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
- 제2부 주님의 기도 “우리 아버지”
제2부 주님의 기도 “우리 아버지”
- 2759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 이 청원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교회에 그리스도교의 기본이 되는 기도를 맡기셨다. 루카 복음은 (다섯 가지 청원으로 구성된) 짧은 기도문을 전해 주는 반면에,(1) 마태오 복음은 (일곱 가지 청원으로 된) 좀 더 긴 기도문을 전해 준다.(2) 교회의 전례 전통에는 마태오 복음의 기도문(마태 6,9-13)이 채택되어 사용되어 왔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2760 일찍이 전례 관습에 따라 주님의 기도에 영광송이 덧붙여졌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 곧 「디다케」에는 주님의 기도가 “주님께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3) 로 끝맺고 있다. 「사도 헌장」에서는 영광송에 “나라와”(4) 를 덧붙이고 있는데, 이 기도문이 오늘날 초교파 기도문(oratio oecumenica)으로 쓰이고 있다. 비잔틴 전승에서는 “영광” 앞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로마 미사 전례서에서는, 복된 희망을 품고(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분명한 희망의 표현으로써,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청원을(6) 이어 나간다. 이어서 회중의 환호 또는 「사도 헌장」의 영광송이 되풀이된다.
- 제1절 “복음 전체의 요약”
- 2761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7) “주님께서는 이 기도문을 전해 주신 다음 이렇게 덧붙이셨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그러므로 저마다 자기 자신의 사정에 따라서 서로 다른 청을 하늘에 계신 분께 드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청원의 기본이 되는 주님의 기도로 늘 시작해야 한다.”(8)
- I. 성경의 핵심
- 2762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편이 왜 그리스도인 기도의 주된 양식[主食]이며, 어떻게 주님의 기도의 청원 안으로 합류하는지를 보여 주고 나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 성경에 실려 있는 모든 청원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연유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9)
- 2763 모든 구약 성경(율법서와 예언서와 시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10) 복음은 이러한 ‘기쁜 소식’이다. 이 기쁜 소식의 첫 선포는 마태오 성인이 산상 설교로 요약하였다.(11)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주님의 기도)가 이 선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기도의 청원 하나하나가 명확해지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 준다.(12)
- 2764 산상 설교는 삶에 대한 가르침이며, 주님의 기도는 청원이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이 두 가지 안에서 주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곧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하는 우리의 내적 지향을 새롭게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써 새 삶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기도로써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청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분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
- II. 주님의 기도
- 2765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ca 곧 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 전해진 이 기도는 참으로 유일한 것으로서 ‘주님의’ 기도이다. 한편, 외아들께서 이 기도의 말씀을 통해, 성부께서 당신에게 주신 말씀을 몸소 우리에게 전해 주신다.(13)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스승이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신 말씀으로서, 인간의 마음으로 당신의 인간 형제자매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그것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모범이시다.
- 276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기도문을(14) 우리에게 남겨 주시지는 않았다. 모든 소리 기도의 경우가 그렇듯이,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성부께 기도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다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말씀만이 아니라 동시에 성령도 주시는데, 성령을 통해서 이 말씀들은 우리 안에서 “영이며 생명”(요한 6,63)이 된다. 더욱이 자녀다운 기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제로 자녀다운 기도를 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성부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7).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이 기도는 성자와 성령의 신비로운 사명에 직접 연결된다.
- III. 교회의 기도
- 2767 시초부터 교회는, 주님의 말씀과 분리될 수 없고 또한 신자들의 마음 안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과 떨어질 수 없는 이 선물을 받아들이고 생활화하였다. 최초의 공동체들은, 유다인들의 신심으로 바쳐 왔던 ‘열여덟 가지 찬미’ 대신에 주님의 기도를 “하루에 세 번”(15) 바쳤다.
- 2768 사도적 전승에 따라, 주님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전례 기도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형제를 위해 공동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교회 전체를 위해 오직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도록,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
- 모든 전례 전승에서 주님의 기도는, 성무일도의 주요 시간경의 기본 요소가 된다. 특히 이 기도의 교회적 성격이 세 가지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 2769 입문 성사 때 하는 ‘주님의 기도 수여’는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바로 같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써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난”(1베드 1,23)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귀담아들어 주시는 바로 그 ‘말씀’으로써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들이 이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유로 받은 인호가 그들의 마음, 귀, 입술, 그리고 자녀다운 그들의 존재 전체에 지워지지 않도록 찍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주석은 대부분 예비 신자들과 새로 입교한 교우들을 위한 것이었다. 교회가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에는, 언제나 “갓 태어난” 백성이 기도드리는 것이며, 자비를 입은 것이다.(17)
- 2770 성찬 전례에서, 주님의 기도는 모든 교회가 드리는 기도가 되어, 그 완전한 의미와 효력을 드러낸다. 감사 기도(Anaphora)와 영성체 사이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한편으로는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에 담겨 있는 청원과 전구를 요약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영성체로 미리 맛보게 될 천국 잔칫집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 2771 성찬례에서 주님의 기도는 또한 이 기도에 담겨진 청원의 종말론적 특성을 나타낸다. 이 기도는 ‘마지막 때’, 곧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었고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구원의 때에 바치는 기도이다.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들은 구약의 기도들과는 달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단 한번 결정적으로 실현된 구원의 신비에 근거를 둔 것이다.
