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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도의 보편적 소명
  • 2566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을 무(無)에서 유(有)로 불러내신다.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쓴”(1) 인간은, 천사들 다음으로, “온 땅에 주님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한지”(2) 알아볼 수 있다. 죄 때문에 하느님과 비슷함을 잃어버린 뒤에도,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분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추구를 입증해 준다.(3)
  • 2567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부르신다.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잊거나 또는 창조주의 면전에서 멀리 숨더라도, 자신의 우상을 좇거나 또는 자기를 버렸다고 하느님을 비난하더라도, 살아 계신 참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기도의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기도에서, 성실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의 행위는 언제나 앞서는 것이요,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이 사랑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점차 당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에게 차츰 인간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심에 따라,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하는 호소, 상호 간에 맺어지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 말과 행위를 통하여, 이 계약의 드라마는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이 드라마는 구원의 역사 전반에 걸쳐 펼쳐진다.
  • 제1절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도
  • 2568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계시는, 인간의 타락과 그 속량 사이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첫 자녀에게 탄식조로 “너 어디 있느냐-……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창세 3,9.13) 하신 질문과, 외아들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4) 하신 대답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기도는 인간의 역사와 관련되기에 이르렀고,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맺게 되는 관계가 된 것이다.
  • 창조 ─ 기도의 원천
  • 2569 기도는 먼저 창조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된다. 창세기의 첫 아홉 장에는 아벨이 양 떼 가운데에서 맏배를 봉헌한 일,(5) 에노스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 일,(6)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과(7) 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 노아의 번제물은, 그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를 통하여 만물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8) 이는 그의 마음이 올바르고 청렴하며, 그가 “하느님과 함께 살았기”(창세 6,9)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수많은 의인들이 이 같은 기도를 구현하였다.
  • 살아 있는 존재들과 맺으신 불변의 계약을 통하여,9)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기도할 것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호소하셨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기도가 계시된 것은 특히 우리의 성조 아브라함부터이다.
  • 약속, 믿음의 기도
  • 2570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자, 그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창세 12,4) 바로 길을 떠난다. 그의 마음은 전적으로 “말씀을 따랐으며”, 그는 순종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정하는 마음의 귀 기울임이 기도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말은 부수적인 요소이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먼저 행동으로 표현된다. 말이 없는 사람 아브라함은 머무는 곳마다 주님께 제단을 쌓는다. 나중에야 비로소 말로 표현된 그의 첫 기도를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 기도는 실현될 것 같지 않은 하느님의 약속을 그분께 상기시켜 드리는 은근한 탄식이다.(10) 이렇게 처음부터, 기도의 극적인 일면, 곧 하느님의 성실성을 과연 믿어야 하느냐 하는 믿음의 시련이 나타난다.
  • 2571 하느님을 믿으며,(11)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으로 살아가던(12) 성조는 신비로운 손님을 자신의 천막에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므레에서 한 이 훌륭한 접대는 바로 참된 ‘약속의 아들’의 탄생 예고에 대한 전조이다.(13) 이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아브라함의 마음도 사람들을 동정하시는 주님과 일치하였고, 대담한 신뢰로써 그들을 위해 감히 전구한다.(14)
  • 257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최대한으로 정화하시고자, 그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받은”(히브 11,17)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약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시고”(창세 22,8),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히브 11,19). 이리하여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실 성부를 닮았다.(15) 기도는 인간에게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에 참여하도록 해 준다.(16)
  • 2573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과 당신 약속을 갱신하신다.(17) 야곱은 그의 형 에사우와 맞서기 전에 신비로운 ‘어떤 분’과 밤새도록 싸웠는데, 그분은 그 싸움에서 자신의 이름 밝히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동틀 무렵 그분은 떠나기 전에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교회의 영적 전승은 이 이야기를 기도의 상징으로, 곧 신앙의 싸움과 끈기의 승리로 이해해 왔다.(18)
  • 모세, 중개자의 기도
  • 2574 약속이 실현되기 시작할 무렵(파스카, 이집트 탈출, 율법 수여와 계약 체결), 모세의 기도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1티모 2,5)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전구의 놀라운 표상이 된다.
