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
- 제2부 주님의 기도 “우리 아버지”
제 1 부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
- 2558 “신앙의 신비는 위대하다."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신앙의 신비를 고백하며(제1편), 성사 전례 중에 이를 거행하여(제2편), 신자들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도록 한다(제3편).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신비를 믿고 거행하며, 또한 살아 계시는 참하느님과 맺는 생생하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이 신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바로 기도이다.
- 기도란 무엇인가-
- 저에게는 기도가 마음의 약동이며, 하늘을 바라보는 단순한 눈길이고, 기쁠 때와 마찬가지로 시련을 겪을 때에도 부르짖는 감사와 사랑의 외침입니다.1)
- 하느님의 선물인 기도
- 2559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며,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것이다.”(2) 우리는 어떤 자세로 기도하는가- 우리의 교만과 우리 자신의 원의라는 고자세에서 하는 가, 아니면 “깊은 곳에서”(시편 130(129),1) 뉘우치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는가- 겸손한 사람은 드높여진다.(3) 겸손은 기도의 초석이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릅니다”(로마 8,26). 겸손은 기도의 선물을 무상으로 받기 위한 마음가짐이다. “인간은 하느님께 비는 걸인이기”(4) 때문이다.
- 2560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요한 4,10) 우리가 물을 길으러 가는 우물가, 바로 그곳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놀랍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시려고 우물가로 나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시고, 마실 물을 달라고 우리에게 청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목말라하신다. 예수님의 청은 우리를 갈망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목마름에서 나온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기도는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목말라하기를 갈망하신다.(5)
- 2561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역설적으로 우리의 청원 기도는 하나의 응답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탄식에 대한 응답이다. “내 백성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예레 2,13). 청원 기도는 무상의 구원을 약속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응답이며,(6) 외아들의 목마름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찬 응답이다.(7)
- 계약인 기도
- 2562 인간의 기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기도를 드리는 표현 수단이 어떠한 것이든(몸짓이든 말이든), 온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가 솟아 나오는 곳을 가리킬 때, 성경은 때때로 그곳이 영혼이나 정신이라고 하지만, 마음이라고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천 번 이상). 마음이 기도하는 것이다.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기도의 표현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 2563 마음은 내가 존재하고 내가 머무는 거처(셈 족이나 성경의 표현으로는 ‘내가 내려가는 곳’)이다. 마음은 우리의 이성이나 타인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우리의 숨겨진 중심이다. 그러기에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만이 마음을 살피고 감지하실 수 있다. 마음은 우리의 심리적 성향의 가장 깊은 곳이기에, 결단을 내리는 자리이다. 마음은 우리가 삶이나 죽음을 선택하는 곳, 바로 진리의 자리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마음은 서로가 만나는 자리이며, 계약이 체결되는 자리이다.
- 2564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관계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행위이며 인간의 행위이다. 곧, 기도는 성령과 우리에게서 솟아나서, 사람이 되신 성자의 인간적인 의지와 결합되어 온전히 성부께 향한다.
- 친교인 기도
- 2565 신약에서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무한히 선하신 성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성령과 맺는 생생한 관계이다. 하늘 나라의 은총이란 “거룩하고 고귀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간의 마음이 온전히 결합되는 바로 그것이다.”(8) 그러므로 기도 생활이란 평소에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면전에서 지내는 것이며,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생활은 언제나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9) 기도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 그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확장되어 가는 그만큼, 그리스도다운 기도가 되는 것이다. 기도의 차원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차원이다.
- 제 1 장 기도에 대한 계시
- 기도의 보편적 소명
- 2566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을 무(無)에서 유(有)로 불러내신다.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쓴”(1) 인간은, 천사들 다음으로, “온 땅에 주님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한지”(2) 알아볼 수 있다. 죄 때문에 하느님과 비슷함을 잃어버린 뒤에도,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분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추구를 입증해 준다.(3)
- 2567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부르신다.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잊거나 또는 창조주의 면전에서 멀리 숨더라도, 자신의 우상을 좇거나 또는 자기를 버렸다고 하느님을 비난하더라도, 살아 계신 참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기도의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기도에서, 성실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의 행위는 언제나 앞서는 것이요,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이 사랑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점차 당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에게 차츰 인간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심에 따라,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하는 호소, 상호 간에 맺어지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 말과 행위를 통하여, 이 계약의 드라마는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이 드라마는 구원의 역사 전반에 걸쳐 펼쳐진다.
- 제1절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도
- 2568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계시는, 인간의 타락과 그 속량 사이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첫 자녀에게 탄식조로 “너 어디 있느냐-……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창세 3,9.13) 하신 질문과, 외아들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4) 하신 대답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기도는 인간의 역사와 관련되기에 이르렀고,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맺게 되는 관계가 된 것이다.
- 창조 ─ 기도의 원천
- 2569 기도는 먼저 창조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된다. 창세기의 첫 아홉 장에는 아벨이 양 떼 가운데에서 맏배를 봉헌한 일,(5) 에노스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 일,(6)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과(7) 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 노아의 번제물은, 그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를 통하여 만물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8) 이는 그의 마음이 올바르고 청렴하며, 그가 “하느님과 함께 살았기”(창세 6,9)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수많은 의인들이 이 같은 기도를 구현하였다.
- 살아 있는 존재들과 맺으신 불변의 계약을 통하여,9)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기도할 것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호소하셨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기도가 계시된 것은 특히 우리의 성조 아브라함부터이다.
- 약속, 믿음의 기도
- 2570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자, 그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창세 12,4) 바로 길을 떠난다. 그의 마음은 전적으로 “말씀을 따랐으며”, 그는 순종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정하는 마음의 귀 기울임이 기도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말은 부수적인 요소이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먼저 행동으로 표현된다. 말이 없는 사람 아브라함은 머무는 곳마다 주님께 제단을 쌓는다. 나중에야 비로소 말로 표현된 그의 첫 기도를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 기도는 실현될 것 같지 않은 하느님의 약속을 그분께 상기시켜 드리는 은근한 탄식이다.(10) 이렇게 처음부터, 기도의 극적인 일면, 곧 하느님의 성실성을 과연 믿어야 하느냐 하는 믿음의 시련이 나타난다.
- 2571 하느님을 믿으며,(11)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으로 살아가던(12) 성조는 신비로운 손님을 자신의 천막에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므레에서 한 이 훌륭한 접대는 바로 참된 ‘약속의 아들’의 탄생 예고에 대한 전조이다.(13) 이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아브라함의 마음도 사람들을 동정하시는 주님과 일치하였고, 대담한 신뢰로써 그들을 위해 감히 전구한다.(14)
- 257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최대한으로 정화하시고자, 그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받은”(히브 11,17)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약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시고”(창세 22,8),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히브 11,19). 이리하여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실 성부를 닮았다.(15) 기도는 인간에게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에 참여하도록 해 준다.(16)
- 2573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과 당신 약속을 갱신하신다.(17) 야곱은 그의 형 에사우와 맞서기 전에 신비로운 ‘어떤 분’과 밤새도록 싸웠는데, 그분은 그 싸움에서 자신의 이름 밝히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동틀 무렵 그분은 떠나기 전에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교회의 영적 전승은 이 이야기를 기도의 상징으로, 곧 신앙의 싸움과 끈기의 승리로 이해해 왔다.(18)
- 모세, 중개자의 기도
- 2574 약속이 실현되기 시작할 무렵(파스카, 이집트 탈출, 율법 수여와 계약 체결), 모세의 기도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1티모 2,5)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전구의 놀라운 표상이 된다.
- 2575 여기에서도 또한 하느님께서 먼저 행동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신다.(19) 이 사건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영적 전승에서 기도에 대한 원초적 표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를 부르신 것은, 당신께서 인간이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을 계시하시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하지는 않으시며, 인간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하지도 않으신다. 곧,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 자비의 구원 사업에 참여시키려고 그를 파견하신다. 이 파견에서 하느님께서는 간청하시는 분과도 같으며, 모세는 오랜 줄다리기 끝에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는 이 대화를 통해서 모세는 기도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곧, 모세는 회피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며, 특히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형언할 수 없는 이름을 알려 주시는데, 이 이름은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 2576 드디어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 33,11). 모세의 기도는 전형적인 관상 기도이다. 이 기도 덕택으로 하느님의 종은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게 된다. 모세는 주님과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산에 올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탄원하였으며 내려와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 주고 그들을 이끌었다. “나의 종 모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나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민수 12,7-8). “모세는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3).
- 2577 성실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과(20) 맺은 이 친밀함으로 모세는 그의 전구를 위한 용기와 항구심을 얻는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몫으로 삼으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다. 아말렉족과 싸우는 동안(21) 또는 미르얌의 병이 낫도록(22) 모세는 이미 전구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성이 변절한 뒤에 모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하느님 “앞을 막아서서”(시편 106[105],(23) 그분 앞에 나아갔다.(23) 하느님과 싸우는 모세의 기도(전구도 하나의 신비로운 싸움이다.)는 유다 민족이나 교회의 위대한 전구자들에게 담대함을 심어 준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며 공정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억지를 부리지 않으시며, 당신께서 전에 손수 하신 놀라운 일들을 반드시 기억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과 관련되는 문제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지닌 이 백성을 저버릴 수 없으시다.
- 다윗, 임금의 기도
- 2578 하느님 백성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장막, 계약 궤, 그리고 나중에는 성전(聖殿)으로 번져 나가게 된다. 주로 백성의 지도자들, 곧 목자들과 예언자들이 백성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친다. 어린 사무엘은 자기 어머니 한나에게서 “주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24) 배웠을 것이며, 사제 엘리에게서는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배웠던 것이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10). 사무엘도 기도의 가치와 그 중요성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나 또한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거나 하여 주님께 죄를 짓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좋고 바른길을 가르쳐 주겠소”(1사무 12,23).