- 2772 이러한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서 일곱 가지의 청원 하나하나에 생기를 불어넣는 희망이 솟아난다. 이 청원들은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므로”(1요한 3,2)(18) 인내와 기다림의 때인 현세의 탄원을 표현하고 있다. 성찬례와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주님의 재림을 열렬히 갈망하고 있다.
- 간추림
- 2773 예수님께서는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하는 제자들의 간청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의 기도’라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기도를 주셨다.
- 2774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며”,(19)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20) 주님의 기도는 성경의 핵심이다.
- 2775 이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 기도의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 2776 주님의 기도는 교회의 가장 뛰어난 기도이다. 이 기도는 성무일도의 주요 시간경들과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인 세례, 견진, 성체성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성찬례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라는 희망이 표명되면서, 이 기도에 담긴 청원들의 종말론적인 특성이 드러난다.
- 제2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I.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온전한 신뢰로 감히 다가간다)
- 2777 로마 전례 중에, 성찬례에 모인 회중은 자녀다운 대담함으로 우리 아버지께 기도드릴 것을 권고받는다. 동방 전례도, “온전한 신뢰로 감히 행하여라.”, “우리를 합당한 자가 되게 하소서.”와 같은 표현들을 발전시켜 왔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 오직 예수님께서만 하느님의 이 거룩한 문턱을 넘으실 수 있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히브 1,3), 우리를 아버지의 면전으로 인도하시어 “보십시오. 저와 저에게 주신 자녀들입니다.”(히브 2,13) 하고 말씀드리신다.
- 만일 우리를 내신 성부께서 친히 그리고 성자의 영이 우리를 재촉하여 “아빠! 아버지!”(로마 8,15)라고 외치게 하지 않으신다면, 노예의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땅속으로 다시 들어가려 할 것이고, 먼지에서 온 우리의 인간 조건은 먼지로 되돌아갈 것입니다.……인간의 심성이 하늘의 권능에 의해 고무되지 않고서야, 죽을 나약한 인간이 언제 감히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까-(21)
- 2778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드리도록 이끄는 전능하신 성령의 힘을 동방과 서방의 전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아름답고 전형적인 표현으로써 곧 담대함(parrhesia), 단순 소박함, 자녀다운 신뢰, 기쁨에 찬 자신감, 겸손한 대담성,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등으로 표현하였다.(22)
- II. “아버지!”
- 2779 주님의 기도의 이 외침을 우리 것으로 삼기 전에, 우리의 마음에서 ‘이 세상’의 그릇된 생각들을 겸손되이 정화시켜야 한다. 겸손해야 우리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마태 11,27) 곧 “철부지들”(마태 11,25)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의 정화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역사 안에서 형성되어 왔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아버지상이나 어머니상과 관련된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창조된 현세의 사고 범주들을 초월하신다. 이 영역에서 하느님을 우리의 생각에 비추어서 흠숭하거나 또는 적대시하는 것은, 찬양하거나 또는 싸워야 할 우상들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성부께 기도하는 것은, 성자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계시는 그분’(Ipse Est), 곧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하느님 아버지라는 이름은 일찍이 아무에게도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누구시냐고 여쭈었을 때, 다른 이름을 들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아들’이라는 이름은 ‘아버지’라는 새 이름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23)
- 2780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아들을 통해서 당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며, 당신 성령께서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성부에 대한 성자의 위격적 관계는 인간이 생각할 수 없고, 천상의 천사들도 엿볼 수 없는 그러한 관계이다.(24) 그렇지만 성자의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25) 믿는 우리를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참여시켜 주신다.
- 2781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할 때, 우리는 성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게 된다.(26) 그때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아버지를 알아 뵙고 깨닫는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분께 간청하기보다는, 그분을 흠숭하며 찬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로, 참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시고, 그 이름을 믿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며, 우리 안에 현존하심에 대해 우리는 감사드린다.
- 2782 우리가 아버지를 흠숭할 수 있는 것은, 외아들 안에서 우리를 양자로 삼아 주심으로써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세례를 통하여,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 ‘머리’에서 지체들에게 흐르는 당신 성령의 도유로써 우리를 ‘그리스도들’이 되게 하신다.
- 과연 우리를 양자로 삼아 주시기로 예정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일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여러분은 당연히 ‘그리스도들’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27)
- 은총을 통해서 새로 태어났고 하느님께 되돌려진 새사람은 이미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우선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28)
- 2783 이와 같이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되며, 동시에 하느님도 우리에게 계시된다.(29)
- 오 사람아, 너는 감히 하늘을 향해 너의 얼굴을 들지 못하고, 땅을 향해 너의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너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았다. 네 모든 죄가 용서받은 것이다. 고약한 종이었던 네가 착한 아들이 된 것이다.……그러니 당신 아들을 통해 너를 속량하신 아버지께 눈을 들어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드려라. ……그러나 너에게 어떤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지 마라.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은 그리스도께만 친아버지이시며, 우리 모두에게는 그저 공동으로 아버지이실 뿐이다. 하느님은 그분만을 낳으셨고 우리는 창조하셨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도 그분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으려면, 은총에 힘입어,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드려라.(30)
- 2784 양자로 삼아 주시는 이 무상의 선물은 우리의 끊임없는 회개와 새 삶을 요구한다.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는 두 가지 근본 의향을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 첫째, 하느님을 닮겠다는 열망과 의지이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는 은총에 힘입어 다시 하느님을 닮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이 은총에 응답해야 한다.
