 ‘자녀를 가질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자녀를 소유물로 보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서는 자녀만이 참된 권리를 갖는다. 곧, 자녀는 “부모에게 고유한 부부 사랑의 행위가 맺는 결실이 되는 권리와, 또한 임신되는 순간부터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130) 를 가지고 있다.
- 2379 복음은 육체적 출산 불능이 절대적 악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의학적인 모든 정당한 수단을 동원한 후에도 임신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부부는 모든 영적 출산의 근원인 주님의 십자가와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타인에게 필요한 봉사를 함으로써 그들의 헌신을 드러낼 수 있다.
- IV. 혼인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죄
- 2380 간음. 이 말은 부부의 부정(不貞)을 가리킨다. 일시적인 것이라고 해도, 성관계를 맺을 때 두 사람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기혼자일 경우, 그 두 사람은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마음으로 짓는 간음조차 단죄하신다.(131) 여섯째 계명과 신약 성경은 간음을 절대로 금한다.(132) 예언자들은 간음의 심각성을 알린다. 예언자들은 간음을 우상 숭배 죄의 표상으로 본다.(133)
- 2381 간음은 정의를 어기는 행위이다. 간음하는 자는 자신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간음은 계약의 표징이 되는 혼인의 유대를 손상시키며, 한 쪽 배우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혼인의 기초가 되는 계약을 어김으로써 혼인 제도를 해친다. 간음은 인류의 선익과, 부모의 안정된 일치가 필요한 자녀들의 선익을 위태롭게 한다.
- 이혼
- 2382 주 예수님께서는 해소될 수 없는 혼인을 원하신 창조주의 본뜻을 강조하셨다.(134) 예수님께서는 옛 법에 서서히 끼어들어 온 관행을 폐기하신다.(135)
- 세례 받은 이들 사이에 “성립되고 완결된 혼인은 사망 이외에는 어떠한 인간 권력이나 어떠한 이유로도 해소될 수 없다.”(136)
- 2383 혼인 유대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부부의 별거는 교회법에 비추어 어떤 경우에는 합법적일 수 있다.(137)
- 만일 민법상의 이혼만이 어떤 정당한 권리들과 자녀 양육이나 상속 재산의 보호를 보장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된다면, 도덕적인 죄가 성립되지 않고, 허용될 수 있다.
- 2384 이혼은 자연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다. 이혼은 부부가 죽을 때까지 서로 함께 살기로 자유로이 합의한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다. 이혼은 성사로 맺어진 혼인이 표징으로서 보여 주는 구원의 계약을 거스른다. 새로운 혼인 유대를 맺는 것은 비록 민법이 그 유대를 인정하더라도, 혼인 파기의 심각성을 증대시킨다. 그때 재혼한 배우자는 계속해서 공공연한 간음 상태에 있게 된다.
- 남자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남편을 버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도 불가합니다.(138)
- 2385 사회와 가정에서 일으키는 폐단 때문에 이혼은 부도덕한 성격을 지닌 것이다. 이 무질서는 중대한 폐해를 끼친다. 버림받은 배우자에게도, 부모의 결별로 충격을 받고 흔히 부모 사이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자녀들에게도, 그 파급 효과 때문에 사회에도, 참으로 큰 폐해를 끼친다.
- 2386 배우자 가운데 한 사람이 민법으로 판결이 내려진 이혼의 무고한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그 사람은 도덕적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혼인성사에 충실하고자 진정으로 노력하였으나 부당하게 버림받는 배우자와, 자신의 중대한 잘못으로 교회법상 유효한 혼인을 파기하는 배우자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139)
- 혼인의 존엄성에 대한 다른 죄들
- 2387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여, 여러 해 동안 부부 생활을 해 온 한 여자 또는 여러 여자를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사람의 비극을 우리는 이해한다. 그러나 일부다처제는 도덕률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부부의 일치에 위배된다. 일부다처제는 “혼인 안에서 온전하고 그러기에 특유하며 배타적인 사랑과 함께 자신을 내어 주는 남자와 여자의 동등한 품위에 위배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계시된 하느님의 계획을 정면으로 부정한다.”(140) 전에 여러 아내를 가졌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한때 그의 부인이었던 여인들과 그의 자녀들에 대한 의무를 마땅히 지켜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다.
- 2388 근친상간은 혼인이 금지되어 있는 촌수의 친척이나 인척들 사이의 육체관계로써 이루어진다.(141) 바오로 사도는 특히 이러한 중죄를 비난한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는 것입니다”(1코린 5,1.3-5). 근친상간은 가족 관계를 타락시키고 동물과 같은 삶을 살게 한다.
- 2389 자신들의 보호에 맡겨진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이 저지르는 성적 악행은 근친상간과 결부시킬 수 있다. 이 경우의 죄는, 그 자체로, 일생을 두고 상처를 간직하게 될 젊은이의 육체와 정신 전체를 짓밟는 악행이며, 또한 교육적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죄는 배가된다.
- 2390 남녀가 성관계를 포함하는 자기들의 관계에 법적이고 공적인 형태를 부여하기를 거부할 경우 이는 자유 결합이다.
- ‘자유 결합’이라는 말은 기만적이다. 두 사람이 서로 상대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며, 이렇게 신뢰가 결핍된 동거가 상대나 자신이나 미래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 내연의 관계라는 이 표현에는 여러 가지의 상황이 포함된다. 축첩(蓄妾), 혼인 그 자체에 대한 거부, 장기적인 약속을 할 수 없는 무능력 등이 그러한 예이다.(142) 이러한 상황들은 모두 혼인의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가정이라는 개념까지도 파괴하고, 신의를 약화시킨다. 이러한 상황들은 자연법에도 어긋난다. 성행위는 오로지 혼인 생활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혼인 생활 외의 성행위는 언제나 중죄이며 성체를 모시지 못하게 한다.
- 2391 오늘날 혼인할 의향이 있을 때 ‘실험해 볼 권리’(시험 결혼)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처럼 미숙한 성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결심이 아무리 단호하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결합은 남녀의 인간관계에 진실성과 성실성을 보장해 줄 수 없으며, 특히 엉뚱한 행동과 일시적 기분에서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143) 육체적 결합은 남녀 사이에 결정적인 생활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이 된다. 인간의 사랑은 ‘실험’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 자신을 결정적으로 완전히 내어 주는 헌신을 요구한다.(144)
- 간추림
- 2392 “사랑은 모든 인간의 기본 소명이고 타고난 소명이다.”(145)
- 2393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심으로써,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하게 인격적 품위를 부여하셨다. 자기의 성(性)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남녀 각자가 할 일이다.
- 2394 그리스도께서는 정결의 모범이시다. 세례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분에 따라 정결한 생활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 2395 정결은 성이 인격 안에 통합되어 있음을 뜻한다. 정결에는 개인의 자제 훈련이 필수 조건이다.
- 2396 정결을 크게 어기는 죄들 중에는 자위행위, 사음, 매매춘, 포르노의 제작과 배포, 동성애를 들 수 있다.
- 2397 부부가 자유롭게 맺은 계약에는 성실한 사랑이 포함된다. 이 계약은 부부에게 그들의 혼인이 파기되지 않도록 지켜 나갈 의무를 지운다.
- 2398 자녀 출산은 혼인의 선익이요, 선물이며, 목적이다. 생명을 탄생시킴으로써 부부는 하느님의 부성(父性)에 참여한다.
- 2399 출산 조절(가족계획)은 책임이 있는 부성과 모성의 한 측면을 표현한다. 부부가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예컨대 직접적인 불임 수술이나 피임)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 2400 간음, 이혼, 일부다처제, 내연의 관계는 혼인의 존엄성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다.
- 제7절 일곱째 계명
-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5).146)
-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마태 19,18).
- 2401 일곱째 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차지하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것을 금한다. 이 계명은 현세의 재물과 인간 노동의 결실에 대한 관리에서 정의와 사랑을 명한다. 그리고 이 계명은 공동선을 위해서 재산의 보편적인 용도와 사유 재산권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재물을 하느님과 형제적 사랑을 위해 사용하면서 살도록 힘써야 한다.