- 2579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이었으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또한 그 백성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목자였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그의 순명과 찬미와 참회는 백성에게 기도의 모범이 된다. 하느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로서 다윗이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충실한 믿음이며,(25) 유일한 임금이시고 주님이신 분께 드리는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신뢰였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다윗은, 시편에 나타나듯이,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기도의 첫 예언자이다. 참메시아이시고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의 기도는 다윗이 드렸던 기도의 의미를 드러내고 완성시켜 줄 것이다.
- 2580 다윗이 건립하고자 했던 기도의 집, 곧 예루살렘 성전은 그의 아들 솔로몬의 업적이 된다. 성전 봉헌 때 바치는 기도는(26) 하느님의 약속과 계약, 당신 백성 가운데 현존하는 하느님 이름의 엄청난 위력, 이집트 탈출의 놀라운 업적에 대한 회상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왕은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자기 자신과 온 백성을 위하여, 미래의 후손들을 위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와 매일의 필요를 위하여, 모든 나라가 주님께서 유일하신 하느님이심을 알고, 백성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도록 기도한다.
- 엘리야, 예언자들과 마음의 회개
- 2581 성전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장소가 되어야 했다. 곧, 순례, 축제, 희생 제사, 저녁 제사, 향, ‘제사 음식’과 같이, 지극히 높으시고 아주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내는 이 모든 표징들은, 기도하라는 호소이자 기도로 이끄는 길이었다. 그러나 흔히 형식주의는 백성을 지나치게 외적인 예배로 이끌어 가곤 했다. 그리하여 신앙 교육과 마음의 회개가 필요하였다. 이것이 귀양살이 이전과 이후의 예언자들이 맡은 사명이었다.
- 2582 엘리야는 예언자들의 아버지이며 주님을 찾는 족속,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이들의 아버지였다.(27) “주님께서는 나의 하느님이시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의 이름은, 카르멜 산에서 올린 그의 기도를 향하여 응답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예고한다.(28)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촉구하려고 엘리야를 회상시킨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6).(29)
- 2583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자비를 깨달은 엘리야는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르친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과부의 믿음을 확고하게 한다. 하느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 주신 것이다.(30)
- 카르멜 산에서 드린 제사는 하느님 백성의 믿음을 시험하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엘리야가 기도를 드리자,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에” 주님의 불이 제물을 태운다.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바로 엘리야가 했던 이 말은 동방 교회 감사 기도의 성령 청원 기도에서 되풀이되고 있다.(31)
- 끝으로, 살아 계신 참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던 곳을 향하여 사막의 길을 가던 엘리야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신비로운 모습의 하느님께서 “지나가실” 때까지 “동굴 속에” 몸을 숨겼다.(32) 그러나 그들이 찾던 하느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변모의 산에서야 비로소 당신 얼굴을 드러내실 것이다.(3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본다.(34)
- 2584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단둘이 있음으로써” 그들의 사명을 위한 빛과 힘을 얻는다. 그들의 기도는 불충한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때로는 하느님과 따져 보기도 하고 하느님께 탄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역사의 주인이신 구세주 하느님의 개입을 열망하고 준비하는 중개의 기도이다.(35)
- 시편, 회중의 기도
- 2585 다윗 이래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성경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를 위한 깊이 있는 기도문들을 수록하고 있다.(36) 시편들은 점차 다섯 권으로 모아 놓은 전집이 되었다. 시편(또는 ‘찬미가’)은 구약 성경에 수록된 기도의 걸작이다.
- 2586 시편은 큰 축일 때 예루살렘에, 그리고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인 하느님 백성 곧 회중의 기도를 표현하며 풍요롭게 한다. 이 기도는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이 기도는, 기도드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관련된다. 시편은 ‘거룩한 땅’에서 또 유민(流民: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서 바치지만, 만민을 다 포용한다. 이 기도는 과거의 구원 사건들을 상기시키며, 역사의 종말에까지 미친다. 이 기도는 이미 실현된 하느님의 약속들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들을 결정적으로 실현하실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바치시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 시편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핵심으로 머물러 있다.(37)
- 2587 시편집은 그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기도가 되는 책이다. 구약의 다른 책들에서 “말씀들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업적들을 선포하며 그 안에 포함된 신비들을 밝혀 준다.”(38) 그러나 시편 작가는 시를 지어 하느님께 노래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밝힌다. 하느님의 일을 추진하시는 분도, 인간의 응답을 불러일으키시는 분도 같은 성령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를 통합시키실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편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를 가르쳐 준다.
- 2588 시편 기도에 담겨진 다양한 표현들은 성전의 전례 안에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구체화한 것들이다. 시편은 찬미가, 탄식 기도나 감사, 개인이나 공동체의 간구, 왕의 노래 또는 순례의 노래, 지혜의 명상 등을 담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한결같이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과 시편 작가가 인생살이에서 체험한 인간적 상황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시편은 과거의 사건을 반영할 수도 있으나, 참으로 간결한 기도이기 때문에, 신분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든지 바칠 수 있는 진실한 기도이다.
- 2589 시편들 안에는 일관된 특징들이 발견된다. 기도의 소박함과 자발성, 피조물 안의 모든 좋은 것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들과 더불어 드러나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 또한 주님을 더 사랑함으로써 많은 원수들과 유혹의 표적이 된 믿는 이들의 괴로운 처지, 그리고 성실하신 주님께서 행하실 것을 기다리며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분의 뜻에 맡겨 드리는 의탁의 자세 등이 시편 전체를 일관한다. 시편의 기도는 언제나 찬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때문에 ‘찬미가’라는 이 책의 이름은, 시편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내용과 참으로 어울린다. 회중의 예배를 위해 모아 놓은 시편집은 우리를 기도로 초대하며, 우리가 “할렐루-야!”(알렐루야), “주님을 찬미하여라!” 하는 노래로 그 초대에 응답하게 한다.
- 시편보다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윗 자신이 아름답게 말해 줍니다. “주님을 찬양하라, 노래도 좋을씨고. 하느님 노래하라, 찬미도 고울씨고.” 그렇습니다. 시편은 백성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하느님께 바치는 찬양이며, 회중이 드리는 찬미의 노래이고, 모든 이가 치는 손뼉입니다. 보편적인 교훈이고, 교회의 목소리요, 노래로 바치는 신앙 고백입니다.…….(39)
- 간추림
- 2590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며,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것이다.”(40)
- 2591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당신과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부르는 호소로서, 구원 역사 전체에 함께하고 있다.
- 2592 아브라함과 야곱의 기도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꾸준히 신뢰하는 것으로, 약속된 승리를 확신하기 위하여 겪어야 하는 신앙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 2593 모세의 기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 부르시는 것에 대한 응답이다. 모세의 기도는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기도를 예시한다.
- 2594 하느님 백성의 기도는, 하느님의 장막, 계약 궤, 성전과 같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목자들, 특히 다윗 왕과 예언자들의 지도 아래 꽃을 피운다.
- 2595 예언자들은 마음의 회개를 호소한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하느님의 얼굴을 열렬히 찾으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한다.
- 2596 시편은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걸작을 이룬다. 시편은 뗄 수 없는 두 가지 요소, 곧 개인적 요소와 공동체적 요소를 보여 준다. 시편은 이미 이루어진 하느님의 약속을 기념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희망함으로써, 역사의 모든 차원에까지 미친다.
- 2597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바치시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 시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근본적이고 불변하는 요소이다. 시편은 계층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이가 드리기에 적합한 기도이다.
- 제2절 때가 찼을 때의 기도
- 2598 기도의 드라마는,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났다. 복음서 안에서 주님의 증인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들을 통하여 그분의 기도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에 다가가듯 거룩하신 주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곧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 주시는지를 깨닫도록 힘쓰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다
- 2599 동정녀의 아들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또한 당신께서 지니신 인간 심성에 따라 기도하는 법을 배우셨다.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께서 마련하신 “큰일”들을 모두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묵상하시던(41) 당신 어머니에게서 기도문을 배우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의 회당과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당신 동포들이 기도할 때 썼던 말과 운율에 젖어 기도를 배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벌써 열두 살 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암시하셨듯이, 좀 더 신비로운 원천에서 솟아 나온 기도였다. 바로 여기에서 때가 차 드리신 기도의 새로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던 자녀다운 기도를, 마침내 사람이 되신 외아들께서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을 위하여 바치신 것이다.
- 2600 루카 복음은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성령의 작용과 기도의 의미를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이행하는 결정적인 순간들을 앞두고 기도하신다. 당신의 세례와(42) 영광스러운 변모(43) 때에 성부께서 당신에 대해 증언해 주시기에 앞서, 그리고 당신의 수난을 통해 성부께서 세우신 사랑의 계획을 성취하시기에 앞서(44) 먼저 기도하신다. 사도들이 부여받은 임무를 시작하려던 결정적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신다. 곧,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부르시기 전에,(45)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전에,(46) 또한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신앙이 유혹으로 약해지지 않도록(47)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신다. 성부께서 성취하라고 명하신 구원 활동을 펼치시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드리는 기도는, 그분께서 인간으로서 지니신 뜻을 겸손과 신뢰로써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의 뜻에 맡겨 드리는 기도이다.
- 260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그리스도의 제자는 기도하시는 스승을 보면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그는 기도하시는 스승에게서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성자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들음으로써 성부께 기도드리는 것을 배우게 된다.