-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처신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31)
- 여러분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인자하신 하느님을 여러분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인자하신 천상 아버지의 징표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32)
-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생각하여 그 아름다움이 우리 영혼을 장식하게 해야 합니다.(33)
- 2785 둘째, 우리를 “어린이처럼”(마태 18,3) 되게 하는 겸손하고 신뢰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철부지들”(마태 11,25)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이다.
-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눈길로, 위대한 사랑에 불타는 듯한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에 마음이 온통 쏠려 사랑에 빠져든 사람은, 자신의 친아버지와 이야기하듯이 매우 다정하게, 매우 독특하고 경건한 친근감으로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34)
-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은 우리 안에 사랑(자녀에게 아버지보다 더 귀한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에 대한 열정……그리고 우리가 청하고자 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동시에 불러일으켜 줍니다.……실제로 당신 자녀가 되는 것을 이미 허락하신 아버지께서 그들의 기도에 대해 무엇을 거절하실 수 있겠습니까-(35)
- III. “‘우리’ 아버지”
- 2786 ‘우리’ 아버지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라는 대명사는 ─ 우리 편에서 볼 때 ─ 소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 2787 우리가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선포된 하느님 사랑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곧,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이제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이 새로운 관계는 거저 주어진 상호 소속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와 자비로써,(3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은총과 진리”에 응답해야 한다.(37)
- 2788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백성이 ‘마지막 때’에 드리는 기도이므로, ‘우리’라는 이 말은 또한 하느님의 궁극적 약속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희망을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새 예루살렘에서 승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묵시 21,7).
- 2789 ‘우리’ 아버지께 기도드릴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우리가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다. 성부께서 천주성의 ‘근원이시고 기원’이시므로, 천주성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치가 성부와 성자의 유일하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위격들을 혼동하지도 않는다. 거룩하신 삼위께서는 같은 본체이시며, 분리되지 않으신다. 우리가 성부께 기도드릴 때, 우리는 성자와 성령도 함께 흠숭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 2790 문법적으로, ‘우리’라는 낱말은 여러 사람에게 공동으로 관계되는 것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한 분만 계신데, 그분의 외아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외아들에게서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들이 그분을 아버지로 알아 모신다.(38)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이와 같은 친교이다. 교회는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로마 8,29) 되신 외아들과 결합하여 같은 한 성령을 통하여, 같은 한 성부와 친교를 이룬다.(39) ‘우리’ 아버지께 기도할 때, 세례 받은 각 사람은 이러한 친교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사도 4,32).
- 279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에게 공동의 유산이자 절박한 호소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일치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은 당신 제자들의 일치를 염원하면서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에 참여해야 한다.(40)
- 2792 끝으로, 만일 우리가 참되게 ‘우리 아버지’께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는 개인주의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사랑이 우리를 개인주의에서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 첫머리에 나오는 “우리”와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네 가지 청원의 “저희”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이 말을 하고자 한다면,(41) 우리는 분열과 대립을 극복해야 한다.
- 2793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어 주신 모든 사람을 하느님 대전에 데려오지 않고서는, 세례 받은 이들이 ‘우리’ 아버지라는 말로 기도드릴 수 없다. 하느님 사랑에는 국경이 없으므로, 우리의 기도에도 국경이 없어야 한다.(42) ‘우리’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아직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로 모이도록,(43) 우리는 그들 모두와 더불어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이러한 배려는, 모든 훌륭한 기도자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우리가 감히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때, 우리의 기도는 그런 폭넓은 사랑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 IV. “하늘에 계신”
- 2794 이 성서적 표현은 어떤 장소(‘공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멀리 계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위엄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다른 어느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겸손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아주 가까이 계신다.
- 하느님께서 당신 성전에 계시듯이, 의인들의 마음에 계신다는 의미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알아듣는 것은 올바른 이해입니다. 이와 동시에,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르는 그분께서 그 안에 오시기를 열망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44)
- ‘하늘’은 또한 천상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며,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사시고 거니시는 것입니다.(45)
- 2795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기도드릴 때 하늘이라는 상징은, 우리가 지키며 살고 있는 계약의 신비를 상기시켜 준다.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며, 하늘은 하느님의 거처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집은 우리의 ‘고향’이다. 죄 때문에 계약의 땅에서 쫓겨난 인간은,(46) 마음의 회개로써 아버지께 곧 하늘로 돌아가게 된다.(47) 그런데 하늘과 땅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였다.(48) 왜냐하면 성자께서 홀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함께 다시 하늘로 오르게 하시기 때문이다.(49)
- 279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드릴 때, 교회는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백성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아 있고,(50)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으며,(51) 그러면서도 동시에,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2).(52)
-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지니고 있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자신들의 생애를 보내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들입니다.(53)
- 간추림
- 2797 성실하고 소박한 신뢰, 겸손하고 기쁨에 찬 확신은 ‘주님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 합당한 마음가짐이다.