  • 2575 여기에서도 또한 하느님께서 먼저 행동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신다.(19) 이 사건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영적 전승에서 기도에 대한 원초적 표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를 부르신 것은, 당신께서 인간이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을 계시하시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하지는 않으시며, 인간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하지도 않으신다. 곧,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 자비의 구원 사업에 참여시키려고 그를 파견하신다. 이 파견에서 하느님께서는 간청하시는 분과도 같으며, 모세는 오랜 줄다리기 끝에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는 이 대화를 통해서 모세는 기도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곧, 모세는 회피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며, 특히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형언할 수 없는 이름을 알려 주시는데, 이 이름은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 2576 드디어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 33,11). 모세의 기도는 전형적인 관상 기도이다. 이 기도 덕택으로 하느님의 종은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게 된다. 모세는 주님과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산에 올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탄원하였으며 내려와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 주고 그들을 이끌었다. “나의 종 모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나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민수 12,7-8). “모세는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3).
  • 2577 성실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과(20) 맺은 이 친밀함으로 모세는 그의 전구를 위한 용기와 항구심을 얻는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몫으로 삼으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다. 아말렉족과 싸우는 동안(21) 또는 미르얌의 병이 낫도록(22) 모세는 이미 전구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성이 변절한 뒤에 모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하느님 “앞을 막아서서”(시편 106[105],(23) 그분 앞에 나아갔다.(23) 하느님과 싸우는 모세의 기도(전구도 하나의 신비로운 싸움이다.)는 유다 민족이나 교회의 위대한 전구자들에게 담대함을 심어 준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며 공정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억지를 부리지 않으시며, 당신께서 전에 손수 하신 놀라운 일들을 반드시 기억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과 관련되는 문제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지닌 이 백성을 저버릴 수 없으시다.
  • 다윗, 임금의 기도
  • 2578 하느님 백성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장막, 계약 궤, 그리고 나중에는 성전(聖殿)으로 번져 나가게 된다. 주로 백성의 지도자들, 곧 목자들과 예언자들이 백성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친다. 어린 사무엘은 자기 어머니 한나에게서 “주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24) 배웠을 것이며, 사제 엘리에게서는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배웠던 것이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10). 사무엘도 기도의 가치와 그 중요성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나 또한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거나 하여 주님께 죄를 짓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좋고 바른길을 가르쳐 주겠소”(1사무 12,23).
  • 2579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이었으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또한 그 백성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목자였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그의 순명과 찬미와 참회는 백성에게 기도의 모범이 된다. 하느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로서 다윗이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충실한 믿음이며,(25) 유일한 임금이시고 주님이신 분께 드리는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신뢰였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다윗은, 시편에 나타나듯이,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기도의 첫 예언자이다. 참메시아이시고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의 기도는 다윗이 드렸던 기도의 의미를 드러내고 완성시켜 줄 것이다.
  • 2580 다윗이 건립하고자 했던 기도의 집, 곧 예루살렘 성전은 그의 아들 솔로몬의 업적이 된다. 성전 봉헌 때 바치는 기도는(26) 하느님의 약속과 계약, 당신 백성 가운데 현존하는 하느님 이름의 엄청난 위력, 이집트 탈출의 놀라운 업적에 대한 회상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왕은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자기 자신과 온 백성을 위하여, 미래의 후손들을 위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와 매일의 필요를 위하여, 모든 나라가 주님께서 유일하신 하느님이심을 알고, 백성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도록 기도한다.
  • 엘리야, 예언자들과 마음의 회개
  • 2581 성전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장소가 되어야 했다. 곧, 순례, 축제, 희생 제사, 저녁 제사, 향, ‘제사 음식’과 같이, 지극히 높으시고 아주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내는 이 모든 표징들은, 기도하라는 호소이자 기도로 이끄는 길이었다. 그러나 흔히 형식주의는 백성을 지나치게 외적인 예배로 이끌어 가곤 했다. 그리하여 신앙 교육과 마음의 회개가 필요하였다. 이것이 귀양살이 이전과 이후의 예언자들이 맡은 사명이었다.