- 2602 예수님께서는 되도록이면 밤에, 홀로, 산으로 물러가셔서 자주 기도하셨다.(48) 예수님께서는, 강생하심으로써 인류를 완전히 떠맡으셨기 때문에, 기도에서도 사람들을 떠맡고 계시며, 당신 자신을 성부께 바치심으로써 그들을 또한 성부께 봉헌하신다. “육체를 취하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간적인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형제들”이(49) 겪는 모든 일에 참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나약함에서 해방시키시려고 그들의 나약함을 함께 겪으셨다.(50) 바로 이를 위하여 성부께서는 그분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일들은 그분께서 ‘은밀하게 드리시던’ 기도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 2603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드리셨던 두 편의 기도를 아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기도는 각각 감사로 시작된다. 첫째 기도에서,(51)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하늘 나라의 신비를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들”(참행복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분으로 고백하시며, 성부를 그러한 분으로 알아 뵙고 성부께 찬미를 드리신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고 예수님께서 외치신 감탄사는 그분의 깊은 마음속을 드러내며, 성부의 뜻에 순종하시는 그분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외침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말씀을 반향하는 것이요,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고뇌하시던 중에 성부께 드리신 말씀의 전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그분께서 인간으로서 지니신 충만한 사랑의 마음으로 성부의 “심오한 뜻”을(52)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의로 집약된다.
- 2604 둘째 기도는 성 요한 복음사가가(53) 라자로의 부활 사건 전에 기술하고 있다. 그 사건은 감사의 기도로 시작된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에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예수님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곧 이렇게 덧붙이신다.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청하고 계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감사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선물을 받으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선물을 주시고 그 선물을 통해 당신 자신도 함께 주시는 분과 일치하시는 것이다. 베풀어진 선물보다도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이 더 소중하다. 선사하시는 성부께서 곧 ‘보화’이시며, 성부의 아들의 마음은 그분 안에 있다. 선물은 “곁들여”(54) 주어지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사제로서 드리신 기도’는(55) 구원 경륜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기도에 대해서는 제1부의 끝에 가서 깊이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기도는 언제나 현재 시점에서 바치시는 우리 대사제의 기도를 알려 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을 담고 있다. 주님의 기도에 대해서는 제2부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 2605 성부의 사랑의 계획을 성취하실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 바치시는 기도의 심오함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붙잡히시기 전에 바치신 기도(“아버지,……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에서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들을 통해서도, 기도하는 것과 당신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동일한 행동임을 보여 주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목마르다!”(요한 19,28),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56)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리고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실 때에도,(57) 예수님의 기도와 자기 증여는 동일하다.
- 2606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인류가 지나온 모든 시대의 온갖 고뇌, 그리고 구원 역사에 나타나는 모든 청원과 전구는 강생하신 말씀의 이 ‘큰 소리’ 속에 합류된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시고, 모든 희망을 뛰어넘어, 당신 아드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들어 주신다. 이렇게 해서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통해 기도의 드라마가 전개되고 완성된다. 시편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드라마의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영원한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눈앞에 두고, 성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시편 2,7-8).(58)
-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기도가 어떻게 구원의 승리를 가져다주는지를 극적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7-9).
-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시다
- 2607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벌써 기도를 가르치신다.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처해 있는 곳에서 그대로 우리를 받아들이시어, 점차적으로 우리를 성부께 인도해 가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는 군중을 뒤돌아보시며, 그들이 구약의 계약을 통하여 이미 기도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에서 출발하여, 다가올 하늘 나라의 새로움에 마음을 열게 하신다. 그다음에 그 새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비유로 알려 주신다. 끝으로, 당신 교회에서 기도의 교사들이 되어야 할 제자들에게는 아버지와 성령에 대해 숨김없이 말씀해 주신다.
- 2608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마음의 회개를 강조하셨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여라,(59)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60) “골방에서”(마태 6,6)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많은 말을 되풀이하지 마라,(61) 기도할 때 마음속으로부터 용서하여라,(62)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 나라를 구하여라(63) 하셨다. 이 같은 회개는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는 것이며, 또 자녀다운 것이다.
- 2609 이처럼 회개하기로 결심한 마음은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믿음은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는 것을 초월하여 자녀로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랑하는 아들께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문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찾아라.” 그리고 “문을 두드려라.” 하고 요구하실 수 있다.(64)
- 2610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 아버지의 선물을 받으시기 전에 감사를 드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녀다운 대담성을 가르쳐 주신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기도의 힘이 이와 같다. 곧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65)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믿음이 없음”(마르 6,6)과 제자들의 믿음이 약함을(66) 보시고 슬퍼하신 만큼, 로마 사람 백인대장과(67) 가나안 여자의(68) 크나큰 믿음을 목격하시고는 경탄하신다.
- 2611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믿음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69)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하느님의 계획에 협력하려는 마음을 지니라고 제자들에게 촉구하신다.(70)
- 2612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마르 1,15),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것과, 깨어 있을 것을 호소하신다. 제자는 기도 중에, 비천하게 사람이 되신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억하고,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희망하면서, ‘언제나 계시며,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린다.(71) 스승과 일치하여 바치는 제자들의 기도는 하나의 싸움이다. 깨어 기도함으로써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72)
- 2613 루카 성인은 기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세 가지 비유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 첫 번째 비유, 곧 “벗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는(73)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라고 촉구한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고, 특히 모든 선물을 가지고 계시는 성령을 주실 것이다.
- 두 번째 비유, 곧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는(74) 기도의 특성 중 하나에 중점을 둔 것으로, 믿음에 따르는 인내를 가지고서, “지치지 말고 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세 번째 비유, 곧 “바리사이와 세리의 예화”는(75) 기도하는 마음의 겸손에 관한 것이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교회는 이 기도를 끊임없이 자신의 기도로 삼아 왔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
- 2614 예수님께서 성부께 드리신 기도의 신비를 제자들에게 숨김없이 밝혀 주신 것은, 당신께서 영광스러운 인성을 지닌 채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가신 그때에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와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신 것이다. 이제 새로운 기도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다.(76)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요한 14,6)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제자들은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믿음은 사랑 안에서 그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게 되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안에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게 된다. 이 새 계약에 따라서, 우리의 청원이 허락되리라는 확신은 예수님의 기도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77)
- 2615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와 결합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 기도와 기도드리는 상황의 이 새로움은 예수님의 고별사를 통해서도 나타난다.(78) 성령과 하나 되어 바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신다
- 2616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드리는 기도를 공생활 동안에 이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을 앞당기는 징표들을 통해서 들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말로 표현되었거나(나병 환자,(79) 야이로,(80) 가나안 여자,(81) 회개한 죄수(82) ), 또는 침묵 중에 표명되었던(중풍 병자를 떠메고 온 사람들,(83) 예수님의 옷을 만진 하혈증을 앓는 여자,(84) 죄 많은 여자의 눈물과 향유(85) ) 믿음의 기도들을 들어 주셨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또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며 탄식했던 소경들의 애원은,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의 전승 안에서 이렇게 인용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병을 치유해 주시거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당신께 애원하는 기도에 늘 응답해 주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예수님의 기도가 지니고 있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을 훌륭하게 요약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또한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입니다.”(86)
- 동정 마리아의 기도
- 2617 마리아의 기도는 때가 차 오는 여명에 우리에게 알려진다. 하느님의 아들이 강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성령께서 세상에 강림하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잉태를 위한 주님 탄생 예고 때,(87)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성령 강림 때에(88) 마리아께서 바치신 기도는 성부의 자비로운 계획에 탁월하게 협력하는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기다려오신 승낙은 하느님의 비천한 여종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전능하신 분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전 존재를 바쳐 응답하신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루어지소서!”(Fiat)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기도, 곧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셨으니, 우리도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겠다는 기도이다.
- 2618 복음서는 마리아께서 믿음 안에서 어떻게 기도하고 전구하시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카나에서(89)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을 당신의 아들에게 청하신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는 또 다른 잔치, 곧 당신의 신부인 교회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몸과 피를 내주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상징한다. 그리고 새 계약이 맺어지는 시각에, 십자가 아래에서,(90) 마리아께서는 ‘새 하와’로, ‘여인’으로, ‘살아 있는 이들의 참어머니’로 받아들여진다.
- 2619 이런 까닭에, 라틴 말로는 마니피캇(Magnificat), 비잔틴 말로는 메갈리네이(Megalynei)인, “성모의 노래”는(91) 하느님의 어머니의 노래이자 교회의 노래이며, 시온의 딸의 노래이자 하느님의 새 백성의 노래이고, 구원 경륜 안에서 충만하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감사의 노래이며,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언약하신 약속의 이행을 통해서 그 희망이 채워진 ‘가난한 사람들’의 노래이다.
- 간추림
- 2620 신약 성경에서 기도의 완전한 본보기는 예수님의 자녀다운 기도에서 발견된다. 자주 고독 속에서 은밀히 행하신 예수님의 기도에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랑으로 충만한 동의와, 기도가 받아들여지리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들어 있다.
- 2621 예수님께서는 그 가르침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깨끗한 마음과 생생하고 꾸준한 믿음 그리고 자녀다운 대담성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촉구하시며,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청하라고 권고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드리는 기도를 친히 들어 주신다.
- 2622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와 ‘성모의 노래’(Magnificat) 에 담겨 있는 동정 마리아의 기도는, 믿음을 통하여 당신의 전 존재를 아낌없이 바치는 특성을 띠고 있다.
- 제3절 교회 시대의 기도
- 2623 오순절 날에, “한자리에 모여”(사도 2,1)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며”(사도 1,14) 그분을 기다리던 제자들 위에 약속된 성령께서 내리셨다. 교회를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는(92) 성령께서는 또한 교회가 기도 생활로 성장하게 하신다.
- 2624 예루살렘의 첫 공동체 안에서, 믿는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이는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곧 사도들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 사랑으로써 그 진실성이 입증되는 교회의 기도는 성체성사로써 양육된다.
- 2625 이 기도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신자들이 성경에서 듣고 읽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 특별히 시편의 기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을 근거로 하여, 이 시편들을 현재 상황에 따라 새롭게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 바친다.(93) 기도하는 교회에게 그리스도를 상기시켜 주시는 성령께서는 또한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교회 생활과 성사와 교회의 사명 수행에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게 될 새로운 기도문들이 생겨나게 하신다. 이러한 기도문들은 위대한 전례적 영적 전승들 안에서 발전되어 갈 것이다. 신약 성경 곧 사도들의 저서와 정경(正經) 안에 들어 있는 기도문들은 그리스도교 기도의 규범이 될 것이다.