- 2798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께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요,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과 한 몸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 2799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성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54)
- 2800 우리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면, 우리 안에 그분을 닮으려는 의지가 굳건해지고 또한 겸손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깊어질 것이다.
- 2801 ‘우리’ 아버지라고 하느님을 부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 계약과, 거룩하신 삼위와 이루는 친교,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 끝까지 퍼져 가는 하느님의 사랑을 상기하는 것이다.
- 2802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엄과 의인들의 마음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인 하늘은 우리가 지향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이미 속해 있는, 참고향이다.
- 제3절 일곱 가지 청원
- 2803 우리가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하고, 찬양하기 위해 하느님 앞에 나아오게 되면, “아드님의 영”(갈라 4,6)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곱 가지 청원과 일곱 가지 축복이 솟아나게 하신다. 첫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을 향한 간구로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나머지 네 가지 청원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로서,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하느님의 은총에 내맡기도록 해 준다. “너울이 너울을 부릅니다”(시편 42[41],8).
- 2804 첫 세 가지 청원들은 우리가 아버지를 향하도록, 아버지를 위하도록, 곧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도록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특성이다. 이 세 가지 청원 중 어느 것에서든 우리는 ‘우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고뇌’가 된 그 ‘열렬한 소망’이 우리를 사로잡는다.(55) “……거룩히 빛나시며,……오시며,……이루어지소서.”라는 이 세 가지 탄원은 이미 구세주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직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지 않으셨으므로,(56) 이 간청들은, 희망하는 가운데, 이제 그 최후의 성취를 향하고 있다.
- 2805 나머지 네 가지 청원들은 성찬례의 성령 청원 기도의 청원들과 유사하게 펼쳐진다. 곧,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자비로우신 아버지께 말씀드리며 그 자비의 눈길을 우리 쪽으로 끄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는 이 청원들은, 바로 이 순간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와 관련된다. “……저희에게 주시고,……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저희를 구하소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청원은 양식을 얻거나 죄를 치유받기 위한, 우리의 생명 자체와 관련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두 가지 청원은 삶의 승리를 위한 우리의 싸움, 바로 기도의 싸움과 관련된 것이다.
- 2806 처음 세 가지 청원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 안에서 굳건해지며, 바람으로 가득 차게 되고, 사랑으로 불타게 된다. 피조물이며 아직도 죄인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청원을 드려야 한다. 이 ‘우리’는, 세상의 넓은 공간과 오랜 역사만큼 최대한으로 확대된 ‘우리’, 곧 ‘만인’을 포함한 의미의 ‘우리’이며, 이러한 우리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맡겨 드리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아버지께서는, 당신 그리스도의 이름과 당신 성령의 다스림을 통해서 우리와 온 세상을 위한 구원 계획을 실현하신다.
- I.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2807 여기서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말은, 우선 원인을 나타내는 의미(하느님 홀로 거룩하게 하신다)가 아니라, 오히려 존중의 의미에서, 거룩한 이름을 거룩하게 알아 모시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흠숭에서는 그 같은 간청이 이따금 일종의 찬미와 감사드리는 행위로 이해된다.(5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원의 형태로, 곧 하느님과 인간이 관련된 청원과 열망과 기대감인 이 청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 아버지께 첫 번째 청원을 드리는 순간부터 그분 신성의 신비로운 내면을 만나게 되고, 또한 우리 인류 구원의 드라마와도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하는 것은,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려고”(에페 1,4),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에페 1,9) 우리를 포함시킨다.
- 2808 구원 경륜의 결정적인 순간들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밝히시는데, 당신의 일을 수행하심으로써 그 이름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날 때, 하느님의 일도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2809 하느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영원한 신비의 다가갈 수 없는 중심이다. 이 신비 가운데 창조계와 역사 안에서 드러난 것을 성경은 ‘영광’, 엄위하신 하느님의 광채라고 하였다.(58)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비슷한 모습으로”(창세 1,26)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써, 그에게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다.(59)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60) 그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콜로 3,10) 새로워지도록,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시고 알려 주심으로써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신다.
- 2810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그 약속에 따른 맹세에서(61)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지만, 당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시고,(62)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구해 내심으로써 온 백성에게 당신 이름을 드러내신다. “나는 주님께 노래하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탈출 15,1) 시나이 산 계약 이후, 이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하느님의 이름이 그들 안에 머무르고 계시므로, 그들은 ‘거룩한 민족’(또는 ‘축성된 백성’ - 히브리 말로는 같은 말이다)이 되어야 했다.(63)
- 2811 그런데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법’을 주시고, 거듭 주셨음에도,(64) 또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생각해서” 인내를 보이심에도, 백성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 등을 돌리고, “뭇 민족 가운데서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65) 그 때문에 구약의 의인들과,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가난한 이들 그리고 예언자들은, 하느님 이름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것이다.
- 2812 드디어, 예수님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졌고, 사람이 되심으로 ‘구세주’로서 그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66) 곧, 예수님의 신원(Ipse Est)과 말씀과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67)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제로서 바치신 기도’의 핵심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당신께서 성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에,(68)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부의 이름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69)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서 파스카를 끝마치셨을 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예수님께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주님’이시다.(70)
- 2813 세례성사의 물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1코린 6,11). 우리 아버지께서는 일생에 걸쳐 “거룩하게 살라고”(1테살 4,7)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거룩함이 되셨습니다”(1코린 1,30). 아버지의 이름을 우리가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은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이다. 여기에 우리의 첫 번째 청원의 절박함이 있는 것이다.