- I. 재물의 보편적 목적과 사유 재산
- 2402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자원을 인류의 공동 관리에 맡기셨으며, 그것을 돌보고, 노동을 통해 지배하며, 그 결실을 누리도록 하셨다.(147) 창조된 모든 재물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궁핍해질 수 있고 폭력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인간 생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땅은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보장하고, 각 사람마다 그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마련하며, 그 사람이 책임지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정당하다. 재산의 소유는 사람들 사이에 본래 있어야 할 연대성이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 2403 정당한 방법으로 사유 재산에 대한 권리를 획득한다 하여도, 그 시초부터 인류가 받은 땅은 여전히 공동의 선물이다. 비록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사유 재산을 존중하고 사유 재산권과 그 재산권의 행사를 존중해야 하더라도, 재물의 보편적 목적이 무엇보다 우선한다.
- 2404 “재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외적 사물을 자기 사유물만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하며, 그러한 의식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148)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소유자는 하느님의 관리인이 되어 그 재산에서 이익을 내고, 그 혜택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 누구보다 먼저 자기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 2405 토지나 공장과 같은 물질적인 생산재 또는 재능이나 기술과 같은 비물질적인 생산재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 소출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소비재나 소모품을 가진 이들은 그것을 절제있게 사용하여, 손님이나 병자나 가난한 이들이 가장 좋은 몫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 2406 정치권력은 공동선을 이룰 수 있도록 소유권의 정당한 행사를 규제할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다.(149)
- II. 인간과 그 재물에 대한 존중
- 2407 경제 분야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려면, 현세 재물에 대한 애착을 조절하기 위해서 절제의 덕을 발휘해야 하고, 이웃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기 위해서 정의의 덕을 실천해야 하며, 황금률에 따라, 그리고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주님의 너그러우심을 본받아, 연대 의식을 길러야 한다.(150)
- 타인의 재물 존중
- 2408 일곱째 계명은 도둑질, 곧 타인의 재물을 그 주인의 정당한 의사를 거슬러 빼앗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동의가 추정될 수 있거나, 거절이 타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물의 보편적인 사용 목적에도 어긋난다면, 그것은 절도가 아니다. 긴급하고 필수적인 것(의식주)을 조달하기 위해서 타인의 재물을 차지하고 사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되는 분명한 위급 상황의 경우가 그러하다.(151)
- 2409 타인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차지하는 모든 행동은, 비록 그것이 민법의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곱째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빌려 온 재물이나 습득물을 일부러 간직하고 있거나, 장사할 때의 속임수,(152) 부당한 품삯을 지불하는 행위,(153) 타인의 무지나 필요를 틈타서 물건 값을 올리는 행위(154) 등이다.
- 다음과 같은 행위들도 도덕적으로 부당하다.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 물가를 인위적으로 변동시키려고 하는 투기, 법에 따라 결정해야 할 사람들의 판단을 빗나가게 하는 매수, 기업의 공유 재산을 가로채서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탈세, 수표와 계산서의 위조, 과도한 지출, 낭비 등이다. 개인 소유물이나 공공 소유물에 일부러 손해를 입히는 행위들은 도덕률에 어긋나며 보상을 해야만 한다.
- 2410 약속은 지켜야 하며,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맺은 계약은 엄격히 이행하여야 한다.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상당 부분이 개인이나 법인 사이의 계약 준수나 계약 이행에 달려 있다. 매매에 관한 상업적 계약이나 임대차 계약, 근로 계약 등이 그러하다. 모든 계약은 성실히 합의되고 이행되어야 한다.
- 2411 계약은 사람들의 권리를 엄격하게 존중하는 가운데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거래를 규제하는 교환 정의에 따라야 한다.
- 교환 정의는 엄격한 의무를 지운다. 그것은 소유권의 보호와 채무의 변제, 자유로이 계약한 의무의 이행 등을 요구한다. 교환 정의가 없이는 다른 어떤 형태의 정의도 불가능하다.
- 교환 정의는 시민이 공동체에 대하여 공명정대하게 이행해야 할 것을 정하는 법적 정의와 구별되고, 공동체가 시민의 공헌과 필요에 상응하여 그들에게 이행해야 할 것을 규제하는 분배 정의와도 구별된다.
- 2412 교환 정의에 따라, 저지른 불의에 대해 배상하려면 훔쳐 온 재물을 그 소유자에게 반환해야 한다.
- 예수님께서는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라는 자캐오의 약속을 들으시고, 그를 칭찬하셨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타인의 재물을 빼앗은 사람은 그것을 돌려주거나, 그 물건이 없어졌을 경우에는 현물이나 돈으로 동등한 가치만큼 돌려줄 의무가 있으며, 그 소유주가 그것으로 마땅히 얻었을 결실과 이익도 돌려줄 의무가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도둑질에 가담했거나, 훔쳐 온 물건인 줄을 알고 그것을 이용한 모든 사람도 자신의 책임과 이득에 비례하여 반환할 의무가 있다. 예를 들면, 도둑질을 명했거나 도와주었거나 장물을 은닉해 준 사람들이 그렇다.
- 2413 도박(카드 노름 등)이나 내기 자체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본인이나 이웃에게 필수적인 것을 박탈할 때, 도박과 내기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도박 벽은 그 사람을 도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릴 심각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손해가 가벼워서 손해 본 사람이 그 손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정하게 내기를 걸거나 노름에서 속임수를 쓰는 행위는 중대한 죄가 된다.
- 2414 일곱째 계명은 이기적이든 또는 이념적이든, 상업주의적이든 또는 전체주의적이든, 그 어떤 이유에서거나, 인간을 예속시키고 그의 인격적 존엄성을 무시하며, 인간을 상품처럼 사고 팔거나 교환하게 하는 행위나 기획을 금한다. 폭력을 써서 인간을 이용 가치나 이득의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기본권을 거스르는 죄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인 주인에게 그리스도인인 그의 노예를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라……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사랑하는 형제로”(필레 1,16) 받아들이도록 명한다.
- 자연계 전체에 대한 존중
- 2415 일곱째 계명은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 등은 그 본성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류 공동선을 위한 것들이다.(155) 우주의 광물, 식물, 동물 자원을 이용할 때, 도덕적인 요구도 동시에 중시해야 하는 것이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무생물과 생물에 대한 지배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 지배권은 미래 세대들을 포함하여 이웃에게 쾌적한 생활 환경을 물려주려는 배려로 제한을 받는 것이다. 이 지배권은 피조물 전체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요구한다.(156)
- 2416 동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동물을 돌보시고 보호하신다.(157) 동물은 단순히 생존함으로써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158) 그러므로 사람들도 동물을 호의로 보살펴야 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필립보 네리 성인과 같은 분들이 동물을 얼마나 세심하게 대했는지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
- 2417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동물을 관리하도록 맡기셨다.(159) 그러므로 식량을 구하고 의복을 마련하기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정당하다. 일과 여가에서 인간을 돕도록 동물을 길들일 수 있다. 동물에 대한 의학적 과학적 실험은 합당한 한계를 지키고, 인간 생명의 치유와 보호에 이바지한다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일이다.
- 2418 동물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며 마구 죽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인간의 빈곤을 구제하는 데에 써야 할 돈을 동물을 위해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옳지 못하다. 동물을 사랑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인간에게 쏟아야 할 애정을 동물에게 쏟아서는 안 될 것이다.
- III. 교회의 사회 교리
- 2419 “그리스도교 계시는……사회생활의 법칙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160) 교회는 복음서에서 인간에 대한 진리의 완전한 계시를 받는다.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의 품위와 사람들을 일치시켜야 할 그 소명을 인간에게 증언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지혜에 부합한, 정의와 평화가 요구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 2420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161) 교회는 경제와 사회 문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 윤리 질서에 관해서 교회는 정치권력과는 다른 사명을 띠고 있다. 교회는, 공동선의 현세적인 국면들이 우리의 궁극 목적인 ‘최고선’을 위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교회는 현세의 재물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올바른 자세를 고취하고자 노력한다.