  • 2582 엘리야는 예언자들의 아버지이며 주님을 찾는 족속,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이들의 아버지였다.(27) “주님께서는 나의 하느님이시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의 이름은, 카르멜 산에서 올린 그의 기도를 향하여 응답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예고한다.(28)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촉구하려고 엘리야를 회상시킨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6).(29)
  • 2583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자비를 깨달은 엘리야는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르친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과부의 믿음을 확고하게 한다. 하느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 주신 것이다.(30)
  • 카르멜 산에서 드린 제사는 하느님 백성의 믿음을 시험하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엘리야가 기도를 드리자,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에” 주님의 불이 제물을 태운다.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바로 엘리야가 했던 이 말은 동방 교회 감사 기도의 성령 청원 기도에서 되풀이되고 있다.(31)
  • 끝으로, 살아 계신 참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던 곳을 향하여 사막의 길을 가던 엘리야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신비로운 모습의 하느님께서 “지나가실” 때까지 “동굴 속에” 몸을 숨겼다.(32) 그러나 그들이 찾던 하느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변모의 산에서야 비로소 당신 얼굴을 드러내실 것이다.(3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본다.(34)
  • 2584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단둘이 있음으로써” 그들의 사명을 위한 빛과 힘을 얻는다. 그들의 기도는 불충한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때로는 하느님과 따져 보기도 하고 하느님께 탄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역사의 주인이신 구세주 하느님의 개입을 열망하고 준비하는 중개의 기도이다.(35)
  • 시편, 회중의 기도
  • 2585 다윗 이래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성경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를 위한 깊이 있는 기도문들을 수록하고 있다.(36) 시편들은 점차 다섯 권으로 모아 놓은 전집이 되었다. 시편(또는 ‘찬미가’)은 구약 성경에 수록된 기도의 걸작이다.
  • 2586 시편은 큰 축일 때 예루살렘에, 그리고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인 하느님 백성 곧 회중의 기도를 표현하며 풍요롭게 한다. 이 기도는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이 기도는, 기도드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관련된다. 시편은 ‘거룩한 땅’에서 또 유민(流民: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서 바치지만, 만민을 다 포용한다. 이 기도는 과거의 구원 사건들을 상기시키며, 역사의 종말에까지 미친다. 이 기도는 이미 실현된 하느님의 약속들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들을 결정적으로 실현하실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바치시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 시편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핵심으로 머물러 있다.(37)
  • 2587 시편집은 그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기도가 되는 책이다. 구약의 다른 책들에서 “말씀들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업적들을 선포하며 그 안에 포함된 신비들을 밝혀 준다.”(38) 그러나 시편 작가는 시를 지어 하느님께 노래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밝힌다. 하느님의 일을 추진하시는 분도, 인간의 응답을 불러일으키시는 분도 같은 성령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를 통합시키실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편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를 가르쳐 준다.
  • 2588 시편 기도에 담겨진 다양한 표현들은 성전의 전례 안에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구체화한 것들이다. 시편은 찬미가, 탄식 기도나 감사, 개인이나 공동체의 간구, 왕의 노래 또는 순례의 노래, 지혜의 명상 등을 담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한결같이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과 시편 작가가 인생살이에서 체험한 인간적 상황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시편은 과거의 사건을 반영할 수도 있으나, 참으로 간결한 기도이기 때문에, 신분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든지 바칠 수 있는 진실한 기도이다.
  • 2589 시편들 안에는 일관된 특징들이 발견된다. 기도의 소박함과 자발성, 피조물 안의 모든 좋은 것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들과 더불어 드러나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 또한 주님을 더 사랑함으로써 많은 원수들과 유혹의 표적이 된 믿는 이들의 괴로운 처지, 그리고 성실하신 주님께서 행하실 것을 기다리며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분의 뜻에 맡겨 드리는 의탁의 자세 등이 시편 전체를 일관한다. 시편의 기도는 언제나 찬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때문에 ‘찬미가’라는 이 책의 이름은, 시편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내용과 참으로 어울린다. 회중의 예배를 위해 모아 놓은 시편집은 우리를 기도로 초대하며, 우리가 “할렐루-야!”(알렐루야), “주님을 찬미하여라!” 하는 노래로 그 초대에 응답하게 한다.
  • 시편보다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윗 자신이 아름답게 말해 줍니다. “주님을 찬양하라, 노래도 좋을씨고. 하느님 노래하라, 찬미도 고울씨고.” 그렇습니다. 시편은 백성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하느님께 바치는 찬양이며, 회중이 드리는 찬미의 노래이고, 모든 이가 치는 손뼉입니다. 보편적인 교훈이고, 교회의 목소리요, 노래로 바치는 신앙 고백입니다.…….(39)
  • 간추림
  • 2590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며,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것이다.”(40)
  • 2591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당신과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부르는 호소로서, 구원 역사 전체에 함께하고 있다.