- I. 찬미와 흠숭
- 2626 찬미는 그리스도인 기도의 기본 움직임을 드러낸다. 찬미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다. 찬미 안에서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과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서로 대화하며 결합한다. 찬미 기도는 하느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곧, 하느님께서 강복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 2627 이 움직임은 두 가지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올라가는 움직임 곧 찬미이다(우리에게 강복하셨기에 우리는 성부를 찬미한다).(94)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내려오시는 성령의 은혜를 간청하는 것이다(성부께서는 우리에게 강복하신다).(95)
- 2628 흠숭은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임을 깨달은 인간이 취하는 기본 자세이다. 흠숭은 우리를 지어 내신 주님의 위대함과,(96) 우리를 악에서 구해 내시는 구세주의 전능을 드높이는 것이다. 흠숭은 “영광의 임금님”(97) 앞에서 인간이 마음을 쏟아 꿇어 엎드리는 것이며, “언제나 더욱 위대하신”(98) 하느님 면전에서 존경 어린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지극히 거룩하시며 최고의 사랑을 받으셔야 할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우리를 겸손되게 하고, 우리의 간청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
- II. 청원 기도
- 2629 탄원(supplicatio)이라는 낱말은 신약 성경에서 그 의미가 풍부하게 나타난다. 곧, 청원하다, 애원하다, 끈질기게 청하다, 호소하다, 부르짖다, 울부짖다 등의 의미와 “기도를 통한 줄다리기”라는(99) 의미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가장 일상적인 형태는 청원이며, 이는 청원이 가장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청원 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다.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원(起源)도 아니고, 우리가 당하는 역경을 마음대로 없앨 수 있는 주인도 아니며, 우리의 궁극 목적도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아버지께 등을 돌린 죄인임을 알고 있다. 청원은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섬을 의미한다.
- 2630 신약 성경에는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비탄의 기도가 거의 없다. 우리가 비록 아직은 기다림 중에 있고 날마다 회개해야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청원은 희망으로 지탱된다. 비탄보다 훨씬 더 깊은 데서 솟아나는 그리스도교 청원을 바오로 사도는 탄식이라고 부른다. 이 탄식은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로마 8,22) 모든 피조물의 탄식이기도 하며, 우리의 탄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3-24). 끝으로, 이 탄식은 바로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는”(로마 8,26) 성령의 탄식이다.
- 2631 용서를 청함은 청원 기도의 첫 단계이다(“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세리, 루카 18,13). 용서를 청함은 올바르고 순수한 기도의 전제 조건이다. 겸손하고 신뢰심을 가져야만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타인들과도 친교를 나누어, 다시 빛 가운데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100)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된다”(1요한 3,22). 용서를 청함은, 개인이 드리는 기도에서 그러하듯이, 성찬 전례에 앞서 이루어져야 할 행동이다.
- 2632 그리스도인의 청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고 찾는 것에 집중된다.(101) 청원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청하고, 다음에는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고 그 나라의 도래에 협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청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맡으신 임무에 대하여 그와 같이 협력하는 것은 이제 교회의 사명으로서, 사도 공동체가 이 협력 문제를 기도의 주제로 삼고 있다.(102) 참으로 출중한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기도는, 모든 교회에 관한 숭고한 염려가 그리스도인 기도의 중요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103)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 2633 이렇게 하여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이 청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모든 사람을 속량하려고 모든 것을 떠맡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104) 이러한 확신에서 야고보(105) 와 바오로(106) 사도는 언제나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
- III. 전 구
- 2634 전구(轉求)는 우리의 기도를 예수님의 기도와 매우 흡사하게 해 주는 청원 기도의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특히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전구자이시다.(107)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 7,25). 성령께서도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27).
- 2635 다른 사람을 위하여 청원하는 전구는 아브라함 이래로,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일치된 인간 마음의 특징이다. 교회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인의 전구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며, 성인들의 통공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구에서, 기도하는 이는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며”(필리 2,4),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위해서까지 기도한다.(108)
- 2636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이런 형태의 나눔을 철저히 실천하였다.(109) 바오로 사도는 그렇게 기도하는 공동체들을 그의 복음 선포 직무에 참여시키면서도,(110) 그들을 위하여 전구한다.(111) 그리스도인의 전구에는 한계가 없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1티모 2,1),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112)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113) 간구한다.
- IV. 감사 기도
- 2637 감사 행위는 교회의 기도를 특징짓는다. 교회는 감사의 제사인 성찬례를 거행하여, 자신의 정체를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본질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구원 사업을 통해서 창조된 만물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그것을 다시 거룩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께 돌아서게 하신다. 지체가 드리는 감사 행위는 그 머리의 감사 행위에 참여한다.
- 2638 모든 사건과 모든 필요는, 청원 기도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감사 기도의 동기가 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흔히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끝맺으며, 또한 감사의 대목에서는 언제나 주 예수님이 언급되고 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 V. 찬양 기도
- 2639 찬양은 하느님께서 진정 하느님이심을 한결 더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기도의 형태이다. 찬양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기리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찬양은, 영광 중에 하느님을 뵙기 전에, 믿음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누리는 참행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과 일치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며,(114) 그 외아들을 증언하신다. 그 외아들 안에서 우리가 양자로 받아들여지고, 그 외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찬양은 기도의 다른 형태들을 통합하여, 만물의 근원이시며 목표이신 그분께 인도한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1코린 8,6).
- 2640 루카 성인은 그의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앞에서 터져 나온 감탄과 찬양에 대해 자주 언급하며, 사도행전에 기술되어 있는 성령의 행적에 관한 감탄과 찬양에 대해서도 또한 강조한다. 그것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생활,(115)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쳐 준 일,(116) 그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군중들,(117)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는”(사도 13,48) 피시디아의 이방인들의 경우이다.
- 2641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에페 5,19).(118) 영감을 받은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그러했듯이, 초기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도 시편을 새로운 각도에서 읽고, 시편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노래하였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총을 받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통해 실현하신 놀라운 사건, 곧 그분의 강생, 죽음을 정복한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신 그분의 승천 등을 주제로 하여 찬미가와 송가를 지었다.(119) ‘경이로운’ 이 구원 경륜 전체에 대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인 영광송이 울려 퍼졌다.(120)
- 2642 “곧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계시인 요한 묵시록은 천상 전례의 찬미가뿐(121) 아니라, 또한 “증인들”(순교자들)의(122) 전구로 점철되어 있다. 예언자들과 성인들,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이,(123) 큰 고난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하늘 나라에 간 사람들의 큰 무리가, 옥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 양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124) 그들과 일치하여, 지상의 교회 또한 신앙과 시련 속에서 그와 같은 찬미가들을 부른다. 신앙은 청원과 전구를 통하여,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고, “모든 완전한 은사를 내려 주시는 빛의 아버지”께(125) 감사를 드린다. 이처럼 신앙은 순수한 찬미이다.
- 2643 성찬례는 모든 형태의 기도를 포함하며 드러낸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하느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정결한 제물”로 봉헌하는 것이다.(126) 동방과 서방의 전통에 따르면, 성찬례는 ‘찬미의 제사’이다.
- 간추림
- 2644 교회를 가르치시고 또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되새기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변하지 않는 기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그 표현에서 새로운, 찬미, 청원, 전구, 감사, 찬양의 기도 등이 생겨나게 하심으로써 교회에게 기도 생활도 가르치신다.
- 2645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에, 인간은 그 보답으로 모든 복의 원천이신 분께 찬미를 드릴 수 있다.
- 2646 청원 기도의 목표는 용서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추구, 그리고 필요한 모든 것을 청하는 것이다.
- 2647 전구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청원하는 것이다. 전구에는 한계가 없으며, 원수들을 위해서도 전구한다.
- 2648 모든 기쁨과 모든 슬픔, 모든 사건과 모든 필요가 다 감사를 드리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으니, 그리스도의 감사 기도에 참여하게 해 주는 이 감사 행위는 전 생애에 걸쳐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8).
- 2649 이해관계를 완전히 초월한 찬양 기도는 하느님께 향한다. 찬양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을 기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 제 2 장 기도의 전통
- 2650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 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곧, 기도하려면 먼저 원의가 있어야 한다. 성경이 기도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살아 있는 전통[聖傳]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믿고 기도하는 교회”(1)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다.
- 2651 그리스도교 기도의 전통은 성장하는 신앙 전통의 한 형태이며, 이는 특히 자신들의 마음속에 구원 경륜의 사건들과 말씀들을 간직하고 있는 신자들의 묵상과 연구를 통하여, 그리고 그들이 체험하는 영적인 것들을 깊이 통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2)
- 제1절 기도의 원천
- 2652 성령께서는 기도하는 마음속에 “솟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물”이시다.(3)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 물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샘의 수로들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성령의 물을 마시게 하시려고 우리를 기다리신다.
- 하느님 말씀
- 2653 교회는 “모든 신자, 특히 수도자들이 성경을 자주 읽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필리 3,8)를 얻도록 강력하고 각별하게 권고한다.……성경을 읽을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4)
- 2654 영성의 교부들은 마태오 복음 7장 7절을 풀이하면서, 기도 중에 하느님 말씀으로 함양된 마음가짐을 이렇게 요약한다. “읽으면서 찾으십시오. 그러면 묵상을 통해서 발견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관상을 통해서 열릴 것입니다.”(5)
- 교회의 전례
- 2655 교회의 성사 전례에서, 구원의 신비를 선포하고 구현하며 전달하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은, 기도하는 마음 안에 계속되고 있다. 영성의 교부들은 때때로 마음을 제대에 비유한다. 기도를 통하여 신자는, 전례가 거행되는 동안과 그 후에, 그 전례를 내면화하고 그 전례에 동화된다. “골방에서”(마태 6,(6) 기도하더라도, 기도는 언제나 교회의 기도이며, 거룩하신 삼위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6)
- 향주덕
- 2656 우리는 신앙의 좁은 문을 통하여 전례 안으로 들어가듯이 기도 안으로 들어간다. 주님 현존의 표징들을 통하여, 우리가 찾고 소망하는 것은 주님의 얼굴이며, 우리가 귀담아듣고 간직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 2657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전례를 거행하도록 가르치시는 성령께서는, 희망을 갖고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한편, 교회의 기도와 개인의 기도는 우리 안에 희망을 길러 준다. 특히 시편은, 구체적이고 다양한 표현으로써,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께 고정시키도록 가르쳐 준다.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셨네”(시편 40[39],2).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로마 15,13).