- 2421 교회의 사회 교리는 19세기에 발전하였는데, 그 시대는 현대의 산업 사회가 소비재 생산을 위한 새로운 사회 구조, 사회와 국가와 권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 그리고 노동과 소유의 새로운 형태 등의 문제로 복음과 마찰을 빚던 시대였다. 경제 사회 분야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발전한 것은, 교회의 가르침의 영속적인 가치를 증명함과 동시에 언제나 살아 있고 활기찬 성전의 참된 의미를 증언하는 것이다.(162)
- 2422 교회의 사회 교리는 점차로 분명해지고 체계화되어 가고 있다. 이 가르침은, 역사가 흐르는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말씀 전체에 비추어서,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점차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다.(163) 이 사회 교리는 신자들의 행동에 반영될수록, 선의의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된다.
- 2423 교회의 사회 교리는 성찰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판단의 기준들을 이끌어 내며, 행동의 지침들을 일러 준다.
- 사회적 관계들이 오로지 경제적인 요소들로써만 결정되는 사회 체제는 모두 인간의 본성과 그 행위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164)
- 2424 이윤이 경제 활동의 유일한 원칙이며 궁극 목표라고 주장하는 이론은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돈에 대한 과도한 욕심은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는다. 이 과욕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갖가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다.(165)
- “생산 집단 조직을 앞세워 개인과 단체의 기본 권리를 무시하는”(166) 제도는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난다. 인간을 오직 이윤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모두 다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돈을 섬기는 우상 숭배로 이끌며, 무신론의 확산을 돕는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루카 16,13).
- 2425 교회는, 현대에 이르러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통하는 전체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이데올로기를 배격하였다. 한편으로 교회는 ‘자본주의’를 시행함에서도, 개인주의와 인간의 노동에 대한 시장 원리의 절대적 우위를 거부하였다.(167) 중앙 집권적 계획만으로 경제를 조절하는 것은 사회적 유대들을 그 근본부터 변질시키며, 시장 원리만으로 경제를 조절하는 것은 사회의 정의를 위배하는 것이다. “시장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인간의 요구가 많기 때문이다.”(168) 올바른 가치 체계에 따라서, 그리고 공동선의 견지에서, 시장과 경제의 주도권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도록 해야 한다.
- IV. 경제 활동과 사회 정의
- 2426 경제 활동의 발전과 생산의 증대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다. 경제생활은 생산된 재화를 늘리고, 이윤이나 경제력을 신장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경제생활은 우선적으로 인간에게, 인간 전체에, 인간 공동체 전체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유한 방식들에 따라 영위되는 경제 활동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부응하기 위하여, 사회 정의에 비추어서, 도덕적인 질서의 경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169)
- 2427 인간의 노동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서로 함께,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땅을 지배함으로써(170) 창조 사업을 계속하라는 요청을 받은 사람들이 직접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하나의 의무이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마라”(2테살 3,10).(171) 노동은 선물을 주시고 재능을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노동은 구원을 받게 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나자렛의 목수이시며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172) 견뎌 냄으로써, 인간은 하느님 아들의 구속 사업에서 어떤 의미로 그분의 협력자가 된다. 인간은 맡겨진 일을 완수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낸다.(173) 노동은 성화의 한 수단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을 세상사들 안에 불어넣는 방법일 수도 있다.
- 2428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타고난 능력의 일부를 발휘하고 실현한다. 노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일의 주체이며 목적인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174)
- 각자는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인류 공동체에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 2429 누구나 경제적인 면에서 주도적으로 행동할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풍요로움을 제공하고, 자기 노력의 정당한 결실을 얻고자, 자신의 재능을 합당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각자는 공동선을 위해 합법적인 공권력이 정한 규칙을 따르도록 유의해야 한다.(175)
- 2430 경제생활에는, 자주 서로 대립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해서 마찰이 일어나는 때가 있다. 경제생활의 특징을 이루는 갈등의 출현은, 대립되는 그 이해관계로 설명된다.(176) 기업의 대표들, 노동조합과 같은 기구를 결성한 노동자들의 대표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공권력과 같은 사회 각 당사자의 권리와 의무를 존중하는 협상을 통해서 갈등을 완화하도록 힘써야 한다.
- 2431 국가의 책임. “경제 활동, 특히 시장 경제의 활동은 제도적, 법률적, 정치적인 규범 없이 전개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경제 활동은, 통화 안정과 효과적 공공 서비스 외에도 개인들의 자유와 재산에 대한 보장이 전제된다. 따라서 국가의 주요 임무는 노동자와 생산자가 동등하게 그들의 노동의 결실을 즐길 수 있고, 효과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노동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안전을 보장해 주는 데 있다.…… 국가는 또한 경제 분야에서 인간의 권리 행사를 감시하고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그 첫 번째 책임은 국가에 있지 않고 개인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과 단체들에 있다.”(177)
- 2432 기업의 책임자들은 사회에 대해서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경제적, 생태학적 책임을 지고 있다.(178) 그들은 이윤의 증대뿐 아니라 인간의 선익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윤은 필요한 것이다. 이윤은 기업의 장래를 보장하는 투자를 실현하게 하고, 일자리를 보장한다.
- 2433 취업과 직업은 남자와 여자, 심신이 건강한 사람과 장애인, 원주민과 이주민에게 모두 한결같이 부당한 차별 없이 허용되어야 한다.(179) 상황에 따라서, 사회는 나름대로 시민들이 일자리와 직업을 얻도록 도와주어야 한다.(180)
- 2434 적정한 임금은 노동의 정당한 결실이다. 임금을 거절하거나 체불하는 것은 중대한 불의가 될 수 있다.(181) 공정한 보수를 평가하려면 각자의 필요와 그의 공헌을 동시에 참작해야 한다. “노동의 보수는 각자의 임무와 생산성은 물론 노동 조건과 공동선을 고려하여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182) 당사자들의 합의만으로 정한 임금의 액수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 2435 파업이 적정한 이익을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어쩌면 필수적인 수단으로 나타날 때에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파업이 폭력을 수반하거나, 근로 조건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목적 또는 공동선에 어긋나는 목적을 내걸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게 된다.
- 2436 합법적인 공권력이 정한 분담금(보험료)을 사회 보장 기관에 지불하지 않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 실업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는 피해자들은 거의 대부분 그 품위에 손상을 입고 균형 있는 생활에 위협도 받게 된다. 그리고 실업자가 받는 개인적인 피해 이외에도, 실업은 그의 가정에도 많은 위험을 안겨 준다.(183)
- V. 국가들 사이의 정의와 연대 의식
- 2437 국제적인 차원에서 자원과 경제적 수단의 불평등은 국가들 사이의 실질적인 “격차”(184) 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편에는 성장의 수단을 소유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채무만 늘어 가는 나라들도 있다.
- 2438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재정적 성질의 여러 원인들이 오늘날 “사회적인 문제를……전 세계적인 차원”(185) 으로 몰아간다. 이미 정치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는 연대 의식이 필요하다. 후진국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사악한 구조’를 막는 데에 연대성은 더욱더 필수 불가결하다.(186) 부당할 뿐 아니라 나아가 폭리를 추구하는 금융 제도,(187) 국가들 사이의 불공정한 교역 관계, 군비 경쟁은 막아야 한다. 그 대신, “먼저 우선적인 것들과 복지의 등급을 정하여”(188) 도덕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 자원들을 동원하려는 공동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2439 부유한 나라들은, 자신의 발전 수단을 스스로 확보할 수 없거나,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발전에 방해를 받고 있는 나라들에 대해 도덕적으로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이는 연대성과 사랑의 의무이다. 부유한 나라들이 누리는 복지가 공정한 대가를 치르지 않은 자원으로 얻어진 것이라면, 정의를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다.