  • 2592 아브라함과 야곱의 기도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꾸준히 신뢰하는 것으로, 약속된 승리를 확신하기 위하여 겪어야 하는 신앙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 2593 모세의 기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 부르시는 것에 대한 응답이다. 모세의 기도는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기도를 예시한다.
  • 2594 하느님 백성의 기도는, 하느님의 장막, 계약 궤, 성전과 같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목자들, 특히 다윗 왕과 예언자들의 지도 아래 꽃을 피운다.
  • 2595 예언자들은 마음의 회개를 호소한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하느님의 얼굴을 열렬히 찾으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한다.
  • 2596 시편은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걸작을 이룬다. 시편은 뗄 수 없는 두 가지 요소, 곧 개인적 요소와 공동체적 요소를 보여 준다. 시편은 이미 이루어진 하느님의 약속을 기념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희망함으로써, 역사의 모든 차원에까지 미친다.
  • 2597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바치시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 시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근본적이고 불변하는 요소이다. 시편은 계층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이가 드리기에 적합한 기도이다.
  • 제2절 때가 찼을 때의 기도
  • 2598 기도의 드라마는,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났다. 복음서 안에서 주님의 증인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들을 통하여 그분의 기도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에 다가가듯 거룩하신 주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곧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 주시는지를 깨닫도록 힘쓰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다
  • 2599 동정녀의 아들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또한 당신께서 지니신 인간 심성에 따라 기도하는 법을 배우셨다.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께서 마련하신 “큰일”들을 모두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묵상하시던(41) 당신 어머니에게서 기도문을 배우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의 회당과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당신 동포들이 기도할 때 썼던 말과 운율에 젖어 기도를 배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벌써 열두 살 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암시하셨듯이, 좀 더 신비로운 원천에서 솟아 나온 기도였다. 바로 여기에서 때가 차 드리신 기도의 새로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던 자녀다운 기도를, 마침내 사람이 되신 외아들께서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을 위하여 바치신 것이다.
  • 2600 루카 복음은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성령의 작용과 기도의 의미를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이행하는 결정적인 순간들을 앞두고 기도하신다. 당신의 세례와(42) 영광스러운 변모(43) 때에 성부께서 당신에 대해 증언해 주시기에 앞서, 그리고 당신의 수난을 통해 성부께서 세우신 사랑의 계획을 성취하시기에 앞서(44) 먼저 기도하신다. 사도들이 부여받은 임무를 시작하려던 결정적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신다. 곧,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부르시기 전에,(45)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전에,(46) 또한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신앙이 유혹으로 약해지지 않도록(47)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신다. 성부께서 성취하라고 명하신 구원 활동을 펼치시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드리는 기도는, 그분께서 인간으로서 지니신 뜻을 겸손과 신뢰로써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의 뜻에 맡겨 드리는 기도이다.
  • 260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그리스도의 제자는 기도하시는 스승을 보면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그는 기도하시는 스승에게서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성자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들음으로써 성부께 기도드리는 것을 배우게 된다.
  • 2602 예수님께서는 되도록이면 밤에, 홀로, 산으로 물러가셔서 자주 기도하셨다.(48) 예수님께서는, 강생하심으로써 인류를 완전히 떠맡으셨기 때문에, 기도에서도 사람들을 떠맡고 계시며, 당신 자신을 성부께 바치심으로써 그들을 또한 성부께 봉헌하신다. “육체를 취하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간적인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형제들”이(49) 겪는 모든 일에 참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나약함에서 해방시키시려고 그들의 나약함을 함께 겪으셨다.(50) 바로 이를 위하여 성부께서는 그분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일들은 그분께서 ‘은밀하게 드리시던’ 기도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 2603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드리셨던 두 편의 기도를 아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기도는 각각 감사로 시작된다. 첫째 기도에서,(51)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하늘 나라의 신비를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들”(참행복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분으로 고백하시며, 성부를 그러한 분으로 알아 뵙고 성부께 찬미를 드리신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고 예수님께서 외치신 감탄사는 그분의 깊은 마음속을 드러내며, 성부의 뜻에 순종하시는 그분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외침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말씀을 반향하는 것이요,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고뇌하시던 중에 성부께 드리신 말씀의 전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그분께서 인간으로서 지니신 충만한 사랑의 마음으로 성부의 “심오한 뜻”을(52)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의로 집약된다.