-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거룩하신데, 누가 그분을 거룩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는 말씀에 따라, 세례성사로써 거룩하게 된 우리는 우리가 꾸준히 거룩한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잘못을 저지르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성화를 통해 우리의 죄를 정화해야 하므로, 우리는 이를 날마다 청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함이 우리 안에 지속되기를 비는 것입니다.(71)
- 2814 하느님의 이름이 뭇 민족 가운데서 거룩히 빛나시는 것은 불가분으로 우리의 삶과 기도에 달려 있다.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함으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하느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합니다.……이 타락한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름도 바로 이 이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합니다. 사실, 우리가 착하게 살면, 하느님의 이름이 찬미를 받으나, 우리가 악하게 살면, 하느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독을 받는다.”(로마 2,24)(72)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신 그만큼, 우리의 삶도 거룩해지도록 기도합니다.(73)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할 때,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합니다. 또한 아직도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서도 하느님의 이름이 빛나시기를 청하는 것이니, 모든 사람을 위해서, 원수들을 위해서까지도 기도하라고 하신 계명을 우리가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나소서.”라고 가려서 말하지 않고, 그 이름이 모든 사람 안에서 빛나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74)
- 2815 모든 청원을 포함하는 이 청원은, 뒤이어 오는 다른 여섯 청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기도를 통해서 받아들여진다.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75) 바치면, 그것은 우리의 기도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로서 바치신 기도에서 이렇게 청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켜 주십시오”(요한 17,11).
- II.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2816 신약 성경에서 ‘나라’(basileia)라는 말은 ‘왕권’(추상 명사), ‘왕국’(구상 명사), 또는 ‘통치’(동작 명사) 등,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보다 먼저 있다. 그 나라는 강생하신 ‘말씀’을 통해서 다가왔으며, 복음 전체를 통하여 선포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도래하였다. 하느님 나라는 최후의 만찬 이래, 성찬례 안에서도 우리 가운데 펼쳐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당신 아버지께 드릴 때, 하느님 나라는 영광 중에 오게 될 것이다.
-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날마다 기원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서 빨리 우리에게 당신의 도래를 앞당겨 드러내 보이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부활이십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다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76)
- 2817 이 청원은 “마라나 타”(Marana tha), 곧 “오소서, 주 예수님!”이라고 하는 성령과 신부(新婦)의 외침이다.
- 비록 이 기도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기원할 의무를 지우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희망이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는 열렬하게 이 말을 외치게 될 것입니다. 제단 밑에서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큰 소리로 주님께 간청합니다.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10) 과연 그들은 세상 끝 날에 정당한 갚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주님의 나라가 어서 오게 하소서!(77)
- 2818 주님의 기도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78) 그런데 이 희망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명을 다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 강림 이후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성자의 구원 사업을 세상에서 이루시며,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79) 주님의 성령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 2819 “하느님의 나라는……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마지막 때는 성령께서 내려오신 때이다. 성령 강림 이후로 “육”과 성령 사이의 결정적 싸움이(80) 시작되었다.
-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그 나라가 오소서.”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로마 6,12). 생각과 말과 행위가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81)
- 2820 성령에 따른 분별력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문화와 사회의 진보를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분리가 아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소명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에 투신하기 위해 창조주께 받은 힘과 수단을 유용하게 활용해야 하는 의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한다.(82)
- 2821 이 청원은 성찬례에서 표명되고 유효하게 되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전달되고 받아들여진다.(83) 이 청원은 참행복에 따른 새 생활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84)
- III.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2822 우리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1티모 2,4)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신다”(2베드 3,9).(85) 다른 모든 계명을 요약하고 또한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온전히 밝혀 주는 그분의 계명은,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86)
- 2823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에페 1,9-11). 우리는 이런 관대한 계획이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청하는 것이다.
- 2824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인간 의지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완전히 그리고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면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87) 예수님께서만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요한 8,29) 하고 말씀하실 수 있다. 고뇌에 찬 기도를 바치시던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셨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88)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다”(갈라 1,4).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 282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히브 5,8).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양자가 된, 피조물이며 죄인인 우리야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아버지의 뜻, 곧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려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당신 아들의 의지와 결합시켜 주실 것을 우리 아버지께 청한다. 우리는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무능하다. 그러나 예수님과 결합되고 또한 당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우리는 아버지께 우리의 의지를 맡겨 드리고, 당신 아들이 늘 선택하신 것을 우리도 선택하려고 결단할 수 있으니, 곧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89)
-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그분과 한마음이 될 수 있으며, 이로써 그분의 뜻을 수행할 수 있고, 이렇게 하여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90)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덕이 우리 노력에만 달려 있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음을 보여 주심으로써, 어떻게 겸손을 가르치시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모든 신자에게,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나 여러분 안에서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온 땅에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세상에서 오류가 추방되고, 진리가 넘치며, 악습이 퇴치되고, 덕이 다시 번성하며, 땅이 더 이상 하늘과 다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91)
- 2826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분간할 수 있으며,(92)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인내를 얻을 수 있다.(93) 예수님께서는 말로써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마태 7,21)을 행함으로써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 2827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신다”(요한 9,31).(94)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특별히 성찬례에서 드리는 기도의 힘도 그러하다. 교회의 기도는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와 일치하여 드리는 전구이며,(95) 주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 ‘마음에 든’ 모든 성인과 일치하여 드리는 전구이다.