- 2440 직접적 원조는, 예컨대 자연재해나 전염병 등으로 생긴 즉각적이고 예외적인 필요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궁핍한 상황에서 생기는 심각한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며, 필요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데도 불충분하다. 경제적 재정적 국제 기구들을 개혁하여, 저개발 국가들과 공정한 관계를 증진하도록 해야 한다.(189) 성장과 해방을 위해 애쓰는 가난한 나라들의 노력을 뒷받침해야 한다.(190) 이러한 원칙은 매우 특별하게 농업 분야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농부들은 특히 제3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절대 다수를 형성하고 있다.
- 2441 하느님에 대한 의식과 자신에 대한 인식이 증대하는 것은 인간 사회가 온전하게 발전하는 데 기초가 된다. 이 온전한 발전은 물질적 재화를 증식시켜서 이를 인간과 그의 자유를 위해 사용하도록 한다. 인간 사회의 온전한 발전은 경제적 빈곤과 착취를 감소시킨다. 이는 문화의 정체성을 존중하게 하고 초월성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준다.(191)
- 2442 정치 구조나 사회생활의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교회 사목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 이 임무는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주도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평신도들의 소명이다. 사회 활동에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사회 활동은 항상 복음의 메시지와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하며, 공동선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열정으로 현세적인 일들을 활성화하고, 이를 위해 평화와 정의의 일꾼으로 행동하는 것”(192) 은 평신도의 의무이다.
- VI.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 2443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가난한 이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배척하신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해 준 것으로써 선택된 사람들을 알아보실 것이다.(193)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마태 11,5)(194)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표징이 된다.
- 2444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사랑은……변함없는 전통에 속한다.”(195) 이 사랑은 참행복의 복음,(196) 예수님의 가난,(197)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배려하신 예수님을(198) 본받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일할 의무를(199) 지우는 동기들 가운데 하나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이 사랑은 물질적 가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거나 종교적인 다양한 형태의 가난에도 미치는 것이다.(200)
- 2445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재물에 지나친 애착을 갖거나 재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야고 5,1-6).
- 2446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를 강력하게 상기시킨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201) “먼저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정의에 따라 이미 주었어야 할 것을 마치 사랑의 선물처럼 베풀어서는 안 된다.”(202)
- 가난한 이들에게 필수적인 물건들을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선물로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203)
- 2447 자선 활동은 육체적으로나 영신적으로 궁핍한 이웃을 돕는 사랑의 행위이다.(204) 용서해 주고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내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가르치고, 충고하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행위는 영적인 자선 활동이다. 육체적인 자선 활동은 특히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집을 잃은 사람을 묵게 해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며, 병자와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보고, 죽은 이들을 장사 지내는 것이다.(205) 이러한 행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은(206) 형제애의 주요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도 하다.(207)
-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208)
- 2448 “물질적 궁핍, 부당한 억압, 육체적 정신적 질병, 끝으로 죽음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인간의 비참은 원죄 이후 인간이 놓이게 된, 타고난 나약한 처지와 구원의 필요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은 구세주 그리스도의 연민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이 비참을 짊어지시고, “형제들 중에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 40.45)과 같아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에 짓눌리는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교회는 그 초기부터 많은 지체들의 과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해방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는 갖가지 자선 사업을 통해서 이 일을 해 왔다. 자선 사업은 지금도 여전히 어느 곳에서나 필수적인 일이다.”(209)
- 2449 구약 시대부터 있었던 각종 법적 수단들(빚을 탕감해 주는 해, 이자와 담보의 금지, 십일조의 의무, 하루 벌이 일꾼의 품삯을 매일 지불하는 것, 남은 포도와 이삭을 주울 권리 등)은 신명기의 권고에 부응하는 것들이다. “너희 땅에서 가난한 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땅에 있는 궁핍하고 가난한 동족에게 너희 손을 활짝 펴 주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15,1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써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아모 8,6)라고 한 옛 예언자들의 격렬한 말씀을 폐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당신의 형제들인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아보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것이다.(210)
-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집에 거두어들이는 것을 어머니가 나무라던 날, 리마의 로사 성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시중들 때, 우리는 예수님께 시중드는 것이어요. 우리는 이웃을 통해서 예수님께 시중드는 것이므로, 싫증내지 말고 우리 이웃을 도와야 해요.”(211)
- 간추림
- 2450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신명 5,19). “도둑도 탐욕을 부리는 자도……강도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1코린 6,10).
- 2451 일곱째 계명은 지상의 재물과 인간 노동의 결실을 관리하는 일에서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명한다.
- 2452 창조된 재화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사유 재산권은 재물의 보편적 목적을 폐기하지 못한다.
- 2453 일곱째 계명은 도둑질을 금한다. 도둑질은 소유자의 정당한 뜻에 반하여 타인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다.
- 2454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고 사용하는 것은 일곱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불의를 저질렀을 때는 보상해야 한다. 교환 정의는 훔친 물건의 반환을 요구한다.
- 2455 도덕률은 상업이나 전체주의를 위한 목적으로 인간을 노예화하고, 인간을 매매하며, 상품처럼 교환하는 행위들을 금한다.
- 2456 창조주께서 주신 우주의 광물, 식물, 동물 자원에 대한 지배권은 장차 태어날 후손들에 대한 의무를 포함하여, 도덕상의 의무를 준수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 2457 동물은 인간의 관리에 맡겨졌으므로, 인간은 동물을 호의로 보살펴야 한다. 인간은 자기의 필요를 정당하게 충족시키는 데 동물을 이용할 수 있다.
- 2458 인간의 기본권이나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필요할 때, 교회는 경제와 사회의 문제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우리의 궁극 목적이시며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위해 있는 인간인 까닭에, 교회는 인간의 현세적 공동선에 관심을 기울인다.
- 2459 인간은 그 자신이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의 주인이고, 중심이며, 목적이다. 사회 문제의 결정적 요점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재화가 정의에 입각해서, 그리고 사랑의 도움으로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 2460 노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노동의 주체이며 노동의 목적이 되는 인간 바로 그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노동을 함으로써 창조 사업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행하는 노동은 구원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 2461 참다운 발전은 인간 전체의[全人的] 발전이다. 참발전이란 각자가 자신의 소명, 곧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각자의 능력을 성장시키는 데 있다.(212)
- 2462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은 형제애의 증거이다. 자선은 또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의 실천이기도 하다.
- 2463 먹을 것 없고, 집 없고, 정착할 곳 없는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비유에 나온 굶주린 거지 라자로를 어떻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213)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하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찌 들리지 않는가-
- 제8절 여덟째 계명
-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6).
-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33).
- 2464 여덟째 계명은 타인과 맺는 관계에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금한다. 이 도덕적 계명은 진리 그 자체이시며 진리를 바라시는 자기 하느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거룩한 백성의 소명에서 유래한다. 진실을 어기는 것은, 말이나 행실로써, 도덕적 정직을 지키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진실을 어기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기본적인 불성실이며, 이런 뜻에서 ‘계약’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 I. 진리 안에서 살아라
- 2465 구약 성경은 하느님께서 모든 진리의 근원이심을 증언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다.(214) 하느님의 법은 진실하다.(215) “하느님의 성실은 대대로 이어진다”(시편 119[118], 90).(216) 하느님께서는 “진실하신”(로마 3,4) 분이시기에, 하느님 백성의 지체들은 진실하게 살아야 마땅하다.(217)
- 2466 하느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두 드러났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218) 그분께서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시다.(219)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220)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을 성화시켜 주고,(221) 자유롭게 해 주는 진리를(222) 알고자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듣는다. 예수님을 따름은, 성부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파견하시고,(223) “모든 진리 안으로”(요한 16,13) 이끄시는 “진리의 영”으로(224)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가르치신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 2467 인간은 그 본성상 진리를 찾기 마련이다. 인간은 진리를 높이 평가하고 증언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개인적 책임을 지고 있는 모든 인간은 자기 존엄성에 따라, 본성적으로 진리, 특히 종교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도록 이끌리며 또 그 진리를 추구할 도덕적 의무를 지닌다. 또한 깨달은 그 진리를 따르고, 자신의 온 삶을 그 진리의 요구에 맞추어야 한다.”(225)
- 2468 인간의 행실과 말이 올바르다는 뜻의 진리는 정직, 성실 또는 진솔함이라고도 부른다. 진리 또는 진실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으로 참된 것을 보여 주고, 자신의 말로써 참된 것을 드러내며, 이중성과 위장과 위선을 피하게 하는 덕이다.