  • 2604 둘째 기도는 성 요한 복음사가가(53) 라자로의 부활 사건 전에 기술하고 있다. 그 사건은 감사의 기도로 시작된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에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예수님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곧 이렇게 덧붙이신다.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청하고 계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감사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선물을 받으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선물을 주시고 그 선물을 통해 당신 자신도 함께 주시는 분과 일치하시는 것이다. 베풀어진 선물보다도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이 더 소중하다. 선사하시는 성부께서 곧 ‘보화’이시며, 성부의 아들의 마음은 그분 안에 있다. 선물은 “곁들여”(54) 주어지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사제로서 드리신 기도’는(55) 구원 경륜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기도에 대해서는 제1부의 끝에 가서 깊이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기도는 언제나 현재 시점에서 바치시는 우리 대사제의 기도를 알려 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을 담고 있다. 주님의 기도에 대해서는 제2부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 2605 성부의 사랑의 계획을 성취하실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 바치시는 기도의 심오함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붙잡히시기 전에 바치신 기도(“아버지,……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에서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들을 통해서도, 기도하는 것과 당신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동일한 행동임을 보여 주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목마르다!”(요한 19,28),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56)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리고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실 때에도,(57) 예수님의 기도와 자기 증여는 동일하다.
  • 2606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인류가 지나온 모든 시대의 온갖 고뇌, 그리고 구원 역사에 나타나는 모든 청원과 전구는 강생하신 말씀의 이 ‘큰 소리’ 속에 합류된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시고, 모든 희망을 뛰어넘어, 당신 아드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들어 주신다. 이렇게 해서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통해 기도의 드라마가 전개되고 완성된다. 시편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드라마의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영원한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눈앞에 두고, 성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시편 2,7-8).(58)
  •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기도가 어떻게 구원의 승리를 가져다주는지를 극적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7-9).
  •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시다
  • 2607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벌써 기도를 가르치신다.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처해 있는 곳에서 그대로 우리를 받아들이시어, 점차적으로 우리를 성부께 인도해 가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는 군중을 뒤돌아보시며, 그들이 구약의 계약을 통하여 이미 기도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에서 출발하여, 다가올 하늘 나라의 새로움에 마음을 열게 하신다. 그다음에 그 새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비유로 알려 주신다. 끝으로, 당신 교회에서 기도의 교사들이 되어야 할 제자들에게는 아버지와 성령에 대해 숨김없이 말씀해 주신다.
  • 2608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마음의 회개를 강조하셨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여라,(59)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60) “골방에서”(마태 6,6)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많은 말을 되풀이하지 마라,(61) 기도할 때 마음속으로부터 용서하여라,(62)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 나라를 구하여라(63) 하셨다. 이 같은 회개는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는 것이며, 또 자녀다운 것이다.
  • 2609 이처럼 회개하기로 결심한 마음은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믿음은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는 것을 초월하여 자녀로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랑하는 아들께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문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찾아라.” 그리고 “문을 두드려라.” 하고 요구하실 수 있다.(64)
  • 2610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 아버지의 선물을 받으시기 전에 감사를 드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녀다운 대담성을 가르쳐 주신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기도의 힘이 이와 같다. 곧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65)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믿음이 없음”(마르 6,6)과 제자들의 믿음이 약함을(66) 보시고 슬퍼하신 만큼, 로마 사람 백인대장과(67) 가나안 여자의(68) 크나큰 믿음을 목격하시고는 경탄하신다.
  • 2611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믿음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69)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하느님의 계획에 협력하려는 마음을 지니라고 제자들에게 촉구하신다.(70)
  • 2612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마르 1,15),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것과, 깨어 있을 것을 호소하신다. 제자는 기도 중에, 비천하게 사람이 되신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억하고,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희망하면서, ‘언제나 계시며,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린다.(71) 스승과 일치하여 바치는 제자들의 기도는 하나의 싸움이다. 깨어 기도함으로써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72)
  • 2613 루카 성인은 기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세 가지 비유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 첫 번째 비유, 곧 “벗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는(73)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라고 촉구한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고, 특히 모든 선물을 가지고 계시는 성령을 주실 것이다.