- 2658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전례 생활을 통해 다듬어진 기도는,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는 사랑에서 모든 것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응답하게 된다. 사랑은 기도의 ‘한’ 원천이다. 사랑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하는 이는 기도의 정상에 도달한다.
- 오 하느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의 유일한 소망은 제 생명이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 무한히 사랑받으실 하느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살기보다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죽기를 더 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께 청하는 단 한 가지 은총은 주님을 영원히 사랑하는 것입니다……저의 하느님, 제 혀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계속해서 말할 수 없지만, 제가 숨쉬는 순간마다, 되풀이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마음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7)
- ‘오늘’
- 2659 우리는 특별한 순간들, 이를테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주님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때에 기도를 배우지만, 매일매일의 사건 속에서 언제나 우리는 기도를 샘솟게 하시는 주님의 성령을 받는다.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 섭리에 대한 가르침과 동일한 선상에 있다.(8) 시간은 아버지의 손 안에 있다. 우리는 지금 아버지를 만난다.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 만나는 것이다.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시편 95[94],7ㄹ-8ㄱ).
- 2660 날마다, 순간마다 일어나는 일들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철부지 어린아이들”과 그리스도의 종들, 참행복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알려진 하느님 나라의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여 역사의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은 좋고 마땅한 일이지만, 일상의 사소한 상황들에 기도가 배어들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모든 형태의 기도는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비유하시는 그 누룩이 될 수 있다.(9)
- 간추림
- 2661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통인 성전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다.
- 2662 하느님 말씀, 교회의 전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은 기도의 원천이다.
- 제2절 기도의 길
- 2663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 안에서, 각 교회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기도의 언어, 곧 말과 음악과 동작과 성화 등을 신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의 길들이 사도들의 신앙 전통에 충실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교도권의 권한이며,(10)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는 그 기도의 길들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사목자들과 교리 교사들의 일이다.
- 성부께 드리는 기도
- 2664 그리스도교 기도의 길은 오로지 그리스도뿐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것이 공동체적이든 개인적이든, 소리를 내어 하는 것이든 마음속으로 하는 것이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되어야만, 성부께 다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인성은 성령께서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길이다.
-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
- 2665 하느님 말씀과 전례 거행으로 양육되는 교회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주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교회의 기도는 그 누구보다도 성부께 드리는 것이지만, 기도는, 전례의 모든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의 기도 안에 도입된 일부 시편들과 신약 성경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호칭들로써 그리스도를 부르며 바치는 기도를 우리 입으로 외우며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말씀, 주님, 구세주, 하느님의 어린 양, 임금님, 사랑하는 아들, 동정녀의 아들, 착한 목자, 우리의 생명, 우리의 빛, 우리의 희망, 우리의 부활, 사람들의 친구.
- 2666 그러나 이 모든 호칭들을 집약하는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 강생하실 때 받으신 이름, 곧 ‘예수’라는 이름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의 입술에 담을 수 없지만,(11) 하느님의 ‘말씀’은,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이름을 건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름을 ‘예수’, ‘야훼(YHWH)는 구원하신다.’라고(12)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모든 것, 곧 하느님과 인간, 창조와 구원의 경륜 전부를 내포한다. ‘예수님’을 부르면서 기도드리는 것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요,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만이 그 이름이 의미하는 현존을 내포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으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맞이하는 것이다.(13)
- 2667 이렇게 지극히 단순한 신앙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동방과 서방의 기도 전통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시나이 산과 시리아와 아토스 산의 영성가들을 통하여 전해 내려온 가장 흔한 기도문은,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부르는 기도이다. 이 기도문은 필리피서 2,6-11의 그리스도 찬미가에 세리의 호소와 빛을 달라고 애원하는 걸인의 호소를(14) 연결시킨 것이다. 이 기도를 통하여, 인간의 비참과 구세주의 자비에 마음이 열리게 된다.
- 2668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것은 늘 기도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길이다. 겸손되이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으로 자주 되풀이한다면, 이 기도는 “말을 많이 함”(마태 6,7)으로 흩어져 버리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게 한다.”(15)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어느 때라도’ 가능한 것이니, 그것은 다른 일에 덧붙여서 하는 부수적인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하나의 중요한 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행동에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시키는 일이다.
- 2669 교회의 기도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듯이, 그분의 성심을 공경하고 존경한다. 교회의 기도는 인간이 되신 ‘말씀’을 흠숭하며,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창에 찔리신 예수 성심 또한 흠숭한다. 그리스도교 기도는 구세주를 따라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총독 관저에서 골고타와 무덤에 이르는 14처는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한 걸음씩 따라가는 것이다.
- “오소서, 성령님”
- 2670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미리 은총을 베푸시어, 우리를 기도의 길로 이끄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니, 우리가 어떻게 그 성령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에게 날마다, 특별히 모든 중요한 활동을 시작하고 마칠 때 성령께 간청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 만일 성령께서 흠숭을 받으셔서는 안 된다면, 그분께서 어떻게 세례를 통해서 나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흠숭을 받으셔야 한다면, 그분은 예배의 대상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16)
- 2671 성령을 청하는 전통적인 형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자이신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성부께 간청하는 것이다.(17)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강조하셨다.(18) 그러나 “오소서, 성령님.” 하고 간구하는, 이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기도 역시 전통적인 것이니, 전례적인 모든 전통도 후렴과 찬미가 안에서 이 기도를 발전시켜 왔다.
-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19)
- 어디에나 계시며 만물을 채우시고, 모든 선의 보화이며 생명의 근원이신 천상의 임금님, 위로자이신 성령님, 진리의 성령님, 오소서, 저희 가운데 사시며, 저희를 깨끗하게 하시고 저희를 구하소서, 선하신 성령님!(20)
- 2672 기름부음으로 우리의 전 존재에 깊이 파고드시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기도의 내적 스승이시다. 성령께서는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을 만드시는 분이다. 기도로 나아가는 길이 기도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과 함께 행동하시는 분께서는 같은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령과 일치할 때 교회의 기도가 된다.
- 천주의 성모님과 일치하여
- 2673 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영광스럽게 되신 외아들의 인성 안에서 우리를 그분의 위격과 결합시키신다. 예수님의 인성을 통하여,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우리가 자녀로서 드리는 기도는 교회 안에서 우리를 예수님의 어머니와 일치하게 한다.(21)
- 2674 “마리아의 모성은 주님 탄생 예고에 믿음으로 동의하시고 십자가 밑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간직하셨던 그 동의에서부터 모든 뽑힌 이들의 영원한 완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된다.”(22)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길이시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온전히 투명한 분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 주신다. 마리아께서는 ‘길잡이’(Hodegetria)이시며, 동방과 서방의 전통적인 성화에 따르면, 그 길의 ‘이정표’이시다.
- 2675 마리아께서 성령께 탁월하게 협력하신 사실을 토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에서 드러난 그분의 위격에 초점을 맞추어, 천주의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를 발전시켜 왔다. 이 기도를 표현하는 수많은 찬미가와 후렴 안에는 흔히 두 가지 움직임이 번갈아 나타난다. 하나는 주님께서 당신의 비천한 여종에게, 그리고 이 여종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해 주신 “큰일”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는”(magnificat) 것이며,(23)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어머니께 하느님의 자녀들의 애원과 찬미를 맡겨 드리는 것인데, 이는 마리아께서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 안에서 마치 신부(新婦)처럼 취하신 그 인성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 2676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의 이 두 가지 움직임은 ‘성모송’에 탁월하게 표현되어 있다.
- “마리아님, 기뻐하소서”(Ave, Maria): 가브리엘 천사의 이 인사말로 성모송은 시작된다. 천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친히 마리아께 인사를 건네신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비천한 여종을 바라보셨던(24) 그 시선으로, 우리는 감히 마리아께 다시 인사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얻으신 그 기쁨을 우리도 누리는 것이다.(25)
-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천사가 드린 이 두 마디의 인사말은 서로에 의해 그 뜻이 명확해진다.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마리아께서는 은총이 가득하다. 마리아께 가득한 은총은 모든 은총의 근원이신 분의 현존이다. “환성을 올려라.……딸 예루살렘아……주 너의 하느님……네 한가운데에 계시다”(스바 3,14.17). 마리아 안에 주님께서 친히 와 계시니, 마리아께서는 바로 시온의 딸이요, 계약 궤이며,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다. 마리아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거처”(묵시 21,3)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께서는 자신 안에 머무르러 오시는 분, 자신이 세상에 낳아 줄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다.