- 2469 “상호 신뢰가 없다면, 곧 서로에게 진실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더불어 살 수 없을 것이다.”(226) 진실한 사람은 타인에게 마땅히 알려 주어야 할 것을 알려 준다. 진실은 말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비밀 사이에서 올바른 중용을 지킨다. 진실은 성실과 신중을 내포한다. 정의에 따라,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성실하게 진실을 밝혀 주어야 한다.”(227)
- 2470 그리스도의 제자는 ‘진리 안에서 사는 삶’을 받아들인다. 곧 주님의 모범을 따라 단순하게 살며 주님의 진리 안에 머문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1요한 1,6).
- II. “진리를 증언하여라”
- 2471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고(228) 선언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2티모 1,8) 한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증언해야 하는 상황에서, 바오로 사도가 재판관들 앞에서 보인 모범을 따라,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애를 써야”(사도 24,16) 한다.
- 2472 교회의 생활에 참여해야 할 의무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증인이 되며, 복음에서 유래하는 의무들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증언은 말과 행실로써 신앙을 전달하는 것이다. 증언은 진실을 밝히거나 알게 하는 정의의 행위이다.(229)
-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살아가든 삶의 모범과 말의 증거로 세례를 통하여 입은 새사람을 드러내고 견진을 통하여 굳세게 해 주시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어야 한다.(230)
- 2473 순교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거이다. 순교란 죽음에까지 이르는 증거를 가리킨다. 순교자는 자신과 사랑으로 결합된 그리스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순교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와 그리스도교 교리의 진리를 증언한다. 순교자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죽음을 참아 받는다. “나를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놔 두십시오. 나는 짐승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231)
- 2474 교회는 목숨을 바쳐서까지 자기의 신앙을 증언한 분들의 유품이나 그분들에 관한 기록을 지극한 정성으로 수집하였다. 이것이 ‘순교자들의 행적’이다. 이 행적들은 피로 쓴 진리의 기록들이다.
- 이 세상의 매력도 현세의 왕국도 내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내게는 이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것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기 위해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분을 나는 찾으며,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그분을 나는 원합니다. 그분 안에서 내가 태어나게 될 때가 가까웠습니다…….(232)
- 주님, 저를 그날과 그 시간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 자로, 당신의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 들 만한 자로 여겨 주셨으니 당신께 찬미 드립니다.……거짓이 없으시고 진실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 은총과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며, 영원한 천상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찬미하고, 찬양하며, 당신께 영광을 드립니다. 성부와 성령과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제와 항상 영원히 영광 받으소서, 아멘.(233)
- III. 진리를 거스르는 죄
- 2475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페 4,24)이 되었다. “거짓을 벗어 버린”(에페 4,25) 그들은,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1베드 2,1) 버려야 한다.
- 2476 거짓 증언과 거짓 맹세. 진실에 어긋나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을 때는 특별한 중대성을 띠게 된다. 법정에서는 이것이 위증이 된다.(234) 맹세를 하고서 거짓말을 했다면, 맹세를 어기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무죄한 이를 단죄하거나 죄인에게 무죄를 선고하게 하고, 피고가 받을 벌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이다.(235) 이런 행위들은 정의의 구현과, 재판관들이 내리는 선고의 공정성을 크게 위태롭게 한다.
- 2477 사람들의 명예를 존중하려면 그들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태도와 모든 말을 삼가야 한다.(236) 여기서 빚어지는 죄상은 아래와 같다.
- - 이웃의 도덕적인 결점을, 충분한 근거도 없이, 은연중에라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경솔한 판단의 죄를 짓는다.
- - 타인의 결점이나 과실을, 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유 없이 알리는 사람은 비방의 죄를 짓는다.(237)
- - 허위로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해치고, 그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의 계기가 되는 사람은 중상의 죄를 짓는다.
- 2478 경솔한 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웃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가능한 대로 좋게 해석하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 선량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웃의 주장을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을 선의적으로 이해하도록 더욱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웃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 그의 주장을 설명해 보라고 요청해야 하며, 그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면, 애덕으로 그 사람을 꾸짖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으로 충분치 못하다면, 그가 바로 깨닫고서 구원을 받도록 모든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238)
- 2479 비방과 중상은 이웃의 명성과 명예를 해친다. 그런데 명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적 증거이고, 각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명성에 대한 타고난 권리를 누리며 존경을 받을 권리를 누린다. 그러므로 비방과 중상은 정의와 사랑의 덕을 모두 손상시키는 것이다.
- 2480 지나친 찬사나 아부나 아첨으로 타인의 악행과 나쁜 품행을 부추기고 북돋는 모든 말이나 태도는 금지되어야 한다. 중대한 악습이나 죄를 칭찬하여 돕는 아부 행위는 중죄이다. 도움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나 우정이 말의 위선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남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악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있을 수 있는 필요에 대비하기 위해, 정당한 이익을 얻기 위해, 지나친 찬사를 했을 때에는 소죄가 된다.
- 2481 자랑이나 허풍은 진실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악의로 어떤 사람의 행동의 일부 측면을 왜곡하여 그를 헐뜯으려는 빈정거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2482 “거짓말은 속이려는 의도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239) 주님께서는 거짓말 안에 악마가 활동하고 있음을 폭로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다.……그는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
- 2483 거짓말은 진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어기는 것이다. 거짓말은 사람을 오류에 빠뜨리려고 진실을 거슬러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이다. 거짓말은 인간과 진실의 관계, 또는 인간과 이웃의 관계를 손상시킴으로써, 인간과 주님 그리고 인간의 언어와 주님 사이의 기본 관계를 해치는 것이다.
- 2484 거짓말의 경중은 거짓말로 왜곡되는 진실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상황과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속마음과 거짓말의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따라 평가된다. 거짓말 자체는 소죄에 지나지 않지만, 정의와 사랑의 덕을 심각하게 해칠 때에는 죽을죄가 된다.
- 2485 거짓말은 그 자체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거짓말은 알려진 진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구실을 하는 말을 악용하는 것이다. 일부러 진실에 어긋나는 말을 해서 이웃을 오류에 빠뜨리고자 하는 의도는 정의와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다. 속이려는 의도가, 진실을 알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 치명적 결과를 가져다줄 위험이 있을 때, 그 유죄성은 더욱 크다.
- 2486 거짓말은 (정직의 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가한 명백한 폭력이다. 거짓말은 모든 판단과 결정의 조건인 타인의 인식 능력을 해친다. 거짓말에는 사회 불화와 그 불화로써 생긴 모든 악의 싹이 포함되어 있다. 거짓말은 어느 사회에나 다 해로운 것이다. 거짓말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며 사회 관계의 구조를 파괴한다.
- 2487 정의와 진실을 거슬러 지은 모든 죄는, 그 당사자가 용서를 받았더라도, 배상의 의무가 있다. 어떤 잘못을 공적으로 배상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비밀리에 해야 한다. 손해를 본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할 수 없다면, 자비의 이름으로 피해자가 정신적인 만족을 얻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이 배상의 의무는 타인의 명예에 끼친 피해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정신적이고 때로는 물질적인 이 배상은 가해진 손해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은 양심상의 의무이다.
- IV. 진실의 존중
- 2488 진실을 전달받을 권리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각 사람은 형제애를 강조하는 복음의 계명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 이러한 계명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진실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를 가늠해 보기를 요구한다.
