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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소예언서 읽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 7,15)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104 추천수0

[소예언서 읽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 7,15)

 

 

아모스를 소개하는 아모 1,1에서는 그가 ‘목양업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예언자가 되었을까요?

 

 

“유다 땅으로 달아나”(아모 7,12)

 

지난달에 읽은 세 번째 환시 다음에, 아모스가 베텔에서 아마츠야에게 쫓겨나는 장면이 전해집니다(아모 7,10-17 참조). 남부 유다 출신의 예언자가 북부 이스라엘의 성소인 베텔에 와서는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유배를 갈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으니,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반가울 수 없습니다. 자기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무엇 한다고 저렇게 불길한 소리를 내뱉고 다니는가? 사제 아마츠야가 예로보암 임금에게 한 말처럼, “이 나라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습니다”(아모 7,10).

 

그래서 아마츠야는 아모스를 쫓아내려 합니다. 여기서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말고, 너희 나라에나 가서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아모스는 자신이 예언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문젯거리가 됩니다. 아모스는 분명 예언자인데, 스스로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아모 7,14)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히브리어 문장에는 동사가 없어 시제를 결정할 수 없기에, 칠십인역부터 “나는 예언자가 아니었다”고 옮기기도 했습니다. 원래 예언자가 아닌 그를 하느님께서 어느 날 부르시어 예언자가 되게 하셨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대중 라틴 말 성경을 비롯한 다른 많은 번역본은 현재 시제로,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이 경우에 아모스는 예언을 직업으로 삼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는 예언자가 되려고 다른 예언자 밑에 들어가 제자가 된 적이 없었습니다. 본래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붙잡으셔서’(아모 7,15 참조)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도록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유다 땅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아모 7,12)고 했지요. 아모스의 대답은 이 말에 대한 반박으로, 그가 “밥을 벌어먹기” 위해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아모스는 목양업으로 생계를 충분히 꾸릴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 편을 선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질문에 대해서 아모스가 이미 답한 바 있습니다.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아모 3,8) 거역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모스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1코린 9,16)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하여 삯을 요구하지 않고 천막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더 이상 뼛속에 가두어 둘 수가 없다고 표현하지요(예레 20,9 참조). 아모스의 체험도 그러했습니다. 자기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화산처럼 솟아오르기 때문에 그는 낯선 땅에 가서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은 소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날에 나는”(아모 9,11)

 

그렇다면 아모스는 구원의 가능성을 말했을까요? 정말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샅샅이 찾으면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아모 5,4)는 말씀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모스서의 주조를 이루는 것은 북부 왕국 이스라엘의 몰락에 대한 예언입니다. 유배되기 전에 예언자들은 대개 심판을 선고했다고 했지요. 아모스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그날에 나는”으로 시작되는 아모 9,11-15입니다. 대개 이 부분은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봅니다. 아모스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무너진 다윗의 초막”, “벌어진 곳”, “허물어진 곳” 등의 표현은 이미 북부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넘어(기원전 722년) 예루살렘 함락을 전제하고 있어(기원전 587년), 아모스가 살던 기원전 8세기가 아닌 기원전 6세기 이후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모스서라는 책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이 마지막 부분이 후대의 첨가라고 해서 그 내용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의 한 권인 아모스서는 아모스가 직접 쓰거나 말한 부분뿐 아니라 최종 편집 상태, 곧 우리가 가진 그대로의 성경 본문입니다. 아모 9,11-15는 분명 그 성경 본문에 속합니다. 그것이 작은 부분 같지만, 여러 예언서에서 그와 비슷한 요소가 공통으로 첨가되어 책 전체를 변형시키고 있기에 중요합니다(호세 14,2-9; 요엘 4,18-21 등 참조).

 

심판을 예고한 유배 전 예언자들의 책에 이미 멸망을 겪고 난 후대의 편집자가 구원 선포를 덧붙입니다. 이로써 예언서들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두 부분을 함께 지니게 되고, 앞에서의 심판 선고는 단순한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것으로 변모됩니다. 기원전 8세기에 아모스가 선포한 심판이 후대의 편집자에게 구원을 위한 여정의 일부가 된 셈입니다.

 

첫 달에 심판 선고와 구원 선포에 대해 말씀드린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모스는 이 심판 후에 어떻게 구원이 다시 가능할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다음 그것을 알아본 어떤 사람이 이 마지막 단락을 아모스서에 덧붙인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면, 이 짧은 단락은 아모스서의 나머지 전체와 무게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선포가 여기에서는 철회됩니다.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구나”(아모 5,2)라고 하시는데, 지금은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아모 9,11)고 하십니다. 앞에서는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탐스럽게 가꾸어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아모 5,11)고 하시는데, 끝부분에 가서는 “그들은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곳에 살면서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고 과수원을 만들어 과일을 먹으리라”(아모 9,14)고 하십니다.

 

이러한 전환에는 동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아모 9,14)입니다.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리십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근거는 이스라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있습니다.

 

심판을 선고할 때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네 가지 죄”(아모 2,6)가 피할 수 없는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에서 잘잘못을 따진다면 이스라엘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는 바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잘못을 따지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 이스라엘은 멸망을 겪으면서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이, 용서를 베푸시고 이스라엘의 잘못을 품어 주시는 하느님 덕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그래서 멸망이 구원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실패를 겪고 난 이스라엘이 비로소 하느님의 충실함,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첫 번째 소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심판을 선고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에 있지만 구원을 선포하는 이유는 오직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자애에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주제는 다른 예언서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등을 썼고, 《약함의 힘》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4년 4월호(통권 457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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