-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사의 인사말 다음에, 우리는 엘리사벳의 이 인사를 우리의 인사로 삼는다. “성령으로 가득 찬”(루카 1,41)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26) 수많은 사람들 중 첫 번째 사람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마리아께서는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기 때문에, “모든 여자 가운데 가장 복되시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복을 받도록”(창세 12,3) 해 주는 사람이 되었다. 마리아께서는 믿음을 통해서, 믿는 이들의 어머니가 되셨고, 세상의 모든 민족은, 마리아 덕분에, 하느님의 복 그 자체이신 분을 받아 모신다.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 2677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하고 외친 엘리사벳처럼, 우리도 경탄한다.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천주의 성모이시며 우리 어머니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근심과 청원을 그분께 맡길 수 있다. 마리아께서는 자신을 위해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기도하셨듯이,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신다. 마리아의 기도에 우리를 맡겨 드림으로써,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 맡기게 된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우리는 마리아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청함으로써,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죄인임을 깨달으며, 또한 온전히 거룩하신 분, “자비의 어머니”께 호소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리아께 맡겨 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신뢰심을 더욱 넓혀, 이제부터는 ‘우리 죽을 때’를 그분께 맡긴다. 당신 아들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처럼,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죽을 때도 함께 계셔 주실 것이며, 우리가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시간에 우리의 어머니로서(27) 우리를 맞아들여, 천국에 계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 2678 중세 서방 교회의 신심은, 대중이 성무일도 대신에 드리는 기도로서 ‘묵주 기도’를 발전시켰다. 동방의 경우, 비잔틴 교회에는 성모 찬미가(Akathistos)와 성모께 위로를 구하는 성모 청원 기도(Paraclesis)라고 하는 연도(連禱) 형태가 노래 성무일도로 남아 있다. 반면에, 아람, 콥트, 시리아의 전통은 천주의 성모에 대한 대중적인 찬미가와 찬가를 더 선호해 왔다. 그러나 성모송, 성모 찬미가(theotokia), 에프렘 성인이나 나렉의 그레고리오 성인의 찬가에서 기도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 2679 마리아께서는 완벽한 기도자, 교회의 표상이시다. 우리가 마리아께 기도하는 것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당신 아들을 보내신 성부의 계획에 마리아와 함께 동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가 그랬듯이, 우리도 살아 있는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분,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어,(28) 마리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고, 나아가서 마리아께 기도할 수도 있다. 마리아의 기도는 교회의 기도를 떠받쳐 주는 것이며, 교회의 기도는 희망 안에서 마리아의 기도와 일치한다.(29)
- 간추림
- 2680 기도는 주로 성부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기도는 특히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름으로써 예수님께 바친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2681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기도의 내적 스승이신 성령께 기도할 것을 권유한다.
- 2682 성령의 활동에 대한 동정 마리아의 탁월한 협력으로, 교회는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께서 마리아 안에서 이룩하신 큰일들을 찬양하며, 또한 마리아께 애원과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즐겨 기도한다.
- 제3절 기도의 길잡이
- 수많은 증인들
- 2683 우리보다 앞서 하늘 나라에 들어간 증인들,(30) 특별히 교회가 ‘성인’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그들의 모범적인 삶과, 전해 오는 그들의 글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도 살아 있는 기도의 전통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상에 남아 있는 이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준다. 그들은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여, “많은 일들을” 맡게 되었다.(31) 그들의 전구는 하느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그들의 봉사 중 가장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온 세상을 위해 전구해 주도록 그들에게 기도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한다.
- 2684 교회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다양한 영성이 발전되어 왔다. 마치 엘리야의 “정신”이 엘리사와(32) 세례자 요한에게 전해졌던 것처럼,(33)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개인의 특은이 전달되어, 몇몇 제자들이 그 정신을 나누어 받을 수 있게 되었다.(34) 어떤 영성은 전례적이며 신학적인 여러 흐름들이 만나는 합류점에서 형성되는 한편, 신앙이 인간 사회와 그 역사 안에 정착하였음을 입증해 준다. 그리스도교의 갖가지 영성은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며, 신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안내자이다. 이 영성은, 그 풍부한 다양성을 통해서, 순수하고 유일한 성령의 빛을 반영한다.
- “성령은 참으로 성인들의 처소이다. 성인 또한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바쳤기에 성령께서 거처하실 만한 처소이니, 그러므로 성인을 성령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35)
- 기도의 봉사자들
- 2685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기도를 가르치는 첫째 장소이다. 혼인성사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정 교회’이다. 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교회로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특히 어린이에게는 가정에서 날마다 바치는 기도가, 성령께서 끊임없이 일깨워 주시는 교회의 살아 있는 기억을 처음으로 증언해 주는 것이다.
- 2686 서품된 봉사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신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의무를 지고 있다. 착한 목자의 종들인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기도가 솟아나는 샘으로, 곧 하느님 말씀, 전례, 하느님을 향한 삶, 구체적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오늘’로(36) 인도하기 위하여 서품된 사람들이다.
- 2687 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들의 전 생애를 기도하는 데에 바쳤다. 이집트 광야에서, 많은 은수자들과 남녀 수도자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백성을 위해 전구하고자 일생을 보냈다. 봉헌 생활은 기도하지 않고는 유지되거나 확산되지 못한다. 기도는 교회 안에서 관상 생활과 영성 생활이 솟아나는 원천 중 하나이다.
- 2688 어린이들과 젊은이들과 어른들을 위한 교리 교육의 목표는 개인 기도 중에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전례 기도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현재 상황과 연결시키며, 또한 그 말씀을 항상 내면화하여 새로운 삶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데에 있다. 교리 교육은 대중 신심을 잘 검토하여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37) 기본적인 기도문을 암기시키는 것은 기도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기초를 닦는 일이다. 그러나 그 기도문의 의미를 음미하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38)
- 2689 ‘기도 모임’, 또는 ‘기도 학교’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진정한 원천에서 물을 길어 낸다면, 교회 안에서 기도를 쇄신시키는 징표와 자극제가 될 것이다. 친교에 대한 열망은 교회 안에 참다운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징표이다.
- 2690 성령께서는 기도라는 공동선을 위해 일부 신자들에게 지혜와 믿음과 식별의 은총을 주신다(영적 지도). 그러한 은총을 받은 남녀 신자들이 곧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을 위한 참다운 봉사자들이다.
-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권고하는 바와 같이, 완덕의 길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의 손에 자신을 맡길 것인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스승에 그 제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덧붙인다. “지도자는 지혜롭고 현명할 뿐 아니라, 경험도 풍부해야 한다.……만일 지도자가 순수하고 참된 영성 생활의 경험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영혼들을 영성 생활로 인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39)
- 기도에 적합한 장소
- 2691 하느님의 집인 성당은 본당 공동체가 바치는 전례 기도에 적합한 곳이다. 본당은 또한 성체 안에 실제로 현존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흠숭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이기도 하다. 적합한 장소의 선택은 진실한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 - 개인 기도를 드리기 위한 장소로는, 우리 아버지 앞에서 ‘은밀하게’ 머무르기 위해,(40) 성경과 성화들이 비치되어 있는 ‘기도의 골방’이 적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 기도를 드리는 이러한 조그만 공간이 가족의 공동 기도를 촉진시켜 준다.
- - 수도원이 있는 지역의 경우에, 수도 공동체는 신자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드리도록 노력하며, 더욱 열렬한 개인 기도를 위해 필요한 은거를 유지해야 할 소명이 있다.(41)
- - 순례는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을 상기시켜 준다. 전통적으로 순례는 기도를 쇄신하게 하는 매우 좋은 기회로 간주되어 왔다. 자신들의 살아 있는 샘을 찾는 순례자에게 성지는, 그들이 ‘교회로서’ 그리스도교 기도를 체험하는 특별한 곳이다.
- 간추림
- 2692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는 교회는 기도를 통하여 성인들이 드리는 기도에 결합되며, 교회는 이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한다.
- 2693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영성은,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에 참여하며, 영성 생활을 위한 매우 소중한 길잡이이다.
- 2694 그리스도인 가정은 기도를 가르치는 첫 번째 장소이다.
- 2695 서품된 봉사자들, 봉헌 생활, 교리 교육, 기도 모임, ‘영성 지도’ 등은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데 도움을 준다.
- 2696 기도를 드리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개인이나 가정의 기도실, 수도원, 순례 성지들이고, 특히 성당은 본당 공동체가 드리는 전례 기도를 위한 고유한 장소이며, 성체 조배를 위해서 가장 알맞은 장소이다.
- 제 3 장 기도 생활
- 2697 기도는 새 마음의 생명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기도에서 생기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전부이신 분을 잊고 지낸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 생활의 교부들은, 신명기와 예언자들의 전통에 따라, 기도는 ‘마음의 기억’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자주 하느님을 생각해야 합니다.”(1) 그러나 일정 시간에 의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어느 때에나’ 기도할 수 없다. 이런 일정 시간들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깊이와 지속성을 주는 특별한 시간이다.
- 2698 교회 전통은 지속적인 기도를 함양시켜 주는 주기적인 기도를 신자들에게 권한다. 어떤 기도들은 날마다 바치는데, 곧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식사 전후의 기도, 성무일도가 그러하다. 그리고 주일에는 성찬례를 중심으로 무엇보다도 기도로써 거룩하게 지낸다. 또한 전례주년과 그에 따르는 대축일들은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에 근본이 되는 주기이다.
- 2699 주님께서는 친히 바라시는 길과 방식을 통해서 각 사람을 인도하신다. 신자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내리는 결정과 자신이 바치는 기도의 독특한 표현으로써 주님께 응답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전통은 기도 생활의 중요한 세 가지 표현 방식, 곧 소리 기도, 묵상 기도, 그리고 관상 기도를 인정해 왔다. 이 기도들의 기본적인 공통점은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고,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물고자 하는 노력에 따라, 이 세 가지의 기도 형태는 기도 생활을 깊이 있게 해 준다.
- 제1절 기도의 형태
- I. 소리 기도
- 2700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나 또는 입으로 하는 말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 중에 말씀을 드리는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데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열성에 달린 것입니다.”(2)
- 2701 소리 기도는 그리스도인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스승이 침묵 중에 하시는 기도에 마음이 끌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리 내어 하는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의 전례 기도만 드리신 것이 아니다. 복음서들은, 환희에 차서 성부를 찬양하신 것을 비롯해서,(3) 겟세마니에서 비탄에 젖으시기까지,(4) 개인 기도를 소리 높여 드리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 2702 내적 기도에 감각을 결합하려는 욕구는, 우리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우리의 감정을 외적으로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의 청원에 가능한 모든 힘을 부여할 수 있도록, 우리는 온몸으로 기도해야 한다.