- 우리는 진리를 그르치는 일없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이 말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의 뜻을 이룬 신랑에게서와 같이, 그 신랑에게 정혼한 신부에게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96)
- IV.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2828 “저희에게 주소서.” 이 말은 자기 아버지께 모든 것을 기대하는 자녀들의 아름다운 신뢰이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모든 생물에게 “제때에 먹이를”(시편 104[103],27)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원을 드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실로 이 청원을 드리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모든 선을 초월하여 더없이 선한 분이심을 깨달은 사람이기에, 우리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 2829 “저희에게 주소서.”라는 청원은 또한 계약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는 ─ 우리를 위한 ─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이 ‘우리’(저희)라는 말은 또한 그분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핍을 느끼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이루는 연대에서, 그들 모두를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 2830 “저희의 양식.”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 삶에 필요한 양식과, 물질적이고 영적인 ‘합당한’ 모든 재화를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우리 아버지의 섭리에 협력하는 이 자녀다운 신뢰를 강조하셨다.(97)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98) 오히려 온갖 불안과 걱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녀답게 의탁하는 일이다.
-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곁들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과연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자신이 하느님을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99)
- 2831 그러나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 청원의 또 다른 깊은 의미를 일깨워 준다. 세상에 굶주림의 비극이 있다는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인 처신에서나 인류 가족인 그들과의 연대에서나, 자기 형제들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다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이 청원은 거지 라자로의(100) 비유나 최후의 심판의(101) 비유와 뗄 수 없다.
- 2832 반죽 속의 누룩과 같이, 하늘 나라의 새로움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이 세상을 ‘부풀어 오르게’ 해야 한다.(102) 이는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국제적 관계 안에서 정의를 확립함으로써 드러나야 하며, 올바르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없이는 올바른 사회 구조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 2833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빵은 ‘여럿’을 위한 ‘하나’인 빵이다. 참행복에 언급된 가난은 나눔의 덕이다. 이 자발적 가난은 강요가 아니라 사랑으로 물질적 정신적 재물을 공유하고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줄 것을 요구한다.(103)
- 2834 “기도하고 일하여라.”(“Ora et labora.”)(104)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그대들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일하여라.”(105) 우리가 일을 하였어도, 양식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아버지께 양식을 청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드리는 식사 전 기도의 의미이다.
- 2835 이 청원과 이 청원이 부과하는 책임은, 사람들이 겪는 또 다른 굶주림에도 해당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106) 곧,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숨결(성령)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노력을 다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땅 위에서는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그렇기 때문에 이 네 번째 청원의 특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생명의 빵, 곧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찬으로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된다.(107)
- 2836 “오늘”이라는 말은 신뢰심을 표현한다. 교만한 우리는 이 말을 생각해 낼 수 없었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신다.(108) 특히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 아들의 몸에 관계된 것인 만큼, 이 ‘오늘’은 우리의 현세적 오늘뿐 아니라 하느님의 ‘오늘’인 것이다.
- 그대가 매일 빵을 받으면, 그대에게는 매일이 오늘입니다. 만일 그대가 오늘 그리스도를 모신다면, 그분은 날마다 그대를 위해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오늘은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때입니다.(109)
- 2837 “일용할”(epiousios)이라는 낱말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서만 쓰인다. 시간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우리의 ‘온전한’ 신뢰를 굳게 하기 위해 ‘오늘’이라는 낱말을 교육적으로 반복한 것이다.(110) 질적인 의미에서는, 생명에 필요한 것을, 더 넓은 의미로는 살아가는 데 충분한 모든 재물을 가리킨다.(111)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이 낱말은(epi-ousios; “반드시 필요한”), 그것 없이는 우리 안에 생명이 있을 수 없는, “불사불멸의 약”(112) 인 생명의 빵, 그리스도의 몸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113) 끝으로, 이러한 의미들과 관련된 이 말의 천상적 의미는 명백하다. 곧, ‘이날’은 주님의 날, 성찬으로써 미리 참여하는 하늘 나라의 잔칫날이다. 성찬은 다가오는 하늘 나라를 앞당겨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전례는 마땅히 ‘날마다’ 거행되어야 한다.