- 2489 정보를 제공하고 진상을 밝히라는 모든 요구에 대해서는 사랑을 지키고 진실을 존중하면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타인의 선익과 안전, 사생활의 존중, 공동선 등은 알려져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조심스러운 어법을 구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추문을 들추어 내지 말아야 하는 의무는 흔히 엄격한 조심성을 요구한다. 진실을 알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 주어야 할 의무는 아무도 지고 있지 않다.(240)
- 2490 고해성사 비밀은 신성한 것이어서 어떠한 구실로도 누설할 수 없다. “고해성사의 비밀은 불가침이다. 따라서 고해 사제는 말로나 다른 어떠한 방식으로도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참회자를 조금도 발설하여서는 안 된다.”(241)
- 2491 직업상의 비밀 ─ 예컨대 정치가, 군인, 의사, 법률가 등이 간직하고 있는 ─ 또는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알게 된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비밀을 지키는 것이 그 비밀을 맡긴 사람이나 그것을 맡은 사람이나 또는 제삼자에게 매우 중대한 손해를 끼치게 되고, 진실을 누설함으로써만 손해를 피할 수 있는 경우에는 예외가 된다. 비록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에서 들은 말이 아니라고 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사로운 정보를 중대하고 합당한 이유 없이 누설해서는 안 된다.
- 2492 각자는 사람들의 사생활에 대하여 당연히 조심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정보 전달의 책임자들은 공동선의 요구와 개인의 권리 존중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정치 활동이나 공공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생활에 언론이 개입하는 일은 그들의 사생활과 자유를 해치는 정도에 따라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 V. 대중 전달 수단의 사용
- 2493 현대 사회에서 대중 전달 수단은 정보, 문화의 향상, 교양의 확산 등의 분야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역할은 기술의 발달, 전달되는 새로운 소식의 풍부함과 다양함, 여론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증대되고 있다.
- 2494 대중 매체를 통한 정보 전달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다.(242) 사회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 그러나 이 권리의 올바른 행사는, 커뮤니케이션이 그 내용에서 언제나 진실하여야 하고 정의와 사랑을 지키며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그 방법과 관련하여 커뮤니케이션은 공정하고 적절하여야 한다. 곧 뉴스의 취재와 보도에서 인간의 정당한 권리와 존엄성 그리고 도덕률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243)
- 2495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이 분야에서도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완수하여야 한다. 따라서 사회 매체의 힘으로도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전파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244) 연대 의식은 참되고 올바른 전달과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촉진하는 의견들의 자유로운 소통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 2496 사회적 전달 수단(특히 대중 매체)은 그 이용자들에게 일종의 수동성을 길러 주거나, 그들이 시청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할 수도 있다. 이용자들은 대중 매체를 대할 때 절제와 규율을 지켜야 한다. 그들은 불성실한 영향력에 더 쉽게 저항하기 위해서, 식견을 갖추고 정확한 의식을 다져 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2497 언론인들은 그들의 직책상, 정보의 전파에서 진실 전달에 이바지하고 사랑을 해치지 않을 의무를 지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은 주의를 기울여, 사실의 내용을 중시하는 동시에 개인에 대한 비판의 한계도 중시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들은 명예를 훼손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 2498 “국가 권위는 이 문제에서 공동선을 위한 의무를 지고 있다. 국가 권위는 자기 임무로서, 현대 사회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진실하고 공정한 정보의 자유, 특히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옹호하여야 한다.”(245) 국가는 법률의 공포와 효과적인 적용을 통하여, “사회 매체의 오용으로 공중도덕과 사회 발전에 중대한 위험이 미치지 않도록”(246) 감시해야 한다. 공권력은 명예와 사생활의 비밀을 보장받아야 할 각 사람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제재해야 한다. 공권력은 대중의 이익에 관계되거나 대중의 근거 있는 불안을 해소시켜 줄 정보를 제때에 성실하게 제공해야 한다. 여론 조작을 목적으로 대중 매체를 통해서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러한 개입으로써, 개인과 집단의 자유를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2499 철저하게 진실을 왜곡하고, 대중 매체를 통하여 여론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며, 공개 재판의 피고인과 증인들의 증언을 조작하고, 자신들이 ‘사상범’이라고 여기는 모든 이를 제압하고 억누름으로써 자신들의 절대적 지배력을 공고히 하겠다고 꿈꾸는 전체주의 국가들의 고질적인 악습을 도덕은 고발한다.
- VI. 진리, 아름다움, 성예술
- 2500 선행의 실천에는 무상의 영적 즐거움과 윤리적 아름다움이 따른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영적 아름다움이 뿜어 내는 기쁨과 찬란함을 동반한다. 진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지성을 부여받은 인간에게는, 창조된 실재와 창조되지 않은 실재에 대한 인식을 이지적으로 표현하는 언어의 진실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리가, 특별히 그 안에 내포된 형언할 수 없는 것, 곧 인간 마음의 심오함, 영혼의 고결함, 하느님의 신비 등을 환기시키고자 할 때, 인간은 다른 표현 형태들, 곧 보완적인 표현 형태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기 이전에도, 당신의 ‘말씀’과 당신 ‘지혜’의 업적이 되는 천지 만물이라는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다. 그것은 바로 ─ 어린이도 과학자도 발견하게 되는 ─ 우주의 질서와 조화이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 13,5).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지혜 13,3).
-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지혜 7,25-26).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지혜 7,29-30). 나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지혜 8,2).
- 2501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247) 인간은 자신의 예술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가 창조주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의 진실을 표현한다. 실로 예술은 인간에게 고유한 표현 형태의 하나이다. 살아 있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생활 필수품의 추구를 넘어서서, 예술은 인간이 무상으로 받은 과분한 내적 풍요로움에서 넘쳐 흐르는 산물이다. 창조주께서 주신 재능과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생겨난 예술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표현 수단을 빌려서 실재의 진실을 표현해 보려고 지성과 능력을 결합시킨 실천적인 지혜의 한 형태이다.(248) 이처럼 예술은 존재들의 진리와 존재들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만큼, 피조물을 통한 하느님의 활동과 어떤 유사성을 지니게 된다. 다른 모든 인간 활동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그 자체로서 절대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술도 인간의 궁극 목적을 위해 있는 것이기에, 고귀한 것이 된다.(249)
- 2502 성예술이 그 표현 형태를 통해 제 본래의 사명에 부합할 때, 그것은 참되고 아름답다. 그 사명이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진리와 사랑의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의 초월적인 신비를, 신앙과 흠숭을 통해서 상기시키고 찬미하는 것이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머물러 있는”(콜로 2,9) 그리스도의 영적 아름다움은, 천주의 모친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성인들 안에서 빛을 발한다. 진정한 성예술은,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시고 거룩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 기도와 사랑으로 인간을 이끈다.
- 2503 그러므로 주교들은 직접 또는 대리인을 통하여, 오래 되었거나 새로운 성예술의 모든 형태를 촉진시키도록 유의하며, 같은 정성으로 전례와 교회 건물에서 신앙의 진리와 성예술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을 제거하도록 해야 한다.(250)
- 간추림
- 2504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6).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들이다”(에페 4,24).
- 2505 진리 또는 진실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으로 참된 것을 보여 주고, 자신의 말로써 참된 것을 드러내며, 이중성과 위장과 위선을 피하게 하는 덕목이다.
- 2506 그리스도인은 행위와 말에서,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2티모 1,8) 한다. 순교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거이다.
- 2507 사람들의 명성과 명예를 존중하려면,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일체의 태도나 말을 삼가야 한다.
- 2508 거짓말은 이웃을 속이려는 의도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 2509 진실을 거슬러 죄를 지은 사람은 배상을 해야 한다.
- 2510 황금률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 주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 2511 “고해성사의 비밀은 불가침이다.”(251) 직업상의 비밀도 지켜야 한다. 타인에게 해가 될 비밀은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
- 2512 사회는, 진리와 자유와 정의에 입각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대중 전달 수단을 사용하는 데에서, 인간은 마땅히 절제와 규율을 지켜야 한다.