- 2703 이러한 욕구는 하느님의 요구에도 부합한다. 하느님께서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곧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살아 있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내적 기도에 몸까지 결합시키는 외적 표현도 원하신다. 왜냐하면 외적 표현은 하느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완전한 찬미를 이루기 때문이다.
- 2704 소리 기도는 외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일반 대중의 기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내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 해도, 소리 기도를 무시할 수는 없다. 기도는 “우리가 말씀드리는” 그분을 의식하면 할수록, 내적인 것이 된다.(5) 이리하여 소리 기도는 관상 기도의 최초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 II. 묵상
- 2705 묵상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탐색이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사람의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여기에는 어려운 주의력 집중이 요구된다. 그래서 대개는 어떤 책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그리스도인이 사용할 수 있는 그러한 책들은 얼마든지 있다. 성경, 그 중에서도 특히 복음서, 성화상, 그 날이나 시기의 전례문, 영성 교부들의 저서, 영성에 관한 저술들, 창조와 역사라는 위대한 책, 곧 하느님의 ‘오늘’이 펼쳐지는 지면이다.
- 2706 우리가 읽은 것에 대해 묵상하면, 그 내용을 자기 자신에 비추어서 생각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게 된다. 여기서 다른 한 권의 책, 삶이라는 책이 펼쳐진다. 생각에서 현실로 옮겨지는 것이다. 겸손과 신앙의 정도에 따라, 우리는 묵상 중에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빛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진리를 실천하느냐가 문제이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 2707 영성의 대가들이 다양한 만큼이나 묵상의 방법도 다양하다. 그리스도인은 정기적으로 묵상하기를 원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처음 세 가지 종류의 땅과 비슷하게 된다.(6) 그러나 방법이란 단지 길잡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기도를 위한 유일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다.
- 2708 묵상에는 사고력, 상상력, 감정과 의욕이 모두 동원된다. 이러한 동원은 신앙의 확신을 심화하고,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키며,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나 묵주 기도에서처럼, 특히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에 더 마음을 쓴다. 이와 같은 성찰 기도의 형태는 큰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과 결합하기 위하여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
- III. 관상 기도
- 2709 관상 기도란 무엇인가-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답한다. “마음으로 하는 관상 기도란, 제 생각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과 자주 단둘이 지냄으로써 친밀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7)
- 관상 기도는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아가 1,(7) 를(8) 찾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고, 또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에 대한 소망이 언제나 사랑의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순수한 신앙으로 그분을 찾으니, 이 신앙은 우리를 그분에게서 태어나게 하고, 그분 안에서 살게 한다. 관상 기도 중에도 묵상을 할 수는 있지만 우리 시선은 언제나 주님께 고정되어 있다.
- 2710 관상 기도를 하는 때와 시간을 선택하는 일은 내밀한 마음을 드러내는 결연한 의지에 달려 있다. 관상 기도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하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을 위해 할애하는 시간을 정하고, 그 만남에 어떠한 시련이 따르고 아무리 마음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더라도, 도중에 주님에게서 그 시간을 다시 빼앗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해야 한다. 늘 관상 기도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건강이나 일이나 정서라는 조건들과 관계없이 언제나 관상 기도에 들어갈 수는 있다. 마음은 가난과 신앙 안에서 주님을 찾고 만나는 장소가 된다.
- 2711 관상 기도에 들어가는 일은 성찬 전례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곧, 마음을 ‘모으고’, 성령께서 움직여 주시도록 우리의 전 존재를 집중시키며,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거처인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우리가 머물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현존을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벗어 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려, 정화되고 변화되어야 할 제물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이다.
- 2712 관상 기도는 하느님 자녀의 기도이며,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하고 더욱 사랑하여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바라는 용서받은 죄인의 기도이다.(9)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우리의 사랑 역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 것임을 우리는 안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기 때문이다. 관상 기도는, 늘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더욱 깊이 일치함으로써, 사랑하시는 성부의 뜻에 겸손하고 비어 있는 마음으로 승복하는 것이다.
- 2713 이처럼 관상 기도는 기도의 신비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선물이며 은총이다. 이 은총은 겸손하고 비어 있는 마음을 가져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관상 기도를 통해서,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계약의 관계가 맺어진다.(10) 관상 기도는 성삼위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모습인 인간을 ‘당신과 닮게’ 하시는 친교이다.
- 2714 관상 기도를 하는 시간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도 가장 알찬 시간이다. 관상 기도 안에서 성부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힘을 돋우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신다. 이로써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머무르시게 되고, 우리는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을 기초로 삼게 될 것이다.(11)
- 2715 관상 기도를 하는 것은 신앙의 눈길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고 계십니다.”이것은 비안네 성인이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있을 때 감실 앞에서 기도하던 한 농부가 한 말이다.(12)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눈길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시선의 빛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준다. 그분의 진리와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에 비추어, 우리는 모든 것을 보게 된다. 관상은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향해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이리하여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은 ‘주님에 대한 내적 지식’을 배워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따르게 된다.(13)
- 2716 관상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다. 경청하는 일은 결코 수동적인 일이 아니라, 신앙에 따라서 순명하는 것이요, 종으로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며, 어린이가 부모를 사랑하여 따르는 것과 같다. 이런 경청은 종이 되신 성자의 “예.”(Amen)라는 응답과, 겸손한 여종의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는 응답에 동참하는 것이다.
- 2717 관상 기도는 침묵이다. 곧 “다가올 세상의 상징”,(14) 또는 “말 없는 사랑”(15) 처럼, 침묵 속에서 하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 중에 하는 말은 장황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와 같다. ‘외적인’ 사람은 견딜 수 없는 이 침묵 중에 성부께서는, 강생하시고, 고통 받으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며, 자녀가 되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기도에 참여하게 하신다.
- 2718 관상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기도와 합쳐진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교회가 성찬례에서 기념하는데, 성령께서는 우리가 관상 기도 중에 그 신비를 다시 체험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게 하신다.
- 2719 신앙의 어둔 밤에 머물기를 동의할 정도에 이르면, 관상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기도가 된다. 부활의 새벽은 고뇌와 무덤의 밤을 통과한다. (‘연약한 육신’이 아닌) 예수님의 성령께서, 관상 기도 중에 우리가 ‘예수님의 시간’ 가운데에서 가장 핵심적인 수난의 사흘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주신다. 관상 기도에는 “그분과 함께 한 시간을 깨어 있을 것에”(16) 동의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 간추림
- 2720 교회는 매일 기도, 성무일도, 주일의 성찬례, 전례주년에 따른 축일 등을 통해 정기적으로 기도하라고 신자들에게 권장하고 있다.
- 2721 그리스도교 전통은 기도 생활의 세 가지 중요한 형태, 곧 소리 기도, 묵상 기도, 관상 기도를 인정해 왔다. 이 세 기도 형태의 공통점은 마음을 가다듬는 데 있다.
- 2722 몸과 정신이 결합된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소리 기도는, 당신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시고 또한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몸을 마음의 내적인 기도에 일치하게 한다.
- 2723 묵상 기도는 사고력, 상상력, 감정, 의욕을 동원하는 탐색적인 기도이다. 묵상의 목적은 우리네 삶의 현실에 비추어 고찰한 주제를 신앙을 통해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 2724 관상 기도는 기도의 신비를 단순하게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는 예수님께 신앙의 눈길을 고정시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없이 우리 사랑을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기도와 합쳐지게 된다.
- 제2절 기도의 싸움
- 2725 기도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선물인 동시에, 이 선물에 대한 우리들의 결정적인 응답이다. 기도는 언제나 노력을 전제로 한다. 그리스도 이전 곧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기도하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성인들과, 그리스도 자신이 기도란 일종의 싸움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누구와 싸우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 자신과 싸우는 것이며, 인간에게 기도를 외면하게 하고, 인간과 하느님의 일치를 깨뜨리려는 유혹자의 계략에 맞서는 싸움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대로 살기 때문에, 또한 사는 대로 기도한다. 우리가 평소에 그리스도의 성령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늘 기도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을 위한 ‘영적 싸움’은 기도의 싸움과 분리될 수 없다.
- I. 기도에 대한 반대
- 2726 기도의 싸움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존재하는, 그리고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기도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을 극복해야 한다. 이 잘못된 견해들 가운데에는 기도를 단순한 심리적 활동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정신적 공백 상태에 이르려는 집중 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기도는 의례적(儀禮的)인 태도와 말에 불과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무의식 중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그 모든 일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떤 ‘일’로 생각한다. 말하자면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 쉽게 낙담하는 것은, 기도는 그들의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 2727 우리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우리가 방심한다면, 이 사고방식은 우리 안에 스며들게 된다. 예를 들어서, 이성과 과학을 통해서 검증되는 것만이 참되다는 생각이다(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서는 신비이다). 사람들은 생산과 효용성의 가치만을 높이 평가한다(기도는 비생산적인 것이어서,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그들은 관능주의와 안락을 진선미의 척도로 내세운다(그러나 기도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philokalia]이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는 행동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삶과 결별하는 것도 아니다).
- 2728 끝으로, 우리가 기도에 실패했다는 느낌에 대항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마음의 무감각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있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17) 주님께 다 드려야 한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일이 있으며, 우리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죄인으로서 무력감을 느껴 상처를 입은 우리의 자존심이 더욱더 완고해지는 일도 있고, 기도란 거저 얻어지는 선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잘못된 반감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 결과, 우리는 “기도를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늘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자면, 우리는 겸손과 신뢰와 인내로써 싸워야 한다.