  • 두 번째 비유, 곧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는(74) 기도의 특성 중 하나에 중점을 둔 것으로, 믿음에 따르는 인내를 가지고서, “지치지 말고 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세 번째 비유, 곧 “바리사이와 세리의 예화”는(75) 기도하는 마음의 겸손에 관한 것이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교회는 이 기도를 끊임없이 자신의 기도로 삼아 왔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
  • 2614 예수님께서 성부께 드리신 기도의 신비를 제자들에게 숨김없이 밝혀 주신 것은, 당신께서 영광스러운 인성을 지닌 채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가신 그때에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와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신 것이다. 이제 새로운 기도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다.(76)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요한 14,6)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제자들은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믿음은 사랑 안에서 그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게 되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안에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게 된다. 이 새 계약에 따라서, 우리의 청원이 허락되리라는 확신은 예수님의 기도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77)
  • 2615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와 결합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 기도와 기도드리는 상황의 이 새로움은 예수님의 고별사를 통해서도 나타난다.(78) 성령과 하나 되어 바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신다
  • 2616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드리는 기도를 공생활 동안에 이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을 앞당기는 징표들을 통해서 들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말로 표현되었거나(나병 환자,(79) 야이로,(80) 가나안 여자,(81) 회개한 죄수(82) ), 또는 침묵 중에 표명되었던(중풍 병자를 떠메고 온 사람들,(83) 예수님의 옷을 만진 하혈증을 앓는 여자,(84) 죄 많은 여자의 눈물과 향유(85) ) 믿음의 기도들을 들어 주셨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또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며 탄식했던 소경들의 애원은,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의 전승 안에서 이렇게 인용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병을 치유해 주시거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당신께 애원하는 기도에 늘 응답해 주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예수님의 기도가 지니고 있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을 훌륭하게 요약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또한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입니다.”(86)
  • 동정 마리아의 기도
  • 2617 마리아의 기도는 때가 차 오는 여명에 우리에게 알려진다. 하느님의 아들이 강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성령께서 세상에 강림하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잉태를 위한 주님 탄생 예고 때,(87)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성령 강림 때에(88) 마리아께서 바치신 기도는 성부의 자비로운 계획에 탁월하게 협력하는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기다려오신 승낙은 하느님의 비천한 여종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전능하신 분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전 존재를 바쳐 응답하신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루어지소서!”(Fiat)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기도, 곧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셨으니, 우리도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겠다는 기도이다.
  • 2618 복음서는 마리아께서 믿음 안에서 어떻게 기도하고 전구하시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카나에서(89)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을 당신의 아들에게 청하신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는 또 다른 잔치, 곧 당신의 신부인 교회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몸과 피를 내주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상징한다. 그리고 새 계약이 맺어지는 시각에, 십자가 아래에서,(90) 마리아께서는 ‘새 하와’로, ‘여인’으로, ‘살아 있는 이들의 참어머니’로 받아들여진다.
  • 2619 이런 까닭에, 라틴 말로는 마니피캇(Magnificat), 비잔틴 말로는 메갈리네이(Megalynei)인, “성모의 노래”는(91) 하느님의 어머니의 노래이자 교회의 노래이며, 시온의 딸의 노래이자 하느님의 새 백성의 노래이고, 구원 경륜 안에서 충만하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감사의 노래이며,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언약하신 약속의 이행을 통해서 그 희망이 채워진 ‘가난한 사람들’의 노래이다.
  • 간추림
  • 2620 신약 성경에서 기도의 완전한 본보기는 예수님의 자녀다운 기도에서 발견된다. 자주 고독 속에서 은밀히 행하신 예수님의 기도에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랑으로 충만한 동의와, 기도가 받아들여지리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들어 있다.
  • 2621 예수님께서는 그 가르침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깨끗한 마음과 생생하고 꾸준한 믿음 그리고 자녀다운 대담성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촉구하시며,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청하라고 권고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드리는 기도를 친히 들어 주신다.
  • 2622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와 ‘성모의 노래’(Magnificat) 에 담겨 있는 동정 마리아의 기도는, 믿음을 통하여 당신의 전 존재를 아낌없이 바치는 특성을 띠고 있다.
  • 제3절 교회 시대의 기도
  • 2623 오순절 날에, “한자리에 모여”(사도 2,1)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며”(사도 1,14) 그분을 기다리던 제자들 위에 약속된 성령께서 내리셨다. 교회를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는(92) 성령께서는 또한 교회가 기도 생활로 성장하게 하신다.
  • 2624 예루살렘의 첫 공동체 안에서, 믿는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이는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곧 사도들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 사랑으로써 그 진실성이 입증되는 교회의 기도는 성체성사로써 양육된다.