- 2513 미술, 특히 성미술은 “그 본질상 인간 작품으로 어느 정도 표현해 보려는, 하느님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지향하며, 그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작품으로 인간 정신을 경건하게 하느님께 돌리는 데에 크게 이바지할수록 그만큼 더욱더 하느님께, 하느님 찬미와 현양에 바쳐진다.”(252)
- 제9절 아홉째 계명
-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 20,17).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 2514 요한 사도는 사욕(邪慾) 또는 탐욕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곧 육의 탐욕, 눈의 탐욕 그리고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이다.(253)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아홉째 계명은 육체의 탐욕을 금하고, 열째 계명은 남의 재물을 탐내는 것을 금한다고 가르쳐 왔다.
- 2515 어원을 살펴보면, ‘탐욕’은 인간 욕망의 온갖 격렬한 형태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그 말에다 인간 이성의 소리를 거스르는 감각적인 욕망의 발동이라고 하는 독특한 의미를 부여해 왔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육’이 ‘영’에 대항하여 일으키는 반란으로 본다.(254) 탐욕은 최초의 죄를 낳은 불순종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255) 이는 인간의 도덕적 기능을 문란하게 하며,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인간을 범죄로 기울게 한다.(256)
- 2516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복합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안에는 이미 어떤 긴장이 깃들어 있으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 일종의 싸움이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실상 죄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며, 죄의 결과 중의 하나이자, 동시에 죄를 확증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영적 투쟁의 일부분이다.
- 바오로 사도가 육체를 멸시하거나 단죄하는 것이 아님은 너무나 명백히 드러납니다. 육체는 영혼과 함께 인간의 본성과 주체인 인격을 구성하는 데에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오히려, 사도는 윤리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소행 또는 성향 ─ 덕과 악덕 ─ 을 말합니다. 덕은 구원을 위한 성령의 활동에 대한 순종의 결과이며 악덕은 이 활동에 대한 반항의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5).(257)
- I. 마음의 정화
- 2517 마음은 도덕적 인격의 중심이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 15,19). 육체적 탐욕에 대항하는 싸움은 마음의 정화(淨化)와 절제의 실천을 필요로 한다.
- 소박함과 무구함을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악을 모르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258)
- 2518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은 여섯 번째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것이다”(마태 5,8).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란 주로 사랑,(259) 정결 또는 올바른 성생활,(260) 그리고 진리에 대한 사랑과 정통 신앙,(261) 이 세 측면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의 요구에 자기의 지성과 의지를 일치시킨 사람들을 가리킨다. 마음의 깨끗함과 육체의 깨끗함과 신앙의 순수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신자들은 “믿음으로써 하느님께 순종하며, 순종함으로써 바르게 살아가고, 바르게 살아감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믿는 것을 이해하도록”(262) 신경의 조항들을 믿어야 한다.
- 2519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뵈올 것이며, 하느님을 닮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263)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을 뵙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깨끗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지금부터 벌써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모든 것을 보고,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육체와 이웃의 육체, 곧 인간의 육체를 성령의 성전으로, 하느님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II. 정결을 위한 싸움
- 2520 세례는 세례 받는 사람에게 모든 죄를 정화하는 은총을 입게 해 준다. 그러나 세례 받은 사람은 육체의 탐욕과 부당한 욕망과의 싸움도 계속해야 한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으면 이 싸움에서 이길 것이다.
- - 정결의 덕과 정결의 은혜를 통해서: 정결한 사람은 정직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 인간의 참된 목표를 한결같이 추구하게 하는 의향의 순수성을 통해서: 세례 받은 사람은 모든 일에서 순수한 눈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하기 위해 힘쓴다.(264)
- - 외적 및 내적 시선의 순수성을 통해서, 감수성과 상상력을 통제함으로써,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이 제시하는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더러운 생각에서 생기는 온갖 굴레를 물리침으로써: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욕망이 인다”(지혜 15,5).
- - 기도를 통해서.
- 저는 제 자신의 힘으로 정결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도대체 저는 몰랐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정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어리석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제 마음속의 탄식으로 주님의 귀에 호소하고, 굳센 믿음으로 제 염려를 주님께 맡겨 드렸더라면 분명히 주님께서는 그것을 주셨을 것입니다.(265)
- 2521 정결은 정숙(貞淑)을 요구한다. 정숙함은 절제의 완벽한 구성 요소이다. 정숙은 사람들의 내밀한 면을 보호해 준다. 정숙은 감추어진 채로 있어야 할 것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정숙은 정결을 지향하며, 정결의 신중함을 드러내 준다. 정숙한 사람은 자기 시선과 품행을 타인의 품위와 타인과 맺은 관계의 품위에 알맞게 조절한다.
- 2522 정숙한 사람들은 인간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신비를 보호한다. 정숙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부부 관계에서 인내와 절제를 준수한다. 정숙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내어 주는 결정적 헌신을 위한 조건들을 반드시 지킨다. 정숙한 사람은 단정하게 산다. 정숙한 사람은 점잖은 옷을 골라 입는다. 정숙한 사람은 불건전한 호기심의 위험이 엿보이는 때에는, 침묵을 지키거나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정숙한 사람은 사리를 분별한다.
- 2523 육체의 정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정숙도 있다. 예를 들어서, 감정이 정숙한 사람은 인체에 대한 변태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광고물들을 거부하고, 사생활의 비밀을 지나치게 들추어 내려는 대중 매체들의 유혹을 거부한다. 감정이 정숙한 사람은 유행의 유혹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을 취한다.
- 2524 정숙의 형태는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어디에서든, 정숙은 인간이 고유하게 가진 내적 존엄성을 직감하는 습성이다. 정숙함은 주체 의식의 각성에서 생겨난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정숙함을 가르치는 것은 인간을 존중하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 2525 그리스도교적 정결에는 사회 분위기의 정화가 요구되며, 또한 대중 홍보 수단들은 타인을 존중하는 신중한 보도를 하는 것이 요구된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만연된 선정주의에서 해방되고, 변태적인 호기심과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공연을 피한다.
- 2526 퇴폐풍조에 대한 관대한 태도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그릇된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자유를 확립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도덕률에 따른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에게 진리와 고결한 마음과 인간의 도덕적 정신적 존엄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베풀도록,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 2527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은 죄에 떨어진 인간의 생활과 문화를 줄곧 쇄신하고 언제나 위협적인 죄의 유혹에서 흘러나오는 오류와 악을 극복하며 제거한다. 또 민족들의 도덕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승화시킨다.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의 정신적 특성과 자질을, 마치 내면으로부터 하듯이, 천상 재화로 풍요롭게 하고 강화하고 완성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한다.”(266)
- 간추림
- 2528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 2529 아홉째 계명은 육체의 욕망이나 탐욕을 경계하도록 해준다.
- 2530 육체의 탐욕에 대항하는 싸움은 마음의 정화와 절제의 실천을 필요로 한다.
- 2531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야, 우리는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며, 지금부터 벌써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 2532 마음의 정화는 기도와 정결의 실천, 의향과 시선의 순수함을 필요로 한다.
- 2533 깨끗한 마음은 정숙을 요구하며, 정숙은 인내와 절도와 신중함을 의미한다. 정숙은 인간의 내밀한 면을 보호한다.
- 제10절 열째 계명
-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 20,17).
- 이웃의 집이나 밭,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재산은 무엇이든지 욕심내서는 안 된다(신명 5,21).
-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 2534 열째 계명은 육체의 욕망에 관한 아홉째 계명을 해설하며 이를 보충한다. 이 계명은 일곱째 계명이 금하는 도둑질과 약탈과 사기의 근원인 타인의 재물에 대한 탐욕을 금한다. “눈의 욕망”(1요한 2,16)은 다섯째 계명으로 금지된 폭력과 불의로(267) 이끈다. 탐욕의 기원은, 간음과 같이, 율법의 처음 세 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우상 숭배에 있다.(268) 열째 계명은 마음속 의향과 관련되어 있다. 이 계명은 아홉째 계명과 더불어 율법의 모든 계명을 요약한다.