- II. 겸허한 경계심
- 기도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 2729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흔한 어려움은 분심이다. 이것은 소리 기도에서 말과 그 의미에 관련될 수 있고, 좀 더 심하면, (전례적이거나 개인적인) 소리 기도에서, 묵상 기도나 관상 기도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그분과 관련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분심을 몰아내려고 쫓아다니는 것은 오히려 함정에 빠지는 것이 된다. 그저 우리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분심은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므로, 이것을 하느님 앞에서 겸손되이 깨달으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우선적인 사랑이 일깨워질 것이다.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결연히 바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실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로 선택하는 것이다.(18)
- 2730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소유욕과 지배욕에 맞서 싸우는 것은 경계심 곧 마음의 절제이다. 예수님께서 경계심을 강조하실 때, 그것은 늘 당신 자신과, 그분의 오심과, 마지막 날과 매일, 곧 ‘오늘’과 연관되는 깨어 있음이었다.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꺼지지 않아야 할 불은 바로 신앙의 불이다. “당신을 제가 생각하오며,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삽나이다”(시편 27[26],8).
- 2731 또 다른 어려움, 특히 마음을 다해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부딪치는 어려움은 마음의 메마름이다. 이 메마름은 관상 기도의 한 부분이다. 거기서는 생각도 기억도 느낌도 의욕도 없고, 영적인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이때는 고뇌와 무덤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참된 신앙의 순간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말씀이 돌밭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지 못해 메마름이 생긴 것이라면, 회개하려고 싸워야 한다.(19)
- 기도 중 유혹에 직면하여
- 2732 가장 흔하면서도 매우 은밀한 유혹은 우리 신앙의 부족이다. 이 유혹은 공공연한 불신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인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급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갖가지 일이나 근심이 더 중요한 것처럼 나타나는데, 이는 또다시 무엇엔가 집착하고 있는 마음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주님을 우리 최후의 피난처로 여겨 그분께 갈 때에도, 우리는 참으로 그분을 믿는가- 또 주님을 우리의 친지로 여길 때에도, 우리 마음은 여전히 자만으로 차 있는 경우가 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 신앙의 부족, 곧 우리가 아직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 2733 자만 때문에 빠지게 되는 또 다른 유혹은 게으름이다. 영성적인 교부들은 이를 금욕 정신이 해이하고 경계심이 감퇴하여 마음이 태만해짐으로써 나타나는 일종의 의기소침으로 이해해 왔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더 많이 다치게 된다. 고통스러운 좌절감은 교만의 이면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비참함에 놀라지 않는다. 자신의 비참함을 느끼는 겸손한 사람은 더 깊은 신뢰심을 갖게 되고, 더욱 끈기있게 참아 견딘다.
- III. 자녀다운 신뢰
- 2734 자녀다운 신뢰는 시련 속에서 드러난다.(20) 특별한 어려움은 자신을 위한 청원 기도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전구하는 청원 기도에 관련된다. 자신의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여긴 나머지, 기도를 그만두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는 왜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효과 있는’ 기도가 되는가-
- 왜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가-
- 2735 우리는 먼저 한 가지 뚜렷한 사실 앞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통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하거나 또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때,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는지를 알고자 진정 애쓰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기도의 결과를 보아야겠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우리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여 그분께 기도하는가-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가 이용할 만한 수단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이해하는가-
- 2736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른다.”(로마 8,26)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알맞은 것’을 하느님께 청하는가-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면서도(21) 우리의 청원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것은, 자유로워야만 하느님의 품위 있는 자녀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확실하게 알려면 자유의 성령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22)
- 2737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2-3).(23) 만일 우리가 “절개 없는 자들”로서(24) 갈라진 마음으로 청한다면,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고 우리가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수가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야고 4,5)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질투를 느끼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표징이다. 그분의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우리의 청원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 당신이 청하는 것을 하느님에게서 바로 받지 못하더라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기도하면서 꾸준히 하느님과 함께 머물러 있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25)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이 기도 안에서 정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26)
- 어떻게 효과 있는 기도가 되는가-
- 2738 구원 경륜 안에서 기도에 대한 계시는, 신앙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업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하느님께서 하신 최대의 업적, 곧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부활은 우리의 자녀다운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을 위한 그 사랑의 계획에 협력하는 것이다.
- 2739 바오로 사도의 이 신뢰는 대담한 것으로서,(27)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기도에,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성부의 성실하신 사랑에 근거를 둔 것이다.(28) 기도하는 마음의 변화가 바로 우리의 청원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이다.
- 2740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그리스도인이 하는 기도는 유효한 청원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시며,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 성자의 마음도 성부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바라시는데, 양자가 된 자녀들의 마음이 어떻게 선물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에 더 집착할 수 있겠는가-
- 2741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이롭도록 기도하신다. 우리의 모든 청원은 한 번에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부르짖음 속에 모아져, 그분의 부활로써 성부께 받아들여졌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성부 곁에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전구하신다.(29) 만일 우리의 기도가 자녀다운 신뢰와 대담성을 지녀 예수님의 기도와 튼튼히 결합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을 얻으며, 이러저러한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곧 모든 선물을 지니신 성령 바로 그분을 받게 된다.
- IV. 항구한 사랑으로
- 2742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20).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8). “언제나 일하고 깨어 있으며 재를 지키라는 명령을 우리가 받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법입니다.”(30) 이런 지치지 않는 열성은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우둔함과 게으름에 대항하는 기도의 싸움은 겸손하고, 신뢰하며, 항구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벌이는 투쟁이다. 이 사랑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빛과 생명을 주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 2743 첫째로, 기도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어떠한 풍파 중에라도(31) 날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마태 28,20)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시간이다. 우리의 시간은 하느님 손안에 있다.
- 저잣거리에서나 혼자 산책할 때에도, 자주 그리고 열심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중에도, 또는 요리를 하는 중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32)
- 2744 둘째로, 기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반명제에서 이끌어 낸 증명도 똑같이 설득력을 가진다. 곧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죄의 노예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33)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실 수 있겠는가-
- 기도만큼 값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고, 어려운 것을 쉽게 해 줍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죄에 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34) 기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김없이 영벌을 자청할 것입니다.(35)
- 2745 셋째로,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곧, 성부께서 세우신 사랑의 계획에 자녀답게 사랑으로 일치함, 우리를 늘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더 닮도록 해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변화됨,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모든 이를 사랑함이 바로 그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6-17).
- 기도를 일과 결합시키고, 일을 기도와 결합시키는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원칙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36)
-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
- 2746 당신의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는 성부께 기도하신다.(37) 복음서가 전해 주는 예수님의 가장 긴 기도는, 마치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그 안에 포괄하듯이, 창조와 구원의 경륜 전부를 포괄하고 있다.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파스카가 그분의 교회 전례 안에서 언제나 존속하듯이,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도 늘 그분의 기도로 지속된다.
- 2747 그리스도교 전통이 당연하게도, 이 기도를 예수님께서 ‘사제로서 바치신 기도’라고 규정하였다. 이 기도는 우리 ‘대사제’의 기도이다. 또한 이 기도는 그분의 희생 제사와 분리될 수 없으며, 그분의 ‘성부께 건너가심’(파스카)과 분리될 수 없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당신을 성부께 온전히 바치신다.(38)
- 2748 이 희생 제사와 파스카의 기도 안에서 모든 것이, 곧 하느님과 세상, ‘말씀’과 살[肉], 영원한 삶과 시간,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과 사랑을 저버리는 죄, 이미 제자가 된 사람들과 제자들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될 사람들, 자기 낮춤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된다.(39) 이 기도는 일치의 기도이다.
- 2749 예수님께서는 성부의 일을 완수하셨으며, 그분의 기도는, 그분의 희생 제사처럼, 세상 끝 날까지 미친다.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드리신 이 기도는 마지막 시간들을 충만하게 만들며, 이 시간들을 종말로 이끌어 간다.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받으신 아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온전히 되맡기셨으며, 동시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전 인류에 대한 권한에 따라, 온전한 자유로 자신을 표현하신다.(40) 스스로 종이 되신 아드님께서는 주님이시며 전권자(Pantocrator)이시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의 대사제께서는 또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 2750 우리가 주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기도하게 됨으로써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사제로서 바치신 기도’는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기도에 포함된 중요한 청원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 청원들이란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관심,(41) 아버지의 나라(영광(42) )에 대한 열정,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짐,(43) 악에서 구원됨(44) 등이다.
- 2751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불가분의 ‘인식’을 계시하고 전해 주시는데,(45) 그것이 바로 기도 생활의 신비인 것이다.
- 간추림
- 2752 기도는 노력을, 그리고 유혹자의 계략과 우리 자신에 맞서는 싸움을 전제로 한다. 기도의 싸움은, 평소에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영적인 싸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살기 때문에, 사는 대로 기도하는 것이다.
- 2753 기도의 싸움에서, 우리는 그릇된 견해들, 다양한 시대적 사조들, 우리가 실패한 경험 등에 대항한다. 기도의 유익성이나 기도의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회의를 느끼게 하는 유혹들에 대해서 우리는 겸손과 신뢰와 인내로써 대처해야 한다.
- 2754 기도하는 데에 가장 흔한 어려움은 분심과 마음의 메마름이다. 여기에 대한 대책은 신앙과 회개와 깨어 있는 마음이다.
- 2755 두 가지 유혹이 자주 기도를 위협한다. 곧 신앙의 부족과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금욕 정신이 해이해진 데에서 기인하며, 좌절감에 빠지게 하는 의기소침의 한 형태이다.
- 2756 우리의 청원을 언제나 들어주시지는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자녀다운 신뢰는 시련을 겪게 된다. 복음서는 우리의 기도가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하는지 생각해 보기를 권고한다.
- 275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기도는 언제나 가능하다. 나아가, 기도는 절대 필요한 일이다.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 2758 ‘사제로서 바치신 기도’라고 불려 마땅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는(46) 창조와 구원의 경륜 전체를 요약한다. 이 기도는 ‘주님의 기도’의 중대한 청원들에 영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