  • 2625 이 기도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신자들이 성경에서 듣고 읽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 특별히 시편의 기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을 근거로 하여, 이 시편들을 현재 상황에 따라 새롭게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 바친다.(93) 기도하는 교회에게 그리스도를 상기시켜 주시는 성령께서는 또한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교회 생활과 성사와 교회의 사명 수행에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게 될 새로운 기도문들이 생겨나게 하신다. 이러한 기도문들은 위대한 전례적 영적 전승들 안에서 발전되어 갈 것이다. 신약 성경 곧 사도들의 저서와 정경(正經) 안에 들어 있는 기도문들은 그리스도교 기도의 규범이 될 것이다.
  • I. 찬미와 흠숭
  • 2626 찬미는 그리스도인 기도의 기본 움직임을 드러낸다. 찬미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다. 찬미 안에서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과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서로 대화하며 결합한다. 찬미 기도는 하느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곧, 하느님께서 강복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 2627 이 움직임은 두 가지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올라가는 움직임 곧 찬미이다(우리에게 강복하셨기에 우리는 성부를 찬미한다).(94)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내려오시는 성령의 은혜를 간청하는 것이다(성부께서는 우리에게 강복하신다).(95)
  • 2628 흠숭은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임을 깨달은 인간이 취하는 기본 자세이다. 흠숭은 우리를 지어 내신 주님의 위대함과,(96) 우리를 악에서 구해 내시는 구세주의 전능을 드높이는 것이다. 흠숭은 “영광의 임금님”(97) 앞에서 인간이 마음을 쏟아 꿇어 엎드리는 것이며, “언제나 더욱 위대하신”(98) 하느님 면전에서 존경 어린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지극히 거룩하시며 최고의 사랑을 받으셔야 할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우리를 겸손되게 하고, 우리의 간청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
  • II. 청원 기도
  • 2629 탄원(supplicatio)이라는 낱말은 신약 성경에서 그 의미가 풍부하게 나타난다. 곧, 청원하다, 애원하다, 끈질기게 청하다, 호소하다, 부르짖다, 울부짖다 등의 의미와 “기도를 통한 줄다리기”라는(99) 의미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가장 일상적인 형태는 청원이며, 이는 청원이 가장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청원 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다.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원(起源)도 아니고, 우리가 당하는 역경을 마음대로 없앨 수 있는 주인도 아니며, 우리의 궁극 목적도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아버지께 등을 돌린 죄인임을 알고 있다. 청원은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섬을 의미한다.
  • 2630 신약 성경에는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비탄의 기도가 거의 없다. 우리가 비록 아직은 기다림 중에 있고 날마다 회개해야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청원은 희망으로 지탱된다. 비탄보다 훨씬 더 깊은 데서 솟아나는 그리스도교 청원을 바오로 사도는 탄식이라고 부른다. 이 탄식은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로마 8,22) 모든 피조물의 탄식이기도 하며, 우리의 탄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3-24). 끝으로, 이 탄식은 바로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는”(로마 8,26) 성령의 탄식이다.
  • 2631 용서를 청함은 청원 기도의 첫 단계이다(“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세리, 루카 18,13). 용서를 청함은 올바르고 순수한 기도의 전제 조건이다. 겸손하고 신뢰심을 가져야만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타인들과도 친교를 나누어, 다시 빛 가운데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100)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된다”(1요한 3,22). 용서를 청함은, 개인이 드리는 기도에서 그러하듯이, 성찬 전례에 앞서 이루어져야 할 행동이다.
  • 2632 그리스도인의 청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고 찾는 것에 집중된다.(101) 청원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청하고, 다음에는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고 그 나라의 도래에 협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청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맡으신 임무에 대하여 그와 같이 협력하는 것은 이제 교회의 사명으로서, 사도 공동체가 이 협력 문제를 기도의 주제로 삼고 있다.(102) 참으로 출중한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기도는, 모든 교회에 관한 숭고한 염려가 그리스도인 기도의 중요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103)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 2633 이렇게 하여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이 청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모든 사람을 속량하려고 모든 것을 떠맡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104) 이러한 확신에서 야고보(105) 와 바오로(106) 사도는 언제나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
  • III. 전 구
  • 2634 전구(轉求)는 우리의 기도를 예수님의 기도와 매우 흡사하게 해 주는 청원 기도의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특히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전구자이시다.(107)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 7,25). 성령께서도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27).