- 성체는 우리의 일용(日用)할 양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양식의 고유한 효험은 일치를 이루게 하는 힘입니다. 성체는 우리를 주님의 몸에 결합시켜서, 우리를 우리가 받아 모시는 당신 몸, 그 몸의 지체가 되게 합니다.……그런데 여러분이 날마다 교회에서 듣는 독서도 일용할 양식이며, 여러분이 듣고 노래하는 찬미가도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지상 나그넷길에 필요한 것들입니다.(114)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자녀로서 하늘의 빵을 청하도록 촉구하신다.(115)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동정녀 안에 뿌려져, 육체 안에서 부풀어 오르고, 수난으로 반죽이 되고, 무덤의 화로에서 구워져, 교회 안에 저장되고 제대로 옮겨져서, 날마다 신자들에게 제공되는 천상 양식인, 빵이십니다.”(116)
- V.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2838 이 청원은 놀라운 것이다. 만일 이 청원이 둘째 부분 ─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으로만 되어 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이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의 처음 세 가지 청원 속에 묵시적으로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이 문장의 첫째 부분에 따라, 먼저 우리가 이 요구 사항을 충족하지 않는 한 우리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청원은 미래를 향하나, 우리의 응답이 그 청원에 앞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부분은 “하오니”라는 한마디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2839 우리는 대담한 신뢰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아버지께 간청하면서, 우리를 언제나 더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세례의 옷을 입었지만, 우리는 죄를 짓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청원으로써, 탕자가 그러했던 것처럼(117) 아버지께 돌아서고, 세리가 그러했던 것처럼(118)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비참함과 하느님의 자비심을 동시에 고백하면서 우리는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로 말미암아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기”(콜로 1,14)(119) 때문에, 우리의 희망은 굳건하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용서에 대한 유효하고 의심할 수 없는 표징을 그분의 교회가 집전하는 성사들 안에서 발견한다.(120)
- 2840 그런데,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한,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가 우리 마음속으로 스며들 수 없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갈라질 수 없듯이, 사랑도 갈라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121) 우리의 형제자매를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마음은 다시 닫히고 굳어져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이 스며들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리게 된다.
- 2841 이 청원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어서 주님께서는 예외적으로 이 청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시고, 산상 설교에서는 더 자세히 설명하신다.(122) 계약의 신비에 내포된 극히 중요한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 2842 여기에 나타나는 “하오니(하듯이: sicut)”라는 말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단 한 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만일 하느님을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라면, 주님의 계명은 지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참여, 우리 하느님의 거룩함과 자비와 사랑이 담긴 적극적인 참여를 의미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갈라 5,25) 성령께서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똑같은 마음을 갖게 해 주실 수 있다.(123) 그리하여 용서의 일치는 가능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 2843 이리하여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 곧 용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구체화된다.(124) 교회 공동체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125) 이런 말씀으로 끝맺는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매고 푸는 것이다. 당한 모욕을 더 이상 느끼지 않고 잊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께 자기 마음을 바치는 사람은 모욕을 동정으로 바꾸며, 상심(傷心)을 전구(轉求)로 변화시켜 기억을 정화한다.
- 2844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원수를 용서하기에 이른다.(126) 기도하는 제자는 변화되어 스승의 모습을 닮게 된다.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기도의 정점이다.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만 기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용서는 우리의 세상에서, 사랑이 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어제와 오늘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증언을 재현하고 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녀들과 그들의 아버지 사이의 화해를(127)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기본 조건이다.(128)
- 2845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이 용서는 한도 없고 끝도 없다.(129) ‘잘못’(루카 11,4에 따르면 ‘죄’, 또는 마태 6,12에 따르면 ‘빚’)에 관해서라면, 사실 우리는 언제나 빚진 자들이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로마 13,8). 거룩하신 삼위의 일치는 모든 관계의 진실성의 근원이며 기준이다.(130) 이 일치는 기도 안에서, 특히 성찬례 안에서 실현된다.(131)
- 하느님께서는 분열을 일삼는 사람들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제단에서 돌려보내시면서, 먼저 형제들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평화를 위한 기도로써 평안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제물은 우리들 사이의 평화와 화목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백성의 일치입니다.(132)
- VI.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2846 우리의 죄는 유혹에 동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이 청원은 앞서 말한 청원들의 뿌리에 닿아 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그리스 용어를 한마디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이 말은 “유혹에 빠지게 허락하지 마십시오.”,(133) “우리를 유혹에 쓰러지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라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야고 1,13). 오히려 그분께서는 우리를 악에서 구해 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죄로 이끄는 길을 택하도록 우리를 버려두지 마시기를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과 영 사이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청원은 분별력과 용기의 영을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 2847 성령께서는 우리가 “시련을 이겨 내는 힘”을(134) 다지기 위하여 인간의 내적 성장에 필요한 “시련”과,(135) 죄와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유혹”을(136) 분별하도록 하신다. 또한 우리는 유혹을 ‘당한다’는 것과 유혹에 ‘동의한다’는 것도 분별해야 한다. 끝으로, 분별력을 이용하면, 우리는 유혹의 거짓된 가면을 벗길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유혹의 대상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이지만”(창세 3,6), 실제로 그 열매는 죽음이다.
- 하느님께서는 선을 행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시며, 자유로운 인간을 원하십니다.……유혹이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우리 자신까지도 우리 영혼이 하느님에게서 무엇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혹은 우리 자신을 알도록 가르치려고 그것을 나타내 보여 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비참함을 발견하게 하고, 유혹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준 좋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137)
- 2848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는 마음의 결단도 포함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 6,21-24).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5). 우리가 성령께 이렇게 동의할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 10,13).
- 2849 이러한 싸움과 승리는 기도로만 가능하다. 처음부터,(138) 그리고 고뇌에 찬 마지막 싸움에 이르기까지,(139)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유혹자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신다.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이 청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싸움과 고뇌에 결합시키신다. 깨어 계시는 당신과 일치하여, 마음이 깨어 있도록 끊임없이 상기시키신다.(140) 깨어 있음은 ‘마음을 지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아버지께 청하신다.(141) 성령께서는, 우리가 이처럼 깨어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일깨우고자 하신다.(142) 이 청원은 지상에서 우리 싸움의 마지막 유혹과 관련되어 그 극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이 청원은 마지막까지 항구하게 하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다. “내가 도둑처럼 간다. 깨어 있는……사람은 행복하다”(묵시 16,15).