- I. 탐욕의 무질서
- 2535 감각적인 욕구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원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배고플 때 먹기를 원하고, 추울 때 몸을 따뜻하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들 자체는 선한 것이다. 그러나 흔히 이러한 욕망들은 우리에게, 합리적인 한도를 넘어서면서, 우리의 것이 아니고 타인의 것이거나 마땅히 타인에게 주어야 할 것을 부당하게 탐내도록 한다.
- 2536 열째 계명은 탐욕과 세상의 재물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을 금한다. 이 계명은 부(富)와 그 힘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발생하는 무절제한 욕망을 금한다. 또 이 계명은 이웃의 현세적 재물에 해를 끼치는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고자 하는 욕망도 금한다.
-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 것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욕망을 버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타인의 소유물에 대한 욕심은 광대하고 무한하며, 또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한다.”(코헬 5,9)는 성경 말씀과 같이, 결코 채워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269)
- 2537 이웃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정당한 방법으로 손에 넣기를 바라는 것은 열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교리를 가르치면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죄가 되는 탐욕과 가장 많이 싸워야 할 사람들”, 곧 “이 계명을 지키도록 더욱 권고받아야 할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그들은 물품의 품귀나 가격 상승을 바라는 상인들, 자기들 이외에 같은 물품을 팔고 사는 상인들이 있어서, 자기네들 마음대로 파는 물건의 값을 올리고 사는 물건의 값을 내리게 할 수 없는 것을 배아프게 생각하는 사람들, 자기네들이 파는 물건을 더 비싸게 팔고 사는 물건을 더 싸게 사서 이익을 남기기 위해, 자기들의 동료들이 곤경에 빠지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병자가 발생하기를 바라는 의사들, 중요하고 수많은 송사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법조인들……등이다.(270)
- 2538 열째 계명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기심을 몰아낼 것을 요구한다. 예언자 나탄이 다윗 임금의 회개를 촉구하고자 했을 때, 마치 자식과도 같은 양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과, 가축을 많이 가지고 있었음에도 가난한 사람을 시기하여 마침내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는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271) 시기심은 매우 심각한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272)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지혜 2,24).
- 우리가 서로 싸우고, 서로에게 대항하게 하는 것은 바로 시기심입니다.……만일 모두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위태롭게 하는 데 열중한다면, 우리는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야수들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있습니다.(273)
- 2539 시기심은 치명적인 악습이다. 시기심에 빠진 사람은, 타인의 재산을 볼 때 침울한 마음을 갖고, 그 재산을 옳지 않은 방법으로라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무절제한 욕망을 갖는 사람이다. 이웃에게 크나큰 재앙이 닥치기를 바라는 시기심은 죽을죄가 된다.
-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기심을 “마귀의 죄”(274) 로 이해했다.
- “시기심에서는 증오와 비방과 모함과 이웃의 불행으로 인한 기쁨과 이웃의 성공으로 인한 불쾌감이 생겨납니다.”(275)
- 2540 시기심은 우울의 한 형태로서 사랑의 거부를 나타낸다. 세례 받은 사람은 자비심으로 시기심과 싸워야 한다. 시기심은 흔히 교만에서 나온다. 세례 받은 사람은 겸손하게 사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이다.
- 여러분은 여러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형제의 향상을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 결과로 여러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의 종이 다른 사람들의 공적을 기뻐함으로써 시기심을 이길 수 있었으니, 하느님은 찬미를 받으실 것입니다.(276)
- II. 성령의 소망
- 2541 법과 은총의 섭리로, 인간의 마음은 탐욕과 시기심에서 해방된다. 곧, 법과 은총은 인간의 마음 안에 ‘최고선’에 대한 갈망을 일으켜 주고, 인간의 마음을 채워 주는 성령의 소망에 귀 기울이게 한다.
- 약속의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일 뿐만 아니라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창세 3,6) 보이는 유혹에 대하여 인간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 2542 이스라엘에 맡겨진 율법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기에 결코 충분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율법은 ‘탐욕’을 조장하기까지 하였다.(277) 원의와 행동 사이의 부조화는,(278) 이성의 법인 ‘하느님의 법’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하는”(로마 7,23) 다른 법 사이의 갈등을 가리킨다.
- 2543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1-2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 5,24).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279) 성령의 소망을 따른다.(280)
- III. 마음의 가난
- 2544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앞서서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명하시고, 당신과 복음을 위하여(281) 그들의 소유물을 모두 버리도록 권고하신다.(282)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바로 전에, 궁핍한 가운데서도 살아가기 위해 지녔던 것을 모두 바친 예루살렘의 가난한 과부를 본보기로 드셨다.(283)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재물에 대해서 초연하라는 계명을 꼭 지켜야 한다.
- 2545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기 마음을 바로 다스리도록 정신을 차려야 하며, 복음적 청빈 정신에 어긋나는 현세 사물의 사용이나 재산에 대한 집착으로 완전한 사랑의 추구를 가로막지 않게 하여야 한다.”(284)
- 2546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행복 선언은 행복과 은총, 아름다움과 평화를 차례차례 알려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 나라를 소유한 가난한 사람들의 기쁨을 찬양하신다.(285)
- ‘말씀’께서는 인간 마음의 자발적인 겸손과 포기를 ‘마음의 가난’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 8,9)라고 말할 때, 하느님의 가난을 우리에게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286)
- 2547 부자들은 풍부한 재산에서 위안을 얻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두고 탄식하신다.(287) “교만한 사람들은 지상의 나라를 찾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므로 행복합니다.”(288) 우리 자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섭리에 온전히 맡겨 드림으로써 우리는 내일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된다.(289) 하느님을 신뢰하는 가난한 이들이 참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 IV.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다”
- 2548 진정한 행복에 대한 갈망은, 인간이 현세 재물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행복을 누리게 될 때 충족된다. “하느님을 뵈오리라는 약속은 모든 행복을 초월합니다. 성경에서 본다고 말하는 것은 곧 소유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뵙는 사람은 이 보는 행위 안에서 좋은 것을 모두 얻는 것입니다.”(290)
- 2549 거룩한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 위로부터 오는 은총에 힘입어 싸워야 한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을 뵙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죽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쾌락과 권세에 관한 유혹을 물리친다.
- 2550 이 완덕의 길에서 성령과 신부(新婦)인 교회는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291)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도록 부른다.
- 그곳에는 참된 영광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잘못 칭찬을 받거나 또는 아첨으로 칭찬받지 않을 것이다. 참된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된 영예를 받을 것이고, 부당한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도 영예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격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그곳에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가기를 바라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반대받지 않을 그곳은 참평화가 지배할 것이다. 덕을 주셨고, 또 당신 자신을 덕에 대한 가능한 모든 상급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큰 상급으로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몸소 덕에 대한 상급이 되어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위 26,12).……“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코린 15,28) 한 사도의 말도 바로 이런 의미인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라보고, 싫증을 내지 않고 사랑하며, 지치지 않고 찬미하는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희망의 목적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선물, 이 사랑, 이 소유는 영원한 생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확실히 공통적인 것이다.(292)
- 간추림
- 2551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 2552 열째 계명은 부(富)와 그 힘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발생하는 무절제한 물욕을 금한다.
- 2553 시기심에 빠진 사람은, 타인의 재산을 볼 때 침울한 마음을 갖고, 그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무절제한 욕망을 갖는 사람이다. 시기는 죄종(罪宗)의 하나이다.
- 2554 세례 받은 사람은 자비심과 겸손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에 완전히 의탁하여 시기심과 싸워야 한다.
- 2555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라 5,24).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소망을 따른다.
- 2556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에 대한 초연함이 필요하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2557 인간의 참열망은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영원한 생명의 물로 채워진다.(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