  • 2635 다른 사람을 위하여 청원하는 전구는 아브라함 이래로,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일치된 인간 마음의 특징이다. 교회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인의 전구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며, 성인들의 통공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구에서, 기도하는 이는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며”(필리 2,4),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위해서까지 기도한다.(108)
  • 2636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이런 형태의 나눔을 철저히 실천하였다.(109) 바오로 사도는 그렇게 기도하는 공동체들을 그의 복음 선포 직무에 참여시키면서도,(110) 그들을 위하여 전구한다.(111) 그리스도인의 전구에는 한계가 없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1티모 2,1),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112)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113) 간구한다.
  • IV. 감사 기도
  • 2637 감사 행위는 교회의 기도를 특징짓는다. 교회는 감사의 제사인 성찬례를 거행하여, 자신의 정체를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본질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구원 사업을 통해서 창조된 만물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그것을 다시 거룩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께 돌아서게 하신다. 지체가 드리는 감사 행위는 그 머리의 감사 행위에 참여한다.
  • 2638 모든 사건과 모든 필요는, 청원 기도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감사 기도의 동기가 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흔히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끝맺으며, 또한 감사의 대목에서는 언제나 주 예수님이 언급되고 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 V. 찬양 기도
  • 2639 찬양은 하느님께서 진정 하느님이심을 한결 더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기도의 형태이다. 찬양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기리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찬양은, 영광 중에 하느님을 뵙기 전에, 믿음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누리는 참행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과 일치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며,(114) 그 외아들을 증언하신다. 그 외아들 안에서 우리가 양자로 받아들여지고, 그 외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찬양은 기도의 다른 형태들을 통합하여, 만물의 근원이시며 목표이신 그분께 인도한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1코린 8,6).
  • 2640 루카 성인은 그의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앞에서 터져 나온 감탄과 찬양에 대해 자주 언급하며, 사도행전에 기술되어 있는 성령의 행적에 관한 감탄과 찬양에 대해서도 또한 강조한다. 그것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생활,(115)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쳐 준 일,(116) 그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군중들,(117)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는”(사도 13,48) 피시디아의 이방인들의 경우이다.
  • 2641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에페 5,19).(118) 영감을 받은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그러했듯이, 초기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도 시편을 새로운 각도에서 읽고, 시편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노래하였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총을 받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통해 실현하신 놀라운 사건, 곧 그분의 강생, 죽음을 정복한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신 그분의 승천 등을 주제로 하여 찬미가와 송가를 지었다.(119) ‘경이로운’ 이 구원 경륜 전체에 대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인 영광송이 울려 퍼졌다.(120)
  • 2642 “곧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계시인 요한 묵시록은 천상 전례의 찬미가뿐(121) 아니라, 또한 “증인들”(순교자들)의(122) 전구로 점철되어 있다. 예언자들과 성인들,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이,(123) 큰 고난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하늘 나라에 간 사람들의 큰 무리가, 옥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 양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124) 그들과 일치하여, 지상의 교회 또한 신앙과 시련 속에서 그와 같은 찬미가들을 부른다. 신앙은 청원과 전구를 통하여,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고, “모든 완전한 은사를 내려 주시는 빛의 아버지”께(125) 감사를 드린다. 이처럼 신앙은 순수한 찬미이다.
  • 2643 성찬례는 모든 형태의 기도를 포함하며 드러낸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하느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정결한 제물”로 봉헌하는 것이다.(126) 동방과 서방의 전통에 따르면, 성찬례는 ‘찬미의 제사’이다.
  • 간추림
  • 2644 교회를 가르치시고 또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되새기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변하지 않는 기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그 표현에서 새로운, 찬미, 청원, 전구, 감사, 찬양의 기도 등이 생겨나게 하심으로써 교회에게 기도 생활도 가르치신다.
  • 2645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에, 인간은 그 보답으로 모든 복의 원천이신 분께 찬미를 드릴 수 있다.
  • 2646 청원 기도의 목표는 용서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추구, 그리고 필요한 모든 것을 청하는 것이다.
  • 2647 전구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청원하는 것이다. 전구에는 한계가 없으며, 원수들을 위해서도 전구한다.
  • 2648 모든 기쁨과 모든 슬픔, 모든 사건과 모든 필요가 다 감사를 드리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으니, 그리스도의 감사 기도에 참여하게 해 주는 이 감사 행위는 전 생애에 걸쳐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8).
  • 2649 이해관계를 완전히 초월한 찬양 기도는 하느님께 향한다. 찬양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을 기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