- VII. “악에서 구하소서”
- 2850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이 마지막 청원 역시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15). 이 간청은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관계되는 것이나, ‘우리’가 온 교회와 일치하여 언제나 모든 인류 가족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끊임없이 우리를 구원 경륜의 차원에 눈뜨게 한다. 죄와 죽음의 비극에 모두가 관련되어 있는 우리의 상호 관계가 변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의 연대성과 ‘모든 성인의 통공’으로 전환된다.(143)
- 2851 이 청원에서, 악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한 위격, 곧 사탄, 악마, 하느님께 대항하는 천사를 가리킨다. ‘악마’(dia-bolos)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가로막는’ 자이다.
- 2852 “처음부터 살인자로서,……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요한 8,44)인 그는,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 온 세계를 속이던 자”(묵시 12,9)인데, 그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의 결정적인 패배로 온 인류가 “죄와 죽음의 수렁에서 건져질”(144)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8-19).
- 여러분의 죄를 없애 주시고 잘못을 용서해 주신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싸우는 마귀의 계교에서 여러분을 보호하고 지켜 주시어, 언제나 악을 발생시키곤 하는 원수가 여러분을 불시에 공격하지 못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145)
- 2853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자유로이 당신을 죽음에 내맡기시던 그 ‘시간’에, “이 세상의 우두머리”(146) 에 대한 승리가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이며,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쫓겨나는” 것이다.(147) 그는 “여인을 쫓아가지만”(묵시 12,13), 그 여인을 잡지 못한다.(148) 곧, 성령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새 하와는 죄와 죽음의 부패에서 보호받는다(평생 동정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승천). 그러자 “용은 여인 때문에 분개하여,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과 싸우려고 떠나갔습니다”(묵시 12,17). 그렇기 때문에 성령과 교회는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17.20) 하고 기도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2854 우리는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또한 악의 세력이 주도하거나 선동하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악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이 마지막 청원에서 교회는 세상의 모든 괴로움에 대하여 아버지께 호소한다. 인류를 짓누르는 악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비는 교회는 평화의 귀중한 선물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꿋꿋한 인내의 은총을 간청한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교회는 신앙의 겸손 안에서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묵시 1,1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묵시 1,8)이신(149) 그분 안에, 그분을 머리로 하여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이루는 일치에 앞당겨 참여하는 것이다.
-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150)
- 마침 영광송
- 2855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하는 마침 영광송은, 주님의 기도에서 드리는 첫 세 가지 청원을 포괄적으로 다시 되풀이한다. 곧,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구원 의지가 힘차게 드러나기를 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재청원은 하늘 나라의 전례처럼, 흠숭과 감사의 형태를 취한다.(151) 이 세상의 권력자가 나라와 권능과 영광, 이 세 가지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주장했었는데,(152) 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이 세 가지를 돌려 드리신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의 신비가 결정적으로 완성되고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때, 아버지께 그 나라를 넘겨 드리실 것이다.(153)
- 2856 “그런 다음 기도가 끝나면, 그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는(154) 의미인 ‘아멘’이라고 말하여 동의를 표합니다.”(155)
- 간추림
- 2857 ‘주님의 기도’의 첫 세 가지 청원은 아버지의 영광이 그 목적이다. 곧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이다. 나머지 네 청원들은 우리의 소망을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 청원들은 우리의 생명 유지를 위한 양식을 얻고 죄를 치유받기 위한 것이며,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위한 우리의 싸움과 관계되는 것이다.
- 2858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함으로써, ─ 먼저 모세에게, 다음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알려 주신 ─ 당신 이름의 거룩함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뭇 민족과 각 사람에게서 나타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협력하게 된다.
- 2859 두 번째 청원을 통해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도래를 지향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삶의 ‘오늘’에서도 성장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 2860 세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지상 생활에서 이룰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당신 아들의 의지에 결합시켜 주시기를 아버지께 청한다.
- 2861 네 번째 청원에서 “저희에게 주소서.”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형제들과 일치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자녀다운 신뢰를 표명한다. “우리의 양식”은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이 세상의 양식을 가리키며, 또한 생명의 빵인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오늘’ 우리는, 성찬례가 미리 맛보게 해 주는 하늘 나라 잔치에 반드시 필요한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신다.
- 2862 다섯 번째 청원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우리 원수들을 용서해야만, 하느님의 자비는 비로소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 수 있다.
- 286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고 말하는 것은, 죄로 이끄는 길로 우리가 들어서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다. 이 청원은 분별력과 용기를 주시는 성령을 간청하며, 깨어 있을 수 있는 은총과 끝까지 항구하게 하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다.
- 2864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마지막 청원에서,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더불어,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계획에 직접 반대한 천사, 사탄, “이 세상의 권력자”를 쳐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드러내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한다.
- 2865 마침의 “아멘”으로, 우리는 일곱 가지 청원이 ‘이루어지기를’ 빈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